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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 '릿지웨이' 리더쉽> 


릿지웨이는 1950년 크리스마스날 도쿄(Tokyo)에 도착하여 맥아더와 전황을 의논하였고 8군의 입지를 명확히 하였다.


맥아더는 그에게 일단 퇴각하여 서울을 보루로 삼아 버티는 것을 권유하였지만 릿지웨이는 보다 공격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타협하였다.


8군에 도착한 릿지웨이는 8군 장교들 중 11월과 12월의 퇴각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에 젖거나 수비적인 태도를 갖지 않은 이들을 조사하여 이들을 각 요직에 앉혔다.


그는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지휘관들을 독려하였고 그렇지 못한 장교들의 경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해임시켰다.

 

그는 한국에서의 첫번째 작전회의 도중 수비계획을 듣고나서 참모들에게 "공격 계획은 없는가" 질문하였고, 그런 계획은 없다고 답한 작전참모를 곧바로 해임해 버렸다.


릿지웨이는 부대 내에 그가 공세를 취하는 쪽에 더 관심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지난 6개월간 퇴각에 시달린 장교들을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장교들로 교체하였다.


릿지웨이는 모든 장교들에게 후방 작전텐트보다. 전방 최전선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것을 요구하였다. 릿지웨이가 요구한바 장교들의 솔선수범은 곧 전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 릿지웨이 장군

- 중공군의 침략으로 서울을 내어주고 퇴각한 UN군은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자동차 사고로 숨지는 악운을 만났다.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이 육군참모차장이던 매튜 릿지웨이 중장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공수사단장이었다. 노르만디 상륙전 때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던 맹장이다.

 

그는 유엔군의 후퇴를 수원 선에서 멈추게 하고 (팽덕회가 남하정지명령을 발하였건 말건) 

반격작전을 통해서, 장차의 휴전선까지 공산군을 밀어 올렸던 것이다.


한국 포기론을 잠재운 역사적인 쾌거였으며 '오늘의 한국이 이만큼 크게 되도록' 하는 길을 터 준 쾌거였다.

 

릿지웨이가 반격에 실패했더라면 수원 선에서 휴전이 되었던지 미국은 아마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것이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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