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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로 보는 한국의 역사18
-다뉴세문경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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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로 보는 한국의 역사 18(특집)

특히 박물관 인솔하시는 학교선생님들, 문화해설사 분들 꼭 읽고 해설해 주세요.

세계 최고 나노 기술의 역사시대 고조선 유물- 다뉴세문경 해부

글쓴이 배달동이 ((사) 대한사랑 기획이사,(사) 미사협 사무총장)
e-mail : lwy2101@hanmail.net

지금까지 다뉴세문경 관련 글을 여러 번 게시하였는데 아직도 다뉴세문경의 뜻을 모르는 사람과 용도를 전투용 갑옷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고 얼굴 보는 청동거울인줄로 아는 국민이 많다.
그리고 다뉴세문경 문양을 유심히 들여다 본 사람들이 아직도 없다.

한국사가 바로 잡혔다면 임진왜란(조일전쟁)시 침략자 일본 장수들이 한양을 쳐들어온 개선문역사로 남겨 둔 남대문과 동대문을 국보1호, 보물1호가 아닌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과 천부경이나 고조선의 다뉴세문경이 국보와 보물 1호로 등재되어 있을 것이다.

우선 다뉴세문경이란 정의부터가 학술적인 겉모양 정명이다.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혹은 정문경(精文鏡), 잔무늬거울이라고 부르고 있다. 쉽게 말하면 고리가 여러 개인 무늬가 세밀한 정교한 거울이라는 것이다. 즉 정신과 철학이 배제된 형태만을 가지고 붙인 이름이다. 다뉴세문경에 담긴 문양을 가지고 정신사적으로 정의한다면 “삼신경(三神鏡), 天地人鏡"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용도는 전투용도 아니고 얼굴 보는 용도가 아닌 천손으로서 하늘을 대신하는 제사장이며 통치자인 지역의 왕들이 가슴에 착용하고 하늘에 제천행사를 할 때 가슴에 걸었던 신성적 존재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이러한 다뉴세문경은 한반도와 홍산문화지역, 하얼빈 쪽에서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일본 열도에서는 큐슈를 거쳐 일본 중심부인 동경 근처에서도 다뉴세문경이 발굴되었다. 즉 일본 열도는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고인돌도 많이 발굴되고 특히 고조선의 청동기와 세형동검은 한국의 박물관에 전시된 양보다 월등하게 많이 발굴되어 일본 지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크기는 작게는 전주주변지역에서 출토된 아주 작은 7cm정도로부터 보편적인 21cm, 더 큰 28cm까지 출토된다. 대일 항쟁기 시기와 광복 후 남한에서 발굴되는 것은 21cm 이쪽 저쪽의 크기다. 국보 다뉴세문경은 21cm 크기이다. 각 다뉴세문경에 새겨진 문양은 여러 형태이다. 뉴(고리)는 2개∼3개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다뉴세문경을 자세히 보면 두 번은 놀란다. 그런데 다뉴세문경에 대해 정확히 해설해 놓은 자료가 없고 고조선을 신화로 배워 온 한국인들이 박물관에 가면 다뉴세문경 앞에서 유심히 관찰할 경우는 거의 0이다. 그냥 지나간다. 그 실체를 알면 가장 많이 머무는 시간이 될 것인데 모르니 한심할 지경이다.

이제 고조선의 문화기술과 철학을 엿 볼 수 있는 다뉴세문경을 들여다 보자.
앞의 사진은 국보로 지정된 숭실대의 다뉴세문경으로 원래 조각난 것으로 붙인 것이다.


두 번째는 리움미술관에 전시된 다뉴세문경이다.


국보 다뉴세문경은 동서남북 8개의 동심원(하늘 원, ○) 그룹과 땅 (방, □), 인간(각,△),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형태 /(빛, 광명)을 새겨 넣었다. 21cm 크기에 13,300개의 선을 그려 넣었다. 2500∼3000년 전에 21cm 점토판에 13,300개의 선을 0.01mm 오차 없이 그려 넣었다는 자체가 불가사의다. 그것을 거품집을 이용해 청동주물로 찍어 낸 것이다.


최근 용인의 이완규 주성장이 활석을 이용한 다뉴세문경을 재현해 내었다. 활석에다 다뉴세문경 선을 새기는 데도 돋보기를 놓고 장시간을 그려 넣어야 할 정도의 정교한 무늬다. 한 순간 방심하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인 것이다. 그러한 다뉴세문경을 고조선시기인 2500∼3000년 전 만들어 내어 고조선의 소국들 왕들이 사용하였다.

▶참고 영상 https://youtu.be/nHxwSxyHuAU

문화와 인물 3회 다뉴세문경 재현, 이완규 주성장님이완규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 47호 주성장 장인아트 대표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국미총리상 수상www.youtube.com

리움 미술관의 다뉴세문경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 /를 활용하여 하늘, 땅, 인간의 광명을 새겼다. 9천년 전부터 내려오던 천부경의 天一, 地一, 太一을 문양의 형태로 드러내었다.


이를 본 진대 단군조선시대는 나라부터 삼한으로 분리하여 다스렸고 제천문화의 청동거울에도 그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을 보면 천부경 문화가 뿌리 내린 역사시대라고 평가 할 수 있다.
하늘의 광명을 ‘환’, 땅의 광명을 “단”, 역사 속에 그 빛을 드러낸 나라와 인간이 “한” 이었다. 그러한 나라나 통치자를 “한, 칸”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을 하나의 큰 원에 새겼다. 그것이 다뉴세문경이며 그 오래전 대한의 뿌리 단군조선의 건국자께서 다뉴세문경에 담고자 했던 조선 문화정신의 핵심이 이것이었다.

중국대륙이 9년의 홍수로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질 시기에 순임금이 초대단군천자께 SOS를 보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다.

후에 하나라의 창건자가 되는 치수관인 ‘우’가 단군조선의 부루태자를 만나 환국, 배달, 고조선 문화의 진수인 ‘홍범구주’와 치수법을 전수 받은 것은 동방동이 천자문화가 중원대륙으로 전파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지금으로 본다면 단군조선류(한류)의 바람이 중국대륙을 완전히 석권한 것이다. 고조선의 문화 풍속, 상투 트는 것, 의복, 음악, 군사 등등 모든 것이 단군조선이 기준이 되었다. 어느 정도 문화의 수입이 이루어진 후 단군조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험한’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주나라 때부터였다. 물론 주나라의 건국자 문왕와 무왕의 뿌리 고공단보와 그 위 조상들은 다 동이족이었다.

청동거울의 문화도 단군조선이 다뉴세문경을 제작할 당시에도 중원은 청동기 제작술이 뛰어나지 않았기에 후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중국 청동경, 거울은 제천용이 아니라 얼굴보는 용이다.

최근 중국이 양쯔강 근처 사천성 삼성퇴문화를 중화문명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황하문명에서 청동기연대와 기술력 딸리는 시간부분을 삼성퇴로 커버하려 하였다.

사천성의 삼성퇴문화는 중국의 중원문명보다 더 고도의 청동기문화다. 이 지역은 중국역사에서 오랑캐문화로 치부하여 중국문화로 인정하지 않던 지역이었다. 동이족문화권인 요하홍산문화지역을 오랑캐라 치부하다가 동북공정을 하면서 중화문화기원으로 바꾼 것처럼
지금은 삼성퇴문화도 중화문화로 기술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실체를 알고자 한다면 북삼한(三韓, 신지비사)을 공부해야 하며 그 문화적 진수를 보고자 한다면 다뉴세문경 속에서 고조선의 건국이념과 사상을 심도 있게 논해보라.

이제 박물관가시면 다뉴세문경 앞에서 가장 많이 머무시고 자녀들이나 학생들에게 진짜 역사 스토리를 전하시길...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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