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코리아 2017 김난도 교수 키워드 발표회 https://youtu.be/KOHUWFMb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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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8 트렌드코리아 2017 김난도 교수 키워드 발표회
- 2017.01.08 도라이브 리포트 : 모바일 트렌드 2017 저자 - 정근호 박사, 박종일 대표
- 2017.01.08 살아서는 영웅, 죽어서는 신화가 된 존 F 케네디
- 2017.01.08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자 실천적 지성인 율곡 이이
- 2017.01.08 양생학 | 무병장수의 꿈
- 2017.01.08 한국의 성씨 | 피皮씨
- 2017.01.08 천산天山과 고려인의 한을 품은 나라 카자흐스탄
- 2017.01.08 연이은 테러, 유럽에 안전한 곳이 없다
- 2017.01.08 평생 단 한 권의 기록, YOLOBOOK(아이폰 광고 패러디)
- 2017.01.08 1인미디어 A to Z (이예나 캠퍼스리포터)
도라이브 리포트 : 모바일 트렌드 2017 저자 - 정근호 박사, 박종일 대표 https://youtu.be/a4RtrthbOA8
살아서는 영웅, 죽어서는 신화가 된 존 F 케네디
정치·사회에 대한 존 F 케네디의 명언
*정치는 비전vision을 제시해야 한다.
*인류가 전쟁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전멸시킬 것이다.
*국민이 내일에의 신념을 갖지 않으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국가는 시민의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최종적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노력, 계속적인 희생, 그리고 의지에의 소명이요 필요하면 그 방어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이다.
*진보로 통하는 가장 훌륭한 길은 자유의 길이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며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된 일이다.
*모든 어린이가 평등한 재능, 평등한 능력, 평등한 동기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의 재능, 능력 및 동기를 발전시킬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만일 사회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다면 부유한 소수의 사람도 구해 줄 수 없다.
*부는 수단이요 사람들은 목적이다. 우리가 국민에게 폭넓은 기회를 부여하는데 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불을 대하듯 윗사람을 대하라. 타지 않을 정도로 다가가고 얼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라.
인간·교육에 대한 명언
*편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해서는 안 된다. 강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대들이 일생의 일로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든 제일인자가 되라. 설혹 하수도 인부가 되는 한이 있어도 세계 제일의 하수도 인부가 되라.
*당신이 자신은 2위로 만족한다고 일단 말하면 당신의 인생은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어떠한 고난과 장애와 위험, 그리고 압력이 따르더라도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간 도덕의 기본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포착하지 못할 뿐이다.
*교육의 목표는 지식의 증진과 진리의 씨뿌리기이다.
*행동에는 위험과 대가가 따른다. 그러나 이때의 위험과 대가는 안락한 나태함으로 생길 수 있는 장기적 위험보다는 훨씬 정도가 약하다.
*가장 완성된 사람이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좋건 나쁘건 가리는 일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다고 해서, 희망을 추구하는 것을 억제해서는 안 된다.
* 예술은 광고의 양식이 아니라, 진리의 양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프로필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미국 제35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으로서,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주州 브루클라인Brookline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46년 매사추세츠 주 제11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투신하였으며, 같은 구에서 1952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상원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미국 국민의 헌신적인 협력을 호소하여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선거를 통하여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기도 하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으로서 소련과 부분적인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였고 중남미 여러 나라와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유세지인 텍사스 주 댈러스 시에서 자동차 퍼레이드 중 암살자의 흉탄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1961년부터 1963년 암살당하기까지 겨우 2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생몰 1917년 5월 29일~1963년 11월 22일
직업 전직 대통령, 정치인
학력 하버드 대학교
경력 1961 ~ 1963 제35대 미국 대통령
1953 ~ 1960 미국 매사추세츠 주 제11지구 상원의원
1947.1 ~ 1953.1 미국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원
수상 1957 퓰리처상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자 실천적 지성인 율곡 이이
율곡 이이의 명언
학문이란
학문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롭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부간에는 분별이 있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고,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 간에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친구에 대한 자세
친구는 반드시 배우는 일과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 행실이 바르고 엄숙한 사람, 곧고 진실한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내 마음을 비워 그 사람의 규범과 경계를 받아들여 나의 단점을 다스려야 한다.
게으르고 장난을 좋아하며 말이나 꾸미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
독서하는 자세
책을 읽을 때는 단정히 앉아서 마음을 모으고 뜻을 극진히 하여 골똘히 생각하고 깊이 연구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글 속에 담긴 뜻을 깊이 이해하고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일 입으로만 읽고 마음으로 본받지 않거나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몸과 마음의 자세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데는 아홉 가지의 몸가짐(九容)이 필요하다.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단정하게, 입은 다물고, 목소리는 조용하게, 머리는 바르게, 기운을 엄숙하게, 서 있는 것은 반듯하게, 얼굴빛은 씩씩하게 가져야 한다.
학문과 지혜의 자세
학문을 진전시키고 지혜를 높이려면 아홉 가지 생각(九思)이 필요하다.
볼 때는 똑바로 볼 것, 들을 때는 총명할 것, 얼굴빛은 온화할 것, 용모는 공손할 것, 말은 충성되게 할 것, 일할 때는 공경할 것, 의심날 땐 물을 것, 분할 때는 참을 것, 재물을 얻을 땐 옳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율곡 이이의 자경문(自警文):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는 글
1. 입지(立志): 목표를 크게 가진다.
2. 과언(寡言): 말을 적게 한다.
3. 정심(定心):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4. 근독(謹獨): 혼자 있을 때에도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
5. 독서(讀書): 옳고 그름을 알기 위하여 독서를 한다.
6. 소제욕심(掃除慾心): 재물과 명예에 관한 욕심을 경계한다.
7. 진성(盡誠): 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다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단호히 끊는다.
8. 정의지심(正義之心): 정의롭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진다.
9. 감화(感化): 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10. 수면(睡眠): 밤에 잘 때나 병이 든 때가 아니면 절대로 눕지 않는다.
11. 용공지효(用功之效): 공부를 게을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공부는 평생 꾸준히 하는 것이다.
프로필
이이李珥는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근세조선의 퇴계 이황李滉과 함께 유학의 쌍벽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다.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이다.
철학자, 정치가로 위대한 경륜을 지니고 있었으며, 학자로서 선유先儒의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유학의 독특한 광채를 발현하였다.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현실과 원리의 조화와 실공實功 및 실효實效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을 제시하였으며, 조선사회의 제도개혁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명으로 공자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시대 조선 전기
생몰 1536년(중종 31)~ 1584년(선조 17)
경력 호조좌랑, 예조좌랑, 이조좌랑, 이조판서
직업 학자, 문신
대표작 천도책天道策, 동호문답東湖問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만언봉사萬言封事, 기자실기箕子實記, 격몽요결擊蒙要訣, 성학집요聖學輯要
양생학 | 무병장수의 꿈
무병장수無病長壽는 모든 인류의 꿈과 소망이다. 인류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불로장생의 명약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했다. 과연 모든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무병장수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불원한 장래에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일까?
이번 호에는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무병장수의 꿈이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살펴보고, 무병장수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아가 무병장수를 이루는 진정한 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무병장수의 꿈, 현실로 성큼 다가오다
인간의 노화가 질병이면 질병은 치료할 수 있다.
현재 수명을 500세 혹은 1000세까지 늘릴 수 있다.
-오브리 드 그레이 박사
영국의 과학자이자 영생학자인 오브리 드 그레이Aubrey de Grey 박사는 『노화의 종말』이란 책에서 인간은 천 년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최근 알파고로 AI 분야에 선두주자가 된 구글은 영생 연구에 2조 원을 투자했다고 한다. 페이팔, 구글, 페이스북 등 실리콘벨리의 내로라하는 최고경영자(CEO)들 또한 노화방지 인체 재생 등 수명 연장 과학 시술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이는 재산 수천억 원을 거머쥐고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백만장자들이 중국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제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고 있는 셈이다. 과연 모든 인류의 꿈인 불로장생은 실현 가능한 것일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래학 전문가인 유엔미래포럼의 박영숙 대표는 미래사회의 메가트렌드로 의료혁명이 일어나 급진적 수명 연장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측하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2045년에는 평균수명이 130살을 넘기게 된다. 대부분의 질병이 퇴치되고 유전자 정보시스템의 구축은 질병 예방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발병하기 전에 예방하거나 초반에 치료가 가능해진다. 또한 이식을 위한 장기생산이 4년 뒤에 가능하게 된다. 10년 뒤엔 인간장기 78개를 3D프린터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인간의 뇌까지 2050년에는 슈퍼컴퓨터에서 내려받을 수 있어 육체는 죽지만 정신은 컴퓨터와 가상 현실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수도 있게 된다.” -박영숙 대표
현대과학이 밝혀낸 무병장수 7가지 비결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100년을 살 수 있을까? 유사 이래 수많은 장수 비법들이 있었지만 과학으로 입증된 장수 비결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적게 먹고,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지며, 배우자와 함께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 등 현대과학이 밝혀낸 장수의 비결 7가지를 소개한다.
①소식小食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확실한 장수 방법이다.
물고기, 파리, 쥐, 원숭이 등 수많은 동물 실험에서 수명 연장 효과가 입증됐다. 미 국립보건원(NIH)이 붉은털원숭이를 두 그룹으로 나눠 관찰한 결과, 식사량을 30% 줄인 그룹은 정상적인 식사를 한 그룹에 비해 사망률은 8%, 암 심장병 당뇨 신장병 등 노화 관련 질환 발병률은 18% 더 낮았다.
쥐 실험에선 식사량이 30% 줄면 수명이 최대 40% 늘어났다.
②저低 체온
2006년 11월 세계적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 동물실험에서 밝혀진 새로운 장수 방법이 공개됐다. 뇌, 심장 등 신체 내부 장기臟器의 온도인 ‘심부체온深部體溫’을 낮추면 수명이 늘어난다는 연구결과였다.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 브루노 콘티 박사팀이 유전자 조작으로 쥐의 체온을 0.3~0.5℃ 낮춘 결과, 수컷은 12%, 암컷은 20% 수명이 연장됐다는 것이다. 이를 인간의 나이로 환산하면 7~8년에 해당한다.
③적절한 자극
옥스포드 의대 리차드 돌 교수가 1897~1979년 82년간 영국에서 배출된 남성 방사선과 전문의 2,698명을 1997년까지 추적 조사한 결과, 일반인들에 비해 사망률이 28% 더 낮게 나왔다.
적은 양의 방사선과 같은 적절한 외부 자극은 인체 면역체계를 활성화시켜 장수에 도움이 된다. DNA 수리효소와 열 충격단백질(HSP) 등이 외부 자극 회복에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많이 분비되면서 기존에 입었던 작은 손상들까지 모두 치유하기 때문이다.
④성공과 학력
런던대(UCL) 공중보건과 마이클 마멋 교수가 1997~1999년 영국 20개 부처 공무원 5,599명을 조사한 결과,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그룹은 최하층에 비해 대사증후군(고혈압 뇌졸중 심장병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증상) 유병률이 2~4배 낮았다.
마멋 교수는 상급자들은 삶에 대한 지배력과 사회 참여의 기회가 더 많기 때문에 더 오래 산다고 설명했다. 고학력일수록 오래 산다는 연구도 있다.
런던정경대(LSE) 사회정책학과 마이클 머피 교수팀이 러시아인 10,440명을 조사한 결과, 대학 졸업자는 초등학교 졸업자보다 기대수명이 11년 더 길었다.
⑤긍정적 태도
미국 듀크대 의대 정신과 연구팀이 1960년대 중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입학한 6,958명을 대상으로 다면적 인성검사(MMPI)를 실시한 뒤 2006년까지 40여 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 가장 긍정적인 태도를 지닌 2,319명은 가장 부정적인 2,319명에 비해 평균수명이 42% 더 길었다.
2004년 예일대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서도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보다 7.5년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긍정적인 태도는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졸’ 수치를 낮춰 면역성 질환, 알츠하이머병, 심장병 등에 걸릴 확률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⑥배우자 &친밀한 관계
배우자, 자녀, 친구, 이웃 등과의 친밀한 관계는 수명을 연장한다.
울산대의대 예방의학 교실 강영호 교수팀이 1998년부터 6년간 30세 이상 성인 5,43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미혼자는 기혼자에 비해 사망률이 6배 높았다. 미국 시카고대학 노화센터 린다 웨이트 박사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심장병을 앓고 있는 기혼 남성은 건강한 심장을 가진 독신남성보다 4년 정도 더 오래 살았다. 호주 연구팀이 70세 이상 노인 1,477명을 10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 교우관계가 가장 좋은 492명은 하위 492명에 비해 22% 더 오래 살았다.
⑦주거 환경
하버드대 공중 보건대 연구팀이 보스턴의 부유한 지역과 가난한 지역 거주자들의 사망률을 조사한 결과, 부촌富村 거주자의 사망률이 39% 더 낮았다. 영국 글라스고의 가난한 지역 거주자들은 기대수명이 54세에 불과하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주변 환경이 나쁘면 노화의 징후도 빨리 온다. 워싱턴 의대 마리오 슈트먼 박사팀이 세인트루이스 지역에 거주하는 563명을 조사한 결과, 소음과 대기오염이 적은 지역 거주자들은 주거환경이 나쁜 지역 사람들보다 하반신 기능장애가 올 확률이 67.5% 낮았다.
세계 4대 장수촌, 그들만의 비결
장수에 있어서 먹는 음식이나 식단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분위기가 우선이라고 지적한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4대 장수 지역을 소개해 본다.
①이탈리아 사르디니아Sardinia 섬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서쪽 지중해에 위치한 유명한 휴양지 사르디니아Sardinia 섬은 인구 1만 명당 100세 이상 노인 수가 21명이다. 이에 반해 미국은 1만 명당 4명꼴이다. 세계적인 장수촌인 이곳은 특히 남성 100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100세인은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7배 많은데, 유독 여기선 남녀 똑같이 100세를 누리고 있다. 이들은 평생 해발 416m 산간 지역을 매일 오르내리며 하루 평균 12㎞씩 걷는다.
사르디니아에서는 파바콩을 즐겨 먹는다. 콩은 소고기보다 단백질 함유량이 많다. 더욱 중요한 점은 섬유질이 풍부해 유익한 장내 세균이 번성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르디니아인들은 건강한 식단만으로는 수명을 늘릴 수 없다고 말한다. 음식에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까지 결합돼야 비로소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②적게 먹는 일본의 오키나와(沖縄)
일본의 오키나와는 세계에서 첫손에 꼽히는 장수촌이다. 인구 10만 명당 100세 이상 노인이 28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심장병이나 암, 전립선 질환이 없는 것도 특이하다. 그들은 하루 18가지 음식을 먹는데 78%가 풀이며 심황, 여주, 쑥, 칡, 곤약, 해초, 재스민 차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소식이 장수의 비결이다. 그들은 ‘하라하치부(복팔분腹八分)’라는 전통을 지켜왔다. 표현하자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위)의 80% 정도 찼을 때 젓가락을 내려놓는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육식으로는 돼지고기를 푹 삶아 기름을 완전히 뺀 걸 먹으며 해초를 비롯한 채소류를 주로 먹는다.
또한 어릴 때부터 운동과 명상을 실천하고 낙천적 사고를 한다. 전문가들은 ‘논어’에 나오는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구부려 베개 삼아도 거기에도 즐거움은 있다’(반소식음수飯疏食飮水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는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오키나와의 장수 비결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④그리스의 이카리아Icaria(Ikaria)
에게 해에 있는 그리스령의 섬 이카리아Icaria는 지중해 식단의 대표적인 곳이다. 지중해 문명의 발상지인 크레타의 식사법이다. 채소와 과일을 즐겨 먹으며 요구르트와 생선을 즐긴다. 그러나 특이한 게 있다. 그들은 낮잠을 잔다. 84%의 노인이 매일 낮잠을 잔다.
⑤코스타리카의 니코야 페닌슐라(Peninsula of Nicoya)
코스타리카의 니코야 페닌술라 지역 주민들의 식단은 호박과 옥수수 등 주로 채소와 과일, 통곡물, 콩, 기타 탄수화물로 구성돼 있다. 고기도 먹긴 하지만 소량만으로 한 달에 5회 정도 먹는데 보통은 무슨 특별한 날이나 잔치 때다.
진정한 무병장수의 길
동양의학의 바이블로 일컬어지는 『황제내경』에서는 진정한 무병장수의 길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岐伯(기백)이 對曰上古之人(대왈상고지인)은 其知道者(기지도자)라
法於陰陽(법어음양)하야 和於術數(화어술수)하야 食飮有節(식음유절)하며
起居有常(기거유상)하야 不妄作勞(불망작로)하니, 故(고)로 能形(능형)이 與神俱(여신구)하야
而盡終其天年(이진종기천년)하야 度百歲乃去(도백세내거)니이다.
기백岐伯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상고시대의 사람은 그 도道를 아는 자라, 음양陰陽을 법칙 삼아 술수術數에 화합和合하여 먹고 마시는 것이 절도가 있으며 행동거지가 떳떳함이 있어 망령되이 수고로움을 짓지 않으니, 고故로 능히 형체形體가 정신精神과 더불어 어울려서 그 천수를 다 마쳐 백세를 지나서 돌아갑니다.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상고천진론편上古天眞論篇」)
한민족의 상고사와 인류의 창세문화, 원형문화를 밝혀주는 『환단고기』에서는 인류의 태고시절에 무병장수를 누린 황금시대가 있었고, 그 방법은 ‘수행修行을 통한 득도得道’에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昔(석)에 有桓國(유환국)하니 衆(중)이 富且庶焉(부차서언)이라 初(초)에 桓仁(환인)이 居于天山(거우천산)하사
得道長生(득도장생)하사 治身無病(치신무병)하시며 代天興化(대천흥화)하사 使人無兵(사인무병)하시니
人皆力作以勤(인개역작이근)하야 自無飢寒也(자무기한야)라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백성들은 풍요로웠고 인구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께서 천산에 머무시며 도를 깨쳐 장생하시니 몸을 잘 다스려 병이 없으셨다. 하늘(삼신상제님)을 대행하여 널리 교화를 베풀어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이 없게 하셨다. 모두 부지런히 힘써 생산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저절로 사라졌다. (『환단고기』, 「환국본기」)
先是(선시)에 桓仁(환인)이 生而自知(생이자지)하사
化育五物(화육오물)하시며 敷演五訓(부연오훈)하시며 主治五事(주치오사)하시니
五加(오가)와 衆(중)이 皆勤苦(개근고)어늘 使至善修行(사지선수행)하사
開心光明(개심광명)하시며 作事吉祥(작사길상)하시며 住世快樂(주세쾌락)하시니라.
환인께서는 태어나면서 스스로 깨달은 분이시다. 오물五物을 기르고, 오훈五訓을 널리 펴고, 오사五事를 주관하여 다스리셨다. 오가五加와 무리가 모두 부지런히 애쓰거늘, 수행을 통해 지극한 선에 이르게 하시고, 광명으로 지혜를 열게 하시고, 하는 일마다 상서롭게 하시며, 세상에서 유쾌하게 즐거이 살게 하셨다. (『환단고기』, 「환국본기」)
진정한 무병장수의 길은 건강의 기본 요건인 올바른 생활과 섭생, 운동을 넘어서 인간 생명의 완성과 깨달음의 공부인 수행을 통해 득도를 이룸(도통)에 있는 것이다.
이제 인류는 우주의 가을철 열매문화 시대를 맞고 있다.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상제님께서 내려주신 수행문화의 총 결론이자 열매인 태을주太乙呪 공부를 통해 몸 개벽과 마음 개벽을 이루어 득도를 성취함으로써 천지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 나아가 질병과 노화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후천의 무병장수 문화를 실현하는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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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 피皮씨
역사는 곧 나라의 혼이다. 나라에 역사가 있듯 각 가문에도 역사가 있으니 곧 성씨姓氏의 역사이다. 지난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姓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 ‘피皮씨’는 총 15본관에 인구는 총 6,303명이었다. 피씨의 본관은 홍천 피씨, 괴산 피씨, 단양 피씨가 대종大宗이다. 우리나라의 피씨는 한 뿌리에서 나왔으며 그 종가 격이 홍천 피씨이다.
홍천洪川 피씨
피씨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중국 천수天水(감숙성)에서 계출된 성씨로 기록되어 있으며 주나라 경사卿士인 번중피樊仲皮라는 사람이 공명功名이 있어 이름 마지막 글자인 피皮 자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조 피위종皮謂宗은 원래 송나라의 금오위상장金吾衛上將인데 고려조 정종 때 안렴사按廉使로 왔다가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郎을 지냈다. 그의 아들 피인선皮寅善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지자 그 뒤 후손들이 홍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피인선의 아들 피맹문皮孟文이 승지承旨를 지냈고, 손자 피원휴皮元休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고려 말에 순창현령으로 나간 피원량皮元亮은 재임기간 동안 왜구 방비에 공헌하여 유명하였다. 조선 헌종 때 학자로 유명한 피병추皮秉樞는 학문이 깊고 문장에 뛰어나 명망이 높았다.
홍천 피씨는 조선시대에 역과譯科(통역을 뽑는 과거)에 11명, 의과醫科(의관醫官을 뽑는 잡과)에 20명, 음양과陰陽科(천문, 지리, 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는 과거)에 12명 등 43명의 전문성이 뛰어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높였다.
홍천은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원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인데,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녹효현綠驍縣으로 고치고, 삭주도독부朔州都督府(춘천)의 영현領縣(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主縣)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는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홍천은 화산현花山縣, 서기 1413년(태종 13)에는 홍천현으로 조선시대 동안 계속 이어왔다. 1945년에 인제군 기린면의 일부와 인제면의 일부를 통합해 신남면으로 개편하고, 인제군 내면도 편입시켰다. 1954년 기린면과 남면 등은 인제군에 환원시켰고, 1963년 홍천면은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0년도에 홍천 피씨의 인구는 374가구에 1,143명이었다.
괴산槐山 피씨
시조 피득창皮得昌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이름을 떨쳤으며 괴산에서 정착하여 살았다. 후손들은 홍천 피씨에서 분적하고, 괴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또한 「진천군지鎭川郡誌」에 따르면 괴산 피씨는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안렴사로 왔다가 귀화한 피위종을 시조로 하여, 홍천洪川, 단산丹山, 충주忠州, 괴산槐山, 청안淸安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미보丁未譜’에는 시조가 피경연皮慶延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중국 원나라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피기광皮起光, 호는 청피靑陂이다. 원나라 순제 때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신경위대장神慶衛大將이 되어 남만南蠻을 정벌하였으나 전세戰勢가 불리, 전공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의 진노를 사게 되어 화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망명해 왔다고 ‘정미보’ 세록世祿에 씌어 있다. 공민왕은 그를 우대, 괴산군槐山君으로 봉하면서 그곳을 관향으로 삼아 그를 시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또 피경연의 5세손인 피득창을 시조로 삼기도 한다. 피경연과 피득창을 괴산 피씨의 시조로 여기는 경우는 피위종이 홍천군에 봉해져 홍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구분하며, 괴산 피씨는 홍천에서 분적한 것으로 본다.
괴산 피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피세만皮世萬을 들 수 있다. 그는 숙종 때 적상별장을 거쳐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영조 때 정희량의 난이 일어나자 병방군 류만원 등과 더불어 적을 토평,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병절교위 훈련원 첨정·부사과에 추증되고, 성산星山(성주)에 기공비紀功碑가 세워졌으며, 그 사적이 ‘충의효열록忠義孝烈錄’에 실려 있다. 그 밖에 인물로는 피득창의 아들 피강지皮康芝가 평안도어사平安道御史를 지냈으며 손자 피정과 증손 피소는 목사牧使를 역임하여 판서에 오른 후손 피홍군皮洪君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이외에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피경송이 괴산 피씨의 가통을 지켰고 방어사防禦使에 오른 피동현皮洞鉉은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 외 통정대부通政大夫 피종남皮宗南과 판관判官을 지낸 피세만皮世萬, 통사랑通仕郎에 오른 피세담皮世淡이 유명했으며, 효자로 유명한 피운손皮雲遜, 통덕랑에 오른 피경우皮景祐, 참봉을 지낸 피봉준皮鳳俊 등이 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괴산은 본래 고구려의 잉근내군仍斤內郡으로 신라 때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치고, 고려 때는 괴주槐州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충주에 속하고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3년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고쳤고, 1413년에는 괴산槐山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 1914년 괴산군, 연풍군, 청안군을 합쳐 괴산군으로 통폐합하였다. 주요 성씨로는 피皮, 방邦, 점占, 종宗, 최崔씨 등이 있었다. 괴산 피씨의 인구는 2000년 기준 693가구 2204명이었다.
단양丹陽 피씨
홍천 피씨 시조 피위종皮謂宗의 후손인 피인고皮寅古를 시조로 받든다. 피인고는 고려 조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단산군丹山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봉군지인 단양으로 분적하였다. 단양 피씨는 문평공파文平公派와 충경공파忠敬公派 두 파로 대별된다. 단양은 충북 단양군의 옛 행정구역으로, 삼국시대에 삼국이 각축을 벌였던 지역이다. 551년(진흥왕 12)에 백제, 신라의 공동작전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어 진흥왕이 순시할 때 세운 적성비가 남아 있다. 757년(경덕왕 16)에 내제군柰堤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이후 변천과정을 거쳐, 1413년(태종 13)에 군이 되었고, 1979년에 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의 피씨 인물
현대에 가장 크게 이름을 날린 인물로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을 꼽을 수 있다. 5월 25일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피천득은 서울대 명예교수, 수필가, 시인, 영문학자다. 수필하면 ‘인연’을 떠올릴 만큼 명작을 남겼다. 기업인으로는 프로골퍼 선수 최경주를 후원한 피홍배(80)회장이 유명하다. 피홍배 회장은 현재 주식회사 삼정 외 몇 개 회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는 중견 기업인이다. 경북 성주가 고향인 피회장은 현재 괴산, 단양, 홍천, 경주 등 전국 피씨 총대종회장을 20여 년 맡았다.
피씨의 주요 세거지는 대구 매천동, 경북 상주시 외답·엄암 마을,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 충북 진천군, 경북 경주시 등이다. 특히 2000년 통계에서 충북 진천군에 거주하는 괴산 피씨는 총 21가구 53명이었다. 현재도 진천읍 금암리 금성에 일부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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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天山과 고려인의 한을 품은 나라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국이다. 구 소련의 공화국 중 하나였다가 1991년 독립하였으며 원유, 가스, 텅스텐, 우라늄, 크롬 등의 매장량이 풍부한 ‘자원의 보고’로 불리는 국가다. 또한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 스텝,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작지가 일본의 전체 면적과 맞먹을 정도로 커서 호주와 함께 세계적 수준의 식량 수출국으로서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다. 카자흐스탄은 130개에 가까운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만에 달하는 한인도 8번째로 큰 소수민족 집단을 이루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지정학적 위치상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카자흐 민족 특유의 외부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관용성이 더하여져 동서를 잇는 새로운 실크로드로 등장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중심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의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을 찾아가 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카자흐스탄의 정식 국가명칭은 카자흐스탄공화국(Republic of Kazakhstan)이다. 카자흐스탄은 영토의 대부분이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며 국토 면적은 2,724,900㎢에 달한다. 세계에서 아홉째로 큰 나라이자 가장 큰 내륙국이다. 서유럽 면적과 비슷한 크기로 아르헨티나(2,766,890㎢)보다 약간 작은 면적이며 한반도의 12배, 남한의 26배에 달하는 크기이다.
카자흐스탄은 북·서쪽으로 러시아와 6,846㎞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동쪽으로는 중국, 남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카스피해에 면하는 우랄산맥 서쪽 땅은 동유럽이다.
카자흐스탄은 광대한 평원의 나라이다. 지형의 반은 해발 500∼600m의 사화산지대이다. 북부지역은 대부분 초원지역으로 수목이 자라지 못하는 곳이다. 현재는 일부 농업이 가능한 지역을 중심으로 밀과 같은 곡물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북부지역 이남부터 남부에 이르는 영토는 사막 또는 흙사막 지역으로서 경작이 불가능하다. 동남부와 동북부지역 대부분은 산악지대이다. 이들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는 초원지역이다. 키르기스스탄과 중국이 맞닿아 있는 남동부에는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저지대가 전체면적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며 구릉이 많은 평원과 고원이 절반에 가깝고 나머지는 산지이다.
면적이 804,500㎢에 달하는 카자흐초원은 카자흐스탄 전체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초원지대이다. 천산산맥의 북단이 위치해 있는 카자흐스탄 동남부지역은 해발 7,010m의 한텡그리(Khan Tengri) 산을 최고봉으로 해발 4,500m 이상의 산들이 마천루를 이루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카자흐스탄 동부지역은 알타이산맥 남단에 위치한다. 이 산맥은 해발 2,000~3,000m에 이르는 산악지대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은 카라쿰 사막의 아랄 지역을 포함해 서쪽과 남서쪽으로 카스피해가 접하는 광대한 고원이다. 아랄해 서쪽으로부터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우스티우르트Ustyurt 고원사막이 펼쳐져 있다. 아랄해 동남쪽에 위치한 키질쿰Kyzylkum 사막은 우즈베키스탄과 공유하고 있다. 아랄 해와 발카쉬Balkash 호수 사이에는 베탁크달라Bethakdala 흙사막이 위치한다.
카자흐스탄의 주요 강과 호수는 카스피해, 아랄 해를 비롯하여 발카쉬 호수, 우랄 강, 시르다리야 강 등이 있다. 동부에 있는 이르티슈 강과 여러 주요 강들이 북서쪽으로 흘러 멀리 시베리아에 도달한다. 서부의 우랄 강은 카스피해로, 남부의 시르다리야 강은 아랄 해로 가까스로 흘러든다. 일리Ili 강이 흘러 들어가는 발카쉬 호수는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다. 호수 동쪽 부분은 염수이고 서쪽 부분은 담수이다.
카자흐스탄의 기후는 계절변화가 뚜렷한 대륙성기후다.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영토가 방대할 뿐 아니라 구릉지가 많기 때문이다. 각 지역마다 계절의 기후는 약간씩 차이가 난다. 먼저 겨울의 기후를 살펴보면, 북부에서는 길고 추우며(1월 평균기온 -18°C) 중부에서는 추운 편이나 남부에서는 온난한 편(1월 평균기온 -3°C)이다. 여름은 전체적으로 길고 건조한데 북부에서는 따뜻하고(7월 평균기온 20°~24°C) 중부는 더우며 남부는 무더운 날씨(7월 평균기온 28°~30°C)이다.
카자흐스탄은 전반적으로 강우량이 적다. 연평균 강수량이 북부가 약 250㎜이고 남부 산악지대는 450㎜이다. 사막은 비가 훨씬 적게 내린다. 바람도 많다. 카자흐스탄 전 지역에서 강풍이 발생하는데 겨울에는 남서풍이 북부지역을, 북동풍이 남부지역을 강타한다. 여름에는 북풍이 카자흐스탄 전 지역을 영향권으로 강하게 몰아친다. 특히 평원과 골짜기 지역에 대륙성 기후의 특징이 심하게 나타난다.
카자흐스탄의 역사
천산이 있는 나라
카자흐스탄의 현재 지형과 기후가 나타난 시기는 약 1백만 년 전인 선신세鮮新世(신세계 3기)로 천산天山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카자흐스탄의 영토에 인류가 최초로 나타난 시기도 바로 이때로 우리나라보다 약 30만 년이 빠르다. 이처럼 까자흐스딴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인류의 역사는 바로 천산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도 이곳 천산에서 발견되었는데, 구석기 시대 족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보리까즈간과 따니르까즈간도 바로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권영훈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교수가 쓴 『고려인이 사는 나라 까자흐스딴』에 묘사된 내용이다. 한국 상고사와 관련하여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인류의 역사가 바로 천산天山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문장이다. 이어지는 문장도 눈길을 끈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도 이곳 천산에서 발견되었다. 이 대목은 주한 카자흐스탄대사관에서 제공하는 자료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대사관 자료에서는 카자흐스탄 내에서 발굴되는 유물들로 미루어 BCE 1500~1000년경 현재의 카자흐스탄에 청동기 초기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고 하였다. 권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국내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의 태고 역사와 함께 한국 상고사를 기록하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가 그것이다.
파내류산波奈留山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桓因氏之國)가 있으니 천해天海의 동쪽 땅을 또한 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으로 5만 리요, 동서로 2만여 리이니 통틀어 환국桓國이라 했다.
옛날에 환인桓因이 계셨다. 천산에 내려와 거처하시며, 천신께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셨다. 백성의 목숨을 안정되게 보살피고, 세상의 뭇 일을 겸하여 다스리셨다.
앞의 인용문은 『환단고기』에 들어있는 「삼성기전 하」에서 ‘고기古記’를 인용한 기록이다. 뒤의 인용문은 같은 책 「태백일사」에서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한 기록이다. 여기에 나오는 파내류산波奈留山이 바로 천산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삼성기전 상」에서는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 되었다(吾桓建國最古)”라고 한 것도 주목된다. 여기서 환족은 우리 조상을 가리킨다. 천산에 우리의 조상이 건설한 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인류 최초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환단고기』는 진·위서 논쟁에 휘말려 있지만, 여기서 그런 내용을 검토할 여유는 없다. 분명한 것은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권 교수의 주장과 『환단고기』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유학을 하면서 9년 동안 현지의 신화, 고대사, 역사, 문화자료 등을 수집하며 한국과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김정민의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도 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이 책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에는 고대 한국에 있었던 국가의 명칭이 부족 명칭으로 계속 전해져 왔다고 한다. 카자흐스탄과 한국은 고대로부터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남단에 위치한 천산은 우리 민족의 시원처始原處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카자흐스탄은 우리 민족과 참으로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고대 역사
카자흐스탄의 고대 민족들은 유목생활을 해왔다. 권영훈 교수에 따르면 천산, 카스피해 연안 등과 같이 기후가 좋은 일부 지역에서 어로와 농경 생활을 하였다. 혹자는 이와 같은 내용을 부정한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알마티의 중앙박물관에 가 보기를 권한다. 이 박물관에는 위 내용의 증거가 되는 밭갈이 쟁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농경은 BCE 8~9세기에 소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BCE 7~8세기,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는 청동기 시대인 BCE 4세기 말경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내용은 주한 카자흐스탄 대사관의 자료와 차이가 있지만, 카자흐스탄 지역에 청동기 초기 문화가 있었다는 주장은 동일하다.
BCE 6세기경에 이르면 현재의 남부 카자흐스탄에 사카Saka 부족이 일어났다. 이들 부족은 알타이산과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방대한 초원지역에 거주했다. 이들이 바로 스키타이Scythai 문화의 일부를 이룬 부족이다. 사카 부족은 카자흐스탄 최고의 고고학적 발굴로 일컬어지고 있는 ‘The Golden Man’(금 갑옷을 입은 전사 모형으로 알마티 인근에서 발굴)을 남긴 부족이다. Golden Man은 현재 카자흐스탄의 국가 상징이다.
BCE 200년경에 중국 북부로부터 훈족(Huns)이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들 훈족은 현재의 동부 카자흐스탄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훈족이 서유럽으로의 진출을 서두르면서 550~750년에 걸쳐 몽고와 중국 북부로부터 투르크(Turkic)족이 현재의 카자흐스탄 남부로 이주했다. 투르크족은 만주로부터 카자흐스탄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콕 투르크Kok Turk제국을 세웠다.
카자흐 민족국가 형성(13세기~18세기)
1218~1221년에 칭기스칸이 이끄는 몽고 대군이 침략하였다. 몽고군은 카자흐스탄 동서부를 시작으로 현재의 카자흐스탄 전역을 석권하였다. 몽고 침략과 함께 카자흐 민족의 통합은 더욱 지체되었다. 몽고 침략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고 일부는 카자흐스탄 지역을 떠나버렸다. 몽고 지배하의 카자흐 영토는 대올다Golden Horde, 백올다White Horde 및 몽굴리스탄Mogulistan으로 분리 통치되었다.
15세기 초, 카자흐 카나테Kazakh Khanate(카자흐 한국汗國)가 백올다White Horde에서 분리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카자흐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카자흐 카나테는 다시 대올다(Great Horde : 발하쉬 호수 남부지역), 중올다(Middle Horde : 카자흐 중부), 소올다(Little Horde : 카자흐 서부)로 분열되었다. 이들 각 지역은 호족들이 통치하였다. 3개 올다는 현재 카자흐스탄 호족 출신 배경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지방 호족들은 300여 년에 걸쳐 3개 올다에 병합되었다. 이후 카자흐는 봉건영주와 농노로 구성된 봉건국가로 18세기까지 존속되었다. 하지만 그냥 존속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규준은 이 지역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봉건 영주들은 호시탐탐 이웃을 노렸고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러시아로의 합병(18세기~19세기)
3개의 올다는 봉건제후들 간의 전쟁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7세기 중엽 중가리(Dzungarian) 한국이 카자흐스탄 지역을 침공하였다. 이로써 소위 ‘대재난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당시 한汗이 상주하고 있던 투르게스탄을 제외한 카자흐스탄의 모든 도시들이 유린당했다. 이들의 침략은 18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지역에는 대기근(1723∼1727)이 몰아쳤다. 맣은 카자흐 인들은 고향과 조국을 등지고 떠나갔다. 1731년 카자흐는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남시베리아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단순히 보호차원에서 멈추지 않았으며 러시아로의 합병과정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초, 카자흐스탄 북부와 중부에 러시아식 8개 행정구역이 나타났다. 제국주의 러시아의 식민화 정책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곳곳에서 반러시아 폭동이 일어났고, 러시아의 식민화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러시아는 중·소올다에 대한 직할통치를 시작으로 1860년대에 대올다까지 집어삼켰다.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전역을 합병한 것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및 내전 과정 동안, 제국주의의 불똥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식민지 카자흐스탄에도 옮겨붙었다. 카자흐스탄 내에서 소비에트 정권이 신속하게 수립되었다. 1920년에는 카자흐스탄이 키르기스 자치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됨으로써 소비에트 정권 수립이 마무리되었다. 식민통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은 1924~1925년 사이에 중앙아공화국에 민족구성을 기반으로 새롭게 구성된 공화국 구성 개혁안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5년 4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36년 12월 카자흐스탄은 소련 구성 공화국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1950년대 말 후르쉬쵸프 공산당 서기장 당시에 추진된 Virgin Land(처녀지 개간) 정책으로 카자흐스탄 북부에 약 80만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이 이주해 왔다. 침략적이고 본격적인 식민화가 시작된 것이다. 1960년대 초에는 전체 930만 카자흐스탄 인구 중 러시아인이 43%, 카자흐인이 29%라는 기형적인 민족구성이 초래되었다.
당시 세계의 3분의 2를 직접 통치하거나 식민 통치하고 있었던 제국주의 정책은 간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카자흐 민족을 통치하고 있었던 소련공산당도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샤야흐메토프Zhumabay Shayakhmetov, 쿠나예프Dinmukhamed Konayev 등 카자흐인을 카자흐스탄 공산당 서기장으로 임명하는 등 카자흐 민족에 대해 배려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소련 공산당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은 언제나 ‘모스크바’에서 행사하였다.
카자흐스탄 독립과 그 이후
1986년 쿠나예프가 러시아인 콜빈Gennady Kolbin으로 교체되자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소련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챙길 수 있는 모든 이익은 모스크바로 가져갔다. 소련은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를 핵실험장으로 이용했고 바이코누르Baykonur에는 우주선 발사 기지를 건설함으로써 심각한 환경 문제가 야기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소련 연방의 해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989년에는 소련 최초의 대규모 시민운동인 세미팔라틴스크 운동Semipalatinsk Movement이 결성되었다. 시민운동의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고 결국 소련은 1989년부터 세미팔라틴스크에서 핵실험을 중지했다. 바로 그해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가 카자흐스탄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4월 나자르바예프는 카자흐스탄 최고인민회의에서 카자흐스탄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20세기를 냉전체제로 이끌었던 소련은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0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소련의 붕괴 과정에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고르바쵸프 소련 대통령 등과 함께 소련 체제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1991년 12월 벨로베쥐스크Belovezhsk 협정이 체결되면서 소련 체제의 와해가 기정사실화되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카자흐스탄은 소련 구성공화국 중 가장 늦게 독립을 선언하였다. 6일 뒤, 카자흐스탄은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했다. 나자르바예프는 2005년 대선에서 91%의 지지로 재선되었고, 2007년 5월에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헌안에서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 규정을 철폐하였다. 나자르바예프 현 대통령의 종신통치를 법적으로 허용한 것이다.
정치 및 행정
정치 개황
카자흐스탄 최초 헌법은 1993년 1월에 채택됐다. 이 헌법은 구소련 헌법에 서방 민주주의 모델을 접목시킴으로서 ‘기형헌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5년 8월 30일 대통령 권한 강화, 상하 양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1998년 10월 대통령 선거일 변경을 골자로 하는 개정, 2007년 5월 대통령 임기 단축, 의회 권한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개정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카자흐스탄 헌법은 대통령, 의회, 행정부, 헌법재판소 및 지방 행정기관의 권한과 기능 등을 언급한 총 9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주권재민, 국민의 기본권 보장, 삼권분립, 대의 민주주의 및 대통령 중심제 등을 언급하고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을 보장하고 있다.
대통령
카자흐스탄은 2007년 5월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종전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고,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삼선 금지) 규정을 철폐했다. 2016년 현재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5선 연임에 성공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국내외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보유하며 특정 상황하에서 의회를 대신하여 입법권을 행사하고 법률의 효력을 발휘하는 대통령령 발령권을 갖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행정부
행정부는 대통령에 의해 구성되며 총리는 임명 10일 내에 행정부 구성과 조직을 대통령에게 제청하여야 하며 행정부는 대통령과 상하원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 행정부 각료는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이 새로 선출되면 사임한다. 내각은 의회에 법령제안권, 의회결정에 대한 시행규칙 결정권, 의회승인 예산에 대한 배분권, 외국과의 조약 체결권, 기타 정부활동 및 산하 행정기관 감독권 등을 보유하고 있다.
지방행정
카자흐스탄의 지방행정 조직은 2개의 특별시 14개의 주(Oblast’)로 구성된다. 특별시장 및 주지사(Akim)는 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시의회 및 주의회(Maslikhat) 의원은 주민들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지방정부는 경제 사회정책 입안, 시행규칙 결정 및 시의회 또는 주의회가 지정한 예산에 대한 배분 및 시행, 공공재산에 대한 관리권 및 기능을 수행한다. 지방자치 권한 강화를 위해 2013년 8월에 2,454명의 군 단위 이하 지방정부장들을 지방의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였으며, 이 중 고려인 4명이 지방자치단체 최하위 단위 ‘오크르크‘ 대표로 당선되었다.
지방정부는 독립적 행정권이 헌법에 보장되어 있으나 중앙정부는 정부령을 통해 지방정부에 대한 지침부여 및 감독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또 주민은 지방정부 결정사항에 대해 국가행정법원에 제소가 가능하다.
입법부
의회는 상원(Senate)과 하원(Majilis)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원의 의석은 47석이고 임기는 6년이며, 하원 의석은 107석이고 임기는 5년이다. 상원의원은 14개주(Oblast’) 의회 및 2개 특별시(아스타나 알마티) 의회에서 각 2명씩 선출하며 대통령은 15명의 의원을 임명한다. 하원의원은 107석 중 98석은 정당 비례대표제에 의해 선출되고, 9석은 ‘카자흐스탄 민족회의(Assembly of the People of Kazakhstan)’에 할당된다. ‘카자흐스탄 민족회의’는 1995년 3월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된 자문기구로 소수민족 대표 등으로 구성되며 민족 간 화합과 안정을 목표로 관련 정책에 대한 제안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7년에 헌법기관으로 승격하였다.
의회의 의결은 양원 합동회의 의결사항과 하원의 심의 및 의결 후 상원에 회부 사항, 상원 단독회의 사항, 하원 단독회의 사항 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상 하원이 각각 7개 이하의 상임위원회를 구성 운영토록 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정당은 다당제에 기초하고 있다. 1993년 12월 구의회(국가최고회의)가 해산됐다. 이듬해 3월에 독립국가로서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면서 정당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카자흐스탄의 정당들은 정치적 이념이나 정책보다는 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이에 저항하는 야권 정당으로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정책과 이념 등에 있어 두드러진 차이는 없는 편이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정치정세는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안정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정당법 개정 등을 통하여 군소정당의 난립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고 있는 독특한 정당제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지적됐다. 또한 야권이 현 집권세력에 도전할 만한 결집된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 상황을 그 요인으로 들기도 한다. 카자흐스탄 야권은 정당들 간의 이해충돌, 민주화 방법 및 속도 등에 대한 이견 등으로 결집된 모습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오탄당을 중심으로 한 친여 집권세력의 정국 주도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사법부
카자흐스탄의 법원은 대법원(Supreme Court), 주법원(Provincial Court), 지방법원(Local Court)으로 구성하되 특별법원 설치는 헌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대법원장 및 대법원 판사는 최고사법위원회의 추천에 기초하여 대통령 제청으로 상원에서 선출하며, 주법원장 및 주법원 판사는 최고사법위원회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기타 지방법원장 및 지방법원 판사는 판사자격협의회(Qualification Collegium of Justice)의 추천과 법무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법위원회(Constitutional Council)
카자흐스탄에는 대통령, 상 하원 의장 및 재적위원 20% 이상의 의회의원 및 총리가 제기하는 사항에 대한 심의권과 법원의 제청에 의한 법률의 합헌성 여부 심의권을 갖고 있는 ‘헌법위원회’를 두고 있다. 동 위원회는 위원장 및 6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위원은 대통령, 상원의장, 하원의장이 각 2명씩 임명한다. 임기는 6년이며 전직 대통령은 헌법위원회의 종신위원으로 재직한다.
최근 정세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대권가도
2005년 12월 카자흐스탄 대선에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91%의 압도적 지지로 재선되었다. 당시 대선은 지방정부의 행정력 동원 등 관권개입, 집권세력의 언론매체 장악 등 특수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지난 2004년 9월과 2005년 8월에 실시된 상하원 선거를 통해 의회를 완전 장악하였다. 이후 주요 요직에 측근인사를 기용함으로써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카자흐스탄의 대외정책 기조는 자국의 독립과 주권을 보호하고 국내개혁 추진을 위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 중앙아시아, CIS(독립국가연합) 등 주변국들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고, 동시에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안보 확보를 위해 이해 당사국은 물론 국제기구와의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한 협력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 실리 균형외교를 펼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고도경제성장, 국민의 삶의 질 개선, 국가위상 제고 등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왔다. 이 정책 추진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중앙아시아 국가 중 정치적 리스크가 비교적 적은 국가로 평가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지속적인 부정부패 만연, 빈부격차 심화 등으로 인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4년 초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 경제가 악화되었고, 국제 유가는 지속적인 폭락을 거듭하였다. 카자흐스탄은 산업의 에너지 의존도가 높고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국가다. 결과적으로 국제 상황에 따른 수출 감소, 금융 불안 고조, 국가 통화 가치 불안정 심화, 내수 부진 등 경제적 어려움들이 가중되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2016년 말 예정이던 대통령 선거를 2015년 4월 26일에 조기 실시한 것도 당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결과적으로 97.5%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5선 연임에 성공해 2021년까지의 집권이 보장됨으로서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건강 문제, 후계 구도 불투명 등으로 포스트 나자르바예프에 대한 불안이 상존하고 있다. 카자흐 정부는 2050년 세계 30대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하는 ‘카자흐스탄 국가발전 2050’ 전략 하에 인프라개발 계획 ‘누를리졸’과 ‘5대 제도개혁 및 100대 구체 조치’의 원활한 추진을 통한 국가 안정화를 도모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민주화 전망
카자흐스탄의 정국 전망을 한마디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야권은 결집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야권인사도 없다. 결국 카자흐스탄 정치권의 특성상 앞으로 민주화 방향 및 속도는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집권세력의 민주화 의지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민주화 의지는 지난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음으로서 다소 희석될 수 있다는 일각의 견해가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상하원 의석수 확대를 통한 의회 위상 강화, 의회 다수석을 기반으로 한 정부 구성, 의회의 대정부 감독기능 강화 및 지방자치단체장 직선 등을 골자로 한 정치개혁을 사회불안이 야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중하게 추진해 나갈 것임을 확인하였다. 집권층 일각에서는 점진적 정치 자유화를 통해 소득수준 향상에 따른 민주화 욕구를 수용해 나가는 것이 정국의 장기적 안정에 긴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카자흐가 점진적이나마 실질적인 민주화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하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선先 경제 후後 정치’를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고도경제성장을 지속해 나가는 가운데 점진적 민주화를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이와 같은 정치적 입장은 서방국들과 이해를 같이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민주화 전망에 대해 서방국 입장은 신중한 편이다. 미국, EU 등 서방국들은 일관성 있는 민주화 과정을 강조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카자흐스탄의 급격한 민주화가 국내정세 불안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카자흐 정치 불안이 중앙아시아 정세불안으로 이어져 대테러 전략에 차질을 가져 올 수도 있다는 우려도 갖고 있다. 따라서 서방국들은 카자흐스탄에 대해 민주화를 강력히 요구하기 보다는 민주화 과정이 후퇴하지 않는 한 ‘점진적 민주화’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
카자흐스탄 경제 개황
카자흐스탄은 개혁 개방 정책의 지속 추진과 카스피해 원유개발 등 원유 가스 산업의 발전을 바탕으로 2000년 이후 10% 수준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빠른 경제성장은 원유, 가스, 우라늄 등 카자흐스탄이 풍부히 보유하고 있는 국제원자재 가격의 상승, 에너지 자원 개발 등을 목적으로 한 외국인직접투자의 급속한 증가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카자흐스탄은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 나오는 화학원소가 거의 망라되어 있을 만큼 자원의 보고이고 특히 풍부한 원유, 가스 외에도 텅스텐의 매장량은 세계 1위이며 우라늄, 크롬은 세계 2위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그 밖에 카자흐스탄은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 스텝, 산악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의 전체 면적과 비슷한 35만 평방 킬로의 경작지를 보유하고 있어 호주와 함께 세계적 수준의 식량 수출국으로서의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된다.
카스피해의 해저 유전 생산이 본격화됨에 따라 카자흐스탄의 경제는 연 10%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으며, 향후 15~20년간 경제 성장 잠재력도 막대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특히 카스피해의 해저 유전의 매장량이 원유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1,000억 배럴을 넘는 것으로 확인될 경우,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맞먹거나 추월하는 원유 매장량을 가진 세계 유수의 산유국 반열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고 있고 이러한 기대는 여러 가지 카스피해의 유징에 비추어 거의 현실로 될 전망이다.
자원 부국이라고 해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자원의 저주’라 불리는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은 한 나라가 자원에 과다하게 의존하여 급성장을 할 경우, 자원 수출로 과도한 외화가 유입되어 물가가 오르고 실질 환율이 상승해 제조업과 같은 여타 부문의 국제 경쟁력을 해치고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가 자원 일변도의 불균형적인 양상을 보여 한정적인 자원이 고갈될 경우 더 이상의 경제발전이 어려워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카자흐스탄은 이러한 자원 부국이 빠지기 쉬운 함정의 위험성을 잘 깨닫고 있는 나라이다. 카자흐스탄은 에너지 자원에서 얻어지는 수입을 National Fund, 연금 기금, 산업 발전 기금 등에 축적하여 자원수입을 당장 지출하지 않고 원유가가 내리거나 자원이 고갈되는 미래에 대비하는 한편, ‘산업혁신전략’을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제조업 등을 선정하여 산업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고, 원유산업 발전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IT, BT 등 신기술 분야를 포함한 차세대 성장 동력 마련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성장률 저하와 대응 전망
카자흐스탄은 국제 원유가가 오르기 시작한 2000년이 연 10%에 육박하는 경제 성장의 사실상 원년이었고 그 이후 매년 10%에 가까운 경제 성장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에도 완만한 성장세를 보이던 카자흐스탄 경제는 2014년부터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여 2015년에는 1.2% 성장에 그쳤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최근 분석 자료에 의하면 카자흐 경제성장 둔화의 대외적인 요인으로는 저유가 국면의 장기화와 러시아의 경기침체, 대내적인 요인으로는 카자흐스탄 외환당국의 갑작스러운 평가절하 단행 및 환율제도 개혁 등 비일관적인 정책 운용의 실패가 꼽히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2015년 11월 30일 연례교서를 통해 ‘누를리 졸Nurly Zhol’ 신新경제정책과 ‘5대 제도개혁 및 100대 구제조치(100 Concrete Steps to Implement Five Institutional Reforms)’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국가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인프라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는 ‘누를리 졸’의 주요 목표는 사회간접자본시설(social overhead capital)을 구축하고 전국 각 지역에 경제특구·산업단지를 건설하는 것이고, ‘5대 제도개혁 및 100대 구제조치’의 핵심내용은 공공기관의 부패 척결, 결과 중심의 성과관리 시스템 도입, 국민 참여 재판을 통한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제고, 민영화를 통한 외국인투자 유치 및 투자환경 개선, 국민통합운동을 통한 국가정체성 확립, 국민의 알권리 충족 및 국정운영의 투명성 확보 등이다.
향후 카자흐스탄 경제는 주로 유가 및 러시아의 경제상황 등에 의해 좌우될 것으로 판단되나 ‘누를리 졸’의 인프라 투자계획과 ‘5대 제도개혁 및 100대 구제조치’가 성공적으로 실현될 경우,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다만 높은 물가상승률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경기부양정책을 펼칠 경우 이를 악화시킬 수 있는 부작용이 존재하며, 카자흐스탄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구조개혁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2016년 IMF 기준으로 카자흐스탄의 국내총생산GDP은 1,162억 달러(세계 56위), 1인당 GDP는 6,472달러(세계 81위)이며, 수출은 462억 달러, 수입은 336억 달러로 교역규모는 798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카자흐의 예술과 문화
카자흐 인들의 선조인 사카Saka 인들의 예술은 두 부류로 나뉜다. 아헤매니드(이란 민족국가)와 박트리아의 예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부류가 하나이고, 중국 주나라·한나라 시대의 예술과 연관성이 있는 부류가 다른 하나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무덤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물이다. 시베리아 남부 러시아의 투바Tuva 자치공화국에 있는 아르잔Aržan(Arzhan) 무덤은 직경 120m에 높이 3m에 이르는 거대 건축물이다. 중앙에 놓여있는 8×8㎡의 목관 안에는 지배자와 씨족 일가 그리고 종신들이 묻혀 있다. 관 밖에는 160마리의 말들이 행군대열로 자리 잡고 있다. 이밖에도 무덤 안팎에서 많은 말들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들 말들의 털이 밝은 보라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카자흐 인들의 토착신앙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사카 인들은 태양, 바람, 천둥 등을 절대적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을 섬기는 여러 제의식을 행하여 왔다. 제의식의 대상들을 살펴보면 천마天馬, 코니스리프(말머리에 사자 몸뚱이)와 같은 새, 짐승 등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사카 인들은 독특한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는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와 같은 신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우주의 질서는 태양과 태양 마차의 움직임이다. 우주는 3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의 세계, 지상의 세계, 천상의 세계가 그것이다. 이들 각 세계는 전후좌우의 방향을 갖고 있다. 아쉬크의 사카족 ‘황금무사’ 투구는 사카 인들의 우주관을 보여 준다.
몽고 지배 이후인 14~15세기의 카자흐 인들에게는 독특한 민중문화가 형성되었다. 주택, 의상, 생활용품, 음식 등 생활양식은 물론 건축, 구비문학 등 예술 양식도 크게 발전되었다. 시그낙, 사우란, 오크라르, 야사의 건축물과 카심, 드자니벡, 카잔가프의 분묘, 시르다리야, 카라타우, 만기쉴락의 회교 무덤 등은 카자흐인들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들이다.
10세기에 철학 과학 수학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남긴 작가 아부 나스르 알 파라비Abū Nasr ibn Muhammad al-Fārābi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자흐스탄의 문필가이며 중세 서양의 정치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904년에 사망한 아바이 이브라힘 쿠난바예프Абай Кунанбаев는 위대한 민족시인이자 카자흐어가 문어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가로는, 시인 잠불 자바예프와 극작가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를 꼽을 수 있다. 아직도 카자흐스탄에는 서사적인 민요시와 서정시를 낭송하는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카자흐스탄에는 많은 예술 연극 학교가 있으며, 알마티에는 국립 미술관이 있다.
카자흐 인들이 남긴 가장 주목할 만한 유산은 독특한 주택양식이다. 이들 주택은 ‘유르트yurt’라고 불린다. 이동식 가옥으로 일종의 천막과 같은 것이다. 유목인들의 생활특성을 잘 보여주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르트는 계절에 따라서 겨울용과 여름용으로 구분된다. 여름용은 이동이 편리한 형태이고 겨울용은 방한이 잘 되고 장기간 정책에 용이한 구조이다. 용도에 따라서도 의식용, 주거용, 혼례용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물론 각 용도에 따라서 유르트의 크기와 구조도 다르다.
카자흐인들의 주식은 고기와 짐승의 젖이다.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음식은 다섯 손가락을 의미하는 ‘베시바르막Beshbarmak’이다. 베시바르막은 양을 부위별로 삶아내고 수제비와 같은 형태의 밀가루 반죽을 끓여 손으로 먹는 음식이다. 또한 말 젖으로 만든 ‘쿠미스Kumys’와 낙타 젖으로 만든 ‘슈바트Shubat’라는 음료도 대표적인 음식으로 꼽힌다. 젖을 발효시켜서 만든 유제품으로는 ‘카미막Kaymak’이라는 요구르트와 함께 응고시켜 과자처럼 만든 ‘쿠르트Kurt’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소, 양, 염소 등의 젖은 버터, 치즈 등의 원료로 사용된다. 카자흐 인들이 가장 즐기는 음료수는 발효시킨 우유 ‘아이란Ayran’이다. 수수, 밀, 호밀 등 주요 재배 곡물은 주로 겨울 음식으로 이용된다.
카자흐의 언어
카자흐어는 몽고 지배 후인 14, 15세기에 카자흐스탄 사회, 경제 체제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침략자인 몽고 한국과 영주들의 장기간 지배, 그리고 새로운 유목민족 유입은 카자흐스탄 남부 정칙지역과 주요 도시의 문화를 파괴했다. 당시의 땅은 각 계층에 따라 구분되었다. 인주(한汗국의 왕실 소유지), 물리끄(농경이 가능한 오아시스 지역의 개인 소유지), 브카프(카자흐스탄 남부 도시에 있는 이슬람 중심지역의 사원이나 기관 소유지) 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사회 계층의 분화와 함께 중앙아시아에는 투르크 표준어와 3개 방언(카르룩-위구르, 위구르-오구스크, 캅차크-오구스카)이 주요 언어로 등장하였다. 이들 언어는 여러 민족어로서 성장하였다. 13, 14세기에는 캅차크어로 된 구비 민속에서 많은 작품들이 나타났다. 카자흐어는 14, 15세기 투르크어 그루브이 캅차크-노가이스크어로부터 형성되었다.
카자흐의 종교
실크로드의 나라 카자흐스탄의 종교는 매우 다양하게 전래되었다. 먼저 불교를 꼽을 수 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그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을 거쳐야 했다. 기원전 1세기 중반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불교는 2, 3세기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특히 6세기 투르크 인들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7세기 전반에는 일부 통치자들이 불교 신도가 되어 불교를 보호했다.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기독교도 실크로드를 따라 유입되었다. 7, 8세기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남부 중앙아시아와 세미레치예의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많은 도시에 기독교회가 생겨났다. 치마후예(780∼819) 총주교 시대에는 일부 투르크 족 지배자들도 앞장서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14세기에 성자 마트훼이의 유골이 안치되었던 기독교 수도원이 아쉬크 쿨리 연안에 건설되었다.
3세기 이란에서 나타난 마니교도 실크로드를 따라서 전파되었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특성을 갖고 있다. 중세 카자흐스탄의 도시인들 중에는 기원전 6, 7세기 고대 이란에서 발흥한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슬람교도 실크로드를 따라 다른 어떤 종교보다 적극적으로 유입되었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헌에는 카자흐스탄이 이슬람화되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960년 카르룩국에 이어 등장한 카라하니드 국(942∼1210)의 칸 하룬 무사는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하였다. 14, 15세기에 이슬람교는 카자흐스탄 남부의 투르케스만, 호레즘 부하라 등 여러 도시들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카자흐스탄에는 세계의 여러 외래 종교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유입되었으나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대다수가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카자흐 인들에게 어떤 거대 종교도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한국과 카자흐의 관계
외교 관계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1992년 1월 28일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가치를 기반으로 꾸준히 실질협력관계를 발전시켜왔다. 카자흐스탄은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이 자국의 경제개발에 유용할 수 있다는 점과 우리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함으로써 카자흐스탄 경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한-카자흐스탄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독립 직후 자국의 경제적 어려움과 서방기업들의 무관심이 지속되던 시기에 한국 기업이 적극 진출하여 투자했던 사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당시 한국의 투자 사례가 서방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례로 삼성은 1995~2001간 ‘카작무스(구리 광산 및 제련)’에 2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성공적인 위탁 경영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 회사는 현재 6만 명 고용, 연매출액 약 8억 달러에 이르는 구리 제련 분야 세계 6위의 회사로 성장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우리 기업들의 투자가 잠시 주춤거렸으나 2002년도 카자흐 외무장관 방한 및 산자부 장관의 상호방문을 계기로 활력을 되찾았다. 양국 관계는 2003년 11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방한 및 2004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의 카자흐 방문을 통해 카스피해 원유 및 광물자원 공동개발 등의 실질협력관계 확대를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2003년 11월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정상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 한반도 비핵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해 인식을 같이하고 UN 등 국제무대에서도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대통령
또한 2009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방문을 계기로 양국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어 양자 및 국제무대에서의 협력의 폭이 강화되고 있으며, 2010년 4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국빈방한, 2011년 이명박 대통령 카자흐 방문, 2012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방한, 그리고 2013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 G-20 정상회의 시 양국 정상의 회담, 2014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방문 등은 양국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내실을 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국 간 협력관계는 앞으로도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경제 관계
2013년도 말 기준, 한국-카자흐스탄 간 교역액은 총 13.2억 달러로 그 중 수출이 10.7억 달러, 수입이 2.49억 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對카자흐 주요 수출품목(MTI 2단위 기준)은 수송기계, 석유화학제품, 산업전자제품, 산업기계, 철강제품, 농산물 등이며, 주요 수입품목(MTI 2단위 기준)은 철강제품, 비철금속제품, 금속광물, 축산물, 정밀화학제품, 수송기계 등이다.
또한 2013년 12월말 기준, 한국의 대對카자흐 투자 금액(신고누계)은 약 32.4억 달러에 달하며, 양국 에너지 자원 협력 분야에서도 석유공사와 LG상사 등이 컨소시움을 구성해 서부지역 육상 유전 개발에 참여하고 있고, 잠빌해상광구 개발을 위한 컨소시엄도 구성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광물자원공사 등 한국기업은 카자흐스탄의 동 연 아연 등 유망광물 개발사업 참여를 적극 추진하고 있고, 한국수력원자력은 카자흐스탄 카즈아톰프롬측과 2002년 우라늄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여 연간 960톤을 카자흐스탄이 공급 중이며, 2008년엔 신규 우라늄 장기도입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더불어 우리나라는 카자흐스탄의 경제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프로젝트, 연수생 초청, 봉사단 파견, 전문가 파견 등 지원 사업을 활발히 시행하여 왔다. 우리 정부는 1992년부터 2009년까지 무상원조 3,100만 불, 1996년 통신망 현대화 사업에 총 2천만 달러의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을 유상원조로 제공함으로써 총 5,100만 달러를 지원했다. 2010년에는 세미팔라친스크 핵실험지역 암 조기진단 시스템 구축, 연수생 92명 초청 등 총 273만 달러 규모의 협력사업을 실시하였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는 2014~2016년간 동카자흐스탄 응급의료체계 강화를 위해 100만 달러 상당의 사업을 진행 중이다.
북한-카자흐스탄 관계
북한은 카자흐스탄이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992년 1월 수교한 데 이어 1992년 12월 주카자흐스탄 북한 대사관을 개설했다. 카자흐스탄이 친한 성향을 유지하고 있고 한-카자흐스탄 간 실질협력관계가 확대되는 반면 북한-카자흐스탄 간에는 별다른 관계 진전이 없자 북한은 1998년 2월 주카자흐대사관을 폐쇄하고 2000년 11월에는 알마티 주재 무역대표부도 철수했다. 2012년 11월에는 주카자흐스탄 북한 대사관 재개설 검토를 위해 북한 외교부에서 대표단을 파견한 바 있으나 현재까지 별다른 진전은 없다. 북한대사관 철수 및 1999년 미그-21기 대북 밀수출사건 등으로 인해 양국 정부 간 인사 교류는 거의 단절된 상태이다. 카자흐스탄의 대對북한 교역액은 2012년에 총 73만불(수출 47만 달러, 수입 26만 달러)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2014년에는 수출이 없이 수입만 25.7만 달러를 기록했다.
[참고문헌]
○주한카자흐스탄대사관 자료
(http://kaz.mofa.go.kr/korean/eu/kaz/main/index.jsp)
○권영훈, 『고려인이 사는 나라 까자흐스딴』, 열린책들, 2001.
○김정민,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글로벌콘텐츠, 2015.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Astana
아스타나Astana는 카자흐스탄의 수도이다. ‘아스타나’라는 이름은 카자흐어로 ‘수도’라는 뜻이다. 1997년 이전의 수도는 알마티Almaty였다. 현재 아스타나의 인구는 약 87만 명(2015년 11월 기준)이다. 면적은 300㎢이고 카자흐스탄 북중부 평원에 위치한다.
짧은 역사지만, 아스타나는 곡절이 많은 도시다. 1830년 이후 아스타나는 러시아의 군사 전진기지였다. 1950년 ‘첼리노그라드(처녀지의 도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소련정부가 스텝지역을 농경지로 바꾸는 ‘처녀지 정책’에 따라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1992년에는 다시 ‘아크몰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7년 카자흐 정부는 수도를 알마티에서 이곳으로 이전했고, 이듬해 도시 이름도 ‘아스타나’로 바꾸었다.
아스타나는 카자흐스탄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철도, 공업, 식품가공의 중심지다. 카자흐스탄 횡단철도와 남시베리아 철도의 분기점으로서 교통의 중심지다. 세계 각국의 자매결연 도시가 14개 도시에 이른다. 한국의 수도 서울시와 2004년 11월에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아스타나의 대학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는 유라시아대학교(Eurasian National University), 나자르바예프대학교(Nazarbayev University) 등이 있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유라시아 국립 대학교는 아스타나에서 가장 큰 대학이다. 이 대학교에서는 2013년 11월에 ‘한국문화의 날’ 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행사는 한국 유학설명회, 붓글씨 전시회 및 체험행사, ‘Korean Beauty’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대학교에서는 한류의 바람을 타고 많은 학생들이 한국어를 전공으로 또는 제2외국어로 배우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학교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2007년에 설립됐다. 이 대학교 역시 한국과 연인이 깊다. 2014년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함께 이 대학교를 시찰하기도 했다. 같은 해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유라시아를 창조의 대륙으로 발전시키자는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구체화한 사업의 일환으로 이 대학교와 ‘교육 문화 협력을 위한 MOU(양해각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관광코스 명소
아스타나에 가면 꼭 둘러보아야 할 명소들이 있다. 먼저 바이테렉 상징탑Bayterek Monument Tower이다. 2002년 8월 29일에 건립된 이 탑은 아스타나로 수도를 옮긴 후에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세워졌다. 카자흐스탄 전설에 따르면 고대 카자흐에 ‘신비의 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 위에 사는 Blue Bird는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의미하는 금 달걀을 낳았다. 바이테렉 상징탑은 신수도 건설과 함께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바이테렉 상징탑은 아스타나로 수도를 이전한 1997년을 기념하여 전망대층을 97m로 건립하였다. 상징탑 외곽에서 볼 때 전망대는 2단계 대형 원형 구조물 안에 위치하고 있다. 1단계에서는 신도시 행정센터 전체 조망이 가능하도록 했다.
유리와 강철의 피라미드로 지어진 평화와 화합의 궁전Palacd of Peace & Accord도 볼거리다. 이 궁전은 2006년 10월 1일 건립되었다. 본 건물은 박물관, 오페라, 극장, 콘서트 홀, 회의실 및 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페라 극장은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다. 세라트 카발리예 오페라 가수 등 국제적으로 유수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였다.
아크몰라 알지르ALZHIR(정치범 아내들의 수용소) 박물관도 관람명소 중 하나다.
ALZHIR는 ‘조국 배신자들의 아내를 위한 아크몰라 수용소’라는 러시아어 약어다. 아크몰라는 지금의 아스타나를 가리키는데, 아스타나 시내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소이다. 구소련 시대 당시 유일했던 여성 집단 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1937년 8월 15일 구소련 해외정보원의 결정으로 정치범 가족들을 체포하여 이곳에 수용시켰다. 수용자들은 대부분 정치범의 아내와 자식들이었다. 이 수용소는 1953년 스탈린 사망과 함께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아크믈라 박물관이 세워진 것은 2007년 5월이다. 스탈린 정치 대탄압 70주년을 맞이하여 정치탄압으로 희생된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관심 있는 이들에게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The Central State Museum of Kazakhstan도 필수코스다. 이 박물관은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2014년에 개관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인 이 박물관은 현대적 전시기술 및 내부설비를 갖추고 있다. 총 면적은 9.9ha이다. 건축부지는 74,000㎡, 전시면적은 14,095㎡으로 총 9층 건물로 독특한 외관을 자랑한다. 이밖에 아스타나 홀, 카자흐스탄 독립 홀, 황금 홀, 고대 및 중세역사 홀, 미술작품 전시실 등 총 11개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카자흐스탄과 “고려인高麗人”
카자흐스탄에는 고려인高麗人(한인韓人)의 아픈 역사의 숨결이 서려 있다. 역사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한인들이 계절농 형태로 러시아의 극동지역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1850년대부터였다. 1858년 중국과의 아이훈 조약, 1861년 북경조약에 의거하여 아무르 지역과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가 되면서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됐다. 당시 극동지역 개발에 부심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 정부는 한인들의 이주, 정착을 환영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국내적으로 왕조 말기의 증상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세도정치는 문란했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썩고 병든 봉건주의 벼슬아치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은 더 이상 빼앗길 것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고국을, 고향을 떠났다. 그들 중 일부가 찾아간 곳은 남의 나라 땅, 동토의 러시아 땅 우수리, 연해주 등이었다. 각자 아픈 역사 하나씩을 안고 대대로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을 떠나온 한인들은 잡초같이 살아남아야 했다.
고려인들의 슬픈 ‘떠돌이 노래’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 하에서 본격적인 계획경제가 도입되었다. 농장의 집단화가 추진되면서 한인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극동지역에서 수십 개의 농업, 어업 콜호스kolkhoz(생산협동조합 형식의 집단농장)를 조직하는 등 경제, 사회, 문화적 잠재력을 갖춘 한인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거기가 시베리아에서의 삶의 끝이었다. 소련 정부가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1937년 가을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단행한 것이다.
1937년 8월 21일은 한인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스탈린 정권은 억압적인 소수민족 정책의 일환으로 우수리, 연해주 등에 정착하고 있던 약 18만여 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사시아의 몇몇 나라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결정했다.
당시의 슬픈 역사를 권영훈 교수는 이렇게 슬픈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1937년 9월 말 한인들을 실은 열차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였다. 이주 행렬은 알마티, 크들오르다, 카라간다, 크스타나이,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이어졌다. 한인들의 이주는 같은 해 12월의 혹한 속에서 완료됐다. 당시(1938. 2) 통계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이주민 수는 20,789가구의 98,454명, 우즈베키스탄의 경우는 16,307가구의 74,500명으로 전체 이주민 수는 170,103명에 이른다. 여기에 사망자 수까지 합치면 약 1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교수의 절규는 계속된다.
고려인들의 운명은 정말로 기구하였다. 19세기 말에는 가난 때문에, 20세기 초에는 자유를 찾아서 조국을 떠났고, 러시아 10월 혁명, 적군과 백군의 내전,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열악한 자연환경 등 모두를 이겨내고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시기인 1930년대를 채 넘기기도 전에, 1937년에는 강제로 황무지에 버려졌다.
강제 이주는 강압적이고도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추진됐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생이별을 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자행된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의 희생이 컸다. 어느 한인 아내는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에 열차에 태워졌고 어떤 이는 친지를 방문했다가 그 자리에서 열차에 태워졌다. 하루아침에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두각을 나타내는 고려인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강제 이주를 당한 한인들의 고통을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당시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상황도 참담했다. 1930년대 초 농업 집단화와 기근 등으로 250만 명이 사망한 비극을 겪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자흐 인들은 강제 이주된 한인들이 이웃에 정착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해 주었다.
중앙아시아 초원의 신비의 나라, 실크로드의 나라, 카자흐스탄은 이제 고려인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우리 동포 고려인들은 피맺힌 한을 가슴 깊은 곳에 남몰래 묻어 둔 채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한인들은 이후 60여 년에 걸쳐 소련 내에서 다수의 고려인 콜호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한인들의 높은 교육열은 어디를 가도 빛을 발했다. 다수의 한인들이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소련 내 주류사회에 진입하는 등 우수한 소수민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카자흐스탄에서는 소련에서 유일한 한인종합예술극장인 고려극장, 한글신문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를 운영하는 등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사회를 주도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카자흐스탄에는 약 10만 명(103.546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한인사회에는 1937년 강제 이주된 한인들의 후손인 2~4세대 고려인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고려인들은 정·관계 고위직, 학계 문화 예술 분야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김 비올례타 전대법관, 니 블라디미르 대통령 알마티 총무수석 비서관, 김 블라디미르 카자흐 무스 구리광업 공사 사장, 최유리 카스피해 은행장 등 다수가 그들이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오랜 기간 모국과의 격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말과 문화를 지켜온 바, 한국어 라디오 방송 및 우리민족 TV 등 문화 예술 언론 활동을 통해 CIS 지역 내 우리 민족문화의 유지 보존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수세대에 걸친 모국과의 격리 및 소련 정부의 러시아 동화 정책 등으로 고려인 2~4세대들은 한국어 구사가 어렵고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도 다소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수교 및 한국대사관 개설 이후 우리 정부로부터의 지원 등에 힘입어 젊은 층의 우리 말 구사 능력이 꾸준히 향상되고 있으며 북한 성향을 보여 주고 있던 공연예술 분야도 점차 한국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주요 재외동포 단체로는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알마티고려문화센터, 고려일보, 카자흐스탄 국립고려극장, 고려말 라디오 방송, 우리민족 TV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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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 연이은 테러, 유럽에 안전한 곳이 없다
니스Nice, 루브래Rouvray, 독일 뮌헨München까지
연이은 테러, 유럽에 안전한 곳이 없다!
지난 7월 14일(이하 현지 시각) 프랑스 니스Nice에서는 혁명 기념일(바스티유의 날)을 맞아 해변가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밤 10시 30분경 마지막 행사로 불꽃놀이가 끝났을 무렵 대형 흰색 수송용 트럭 한 대가 해변가의 유명 산책로인 프롬나드 데 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영국인 산책로)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시속 60∼70㎞ 속도로 돌진했다. 트럭은 의도적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지그재그로 운전하며 도망가는 군중들을 공격했다. 트럭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최소 84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트럭 운전사는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트럭을 군중 속으로 몰았고, 나중에는 군중을 향해 총을 꺼내 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사살된 범인은 튀니지계 프랑스인 모하메드 라후에유 부럴(31)이었다. 나중에 그의 트럭에서 총기, 수류탄, 폭약 같은 다량의 무기가 발견되었다. 그는 이슬람 국가(IS)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그들의 사상에 동조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니스 테러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 7월 26일 오전 프랑스 북부 생테티엔 뒤 루브래시市의 한 성당에 괴한 두 명이 흉기를 들고 침입했다. 이들은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자크 아멜(84) 신부와 수녀·신자 각 2명 등 총 5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 과정에서 신부가 칼에 목을 베여 목숨을 잃었고, 신자 한 명이 크게 다쳤다. 괴한들은 아랍어로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제단 주변에서 설교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범인들은 IS 추종자로, 그중 한 명은 알제리계 프랑스인 아델 케르미슈(19)로 확인됐다. 케르미슈 일행은 범행 후 성당을 빠져 나오던 중 먼저 빠져 나온 수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사살됐다. 이들의 흉악무도한 테러 범행 소식에 프랑스 전역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IS는 그동안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서 타 종교 시설을 파괴한 적은 있지만 서방의 종교 시설을 대상으로 테러를 일으킨 것은 처음이다. 계속된 테러로 공포에 휩싸인 프랑스는 최근 작년 11월 파리 테러 이후 선포된 국가비상사태를 내년 1월까지 6개월 추가 연장하였다.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 바이에른 주 뮌헨의 도심에서 7월 22일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9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했다. 지난 18일 같은 주 뷔르츠부르크를 지나던 통근 열차에서 17세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년이 흉기를 휘둘러 승객 4명이 다친 지 나흘 만에 일어난 일이다. 이날 총격은 오후 5시 50분께 맥도널드 점포와 새턴 자동차영업점 앞, 올림피아 쇼핑몰 3곳에서 발생했다. 경찰은 처음 총격이 발생한 지 2시간 30분쯤 후에 쇼핑몰 인근 도로에서 용의자의 시신 1구도 발견했다. 독일 언론은 도주 중이던 용의자가 경찰에 붙잡히기 직전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총을 쏴 자살했다고 보도했다. 총격범은 뮌헨에 사는 18세의 이란과 독일 시민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란계 독일인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과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번 사건이 ‘소프트 타킷 테러soft target terror’(불특정 다수의 일반 대중을 노리는 테러)라는 점에서 독일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벌어진 테러들은 사회에 섞이지 못한 외톨이 청년들의 무차별 공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럽형사경찰기구(유로폴Europol: European Police Office)는 지난 20일 보고서에서 미국 올랜도 나이트클럽 총기난사, 프랑스 마냥빌 경찰관 부부 난자, 니스 트럭 돌진, 독일 뷔르츠부르크 도끼 난동 등 올해 일어난 4건의 테러 모두 IS가 기획이나 지원, 실행을 한 테러가 아니라고 분석했다. 오히려 2000~2015년 사이 일어난 ‘외로운 늑대’에 의한 공격의 35%는 정신장애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최근 발생되는 테러는 뚜렷한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일어나는 전통적인 테러의 개념에서 벗어나 테러와 광기가 구분되지 않고 뒤섞인 형태로 일어나고 있다.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자이퉁Süddeutsche Zeitung은 “많은 이들이 실제 어떤 위험에 처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오랜 불확실성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적었다. 잘못된 종교적 신념, 정신장애, 사회적 원한이 뒤섞여 이제 지구촌 어디에서도 완전한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뮌헨 총기난사는 테러와 광기가 뒤섞인 세계에서 안전한 곳은 없음을 확인시켜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