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없다' 책 요약 정리 ②
요즘 대형교회의 재정 불투명과 세습, 목회자들의 부도덕성 등은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집과 독선을 버리고 자신을 비울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참다운 종교의 길이다.
종교는 나를 비울 것을 가르친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나 자기 교파,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예수의 이름을 파는 사람에 대해 예수는“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한데서 단죄가 이루어질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초대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 속에 그 어떤 것이 있다한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 소산이라 규정하여 일망타진을 기도했다. 그러면 왜 지구촌에 이 많은 종교가 생겨나도록 하나님은 방치하셨는가.
타종교는 악의 소산으로서 청산되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깨어진 진보신학자들은 기독교가 개종 중심의 선교신학을 견지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하며 기독교 토착화와 다원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다원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에도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냉소적이다. 그러나 21세기는 정복주의적, 배타주의적 선교신학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종교 다원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나아가 하나님 중심으로 선회하여 신학을 전개함으로써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한 다원성을 인정하는데 있다.
대체로 한국기독교 신자들은 “불교의 신, 알라신, 한울님이 따로 있다”고 믿지만 이런 여러 종류의 한 분으로서 여호와 신이라면 결국 유일신관(唯一神觀)에 위배된다.
한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만 보호해 준다면 천국에서 건사해 주는 신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한 유일신관은 종교 다원론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가 여러 종교 중심이고 다른 종교는 그 둘레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코페루니쿠스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고 지구도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기독교든 불교든 타종교든 자신의 종교 중심으로 우주가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기독교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불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등 지구촌 모든 종교의 하나님으로 심지어 무신론자마저 수용하는 신으로서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종교의 길은 결국 하나로 귀일되어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매듭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특히, 예수는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기존의 종교와 제도, 권력과 투쟁을 벌였다. 예수는 사즉생(死則生)의 진리를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닫힌 종교는 교리적종교, 율법적종교, 의례중심종교,교권주의 종교, 배타와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종교, 지극히 독선적이고 광신적 종교 행태를 구가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열린 종교는 자기 종교의 절대적 신념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타종교의 상대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성숙한 자세를 지닌 종교다.
그동안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윤리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배타주의적이고 공격적이며 편협한 차별 정책을 펴왔고, 구원과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의식을 병적으로 과장하였다.
결국 예수를 배타적 인물로 왜곡시켜온 것이다.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진리임을 알아야 한다. 음양으로 순환하는 것. 그 상대적 운동을 하는 원리가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변하는 것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석가도 금강경에서 “나의 설법은 물을 건널 때만 필요로 하는 뗏목으로 알라”. “강을 건너면 배를 놓아라”고 했다. 절대적이라 주장하고 자신이 믿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한 자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단으로 몰려서 희생당했는가.
과연 그 확신이 절대적 진리였던가! 결국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자기 주장을 절대시 하는 경향이 있다.
각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도 문화, 정치, 사회, 언어,역사의 제약을 받는 상대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버림으로써 강해짐을 가르쳤다. 그러나 소중한 가치인 청빈과 비움, 겸손, 버림, 절제, 헌신의 덕목은 설자리를 얻지 못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도리어 남보다 강해지는 법, 남보다 앞서 나가는 법, 남을 이기고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회가 인기를 얻고 있다.
성공과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니 말이다. 저 가난한 나라는 하나님의 저주란 말인가? 예수가 설파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씀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의 뜻은 뭘까.
예수가 재림한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대형교회와 교권, 교파주의, 세속에 매몰돼 있는 개별교회는 물론, 종단의 분열과 분쟁이 늪 속으로 빠지는데도 교세확장만 부추기며 내 종교가 최고라는 독선과 자만만 심어주고 있다.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할 수는 없는 것인가?
자기를 비울 때 하나님이 찾아온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3:16)하는 말씀과 다음의 예수의 일성을 음미해 보자.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한복음2:1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르는 것이요, 예수와 같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곧 예수와 같이 되는 것이요. 예수를 닮아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예수가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현실적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은 것처럼 우리도 그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 핵심인 것이다. 과거 유대교의 낡은 안목으로 새 시대 지도자인 예수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율법에 갇혀 신앙의 노예가 된 유대교 지도자들은 새 시대가 도래했지만 새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지도자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당시 예수의 파격적 행동을 받아들인 지도자가 거의 없었듯이 지금도 그러하다.
만일 예수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들어온다면 기독교인들 중에 몇 명이나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교회와 신자는 많건만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은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교회가 새롭게 되고 온전하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들이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간파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패는 진리를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자파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 왔기 때문에 일어났다. 하나님의 눈에는 잘살고 못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숙한 신앙은 기복신앙을 극복하고 고난과 시련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성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 도달해야할 숭고한 삶의 가치며 실재이다.
구약성경은 여성차별을 당연시하며 여성을 재산의 일부로 간주하고 매매하기도 했다. 이런 고대사회의 가치관이 현대사회에 적용돼서는 안 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의 무(無)오류 원칙과 예수의 신성, 처녀로서의 출산, 대속적 구원, 예수의 부활과 재림 등을 핵심교리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벗어난 개인이나 집단, 종교에 대해 관용은 없다. 세계 분쟁에는 꼭 근본주의가 관여하고 있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인가?
기독교는 원래 열린 종교이다. 유대교는 율법과 종교 의식에 집착하는 닫힌 종교였다. 요즘 기독교는 어떤가. 자신을 처음 핍박했던 ‘닫힌 종교’를 닮아가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해 살아남기 위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동양유일의 제국주의가 되어 지구상 가장 악독한 제국주의가 되었던 일본처럼 한국기독교는 과거 자신을 핍박한 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다른 종교나 신앙체제를 거부하고 있다. 지금은 한 종교의 독점이 불가능한 공존의 다종교 사회이다.
예수는 부패한 종교적 현실과 맞서 싸우며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편에 섰다. 종교적 위선을 철저히 거부했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 후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들이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고 “이런 성전은 헐어 버려야한다”고 분노했다.(마가11:15~) 그러나 지금의 교회에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패권력을 옹호하고 기득권유지에 급급한 모습에 씁쓸할 뿐이다. 이제 예수의 본래 모습을 되찾지 않으면 민중은 교회를 떠날 것이다.
《종교는 없다》
4350년 6월 22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