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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족, 한 목적, 한 믿음의 나라 세네갈 Senegal


세네갈은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고 서부아프리카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로 불리는 나라이다. 9세기에 세네갈 강 유역을 중심으로 투쿨로르Tukulor족이 정착하며 세네갈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 세기 동안 여러 민족과 왕조들이 명멸하였고, 19세기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프랑스공동체의 일원으로 운신하다가 1960년에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후 여러 정치적 실험과 인종 분규, 내전 등을 겪어 왔으며, 개발도상국형 경제 체제를 운영하면서 어렵고 힘든 여정을 걷고 있다. 

하지만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수준 높고 복합적인 문화 역량을 자랑하며 서부아프리카 민주주의의 창구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훌륭한 시민 의식을 소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비동맹 중립 및 실리주의 외교를 펼치며 우리나라와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다져나가고 있는 세네갈의 저력을 확인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세네갈 공화국Republic of Senegal은 아프리카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다. 현지어(프랑스어)로는 레퓌블리크 뒤 세네갈(Republique du Senegal)이라고 한다. 수도는 인구 약 352만 명 규모의 다카르Dakar이다. 다카르는 그리니치 표준시 기준으로 서울보다 9시간이 느리다. 세네갈의 총인구는 2016년을 기준으로 약 1,432만 명이며, 국토의 총면적은 196,722㎢로 영국보다 조금 작다. 국토의 대부분은 해발 고도 100m 이하의 평지이다. 남으로는 기니Guinea, 기니-비사우Guinea-Bissau, 동으로는 말리Mali, 북으로는 모리타니Mauritania, 서로는 북대서양과 접한다. 아프리카 대륙을 흔히 사람의 두개골 모양으로 여기는데, 그렇게 보면 세네갈은 볼록 나온 뒤통수 해당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수도 다카르는 그 중 가장 튀어나온 부분에 위치해 있다. 세네갈 내부에는 대서양으로부터 감비아Gambia 강을 따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감비아Gambia가 북부 세네갈과 ‘카자망스Casamance’라 불리는 남부 세네갈을 분리하고 있다. 그런 지형 탓에 세네갈은 마치 감비아를 입에 가득 물고 깔깔거리며 웃는 턱이 네모난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세네갈의 국기는 세로로 된 삼색기로 초록색, 금색, 붉은색 순이다. 그리고 중앙에 5개의 가지를 가진 초록색 별이 있다. 초록색은 삼림에서 온 것으로 희망을 의미하며, 금색은 초원(savane)을, 붉은색은 세네갈 투사들이 흘린 피를 각각 상징한다. 중앙에 위치한 별의 다섯 가지는 5대륙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세네갈 국가 문장에서 사자는 힘을 나타내며, 바오밥(Baobab)은 장수를 의미한다. 매년 4월 4일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날로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세네갈의 국가이념은 한 민족(Un Peuple), 한 목적(un But), 한 믿음(une Foi)이다.

세네갈은 산을 보기 힘든 저지대로 대부분 지역이 평평하다. 전반적으로 해발고도 100m 이하의 평탄지이다. 유일하게 솟아 있는 지역은 남동부에 있는 해발 400m의 푸타잘롱 산악 지대의 줄기이다. 평평한 모래사장으로 덮여 있는 대서양 해변은 길이가 약 500km이고 시네 강, 살룸 강, 카자망스 강 하구의 삼각주는 넓은 맹그로브 숲으로 덮여 있다. 긴 사주, 석호, 소금이 덮인 모래 언덕이 북부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다.

남부를 중심으로 전국토의 54%는 삼림을 이루고 있으나 세네갈 강 유역은 사하라 사막에 접하는 건조 지대로 페를로 사막을 형성한다. 그 밖의 지역은 사바나성性 기후를 나타낸다. 북부 사헬 지역의 가시나무 덤불 사바나에서 독특하고 마디가 있는 바오밥과 빨간 꽃이 피는 플랑부아양 나무가 자라는 건조 사바나를 지나, 케이폭수樹, 야자나무, 유칼립투스, 망고 등으로 이루어진 카자망스의 습윤 사바나 그리고 습윤 삼림 지대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세네갈에는 3개의 강江이 흐른다. 북쪽 모리타니와의 국경을 형성하는 이 나라 최대 강인 세네갈Senegal 강, 극동쪽의 발원지만 제외하고는 감비아에 의해 둘러싸인 중앙의 감비아Gambia 강이 있다. 감비아는 세네갈의 국토로 둘러싸여 세네갈 남부 카자망스 지역을 북부와 남부로 갈라놓고 있다. 또 하나의 강은 인근 지역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고 지역 명칭의 유래가 되기도 했던 남쪽의 카자망스Casamance 강이다.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며 하류는 대형선박의 항행이 가능하다. 

국토 북부 전체에 걸친 사막화 현상은 계속 확대되는 문제로, 세네갈 강의 마난탈리 댐만이 부분적으로 이 현상을 저지하고 있는 사정이다. 사하라 사막 남부의 반 건조대인 사헬에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다양함을 보여주는 나라인 세네갈은 550종 이상의 동물군을 자랑한다. 또한 철새들-특히 물새 종류-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매해 겨울 유럽에서 많은 수가 떼를 지어 돌아와 생루이Saint-Louis 북쪽에 있는 세계 주요 조류보호지구 중의 하나인 빠르 나씨오날 오 외주 두 쥬지(Parc National aux Oiseaux du Djoudj)에 머문다. 세네갈은 지반이 안정적인 곳으로 지진 피해는 발생하지 않으며, 태풍 등 천재지변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높은 파도로 인한 해안침식 현상은 어느 해안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기후는 우계(6~11월)와 건계(12~5월)로 나누어지는데 우계에는 사하라 사막 쪽으로 습기가 많은 남동 계절풍이 불며 국토 전역에 비를 몰고 온다. 건계에는 카나리아 한류寒流의 영향으로 북서쪽에서 서늘한 무역풍이 불어와 연안부에서는 기온이 낮아진다. 그러나 내륙에서는 사하라에서 하르마탄이라는 건열풍乾熱風이 불어오므로 기온이 내려가지는 않는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mm 미만인데 북부와 북동부는 적은 양의 비가 오는 반면 남부의 카자망스는 최대 2,000mm의 비가 오는 습윤 열대성 기후이다. 또 남부의 우기는 북부보다 현저히 길다. 가장 더운 달은 9월~10월로 기온이 섭씨 30℃~35℃를 보이며,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섭씨 18℃~26℃를 보인다. 가장 건조한 달은 4월~5월로서 평균 강우량이 1㎜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습한 달은 8월로 평균 강우량이 254㎜를 보인다.

세네갈의 역사

세네갈의 기원
세네갈은 다카르 부근에서 석기 시대의 도끼나 화살촉 등이 발굴되고 있으나 9세기에 세네갈 강 유역에 투쿨로르Tukulor족族이 정착하면서 세네갈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11세기 중엽 북쪽의 베르베르계족의 일파인 제나가족族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파됐다. 이 종족의 이름에서 ‘세네갈’이란 국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나의 배(舟)’라는 의미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1050년대 말~1140년대 말 무렵 모로코를 중심으로 한 알무라비트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 후 나이저 강 유역의 비非이슬람교도가 강대해지면서 분쟁이 계속되었다. 14세기에는 윌로프Wolof족이 대서양 연안에 왕국을 세웠고, 15세기에는 풀라니Fulani족이 세네갈 강 중류에 왕국을 세웠으나 1444년 포르투갈 항해자가 베르데곶(串)에 내항한 무렵에는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
포르투갈은 세네갈 하구河口와 다카르 항 앞바다에 있는 고레 섬 등지에 무역기지와 가톨릭 포교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때 세네갈의 해안 왕국들은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접촉을 하며 나라를 유지했다.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도 진출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밀어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인들을 쫓아내고 미국으로 보낼 노예들을 수합하는 중요 지점인 생루이와 고레 섬(Gorée Island)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1633년 창립된 프랑스의 세네갈 회사가 1659년 생루이에 상관商館을 설치하면서 이곳을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차지하게 됐다. 프랑스는 1677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고레 섬을 빼앗았다. 한편 영국은 감비아 강 유역에 기지를 설치함으로써 17~18세기의 세네갈 지역은 영국·프랑스 간에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말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어 모든 프랑스 기지는 영국에 점령되기도 했지만, 1816년 고레 섬과 생루이가 다시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식민지화에 노력했다. 세네갈은 프랑스의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 기지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1854년 L.L.C 패데르브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 투쿨로르족의 지도자 오마르 알하디의 저항 전쟁을 제압하는 등 강력한 팽창 정책을 취하여 내륙의 프랑스 식민지화가 추진되었다. 1859년부터 1865년 사이 세네갈 내 각 부족 왕국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말 프랑스는 세네갈 전부를 지배할 수 있었다. 1886년에는 포르투갈령領 기니와, 1904년에는 감비아와의 경계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었다. 생루이, 고레 섬, 루피스크 및 다카르는 ‘4개의 코뮌’으로서 1887년 이래 프랑스 본국의 지방자치제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1895년에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하나의 통치 단위가 되고 생루이가 수도가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대한 동화정책同化政策과 침략의 기지로서 세네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902년에 수도를 다카르로 옮겼으며 1908년 도시 건설이 완료되면서 다카르는 서아프리카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쳐 세네갈은 다른 프랑스령 아프리카 국가와 함께 1946년 프랑스연합 내의 해외 영토가 되었고, 1956년에는 프랑스 공동체 내에서 자치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58년 12월에는 말리Mali, 니제르Niger,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와 연합하여 말리연방(Republic of Mali)을 수립하였다. 

독립 이후
1960년 8월 세네갈은 말리 연방에서 탈퇴하여 단독 국가로 독립을 선포하였고, 9월에는 세네갈 사회당(PSS)의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1906~2001)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친 프랑스 온건 개혁 노선을 택하며 1980년까지 장기 집권한 셍고르는 시인이자 문화이론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아프리카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 지식인 중 1명으로 평가된다. 1976년 4월 세네갈은 제한적인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80년 12월에는 셍고르 대통령이 사임하였고, 이듬해 1월에 압두 디우프Abdou Diouf 수상이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세네갈은 1981년에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93년 2월에는 디우프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하였다. 5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 사회당이 총 의석 120석 중 85석을 차지하면서 승리하였고, 1998년 5월 총선에서도 총 의석 140석 중 93석을 획득하여 다시 승리하였다. 1998년 8월에는 1992년에 제정되었던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3회 이상 연임 제한을 철폐하였다. 1999년 1월에는 상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사회당이 압승하였으며, 2월 18일자로 세네갈의 상원이 공식 출범하였다.

2000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3월에는 대통령 선거 2차 투표가 실시되어 야당 후보인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와데 대통령은 2000년 4월에 취임하였다. 2001년 1월에는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새 헌법을 채택하였으며, 2월에는 새 헌법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었다. 4월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여당이 120석 중 89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세네갈은 1996년 중국과 단교하였으나 2005년 10월 타이완과의 단교 이후 중국과는 재수교를 단행하였다.

2007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와데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6월에는 총선이 실시되어 여당이 하원 160석 중 130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009년 3월에는 세네갈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세네갈은 201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4월부터 마키 살Macky SALL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2. 정치 및 행정


정치 제도 및 최근 정세
세네갈은 1960년에 독립을 선포한 이후 1963년 3월에 공포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세네갈은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고, 총리는 각료를 임명하는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대통령의 서명 없이는 법률이 통과될 수 없으며, 대통령은 특히 외교, 국방, 사법 등의 분야에서 큰 권한을 지니고 있다. 1968년 2월 국민의회 총선거에서는 80의석 전부를 세네갈 진보동맹(UPS)이 독점하면서, 1966년 야당인 아프리카 재편당(PRA)을 통합한 이래 실질적으로는 1당제 국가가 되었다. 1978년에는 UPS를 세네갈 사회당으로 개칭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을 표방하였다. 독립 후 줄곧 대통령직을 맡은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가 1980년 사임을 하자 압두 디우프Abdou Diou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디우프는 3선 연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000년 2월 2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세네갈 민주당(PDS)의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후보가 디우프를 꺾고 1960년 독립 이후 40년 만에 최초의 수평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며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집권 사회당 체제가 무너졌다. 이에 따라 세네갈은 서부아프리카 민주주의의 창구라는 명성을 확인하였다. 2000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이유는, 세네갈 국민들이 사회당의 장기 집권에 따른 부정부패와 여당 내 자리 다툼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성적인 실업 문제 등 경제·사회적인 어려움도 정권 교체의 원인이 되었다. 세네갈은 2000년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정치, 사회적인 혼란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차분하게 민주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와데 당선자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선거 공약대로 자신을 지원한 야당연합(Coalition 2000) 참여 인사와 지인들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세네갈은 2001년 1월 헌법 개정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개정안을 채택하였다. 헌법 개정안은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 부여, 상원 폐지, 여성권리 강화 등의 내용을 주요 골자로 채택하였고 1998년 폐지되었던 3선 제한이 재도입되었으며 대통령 임기도 7년에서 5년으로 축소되었다. 이어서 와데 대통령은 구 집권당인 사회당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던 국회를 해산하고 2001년 5월 29일에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결과 와데 대통령 소속당인 세네갈 민주당을 축으로 한 Sopi연합(coalition Sopi)이 국회 총 의석 120석 중 89석을 획득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여 개혁 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와데 대통령은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식량 자급, 자원 개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위한 16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신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로 보건, 교육, 고용 창출을 표명하였다. 또한 당초 2006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2005년 수해복구 예산 확보 등의 이유로 2007년 대선과 통합하여 국회의원 임기를 8개월 연장하였다. 

와데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내외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해외순방 등을 통해 해외자본 유치, 개발 프로젝트 구상 등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40년에 걸친 사회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누적된 실업, 빈곤, 교육, 전기·수도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노후화 등의 문제 해결에 있어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은 집권 1기 기간 동안 경제·사회문제 해결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치러진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55.9%의 지지율로 재선되어 집권 2기를 맞았고 그 해 6월에는 집권 여당을 중심으로 한 Sopi 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150석의 의석 중 130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사회문제 해결에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세네갈 국민들의 지지도가 크게 하락하였다. 특히 자신의 아들인 카림 와데Karim Wade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무리한 조치들을 시행한 결과, 국민들의 비판이 가중되었다.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의 지지도가 하락한 결과, 2009년 3월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다카르Dakar, 티에스Thies, 카올라크Kaolack 등 주요 도시 지역에서 패배하였으며, 다카르 Point-E 선거구에 출마한 와데 대통령의 아들 카림 와데가 낙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2009년 10월에는 또 다시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 임기가 2012년 선출되는 차기 대통령부터 7년으로 다시 연장되고 하원의장의 임기는 5년에서 1년으로 축소되는 변화가 발생했다. 

결국 2012년 3월 2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결선투표를 치른 끝에 전 세네갈 총리이자 야당 연합 후보인 마키 살Macky SALL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4월에 취임하였다. 살 대통령은 2012년 9월 상원 폐지 등 개혁을 단행했고 11월에는 전임 와데 대통령 아들(전 장관)의 부정부패 및 비리 수사, 처벌을 위한 특별법정을 설립했다. 하지만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는 연립 여당이 패배하였다. 2014년 8월에는 제15차 불어권 정상회의가 수도 다카르에서 개최되었으며, 2015년 5월 세네갈은 ECOWAS(서아프리카 경제협력체) 의장국으로 선출되었다. 2016년 1월 세네갈에서는 치안 불안과 함께 테러 위험이 고조되었는데, 카올락 및 뤼피스크 지역에서 테러 용의자가 체포되기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개헌안 국민투표가 62.6% 찬성으로 통과되어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다시 5년으로 축소되고 3선이 금지되었다. 

지방행정
세네갈은 수차례의 개편을 거쳐 1984년부터 10개 지역(Region) 단위의 자치단체를 구성하였다. 2012년 현재는 14개의 지역단위 자치단체가 있고 각 지역은 3개 내외의 도(Département)로 구성된다. 각 도는 여러 개의 군(Arrondissement)으로 나뉜다. 지방 정부는 주로 환경 및 천연자원 관리, 보건·인구·복지, 청소년·체육, 문화, 교육, 지역개발, 도시화·주거 등의 분야를 담당한다. 14개 지역은 다카르Dakar, 티에스Thies, 카올라크Kaolack, 디우르벨Diourbel, 생루이Saint-Louis, 콜다Kolda, 파티크Fatick, 루가Louga, 지긴쇼르Ziguinchor, 탐바쿤다Tambacounda, 마탐Matam, 카프린Kaffrine, 케두구Kédougou, 세디우Sédhiou 등이다. 14개의 지역단위 자치단체 아래에는 총 44개의 도(Département) 단위 행정구역이 편재되어 있다.

입법부
세네갈은 1998년 헌법 개정으로 임기 5년의 국회의원 140명으로 구성된 국회(National Assembly)와 임기 5년의 상원의원 60명으로 구성된 상원(Senate: 1999.1.24 선거, 2.18 출범) 등 프랑스식 양원제 의회 제도를 보유하였으나, 와데Wade 정부 출범 직후, 2001년 헌법 개정을 통하여 상원을 폐지하여 단원제가 되었으며, 의원내각제 요소가 일부 도입되어 국회가 정부의 정책을 토의하고 불신임 투표를 통하여 내각 사임을 가져올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또한, 정당을 옮기는 의원은 자동적으로 의석을 상실하도록 하여 당적 이적을 어렵게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상원은 법률안 입법 권한 없이 자문 기능을 수행하도록 구헌법에 규정된 바, 사회당(PS) 정부 말기 여당 출신 및 디우프Diouf 대통령 측근 인사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설립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7년 1월 헌법 개정으로 양원제가 부활되었으나, 2012년 4월 취임한 마키 살Macky SALL 대통령의 개혁 의지에 따라 2012년 9월 국회 표결로 상원이 재차 폐지되고 단원제로 환원 후, 2012년 7월 총선거에서 총 150명의 국회의원(임기 5년)을 선출, 제12대 국회가 출범했다. 

국회는 의장단과 원내 교섭단체 대표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구성되며, 국회의원 정원 150명 중 90명은 지역구에서, 60명은 비례대표 방식으로 선출된다. 현재 국회는 연립여당인 희망연대(BBY: BENNO BOKK YAKAAR)가 119석, 세네갈 민주당(PDS) 12석, 무소속이 19석의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전체 의원 중 여성 의원은 64명이 등록되어 있다.

사법부
세네갈의 사법 및 법률 제도는 구 식민 종주국인 프랑스식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1992년에 대법원(Cour Supreme)을 분리, 3개의 기구(Conseil Constitutionnel, Cour de Cassation, Conseil d'Etat)가 최고 법원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1999년 헌법수정으로 감사원(Cour des Comptes)이 창설되었다.

헌법 재판소(Conseil Constitutionnel)는 각종 법률 및 국제법규의 헌법 일치 여부, 행정부와 입법부 간 권한 관련 분쟁, 국가참사관과 대법원 간의 권한 관련 분쟁 및 각종 헌법 일치 여부 심의, 선거 관련 분쟁 판결 등을 수행한다. 최종 법원(Cour de Cassation)은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헌법 일치 여부를 판단하고, 국사원(Conseil d'Etat)은 정부의 각종 법률안에 대하여 국회 송부 전 사전 심의 및 행정법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밖에 감사원(Cour des Comptes)은 정부 및 국영기업 등의 회계 감사를 맡고 있다.

외교정책
세네갈은 1960년에 독립한 이후 비동맹 중립의 외교정책을 펴고 있으며 아프리카단결기구(OAU) 등 지역통합운동 등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왔다. 프랑스공동체의 구성국이고 프랑스와는 공동방위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또 아프리카모리셔스공동기구(OCAM)의 가맹국이다. 1982년 2월 감비아를 합병, 세네감비아 국가 연합의 발족을 선포하였으나 1989년 양국은 해체에 합의하였다. UN의 가맹국이며 EC의 로마협정국이다. 세네갈은 프랑스, 일본, 미국, 타이완, 독일, 캐나다, 네덜란드 등 선진국을 대상으로 무상원조를 받는 등 적극적인 경제 실리 추구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세네갈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며, 원칙적으로 남·북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표방한다. 한국과는 친선 우호협력관계를 유지 중이며, UN 등 국제무대에서의 협력관계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세네갈은 서구 선진국 중심의 기존 원조 공여국 외에 한국 등 새로운 원조 공여 가능 대상국 개척에도 상당한 관심과 기대를 보이고 있다. 한편 미국, 프랑스,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의 대對 세네갈 관계 강화 노력이 현저한데, 1998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였고, 2005년에는 부시 미국 대통령,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 룰루 브라질 대통령 등이 방문하였다. 2005년 중국과 재수교했으며, 대만과는 단교 조치를 단행했다. 

3. 경제


경제 특성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불어권 국가 중 코트디부아르 다음으로 국민총생산 2위(149억 달러, 2016년)에 해당하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약 1,067달러(2016)인 최빈 개발도상국으로, 농수산물 및 인산염, 금 등 1차 상품 수출, 재외국민 송금(연간 약 10억 달러 수준) 및 해외 원조 수원 등이 주요 재정 수입원이다. 

세네갈은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IBRD)과 긴밀한 협의 하에 경제구조 조정계획을 추진, 2000년~2013년도 연 평균 약 4~5%대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외국 투자 유치, 공기업 민영화, 시장경제 육성 등을 통한 경제 개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 중이다. 정부는 민간 투자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2000년 S&P’S 신용등급을 신청하여 B+/B를 처음으로 부여받고 2014년에도 B+/B 등급을 유지하였다.

마키 살Macky SALL 대통령은 취임 후에 효율적인 공공자금 운영, 정부 규모 축소, 부정 축재 척결 특별재판소(CREI) 부활, 감사원 개혁 등 대대적인 정부 구조개혁에 나서는 한편, 동년 11월 입안한 ‘경제사회개발 국가전략(SNDES)’을 수정 보완해 2035년 개도국 도약을 목표로 ‘세네갈 부흥계획(PSE)’을 수립, 적극적인 해외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높은 국가채무 비율(2013년 GDP 45%), 비효율적인 공공자금 운영, 만성적 재정적자 등으로 인해 외국인 투자의 유치 및 효율적인 경제개발 추진에 애로가 상존하고 있으며, 가시적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전력 식수 등 사회 인프라 부족 사태가 심화되고, 실업률 확대, 식량 부족에 따른 곡물가격 상승, 지속적인 물가 불안 등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등 세계 경제의 불안, 역내 에볼라 사태의 장기화 등으로 경제 불황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으며, 최근 지역 강수량 급감에 따른 곡물 작황이 감소하면서 식량 안보 문제도 심화되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다.

경제구조와 교역
세네갈은 1차 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가전제품과 자동차는 물론 식기, 플라스틱류 등 생활필수품인 공산품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전형적인 개발도상국형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다. 2007년(추정치) 기준 GDP 비중에 의한 산업 구조를 살펴보면, 농업 16.7%, 제조업 18.9%, 서비스업 64.4%이다. 

노동력 비중 기준으로 보면, 약 75%인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업 생산 품목은 땅콩, 진주조, 면화, 쌀 등이 있다. 특히 ‘세네갈의 황금’으로 불리는 땅콩은 프랑스가 식민지 시대에 가지고 들어와 재배를 장려하기도 하였고, 세네갈 총수출액의 25%를 차지하고 있어, 땅콩을 재배하는 농사는 사실상 이 나라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60년대에 독립할 무렵에는 노동 인구의 87%가 종사하는 규모였다. 어업은 참치, 문어, 오징어, 가다랑어, 새우가 중심이며, 이들의 대부분은 수출된다. 광업(인광석)과 공업은 인광석을 원료로 하는 화학 공업과 상호 관계를 가지며, 관광, 서비스업이 주요 산업이다. 세네갈은 세계 10대 인광석(phosphate) 생산 수출국이고, 아프리카 50개 금생산국 중 1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세네갈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천연가스 시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4년 IMF 기준으로 세네갈의 수출은 25.7억 달러, 수입은 60.5억 달러를 기록하여 극심한 무역수지 적자를 보이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수산물, 땅콩 및 땅콩기름, 석유제품, 비료 등이고, 주요 수출대상국은 말리(19.2%), 프랑스(8.3%), 인도(5.8%), 감비아(5.3%), 스페인(5.1%), 이탈리아(4.9%) 등이다(2006년). 수입품은 사탕·쌀·밀 등의 식료품, 소비재, 석유제품 등이고, 주요 수입대상국은 프랑스(25.1%), 영국(5.2%), 태국(4.8%), 중국(4.5%), 스페인(4.0%) 등 이다(2006년). 

경제개발에서는 자금 조달을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는 미개발 철광산 개발, 다카르 자유무역지대의 설치, 세네갈 강 유역의 개발 등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또한 인광석 개발에도 노력하고 있어 땅콩에 편중된 외화수입원의 다양화를 모색하고 있다. 

교통은 전체길이 906km의 철도, 세네갈 강의 항로, 1만 3,576km의 도로 외에 다카르·카올라크·생루이 등 주요 항구가 있다. 국제공항은 다카르에 있고 공항은 모두 20개이다(2006년). 세네갈 강 유역의 모리타니·말리·기니 등과는 경제협력기구를 구성하고 있고 서아프리카 경제협력체(ECOWAS)의 가맹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4. 사회와 문화


인구 민족 및 언어

세네갈의 인구 규모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간 정도에 속한다.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수도인 다카르Dakar로 약 352만 명의 인구수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 수명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의 평균보다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며, 인구 구조 상 전형적인 피라미드형을 보인다. 세네갈에는 많은 민족적 그룹이 존재하고, 각각 독자의 역사, 언어, 문화를 갖고 있다. 이러한 민족적 그룹 내의 교류, 아프리카 이외의 문화와의 교류 결과, 자신들의 출신에 긍지를 갖는 복합 문화가 국민들 사이에 형성돼 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족은 월로프족(44.3%), 풀라르족(23.8%), 세레르족(14.7%) 등이다. 그밖에 투쿨로르족 디올라족 말링케(만딩고)족 등이 있고, 프랑스인이나 아랍인도 있다. 주민의 73%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2001년 헌법)이다. 세네갈은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그러나 월로프어, 세렐레어 등 토속어도 사용된다. 종교는 이슬람교도가 전 인구의 94%, 가톨릭을 주로 하는 그리스도교도가 5%, 나머지는 전통적 부족종교를 신봉한다.

세네갈인은 대체로 대가족주의로 친척이나 친구를 중히 여기며 방문자에게도 친절하다. 인터넷 호스트의 수는 199개(2007년)이며, 약 65만 명의 인구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2006년). 문맹률은 60.7%(15세 이상, 2002년 추정치)로 높은 편이다. 2004년을 기준으로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는 0.460으로 조사 대상국 177개국 중 156위를 차지하여 아프리카 대륙 저개발국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도 같은 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하루 1미국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빈곤 인구는 전체 인구의 50.6%에 달하였다. 

복합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 역량

반면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나라다. 각 부족은 흑인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으나 도시에서는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 구비 문학은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말리 제국 시대부터 내려온 음유시인 계층인 그리오griot들은 전사의 무용담을 담은 구비 전승시를 낭송한다. 레오폴드 셍고르Leopold Senghor, 부알라Boilat 신부 등 우수한 시인과 작가 그리고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 등의 영화감독들이 많이 배출된 국가다. 특히 1930~1950년대 레오폴드 셍고르는 마르티니크Martinique의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1913~), 기아나Guiana의 레옹 다마스Leon Gontran Damas(1912~1978)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동화정책에 저항하면서 아프리카의 전통과 아프리카인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문학 운동인 네그리튀드Negritude 운동의 깃발을 들었다. 셍고르의 시는 아프리카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세네갈의 시인 비라고 디오프Birago Ishmael Diop(1906~1989)는 아프리카인의 삶의 신비를 다룬 시를 쓰는 한편, 월로프족의 전통적인 민담과 전설을 기록하였으며, 다비드 디오프David Diop(1927~1960)는 제국주의 유럽 열강들을 축출하고 아프리카인의 독립과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혁명적 시들을 썼다. 세네갈의 작가들은 일부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로 소설, 시, 드라마 등의 작품을 쓴다. 잘 알려진 영화감독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은 서아프리카의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세네갈은 서부아프리카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로 평가받는다. 특히 다카르 대학(약 4만 명 등록)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인데, 문학, 법경제학, 과학, 의학, 언론, 공학, 사서학, 교육학 등 모든 분야가 이 지역에서 인정받고 있다.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 ‘다카르’

세네갈의 음악은 크게 전통 음악과 현대 음악으로 나누어지며, 매년 12월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 ‘다카르’가 세네갈 전역의 크고 작은 바나 클럽에서 열리는데 전통 아프리카 음악과 현대 아프리카 음악을 모두 보여준다. 월로프족의 퍼커션Percussion 음악인 음발락스mbalax는 유명한 세네갈 민속 음악이다. 음발락스는 세네갈 출신의 가수이자 ‘더 슈퍼 에뜨왈 밴드’의 리더인 유쑤 은두르Youssou N’Dour(1959~)에 의해서 대중화되었다. 2007년 3월 1일 은두르는 자신의 밴드와 서울에서 내한 공연을 한 바 있다. 사바르Sabar 드럼 연주는 특히 인기가 많다. 사바르는 결혼식 같은 특별한 의식에서 연주된다. 다른 악기로는 타마tama가 있다. 은두르 외에 빠쁘 디우프Pape Diouf, 바바 말Baba Maal(1953~), 시온 섹Thione Seck(1955~) 등도 인기 있는 뮤지션들이다. 

이슬람 신앙 문화

세네갈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94%, 개신교 및 천주교가 5%, 토속신앙이 1%를 차지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관계로 이슬람교 공동체(Brotherhood)가 사회 깊숙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마라부Marabout들이 이슬람교도들의 사회·경제생활을 인도하고 있다. 

세네갈의 이슬람교 공동체 중 무리드Mouride파의 영향력이 가장 크며, 그 밖에 티자니야Tijaniyya, 니아시야Niassiyya, 카디리야Qadiriyya, 라예네Layenne파 등이 있다. 최근에는 보다 조직적이면서, 종교 및 정치적 입장을 지닌 개혁적인 이슬람 조직들이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고 있다. 

1990년대 세네갈의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은 마라부의 지원을 배경으로 정치적 기반을 확대한 적이 있다. 이들 이슬람교 공동체는 지하 경제에 간여하고 있어 세네갈 국가 경제 발전의 저해 요소로 작용함으로써 개혁의 대상으로 거론되어 왔다. 하지만 각종 선거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역대 정부들은 본격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전前 대통령도 무리드파 이슬람교 공동체 지도자들과 깊은 친분 관계를 맺었다. 와데 대통령은 각종 선거 전후에 무리드파의 성지인 투바Touba를 방문하는 등 자신의 정권 유지 기반으로 이슬람교 공동체를 활용하였다. 세네갈의 이슬람화는 442~1050년경 무라비뚠al-Murābiṭūn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제2단계(쑤피종단의 확장기)에 이 나라에서 도입되었다. 그 결과 현재 전 인구의 86%가 말리키 법학파에 속하는 무슬림이다. 물활론자들이 4%이고 나머지는 여러 그리스도교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다. 

세네갈은 이슬람이 압도적이지만 신정국가는 아니다. 시민법은 프랑스식에 기초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종교적 관용성을 갖고 있다. 강경파라기보다는 생활형 종교에 가까워 사람들이 비교적 순박한 편이다. 라마단Ramaḍān 역시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라마단 기간 한 달여 동안 태양이 떠 있을 때는 물을 비롯해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기간에는 문을 여는 레스토랑도 줄어든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번째 달(현재로는 12월에 해당)에 실시되어 코란이 모하메드에게 전해진 달을 기념하는 이슬람 종교 의례다. 

음식, 의복 문화

세네갈인들은 쌀, 기장, 생선, 야채 등을 주식主食으로 삼는다. 사막 지역에서는 갈대나 기장을 저장하는 둥근 집을 쉽게 볼 수 있다. 도시에는 거대한 빈민가가 늘어나고 있다.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의상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쓴다. 남자는 쌀과 기름을 조달하고 여자들은 그 외 식량을 마련한다. 그들의 요리는 매우 다양하다. 음식은 손가락으로 먹는데 오른손은 식사 전에 씻고 나중에 양손을 씻는다. 세네갈 음식은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지방 특식으로는 쁠레poulet 또는 뽀이즌 야사poisson yassa로 양념에 절여 구운 닭고기나 생선 요리, 땅콩을 넣은 스튜인 마페mafe, 야채소스와 생선과 함께 익힌 쌀 요리인 체이부젠ti boudienne등이 있다. 세네갈의 주 음식은 ‘체이부젠’이라 할 수 있는데, 쌀밥에 생선 튀기고 남은 기름, 토마토 소스와 야채를 섞어서 볶은 뒤에 맵게 절인 고치와 튀긴 생선을 얹어 놓은 것이다. 커다란 양재기에 담긴 밥을 둘러앉아 함께 오른손으로 주물럭주물럭하여 먹을 만큼 모양을 내서 먹는다. 세네갈 맥주도 맛이 좋다. 가젤Gazelle, 플랙Flag 등이 인기 있는 브랜드이다.

수도인 다카르에서는 여느 이슬람 국가들과 달리 여성들의 자유로운 의상을 종종 볼 수 있지만, 다카르에서 조금만 벗어난 지방으로 가게 되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지내며, 치마는 발까지 덮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방문자들의 옷차림도 매우 중요하다. 남자와 여자 모두 하의는 긴 바지나 긴 스커트로 무릎을 가리고, 상의는 민소매를 제외한 반팔 티셔츠면 무방하다. 하지만 티셔츠에 남녀의 그림이 있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5. 한국과 세네갈의 관계


외교 관계
한국과 세네갈은 1962년 10월 19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주세네갈 한국공관은 1973년 5월 4일에 개설되었다. 2007년 8월에는 주한 세네갈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한국과 세네갈 간에는 1975년 4월 무역협정, 1979년 문화협정·경제기술협력협정, 1984년 투자보장협정, 1997년 청년봉사단 파견협정, 2008년 5월에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 기본협정이 각각 체결되었다. 

양국 간에는 1979년 4월에 세네갈의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바 있으며, 1982년 8월에는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세네갈을 방문하였다. 1984년 7월에는 압두 디우프Abdou Diouf 대통령이, 2009년 11월에는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대통령이, 2015년 6월에는 마키 살Macky SALL 대통령이 한국을 각각 방문하였다.
세네갈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며, 한국과는 1962년 10월 19일, 북한과는 1972년 9월 12일에 각각 수교하였다. 한국의 상주 공관이 설치되어 있고 북한측 상주 공관은 폐쇄하였다가 2013년 7월 재개설하였다. 

경제문화 관계
한국과 세네갈 사이에는 최근 8년여 동안 교역량이 4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동원그룹이 세네갈 국영 참치 통조림 공장을 인수하는 등 양국 간 교역 및 투자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세네갈의 대한對韓 수입은 1억 4,618만 달러, 수출은 6,268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어류, 육어류 조제품 등 수산물이 87% 이상을 차지하고, 주요 수입품은 전자제품, 인조섬유, 고무, 유기화학품 및 화장품 등 화학제품, 종이류, 사진용 재료, 인쇄물, 생활 잡화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동원산업, 삼성전자, 미성상사 등의 한국 업체가 세네갈에 진출하여 총 20건에 걸쳐 654만 달러(2015년 누계)의 투자를 하고 있다.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며, 연해에 풍부한 수산자원으로 우리 원양어선은 물론 우리 교민의 상당수가 수산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수산업 분야 외에도 한국 기업들은 가발업, 잡화 및 문구점, 사진업, 요식업, 보석산업 등의 분야에 진출해 있다.

2008년 한국은 세네갈을 무상원조 중점 지원 대상국으로 선정하고 농업, 교육, 수산양식 등의 분야에서 9백만 달러 상당의 총 5개 프로젝트 사업을 지원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봉사단과 전문가들을 파견하고 있으며, 세네갈로부터 연수생을 초청하고 있다. 2015년 5월 기준으로 세네갈에는 한국 교민 약 2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과 세네갈의 문화 분야 교류는 전통예술단의 방문 공연 정도이다. 체육 분야에서는 세네갈의 아마두 바Amadou Ba 선수가 제24회 서울올림픽(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여 400m 남자 허들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 2002년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세네갈이 동시에 8강에 진출하여 축구를 통해 양국 국민이 서로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에는 세네갈의 최고 대중 인기 가수인 유수 은두르Youssou N’dour와 이스마엘 로Ismaël Lô가 방한하여 공연하였다. 한국의 경우 퓨전 국악 실내 악단인 ‘슬기둥’이 세네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2008년 5월에 개최된 다카르Dakar 비엔날레에서는 한국 작가 8명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2012년에는 한-세네갈 수교 50주년 기념을 계기로 양국 정상 간 메시지 교환(2012년 1월), 문화행사(2012년 5월, 비보이/퓨전국악 다카르 공연, 2012년 7월 세네갈 민속공연팀 여수 공연), 학술 세미나(2012년 11월, 다카르), 한식 축제, 영화제 등을 개최한 바 있다.

북한과의 관계
세네갈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비동맹 중립 외교노선을 견지, 원칙적으로 남·북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표방하고 있으나, 한국과의 경제 협력을 보다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 북한은 1972년 9월 세네갈과 수교하고, 같은 해 11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1974년 셍고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세네갈은 한때 친북한 경향을 띠기도 했다. 하지만 친서방 실리 외교를 추구하는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98년 2월 북한은 경제 사정으로 인해 주세네갈 상주 대사관을 폐쇄하였다가 2013년 7월에 상주공관을 재개설하였다. 상주 대사관 폐쇄 기간 동안에는 주기니 대사관에서 관련 업무를 겸임하였다. 세네갈은 주일본 대사가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북한의 만수대 해외사업부가 2011년 LSS 국제공항에서 다카르 시내로 진입하는 언덕에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탑’을 건설하여, 세네갈의 상징물로 자리 잡고 있다. 2015년 5월 현재 북한은 건축기술협력 대표부 및 만수대 해외사업부 세네갈 지사를 설치, 기술자 및 100명 가량의 노동자를 세네갈에 파견하고 있으며, 이들은 다카르 시내 및 인근에서 각종 건물 신축 사업에 투입되고 있다. 북한과 세네갈 간에는 경제기술 협력 협정(1974), 무역 협정(1974), 혼성위 창설 협정(1986), 정보교류 협력 협정(1994) 등이 체결되어 있다. 





모리타니 인종 분규

@1989년 4월 세네갈은 ‘모리타니Mauritanie 인종 분규’ 사건을 겪었다. 인접 국가인 모리타니와 세네갈 간에 방목권 분쟁이 있던 와중에, 모리타니 국경수비대의 무어인(Moor, Arabo-berber)이 세네갈의 소닌케족族 농부 2명을 사살하는 사건으로 인종 분규가 일어났다. 세네갈에서는 분노한 소닌케족을 비롯한 흑인들이 봉기하여 모리타니인들의 상점들을 약탈하고, 무어인들을 추방하였다. 모리타니에서는 마위야 울드 시드 아흐메드 타야Maawiya Ould Sid'Ahmed Taya(1941~) 정권의 비호를 받는 무자비한 무어인 경찰과 테러 집단이 모리타니 남부인 수백 명을 학살하고 강간과 신체 훼손, 폭행, 토지 약탈, 가옥 파괴를 자행하였다. 또, 7만 명 이상의 남부인들을 아무 연고도 없는 세네갈로 강제 추방하였다. 25만 명이 넘는 남부인 난민들은 타야 정권과 무어인의 인종 청소를 피해 세네갈과 말리로 탈출하였다. 8월 모리타니가 국경을 폐쇄하자 세네갈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세네갈 군軍의 정치 불개입 원칙

세네갈은 1960년 독립 이래 단 한 번의 군사 쿠데타도 없이 역대 모든 대통령이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세네갈의 군대는 정치 활동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정치 불개입 원칙‘을 독립 이래 유지하고 있다. 그간 정치적 격변기에도 정부의 결정에 복종하는 전통을 유지하여 왔으며 군사 쿠데타도 발생하지 않았다. 세네갈의 군 장성 출신 인사들은 국방장관, 내무장관 등 내각에 진출하거나 해외 주재 대사로 일부 진출하는 것 외에는 고위직을 차지하는 경우도 드물다. 세네갈은 프랑스와의 방위 협정에 따라 2009년 현재 약 1,200명의 프랑스 병력의 주둔을 허용하였다. 프랑스는 세네갈 군대에 대한 기술 협력 사업을 강화하고 있으며, 공동 군사 훈련도 실시하고 있다. 미군도 평화 유지 활동 참가를 명분으로 세네갈 군대에 대한 재정 및 기술 협조를 제공하고 있다.

세네갈의 군대는 서부아프리카 지역 등에서 UN 또는 아프리카단결기구(OAU), 서아프리카 경제협력체(ECOWAS)의 평화 유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네갈은 르완다, 캄보디아, 레바논, 라이베리아, 아이티, 콩고민주공화국, 동티모르, 코트디브와르, 부룬디 등에서 평화 유지 활동에 적극 참여해 왔다. 세네갈은 적극적인 평화 유지 활동을 통해 비동맹 중립외교 노선을 주창하고, 서부아프리카 지역 외교 분야에서 주도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카자망스 분리 독립 투쟁 문제

1980년대 이후 세네갈에서는 남부 카자망스Casamance 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 세력이 정부와 무력 충돌을 벌였다. 기독교 세력이 카자망스 지역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 반군인 카자망스민주세력운동(MFDC)를 결성하고 대정부 게릴라전을 개시하면서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199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기도 했으나 곧바로 결렬되었고, 이후 간헐적인 게릴라전과 소탕 작전이 지속되었다. 2000년 12월 카자망스 지역에서 세네갈 정부와 반군(MFDC) 간의 직접 협상 재개 합의가 이루어졌고, 2004년 12월 세네갈 정부는 마침내 남부 카자망스 반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카자망스 반군과의 평화협정 체결 이후 반군 활동은 거의 종료된 것으로 보이나, 카자망스 지방으로 진입하는 도로상에서는 외국인 등 외래 방문객을 상대로 한 금품 갈취 행위가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은 상황이며, 카자망스 지방 내에서는 대인지뢰 제거 작업도 진행 중이다. 마키 살Macky SALL 대통령은 정부 출범 이후 2014년 3월 및 2015년 2월에 각각 남부 카자망스 지역을 방문하여 ‘카자망스 개발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지방자치의 완전 실현과 세제혜택을 약속하는 등 적극적인 카자망스 통합 정책을 펼침으로써 정세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4년 4월에는 반군(MFDC)측이 휴전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노예무역의 상흔을 간직한 고레Gorée 섬

세네갈은 일 년 내내 관광이 끊이지 않는 나라다. 세네갈은 서아프리카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항공교통이 편리한 지역으로 서아프리카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하고 남쪽의 카자망스 평원은 원시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의 끝자락이 이어졌는데, 파리에서 출발하는 유명한 자동차레이스 파리-다카르 랠리의 종점이기도 한 나라다. 기후와 거리가 유럽과 비교적 가까우며 역사적 관계도 깊다. 세네갈은 2007년~2008년 시즌에 유럽 등지로부터 약 8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였고 2015년에는 방문 관광객이 총 3백만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네갈에는 대서양 해변을 따라 외국인을 위한 관광 리조트들이 개발되어 있다. 유럽에서 겨울철인 12월~2월 기간에는 따뜻한 기후를 즐기고 싶은 유럽인의 방문이 많다. 이 기간에는 월동을 위해 세네갈에 도래하는 철새도 볼 수 있다. 또한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국립공원을 선정하고 문화보호 정책과 관광개발 정책 등을 추진함으로써 관광지로서 가치를 높이고 있다. 세네갈의 관광산업은 재외국민 송금, 어업과 함께 세네갈의 주요 외화 획득원이며, 각종 레저단지는 면세 혜택을 받고 있다. 세네갈의 주요 관광지로는 고레 섬(노예 수출 기지), 쥬지 국립공원(철새 도래지), 생루이(구 프랑스 식민지 수도), 살리(휴양지) 등을 꼽을 수 있다.

고레 섬은 다카르 동쪽의 3㎞ 앞 바다에 길이 900m, 폭 300m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이전에는 노예무역의 중계지였다. 지금은 인구 10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는 평화로운 곳으로 아스팔트 길도, 자동차도 없다. 단철로 만든 발코니가 있는 식민지풍 집들, 구 공회당, 멋진 해변, 또 섬과 다카르의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는 바위투성이 고원으로 지금은 마리화나 중독자들이 차지한 르 카스텔 등이 있다. 섬 북쪽의 역사박물관은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멋진 그림과 여러 전시물들이 현재에 이르는 세네갈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비참한 노예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고레 섬 방문에서 빠질 수 없는 일정은 메종 데 에스끌라브(노예의 집)에 가는 것이다. 노예들이 생활하고 있었던 집으로 노예 무역의 상흔을 간직한 이곳은 1786년 세워졌으며 1990년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새롭게 꾸며졌다. 노예의 집과 이에 얽힌 이야기는 그 야만적인 상행위에 세네갈이 연루되었던 참담한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기려 그 이름을 붙인 생루이. 한때 세네갈의 수도였던 생루이에는 도시의 중심이기도 한 세네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을 끼고 우측 본토인 소르지구, 좌측에 랑고 드 바르발리라고 하는 모래톱에 위치한 응다르 투트 등이 있다. 또한 이 도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리가 이 세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쥬지 조류공원이 이곳에 있는데 이곳은 수만 마리의 철새들의 휴식처이다. 또한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Saint-Exupéry가 묵던 호텔도 있다.

“살람 말리쿰” 세네갈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인사말이다. ‘안녕하세요.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답례의 말은 “말리쿰 살람”이다. 일찍이 식민지 역사와 내전의 아픔을 겪은 아프리카 서쪽 끝나라 세네갈에도 따뜻한 안정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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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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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래 티베트 Tibet

노종상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티베트는 인류 문명의 젖줄로 불리는 중국 남서부 티베트 고원을 무대로 오랜 세월 동안 고유한 민족적, 문화적 전통을 구축해 온 지역으로, 현재는 중국에 합병되어 ‘시짱西藏자치구’로 남아 있다. 기원전 4세기경 형성된 토번 왕조로 역사에 등장한 티베트 민족은 몽골(원元)과 명明, 청淸 등 중국 왕조들과의 꾸준한 관계 속에서 티베트 불교 문화의 영향력을 신장시켜 왔으나,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독립 국가를 이루려는 티베트의 열망은 중국의 무력 점령에 의해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땐진 갸초)는 인도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비폭력 독립 운동을 주창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티베트의 독립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비록 독립 국가는 아니지만,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조화의 땅으로 알려진 티베트의 역사와 전통을 살펴보는 것은 세계의 문화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 데 일조가 될 것으로 본다. 이제 티베트의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러 가 보자.




1. 신비와 조화의 땅, 티베트


“하늘의 한 가운데 땅의 중심, 세계의 심장, 히말라야 산맥은 모든 강의 원류이고, 산은 높고 땅은 깨끗하다. 사람은 선을 행해야 함을 알고 심성은 영특하고 용감하며 풍속은 순수하고 선량하다.”

이 말은 『돈황고장문문헌敦煌古藏文文獻』의 일부분이다. 1천여 년 전에 티베트 민족의 조상들이 티베트 고원과, 거기에 살고 있는 자신들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다. 한 세기가 지났으므로 무엇인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티베트는 천 년 전에 기록한 문자 그대로다. 그렇다고 해도, 미개未開라거나 야만野蠻 따위와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면 또한 오산이다. 그것은 타자와 나를 구분해 놓고, 현대 문명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타자를 보려고 하는 타락된 자들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티베트Tibet, 티베트. 
우리는 티베트로 간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티베트는 불가사의不可思議와 신비로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땅이다.

티베트, 떠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티베트Tibet를 탐방하려고 할 때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탐방하려고 하는 티베트는 어떤 티베트를 가리키는가? 티베트 망명 정부로 대표되는 티베트를 말하는가? 민족적·문화적·역사적·지리적인 위치로서의 티베트인가? 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당장에 대답을 구하지 않는다. 각 입장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티베트, 이 정도를 기억하고 탐방 길에 나선다. 

티베트의 지리적 위치는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다. 히말라야Himalayas 산맥의 북측, 쿤룬 산맥의 남측에 옆으로 누운 산악지대 티베트 고원을 티베트라고 한다.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의미에서 프랑스의 7배 정도인 380만㎢의 면적이다. 한반도의 여섯 배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국토의 대부분은 식물 한계선인 해발 4,000m를 넘는 곳에 위치한다. 

오늘날 티베트의 주 영역은 중국의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티베트자치구)에 편입돼 있다. 티베트의 동쪽은 다쉐大雪 산맥으로 중국 본토와 구분된다. 서쪽은 카라코람Karakoram 산맥과 접하고 있다. 이 중 히말라야 산맥을 따른 남쪽과 그 북동으로 뻗친 연장선상에서 남북으로 달리는 계곡으로 중국 칭하이靑海 성省 남쪽과 쓰촨四川 성 서쪽 지역에 사는 민족이 바로 티베트인이다. 

인구는 6백만 명이 조금 넘는다. 중국 인구의 0.46%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티베트를 정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티베트 국경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8세기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둔황敦煌과 윈난雲南 성까지 이르렀다. 라다크는 물론 인도 북부와 네팔의 여러 지역까지 티베트 영토였다. 1959년 수립된 티베트 망명 정부의 입장에서 티베트는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총체로서의 ‘티베트’를 일컫는다. 이때 티베트는 ‘뵈 쵤카 숨’이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우창·캄·암도 등 3개 지역의 티베트라는 뜻이다. 

‘티베트’라는 용어 그리고 ‘시짱西藏’, ‘토번吐蕃’

현재 중국에서는 티베트를 ‘시짱西藏’이라고 한다. 티베트 민족을 ‘장족藏族’이라고 부른다. ‘시짱’이라는 명칭은 중국 청나라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시西’는 티베트 지역이 중국 대륙의 서쪽에 위치한다는 뜻이고, ‘장藏’은 티베트 ‘위짱衛藏’의 줄임말이다. 청나라 강희제姜熙齊 후기에 ‘서정’이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건륭제乾隆帝 이후에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장’은 위짱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그리고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면 토번吐蕃, 서번西蕃, 번족蕃族이라는 표현 대신 ‘장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어 이것이 티베트 민족의 명칭이 되었다. 티베트인은 자기의 민족을 ‘푀蕃’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은 고대 티베트 제국을 토번吐蕃(혹은 투베트, 투보트)라고 불렀다. 14세기경까지는 토번으로 통칭되었다. 고대 튀르크 및 소그드어로 기록된 문헌에는 이지역을 튀퓟Tüpüt으로 불렀다. 학계에서는 이 명칭이 티베트 북부 지역을 나타내는 티베트어 ‘tu phod’나 ‘stod pod’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발음이 아랍 세계로 전해졌다. 이후 영어권에서 Thibet이라고 불리다가 오늘날 영문 명칭인 Tibet으로 정착됐다. 오늘날 중국 외에서는 ‘시짱’보다는 ‘티베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체로 티베트, 간혹 한역인 ‘토번’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류 문명의 젖줄, 티베트 고원

1억 년 전, 티베트 지역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오늘날 티베트 고원에 남아 있는 수많은 염호鹽湖가 까마득히 잊힌 기억을 되살려 준다. 현대의 지질학자들은 그 바다를 그리스 여신의 이름을 가져와 테티스Tethys 해라고 이름 붙였다. 약 4천만 년 전 인도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이 부딪치면서 히말라야 조산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수천 년에 걸친 지각 변동의 결과 테티스 해 한복판에서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올랐다. 이때 융기된 지각이 오늘날의 티베트 고원이다. 

2,500㎞에 이르는 티베트 고원의 남쪽은 히말라야 산맥과 맞닿아 있다. 히말라야 산맥은 티베트 고원과 인도 아대륙印度亞大陸 사이를 가르며 카라코람 산맥에서 미얀마 북부까지 펼쳐져 있다. 티베트 고원 서쪽으로는 히말라야와 카라코람 산맥이 교차한다. 동쪽으로는 암매 마친, 마얀 카라, 미낙 콩가와 민산 산괴로 이어진다. 북서쪽과 북쪽에는 쿤룬 산맥과 차이다무 분지가 놓여 있어 티베트 고원을 중앙아시아와 분리한다. 티베트 고원은 해발 6,000m 이상의 여러 산맥들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트랜스 히말라야 산맥과 니엔첸탕글라 산맥이 대표적이다. 

티베트 고원은 아시아 대륙을 거미줄처럼 흐르는 주요 강의 어머니다. 황허黃河 강, 양쯔揚子 강을 비롯하여 메콩Mekong 강, 이라와디Irrawaddy 강, 살윈Salween 강,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 인더스Indus 강, 수틀레지Sutlej 강이 티베트 고원이 낳은 자식들이다. 이들 강물은 아라비아 해, 인도양, 그리고 서해를 지나 태평양으로 흘러간다.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 두 문명―황허문명과 인더스 문명이 바로 이곳 티베트 고원에 젖줄을 대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 문명의 절반이 이곳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2.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에서 만난 창세 신화

티베트 고원은 수백만 년 전에 형성된 비교적 젊은 지형으로 알려졌다. 티베트 민족은 1만 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티베트 고원은 티베트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다. 티베트의 동부, 남부, 북부 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최소 1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이미 이 지역에 인류의 활동이 있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비교적 많은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참도의 카룹, 라싸의 곡공曲貢 유적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유적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티베트 고원에 인류가 생활하며 살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티베트 민족은 다른 지방에서 이주한 민족이 아니라 바로 티베트 고원에서 형성된 민족이다. 

티베트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창세 신화에 따르면 티베트 민족은 원숭이와 나찰녀羅刹女의 후예다. 현지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나찰녀는 마녀나 요괴가 아니라 바위 동굴에 거주했던 유인원類人猿이었다. 그 유인원과 원숭이가 교합하여 자식을 낳아 인간이 되었다는 내용은 다윈의 진화론과도 상통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원숭이 후예 티베트 민족, 역사 시대로 가다

기원전 3세기 전후, 티베트 고원에는 세 개의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산난 지역의 얄릉雅隆 계곡에 자리 잡은 얄릉 왕국, 중부 지역의 숨파 여인국, 그리고 서부 지역의 장중 왕국이 그것이다. 얄릉 왕국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4세기, 얄릉 계곡에서 티베트 민족의 고유 신앙인 뵌뽀本敎를 신앙하는 12명의 유목민이 방목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들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유목민과 소년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소년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유목민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소년을 어깨에 태워 부락으로 데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년을 우두머리로 삼고 네치짼뽀聶赤贊普라고 불렀다. ‘목덜미에 앉아 있던 왕’이라는 뜻이다. 네치짼뽀는 티베트 최초의 왕이다. 네치짼뽀 왕에서 시작하는 이 왕조를 토번 왕조吐蕃王朝라고 한다. 토번(투푀·토번)은 티베트Tibet土伯特의 어원이 되었다. 뵌뽀 경전은 네치짼뽀를 색계色界의 13대 광명천자光明天子가 속세에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신화로 묘사되고 있으나 네치짼뽀는 실존 인물이다. 티베트 역사 기록에 따르면 네치짼뽀는 티베트 동부의 보미 지역 출신이다. 그는 눈과 피부가 녹색을 띠었고 손발에 물갈퀴 같은 것이 달렸고 힘이 장사였다. 고향 사람들은 그를 악귀의 화신이라고 의심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얄릉으로 와서 토번 최초의 왕이 된 것이다. 네치짼뽀는 얄릉 부족을 통일하고 윰부라캉궁雍布拉康을 세웠다. 티베트인이 세운 최초의 궁전이다. 이곳에서 토번 왕조가 시작되어 32대까지 이어졌다.

제1대 왕 니치짼뽀로부터 제7대 왕 십치짼뽀塞赤贊普까지 토번 왕국의 임금은 뵌뽀 무당의 지배를 받았다. 토번 왕국이 일종의 신교神敎국가였다는 얘기다. 이 시기의 왕들이 남긴 업적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기록이 전한다. 일곱 왕은 모두 임종 직전에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무덤조차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군주 송짼감뽀松贊干布

7세기 초, 송짼감뽀松贊干布(617∼650)는 다른 십여 개 지역을 병합하고 티베트 고원의 통일 정권인 토번 왕조를 건설했다. 이때가 티베트 역사상 가장 강성한 시기다. 이 시기를 이끌었던 송짼감뽀야말로 티베트 민족의 영웅이다. 송짼감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자 조손삼대법왕祖孫三代法王의 으뜸으로 칭송되고 있다. 

송짼감뽀는 푸갈 세계世系의 제32대 짼뽀贊普(군주)로 라싸 동쪽 마이조쿵가르에서 태어났다. 당시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부왕인 남리송짼은 위기를 맞았다. 안으로는 신하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밖으로는 닥포, 공포, 장중, 숨파 등지에서 침공을 해 왔다. 마침내 남리송짼은 신하들에 의해 독살당하고 말았다. 629년 13살이던 왕자 송짼감뽀가 왕위에 올랐다. 영민했던 어린 왕은 정치적 수완을 한껏 발휘했다. 그는 암살자를 보내 부왕을 독살한 숨파 지역 냥망보쩨娘芒布杰를 제거하였다. 이어서 군대를 동원해 망보쩨 마을을 병합시켰다. 숨파 지역뿐만 아니라 티베트 전 지역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633년 송짼감뽀는 수도를 얄룽장뽀강 북쪽에 위치한 라싸로 옮겼다. 중앙의 마르포리 산 위에 아름다운 궁궐도 세웠다. 이때부터 라싸는 티베트 전 지역을 통치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송짼감뽀는 이어서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다. 주요 호족들을 중앙 관리로 임명하고 등급을 정했다. 부왕 남리뢴짼까지만 해도 임금과 부족장들의 회맹 관계에 불과하였던 것이 비로소 왕과 신하 관계로 바뀐 것이다. 이어서 군사 제도를 개편했다. 전국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고 한 구역에 한 군단을 설치했다. 전 인구의 군사화였다. 당시 한 구역의 인구가 4천여 호였다. 왕의 친위대는 1천 호였다. 토번 왕국의 백성이라면 평민이 농민이거나 유목민이면서 동시에 군인이었다. 법률도 제정했다. 지금까지의 왕들은 뵌뽀를 통해 통치했다. 법률 제정에 의해 토번은 왕이 직접 통치하게 된 것이다. 

토번 왕국의 왕비가 된 당나라 문성공주

634년, 송짼감뽀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2년 뒤에 다시 사신을 보내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청혼했다. 당나라 공주를 아내로 요구한 것이다. 이세민은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土谷渾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638년 송짼감뽀는 군사를 일으켜서 북부 티베트 지역인 토욕혼을 정벌했다. 이어 여강麗江 등지를 점령했다. 같은 해 8월 송짼감뽀는 친히 20만 군사를 이끌고 당시 토번과 당나라의 국경 지역이던 송주松州(현재의 중국 쓰촨 성 송번松蕃)를 점령했다. 송짼감뽀의 군사력에 놀란 이세민은 마침내 구혼을 받아들였다. 

당시 송짼감뽀의 왕비는 넷이 있었다. 첫째 왕비는 토번 출신이었다. 둘째와 셋째는 병합을 계획하고 있던 이웃의 작은 왕국 출신이었다. 송짼감뽀가 일종의 혼인 정책을 썼다는 얘기다. 넷째 왕비는 네팔 출신 브리쿠티bhrikuti(赤尊)였다. 브리쿠티는 ‘공주’라는 뜻이다. 브리쿠티 왕비는 불교 신자였다. 그녀는 토번으로 올 때 석가 8세 등신불을 가져왔다. 그녀는 송짼감뽀에게 석가 불상을 모실 사원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송짼감뽀는 작은 사원을 지어 주었다. 지금도 티베트 불교의 성지로 남아있는 조캉 사원大昭寺이 바로 그 사원이다. 

641년 당나라 문성공주文成公主가 송짼감뽀의 왕비가 되기 위해 토번 왕국에 왔다. 그녀는 토번에 오면서 천문역법·음양참위·의학 등의 서적들을 가져왔고 각종 기술자들도 데려왔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녀는 석가 12세 불상을 가져왔다. 왕비가 된 그녀는 남편 송짼감뽀에게 석가 불상을 모실 사원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송짼감뽀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 사원이 조캉 사원 북쪽에 건립된 라모체 사원小昭寺이다. 이 사원 역시 오늘날에도 티베트 불교의 성지 중 하나다. 오늘날 불교를 빼놓고 티베트를 얘기할 수는 없다. 송짼감뽀가 두 왕비의 요청에 의해 세운 조캉 사원과 라모체 사원은 티베트 고원에서 불교가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710년 조캉 사원과 라모체 사원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 불상은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송짼감뽀는 650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던가. 티베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자리매김되는 송짼감뽀의 뒤는 손자인 망송망짼芒松芒贊(재위 650∼676)이 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한 살이었다. 재상 까르통짼이 대신 국정을 관장했다. 이로부터 약 50년 동안 토번 왕조는 통짼 가문에 의해 지배되었다. 토번 왕국은 9세기 이후 마지막 왕인 랑데르마가 암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붕괴됐다. 

몽골(원元)의 통치와 티베트 불교

13세기, 몽골 제국의 등장은 티베트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티베트는 거의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다. 토착 종교 뵌뽀와 외래 종교인 불교 간의 대립, 불교 내의 파벌 간 다툼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등으로 이미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미 다른 민족에게 빼앗겼다. 1240년 몽골 제국은 장군 도르타를 파견하여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몽골 군사는 파죽지세로 밀려들어 왔다. 티베트 각 지역의 호족들은 앞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당시 몽골은 항복한 뒤에 공물을 바치는 세력들에게는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회유책을 썼다. 물론 저항하는 세력들에게는 강경 진압책을 구사했다. 

티베트를 제압한 뒤 몽골은 종교(불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선택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많은 불교 종파들이 횡행했다. 몽골 치하에서 각 종파의 지도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종교적 지배권을 잡기 위한 경쟁 관계를 유지했다. 달라이 라마 5세 롭상 갸초Lobsang Gyatso(1617~1682) 때 티베트는 다시 사캬Sakya파 티베트 불교로 통일된다. 몽골은 불교 지도자를 통해 티베트를 지배했지만, 반대로 티베트 종교에 의해 몽골의 정신계를 지배당하고 있었다.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는 깊이 뿌리를 내렸다. 

원元나라 최후의 황제인 순제順帝(1320∼1370) 시기에 티베트 정권은 사캬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강력한 몽골 제국(원元)을 등에 업고 티베트를 지배해 온 사캬파는 이미 부패해 있었다. 이때 팍모주빠의 라뵌喇本(한 지방의 정치와 종교 권력을 모두 갖고 있는 호족) 창춥개짼絳曲堅贊(1302∼1364)이 샤카 정권에 대한 타도의 깃발을 올렸다. 1354년 창춥개짼이 이끄는 팍모주빠 군대가 마침내 사캬 사원에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사캬 정권이 무너졌다. 각 지역의 만호장이나 개뽀結布(토번 왕국 멸망 뒤 군벌들이 각 지방에서 기반을 잡고 스스로 ‘개뽀’라고 칭했다)들도 창춥개짼을 티베트 최고 지도자로 인정했다. 

원나라 순제는 창춥개짼 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나라 정부에서는 창춥개짼을 ‘시뚜司徒(정치·종교 권력을 모두 지배하는 수장)’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130년 동안 티베트의 국가 원수의 호칭은 ‘시뚜’였다. 역사는 당시의 티베트 정부를 ‘팍모주빠 정권’이라고 기록하였다. 창춥개짼은 위대한 개혁군주였다. 티베트 역사에서 그는 송짼감뽀에 비교되는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티베트 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종카빠

명明나라와 티베트 관계도 몽골 제국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408년 명 태종明太宗(1360∼1424)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 종카빠宗喀巴(1357∼1419)를 북경으로 초청했다. 종카빠는 티베트 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1357년 북부 티베트 종카宗喀(오늘날 칭하이靑海 성 서녕西寧)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몽골 칸이 임명한 지방관 다루가치達魯花赤였다. 출가한 뒤에 종카빠는 각 분야의 뛰어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대·소승의 불교 교리를 터득해 나갔다. 21세가 된 1377년, 그는 이미 뛰어난 학자로서 다른 학인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8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모두 다 기념비적인 업적이 되었다. 특히 『람림 -깨달음에 이르는 길菩提道次諸廣論』은 티베트 불교 연구자에게는 첫 번째 손에 꼽히는 필독서이다. 종카빠는 원래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까담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까귀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티베트 불교사에 따르면 인도 불교의 마지막 법맥은 사캬에게 전해졌고 사캬의 법맥은 까귀에게 전해졌다. 종카빠가 까귀 계사戒師에게 계를 받음으로써 그 법맥은 까담에게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명 태종의 초청을 받았으나 종카빠는 거절했다. 티베트 국민들은 그의 결정에 감동을 받았다. 다른 불교 종파의 지도자들도 그를 존경했다. 1409년 종카빠는 라싸 동쪽 족卓이라는 산에 까땐 사원囑丹寺을 세웠다. 1416년 종카빠의 제자 참양자시빼땐降央扎西貝典이 라싸 서부 지역에 째뿡 사원哲蛙寺을 세웠다. 3년 뒤에는 종카빠의 제자 사캬예세釋迦益西가 라싸 북부 지역에 세라 사원色拉寺를 새웠다. 이 사원들은 현존하는 티베트 3대 사원이 되었다. 이후 티베트 국민들은 종카빠의 제자들을 ‘겔룩格魯’이라고 불렀다. 계율에 밝다는 뜻이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는 90%가 겔룩파다. 까담 종파의 시조는 아티샤였지만, 겔룩 종파의 시조는 종카빠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는 팍모주빠 5대 시뚜 드락파 갈짼(1374∼1432)을 국가의 종교 수령인 천화왕闡化王으로 책봉했다. 명나라는 260년 동안 중국 역사에 존속했다. 티베트의 팍두르 정권도 명나라와 운명을 같이했다. 

달라이 라마의 탄생

청淸나라의 황제는 티베트 정치·종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Dalai Lama達賴喇嘛를 황제의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상징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달라이 라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생제도還生制度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티베트에서 처음 이 제도를 만든 사람은 제2대 까마빠(까담의 스승)인 까마박시噶瑪拔希(1204∼1283)였다. ‘튀쿠孜古’라고 하는 티베트어는 스스로 환생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라마(스승)를 가리킨다. 중국어로는 활불活佛로 번역한다.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리빙 붓다Living Buddha’라고 번역한다. 『티베트 비밀역사』에 따르면 중국어 번역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튀쿠는 몸이 변했다는 뜻으로 부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는 살아있는 부처를 인정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부처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다. 튀쿠의 정확한 번역은 ‘화신nirmāa-kāya化身’, 일종의 변화신變化身이라 할 수 있다. ‘환생’은 중국어로 ‘전세轉世’를 가리킨다. 방금 환생한 아기는 영특한 동자이므로 ‘영동靈童’이라고 한다. 따라서 환생한 아이를 ‘전세영동轉世靈童’이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의 특징 중 하나인 전세영동에 대한 이야기는 각종 영화와 소설 등에서 묘사되어 알려지고 있다. 

13세기 종카파의 제자인 겔룩파 제2대 까마박시가 창시한 전세 제도는 티베트 불교의 각 교파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었다. 이후 겔룩파 최고의 활불 중 한 명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 최고의 활불 중 한 명으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제1대 달라이 라마는 겐둔 드룹(1391∼1474), 2대 겐둔 갸초(1475∼1542), 3대 쇠남 갸초(1543∼1588)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이 쇠남 갸초 때부터였다. 

라싸 부근에서 태어난 쇠남 갸초는 3세에 겐둔 가문의 전세활불轉世活佛로 인정받았다. 1571년 투메트 몽골의 알탄 칸(1507∼1582)이 그의 명성을 듣고 초청했다. 1578년 5월, 청하이호 부근 찹차恰卜怡에서 회동했다. 쇠남 갸초는 노란 모자에 법복法服을 입었고 알탄 칸은 몽골식 흰색 정장 차림이었다.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다. 회담장인 몽골식 천막에서 나온 알탄 칸이 「찹차회담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는 “차하르Chakhar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세력이 강성하여 중국과 티베트를 정복했으며, 사캬와 법주法主·시주施主 관계를 수립한 뒤 불교를 넓게 전파했다”고 그동안의 몽골과 티베트 관계를 회상한 뒤에, “백의몽골인白衣蒙古人은 다음과 같은 법을 지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내용은 티베트 불교를 신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알탄 칸은 “오늘부터 우리는 티베트가 하는 그대로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 내용을 보아도 몽골과 티베트는 단순한 정치적 식민 관계가 아니라 서로 믿고 의지하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세계 정복 민족으로서 정쟁과 살인, 약탈, 겁탈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몽골인들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으로 점차 개과천선해 나갔다. 

행사의 말미에 두 정상은 존호尊號를 주고받았다. 알탄 칸이 쇠남 갸초에게 준 존호는 ‘와치르다라 달라이 라마瓦齊爾達喇達賴喇嘛’였다. ‘와치르다라’는 금강살타金剛薩埵Vajrasttva, 신성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달라이Dalai’는 갸초Gyatso(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큰 바다(大海)’를 뜻하고, ‘라마Lama’는 티베트어로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달라이 라마’는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티베트 불교 하면 상징적으로 떠올리는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이때 이후로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은 그 법통을 잇는 모든 화신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쇠남 가쵸는 알탄 칸에게 ‘차크라와르 세첸 칸咱克喇瓦爾第徹辰汗’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차크라와르’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세첸’은 현명하다는 뜻이다. 티베트 불교와 정복 국가 몽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였다. 제3대 달라이 라마 쇠남 갸초는 이후 10년 동안 몽골 포교 활동에 진력했다.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

1588년 3월 3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서 입적했다. 그를 이어 4대 달라이 라마가 된 인물은 용텐 갸초(1589∼1616)였다. 그는 알탄 칸의 증손자다. 1603년 제4대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 도착했다. 전세영동으로 인정되어 달라이 라마가 되었으므로 계를 받아야 한다. 당시 겔룩파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계를 줄 수 있는 고승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그가 바로 티베트에서 또 하나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빤쩬 라마Panchen Lama였다. 제4대 달라이 라마가 라싸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빤쩬 라마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빤쩬 라마는 4대 달라이 라마의 머리를 깎고 계를 주었다. 이때부터 4백 년 동안 달라이 라마가 아직 어리면 빤쩬 라마가 스승이 되어 주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616년 28세의 4대 달라이 라마는 드레풍 사원에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5대 달라이 라마가 된 인물은 롭상 갸초였다. 『1만 년의 이야기 티베트』에 따르면 토번의 모든 공적을 송짼감뽀에게 돌릴 수 있듯이 오늘날 겔룩파 정교 제도 수립의 공은 모두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에게 돌릴 수 있다. 그는 겔룩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 초기부터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다. 1642년 제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국왕에 취임했다. 당시 26세였다. 제4대 달라이 라마까지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한 종파의 지도자였다. 국왕으로 등극한 5대 달라이 라마는 세속과 종교 권력을 움켜쥔 절대 군주가 되었다. 1649년 5대 달라이 라마는 7세기 토번 왕조 시대에 건설되었다가 왕조 몰락과 함께 황폐해진 포탈라Potala궁(布達拉宮)으로 수도를 옮기고 30년에 걸쳐 궁전을 재건하였다. 

중원을 평정한 청나라 정부가 5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만주인은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티베트가 법주, 몽골이 시주’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아가 몽골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신으로 추앙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원을 통일한 청나라 정부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싶어 했다. 티베트 역시 중원의 판도를 읽고 있었다. 5대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 정부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제4대 빤쩬 라마 역시 같은 시기에 초청장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1652년 12월 북경에서 티베트 국왕 달라이 라마가 청나라 황제를 만났다. 당시 청나라 황제는 15살의 제3대 순치제였다. 청나라 정부는 몽골 시대 이상으로 티베트 불교를 대우했다. 달라이 라마는 두 달 동안 북경에 머물렀다. 그가 황궁을 방문할 때는 스승으로서 황제의 옆에 앉았다. 당시 중국 문화권의 국가 중에서는 황제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달라이 라마였다. 이후 티베트와 청은 과거 원나라 시기와 같이 ‘법주法主와 시주施主’ 관계를 유지했다. 

티베트·중국 전쟁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였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13세 툽텐 갸초였다.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고 판단한 툽텐 갸초는 즉시 행동으로 나섰다.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 국가 건설에 나섰다. 같은 해 음력 10월, 라싸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1천 명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이듬해(1913) 1월 중국군과 중국 교민들은 모두 라싸를 떠났다. 달라이 라마 13세가 라싸로 귀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귀국 즉시 달라이 라마는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났다.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했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곧이어 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 티베트·중국 전쟁이다. 이 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1918년 제2차 티베트·중국 전쟁이 일어났다. 티베트군은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참도를 포위 공격하여 3개월 만에 점령했다. 티베트군은 기세를 몰아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중국 쓰촨 성으로 진격했다. 양국은 1918년 12월 영국의 중재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금사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 간에 무력 충돌이 잦았다. 1933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갑자기 입적했다. 이듬해 제3차 티베트·중국 전쟁이 일어났다. 1939년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티베트 정부와 종전 협정을 체결했고 금사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전세영동을 찾다

1935년, 제13대 달라이 라마의 전세영동轉世靈童, 즉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비밀순방단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해 가을 비밀순방단이 도착한 곳은 북부 티베트 서녕 아래 탁최達澤라는 마을이었다. 20가구 남짓 사는 작은 마을이다. 그들이 찾은 곳은 탁최 마을의 최종체링曲炯才仁·쇠남초索南措(또는 데끼쩨링德吉才仁) 부부의 집이다. 비밀순방단은 부부의 넷째 아들 라모된줍拉莫頓珠을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확정했다. 바로 이 아이가 현재 전 세계인이 ‘달라이 라마’로 부르고 있는 인물이다. 법명은 땐진 갸초丹增嘉措. 

1940년 2월 22일,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라싸의 포탈라 궁에서 정식으로 등극했다. 중일전쟁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즉위식이 끝난 뒤에도 중국 사절단은 철수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1948년 티베트 정부가 강제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강압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였다. 1949년 10월 1일 중원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당시 청해에 있던 10대 빤쩬 라마 오이키 칼쩬은 중국 정부의 수립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티베트를 향한 발톱을 숨기지 않았다. 

1950년, 한반도에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다섯 달 뒤, 중국인민군 제18군(총사령관 장국화張國華, 정치위원 담관삼譚冠三)은 티베트와의 국경 금사강을 넘었다. 며칠 뒤 중국 정부는 참도에서 티베트군 5천7백 명을 전멸시켰다고 발표했다. 이듬해(1950) 5월, 중남해中南海에서 중국과 티베트 대표단은 17조협약十七條協約이라 불리는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티베트평화해방협약中央人民政府和 西藏地方政府關於和平解放西藏辨法的協議」을 체결했다. 현 중국 공산당 정부와 티베트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그해 9월 9월 중국인민군 3천 명이 라싸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티베트에 겔룩 시대가 끝나고 중공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달라이 라마, 히말라야를 넘다

티베트는 신앙의, 종교의, 불교의 나라다.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중국과 티베트가 과거 역사에서 보여 주었던 그런 관계일 수는 없었다. 1954년 달라이 라마와 빤쩬 라마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나타났다.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이들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은 당시 청년 달라이 라마가 종교에 대해 안심할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마오쩌둥에게 인간적 매력마저 느끼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달라이 라마의 기쁨은 불과 몇 시간도 가지 않았다. 마지막 회견에서 마오쩌둥은 종교는 독毒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듬해(1955) 귀국길에서 달라이 라마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미 조국 티베트는 없고 중국 공산당 치하의 현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티베트에는 이미 공산주의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신성한 사원은 비어 갔다. 1965년 티베트 자치구가 탄생했다. 자치구 최고지도자는 달라이 라마였으나 이미 이름뿐인 자리였다. 

한때는 중원 대륙을 호령하였던 티베트인들이다. 그들은 쉽게 지배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1955년 공산주의 개혁의 강요에 지친 암도와 캄의 티베트인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승려들조차 무기를 들었다. 곳곳에서 게릴라전이 일어났다. 1956년 베이징은 캄에 15만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티베트 저항군은 수없이 죽어 갔다. 티베트인들도 항거의 깃발을 꺾지 않았다. 중부 티베트에서 전면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1958년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긴박해졌다. 중국은 “티베트를 반동(달라이 라마와 그 추종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아니, 엄포가 아니라 결행이었다. 1958년 3월 16일과 17일 사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달라이 라마는 측근과 캄빠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밤중을 이용해 몸을 피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히말라야 너머 인도였다. 네루 인도 수상은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달라이 라마 일행을 정치적 망명자로서 보호해 주었다. 

달라이 라마가 라싸를 탈출한 지 3일 뒤인 20일부터 22일까지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불바다가 되었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죽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에 따르면 2천 명에서 1만 명에 이른다고 썼다. 4천 명이 체포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 이후 많은 티베트인이 정치적 동기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적어도 8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이 달라이 라마를 따라 인도로 혹은 네팔로 떠났다. 당장에 갈 곳이 없는 티베트인들은 유엔 난민기구와 인도 정부에서 세운 난민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티베트인들은 갑작스럽게 바뀐 인도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결핵과 이질, 풍토병 등 질병으로 죽어갔다. 달라이 라마는 동포들이 겪는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기자 회견을 자청하여 강압에 의해 체결된 「17개조 협의안」은 무효임을 선언했다. 유엔에서도 중국의 티베트 정책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인도 정부는 달라이 라마에게 다람살라 북쪽 맥그로드 간즈를 제공해 주었다. 1960년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 주州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 정부亡命政府가 수립되었다.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티베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자의든 타의든 티베트인들도 섞여 있었던 홍위병紅衛兵은 소위 ‘구체제’의 유적들을 거침없이 파괴했다. 홍위병에게 ‘반동분자와 미신’의 표적이 된 것은 각종 사원을 비롯하여 성곽, 서책, 조각상, 그림, 탑 등이었다. 6천여 곳에 달했던 티베트의 사원과 사찰들은 1976년 이후에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까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물·유적들은 뜻있는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걸고 감추어 두었던 유물과 곳간 등으로 위장해 숨겼던 사찰, 사원들이다. 

1975년부터 중국 정부는 티베트 중부에 중국 한족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다. 중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한족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방정책은 티베트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티베트에 대한 특별경제조치가 취해졌다. 티베트인에게도 어느 한도 안에서 자율결정권이 주어졌다. 많은 죄수들이 풀려났고 티베트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1982년 중국 헌법 제35조에 의해 국가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며, 티베트에 대한 외국인 출입이 허가되었다. 1989년 달라이 라마는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인권 및 세계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수상 당시 행한 연설을 통해 티베트의 국가적, 문화적 동질성을 파괴하려는 중국의 억압 정책들을 지적하고 이에 맞서는 티베트의 투쟁은 정당하며 폭력은 더 큰 폭력과 고통을 가져오므로 비폭력 독립 운동을 지속해 나갈 것임을 주창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2008년 3월, 라싸에서는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항쟁이 있었다. 1959년 시작된 티베트 독립 운동(티베트 봉기)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 600여 명이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를 일으켰고, 이것이 확대되어 티베트 독립 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 사태로 번졌다. 이 항쟁은 잠시 잠잠했던 티베트 독립 운동에 불을 붙였다.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에 나섰다. 국제 여론이 들끓었고 유럽을 중심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압박이나 국제 여론에 고개를 숙일 중국이 아니었다. 개방정책 이후 중국은 세계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으로 몸집을 부풀린 상태다. 오늘날 티베트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서는 찬반으로 엇갈린다. 평가하는 이에 따라서 달라이 라마 14세가 주창하는 비폭력 독립 운동에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 또한 쉽게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티베트 고원을 향해 귀를 열어 준 이들은 듣고 있다. 히말라야에 떠도는 망자의 노랫소리를.

3. 티베트의 정치와 경제


인민정부와 망명정부

티베트 자치구는 중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지역 공산당 위원회의 서기와 주석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고 있다. 시짱西藏자치구 인민정부의 청사는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Lhasa에 소재한다. 이 라싸와 르카쩌日喀则Rìkāzé(시가쩨Xigazê)는 중국 국무원이 지정하는 국가역사문화명성(1차, 1982)으로 지정되어 있다.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된 이후 민족적, 문화적인 억압이 지속되면서 중국의 통치에 반기를 든 티베트인들의 봉기와 유혈 사태가 계속 이어졌고, 고국을 떠나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국외인 인도에서 ‘망명 정부’의 형식으로 집결하였다. 따라서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구 정부로서 존립하는 티베트와 독립 국가를 지향하는 국외 망명 정부로서의 티베트가 공존하고 있다. 

티베트 자치구의 행정구역

시짱 짱족 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 다시 말하면 티베트 자치구는 1965년에 성립되었다. 이 지역을 일반적으로 위짱Ü-Tsang, dbus gtsang 지방이라고 부른다. 중국 서남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시짱 짱족 자치구 혹은 거기에 사는 토착 민족인 티베트족을 일컫는 말이다. 범위를 확장하여 티베트 고원 전체나 티베트인들의 거주지 전체를 일컫기도 한다. 

중국의 티베트 자치 구역은 2개 지구地區와 5개 지급시地級市로 이루어져 있다. ‘지급시’는 성省과 현縣 사이의 행정 구역으로 시市가 시市 및 각종 유형의 현縣급 행정구를 관할하고 있는 체제이다. 티베트 내에서는 위짱 지방과 캄 지방의 일부(참도)만을 포함하고 있으나 넓은 의미의 티베트는 칭하이성 대부분 지역과 간쑤甘肅 성, 쓰촨四川 성, 윈난雲南 성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티베트 자치구 안에서 공식적인 통용어는 티베트어와 중국어다. 

지형적으로 티베트 자치구는 굳이 비유하자면 거대한 물고기 형상을 닮았다. 무슨 고기가 알맞을까. 가물치나 쏘가리, 아니면 꺽지같이 생겼다. 티베트 자치구의 서쪽, 그러니까 물고기 머리통(아가미 위) 부분에는 아리阿里Ālǐ 지구(응아리Ngari 지구)가 위치한다. 면적은 296,822㎢이고 평균 고도가 5천m에 이른다. 대지는 거의 황무지에 가깝다. 나무도 자라지 않는 지역이다. 인구는 95,465명으로 민족 구성 분포를 보면 티베트인 91.7%, 한족 7.7%이다. 

중북부 지역, 물고기의 뱃살 윗부분에서 등지느러미 부분은 나취那曲Nàqū 지구(낙추Nagqu 지구)이다. 면적은 391,816km², 인구는 462,382명이다. 티베트인 96.8%, 한족 2.8%이다. 동북쪽, 물고기 꼬리 윗부분에는 창두昌都Chāngdū 시(참도Qamdo 시)가 위치한다. 면적은 108,872㎢이다. 인구는 657,505명으로 티베트인 95.5%, 한족 3.4%이다. 중남부 지역, 물고기 뱃살 윗부분은 르카쩌日喀则Rìkāzé 시(시가쩨Xigazê 시)가 위치한다. 면적은 182,066㎢이다. 인구는 703,292명으로 티베트인 95.5%, 한족 3.7%이다. 

약간 동쪽으로 기운 중부 지역은 좀 애매하다. 티베트 자치구의 바깥 지역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내륙 지방으로 이 지역은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인 라싸Lhasa(‘하싸’라고도 발음. 중국어로는 라싸拉萨Lāsà) 시가 위치하고 있다. 라싸는 해발 3,700m에 이르지만 티베트 전체 면적을 두고 볼 때 낮은 지역에 속한다. 라싸의 면적은 티베트 자치구 중에서 가장 적은 29,538㎢, 인구는 559,423명이다. 티베트인 76.7%, 한족 21.6%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싸는 티베트의 중심지다. 정신적 고향이며 문화의 중심지다.

라싸 시 아래쪽, 물고기의 뱃살 뒷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은 산난山南Shānnán 시(로카Lhokha 시)이다. 면적 79,287㎢에 인구는 328,990명이다. 티베트인 93.7%, 한족 5.6%으로 구성되어 있다. 티베트 자치구의 동남쪽, 물고기의 꼬리 부분 아래쪽 지역은 린즈林芝Línzhī 시(닝치Nyingchi 시)이다. 면적은 113,964㎢, 인구는 195,109명이며, 티베트인 74.1%, 한족 17.3%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와 같이 2개 지구와 5개 지급시로 이루어져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현 티베트 자치구 지역은 티베트 내에서는 위짱 지방과 캄 지방의 일부(참도)만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넓은 의미의 티베트는 칭하이성 대부분 지역과 간쑤 성, 쓰촨 성, 윈난 성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티베트의 경제

2015년 티베트 자치구의 경제 생산 총액은 인민폐 1천억 위안을 웃돌아 23년째 연속하여 두 자리 수의 성장을 유지했다. 2015년 티베트의 고정자산 연간 투자액은 인민폐로 1,342억 위안에 달했고 대부 잔액은 2,100억 위안을 넘어섰다. 도시 주민 1인당 가처분 소득은 제11차 5개년 계획 실시 기간 종료 무렵보다 66.8% 증가한 25,457위안에 달했고, 농촌 주민 1인당 가처분 소득은 8,244위안에 달해 연속 13년째 두 자리 수 성장을 유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티베트족의 80%는 농목업에 종사하고 있어 빈곤한 지역이 많다. 대개는 말이나 소, 양 등의 목축업을 주업으로 하고 소량의 농사를 짓는 형태로 운영이 된다. 하지만 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수도 라싸나 시가쩨, 강체 등을 중심으로 관광업이 현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자치구 내의 농민이나 유목민은 모든 세금이 면제된다. 2000년부터는 중국 국무원의 서부 대개발 정책이 집행되면서 티베트 자치구에서 칭짱 철도나 도로의 건설 등이 이루어졌다. 2004년 티베트 자치구의 수출액은 전년 대비 6.9% 늘어난 13,008만 달러, 수입은 전년 대비 136% 증가한 9,345만 달러였다. 또 개인이 변경에서 실시하는 영세 무역도 전년 대비 31%가 증가한 2억 위안에 달했다고 보고되고 있다. 아울러 대량의 석유, 천연가스나 광물 자원의 존재도 확인되고 있다. 

4. 티베트의 종교와 신앙


고유의 신교 신앙 뵌뽀本敎

오늘날 외국인들에게 티베트는 불교와 달라이 라마의 나라로 쉽게 다가올 것이다. 불교 전래 이전에 티베트에는 고유 신앙인 신교神敎가 있었다. 이를 ‘뵌뽀本波(本敎)’라고 한다. 일종의 정령 신앙이고 샤머니즘이다. 티베트인 조상들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믿었다. 주술을 외우고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제사를 지냈다. 티베트 역사 곳곳에는 그들이 흑마술黑魔術을 쓴 흔적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티베트에는 뵌뽀 무당들이 굿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뵌뽀에서는 이 세상이 하늘·땅·지하 삼계三界가 있으며, 거기에는 각각의 신이 있다고 믿었다. 질병을 관장하는 용신龍神, 자연재해를 관장하는 땅의 신 등등. 뵌뽀는 교파 출현 시기에 따라 정령 숭배 신앙 뵌뽀, 융드롱(한자 ‘만卍’ 자를 지칭하는 티베트어) 뵌뽀, 신新 뵌뽀로 구분할 수 있다. 제6대 왕인 다크리 짼뽀 시기에 전장 지역에서 귀신과 교통한다는 무당이 스스로 교파를 만들었다. 이 시기의 뵌뽀는 원시적인 자연 숭배 단계였다. 융드롱 뵌뽀는 외지에서 온 신자들이 만든 교파였다. 이들은 신령을 대신하여 무당이 존재하고 특히 조상 숭배를 행한다는 점에서 정령 신앙 단계에서 발전한 신앙 형태를 하고 있었다. 신 뵌뽀는 7세기 불교 전래와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뵌뽀에서는 자체 경전을 제작, 보급했다. 대부분 불교 경전을 겉모습만 바꾸어 뵌뽀 경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뵌뽀 창시자는 셴랍 미우쩨로 알려졌다. 그는 뵌뽀 신자들에게 불교에서 석가모니와 같이 신성한 존재다. 그가 역사적 인물인지는 아직도 의심을 받고 있다. 뵌뽀 경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 삼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뵌뽀의 최고 신령을 스승으로 모시고 뵌뽀 교리를 공부했다. 공부를 끝낸 삼 형제는 셴라 오카르 신神(뵌뽀 최고의 신. ‘흰빛의 지혜의 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오른손에 갈고리를 들고 코끼리 위의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에게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3단계의 교리 과정을 수련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끝나면 불교의 부처에 해당하는 큰 스승이 된다고 했다. 삼 형제 중 첫째는 1단계 수련을 끝냈고 불교의 전세불前世佛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둘째는 2단계 수련을 끝내고 불교의 현세불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뵌뽀 창시자 셴랍 미우쩨이다. 셋째는 3단계 교리를 익혔다. 그는 미래를 관장하는 미래불이 되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셴랍 미우쩨의 수호신이다. 신은 셴랍 미우쩨로 하여금 장중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 기원전 5세기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온 셴랍 미우쩨는 뵌뽀를 창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장중 왕국과 토번에는 신교 형태의 다양한 뵌뽀가 있었다. 셴랍 미우쩨는 이러한 원시적 뵌뽀를 통일하여 융드릉 뵌뽀를 만들었다. 

티베트 불교는 ‘종파불교’

불교가 티베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였다. 중국의 불교 전래보다 600년이 늦고 한국의 불교 초전初傳(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보다도 약 300년이 늦었다. 티베트는 불교 발상지 인도·네팔과 인접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전래가 늦은 이유는 두 지역(티베트와 인도·네팔)을 가로막고 있는 히말라야의 설산 고봉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티베트의 나라 세움이 그만큼 늦어진 탓도 있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두 갈래 길이었다. 7세기 중엽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해진 중국계 불교와 인도·네팔계 불교가 그것이다. 중국 불교가 조금 앞서 전래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티베트인들은 늦게 전해진 인도 불교를 채용했다. 불교는 티베트에 도입된 이래 몇 차례에 걸친 탄압 운동도 있었으나 곧 뿌리를 내리게 된다. 

티베트 불교의 국교화를 이끈 왕은 제38대 임금 티송데쩬(742∼797)이다. 티베트 불교에는 한국인(신라인)의 영향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37대 임금 치데죽짼(재위 705∼754)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진흥책을 썼다. 750년 인도와 당나라로 불경을 구하는 외교 사절단을 동시에 파견했다. 인도로 간 사절단은 히말라야를 넘지 못하였다. 상시桑喜를 단장으로 하는 당나라로 간 사절단 5명은 장안에서 『금강경』, 『도간경稻芉經』 등 불경 1천권을 입수했다. 귀국하는 길에 상시 사절단은 쓰촨四川 성 성도成都에 있는 정중사淨衆寺에 들렀다. 그곳에 있는 유명한 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가 바로 당시 정중사 주지로 있었던 무상無相 김화상金和尙(684∼762)이다. 그는 고국 땅에서 까마득히 잊힌 존재였으나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는 태산북두처럼 높이 떠 있는 인물이다. 

무상대사는 신라 사람이다. 정확하게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의 셋째 왕자였다. 그는 728년 당나라로 건너갔다. 장안에 도착하여 당 현종唐玄宗의 인도를 받아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렀다. 이후 쓰촨 성 자중현資中縣 덕순사德純寺(寧國寺)로 가서 당대의 큰 선사 처적處寂의 제자가 되었다. 무상은 2년 동안 처적의 가르침을 받고 이후 12년 동안 용맹정진했다. 743년부터 20년 동안 정중사 주지로 있으면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당나라 인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숭앙받는 큰 선사였다. 

토번 왕국 외교 사절단 상시 일행은 정중사에서 두 달 동안 머물면서 무상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떠나는 상시 일행에게 무상대사는 앞으로 토번 왕국에 인도 불교가 흥왕할 것을 예언하며 불경 세 권을 선물로 주었다. 상시 사절단 가운데 셀랑拔(塞囊)이 당시 일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무상사 주지 큰 스님을 ‘니마尼瑪(‘태양’이라는 뜻이다)’라고 적었다. 후학들은 고증 끝에 ‘니마’가 무상대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상대사와 하직하고 상시 일행은 756년 라싸로 돌아왔다. 치데죽짼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뒤를 이은 임금이 티송데짼이었다. 

티송데짼 이후에도 몇 차례 불교 탄압이 있었으나 결국 불교는 티베트를 상징하는 종교로 큰 뿌리를 내렸다. 티베트 불교는 843년 고대 티베트 왕조 분열 후 약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경계로 전전기前傳期와 후전기後傳期로 구분된다. 전전기는 ‘국가불교’, 후전기는 ‘종파불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사상 및 종파 역사를 소개할 여유는 없다. 티베트 역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한 것으로 대신한다. 




티베트를 상징하는 여러 ‘기호’들

오늘날 바깥 세계의 사람들이 티베트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몇 개의 장면이 있을 것이다. 지구촌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유창한 영어로 평화와 행복의 말씀을 전하는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모습도 그 중 하나다. 또 있다. 거의 누더기가 되어 버린 옷차림, 삭정이같이 깡마른 몰골이지만 타는 듯 형형한 눈빛, 피투성이가 된 맨발로 황량한 계곡을 오르며 몇 걸음씩 옮길 때마다 온몸을 던져 넙죽넙죽 오체투지五體投地, 소위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는 티베트인들의 참 처절할 정도로 근엄한 풍경이 그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프랑스 국립학술원 연구원에서 티베트 역사와 민족학 분야의 연구 책임자인 프랑수와지 포마레Francoise Pommaret는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에서 티베트인들에 대한 정체성을 몇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먼저 티베트인에게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공동의 문화, 즉 방언에 따른 차이와 역사적 분쟁, 복식의 다양함 등을 초월한 동일한 표지를 꼽는다. 티베트의 어느 지역이든, 이들 표지가 있다. 지역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 표지는 티베트인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한 표식이 된다. 어떤 것인가? 즉각적으로 티베트 땅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뚜렷한 흔적의 몇 가지 풍경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기도 깃발, 길 곳곳에 서 있는 탑, 고갯길 꼭대기에 있는 돌무더기, 바위투성이 산허리며 집 벽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지역 신에게 바쳐진 성소 등이 그것이다.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는 가옥에서도 공통의 ‘기호’를 발견할 수 있다. 티베트 일반 가옥의 외관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부의 배치는 비슷비슷하다. 말하자면 공동의 기억을 표시하는 기호로 작용한다. 각각의 방은 뚜렷한 구분이 없다. 다만 생활 공간인 부엌, 부엌 뒤편 북쪽의 저장고, 사적인 기도실만은 예외다. 기도실은 집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 있다. 이 기도실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1층에는 가축과 곡식 창고를 두고, 가축용 사료는 지붕 위에 보관한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 연기를 피우는 화덕과 토지신을 섬기는 사당은 지붕 위나 마당에 위치한다. 

미개한 상태의 티베트를 상징하며 여자 악귀가 송짼감뽀松贊干布 왕에게 정복당한다는 내용의 이야기 또한 티베트인들에게는 공동의 기억이다. 한국인에게 춘향이 이야기 정도에 해당한다고 할까. 아니, 송짼감뽀 이야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링 왕국의 게세르Geser 왕 서사시와 함께 티베트인의 공동의 기억 속에서 가장 깊이 뿌리박혀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亡命政府

1959년 인도 북서부 지역에 세워진 티베트 망명 정부는 1950년대 중국에 의해 합병된 이후 나라를 잃은 난민들이 모여 설립하였다. 흔히 ‘티베트 망명 정부’(The Government of Tibet in Exile, Tibetan Government in Exile) 또는 중앙 티베트 행정부(CTA: 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라고 부르며, 공식 이름은 ‘달라이 라마 성하의 중앙 티베트 행정부(The 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 of His Holiness the Dalai Lama)’이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티베트에 있던 본래 티베트 정부의 연장선으로, 처음에는 1959년 4월 29일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 주州 무수리에 설립되었으며, 이후 1960년 5월에 인도 북서부 히마찰프라데시Himachal Pradesh 주州 다람살라Dharamsala의 강첸 키숑Gangchen Kyishong(티베트어로 ‘설국의 기쁨의 골짜기’를 의미)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자신들이 티베트 내외에 거주하는 티베트인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며, 티베트의 독립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함께 중국의 침략으로 티베트를 떠나 인도와 네팔, 부탄에 흩어져 있는 13만 난민難民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일종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망명 티베트인 헌장’을 제정하고 근대적 민주주의 제도와 조직을 갖추어 장래의 티베트 독립에 대비하고 있다. 또한 미국 뉴욕, 인도 뉴델리, 일본 도쿄, 네팔 카트만두, 대만 타이베이,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스위스 제네바, 헝가리 부다페스트, 러시아 모스크바,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등에 대표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망명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한 나라는 아직 없지만, 일부 유럽국가 의회에서 공식 정부로 인정하는 등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티베트인과 망명 정부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땐진 갸초丹增嘉措, Tenzin Gyatso)는 중국정부에 대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사항을 티베트인들이 관할하는 고도의 자치를 인정해 준다면, 중국의 일부로서 티베트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외교ㆍ군사적 완전 독립 대신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중도 노선을 취하고 있다. 그는 2001년 7월 티베트 망명 정부의 초대 총리를 뽑아 그로 하여금 망명 정부를 이끌게 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퇴진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망명 정부는 망명 티베트인들이 참여한 투표에 의해 2001년 8월 티베트 첫 직선 총리로 삼동 린포체Samdhong Rinpoche(1939~ ) 전 국회의장이 선출되었다. 린포체 총리에 이어 2011년 8월에는 55%의 득표율을 기록한 하버드대 법대 출신의 롭상 상게Robsang Sanay(1968~ )가 망명 정부의 새 총리로 선출되어 취임하였다. 

전통과 신비로움이 숨 쉬는 참 아름다운 도시 라싸Lasa(拉薩)

●위치: 티베트 남부, 브라마푸트라 강의 지류인 라싸 강이 이루는 넓은 곡저평야 
●인구: 559,423명 (2010 추계) 
●면적: 29,274㎢ 
●대륙: 아시아 
●국가: 중국 

라싸Lasa는 브라마푸트라 강의 지류인 라싸 강 부근,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의 3,650m 고지에 위치한다. 백두산(2,750m)보다 900m나 높지만 티베트 고원에서는 낮은 고도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다. 북쪽으로는 달라이 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다. 남쪽은 온골리 산맥이 동서로 굽이치는 가운데 남북 8㎞, 동서 60㎞의 장방형 분지를 이루고 있다. 도시 가운데는 기츄 강이 흐르고 있다. 강 북쪽 기슭에는 붉은 언덕으로 불리는 뜻의 말보리 언덕이 솟아 있다. 그 위에는 위용을 자랑하는 포탈라Potala(普陀落) 궁이 자리 잡고 있다. 

라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티베트 불세출의 군주 송짼감뽀 왕이다. 7세기 중반, 토번 왕국을 세계 무대에 알린 송짼감뽀는 이곳을 덮고 있던 호수를 메워 수도를 건설하고 천도하였다. 이후 라싸는 토번 왕국의 수도였다. 842년 왕이 암살된 후 국가 권력이 각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싸는 항상 토번의 종교 중심지로서 위치가 흔들리지 않았다. 1642년 라싸는 다시 중앙 정부의 수도가 되어 20세기까지 이 위치를 고수했다. 1951년 라싸와 티베트가 중국에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59년까지는 티베트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1959년부터 중국이 직접 통치하고 있다.

라싸에는 유명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라싸 중앙에는 7세기 중엽에 건설된 축락캉Gtsuglag-khang 사원이 있다. 4층 건물인 이 사원은 티베트 최고의 성지로 여겨진다. 루캉 사원Klu-khang, 놀북링카Nor-bu-glingka 등이 과거 찬란했던 정신적 위상을 보여 주고 있다. 티베트 최대 사원인 데풍Drepung 사원과 세라Se-ra 사원도 복원되었다. 그중에서도 말보리 언덕에 찬란하게 서 있는 포탈라 궁을 순례하는 것이 티베트 여행에서 백미로 꼽힌다. 포탈라 궁은 달라이 라마의 겨울 궁전이며 1994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포탈라의 ‘포탈’은 배, ‘라’는 항구라는 뜻이다. 실제로 포탈라는 범선 형국을 하고 있다. 이 도시를 몇 차례나 여행하고 돌아온 순례자 김규현은 여행 견문록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 포탈라에서 수미산까지』에서 이 포탈라 궁전의 형국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마치 미래의 어느 날, 천지가 개벽할 때 피안의 니르바나로 떠날 준비를 끝낸 상태에서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라싸의 경제는 중국이 점령하기 전에 중국·인도·네팔·부탄으로 통하는 역사적 교역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수공예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무기 제조 및 조폐가 주요 산업이었다. 1980년대 이후 라싸는 새로운 경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대외 무역을 위해 라싸를 개방하였다. 라싸 외곽에는 실험 농장을 설립하여 목축업의 과학화를 장려하고 있다. 중소기업 위주이지만 각종 화학 제품, 전기 모터, 제혁, 울 가공, 약품 및 비료, 융단·양탄자, 시멘트 등이 다양하게 제조, 생산되고 있다. 

라싸로 가는 길은 4개의 코스가 있다. ①방콕을 경유하여 네팔, 카트만두 코다리에서 국경을 넘어 징무로 들어가는 코스다. 징무에서 여행사를 통한 허가증을 요구한다. 5,000m 상당의 고개 도로를 세 개나 넘어야 한다. 팅리에서 에베레스트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설렘이다. ②쓰촨 성 성두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개별적인 여행은 불가능하다. ‘여행사를 통해’ 단체로 들어가는 길만이 가능하다. ③신강 위구르의 카슈가르喀什까지 가서 다시 두 가지 코스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도 있다. 하나는 기차로 우루무치까지 가서 버스로 카슈로 가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쿤제랍 고개를 넘는 방법이다. 카슈에 도착하면 예청葉城까지 가서 공안국으로부터 허가증을 얻으면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다. 쿤룬 산맥을 넘어 티베트 서부의 아리에 도착한다. ④칭하이 성의 거울무를 거치는 방법이다. 참 아름다운 도시 라싸로 가는 코스 가운데 어느 길을 선택하든 만만찮은 비용과 체력, 정신력이 요구된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충고임을 잊지 말자. 

티베트로 가는 길

현재 티베트는 중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남아 있다. 중국 정부는 인구동화 정책을 계속 추진 중이다. 소상공인, 운전사, 건설 및 철도 노동자 등 50만 이상의 한인들이 이주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들이 티베트 지역으로 이주해 온 것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이익이 중국 현지보다 3배나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덕택에 칭하이의 거얼무와 라싸를 잇는 칭짱 철도靑藏鐵道가 건설되었다. 

오늘날 티베트로 가기 위해서는 중국 비자 외에도 티베트 입경허가서가 있어야 한다. 라싸나 시가체 등 개방 지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추가로 공안이나 군에서 발급하는 여행허가서가 필요하다. 개별 관광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현지 차량을 이용한 차량 기사, 가이드를 동반한 관광은 허가된다. 상황에 따라 외국인의 티베트 출입 자체가 금지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티베트로 가는 경로는 칭짱 철도 외에 칭짱 도로靑藏道路, 쓰촨 성―티베트 도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 도로 등 3개 코스가 있다. 칭짱 철도는 2006년에 완공되었다. 해발 평균 4,500m 높이에 총 길이 1,142km에 걸쳐 건설된 이 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을 다니는 하늘길이다. 워낙 높은 지역을 달려야 하므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객실에는 산소마스크가 준비되어 있을 정도다. 

칭짱 도로는 칭짱 철도보다 더 높은 길을 달려야 한다. 쓰촨 성―티베트 도로는 쓰촨 성 청두에서 서쪽으로 산을 타고 올라가서 라싸에 이르는 도로다. 이 도로 역시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 도로는 쿤룬 산맥을 지나는 2개의 도로 중 서쪽 219번 국도가 아크사이친을 통해 신장의 예청과 티베트의 라체를 잇고, 동쪽 109번 국도는 라싸와 거얼무 사이를 잇는다. 칭짱 철도와 칭짱 도로를 타고 가는 여행객들의 눈에는 삼보일배하며 라싸의 포탈라 궁으로 가는, 참으로 진지한 모습의 티베트인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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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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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와 행복의 선진 부국 덴마크


덴마크는 북유럽 바이킹 계열의 데인족이 세운 나라이다. 고대 바이킹 시대의 국가 형성 과정을 거쳐 8세기경 역사에 본격 등장한 이후, 덴마크는 여러 왕조를 거치며 부침을 겪다가 19세기 중엽에 입헌군주제를 확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덴마크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영위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산업기계 분야와 낙농 분야 등이 우수한 선진국으로서 북유럽 지역과 유럽 본토를 잇는 가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나라이다.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광범위한 사회복지제도를 운영 중이고, 높은 시민의식과 함께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국민성을 갖고 있으며, 국민들이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연 어떤 요인들과 배경이 덴마크를 이와 같은 선진국으로 이끌었는지, 그 탐구의 여정을 떠나 보기로 한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덴마크의 공식 명칭은 덴마크 공화국Kingdom of Denmark이다. 덴마크는 단마르크 왕국(덴마크어: Kongeriget Danmark)에서 기원한다. 고대에 덴마크 땅에 데인Dane 족이 살았는데, 덴마크라는 국명은 고대 노르드어로 ‘데인인의 땅(Danernes mark)’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G.J.C. Augustus(일명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재위 BCE 27~CE 14)와의 전쟁 때 덴마크에 사는 민족은 왕의 아들 단Dane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승리로 단을 왕으로 모시고 이름을 단마크Danmark로 명명했다는 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평평한 숲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접두사 단dan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국기國旗는 ‘덴마크의 힘’이란 뜻을 지닌 ‘다네브로그Dannebrog’이다. 다네브로그는 1219년 에스토니아와의 전투가 벌어질 때 덴마크 왕 발데마르Valdemar 2세가 전투 중에 하늘에서 빨간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를 봤다는 데서 그려졌다는 설이 있다. 빨간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의 국기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덴마크 국기와 유사하게 하얀 십자에 파란 십자를 더하여 만든 노르웨이 국기도 등장한다. 아무튼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국가의 국기들 중 덴마크의 국기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는 북해와 발틱 해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본토가 스웨덴 남쪽, 독일의 북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윌란Jylland 반도이고, 동쪽으로 퓐Fyn 섬 및 스웨덴 남단 쪽의 셸란Sjaelland 섬을 비롯하여 443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덴마크의 총 면적은 43,094㎢이고, 한반도의 5분의 1 크기로 그리 넓지 않은 편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서일까? 해안선의 길이가 무려 7,314㎞나 될 정도다. 그 외에 덴마크의 자치령으로 북쪽 지방에 그린란드Greenland와 패로Faroe 제도가 있다. 

덴마크의 평균 고도가 해발 30m로 저지대이다. 빙하에 의한 침식으로 인해 모래와 자갈이 많은 서부 윌란드와 비옥한 평야가 있는 동부 윌란드 지역으로 나뉜다. 전체적으로 지대가 낮고 모래나 습지, 평야가 많으며 산이 별로 없는 편이다. 최고 높은 산이라고 불리는 곳은 몰레회이Molleǿj인데, 기껏해야 173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지대가 낮은 까닭에, 우리나라 무창포 해수욕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바다가 갈라지는 신기한 현상을 보이는 동네도 있다고 한다. 수도는 코펜하겐Copenhagen(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kǿbehavn)이다. 코펜하겐은 윌란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셸란 섬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에 외레순Ǿresund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웨덴의 남단 말뫼Malmö와 인접해 있다. 

덴마크 땅이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전국에는 많은 철도와 고속도로 및 포장된 도로가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약 420㎞에 달하는 내륙 수로가 있다. 덴마크 국영철도회사가 운영하는 연락선들이 덴마크 여러 섬들과 유틀란트 반도를 연결하고 있으며,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에도 취항한다. 여러 훌륭한 항구들이 15개의 주요 선박회사들에게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준다. 코펜하겐 중심부에서 약 10㎞ 동남쪽에 있는 카스트로프에 국제 공항이 있다.

덴마크는 서북지역에서 몰아치는 강한 바람을 맞는 반도 국가이다. 연중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이 특색이기 때문에 바람의 나라라 할 수 있다.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서북부 지역의 농지 주변이나 주택 주위에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고, 곳곳에 바람을 이용하여 동력을 만들어 내는 풍차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덴마크 서북부 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좁은 경작지들을 넓히기 위해 윌란 반도 북쪽 습지를 개척하고 메마른 땅을 개간하여 가축의 사료를 많이 재배하면서 목축업에 종사한다. 여기에서 질 좋은 치즈 및 많은 육류와 달걀 등이 많이 산출되어 덴마크는 낙농업 국가로 발돋움하게 됐다. 

덴마크의 기후는 북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온난한 편에 속한다. 북대서양 해류(멕시코 만류) 및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의 영향 때문이다. 겨울에는 날씨의 변덕이 좀 심하지만 대체로 온난한 편이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의 1월 평균기온이 0.1℃이다. 전체적으로 기온의 연교차는 적은 편이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이 -1.5℃이고 가장 더운 7월의 평균기온이 17℃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다만 겨울이 습하고 일교차가 적어 체감온도는 춥게 느껴진다.

덴마크의 역사

고대 및 국가형성기(바이킹시대)
현재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살펴보면, 덴마크 지역에 인간이 활동한 흔적은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가 겹치는 BCE 10000~BCE 1500년 사이에 덴마크의 주민들은 사냥이나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점차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정착생활로 전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CE 500년경에는 농경을 주로 하는 ‘앵글Angles’ 및 ‘주트Jutes’라는 부족이 처음으로 집단부락을 형성했다.

고트족의 한 역사가는 덴마크인들이 원래 스웨덴 지역에 살던 데인Dane족으로 덴마크로 넘어와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덴마크를 세운 민족은 북유럽 바이킹Viking(고대 노르드어로 Vikingr) 계통의 후손인 데인족이라 볼 수 있다. 북유럽의 바이킹족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대표적이다. 덴마크를 더하여 세 나라 민족은 모두 바이킹 계통의 정통 후손이라 볼 수 있다. 바이킹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작은 만’, ‘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vik”에서 ‘작은 만의 거주자’,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란 뜻에서 유래한 것 같다. 노르드어 “비킹르vikingr”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에 남겨진 고대 금석문에서 많이 발견된다.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는 바이킹 족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세기경에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떠나 항해하여 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해상무역 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 바이킹은 북유럽과 중앙유럽에서 약탈 및 교역을 주도적으로 하면서 활보한 바닷사람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덴마크를 세운 데인족의 바이킹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이다. 이민족(해안가의 노르만족, 동남부의 헝가리족, 마자르족, 슬라브족 등)의 침략에 위협을 받고 있었던 프랑크 왕국의 2대 왕 카롤루스 대제Carulus Magnus(일명 샤를마뉴Charlemagne 대왕, 742?~814)는 북진정책을 펴게 되었다. 그때부터 덴마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792년 카롤루스 대제가 북방의 노달빙기아Nordalbingia를 정복하자 프랑크 왕국의 국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접경하게 된다. 이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던 덴마크족과 핀란드 족은 카롤루스가 정복민을 이상한 종교로 세뇌시킨다는 소문에 분노와 공포감을 품게 됐다. 808년에 덴마크의 고드프리Godfred 왕은 카롤루스 대제의 침략으로부터 덴마크를 보호할 목적으로 장성을 쌓았다. 장성이 다 쌓아질 무렵 덴마크의 해적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인 프리슬란트와 플랑드르를 습격하고 돌아갔다. 고드프리 왕은 프랑크 족의 보복이 두려워서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다가 아헨에서 갑자기 살해당하고 만다. 이 시기에 침략을 계획한 카롤루스 대제는 출병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고드프리 왕의 조카이자 계승자인 헤르만 왕은 811년 하순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여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힐리겐 조약을 체결한다.

10세기경에 기독교가 북유럽에 전파되었다. 이때에 덴마크의 옐링 지역을 중심으로 고름Gorm 왕조(936?~958)가 일어났다. 고름 왕조의 1세(고름의 아들)가 되는 하랄Harald 왕조(958~986)는 아버지가 시작한 국가 통일을 완수했고, 덴마크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리고 1016년에 덴마크 출신 크누트Knut(크누드Knud) 왕(995?~1035)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는 덴마크의 하랄드 블라톤 왕(940~986)의 손자이며 스베인 튜쿠스케 왕의 차남이다. 잉글랜드의 크누트 왕은 1018년에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세 나라의 왕을 겸하는 북해 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크누트 왕은 재위기간에 잉글랜드와 덴마크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두 나라 간의 문화가 융화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고, 또한 덴마크 문자와 앵글로 색슨 문자가 혼용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덴마크 출신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국 왕이 되었고, 3국의 왕이 된 것은 크누트 대왕뿐이다.

중세시대

에스트리스Estrith 왕조(1047~1447년)


크누트 대왕이 죽자 3국은 분열되었고,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의 조그만 세력으로 전락하였다. 크누트 왕의 조카 스벤(스웨인) 2세Svend(Sweyn) Ⅱ(1020?~1074)는 덴마크를 노르웨이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1047년에 잉글랜드 교회로부터 벗어나려고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 덴마크 왕국 건설을 지향하면서 최초의 왕조인 에스트리스Estrith 왕조를 창설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후 몇 번의 왕이 교체되면서 다시 왕권이 약화되었고, 덴마크 교회는 함부르크의 세력 하에 있다가 1104년에 독자적인 국교회를 갖게 된다. 

이후 교회와 국가 내의 분열이 거듭되자 1157년에 크누드 리바르의 둘째아들 발데마르Valdemar den Store 1세(1131~1182)가 일어나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왕은 신성로마 황제에 복종할 것을 맹서하고, 군사력을 증진하고 재편성하여 독일을 견제하면서 발트 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다. 그때 셸란 섬에 구축한 성채가 바로 오늘의 코펜하겐Copenhagen의 기원이 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발데마르 2세(1170~1240)가 즉위하면서 덴마크는 경제적 측면에서 안정이 되었으나 왕과 교회, 귀족 사이의 투쟁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왕국의 힘이 점점 사그라졌다. 12세기 중반부터 전국적으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교회가 확대됨에 따라 국왕, 귀족 및 교회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1282년 국왕에 대한 견제 기능을 보유한 국정 협의 기관으로서 귀족원(다네호프Danehof, 후에 Rigsråd로 개칭)이 설치되기도 했다. 

발데마르 4세가 죽자 외손자인 올라프 2세Olaf Ⅱ세(1376~1387 재위)가 1380년 노르웨이 및 아이슬란드를 합병(1814년까지 지속)했고, 이어 발데마르 4세의 둘째 딸 마르그레테Margrete 1세(1387~1397 재위)가 등장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섭정하다가 1387년에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고, 1389년에 스웨덴 왕을 겸함으로써 3국을 다스렸다. 그럼으로써 1397년 비로소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3국 연합체인 칼마르 동맹Kalmar Union(1397~1523)이 결성되었으며, 마르그레테 1세는 정식으로 3국의 북해 제국을 다스리는 여왕이 되었다.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1448~1863년)


1448년 덴마크는 크리스티안 1세Christian Ⅰ(1448~1481년 재위)에 의해 창설된 제2의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1448~1863년)로 교체되지만 3국 연합국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나 스웨덴에 독립의 기운이 일어나 연합체의 결성이 약화되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Ⅱ는 스웨덴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의 독립군을 격파하고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독립조직을 와해시켰지만, 끝내 스웨덴은 봉기를 거듭하여 1523년 덴마크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다. 

1526년 즉위한 크리스티안 3세Christian Ⅲ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루터교를 받아들였고, 자치 능력을 상실한 노르웨이를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원로원과 귀족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 여러 분야의 학자를 배출하여 나라가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프레데릭 2세Frederik II가 집권하면서 덴마크는 발트 해의 주도권을 놓고 스웨덴과 폴란드, 뤼벡 사이의 전쟁에 끼어들었고, 후에 노르웨이 왕이면서 덴마크의 왕인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Ⅳ가 등장하여 상공업을 진흥시키고,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그렇지만 1625년 독일과의 전쟁, 1643년 스웨덴과 네덜란드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에 덴마크의 프레데릭 3세Frederik Ⅲ가 나와 귀족세력과 대립하는 도시 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 받고 1665년에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1788년에 덴마크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덴마크는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을 제정하고, 경제적인 활력에 주력을 가했다. 그러나 유럽의 동맹연합에 대립하여 벌인 나폴레옹 전쟁The Napoleonic Wars(1803~1815)에서 프랑스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 러시아, 스웨덴의 동맹국과 싸웠으나 패하게 됐다. 결국 덴마크는 1814년 킬Kiel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와의 연합을 파기하고,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여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 덴마크와 덴마크령 아이슬란드, 패로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덴마크의 프레데릭 왕정은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1830년 프랑스 혁명 직후 왕권이 크게 약화되면서 1842년에는 덴마크에 입헌적 대의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1849년에 절대왕정 폐지 및 의회(Rigsdag : 상원 Landsting 및 하원 Folketing으로 구성) 신설을 골자로 하는 최초의 『헌법』이 채택되었고, 마침내 프레데릭 7세Frederik Ⅶ는 왕정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헌법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귀족대표 중심의 상원과 소규모 자본가와 평민대표 중심의 하원간의 주도권 경쟁으로 덴마크의 국내 정국은 불안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근·현대시대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1863년~현재)


덴마크는 1863년 왕위에 오른 크리스티안 9세Christian IX(1863~1906년 재위)에 의해 세 번째 왕조인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가 창설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크리스티안 9세가 등극한 1863년 덴마크 의회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킨 뒤에 독일연방에 속해 있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역을 덴마크에 합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동맹을 맺고 덴마크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를,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과 농업의 집단화(협동농장)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1898년 전국 노동자연합과 고용주협회가 구성되는 등 근대사회로의 이행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 근대적 정당으로서 1871년 사회민주당(노동자 중심)과 1880년 자유민주당(농민 중심)이 창당되었고, 이들 두 정당을 주축으로 한 개혁주의자들이 1901년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근대 입헌정치가 개막되었다.

1914년 6월 28일에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의 후계자가 세르비아의 국민주의자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내리면서 1차 세계대전World War Ⅰ(1914~1918)이 발발했다. 덴마크는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인 상선들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는 고초를 겪게 됐다. 1918년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의해 패전하자 전쟁이 끝나고, 1920년 덴마크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북 슐레스비히를 되찾을 수 있었다. 덴마크는 세계대전 중인 1915년 헌법 개정을 통해 보통선거제도(25세 이상 남·여에게 투표권 부여)가 도입됨으로써 민주제도가 출범하였다. 그 후 사회민주당과 급진 자유당(1905년 창당, 소지주·지식층 중심)의 오랜 연정(1929~1940년)이 지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1940년~현재)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World War Ⅱ(1939~1945)이 시작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및 재산을 파괴한 이 전쟁에서 덴마크는 1940년 4월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함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필요한 물자들은 독일군에 빼앗겼고, 덴마크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색출되어 끌려갔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에 의해 종식되자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게 되었고, 1945년에는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덴마크는 인적·물적 희생이 컸으나, 전후 미국의 대외원조계획인 마샬 플랜Marshall Plan의 혜택으로 파괴된 기간산업시설, 전력부문, 농업분야 등의 복구가 이루어졌다. 전후에 덴마크는 종래의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공동방위를 통한 국가안보 확보 차원에서 스웨덴, 노르웨이와의 방위동맹을 모색하였으나 동 협상이 실패함에 따라 1949년 NATO에 가입하였으며, 그 후 유럽제국과의 경제협력증진을 위해 EFTA(1960), EC(1973)에 각각 가입하는 등 친서방 노선을 유지해 오고 있다. 

덴마크는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가 창설된 이후 크리스티안 9세, 크리스티안 10세, 프레데릭 9세에 이어 현재는 마르그레트 2세Margrethe Ⅱ(1972년 즉위) 여왕이 덴마크의 국가 원수로 위상을 점하고 있다. 마르그레트 여왕은 프레데릭 9세의 장녀이다. 그녀는 영국과 네덜란드 여왕 즉위에 영향을 받아 1953년에 개정된 새로운 헌법에 따라 여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덴마크 왕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덴마크는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사회복지정책이 비교적 발달되어 있으며 특히 산업기계분야와 낙농분야 등이 우수한 선진국으로서 북유럽 지역과 유럽 본토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및 법치구조


덴마크는 1849년 6월 자유민주주의 헌법 채택에 따라 입헌군주국(Constitutional Monarchy)이 되었다. 사실상의 의회민주제도(내각책임제)는 1901년부터 시행되었으나 법적으로는 현행 헌법이 채택된 1953년 6월부터이다.

헌법상 3권분립제를 채택하고 있고, 입법권은 국왕과 의회(Folketing)가 공동으로 보유한다. 행정권은 국왕에게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에 의해 행사되고 있으며,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 덴마크 헌법은 루터복음교Evangelical Lutheran Church를 국교(Established Church of Denmark)로 지정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헌법상 국가 원수인 국왕이 입법권과 행정권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 입법권은 의회에, 행정권은 내각에 속함으로써 국왕은 상징적 존재로 있다. 참고로 국왕은 각료를 통해 최고통치권(Supreme Authority)을 행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1953년 ‘왕위계승법’에 의거하여, 왕위는 18세 이상의 남녀에게 계승된다.

그러나 2009년에 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르면, 남녀 구분 없이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되어 있다. 국왕은 의회에 대한 법률안 제출권을 보유하며, 비상 시 의회의 소집이 불가능한 경우 헌법에 반하지 않는 한 임시법을 발표할 수 있다. 이 경우 의회 개회 후 승인이 필요하다. 현 여왕(국가원수)은 1972년 즉위한 마그레테 2세H.M. Queen Margrethe Ⅱ이며, 향후 프레데릭Frederik 왕세자(49세)가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다. 

행정부
덴마크에서는 헌법상 국왕이 국정전반에 걸쳐 최고통치권을 보유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행정권은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에 의해 행사되며, 내각은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진다. 또한 헌법상 국왕에게 총리와 각료를 임명하는 권한이 있지만, 실제로는 국왕이 총선 후 또는 총리 사퇴 시 의회의 각 정당지도자들과 협의를 거쳐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획득이 가능한 인사 또는 적어도 다수가 반대하지 않을 만한 인사를 선정해 총리 후보로 지명한다. 그 후 내각 구성을 위촉하면 총리 후보는 각료 명단을 작성해 국왕에게 제출함으로써 새로운 내각이 구성된다. 내각 구성에 대한 의회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지만 의회는 총리 또는 개별 각료에 대한 불신임을 의결할 수 있다.

한편, 총리불신임 의결 시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지 않는 한, 모든 내각이 퇴진해야 한다. 각료는 일반적으로 국회의원 중에서 임명되는데,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도 임명될 수 있다. 참고로 각료에 임명된 국회의원은 의원 자격을 계속 보유한다. 현재 덴마크 총리는 자유당 소속으로 2015년 6월 취임한 라스 뢰케 라스무센Lars Løkke Rasmussen이다.

지방행정
덴마크의 지방 행정은 1660년 코펜하겐 시가 국왕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1849년 입헌군주제 헌법 채택 이후 본격화되어 관련 법률들이 제정되었으며, 2005년에 주·시·군 지방자치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현재의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2007년 이전에 지방 행정은 전국이 14개 주(Amt)와 271개 시·군으로 구성되었으나, 2007년 1월 이를 5개 주(Region)와 98개 시·군(Kommune)으로 축소 조정하였다. 5개 주는 중앙윌란Midtjylland, 북쪽윌란Nordjylland, 셸란Sjælland, 남덴마크Syddanmark, 덴마크수도Hovedstaden 지역이다. 그린란드와 패로제도는 덴마크령으로 독자적인 자치권을 갖고 있다.

입법부
덴마크의 의회(Folketing)는 단원제이며 헌법상 전체 의석 179명 가운데 175명은 본토에서 선출하고, 나머지 4명은 그린란드Greenland와 패로Faroe 제도 자치령에서 각 2명씩 선출한다.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 선거제도는 전국 10개 대선거구 내에서 다시 92개 소선거구로 구분되며, 175개 의석 중 135석은 각 지역구별로, 나머지 40석은 정당비례대표(Party Supplementary Seats)로 선출된다. 의원의 임기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4년이지만 정부는 의원 임기 종료 전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수도 있다. 

덴마크의 주요 정당으로는 자유당, 사회민주당, 보수당, 덴마크국민당, 사회국민당, 덴마크 사회자유당, 기독민주당, 적색녹색동맹당, 자유동맹당, 대안당 등이 있다. 1960~1982년까지 사민당과 보수당이 교대로 집권했고 2001년부터는 자유당과 보수당 연합이 집권하기도 했는데, 2015년 6월 치러진 총선에서는 사민당(47석), 덴마크국민당(37석), 자유당(34석), 적색녹색동맹당(14석), 자유동맹당(13석), 대안당(9석), 사회자유당(8석), 사회국민당(7석), 보수당(6석)의 의석 분포를 보였다. 

덴마크 의회의 주요 권한은 입법권과 행정부 감독권이다. 의회의 영향력은 다수 내각인 경우 행정부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약하고, 소수내각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강하다. 주요 국정 사안들은 주로 타협에 의해 결정된다. 의회에서 채택된 법안이 국회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로 국민투표에 회부되어 투표자 중 30% 이상이 반대할 경우 동 법안은 부결된다. 또한 정부가 국가 주요 정책 및 안건에 대해 의회에 제출하여 의회 과반수 동의를 획득하지 못하면, 총리는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거나 총리 스스로 내각에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나지 않을 경우 총리는 특별한 근거가 없어도 언제든지 여왕에게 의회해산을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총리의 요청이 있을 경우 국왕은 재선거 요청을 무조건 수락해야 한다. 그럼에도 덴마크의 의회는 다른 나라보다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정치제도가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었고, 국민들은 정치에 매우 만족하고 있는 편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패가 없는 나라들 중의 하나가 덴마크다.

사법부
덴마크의 사법부는 대법원(Supreme Court), 고등법원(High Court), 하급법원(Lower Court)으로 구성되는 3심제도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외에 특별법원인 해양·상업법원(Maritime and Commercial Court)과 노동법원(Labor Court)이 있다. 법관은 법무장관의 추천에 의해 국왕이 임명하나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한다.

최근의 덴마크 정세
2015년 6월 실시된 덴마크 총선에서 야당 그룹인 Blue bloc(보수 성향)이 단 1석 차이로 승리했다. Blue bloc은 52.3%의 지지를 얻어 덴마크 의회 총 179개 의석 중 90석을 확보하는 한편, 반대 진영 Red bloc(진보 성향)은 47.7%의 지지를 얻어 89석을 확보하였다. Blue bloc은 소속 정당 간 협의를 진행했으나 연정을 이루지 못하고 자유당으로만 구성된 신정부를 출범시켜 자유당 소속인 라스 뢰케 라스무센Lars Løkke Rasmussen 총수가 신임 총리로 취임하였다.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2015년 6월 총선에서 최다 의석을 확보하였으나 Red bloc이 총선에서 패배하여 야당이 되었고, 헬레 토르닝 슈미트Helle Thorning-Schmidt 총수(전 총리)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수직을 사임하고 메데 프레데릭슨Mette Frederiksen 전 법무부 장관이 사회민주당의 새로운 총수로 선출되었다.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의 자치권 확대 문제는 덴마크가 직면한 주요 정치적 이슈 중 하나이다. 그린란드는 2008년 11월 주민투표(71.96%의 투표율 및 75.54%의 찬성률)를 통해 자치확대안을 채택하였다. 그린란드 정부는 자치확대안 통과를 독립을 향한 중대한 진전으로 자평하고 있으나, 현재 자원개발 수익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덴마크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지역에 주민이 분산 거주하고 있어 사회 인프라 및 정치적 자치 능력이 부족하고, 안보면에서도 덴마크나 미국(2005년부터 Thule에 MD용 조기 경보 레이더 기지 운용 중)의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인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린란드의 실질적 독립 달성은 아직은 멀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3. 경제


경제 구조 및 특성
덴마크 경제체제는 거의 완전한 자유시장경제와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 모델로 특징지어진다. 경영상의 이유로 근로자를 자유롭게 해고하고 채용할 수 있는 등 정부의 규제가 거의 없는 동시에, 국가가 실직한 근로자에게 실직 후 2년간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재취업 교육을 제공하며, 국민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북유럽 모델을 시현하고 있다. 덴마크 경제는 2002~2007년간 EU회원국 중 가장 견실한 성장세를 기록했으나, 세계금융위기의 영향으로 2008~2009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후 느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덴마크는 에너지 효율 제고 및 재생에너지에 중점을 둔 에너지 정책을 통해 대표적인 녹색 성장 국가로 부상하였다. 자급자족 에너지 공급에서 탈탄소화 및 재생에너지 자원 기반의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하여 충분한 에너지 공급을 확보함과 동시에 기후 변화 대응과 그린 기술 및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2050년까지 “화석 연료를 전혀 쓰지 않는다(fossil fuel zero)”는 목표하에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주요 산업과 무역
덴마크 경제는 산업별 GDP 구성비 분류시 2014년 기준으로 서비스업(공공, 민간서비스)이 76.2%를 차지하며, 제조업 22.5%, 농업 1.4%의 순으로 나타난다. 덴마크의 경제 하면 떠오는 것이 낙농업이다. 덴마크 농업의 국제경쟁력이 높다 보니 흔히 덴마크를 농업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순수 농업종사 인구는 전체 노동력의 2.6%에 불과하다. 그 대신 기계설비, 엔진, 조선, 금속가공, 제약, 화학, 의료기 등 제조업이 활발하며, 여타 금융, 에너지, 건설업 등이 주요 산업이다. 즉 오늘날 덴마크의 경제체제는 서비스업, 제조업, 금융업을 기반으로 한 국영과 민영의 혼합 체제를 이루고 있다. 이런 경제 체제에서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막강한 나라로 올라선 나라가 덴마크다. 덴마크는 천연자원이 빈약한 데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서구의 선진국들에 비견된다. 그래서 덴마크의 국민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편이다.

덴마크는 국가 규모가 작지만, 세계 최대 완구 제조업체 중 하나인 ‘LEGO’사, 세계 4위의 맥주 제조업체 ‘Carlsberg’사, 전 세계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의 50% 가량을 공급하는 ‘Novo Nordisk’사, 해운회사인 ‘A.P Møller Maersk’ 그룹, 세계 3대 명품 도자기 중 하나인 ‘Royal Copenhagen’, 세계 최대의 풍력터빈 생산 업체인 ‘Vestas’, 명품 오디오 기기를 제작하는 ‘Bang & Olufsen’사 등 세계적인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어 짧은 노동시간과 고 인건비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의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덴마크는 소규모 개방경제로서 무역량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상회한다. 전체 무역의 3분의 2는 EU국가와 거래되며, EU 역내 주요 무역국은 독일, 스웨덴, 영국 등이고, EU 역외국으로 노르웨이, 미국, 중국 등이 있다. 주요 교역상품은 산업재(76%), 서비스(12.5%), 농업(10%) 등으로 기계류 등 산업재가 절대 비중을 차지한다. 주요 수출품은 기계류, 농산물가공품, 제약제품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소비재, 중간재, 자본재, 운송수단 등이다. 덴마크는 1987년 이래 무역 및 경상수지 흑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고, 2014년의 경우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전체 GDP의 3% 수준에 달하고 있다. 

최근 경제 동향 및 향후 전망
덴마크의 국민 총생산(GNP)은 9957억 크로네DKr이며, 유아에서 연금 수령자에 이르기까지 1인당 국민 소득이 15만 8000크로네(2만 5,500달러)에 이른다. 이는 유럽공동체EC 회원국 중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덴마크는 세계에서 빈부의 격차가 심한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세계에서 국민의 소득 불균등이 낮지만, 최저 임금이 가장 높다.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국가 경제의 한 특징을 이룬 나라가 덴마크다. 국가 세입은 주로 관세, 국내 물품세, 소득세, 재산세에서 충당한다. 세출은 주로 사회복지사업, 교육, 국방에 쓰이며 나머지는 경제개발에 사용된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덴마크의 경제철학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르다. 노동력의 4분의 1 이상이 사회복지사업에 종사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안정된 생활 기반을 제공한다는 취지하에 다양한 복지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아직 큰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다.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의료와 교육제도는 물론 안정된 고용시장까지 추구하려는 덴마크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정책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세금 부담률은 48.1%이다. GDP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보자면, 덴마크가 전 세계 1위이다. 25%에 달하는 부가가치세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덴마크 사람의 대부분은(70%) 국가가 주는 서비스와 세금이 균형을 이룬다고 만족해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 고소득 고세율을 기조로 하는 덴마크 경제 모델은 상대적으로 느린 경제 성장을 초래했다. 하지만 최근 유가하락과 고용증가에 따른 내수 회복(민간소비회복) 및 수출 증가(덴마크 크로네 약세)가 덴마크의 경기 회복을 견인해 나가고 있다. 덴마크 중앙은행의 자료에 의하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던 GDP 성장률이 2014년에는 2011년 이후 처음으로 플러스 성장(1.1%)으로 돌아선 이후, 2015년 1.2%를 기록했다. 2016년에도 비슷한 수준인 0.9%의 성장률을 기록하였고, 2017년과 2018년에는 이보다 약간 높은 1.5%, 1.8% 성장률을 나타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또한 세계은행이 발행한 ‘Doing Business 16/17’ 보고서에 따르면, 덴마크는 6년 내내 유럽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기업환경평가) 랭킹 1위, 세계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외국인의 대對덴마크 투자도 (산업별) 금융중개업, 무역 및 운송업(세계 1위 컨테이너선사 머스크Maersk를 비롯해 다수 선주 포진),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집중되는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제조업의 경우 덴마크는 인건비가 매우 높기 때문에 단순 제조업보다는 비교 우위가 높은 풍력발전 등 녹색 기술(Green Technologies), IT 및 전자통신, 생명 과학 및 의료서비스 부분에 대한 투자가 두드러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IT, 생명과학 등 덴마크가 강점이 있는 산업에 투자 진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4. 사회와 문화


사회문화적 특성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광범위한 사회복지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는 덴마크다.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혜택을 입고 있다. 노인, 불구자, 임산부, 사망자, 환자는 수당을 받는다. 생활수준이 높고 사회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보건상태가 우수하다. 덴마크의 국민들은 시민의식이 높고 인종차별을 하지 않으며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아주 훌륭하다. 

덴마크인들은 북유럽인들에 비해서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국민성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일까? 덴마크인들은 성性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며 동성 커플의 시민결합제도를 최초로 도입하여 동성 동반자를 법적으로 인정했고, 2012년에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또 덴마크는 마약과 알콜 중독자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며, 의외로 높은 범죄율(경범죄)과 정신질환 발병률도 보이고 있다. 사회적 취약층인 홈리스homeless(노숙자)들에 대해서는 덴마크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이를 해결하고 홈리스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여러 프로그램을 실행 중이다. 집이 없음의 뜻하는 『후스 포비Hus Forbi』라는 잡지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잡지를 홈리스가 판매하여 당당히 돈을 벌 수 있도록 해 안정적인 자활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만족지수가 높다. 택시기사나 식당 종업원, 주부, 고등학생, 대학생, 교사, 교수, 공무원, 언론인, 목사,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기업인 등 각계각층의 덴마크인들에게 삶이 어떠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그러한 의식과 정서가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종, 언어 및 종교
덴마크인구는 559만 명쯤 되는데, 인종은 아리안계의 노르드족의 한 분파인 데인Dane족 및 고트Goth족이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외국계 이민자(이 가운데 절반이 북유럽 또는 기타 유럽 국가 이민)들로 구성된다. 덴마크인은 오랜 왕정과 농업 사회의 역사 및 지리적인 여건에 따라 근면하고 협동심이 강하며, 모험을 좋아하는 대외지향적인 국민성을 갖고 있다. 덴마크는 인도유럽어족 북게르만어(노르드어)파에 속하는 덴마크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데, 이 언어의 특징은 어미의 변화가 적고 영어와 비슷한 어순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덴마크어는 노르웨이, 스웨덴어와 매우 흡사하여 이들 세 나라 언어 간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이다. 또한 덴마크어는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와도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약 600만 명이 덴마크어를 사용 하는데, 주로 덴마크에 사는 사람들이고,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 사는 약 5만여 명도 덴마크어를 사용한다. 현재 덴마크령인 패로 제도와 그린란드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종교에 있어서 9세기 이전의 덴마크는 다신교적인 신앙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9세기 무렵 기독교가 전래되었고, 오늘날에는 전 국민의 약 80%가 국교인 덴마크 루터복음교(Evangelical Lutheran Church of Denmark)를 믿고 있다. 이외에 가톨릭, 기타 개신교, 유대교 신도들도 있으며 최근 이민자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교육과 언론
덴마크 정부는 교육 부분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보다 교육 재정에 훨씬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살펴보면 GDP의 7.9%를 교육 재정에 사용하여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덴마크는 뛰어난 교육 인프라를 갖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수준을 자랑한다. 특히 성인교육과 재교육에 많은 비중을 할애, 이 부문에서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막대한 교육 재정 지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학습 능력 평가와 노동자의 지적 수준 저하 문제가 제기되는 등 교육 개혁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교육제도는 초등교육(7~16세)과 중등교육(16~18세) 및 고등교육으로 단계별 구분이 되어 있다. 초등교육은 9년제 초급학교(Folkeskole,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결합)가 의무교육이고, 10세부터 영어 교육이 의무적으로 시행되며 14세부터는 제2외국어를 학습한다. 중등교육은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3년제 일반 중등학교(Gymnasium)와 2~3년제 직업학교로 구분되며, 대부분의 초등학교 졸업생이 진학한다. 직업학교의 경우 농업, 사회보건, 직업교육연수 등 세 가지 분야로 나뉜다. 동 과정을 수료하면 바로 직업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이밖에 고등 상업기술시험을 합격할 경우에도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

고등교육은 대학 교육과 성인 교육으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5개의 종합대학이 있으며 대부분 학사 과정(3년)이후 석사 과정(2~3년)에 진학한다. 또한 대부분의 고등교육 기관들이 정부의 후원 아래 직장인 또는 실업 인구를 대상으로 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며, 이러한 성인교육은 덴마크 교육제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덴마크 주요 대학으로는 코펜하겐 대학(University of Copenhagen), 오후스 대학(Aarhus University), 덴마크 공과대학(Technical University of Denmark), 덴마크 남부대학(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올보 대학(Aalborg University), 로스킬드 대학(Roskilde University), 코펜하겐 비즈니스대학(Copenhagen Business School), 코펜하겐 IT대학(IT University of Copenhagen) 등이 있다. 

덴마크에서 전국망을 갖는 TV방송은 Danmarks Radio(DR), TV2, TV3와 TvDanmark 등 4개 방송국의 8개 채널이 있다. 그리고 Danmarks Radio에서는 4개 채널의 라디오 방송을 운영 중이다. 신문의 경우, 대표적인 전국지는 폴리티켄Politiken, 율랜츠 포스텐Jyllands-Posten, 베를링스케 티엔데Berlingske Tidende 등이며 이들 세 곳은 전체 신문 발행부수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보장
덴마크는 폭넓은 사회복지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회보장 비용은 정부에서 부담한다. 2013년 기준 사회보장(보건, 사회보호, 교육) 정부 지출은 약 7,698억 덴마크 크로네(Danish Krone, DKK)에 달한다. 정부 예산 중 보건, 사회보호, 교육 등 분야에 지출되는 사회보장비용은 71% 이상을 차지하는데, 특히 사회보호 및 복지 지출은 총 정부지출의 43.9%에 달한다. 의료 부문은 2011년 기준 종합병원이 48개로 비교적 높은 의료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 

덴마크인들은 퇴직 후 9,105~ 15,575 덴마크 크로네 상당의 국민연금을 수령한다. 결혼한 배우자와 함께 생활하고 있을 시 최소금액을 수령하게 되며, 독거할 경우 최다 금액을 수령하게 된다. 2015년 기준 덴마크의 연금 수혜자는 약 130만 명이다. 이밖에도 미성년 자녀교육, 실업 등 생계비 지원 대상 가정에 대해서는 사회보조금이 지급되고 있다.

문학과 예술
덴마크에는 문학과 예술 등의 분야에서 배출된 걸출한 인물들이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아동문학의 문호를 꼽으라 하면 단연코 덴마크의 동화작가이자 소설가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ans Christian Andersen일 것이다. 안데르센은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들로 옛이야기나 요정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유럽 문화에 어린이를 위해 창작한 이야기로서 오늘날 ‘동화’라고 부르는 어린이 문학의 꽃을 피우게 한 ‘동화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어 공주』, 『눈의 여왕』, 『성냥팔이 소녀』 등이 그의 주요 작품이다. 

더불어 덴마크에는 유명한 실존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쇠렌 키에르케고르øren Kierkegaard가 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 『이것이냐 저것이냐』,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 등 주옥같은 사상서를 펴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로는 1917년의 헨리크 폰토피단Henrik Pontoppidan과 1944년의 요한네스 V. 옌센Johannes Vilhelm Jensen이 유명하다. 또한 1754년에 세워진 왕립 덴마크 미술협회에서는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트센Bertel Thorvaldsen과 현대건축가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이 배출되었다. 19세기에 오귀스트 부르농빌August Bournonville이 안무를 맡음으로써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던 유명한 덴마크 왕립 발레단도 있다. 

관광명소
덴마크의 관광명소로는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공주 동상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은 그리 기억할 만한 의미를 던져 주지 못한다. 실은 옐링 고분군Jelling Mounds, 루닉 스톤과 성당Runic Stones and Church, 로스킬드 대성당Roskilde Cathedral이 가 볼 만한 곳이다. 

옐링 고분군은 덴마크의 유틀란드 반도 중부에 위치한 옐링 지역에 있다. 고분군에는 룬 문자가 새겨진 10세기의 비석과 성당이 대표적이다. 거기에 있는 가장 오래된 비석은 최초로 덴마크의 통일을 이룩한 왕으로 여겨지는 고름Gorm 왕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비석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아들인 하랄드Harald 1세의 기념비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정복한 것과 데인족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분군의 비석은 덴마크의 기원을 나타내는 귀중한 문자 자료로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로스킬드 대성당은 덴마크의 시란 섬에 위치해 있다. 12~13세기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초기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건축물이다. 벽돌을 주재료로 건설한 이 성당은 15세기부터는 덴마크 왕실의 묘당으로 사용되었는데, 거기에 덴마크 역대 군주가 매장되었다. 1536년의 종교 개혁 이후에는 시란 섬의 주교좌가 되었다. 현관과 측면의 예배당은 19세기 말에 증축되었다. 로스킬드 대성당은 고딕 양식이 북유럽으로 확산되는 데 공헌하였으며, 유럽의 종교 건축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래서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5. 한국과 덴마크의 관계


외교 관계
덴마크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2년 7월 대한제국 전권대신 유기환兪箕煥과 덴마크 전권대신 파블로우巴禹路厚 사이에 한정수호통상조약韓丁修好通商條約이 조인되었다. 이것이 대한제국이 외국과 맺은 마지막 수호조약이었다. 1905년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맺어지면서 우리나라는 덴마크와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비록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교했으나, 이때 덴마크 정부의 기술 지원 덕분에 우리나라는 최초로 전화 가설이 이루어지는 등 덴마크와 경제 교류가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2년 2월에 덴마크는 유엔 정회원국으로 참전하여 야전병원선 유틀란디아호Jutlandia를 파견하여 의료지원에 나섰다. 

한국과 덴마크 간의 정식 외교관계는 1959년 3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덴마크는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1973년 7월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외관상 남북 간 등거리 외교정책을 시행하여 왔다. 그러나 1978년 6월, 한국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하고 UN 등 국제 무대에서 북한보다는 우리의 입장을 더욱 지지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좀 더 중시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민주화 및 1988년 올림픽, 2002년 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와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로 덴마크 정치인, 경제인 및 일반 국민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매우 우호적인 편이다. 최근에는 양국 간의 인적, 경제, 통상 등 제반 분야에서의 협력과 교류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2016년 10월 25일에는 라스무센 덴마크 총리가 방한해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와 녹색성장동맹 증진 현황을 평가하고, 양국 간의 실질 협력 확대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또한 북한 문제와 기후 변화 대응 등 지역과 국제무대 협력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졌다.

경제문화 관계
경제·기술 분야에서 한국과 덴마크 양국은 기술 협력 및 제휴, 자본 합작 등을 시행하고 있다. 1959년 이래 덴마크는 한국의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지도자들을 매년 10명씩 전액 장학금으로 초청하여 농업 목축 수의 의료 조립식주택 기계공업 핵과학 화학공업 식물병리 등 67개 분야에 걸쳐 교육훈련을 시켜 왔고, 선박용 전자제품과 조립식 주택, 농산물 가공 부문 등에 기술 협력을 제공하였다. 또한 덴마크의 완구제조업체인 레고Lego사와 한국의 우정해운이 1983년 153만 달러를 투자하여 레고코리아Lego Korea를 설립하였고, 1983년 덴마크 BNW엔진사와 현대중공업의 기술 제휴 및 합작이 성사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양국의 교류는 사회·문화 측면에서도 긴밀히 유지되고 있다. 유틀란디아 병원선이 들어왔던 1952년 2월 한·덴마크협회가 조직되어 덴마크와의 친선사업을 펴왔다. 한·덴마크협회는 1975년 5월부터 ‘덴마크의 날’을 기념하여 한국과 덴마크 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정기적으로 덴마크 사진전도 개최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1980년에 덴마크 태권도협회가 조직되어 500여 명의 연수생을 배출했으며, 협회 산하에는 1985년에는 태권도 클럽이 100여 개에 이르고 있었다. 또한 교민단체로는 1973년 한인회가 창설되어 생활 정보를 나누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덴마크에는 6·25전쟁 고아 6,000여 명이 입양되어 갔고, 이들이 자라 가정을 이루며 ‘한·덴마크 우정의 모임’을 만들어 친선 도모에 적극적이다. 

2016년 현재 한국의 대對 덴마크 교역(11월까지의 누계액 기준)은 약 9.55억 달러로 무역수지는 적자를 기록했다. 대對 덴마크 수출이 3.12억 달러, 수입은 6.43억 달러를 기록했고,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 기계류, 철강제품, 플라스틱, 전자기기 등이며 주요 수입 품목은 기계류, 의료용품, 전자기기, 광학기기 및 의료기기, 육류 등이었다. 

우리나라의 대 덴마크 수출액은 전체 수출의 70~80%를 차지하는 선박 수출 여부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이는데, 선박(조선기자재 포함) 수출 확대에 힘입어 2013년 이후 수출이 급증세를 나타내다가 2016년 이후 선박 인도 물량이 사실상 전무하게 되면서 수출이 다시 급감세로 돌아섰다. 2013년 이후 대 덴마크 수입은 완만하게 증가하는 모습을 나타내다 2016년 들어 기계류 수입이 감소하며 2016년 11월 누계 기준 30%가량 급감했다. 이는 아마도, 한국 조선업 불황에 따라 선박기자재 수입이 감소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재외동포 현황
덴마크에 거주하는 우리나라의 재외국민은 약 4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워킹홀리데이working holiday 참가자 약 100명, 교환 학생 및 유학생 약 70명, 주재원 및 대사관 직원 가족 약 50명, 그린카드 소지자 및 과학인(연구원 및 교수) 가족 약 70명, 기타 국제결혼 등을 합한 인원이다. 

덴마크 지역 한인 단체는 200여 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한인회와 덴마크 한인과학인 협회가 있고, 한글학교는 덴마크 (코펜하겐) 한글학교와 율랜드지구 한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덴마크에 입양된 성년 입양인 약 9,000명이 상호 친목과 한국에 관한 정보교환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The Korea Club(Koreaklubben)이라는 단체도 있다. 덴마크 내 친한 단체로는 한-덴마크 협회(Danish-Korean Society)와 유틀란디아 동지회(The Jutlandia Veterans Association), 덴마크 태권도 협회(Danish Taekwondo Federation) 등이 있다. 

북한과의 관계
덴마크는 NATO 및 EU 회원국으로서 친서방 노선을 대외 정책의 근간으로 하고 있으나,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여타 북유럽국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73년 7월 이래 북한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1973년 10월 덴마크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으나 1998년 폐쇄하였다. 현재 주한 덴마크 대사가 북한을 겸임하고, 주스웨덴 북한 대사가 덴마크를 겸임하고 있다. 1976년 10월 덴마크는 북유럽 최초로 마약 및 술, 담배 밀매 혐의로 북한공관원 전원을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경제 관계에 있어 덴마크와 북한의 무역 규모는 28만 달러(2013년 기준)로 미미한 수준이며, 북한의 대對덴마크 채무상환 불이행으로 덴마크 대외 수출 보증위원회는 대對북한 수출보증을 허가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덴마크의 옴부즈맨Ombudsman 제도

덴마크의 의회 운영에 있어 특이한 점은 1953년부터 스웨덴의 영향을 받아 ‘옴부즈맨ombudsman’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의 독특한 제도인 옴부즈맨은 ‘국정민원조사관’으로 불리는 행정 감찰 전문인이다. 옴부즈맨ombudsman은 대리인, 대변자의 뜻을 가진 스웨덴어 'ombud'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혹자는 이 용어가 “이것저것에 대하여(om) 말하는(bid) 사람”이라는 어원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옴부즈맨 제도는 스웨덴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현재 스웨덴에서는 저스티티 옴부즈맨(Justitieombudsman, 'JO')이라고 불리는 의회가 선출하는 옴부즈맨과, 정부가 임명하는 특수분야 관할 전문 옴부즈맨 등 두 가지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군에 대한 통제와 군인의 법적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국방 옴부즈맨 제도(Wehrbeauftragter; Defense Commissioner)가 실행되고 있고, 일본은 유럽 방식이 아닌 독자적 옴부즈맨 제도로서 행정상담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대중적 옴부즈맨 제도가 특정 분야를 관할하는 특수 옴부즈맨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충민원처리와 부패방지 및 행정심판 기능을 통합하여 수행하는 옴부즈맨 기관으로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다. 이렇듯 옴부즈맨 제도는 정부의 권한 남용을 막고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다. 

덴마크에서 의회에 의해 임면이 되는 옴부즈맨은 법률 및 행정 등 국정에 관한 민원을 조사하고 이의 시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 또는 권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한다. 행정 기관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옴부즈맨 제도는 행정 결정의 합법성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행정 활동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행정에 대한 옴부즈맨의 권고 사항은 사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잘못된 것이 있을 경우 해당 부서가 의회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체로 수용되는 편이다. 

1753년에 개정된 덴마크 헌법 제55조는 의회로 하여금 국회의원이 아닌 자 중에서 국가의 행정 및 군사 행정을 감독할 수 있는 자를 임명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옴부즈맨 임명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그 후 옴부즈맨 임명에 관한 법률 제정 시 1명으로 충분하다는 검토 결과에 따라 1955년 초대 옴부즈맨 이래 1명씩만 임명이 되고 있다. 모든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및 소속 공무원은 옴부즈맨의 조사 대상이 되지만, 사법부와 판사 등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며 교회의 교리와 직·간접으로 연관되는 사항도 제외된다. 조사 대상에 지목된 정부기관 또는 공무원은 옴부즈맨의 조사활동에 자료 제출, 출석 등 필요한 협조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옴부즈맨은 각료(또는 전직 각료)의 직무상 행위가 민·형사 재판에 회부되어야 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이를 의회에 권고하며, 기타 공무원에 대해서는 범법 또는 불공정 행위의 정도에 따라 검사에게 조사 및 기소를 지시하거나 해당 행정 기관에 징계를 지시할 수 있다. 또한, 옴부즈맨은 법률 또는 행정규정상 오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이를 의회 및 해당 정부부처에 통보한다. 옴부즈맨은 매년 의회에 활동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덴마크에는 의회에서 임명되는 옴부즈맨(Legislative Ombudsman)과는 별도로 소비자 옴부즈맨(Ombudsman for Consumer Affairs) 제도가 있다. 소비자 옴부즈맨은 1954년에 도입된 것으로, 소비자가 민간 기업 또는 정부 기관이 선량한 시장 관행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이를 소비자 옴부즈맨에 제소하는 제도이다. 기업도 타 기업이 불공정경쟁을 하는 경우 제소가 가능하다. 소비자 옴부즈맨은 강제 처분 권한이 없으며 가급적 쌍방 간에 타협을 통한 해결책 권고를 모색한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도 그런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정부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를 들 수 있다. 월급의 50% 이상 세금을 내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사는 나라가 덴마크다. 덴마크인들은 의료비 무료, 학교 등록금 무료, 얼마간의 생활비 지급과 실업 보조금 등을 받는다. 본인들이 이런 혜택을 누리는 당사자들이고, 자신이 낸 세금이 사회를 위해 정당하게 쓰이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덴마크인들은 세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만큼 정부와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얘기다. 그래서 덴마크의 정부, 경찰, 사법부, 행정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84%에 육박하여 세계 1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투명한 운영 때문이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발표에 의하면 덴마크는 2015년 세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91점으로 세계 1위를 기록함으로써 가장 부패가 없는 투명하고 깨끗한 나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둘째는 공정한 교육정책이다. 어린아이부터 16세 이하의 학생들에게는 모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학교는 대부분 공립으로 무상교육에 장학금까지 지급되기 때문에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 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직업교육을 시키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쓴다. 그래서 젊은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학은 그리 많지 않다. 1479년에 설립한 코펜하겐대학교를 포함하여 5개의 대학교가 있다. 대학에서의 교육 또한 엘리트 양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개성과 능력 발달을 강조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평범한 학생들 수준에 맞추고 있다. 

셋째는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와 자율성이 보장되어 있다. 덴마크의 사회나 부모가 강요하지는 않지만, 18세가 되면 70% 정도의 청년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기 위해서 부모 곁을 떠난다. 사회적 차별이 없기 때문에 부모가 청소년들의 진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 대학에 진학해도 걱정이 없다. 학비 무료에 최소 생활비까지 지급되기 때문이다. 또한 덴마크 국민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일정한 기본 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에 밥벌이를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다. 사회에 뛰어들어 실패해도 걱정이 없다. 실직해도 2년 동안 기존 급여의 90% 실업 보조금이 지급되기 때문이다. 해고를 당하더라도 실업급여를 받으며 정부에서 제공하는 체계적인 재취업 교육을 통해 다음 진로를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언론의 자유가 보장돼 있어 신문이나 잡지는 검열을 받지 않는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 또한 독립 공공기관으로 시청자들로부터 시청료를 받아 운영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운영된다.

넷째는 직업에 귀천이 없는 평등한 사회라는 것이다. 청바지 차림으로 일하는 국회 의원, 아들이 열쇠 수리공임을 자랑하는 식당 종업원 아버지, 길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교장 선생님, 회사 사장과 직원의 평등한 관계 등은 덴마크인들의 직업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등한 사회의 직업관은 어려서부터 남과 비교하지 않고 즐거운 일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여 건강한 인생관을 길러 내는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배움을 통해서 덴마크인들은 상호 간의 협동과 연대를 이루고, 각자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어 평등하고 건전한 사회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다섯째는 만족의 미덕을 들 수 있다. 덴마크인들은 최고가 아니어도 만족하고 살아간다.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충분히 좋아’, ‘나쁘지 않지’, ‘괜찮아’라는 말들이 이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습은 과거 바이킹 시대에 강대한 나라였다가 외부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은 또한 경제적인 것(돈)에 대해 심하게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그것은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일 것이다. 소득이 아주 적더라도 일단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면 돈은 만족과 행복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도 인간이 만들어 낸 다양한 사회 중의 하나이다. 행복한 사회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가 덴마크가 아닐까? 거기에는 그들만의 역사와 고유한 특성을 좋은 방향으로 이끈 지도자가 있었고 함께 따른 국민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행복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갔던 선각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法古創新]”는 조선의 유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말을 상기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우리 사회가 행복한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옛것을 돌이켜 미래의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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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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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어를 지키며 세운 나라 방글라데시


아시아 서남부에 자리를 잡은 방글라데시는 세계 제일의 인구 조밀국이자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다. 고대에 인도 대륙 왕조와 이슬람왕조, 무굴제국의 지배를 거쳐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47년 동파키스탄으로 독립을 했으며, 다시 현재의 파키스탄(서파키스탄)과 유혈 전쟁을 벌인 끝에 1971년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을 달성했다. 독립 이후 쿠데타와 정치폭력 등으로 혼란한 정국을 이어 오고 있는 방글라데시는 정치 안정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함께 외국 원조에 의존하는 저개발형 경제구조의 혁신을 이루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하고 있어 점차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이 가시화되고 있다. 

시詩를 사랑하고, 행복지수가 가장 높으며, 모어母語인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삶의 희생도 감수하는 민족성을 지닌 방글라데시인들은 오늘도 벵골민족 중심의 문화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묵묵히 전진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방글라데시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는 아시아 서남부 인도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으로, 남쪽엔 벵골만에 접해 있고 여기를 통해 인도양으로 향할 수 있다. 국경의 대부분이 인도와 접해 있지만, 동남쪽에는 미얀마Myanmar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고, 가까운 주변국으로는 네팔Nepal, 부탄Bhutan, 중국China 등이 있다.

국토의 면적은 143,998㎢로 그다지 큰 편은 못 되지만 인구는 약 1억 6,895만 명으로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로 꼽힌다. 인구 밀도가 1,173명/㎢인데 이는 우리나라의 울산광역시, 경기도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는 방글라데시 국토 전체가 삼각주이므로 인구부양력이 높은 벼농사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50년이면 인구가 2억 5,000만 명까지 증가한다는데, 그러면 인구밀도는 1,736명/㎢가 되고 2050년의 러시아보다 인구가 많게 된다. 인구 밀도가 모나코, 싱가포르, 바티칸, 바레인, 몰타, 몰디브에 이어 7위이나, 적어도 국토면적 1만㎢를 넘는 국가 혹은 인구 1,000만 이상인 국가 중에서는 부동의 1위를 차지한다.

영토 대부분이 평야지역인데다 국토 면적의 60% 이상이 농토이기 때문에 경지면적당 인구밀도는 한국이나 대만보다 낮다. 방글라데시는 1970년대만 해도 한 집당 6.6명이라는 가공할 출산율을 보였다. 이는 당시 중국의 5.1명이나 인도의 4.5명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출산율이 크게 낮아져, 흔히 세대교체율이라 불리는 2.1명을 약간 웃도는 수준(2.3명)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방글라데시의 자연경관은 갠지스Ganges 강,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자무나Jamuna 강), 메그나Meghna 강 등이 합류하면서 형성된 수계水系와 그 주변지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 갠지스-브라마푸트라 삼각주 평원의 동부 3분의 2에 해당되는 지역을 차지한다. 북쪽으로는 갠지스 강과 브라마푸트라 강의 합류점 위쪽에 쐐기 모양으로 펼쳐진 3각형 지대, 동쪽으로는 수르마Surma 강의 유역 평원까지 포함한다. 수르마 강 유역의 충적평야 동쪽 끝은 남북으로 뻗은 능선으로 연결되며, 남동부 미얀마와의 경계선은 산 능선을 이룬다. 방글라데시는 옛 충적층에 있는 소규모의 고지대를 제외하면 평원은 아주 완만한 땅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지형은 국토의 90% 이상이 평지이다. 평원과 함께 호수, 습지, 늪지대 등도 방글라데시 지형의 특색이다. 기복이 적은 평지에는 강들이 둔덕을 형성하면서 수많은 지류로 갈라져 흐른다. 우기에는 범람으로 인해 수백㎢에 이르는 지역이 피해를 입기도 한다. 특히 중남부는 강의 옛 삼각주 지역에 해당하는 서부와 퇴적 및 생성작용이 활발한 강에 의해 새로 형성된 삼각주가 자리잡은 동부로 이루어져 있다. 남부 해안지대는 소금기가 많은 작은 연못들이 많으며, 나무들이 울창하게 뻗은 지역이 흔하다. 

방글라데시는 전형적인 열대 몬순의 고온다습(연평균 기온 26.6℃, 습도 75%)한 기후를 갖고 있다. 대체로 겨울, 여름, 우기로 크게 나눠 볼 수 있는데, 10월부터 3월까지는 날씨가 좋으며(15~26도 정도), 4~6월 사이에는 더운 날씨(30~35도 정도)가 지속되다가 7~9월은 우기로서 매우 고온 다습한 날씨가 이어진다. 또한 영토 자체가 비가 많이 오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자연환경 훼손까지 겹쳐서 해마다 엄청난 대홍수를 겪는 국가이다. 연평균 1.6건이 발생하는 사이클론과 대홍수 때문에 하구의 비옥한 삼각지가 다 쓸려나가서 농산물 생산량에 큰 손실이 생긴다. 그래서 홍수가 한 번 날 때마다 영토가 줄어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매년 약 0.4%씩 영토가 줄어들고 있다. 해마다 대략 서울특별시 면적 정도가 물에 잠기는 셈이다. 

이 때문에 부레옥잠(water hyacinth)해상 농법을 시험적으로 재배하고 있다. 부레옥잠은 관상용이나 수질정화용으로도 기르지만, 소나 양이나 염소 같은 가축 먹이로도 나쁘지 않다. 홍수로 늘어나는 호수에서 아예 집을 짓고 부레옥잠밭에서 식용 호박류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여 그것을 팔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농민도 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는 코끼리나 코뿔소, 물소 등 큰 짐승들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거의 멸종하고 중소형 짐승들 정도만 남아 있다. 현재는 가장 큰 포식자인 호랑이도 50~75kg 수준으로 작아져 먹이사슬이 무너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밖에 사슴이나 멧돼지, 원숭이 등과 황새를 비롯한 민물조류도 서식한다. 습지 주변에는 악어도 있다. 이런 기후상황 때문에 2030년까지 적어도 2,000만 명의 기후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불행한 경고가 나와 있다. 

방글라데시의 역사


근대 이전
방글라데시 역사의 근대 이전은 옆 나라 인도 벵골 지방의 역사와 겹친다. BCE 6세기경 아리아인이 갠지스 강 하류 벵골 지방(현 방글라데시)에 진출하여 선주민인 드라비다족과 함께 벵골인을 형성하였다. BCE 5세기 중엽 이후에는 마우리야Maurya 왕조나 굽타Gupta 왕조, 팔라Pala 왕조 등 인도 대륙 왕조가 지배하였는데, 마가다Magadha 왕조(BCE 5세기) 이후 이슬람교 왕조가 성립(CE 13세기 초기)되기까지 불교 문화가 융성하였다. 그 당시 방글라데시는 인도와 구분되지 않았으나, 12세기 아랍인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해 이후 벵골 동부는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260년에는 이슬람교 왕조인 벵골 술탄국이 수립되어 벵골 지역을 지배함으로써 이 지역에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성립하였다. 1352년부터 1576년까지 존속된 이 나라는 인도의 무굴Mughul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고, 이후 무굴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그러나 무굴 제국이 쇠퇴하면서 독립을 선포하고 벵골 나왑nawab국이 되었다. 나왑은 이슬람인 귀족이다. 서양식으로 번역하자면 대공국大公國 정도로서 영어로는 nawab of Bengal이다. 1717년부터 1818년까지 존속된 나왑국은 인도 북부의 패권을 손에 쥔 마라타Mahratha 동맹에 의해 정복당했고, 이 마라타 동맹은 인도 지역에 진출한 유럽 열강 세력 중 영국에 의해 패배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
1757년 영국은 벵골 지방을 포함하여 인도 전역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이후 이곳은 영국의 기계·면제품 시장화, 황마 및 차 생산지로 전락한다. 초창기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식민 지배를 시행하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후 명목상으로 남겨 두었던 무굴제국을 멸망시키고 영국 정부에 의한 인도의 직접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1877년에 식민지 인도에 세워진 것이 인도제국Indian Empire이며, 벵골 지역도 인도 제국의 일부로써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 통치는 현지인들의 많은 반발을 초래하였는데 특히 벵골 지역의 주민들이 반영反英 운동을 벌이며 심하게 저항을 했다. 이에 영국은 1905년 반영 운동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벵골 지역 분할령’을 선포하였다. 영국은 벵골 지역을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면서 분리 목적이 행정 편의라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영국의 경제적 이익과 인도 민족의 분열이 목적이었다. 당시 벵골 서부는 힌두교 신자들이 많았던 반면 현 방글라데시 지역인 동부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많았다. 당시 벵골 주민의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슬람교 신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와 경제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힌두교 신자들은 벵골 동부가 이슬람교 신자들의 중심이 되자 벵골 분할 정책에 맹렬히 저항하였다. 반면, 벵골 동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교 신자들은 분할을 환영했다. 이러한 문제로 힌두교 신자들과 이슬람교 신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벵골 분할령이 발표되자 벵골 주민들은 인도 국민 회의파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할령 반대 운동을 거세게 일으켰다. 이것이 인도 전역으로 퍼지자 결국 영국은 1911년에 벵골 분할령을 철폐할 수밖에 없었다. 벵골은 다시 하나의 주가 되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분쟁은 피할 수 없었다. 힌두교도가 주도하는 국민회의가 이슬람교도를 무시하자 이슬람교도들은 ‘전인도이슬람교도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1940년경부터 인도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였고, 결국 1947년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이 영연방에 속한 자치령으로 각각 분리ㆍ독립되었다. 이 때 벵골 서부는 인도의 한 주가 되었고 벵골 동부는 파키스탄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인도 영토를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서로 1,600㎞나 떨어진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이라는 두 영토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동파키스탄 시대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동벵골)이라는 이름으로 파키스탄의 11개 주 가운데 1개 주로 독립하였다. 벵골 지역 힌두교도들은 벵골 지역(동·서벵골)이 하나의 국가로 독립할 경우 이슬람교도가 다수가 되는 상황을 우려하였으며, 벵골 지역 이슬람교도들은 인도로부터 독립하지 않을 경우 소수 힌두교에 의한 다수 이슬람교도가 지배되는 상황을 우려하였다. 그 결과 상이한 종족과 언어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공통점 때문에 동·서벵골 지역은 한 나라로 독립하게 되었고, 면적이나 인구 규모에서 상대적으로 큰 서파키스탄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파키스탄(동벵골)과 서파키스탄(서벵골)은 영토가 너무 멀리 분리되어 있고, 내부적으로도 파키스탄 정부(서파키스탄)가 동 벵골(방글라데시) 주민들을 차별대우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은 언어까지도 서로 달랐다. 파키스탄의 지식인들이 우르두어가 파키스탄 사람들의 공식 언어라고 주장하며 방글라데시에서 많이 쓰는 벵골어 대신 파키스탄의 우르두어를 쓰라고 하자 다카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소위 ‘언어운동’이라 불리는 반발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는 1952년 2월 21일에 일어났는데, 이날은 현재 방글라데시의 주요 국가 기념일 중 하나이자 유네스코에서 세계 모어母語의 날로 기념하는 날이다. 이 시위를 서파키스탄 군인들이 폭력으로 누른 것이 방글라데시인들의 저항을 불러왔고, 벵골인들이 아와미 연맹을 결성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질적 요소와 대립 등으로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시작하였다.

1954년 3월 동파키스탄 주의회 총선에서 야당이 대승을 거두었고, 1969년 3월에는 파키스탄의 모하마드 아유브 칸Mohammad Ayub Khan 정부에 대한 벵골인들의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1970년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를 준 열대성 저기압인 사이클론 볼라가 방글라데시를 덮쳐 약 5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파키스탄 정부가 세계 각국에서 받은 원조 물자를 불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방글라데시인들은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고 1970년 12월에는 파키스탄 독립을 주창해 온 아와미연맹AL(Awami League)이 총선에서 압승하고, 국회 개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 당시 아와미연맹은 동파키스탄 국민회의 162석 중에서 160석을, 동파키스탄 주의회 300석 중에서 289석을 차지하였다. 방글라데시의 인구는 현재 1억 5,600만 명으로 2억 100만 명의 파키스탄의 인구보다 적지만, 당시엔 방글라데시의 인구가 더 많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 벵골 지역에서 정부의 총선 무효화에 항의하는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지자 파키스탄 대통령은 방글라데시와 아와미 연맹의 당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Sheikh Mujibur Rahman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파키스탄군이 만행을 저지르는 가운데 결국 아와미 연맹의 당수 라만은 1971년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했다. 파키스탄군이 라만을 체포하자 방글라데시인들은 독립군을 결성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일으켜 서파키스탄인들을 공격해 방글라데시 일대를 장악했으나, 결국 파키스탄군에게 진압당하고 국경 지대로 밀려났다.

방글라데시로 진입한 파키스탄군은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방글라데시 측은 이 때 30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한다. 파키스탄 정부 측은 26,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세계 각국의 기자들은 대략 50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독립군이 인도 국경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함에 따라 파키스탄이 인도 영토의 독립군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힌두교를 믿는 벵골인 1,000만여 명이 전쟁을 피해 인도로 피난을 오는 사태가 벌어지자,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사 개입을 하여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카슈미르Kashmir 지역 영유권을 둘러싸고 두 차례에 걸쳐 이미 전쟁을 치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다시 3차로 전쟁을 벌였고, 인도가 2주일 만에 서파키스탄군을 제압하면서 끝이 났다. 전쟁의 결과 서파키스탄이 패하면서 동파키스탄은 국호를 방글라데시Bangladesh(‘벵골 국가’라는 의미)로 하여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1971.3.26)하였고, 서파키스탄은 현재의 파키스탄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시대
1972년 1월 아와미연맹AL 당수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Sheikh Mujibur Rahman이 독립한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의 초대 총리에 취임해 내각책임제 정권을 수립하였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정권은 사회주의경제, 비동맹 중립노선을 선언하였다. 1973년 3월 제1차 총선에서 아와미연맹이 승리한 후, 1975년 1월에는 대통령중심제로 개헌을 단행해 ‘노동자·농민 아와미연맹BAKSAL(The Bangladesh Krishak Sramik Awami League)’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체해 1당 독재를 실시했다. 

그러나 1975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대통령은 피살되었고, 지아우르 라만iaur Rahman 육군참모총장이 정권을 장악하여 1978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1년 3월 해외 망명 중이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귀국하여 아와미연맹AL 당수로 취임하여 대정부 투쟁을 강화한 가운데 1981년 5월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지아우르 라만 대통령도 피살되었다. 

이후 1982년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후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Hussain Muhammed Ershard가 권력을 장악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86년에는 에르샤드가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7년 11월 야당 측의 반정부운동인 ‘다카 시지 프로그램Dhaka Siege Programme’을 시작으로 에르샤드 정권 퇴진 투쟁이 격화되었고, 1990년 10월에는 전국 규모의 정권 퇴진 운동이 확산되어 결국 같은 해 12월 에르샤드 대통령은 사임하고 민정으로의 전환에 성공하였다. 

1991년 3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 당수인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가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신정부를 출범시켰고, 1991년 9월에는 내각제 개헌이 국민투표로 통과되었으며, 10월에는 아브도르 라만 비스와스Abdour Rahman Biswas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1996년 3월에는 베굼 칼레다 지아 정부가 정국 혼란으로 퇴진하고 중립과도정부가 구성되었으며, 6월에 치러진 총선으로 아와미연맹 당수인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로 취임하여 21년 만에 아와미연맹이 재집권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사하부딘 아메드Shahabuddin Ahmed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1년 10월에는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 총리가 재집권하였고, 2001년 11월에 바드루도자 초두리Badruddoza Chowdhurry 대통령이 취임하였다가 다음 해 사임하자 이아주딘 아메드Iajuddin Ahmed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베굼 칼레다 지아 정부는 2006년 10월 반정부 시위 사태가 격화되면서 퇴진하고 과도정부가 구성되었으며, 2007년 1월 파크루딘 아메드Fakhruddin Ahmed가 임시정부 수반으로 취임하였다. 

2009년 1월 아와미연맹AL의 당수인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재집권에 성공하여 총리로 취임하였고, 2월에는 모하마드 질루르 라만Muhammed Zillur Rahman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2011년 6월 제15차 개헌을 통해 과도중립정부 제도가 폐지되었다. 2013년 3월 질루르 라만Zillur Rahman 대통령이 질병으로 사망하자 직전 국회의장인 압둘 하미드Abdul Hamid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BNP 등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2014년 1월 5일 치러진 제10차 총선에서는 아와미연맹AL이 300석 중 232 석을 획득하며 승리하였다. 

최근의 방글라데시 정세
방글라데시는 2014년 제10차 총선을 둘러싸고 여야간 갈등이 증폭되면서 정국불안이 지속되고 이에 따른 정치폭력 사태가 전국적으로 빈발하면서 치안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다. BNP 등 야당연합은 중립과도정부(Caretaker Government) 복원을 주장하면서 ‘하탈Hartal(시위 또는 총파업)'과 '봉쇄' 등 폭력시위를 선동하고 있고, 정부 여당은 폭력 선동을 이유로 야당 주요 인사들을 대거 구속시키는 등 탄압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2013년 초부터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과정에서 발생한 집단학살 강간 등 인도적 범죄의 주범으로서 야당 연합의 주축이자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당(Jamaat-e-Islami)의 주요지도자들에 대한 전범재판 결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되면서 여야간 정치 갈등이 보다 심화되고 종교적인 갈등으로까지 비화되어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 

한편 2012년 11월 타즈린 화재사고(118명 사망)에 이어 2013년 4월 다카 교외지역에서 의류공장이 입주되어 있었던 건물(라나플라자)이 붕괴되면서 1,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이로 인해 방글라데시의 근간 산업인 의류 섬유(RMG) 산업의 근로환경 문제, 노동권 보장 문제, 최저임금 문제가 불거지고 이와 관련된 의류노동자들의 시위가 빈발하면서 정세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지속적으로 정치 폭력사태를 비난하고 여야간 대화를 통해 문제해결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2014년 총선 이후에는 미, 영 등 서방국가를 중심으로 여야 참여하에 공정하고 자유로운 총선을 다시 개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더불어 방글라데시의 RMG 산업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미국은 2013년 6월 관세 특혜(GSP) 철회 및 권고사항(Action Plan) 제시, EU는 2013년 7월 방글라데시 정부-ILO-EU 3자간 합의(Sustainability Compact) 등을 통해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2015년에는 IS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까지 발생하여 나라가 온통 혼돈 상황을 겪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현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지만, IS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라고 공식으로 주장함에 따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의 내정은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치 및 행정


방글라데시의 국가 형태는 입헌공화국이며, 정치 체제는 내각책임제다. 1972년 1월 내각책임제로 출발했다가 1975년 1월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그러다 1991년 9월에 개헌을 통해 다시 내각책임제로 복귀하였다. 1972년 12월 26일 헌법이 공포되었고, 2011년 6월 제15차 개헌을 했다.

행정부
방글라데시는 내각책임제이므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교와 국방에 관한 형식적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1회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한다. 내각 총리는 행정권의 수반으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고 내각의 연대책임을 진다. 의회 다수당 총재가 총리가 되고, 내각은 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각료의 90%는 국회의원 중에서, 10%는 국회의원 피선거권자 중에서 임명한다.

2006년 10월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 정권 퇴진 후 차기 총선을 둘러싼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과 아와미 연맹 사이에 극한 대치 상황이 지속되었고, 전국적인 유혈 사태로 인해 군부 후원하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총선 때까지 정국을 관리할 과도정부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과도정부는 헌법상 총선 전 3개월만 존속하도록 되어 있으나, 총선이 2008년 말까지 연기됨에 따라 약 2년간 과도정부가 방글라데시를 통치하였다. 과도정부는 당초 부패 척결과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베굼 칼레다 지아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당수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아와미 연맹 당수를 배제한 새로운 정치 질서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을 대체할 정치 세력 형성이 시기상조라는 점이 분명해짐에 따라 이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2008년 12월 29일 총선을 실시했다.

총선 결과 셰이크 하시나 당수가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총 300석 가운데 230석을 획득하여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을 누르고 압승하였다. 2009년 1월 6일 정식 출범한 셰이크 하시나 정부는 과도정부 기간 동안 폭등하였던 쌀값을 안정화하는 한편 만성적인 전력 및 교통난 해소를 위한 다양한 국가사업을 추진하였다. 2016년 11월 현재, 방글라데시의 대통령은 압둘 하미드Abdul Hamid(2013년 4월 취임)이고 총리는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2014년 1월 재취임)이다. 

지방행정
방글라데시의 지방행정 조직은 우리의 도道에 해당하는 Bibhag(또는 Division), 군郡에 해당하는 질라Zila(또는 district), 읍邑에 해당하는 우파질라Upazila, 리里에 해당하는 유니언Union으로 분류된다. Bibag(Division)은 바리살Barisal, 치타공Chittagong, 다카Dacca, 쿨나Khulna, 마이멘싱Mymensingh, 라지샤히Rajshahi, 랑푸르Rangpur, 실렛Sylhet 등 8개로 구성된다.

각 Bibag의 행정책임자는 Divisional Commissioner(도지사)로서 정부에서 임명한다. 전체 Bibag은 총 64개의 Zila(또는 District)로 구성되는데, Zila 지방행정기관은 Zila Parishad(District Council)이며, 행정책임자는 정부에서 임명하는 Deputy Commissioner(군수)로서 Zila Parishad 의장(Chairman)을 겸임한다.

이하 Upazila, Union의 지방행정기관은 각각 Upazila Parishad(Upazila Council), Union Parishad(Union Council)이며, 행정책임자인 의장 및 부의장(Chairman, Vice-Chairman)은 각각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된다(임기 5년). Upazila Parishad 행정총괄인 UNO(Upazila Nirbahi Officer)는 정부에서 임명되나 선출직인 Upazila Chairman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아울러, 주요 인구 밀집 지역에 우리의 시市에 해당하는 City(우리의 광역시 해당) 또는 Municipality가 있다. City는 현재 총 11개로 행정기관은 City Corporation(광역시청)이며 행정책임자인 시장(Mayor)은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된다(임기 5년). Municipality는 현재 총 309개로 행정기관은 Municipal Corporations(Pourashava)이며 행정책임자인 시장(Mayor)은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된다(임기 5년).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Jatiya Sangsad)이며 의석은 350석이다. 350석 중 지역대표가 300석(소선거구제), 비례대표가 50석(전원 여성)이다. 주요 정당은 아와미연맹AL(Awami League),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Bangladesh Nationalist Party), 자티야당Jatiya Party이다. 그 밖에 자티야 사마지탄트리크당Jatiya Shamajtantrik Dal, 자마티이슬라미당JI(Jamaat-e-Islami), 노동당Workers Party 등이 있다.

사법부
영국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방글라데시의 법률체계는 관습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방글라데시 사법부의 구조는 대법원, 지방법원, 특별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법원(Supreme Court)은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Dacca에 소재하고 있으며, 상소부(Appellate Division)와 고등부(High Court Division)로 구성된다. 대법원장 및 상소부, 고등부 판사는 총리 및 법무장관의 권고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들의 정년은 65세이다. 대법원 판사의 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만큼 임명할 수 있다. 상소부 판사는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7명이며, 고등부 판사는 32명이다.

지방법원은 각 군(district)마다 설치되어 있다. 지방법원에는 형사 사건만을 담당하는 치안판사(magistrates)와 형사·민사 사건을 모두 담당하는 판사(judges)가 있다. 특별법원으로는 행정법원과 노동법원이 설치되어 있다.

경제


방글라데시의 경제 개황
방글라데시의 경제는 식민지적 경제구조로 출발했다. 차 및 황마생산을 중심으로 근대공업이 시작되었으며, 전형적인 저개발농업국가 구조를 특성으로 하고 있다. 인구 밀도 세계 1위의 국가로서 전체 인구의 약 50%가 농업에 종사하며, 농업이 국내 총생산의 21%를 차지한다. 그리고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제조업 및 기간 시설이 낙후되어 있다. 방글라데시의 주요 생산물은 황마, 피혁, 미곡, 홍차, 사탕수수이다. 그리고 주요 자원은 천연가스, 석회석, 고령토가 있으며, 도량형은 미터법과 영국식 도량형을 혼용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경제인구 구성의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인구가 과밀할 뿐만 아니라 1.29%에 이르는 높은 인구증가율(2009년 기준)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인구 1%에 해당하는 상류층이 국민 총생산의 의 90% 이상 점유하고 있으며, 2008년 재무부 경제 보고에 따르면 1일 1달러 소득 미만인 극빈자가 전체 인구의 41.3%를 차지한다. 또한 통계국은 방글라데시의 문맹률을 47.5%라고 발표했는데, 실제 문맹률은 그보다 훨씬 높은 60%에 달한다.

또한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생산성이 기후 조건이나 전기 사정에 좌우될 만큼 불안정하다. 그리고 경제 발전 및 인프라 구축 등에 필요한 투자 재원을 외국 자본 및 원조에 의존하고 있으며, 무상원조는 갈수록 줄어들고 상환 부담은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밖에도 여야 간의 극한 대립으로 인한 정치 불안정이 잦은 파업으로 이어져 수출산업 등 제조업 분야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존 자원의 부족으로 산업에 필요한 원부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아 만성적인 무역수지를 해외근로자 송금으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장규모는 매년 확대되고 있지만 낮은 국민소득으로 실질 구매력 증가가 높지 않으며, 수도 다카를 중심으로 치타공, 쿨나, 라샤히 등 주요 도시에 신흥부촌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대규모 도소매상이 없으며, 에이전트들의 활동이 활발한 특성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의하면, 2016년 명목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의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은 2,263억 달러(세계 43위)이고, 1인당 GDP는 1,286 달러(세계 146위)이다. 2014년을 기준으로 수출은 284억 달러, 수입은 416억 달러로 총 교역량은 670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 수년간 연 6%대의 경제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개발계획
2005년 이후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은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정권이 집권했을 당시 ‘빈곤 감소 전략보고서PRSP(Poverty Reduction Strategy Paper)’라는 명칭의 프로젝트로 2007년까지 3년간 시행되었다. 그리고 과도정부 기간 동안에는 빈곤 감소 전략 프로젝트가 2008년까지 1년간 연장되었다.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정권의 국가경제위원회는 2차 PRSP(2009년 7월~2011년 6월) 3개년 계획을 마련하여 7.2%의 경제 성장률을 목표로 농업 및 발전 분야를 중심으로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경제 인프라
전력 설비 현황: 송전망 시설이 9,530C-㎞(서킷킬로미터), 배전망 시설이 26만㎞로 전체 인구 중 전력 사용 비율은 47%에 달한다. 전기 공급이 비교적 안정적인 도시에서도 잦은 정전으로 산업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2014년까지 전력 수요량이 약 8,000MW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전력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방글라데시 정부는 해외민자발전사업 등으로 2015년까지 5,300MW의 추가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통신: 통신 인프라에서 고정 전화선은 국영 기업인 방글라데시 통신공사에 의해 거의 독점되고 있으나, 현재 회선수는 100만 회선에 불과하여 인구 1000명당 7대에 불과한 상황이다. 휴대폰 서비스의 경우 1989년 민간 업체에 최초 허가된 이후 현재까지 5개사가 서비스 중으로 2008년 말 4000만 가입자를 돌파하였다. 국제통신은 방글라데시 통신공사에 의해 위성이 연결된 4개의 지상중계소를 통해 독점 서비스 중이다. 철도청에 의해 현재 광케이블이 전국적으로 네트워크화되고 있다.

도로 운송: 내륙 운송화물의 63%, 내륙 승객의 73%가 도로망을 이용한다. 그리고 자무나 대교(Jamuna Bridge)의 완공으로 방글라데시 도로 운송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으며, 이어 파드마 강의 쿨나Khulna-룹샤교 등이 완공되어 동서 교통이 원활하다. 도로망과 더불어 총연장 2,880㎞의 철도는 바리살Barisal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방의 주요 도시와 연결되어 있으며, 다카Dacca와 자무나 대교 간 42㎞ 철로가 2005년 말 완공되어 국토의 동서 연결이 가능하다. 내륙 운송화물의 30%, 내륙 승객의 20%~25%가 철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46개의 상업용 열차(우편, 특급, 지방)가 운영 중이며, 이 가운데 26개의 열차편이 민영화되었지만 대부분의 열차가 50년 이상 되어 노후화가 심각하다. 

산업 정책과 동향
방글라데시는 매 3년~5년마다 산업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정책의 주된 내용은 식량 자급을 목표로 농업의 발전 관련 공업 부문에 대한 중점 투자, 수출 품목 다변화를 위한 트러스트thrust 산업에 대한 지원 확대, 산업 입지의 분산을 통한 지역 간 균형 발전 도모, 수입대체산업 육성 등이다.

방글라데시는 점차 전통적인 농업 위주 산업구조에서 탈피하여 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으나, 아직까지는 의류산업 이외에 뚜렷한 전략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입으로 대체하는 수준이다. 제조업은 기초산업의 부재로 대부분의 자본재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제조업 가운데 섬유(봉제) 산업이 전체 수출의 79%를 점유하고 있다. 기타 의약품, 냉동 어류, 황마, 차, 가죽 등을 수출한다. 최근에는 식음료 및 담배, 화학 및 고무 플라스틱, 제지 및 인쇄출판 등 분야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다.

향후의 전망
IMF는 2016년 10월 초 발표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방글라데시가 2016년에 6.9%의 성장을, 2017년에도 6.9%의 성장(GDP증가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방글라데시의 7년 연속(2010년부터) 6%대 경제성장과 2006년(6.9%) 이후 가장 높은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IMF는 방글라데시의 2017년 각 경제지표에 대해 GDP성장률 6.9%, 1인당 GDP 1,508달러, 인플레이션 6.9% 등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망은 방글라데시 최대산업인 봉제업의 수출이 다소 회복된 가운데 농업생산과 해외근로자 송금 호조가 이어지고, 2015년 하반기 이후 정정이 다소 안정됨에 따라 내수 및 신규투자도 더디나마 회복되는 추세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1인당 GDP가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향후 방글라데시 국내 소비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전망인데, 특히 화장품 등 미용 관련 산업, 현대식 식품유통망, 프랜차이즈 등 식품과 소비재 및 연관 산업분야에 대한 기업의 투자가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기업은 여전히 현지 협력업체를 통한 간접 진출을 선호하고 있으나, 성장일로에 있는 내수소비시장을 잡기 위해서는 안테나숍의 운영 등 직접 진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방글라데시의 인터넷 사용 인구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산업과 소비 양상을 만들어가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방글라데시 대기업들은 내수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를 추진하고 있으나 신제품 설비를 들여올 여력이 없어 중고설비 및 기술 수입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특히 직접적인 가격 비교에 노출되지 않는 생산라인의 일괄 수출의 경우 높은 수익성도 함께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와 문화


문화예술의 특징

방글라데시의 문화예술은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과 방글라데시 고유의 것, 그리고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근대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방글라데시 기층 문화로서 음악과 춤 중 일부는 인도문화와 접목이 되어 있다. 대표적인 전통음악으로는 바티아리Bhatiali, 바울Baul, 마르파티Marfati, 무르쉬디Murshidi, 바와이야Bhawaiya 등이 있다. 음악과 춤에 사용되는 악기들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 드럼 등 다양하며, 여러 가지 악기의 아름다운 협주를 통한 연주가 청중을 사로잡는다.

특히 방글라데시인들은 시詩에 대한 열정이 높은 편이다. 라론 샤Lalon Shah, 하손 라자Lason Raja 등의 걸작이 있다. 20세기 작가인 카디 나즈둘 이슬람은 방글라데시의 국민시인이며, 방글라데시 사람인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1913년 노벨상을 받았다. 타고르의 시 ‘우리의 황금 벵골’은 방글라데시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세계에 널리 알려진 시성詩聖 타고르도 방글라데시 출신일 정도로 온 국민이 시를 사랑하며, 그 때문인지 몰라도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손꼽힌다. 

수공예는 방글라데시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예술품이다. 중세 시대의 수공예품은 주로 직물, 금속물, 보석가공, 목각품, 대나무 목각, 토기 제작 등이었으나 이후 가죽이 수공예품의 재료가 되었다. 낙쉬 칸타Nakshi Kantha라는 자수품이 가장 대중적인 수공예품이다. 

민족의 구성
방글라데시는 벵골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일 민족국가라 할 수 있다. 소수민족 구성비가 낮아 비교적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가 분할되는 과정에서 다른 지방의 무슬림인(특히 비하르 주 출신의 비하리인)들이 소수 이주해 오긴 했으나, 원래부터 벵골인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더욱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때 다른 민족의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으로 이주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비하리인은 전쟁 직전에는 100만여 명이 살고 있었으나, 상당수가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 나머지 15만 명은 피난을 갔다가 난민촌에 살면서 파키스탄 국적 혹은 방글라데시 국적도 얻지 못한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2009년에 대법원 판결에 의해 국적을 부여받았다. 그 결과 현재 동부에 거주하는 불교계 소수 민족 원주민들이 비하리인보다 많아졌다. 방글라데시 내 소수 민족은 약 12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치타공 시의 구릉지대CHT(Chittagong Hill Tracts)에는 독특한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100만 명의 13개 소수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종교와 교육
방글라데시는 국민의 83%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그 밖에 힌두교가 16%를 차지하고, 불교 0.7%, 기독교 0.3% 등이다. 1988년 6월 8차 헌법 개정 시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언하였다. 방글라데시 이슬람교 종파는 수니Sunni파이다. 전국적으로 20만 개 이상의 이슬람사원(Mosque)이 있고 수도 다카에만 2,000개의 이슬람사원이 있다. 방글라데시의 이슬람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영향력이 지대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미약한 편이다. 

방글라데시는 정부의 노력으로 1990년 초부터 초등학교 취학률이 높아져 현재는 97%에 이르고 있으나, 교육수준은 전반적으로 낮다. 방글라데시의 #교육 정책#은 이슬람교 이념과 가치 전수에 중점을 두는 한편,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고급 기술 인력 및 기능 인력 수요 충당을 우선으로 삼고 있다.

학제는 초등 5년, 중등 5년, 고등 2년, 대학 2년~5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은 컬리지College와 유니버시티University로 나뉜다. 컬리지는 2년 과정이며 일반교양 과목을 이수하여 졸업하면 문리학사를 취득할 수 있다. 유니버시티는 3년 과정인데, 컬리지 졸업 후 유니버시티 진학을 위해 자격시험을 치러야 하며, 유니버시티를 졸업하면 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방글라데시를 대표하는 대학교로는 다카 대학교University of Dhaka, 노스사우스 대학교North-South University, 치타공 대학교University of Chittagong, 방글라데시 농업대학교Bngladesh Agricultural University, 라지샤히 대학교University of Rajshahi, 쿨나 대학교University of Khulna, 방글라데시 엔지니어링 대학교Bangladesh University of Engineering and Technology, 개방 대학교Open University 등이 있다. 

언론
방글라데시는 언론의 자유가 비교적 잘 보장되어 있으며 신문사가 상당히 많다. 20여 개의 언론기관이 있으며, 150종 이상의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다. 총 발행 부수는 160만 부에 이른다. 그 가운데 다이닉 인킬라브Dainik Inqilab와 다이닉 이테팍Dainik Ittefaq이 유력지인데, 둘 다 벵골어 신문이다. 영자 신문으로는 더 데일리 스타The Daily Star와 더 방글라데시 옵서버The Bangladesh Observer가 유명하다.

현지어 라디오 방송은 방글라데시 베타Bangladesh Betar, 라디오 투데이Radio Today, 라디오 푸르티Radio Foorti, ABC 등 4개 채널이 운영되고 있다. TV는 국영으로 운영되는 방글라데시 TV와 11개의 민영 케이블 방송이 있다. 케이블방송은 채널-I, ATN 방글라Bangla, NTV, RTV, 방글라 비전Bangla Vision, STV, 바이사키Baishaki TV, 마이My TV, 채널 원Channel One, 디간타Diganta TV, 이슬라믹Islamic TV 등이다.

통신사로는 국영 방글라데시 상바드 상스타BSS(Bangladesh Sangbad Sangstha)와 방글라데시 유나이티드 뉴스UNB(United News of Bangladesh)가 있다. 그리고 로이터Reuters, AP, AFP, 신화사 등 외국 통신사 현지 에이전트가 주재하고 있다.

관광
방글라데시의 관광지는 이슬람교적 배경 및 경제활동 부진 등의 이유로 거의 개발이 안 된 상태이다. 주요 관광지는 유네스코가 자연보호지역으로 지정한 순다르반Sundarban, 치타공Chittagong 남부 지역에 위치한 세계 최장 해안선인 콕스 바자르Cox’s Bazar 해안, 랑가마티Rangamati 지역에 있는 카프탈 호수Kaptal Lake, 치타공 구릉지대Chittagong Hill Tracts 소수 민족촌, 북부 실렛Sylhet 차농원 등이 있다. 

한국과 방글라데시의 관계


외교 관계
한국은 1972년 5월 방글라데시 정부를 승인했으며, 1973년 9월 영사 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같은 해 12월 양국간에 정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1975년 3월에는 주 방글라데시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으며, 1987년 2월에는 주한 방글라데시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방글라데시는 과거 비동맹 중립외교 노선을 표방하면서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1990년대 이후 한국과의 실질 협력관계가 심화됨에 따라 북한과의 관계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방글라데시는 북한 핵문제 및 남북한 관련 사안에 대해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2009년에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2차 핵실험에 대해 북한 비난 정부 성명을 발표하였다. 현재도 방글라데시는 국제 협약에 따라 한국의 입장을 적극 대변해 주는 우방국이다. 

경제 관계
한국과 방글라데시는 2014년 기준으로 15.9억 달러의 교역량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대對방글라데시 수출은 12.4억 달러이고 주요 수출품목은 합성수지 경우 열연강판 등이며, 대對방글라데시 수입은 3.5억 달러이고 주요 수입품목은 의류 섬유 가죽 등이다.

한국의 대對방글라데시 투자는 2015년 9월까지 누계를 기준으로 6.02억 달러(신고금액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1978년 (주)대우에서 방글라데시 정부와 봉제 합작투자를 한 것이 시초인데, 이는 방글라데시 섬유산업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영원무역의 합작투자 진출이 이루어지면서 방글라데시는 의류생산기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기업의 대 방글라데시 투자는 한국의 임금이 급상승했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본격화되었고, 1994~1999년 사이의 기간 동안 피크에 달했다. 1997년 방글라데시 정부가 섬유쿼터 확보 목적의 단순가공 분야의 투자를 제한하고 섬유 전후방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조건부 투자를 허용하면서 우리나라의 방글라데시 투자 진출은 감소세를 보였다. 2002년 이후 방글라데시에 대한 연간 투자액은 1990년대 중후반에 비해 훨씬 적은 수준을 보였다. 그러나 2010년부터 투자가 다시 증가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사상 최대(4,483만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중국, 베트남 등의 생산비용 상승에 따라 방글라데시와 같은 저임금국에 대한 진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으로 관측된다.

우리나라는 섬유 및 의류 등 제조업에 투자가 집중되어 있으며, 일본과 함께 이 분야 최대 투자국의 하나이다. 방글라데시 투자통계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 우리나라는 섬유 의류 분야에서 최대 투자국(2억 9,534만 달러)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연구개발센터(삼성전자), 은행(우리은행) 등 새로운 분야로 우리기업의 투자가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대對한국 수출은 한국의 대對방글라데시 특혜관세 공여 품목 확대로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현재 방글라데시 정부는 석탄발전소(15억 달러), 원전(20억 달러), Sonadia 심해항(140억 달러), LNG 터미널 건설(10억 달러)등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데 한국 기업은 파드마대교 시공감리, 복합화력발전소 건설, SASEC 도로 시공감리 등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2014년 1월 방글라데시 방산품목 조달등급이 상향 조치가 된 이후 우리 방산제품의 수출도 증가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공동위원회 및 친선단체
1985년 6월 에르샤드 방글라데시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체결된 양국 대통령 간 공동성명(제9조)에 따라 매년 서울과 다카Dacca에서 양국 외무장관을 수석대표로 하여 무역, 투자, 기술협력 등의 사안을 다루기 위한 공동위원회를 교대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86년 다카에서 제1차 공동위원회가 열렸고, 1987년 제2차 공동위원회, 1993년 제3차 공동위원회가 열린 바 있다.

양국 간 친선단체로는 1988년 결성된 ‘한국-방글라데시 의원친선협회’와 1985년 결성된 ‘한국-방글라데시 경제협력위원회’, 그리고 1980년대 말 창립된 ‘한국-방글라데시 문화친선협회’가 있다. 이밖에도 ‘한국-방글라데시 국제협력단 연수생 동창회’와 ‘한국-방글라데시 친선협회’ 등 정부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들이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재외동포 현황
2014년 1월 현재 우리나라 재외국민으로 방글라데시 체류자는 약 1,100명이며, 주로 섬유봉제 투자자, 기술자, 상사주재원, 자영업자, 비정부기구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 종사자, 선교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인단체로는 1982년 12월 10일에 창립한 재 방글라데시 한인회, 1978년 1월에 창립한 다카 한인교회, 다카 선교교회, 한국민간문화원 등과 더불어 섬유회, 투자자협의회, 상사협의회, 자영업회(요식업 및 숙박업) 등도 있다. 2012년 기준 인적 교류 현황을 살펴보면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한국인은 7,578명이고, 한국을 방문한 방글라데시인은 5,423명으로 집계되었다.

북한과의 관계
방글라데시와 북한은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77년 5월 주방글라데시 북한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방글라데시는 북경에 있는 주중국 공관이 북한을 겸임하고 있다. 초기에는 양국이 같은 비동맹회원국으로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실질 관계에는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2년 에르샤드Ershad 대통령 집권 이후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와의 경제협력을 중시하며 남북한 등거리외교정책 노선으로 전환하였고, 2008년 집권한 하시나Hasina 총리 정부가 경제 발전에 우선 순위를 둠에 따라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심화되는 반면 북한과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져 가는 추세이며, 방글라데시 정.재계 및 언론에서도 북한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경제 통상 관계에 있어서 양국은 1997년 구상무역협정(Barter Protocol)을 체결하였지만 무역 실적은 미미한 편이며 특별한 경제협력관계 또는 무상원조 실적도 별다른 것이 없다. 북한의 대표적인 대對방글라데시 투자 사례로는 마드하파라 지역 경석 광산 개발 사업에 약 1억 5,800만 달러를 투자한 것을 들 수 있고, 방글라데시의 대對북한 투자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7/2008년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의 대對북한 수출은 8,701만 달러, 수입은 1,281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2010년 2월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에 진출한 북한 인력은 북부 Dinajpur지역 경석 채굴 공사장에 근로자 및 기술자 27명과 다카 시내 북한식당 ‘평양관’에서 상주하는 종업원 및 요리사 등 총 10여 명, 그리고 다카 지역을 중심으로 나가 있는 북한인 한의사 3명 등이다. 방글라데시 내 친북한 단체로는 ‘방-북한 친선협회’와 ‘방글라데시 주체사상연구소’ 등이 있다. 





샤히드 디보쉬 Shahid Dibosh (모국어의 날)


매년 2월 21일은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로 ‘샤히드 디보쉬Shahid Dibosh’라 불리는 ‘언어 수호의 날’이다. 이 날은 유네스코가 정한 ‘국제 모국어의 날’(Internatianal Mother Language Day)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인들에게 이 날은 국가의 독립 및 언어와 관련하여 특별한 역사와 더불어 민족적 자부심을 갖는 날이다. 여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1757년 이래 오랜 시간 동안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방글라데시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파키스탄의 11개 주 가운데 1개 주(동東 파키스탄 또는 동東 벵골)로 독립을 하였다. 당시 동서 뱅골 지역은 종족과 언어가 달랐지만 이슬람이란 종교적 공통점 때문에 파키스탄과 묶여 동 파키스탄으로 독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파키스탄 정부(서 파키스탄)는 동 벵골(방글라데시) 주민들을 대상으로 공공연히 경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하였고, 그러한 차별로 인한 불만들이 점점 누적되어 극에 달했을 시점에서 파키스탄 정부는 동 벵골인들에게 비수를 꽂는 결정적인 조치를 발표하게 된다. 동 벵골에 대한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벵골어를 말살하고 파키스탄의 우르두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한 것이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벵골어를 제외시키고 문학에서도 모국어 표현을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 벵골의 다카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소위 ‘언어운동’이라 불리는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과 많은 시민들은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벵골어가 파키스탄의 공식 언어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부상이나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들의 삶을 바쳤다. 방글라데시 역사에 길이 남을 이날이 1952년 2월 21일이었다. 이날의 시위에 대해 서파키스탄 군인들이 폭력 진압으로 대응하면서 이 사태는 방글라데시 독립 운동 개시의 촉매 역할을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결과 1956년 드디어 벵골어가 국가 공식 언어로 정식 공표되는 결실을 이루게 되었고, 1971년 3월 2일에는 방글라데시가 파스키탄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1999년 11월 17일, UN의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2월 21일을 ‘국제 모국어의 날’로 지정하였다. 이는 방글라데시 언어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수용하여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 다언어多言語의 사용, 그리고 각각의 모국어를 존중하자는 뜻에서 지정된 기념일이다. 모어母語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자 권리를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방글라데시Bangladesh라는 국명은 벵골어를 뜻하는 ‘방글라Bangla’와 나라를 뜻하는 ‘데시desh’가 합쳐진 이름으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나라’를 뜻한다고 한다. 이 국명을 보더라도 방글라데시인들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알 수 있다. 

방글라데시의 대학 캠퍼스와 마을의 입구에는 샤히드 미날Shaheed Minar이라 불리는 기념비가 위치해 있다. 이것은 파키스탄의 벵골어 말살 정책에 대항해 싸우다가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매년 2월 21일 되면 많은 사람이 가까운 샤히드 미날을 찾아 꽃을 바치며 희생된 이들을 추모한다. 특히, 다카대학교 캠퍼스의 샤히드 미날에는 대통령이나 총리, 많은 정치인뿐 아니라 전국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온종일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에는 관련된 기념 행사나 공연 등이 온종일 이어진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이라 하여 세종 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반포를 기념하기 위한 국경일로 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여러 연구 등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방글라데시인들만큼 모국어에 대해 자부심과 존중심을 갖고 있는지 한 번쯤 자문해 보았으면 한다.

문화적 금기 사항

방글라데시에서는 기본적으로 이슬람교의 계율에 반하지 않게 행동할 필요가 있으며 문화적으로 금기시되는 사항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우선 악수를 하거나 물건을 받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해야 하며, 왼손은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므로 사용에 유의해야 한다. 

여성들은 허리 위 부분의 노출은 할 수 있으나, 허리부터 발끝까지는 철저히 가려야 한다. 여성이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성적으로 문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방글라데시에서 여성이 반바지를 입는 경우는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은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인사할 때도 여성과는 악수를 하지 않는다. 여자를 빤히 바라보는 것도 실례가 된다. 

또한 발끼리 부딪히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므로 남의 발을 밟았거나, 부딪혔을 때에는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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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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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문명의 발원지 페루

페루는 남미 대륙에 있는 다인종 국가로 마추픽추의 나라로 불릴 만큼 고대 잉카문명을 활짝 꽃피운 곳이다. 16세기 초에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 근 300년 동안 통치를 받다가 산 마르틴, 시몬 볼리바르 등의 영웅들에 의해 1824년 독립을 달성한 뒤, 여러 권력자들의 정쟁과 좌익 테러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1990년대 이후 점차 안정을 찾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고대 문화유산을 잘 간직하고 있는 나라로 알려진 페루는 고유의 원주민 문화와 유럽풍 문화가 병존하고, 대가족 중심의 생활 양식과 문화를 전통으로 보존해 온 나라이기도 하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꾸준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개발도상국으로서, 정상 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형성해 가고 있는 페루를 찾아가 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페루공화국República del Perú(Republic of Peru)은 남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한 태평양 연안국가로, 전체 면적은 1,285,220㎢이며 멕시코 면적의 3분의 2, 한반도 면적의 약 6배 정도이다. 에콰도르와 콜롬비아가 북쪽에 있고 브라질이 동쪽, 남동쪽으로 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와 접하고 있으며 태평양 연안을 끼고 있다. 안데스 산맥이 태평양 해안을 따라 뻗어 페루 전역을 3등분한다. 서쪽에 있는 해안 지방(costa)은 좁은 평원으로 계절에 따라 강이 생겨서 형성된 계곡을 제외하면 대개 건조한 곳이다. 고원 지방(sierra)은 알티플라노altiplano 고원이 있고 페루에서 가장 높은 6,768m의 우아스카란Huascaran 봉우리가 있다. 정글 지방(selva)는 동쪽으로 펼쳐진 아마존 강의 열대우림으로 뒤덮인 넓은 평원이다. 이 지역은 페루 국토 전체의 60%를 차지하며, 브라질, 콩고,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세계 네 번째의 열대 우림이다.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에서 여러 페루의 강이 발원한다. 페루의 주요 강은 우카얄리Ucayali 강, 마라뇬Maranon 강, 푸투마요Putumayo 강, 야바리Yavari 강, 우아야가Huallaga 강, 우루밤바Urubamba 강, 만타로Mantaro 강, 아마존Amazon 강 등이 있다.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티티카카Titicaca 호수는 운송로로 이용 가능한 호수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발 3,812m에 있으며, 수량도 남아메리카 전체에서 으뜸이다.

페루는 열대 기후만 있는 것은 아니며, 안데스 산맥과 훔볼트 해류의 영향으로 기후 변화가 다양하다. 해안 지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강수량이 적고 북쪽 산자락을 제외하면 매우 습한 편이다. 산지 지방에서는 여름에 비가 잦으며 고도가 올라갈수록 기온과 습도가 떨어져서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는 얼음이 있다. 정글 지방에서는 비가 아주 많이 오고 날씨도 무덥지만 남부 끝 지역은 겨울이 춥다.


페루의 역사


고대역사
페루의 역사는 안데스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한 원시 수렵 농경 시대(BCE 약 2만 년 전~BCE 3000)로부터 출발하며, 원주민을 몽고계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페루 지역은 잉카Inca제국의 발원지로 유명하지만, 그 이전의 초기 고대 문명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까랄Caral 문명이다. 이 문명은 미주대륙 최초의 도시 문화를 형성한 문명으로, 약 5,000년 전 이집트의 나일강 문명이나 인도의 갠지스 문명과 동시대에 번성하였으며, 페루 북부 해안지대 유적지에 피라미드, 원형극장, 주거지 등의 유적을 남겼다. 또한 페루 최초의 정착 농경문화를 형성한 차빈Chavin 문명(BCE 1200~200)은 페루 북부 지방인 현재의 앙카쉬Ancash 주州에서 발생했으며, 금세공 및 도자기 제작에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었다. 

페루의 제1기 토착문화 시기(BCE 3C~CE 8C)에는 페루 북부 지방인 현재의 라 리베르타드La Libertad 주 트루히요Trujillo 시를 중심으로 모치카Mochica 문화가 번성했다. 모치카 문화는 관개수로 축조 기술과 치수治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농업을 발전시켰고, 무기와 연장, 장신구 제작을 위해 구리를 사용한 동기銅器 문화도 선보였다. 이와 함께 페루 중남부에서는 리마Lima, 나스카Nazca 문화 등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토착문화 시기가 끝난 후 와리Wari 제국(8C~12C)이 티티카카Titicaca 호수를 중심으로 페루 전역에 걸쳐 통일국가를 형성함으로써 와리Wari 및 티아나와꼬Tiahuanaco 문화가 조성되었고, 와리 제국의 쇠퇴 이후에는 북부지역에 치무Chimu, 중부지역에 찬카이Chancay, 남부지방에 이카Ica 토착문화권이 형성됨으로써 제2기 지역문화(12C ~15C 중엽)가 펼쳐졌다.

잉카제국(1200~1500년)
페루의 여러 부족국가는 15세기에 잉카의 지배 체계로 편입되었으며,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에는 안데스를 중심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지배하는 광대한 잉카제국Inca Empire을 건설하였다. 태양신이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잉카(최고 지도자)는 태양의 아들이란 의미이고, 잉카 왕실의 혈통인 귀족 계급을 기반으로 통치하였다.

스페인 식민시대
1532년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내란상태에 있는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1544년에는 스페인이 페루에 부왕청 (Virreynato)을 설치해 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18세기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청(Virreinato de Nueva Granada, 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파나마 일대),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청(Virreinato del Río de la Plata, 아르헨티나) 설치 시까지 170여 년간 페루는 남미 전체를 관할하는 스페인의 식민통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페루 독립운동
19세기 초 페루에서는 식민지 출신 백인을 가리키는 크리올료Criollo 계층이 중심이 되어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독립 운동은 과도한 세금 등 식민지 수탈정책, 크리올료들에 대한 고위직 진출 제한, 유럽견문에 따른 자유계몽 사상의 전파,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을 계기로 스페인 식민지에 대한 통제력의 급격한 감소 등이 촉발 요인으로 작용했다. 1814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인디오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페루의 독립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남아메리카 제국의 독립 운동을 이끈 산 마르틴San Martín 장군에 의해 선도되었다. 그는 독립 혁명군을 지휘하여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칠레에서 국가 수반에 오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의 지원으로 페루의 독립을 위한 해방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1820년 산 마르틴은 영국 출신 토머스 코크런Thomas Cochrane 제독의 함대 지원을 받아 칠레 발파라이소 항을 출항하여 1821년 7월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리마로 진격하여 페루의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페루의 보호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페루가 마침내 독립을 확립하기까지는 내륙 고지에서 저항을 계속하던 스페인 부왕군과 이를 공공연히 지원하기까지 한 기득권 지배층 크리올료들과 맞서 3년을 더 싸워야 했다. 마침내 1824년 베네수엘라 출신의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와 토레 타글레Torre Tagle 총독이 연합한 독립군이 다시 리마에 입성하여 스페인군을 격퇴함으로써 페루에 대한 300년간의 스페인 식민통치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달성하였다.

독립 이후의 역사
페루는 공화국 초기에 군사 지도자들 사이의 지역적 권력 다툼으로 정치가 불안하였다. 1826년 신헌법에 의해 시몬 볼리바르가 페루의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그란콜롬비아 사태로 물러났다. 1836년 10월에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Andrés de Santa Cruz에 의해 페루 - 볼리비아 연방(Peru - Bolivia Confederation)이 창설되었으나, 남미 남부 지역에서 세력 균형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강력히 반발해 전쟁을 벌임으로써 결국 1839년에 연방은 해체되고 말았다. 

연방 해체 후 페루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기를 맞이했으나, 그 혼란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 바로 페루 최대의 카우디요Caudillo(강력한 지배권을 장악한 정치 및 군사 지도자)인 라몬 카스티야Castilla y Marquesado, Ramón였다. 184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 페루는 라몬 카스티야 대통령 하에서 구아노guano 수출을 통한 국가 수입 증대로 안정기를 맞았다. 구아노는 수천 년 동안 페루 해안에 쌓인 조류의 배설물로써 1840년경부터 비료의 주원료로 이용되어 왔는데, 19세기 초 페루는 구아노의 수출로 국고 수입의 80%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1870년대에 이르러 구아노가 고갈되면서 국가는 빚더미에 올랐고 정치 내분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칠레와 볼리비아 간에 아타카마 사막 지대의 구아노 생산지에 대한 경제적 이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면서 소위 태평양 전쟁(Guerra del Océano Pacífico, 1879~1884년)이 발발하였고 페루도 이에 개입되어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칠레가 승리하면서 페루는 동맹국인 볼리비아와 함께 패전국이 되었다. 전쟁 후 미국의 중재로 1929년 체결된 리마Lima 조약에 따라 아리카Arica주는 칠레에 귀속되고, 타크나Tacna주는 페루에 반환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페루에서는 내부 정쟁이 이어지다가 시민당(Partido Civil) 시대에 안정을 되찾았으나, 1919년 아우구스토 B. 레기아Augusto B. Leguía의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11년간 집권했던 레기아는 대공황으로 몰락하고 다시 정치 분쟁이 일어났으며 미주인민혁명동맹(APRA, Alianza Popular Revolucionaria Americana)이 등장하였다. 이후 이들의 반대파와 상류층-군부의 연합이 서로 대립하면서 30여 년간 페루 정계를 주도하였다.

1968년에는 좌경 성향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Juan Velasco Alvarado 장군이 무혈 쿠테타를 통하여 집권, 급진적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사회 동원제도를 채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75년 쿠데타로 집권한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Francisco Morales Bermúdez 대통령은 개혁에 손을 놓고 방관하다가 민정이양 계획을 발표하고 1980년 총선에서 당선된 민중행동당(Acción Popular)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Fernando Belaúnde Terry 후보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1980년대 페루는 많은 외채와 인플레이션 상승, 마약 밀매, 그리고 좌익 테러단체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과 MRTA(투팍아마루 혁명운동, Movimiento Revolucionario Túpac Amaru)의 테러활동 격화 등 극도의 사회 불안상태가 지속되는 국정의 혼란이 이어졌다. 

1985년 등장한 APRA당의 알란 가르시아Alan García 정권에서는 은행 국유화, 외채상환 거부 등 급진적 경제정책이 시행되었으나 정치 경제적 불안정을 막지는 못했으며, 1990년 대선을 통해 ‘Cambio 90’ 당의 일본계 알베르또 후지모리Alberto Fujimori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후지모리는 1993년 헌법 개정에서 대통령 연임이 허용됨으로써 1995년 4월 총선에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런데 2000년 11월 블라디미르 몬테시노스Vladimir Montesinos 정보부장 수뢰사건으로 후지모리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 참석 후 일본으로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는 2005년 칠레에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2007년 페루로 인도되었으며, 2010년에 25년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이다. 

후지모리 사태 이후 2000년 11월 발렌틴 파니아구아Valentin Paniagua 국회의장이 과도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새 내각을 구성했고, 2001년 7월에는 알레한드로 톨레도Alejandro Toledo가 원주민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2006년 6월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는 APRA당의 알란 가르시아Alan García가 16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2011년에는 가나 페루Gana Perú 당의 우말라Humala 후보가 51.48% 득표로 케이코 후지모리Keiko Fujimori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말라 대통령은 취임 후 당초 좌파민족주의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대외개방 및 시장 친화적 정책기조를 유지하였고, 아울러 사회통합(social inclusion)을 위해 아마존 지역 등 낙후된 지역을 지원하고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최근 2016년 6월에는 전직 총리이자 경제학자인 77세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Pedro Pablo Kuczynski가 역대 최고령 기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치 및 행정


행정부
페루는 대의제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대통령 중심제로 정치 체제를 운영하는 국가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 겸 행정부 수반으로,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데 유효 투표수의 과반수 이상을 득표해야 당선된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 후보가 없을 경우 2차 결선투표 실시하며, 임기는 5년(연임 불가, 5년 후 재출마 가능)이다. 대통령 아래에 제1, 제2 부통령 제도를 두고 있으며, 행정부인 내각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18명의 각료와 각료회의 의장으로 구성되고, 각료 교체 시마다 내각 전체에 대한 의회의 별도 인준이 필요하다. 

2016년 6월 5일 치러진 페루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변화를위한페루인당PPK’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Pedro Pablo Kuczynski가 50.12%의 득표율로 케이코 후지모리 후보를 42,597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쿠진스키는 당선 후 신임 국무총리에 페르난도 사발라 롬바르디Fernando Zavala Lombardi를 지명했다.

쿠진스키 신정부의 정책방향은 시민안전 확보 및 부패방지, 경제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범정파적 연합정부 구성을 통해 대선 과정에서 표출된 지역간, 계층간 분열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는 국민통합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지적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소속 정당인 ‘변화를위한페루인당’이 국회 내에서 18석으로 제3당의 지위에 머물고 있어 여타 정당과의 연합전선 구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지방행정
헌법에 의하면, 페루의 정부조직은 중앙정부(Gobierno Nacional), 지방정부(Gobierno Regional), 지역정부(Gobierno Local)의 3개로 구분되며, 이는 페루 헌법상 영토 구분과 연계되어 있다. 지방 행정구역은 Region(광역도), Departmento(주/도), Provincia(시/군), Distrito(구/읍/면)로 구분된다. 수도인 리마Lima 시는 리마 주(Departmento)의 관할권에 속하지 않고, 광역시(Provincia Metropolitano)의 특별지위를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페루는 25개의 주와 1개의 리마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주는 4년 임기의 주지사와 주 의회를 선출한다. 리마 군은 시 의회가 관할한다.

입법부
페루의 국회는 단원제 의회로 임기 5년의 의원 130명으로 구성되며, 정기국회 회기는 제1회기(7.25~12.15)와 제2회기(3.1~6.15)로 나누어진다. 정기국회 폐회 시에는 의장단을 포함한 20명 이상의 의원들로 구성된 상임위원회(Comisión Permanente)가 운영된다. 국회의장단은 의장 및 부의장 3명(1년마다 선출)으로 구성되고, 총 24개의 일반위원회(Comision Ordinaria)가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우말라Humala가 2005년 설립한 좌파 민족주의 성향의 페루민족주의당PNP(Partido Nacionalista Peruano),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인 케이코 후지모리Keiko Fujimori가 2010년 설립한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인민권력당(Fuerza Popular), 1924년 Haya de la Torre 주도로 설립된 사회민주주의 좌파 성향의 미주인민혁명동맹당APRA(Partido Aprista Peruano), 톨레도Toledo 전 대통령이 1994년 설립한 자유민주주의 중도 성향의 Peru Posible당(Perú Posible), 1956년 테리Terry 전 대통령이 설립한 민족민주주의 중도 성향의 민중행동당(Acción Popular), 1966년 민주기독당에서 분리된 기독민주주의 중도우파 성향의 인민기독당PPC(Partido Popular Cristiano), 1996년 루이스 카스타녜다Luis Castañeda가 설립(2006년 등록)한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국민연대당(Solidaridad Nacional) 등이 있다. 

사법부
페루의 사법체제는 대륙법 체계를 따르고 있으며, 사법행정권은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일반법원은 3심제로 운영되며, 대법원(Corte Suprema de Justicia)과 28개의 고등법원(Corte Superior de Justicia), 195개의 지방법원(Juzgado de Primera Instancia)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법원은 대법원장 및 18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는데, 대법원장은 중앙법관회의CNM(Consejo Nacional de Magistrados)에서 과반수 투표로 선출하며 임기는 2년이고, 대법관의 임기는 70세 정년제로 운영된다. 대법원은 위헌심사 사건을 제외한 모든 일반사건의 최종심을 담당한다.

그밖에 소장, 부소장 및 5명의 재판관 등 7명으로 구성되는 헌법재판소(Tribunal Constitucional)를 두고 있고, 국민의 기본권 보호 및 행정기관으로부터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보호를 위해 인권보호관(Defensor del Pueblo: 국회에 의해 임명되는 옴부즈만) 제도도 운영되고 있다. 또한 특별법원으로 군사(경찰)법원을 두고 있는데, 군사법원 재판관에는 현역군인 임명이 금지되며 국가사법위원회CNM(Consejo Nacional de la Magistradura), 공개 시험을 통해 군사법원 판사를 선발한다. 

대외정책
페루의 대외정책 기조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인종차별주의를 바탕으로 유엔헌장 및 미주기구 헌장의 원칙과 규범을 준수하고, 국내문제 불간섭 원칙을 존중하며, 국제조약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보편성 원칙 및 다원주의에 입각한 세계 모든 국가와의 관계 수립과 개발도상국과의 협력 강화, 신국제경제질서의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주요 대외정책의 방향으로 삼고 있다. 

페루는 역내 중남미 국가와의 결속 강화를 위해 남미국가연합(UNASUR) 메카니즘을 통해 역내 국가 간 협력 및 국제위기에 공동 대처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고, 지역 통합 강화 방안으로 브라질과 전략적 동맹관계의 심화 발전을 추진 중이며, 콜롬비아 및 에콰도르와의 합동각료회의 정기적 개최 및 브라질과의 인프라 연결 등을 추진하고 있다. 

서방 선진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서는 과거 비동맹 지향 외교에서 탈피하여 미국, 캐나다, EU 등 대서방국 외교를 중시하는 정책을 펴고 있고, 당초 우려와는 달리 기존 자유무역협정(FTA)을 존중, 시행하는 한편 추가적 FTA 협상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페루는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 멕시코, 파나마, 한국, 태국 등 주요 교역국들과 FTA를 체결하였으며, 터키, 인도, 호주, 브라질 등과는 협상을 개시하거나 검토 중에 있다. 

페루는 또한 아태 지역 외교에 정책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1998년 APEC에 가입하여 태평양 연안국과의 관계 강화를 추진(2008년 APEC 정상회의 개최)하였고, 최근에는 개방정책의 상징적 의미의 하나로 환태평양공동체TPP(Trans-Pacific Partnership) 협상에 적극 나서고 있으며 동 협상에서 인프라 개발, 저소득 지역 소득 증가 등 비전통적 이슈에 대한 논의를 강조하고 있다. 페루는 칠레와 함께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과 모두 FTA를 체결한 유일한 중남미 국가로서 아시아 주요 국가와의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경제


페루의 경제 개황
2000년 이래 연평균 6% 수준의 빠른 성장을 구가해온 페루 경제는 에너지 광업 분야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유치정책에 힘입어, 최근에도 2010년 8.5% 2011년 6.5%, 2012년 6.0%, 2013년 5.8%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페루 경제가 고도성장을 시현해온 가장 큰 기반은 무엇보다도 근래 광물 등 원자재 가격의 상승(원자재 수출액이 전체 수출의 70% 차지)에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014년에는 중국 등 주요 국가의 자원 수입 감소, 페루의 주요 수출품목인 원자재 가격 하락 등으로 성장속도가 둔화되어 예년보다 낮은 2.4%의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2015년에는 3.3%로 회복세를 보였으며, 2016년에는 3.6%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페루는 최근 석유 생산 증가에도 불구하고 석유 수요의 3분의 1을 에콰도르 등 인접 국가에서 수입하고 있다. 천연가스 매장량은 15.4조 입방피트로 남미 4위이나 가스 처리시설, 파이프라인 부족 등으로 생산량 및 소비량은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천연가스 개발 사업을 확대하고 있어 향후 LNG 생산 및 천연가스 소비가 증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페루는 석유 가스 이외에도 은, 동, 연, 아연 등의 광물자원도 풍부한 나라이다. 부존량에 있어서는 은이 세계 2위, 동과 아연이 세계 3위, 연이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생산량에 있어서는 은, 동, 아연이 세계 3위, 연이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이다. 

페루의 경제 전망
페루는 2013년에 이어 2014년에도 약 25억 달러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는데, 최근 출범한 쿠진스키 정부는 대내적으로 부가가치세율 인하, 인프라 투자 촉진, 대규모 광산 개발 프로젝트 재개 등의 정책을 통한 경제성장 도모 및 친기업적인 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되며,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을 두고 2021년에 OECD 가입을 위한 개혁, 개방정책을 지속 추진해 나가면서 현재 진행 중인 터키, 인도 등과의 FTA 협상 마무리 및 TPP 조기 비준을 위해 노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4년 기준으로 페루의 10대 수출국은 중국, 미국, 스위스, 캐나다, 브라질, 일본, 칠레, 스페인, 독일, 콜롬비아이고, 10대 수입국은 중국, 미국, 브라질, 멕시코, 에콰도르, 독일, 한국(7위), 칠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이다. 

2016년의 글로벌 경제는 성장세가 이어지고는 있으나 성장 속도는 예상보다 더딘 반면 경기 하강 리스크는 고조되고 있는 국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산업연구원KIET의 최근 분석 자료에 의하면, 대내외의 악재로 인해 중남미 대부분 국가들의 경제 성장 모멘텀이 크게 위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루의 경제 성장률은 2015년 3.3%에서 2016년 3.6%, 2017년 4.2%로 꾸준히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주요 광산 프로젝트의 본격 가동으로 인한 구리 생산 증가가 향후 2년간 페루의 경제 성장 모멘텀을 견인할 전망이다. 아울러, Lima Metro 2호선 건설, 남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Energy Node와 Talara 정유 시설 현대화 프로젝트 등과 같은 주요 인프라 건설 공사의 지속도 페루의 경제 성장세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반면, 하반기로 예정된 총선과 엘니뇨 강세는 페루의 경제 성장 모멘텀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리스크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개인 소득세 및 법인세 인하 정책과 공공 인프라 투자에 대한 재정 지출 확대로 말미암아 재정수지 악화 추세는 당분간 피할 수 없을 전망인데, 2016년과 2017년 말 페루의 GDP 대비 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각각 3.0% 및 2.7%로 예측되고 있다. 하지만, 페루의 공공부채 부담은 여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인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의 통화정책 정상화, 중국 경제의 성장률 둔화, 원자재 가격의 약세 기조 지속, 재정 여건 및 교역 조건 악화 등을 고려할 때, 페루 솔화의 약세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급격한 통화 약세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제한적인 외환시장 개입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원자재 수출 가격이 전반적으로 약세 기조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량 확대에 힘입은 구리 수출 급증은 페루의 경상수지 개선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구체적으로, 최근 2년간 GDP 대비 4.0%에 달했던 페루의 경상수지 적자폭은 2016년 3.2%, 2017년 3.1%로 꾸준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더불어 올해 하반기 이후 통화 하락세가 진정되고, 엘니뇨 효과 퇴조에 따른 식료품 가격의 안정세가 나타나면서, 고조되었던 인플레이션 압력이 서서히 둔화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에 따라 2015년 말 4.4%를 기록했던 페루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16~2017년 말 각각 3.2% 및 2.8%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회와 문화


사회문화적 특징
페루는 라틴계 백인, 혼혈 메스티소, 원주민 인디오 및 기타 아시아계 이민으로 구성된 다인종 국가이다. 아메리카 토착민은 1520년대 900만으로 추산되다가 1620년에는 60만여 명으로 급감하였는데 주로 전염병 때문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스페인인과 아프리카인들이 토착민과 더불어 뒤섞였다. 독립 이후 서유럽인들이 들어왔으며, 1850년대에는 중국인들이 유입되면서 페루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종 구성에 있어,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는 백인은 정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고, 37%의 메스티소mestizo(토착민과 유럽인의 혼혈)는 실질적인 산업 노동을 담당하고 있다. 45%인 원주민 인디오는 주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대체로 문맹률이 높은 빈곤계층이며, 약 3%를 점유한 흑인 및 동양인은 주로 일본 및 중국계로서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페루 사회는 경제적 불균등이 심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계층별, 지역별로 빈부차가 극심하여 전체 인구의 상위 10%가 전체수입의 37.9%를 차지하고 하위 10%가 총수입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페루 통계청(INEI) 자료에 따르면, 2001년 54.3%에 이르던 빈곤층이 2006년 44.5%, 2010년 31.3%, 2011년 27.8%, 2012년 25.8%, 그리고 2013년에는 23.9%를 기록하였다.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5%가 수도 리마에 거주하며, 국내 총생산의 44.8%를 생산하고 있다. 페루 정부가 지정한 최저 생계비 이하의 수입으로 생활하는 인구는 2007년 14.2%였고 2013년에는 6.2%로 2007년에 비해 절반 이하로 대폭 감소하였으나 2013년 극빈층은 143만 2000명(6.2%)에 달하는 실정이다.

페루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5,000여 년의 문화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이다. 서기 15세기 잉카제국이 안데스산맥의 일대를 중심으로 지금의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및 아르헨티나 북부일대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찬란한 잉카문화를 형성하였다. 잉카제국은 건축, 금은 세공, 수리관개, 농업 및 기하학적인 요새 구축 등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일으켰으나, 1532년 스페인에 정복당한 후 라틴계 서구문화가 도입됨으로써 그 시절부터 원주민, 페루 고유 문화와 유럽풍 문화가 병존하는 특징을 띠게 되었다. 

인구 분포 및 언어
페루의 인구는 3,044만여 명으로 추산되며, 남아메리카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2015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 25만 명 이상의 주요 도시로 리마Lima, 아레키파Arequipa, 트루히요Trujillo, 치클라요Chiclayo, 이키토스Iquitos, 피우라Piura, 쿠스코Cusco, 침보테Chimbote, 우앙카요Huancayo, 푸카이파Pucallpa, 타크나Tacna, 훌리아카Juliaca 등이 있다. 언어는 공용어는 에스파냐어, 케추아어, 아이마라어이다. 페루인의 83.9%가 에스파냐어를 제1언어로 사용한다. 그 외 토착 언어 중 가장 비중 있는 케추아어는 인구의 13.2%가 구사한다. 

종교와 교육
200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2세 이상 인구의 81.3%가 자신의 종교를 로마 가톨릭이라 답하였고, 12.5%는 개신교(Evangelical)이며, 3.3%는 다른 종교이고, 2.9%는 무교였다. 전체 문맹률은 6.2%(2012년)이고, 도시 지역 인구의 문맹률은 3.3%, 농촌 지역은 15.9%로 도농 간의 격차가 크다. 또한, 여성의 9.3%, 남성의 3.1%가 문맹으로 남녀 간 격차도 크다. 초중등 교육은 의무 교육이며, 공립학교는 무료이다. 초등학교는 6년, 중고등학교는 5년 과정이고, 대학은 초급대학 2년, 일반대학 5년이다.

문학과 음악
페루 문화는 주로 아메리카 토착민과 스페인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여러 민족의 영향을 받았다. 페루의 예술 전통은 잉카 이전 문화의 세련된 도기, 직물, 보석, 조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 이후 예술은 침체를 겪다가 20세기 초 토착주의(Indigenismo)가 등장하고, 이후 페루의 예술은 외국과 지역 예술 조류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된다.

페루 문학은 구전 전승에서 시작되었다. 독립 이후 리카르도 팔마Ricardo Palma(1833~1919)를 중심으로 풍속주의(Costumbrismo)와 낭만주의가 주된 흐름을 이루었으며, 20세기의 주요 작가들로는 시로 알레그리아Ciro Alegría(1909~1967),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José María Arguedas(1911~1969),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1892~1938) 등의 작가가 나왔다. 20세기 중반 이후 페루 문학은 라틴아메리카 문학 붐을 이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1936~) 등이 있다.

현대의 페루 음악은 안데스, 스페인, 아프리카의 음악이 섞여 있다.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케나quena와 팅야tinya가 널리 쓰인 악기였다가 스페인의 정복으로 기타나 하프와 같은 새로운 악기가 도입되었으며, 차랑고charango처럼 혼합된 악기가 발전하기도 하였다. 페루 음악에서 나타나는 아프리카의 영향으로는 그 리듬과 타악기 카혼cajón 등이 있다. 페루의 민속춤으로는 마리네라marinera, 톤데로tondero, 우아이노huayno 등이 있다.

페루 대부분의 축제와 행사는 카톨릭의 주요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고원지대의 인디안 마을의 카톨릭 축제는 보통 전통적인 농경 축제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주요 행사들 중에는 카르나발(2~3월), 춤과 행진을 펼치는 가장 큰 잉카 축제인 인티 라이미(6월 24일), 페루 독립 기념일(7월 28일), 만령제(11월 2일), 푸노Puno에서 열리는 푸노데이(11월 5일) 등이 있다.

언론
페루의 주요 일간지로는 정부기관지인 엘 패루아노El Peruano, 중도 보수지인 엘 코메르시오El Comercio, 중도적 성격의 엑스프레소Expreso, 진보지인 코레오Correo, 좌파적 성격의 라 레푸불리카La República, 중도적 성격의 경제지 제스티온Gestión과 진보적 성향의 페루 21Perú 21 등이 있다.
라디오 및 TV 방송국으로는 수도 리마에 라디오 방송국 68개와 텔레비전 방송국 25개 등 총 301곳이 있고, TV 채널은 7개가 있다. 

풍속 및 관습
페루인의 의복 문화를 살펴보면, 도시의 중산층 이상은 현대식의 일반적 복장을 하지만 안데스 고원지대의 인디오들은 손으로 짠 모직옷(전통의상)을 입는 편이다. 

페루 원주민들은 진한 보라색 옥수수를 끓여서 설탕을 혼합한 음료수인 치차모라다Chicha Morada를 마시는데, 이 음료는 대중화되어 리마 내 식당 어디에서나 주문할 수 있으며 식사 때 흔히 마시는 콜라, 잉카 콜라와 더불어 페루인들이 즐겨 마시는 국민 음료가 되어 있다. 페루의 대표적인 고유 술로는 포도를 원료로 한 증류주인 피스코Pisco가 있다. 페루인들은 피스코에 레몬주스 및 설탕 약간과 계란 흰자위를 혼합하여 만든 칵테일인 피스코 사우어Pisco Sour를 흔히 즐겨 마시며, 피스코에 각종 과일이나 다른 재료를 혼합하여 만든 칵테일 종류가 많이 개발되어 있다. 페루 요리는 아메리카 토착민과 스페인의 요리가 섞인 것으로 일반적인 요리로는 안티쿠초스anticuchos, 세비체ceviche, 파차만카pachamanca 등이 있다. 페루 요리는 재료와 요리법이 다양하여 최근에 주목받고 있다.

페루는 가족 제도에 있어 가톨릭 의식을 존중하며, 대가족 제도의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가족 중심의 생활양식을 따르고 가정 단위로 생일, 종교적 축제 및 행사를 가지는 것이 보편적이다. 

한국과 페루의 관계


외교 관계
페루와 우리나라는 1963년 수교하여 2013년 수교 50주년을 맞이하였으며, 꾸준한 교류와 협력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 양국은 2011년 발효된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경제적인 관계 또한 두터워지고 있다. 비동맹 핵심국인 페루는 1989년 알란 가르시아Alan García 집권 1기 당시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반도 정책과 관련하여 페루는 원칙적으로 중립 불간섭 태도 견지 및 남북한 간 대화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페루는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전수받아, 각종 경제개발 사업에 한국의 경험과 기술 이전을 기대하고 있으며, 특히 2011년 8월 발효된 한-페루 FTA 등 협력 채널을 통해 상호보완적 경제 기술 협력을 희망하고 있다. 

한국과 페루는 1993년 후지모리Alberto Fujimori 대통령의 국빈 방한,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국빈 방문, 2005년 톨레도Alejandro Toledo 대통령의 국빈 방한,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국빈 방문, 2009년 가르시아Alan García 대통령의 국빈 방한 및 공식 실무 방한(2010년), 2012년 우말라Ollanta Humala 대통령의 국빈 방한,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국빈 방문 등 8회의 정상 상호 방문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이 긴밀화되었다.

또한 2008년 11월 페루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명박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통해 양국이 ‘포괄적 협력 관계’를 수립하는 데에 합의하였고, 나아가 2012년 5월 우말라Ollanta Humala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

양국은 1974년 이래 최근까지 무역, 경제·과학·기술, 문화, 투자, 관광, 사법, 과세 등 각종 협정을 체결하였고, 고위정책협의회와 경제공동위, 민간경협위, 자원협력공동위, FTA 공동위원회, 산업협력위원회 등의 협의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1991년부터 2014년까지 7,263만 달러 규모의 개발협력(KOICA) 지원을 하고 있다. 개발협력은 프로젝트 개발조사, 초청연수, 봉사단원 및 전문가, 민관협력(기업/NGO/대학), 기타 물자지원, 긴급원조, 개발조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경제 관계
우리나라의 대對페루 수출입 규모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3년 유로존 경제 위기 시 다소 축소되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4년 대對페루 수출입 규모(28.2억 달러)는 2004년(5.3억 달러) 대비 5.3배가 증가하였고, 동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대對세계 교역은 2.3배 증가(4,783억 달러→10,987억 달러), 대對중남미 교역은 3.0배 증가(183억 달러→542억 달러)하였다. 특히, 2011년 8월 한-페루 FTA 발효 이후 양국 간 교역 규모가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4년 우리나라의 대對페루 교역 규모는 수출액이 13.9억 달러(자동차, 합성수지, 휴대폰 등), 수입액이 14.3억 달러(동, 은, 아연, 수산가공품 등)로 약 4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對페루 직접 투자는 1994년 이후 2014년 9월말까지 누계 기준으로 총 139건, 42.0억 달러(우리측 신고 기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로 투자 업종은 주로 광물·에너지 분야(58건 39.2억 달러)에 집중되어 있다. 페루의 대對한 투자는 2014년 말까지 26건, 1,322천불로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재외동포 현황
페루 재외 동포로는 1974년 박만복 배구 감독의 페루여자국가대표팀 감독 부임이 이민 1호였다. 1980년대 초까지 체육인(태권도 사범), 병아리 감별사 등 중심의 10여 세대가 초기 이민사회를 형성했고, 1980년대 후반 페루 연안 오징어잡이 수산업 진출과 더불어 1993년 이후 페루 치안 및 경기 안정으로 한인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상당수의 한인은 볼리비아, 파라과이, 칠레 등 인접국으로부터 재이민한 경우이다. 페루에 있는 우리 교민은 약 1,500명 수준이며, 90% 이상이 수도 리마시에 거주(이 중 체류자 약 200여 명)하고 있는데, 주로 의류·원단수입 판매, 중고차 판매, 수산업 등에 종사한다. 

페루-북한 관계
북한은 1975년 리마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하였으며, 이후 양국 관계는 별다른 진전 없이 유지되다가, 1985년 7월 취임한 사회주의 성향의 가르시아 대통령 집권 1기인 1988년 12월 양국 간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페루는 주중 대사를 북한 대사로 겸임토록 하고 있다. 

대북한 수교 이후 페루 정부는 한국과의 기존 우호관계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극적으로 대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남북한 관계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중립·불간섭 태도를 견지하는 한편, 남북한 간 대화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고 있다. 

페루의 대북 교역량은 2013년 기준으로 수출 49.8만 달러(동식물생산품, 동, 의류 등), 수입 55.2만 달러(기계류, 플라스틱, 운수설비 등)를 기록하고 있다. 




페루의 주요 도시

리마Lima
리마는 페루의 수도로 태평양 해안에 있으며 주변은 사막으로 1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시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안데스 산맥으로부터 내려오는 풍부한 지하수로 농작물의 재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리마는 혼잡하고 오염, 소음도 심각하며 가끔은 날씨도 불쾌하지만 주민들은 친절하고 우호적이다. 볼거리들로는 수많은 금, 은, 보석 유물들을 소장한 오로 델 페루Oro del Peru박물관과 선사시대 전시물로 유명한 국립 고고 인류학 박물관을 들 수 있다. 카타콤으로 유명한 산 프란시스코 교회나 산토 도밍고 교회도 유명하며, 폴보스 아술레스Polvos Azules를 포함한 리마의 많은 시장들에서는 물건들과 수공예품을 구입할 수 있다. 교외의 바란코Barranco에는 많은 저렴한 식당들과 라이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들이 있어 배낭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다른 교외인 미라플로레스Miraflores는 시내에서 가장 좋은 상점, 식당과 유흥가들이 있다.

리마 남부 연안에는 이슬라스 바이예스타스Islas Ballestas, 페닌술라 데 파라카스Peninsula de Paracas, 피스코Pisco 등이 있다. 더 남쪽에 있는 나스카Nazca는 도기나 BCE 900년에서 CE 600년 사이에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스카 유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레키파Arequipa와 티티카카Titicaca
하얀 도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레키파는 엘 미스티El Misti화산을 포함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도시의 특징은 실라르라고 불리는 밝은 색의 화산 바위로 만든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다. 유명한 건축물로는 수녀원이었던 콘벤토 데 사니타 카탈리나Convento de Sanyta Catalina,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스이는 카사 리켓츠Casa Richketts 등이다. 콜카Colca협곡은 아레키파에서 갈 수 있는 인기 있는 여행지이다. 티티카카 호수는 3820m 높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이다. 또 남미에서 가장 큰 호수이기도 하다. 높은 고도 때문에 공기도 굉장히 맑으며 새파란 물은 특히 인상적이다.

쿠스코Cusco 
안데스 고원 분지에 있는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케추아어로 ‘세상의 배꼽’ 즉 ‘세상의 중심’이란 뜻이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정복당하고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스페인 건축물이 들어섰다. 하지만 주요 건물들은 잉카 시대 건물의 기초 위에 지어졌다. 몇 번의 지진에도 끄떡없이 견딘 태양의 신을 모시던 신전 코리칸차Qorikancha의 기초위에 산토도밍고 성당을 지었고, 주요 건물의 외벽 역시 잉카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도시는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른 유적으로는 근처에 삭사이와만Sacsayhuam, 켄코Qenko, 푸카 푸카라Puca Pucara, 탐보 마챠이Tambo Machay 등이 있다. 

쿠스코 서쪽에는 마추픽추Machu Picchu가 있다. 우루밤바 강 옆 절벽, 해발 2,400미터의 높은 곳에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만든 공중도시다. 마추피추 중앙의 큰 바위 위에는 1미터 내외로 솟은 돌기둥이 있다. 이를 인티와타나Intihuatana라고 하는데, 케추아어語로 ‘태양을 끌어당기는 자리’라는 뜻으로, 이 기둥은 ‘태양을 묶는 기둥’인 셈이다. 태양을 숭배하는 잉카인들은 해마다 동지가 되면 이 돌기둥 바로 위에 떠 있는 태양을 붙잡아 매려고 돌기둥에 끈을 매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인티와타나는 해시계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인티’는 태양이란 뜻이고, ‘와타나’는 기둥이란 뜻으로 도시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아래쪽에서는 위로 올려다보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카라스Caraz
침보테Chimbote 동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카라스는 매력적인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과 주위에 아름다운 산책로들이 있다. 유명한 양가누코Llanganuco에서 산타 크루스SantaCruz까지의 트레킹 코스가 끝나는 지점이며 아름다운 라구나 파론Laguna Paron과 카뇬 엘 플라토Canon del Plato로 가는 길 여행의 출발점이다.

이슬라 타킬레Isla Taquile
이슬라 타킬레는 푸노Puno에서 24km를 지나 있는 티티카카 호수의 섬이다. 잉카 이전의 축대와 작은 유적들이 여기저기 보이며, 호텔, 전기, 도로, 탈것, 그리고 개도 없다. 푸노의 정박장에서 출발하는 배가 매일 있으며 섬까지 네 시간 정도 소요된다. 

세친Sechin
세친이 있는 곳은 침보테의 남쪽 50km로 이곳은 페루에서 BCE 1500년경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신전의 외벽으로 잔인한 전사들이 사로잡은 포로의 창자를 꺼내는 조각으로 덮여있다.

야리나코챠Yarinacocha
U자 모양의 호수인 야리나코챠는 아마존 유역에 있는 푸칼파Pucallpa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있다. 한때는 우카얄리Ucayali 강의 한 부분이었으나 현재는 육지로 둘러싸여 있다. 쉽보Shipbo 인디안 마을을 방문하거나 수공예품을 사고, 카누를 타고 가 호수 주위의 자연을 둘러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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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일) 우리가 몰랐던 유럽이야기 특강


유럽문화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지구촌 동서양 문화에 활력을 주고 문화 교류를 통해 중동과 서양문명을 형성하는데 절대적 영향을 준 선비,돌궐,훈족 등 북방유목민족 ! 이들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문화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역사와 문화를 통해 유럽을 새롭게 보고 한민족을 새롭게 보는 시간 ~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 되실겁니다. ~


일시 : 9월 11일(일) 오후 3시 ~ 6시

장소 : 서울 갭이어공간(사당역 3분거리)

주최 : 한국사 시간여행자 밴드

후원 : 한류열풍사랑

회비 : 1만원(청소년 5천원)


◈신청하기 -> http://goo.gl/qOQ3qN


**  선착순 50명까지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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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긴자에 있는 이토야 I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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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올림픽 특집]

월드컵보다 재미있는브라질 이야기 1 https://youtu.be/5nIIXr_q2HM

월드컵보다 재미있는브라질 이야기 2 https://youtu.be/UNmWtY1fcNQ

월드컵보다 재미있는브라질 이야기3 https://youtu.be/N0QkmAook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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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류가 가장 먼저 거주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15세기에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으로 유럽에 알려진 이래 17세기부터 유럽 지역 백인들의 본격 이주가 이어지고 19세기에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다. 영국 연방 시절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 정책으로 악명이 높았던 남아공은 샤프빌 봉기 사건이 계기가 되어 1961년 공화국으로 독립을 한 후, 1994년 넬슨 만델라의 흑백연합정부 출범으로 새 시대를 여는 역사적 분기점을 마련하였다.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여 ‘무지개 나라’로 불리는 남아공은 역동적인 조화와 문화적 다양성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희망봉을 찾아 힘찬 진군을 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남아프리카공화국南Africa共和國(Republic of South Africa, RSA, 아프리칸스어: Republiek van Suid-Afrika)은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국가이다. 줄여서 ‘남아공南阿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10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1961년까지의 국호는 ‘남아프리카 연방(남아연방)’이었다. 

남아공은 위도 22도에서 35도 그리고 경도 17도에 위치한다. 표면적은 약 1,219,090㎢에 달한다. 북쪽으로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북동쪽으로는 모잠비크, 스와질란드와 접하고 있다. 남아공 영토 안에는 1966년에 독립한 내륙국인 레소토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동남쪽은 인도양, 서남쪽은 남대서양과 연하고 있다. 수도는 프리토리아(행정), 블룸폰테인(사법), 케이프타운(입법)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약 786만 명의 요하네스버그이다. 남아공의 표면적은 지형학상 내륙의 고원과 해안 사이에 위치한 평원의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두 지형은 단층의 한 형태인 대지형(Great Escarpment)으로 구분된다. 해수면 높이는 서남쪽 현무암으로 덮인 로게벨드의 경우 1,500m, 콰줄루나탈 지역의 드라켄스버그는 약 3,482m에 달한다. 

단애로부터 내륙 쪽에 이르면 고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고원은 사하라 사막 북쪽에서 시작되는 대아프리카 고원이 남쪽으로 이어지는 형태를 이룬다. 해수면에서 평균 높이가 약 1,200m에 이르는 드넓은 평원이 특징이다. 레소토 고원은 해발 약 3,000m 높이에 위치해 있다. 단애는 일반적으로 고원의 가장 높은 층을 형성하고 있다. 대단애와 해안 사이에 있는 펼쳐져 있는 지역은 동남으로 80km에서 240km, 남서로 60km 에서 80km에 이르는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이는 다시 동부 고원 경사 지대와 케이프의 접힌 벨트와 주변 지역 그리고 서부고원 경사의 세 개의 소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남아공의 서쪽과 남쪽, 동쪽에 걸쳐서 대서양과 인도양이 둘러싸고 있다. 케이프타운에서 동남쪽으로 약 1,920km 떨어진 외딴 곳에 프린스에드워드와 마리온 섬이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남아공은 약 3천km에 달하는 해안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해안선 앞으로는 난류인 모잠비크―아굴라스 난류와 벵구엘라 한류의 두 개의 주요 해류가 흐른다. 아굴라스 난류는 동남쪽 해안에서 아굴라스 곶까지, 벵구엘라 한류는 서해안을 따라 남부 앙골라까지 북쪽을 향해 흐른다. 두 해류로 인해 생기는 기온 차는 남아공 동쪽과 서쪽 해안의 기후와 식물종 뿐만 아니라 해양 생물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해안의 특징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포구가 적다는 점이다. 남아공 해안에서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자연 포구로는 서해안의 살다나 만Saldanha Bay을 꼽을 수 있다. 이 지역은 밀물이 없다. 따라서 내륙으로의 진입이 어렵다. 남아공의 대부분 강어귀는 포구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커다란 모래톱이 연중 내내 진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모래톱은 파도와 해류의 작용, 하천에서 밀려 내려온 침전물 더미 등으로 인해 형성된다. 오렌지 강이나 림포포 강과 같은 큰 강에서만 모래톱까지 좁은 채널이 길게 유지된다. 따라서 남아공 내에는 배가 진입할 수 있는 강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남아공은 온화한 기온과 기후를 유지하고 있어 연중 내내 화창한 햇살을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열대성 기후로 동부지역이 서부보다 온난다습(연평균 기온 17℃)하며, 지역에 따라 기후가 크게 상이한 특징을 보인다. 남아공의 우기인 여름은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이어진다. 여름철 날씨는 매우 덥고 오후에는 천둥번개가 치는 때도 있다. 건기인 겨울은 비교적 건조하고 선선한 편이다. 일조량이 세계에서 가장 길다. 하루 평균 일조량이 평균 8.5시간으로 기록된다. 런던의 3.8시간, 로마의 6.4시간, 뉴욕의 6.9시간에 비해 높은 편이다. 평균 강우량은 464mm이다. 전 세계 강우량인 857mm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웨스턴케이프의 경우 겨울에 강우량이 더 높다. 반면 다른 주들은 여름철 강우량이 더 높다. 위와 같은 기후와 날씨는 남아공이 농사 짓기에 매우 적합한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공의 역사

백인 정착 이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나 기록된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이 지역은 인류가 가장 먼저 거주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남아프리카 지역에 처음 인류가 나타난 것은 300만 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100만 년 이상을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살아오던 코이산Khoisan족은 카메룬 부근에서 남하한 반투Bantu족에게 쫓겨 피시Fish 강 이남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수렵 및 채취 생활을 하던 부시먼Bushman족과 가축사육을 하던 코이코이Khoi-Khoi족은 오렌지Orange 강까지 진출하여 17세기까지 거주했다. 예전에는 남아프리카 전역에 분포하고 있었지만, 북쪽으로부터는 반투족, 남쪽으로부터는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압박을 받아 지금은 나미비아Namibia와 보츠와나Botswana를 중심으로 앙골라Angola 남부, 칼라하리Kalahari 사막 중부와 북부, 남서 아프리카 북부 등 한정된 지역에서만 살고 있다.

반투족의 선조들은 주로 잠베지Zambezi 강과 탕가니카Tanganyika 호수, 그리고 말라위Malawi 호수 주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철기문화와 금속문화를 보유한 채 림포푸Limpopo 강 이남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18세기 후반이 되자 오렌지 강 북부와 칼라하리 사막 동부지역 등을 포함한 남아프리카 전역, 그리고 동부 해안가까지 진출하였으며, 4세기 이전 산San족이 보츠와나 및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수렵생활을 하며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는 코이코이족이나 산족이 살았다.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을 하던 민족이었으나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1,500년 전쯤 반투족이 남아공 일대로 남하해 왔다. 이후 남아공 동쪽 지역에는 반투 종족들이 농경과 목축을 영위했고, 서쪽에는 코이코이족과 산족이 수렵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동북쪽 짐바브웨 근처에는 마풍구브웨 같은 왕국이 있었다.

백인 이주 시작
남아프리카 지역의 역사에 백인의 역사가 더해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z(1450년경~1500년)가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발견하고 난 이후부터이다. 1652년에는 해상 교역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동인도 제도와의 무역을 위한 중간 보급항 차원에서 케이프타운Cape Town에 정박소와 함께 정착촌을 설립하고 나섰다. 자국 선박의 보급기지를 만들고 노예와 천연자원, 귀금속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백인들이 남아프리카에 거주하게 되었고, 케이프타운은 백인들을 위한 개척과 보급의 기지가 되었다. 남아공에 살고 있는 토착 흑인들에게는 슬픈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679년에는 동인도회사가 유럽에서 들어온 이주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의 이주와 함께 정착농업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인은 전매회사를 통해 코이코이Khoi-Khoi족 등과 교역을 시작했고, 이로 인해 기존의 사회 체제나 경제 체제는 순식간에 잠식되었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임금 노동자 또는 노예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인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백인들은 스스로를 보어인Boer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이다. 이들 보어인과 1688년 이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프랑스의 위그노파 등 백인들은 케이프타운 해안 주변의 정착촌에서 벗어나 점차 내륙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18세기 무렵에는 동부 해안으로 진출한 보어인들과 동케이프 지역으로 진출하던 반투Bantu족이 그레이트피시Great Fish 강 근처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분쟁은 약 100년 동안 이어졌으나 19세기 후반, 반투족은 우세한 화기를 갖춘 백인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이미 18세기 무렵부터 백인들은 유색인 차별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권한이라고 주장하면서, 인종간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백인의 생활양식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영국의 진출
남아프리카에 영국이 진출하여 케이프타운Cape Town을 점령한 것은 1795년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프랑스와 체결한 아미앵조약Treaty of Amiens에 따라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게 되면서, 1803년에 케이프타운을 바타비아 공화국Batavian Republic, Bataafse Republiek에 돌려주게 되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은 1795년부터 1806년까지 네덜란드 본토에 성립된 공화국을 말한다. 이로 인해 케이프타운은 곧 네덜란드령이 되었지만, 1806년 다시 영국에 점령되었고, 1814년에는 정식으로 영국령 케이프로 편입되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20년부터 영국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이주해오기 시작하면서 보어인Boer은 내륙의 오지로 소개疏開되는데, 이로써 영국인과 보어인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1834년에 영국정부가 노예제도를 폐지하면서, 특히 노예에 의존해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이스턴케이프Eastern Cape 지역 보어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보어인들은 오렌지 강 이북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1835년에 북방 내륙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를 대이주, 즉 그레이트트렉Great Trek이라고 한다.

내륙으로 진출해간 보어인Boe)은 원주민을 정복한 후 발Vaa) 강 이북과 오렌지Orange 강 이북에 두 개의 정부를 수립했다. 영국 또한 이들 지역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나 보어인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1852년에는 오렌지자유국Orange Free State, Oranje-Vrijstaat이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어 1854년에는 트란스발공화국Transvaal Republic의 독립을 인정했다. 트란스발공화국의 정식 이름은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n Republic, Zuid-Afrikaansche Republiek으로, 현재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어 표기인 ‘Republic of South Africa’와는 구별된다.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설립한 아프리카너Afrikaner들, 즉 네덜란드 이주민을 중심으로 한 독일인과 프랑스인 등 소수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지배권과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아프리카 토착인을 노예로 취급하면서 백인과는 엄격히 차별 대우하는 관습을 확립시켜나갔다. 1899년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귀금속 채굴권을 둘러싸고 영국군과 ‘보어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독일의 물밑 지원을 받으며 줄기찬 게릴라전을 전개해나갔고, 영국군은 강경책으로 맞섰다. 영국군이 휩쓸고 지나간 보어인 마을들은 마치 메뚜기떼의 습격을 받은 들판처럼 초토화됐다. 주민들은 닥치는 대로 끌려가 강제수용소에 수용됐다. 십중팔구는 노약자들이었다. 2만8천 명에 가까운 여성과 어린이들이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학대로 죽었다. 영국군의 잔학상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물론 영국 안에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Goldwin Smith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화형으로 죽인 이래 이처럼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보어전쟁은 1902년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중부 내륙 지역은 영국령으로 넘어갔다. 

남아프리카 연방의 수립
1909년 9월 20일, 영국 의회는 남아프리카법South Africa Act을 통과시켜 오렌지자유주, 트란스발 주, 케이프Cape 주, 나탈Natal 주 등 4개의 주로 구성된 입헌군주국 형태의 자치제로서 남아프리카연방의 수립을 승인했다. 남아프리카연방이 영국연방국가로 독립한 것은 이듬해인 1910년 5월 31일이었다.

1912년에는 남아프리카원주민민족회의SANNC(South African Native National Congress)가 창설되면서 흑인들의 반정부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원주민민족회의는 1923년에 아프리카민족회의ANCAfrican National Congress로 명칭을 변경했다.

남아프리카의 백인사회는 영국계와 백인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보어계로 여전히 분열된 채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남아프리카연방이 수립된 이후로는 영국계가 상공업과 금속업 등 경제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아프리카너Afrikaner로 이름을 바꾼 네덜란드계는 농촌을 기반으로 하여 정계에서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1948년에는 보어계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정권이 발족하면서 가혹한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과 반영국정책의 실시를 분명하게 선언했고, 보어계 백인과 영국계 백인 사이의 대립 노선은 더욱 뚜렷해졌다. 국민당은 또 1953년에는 흑인들의 고등교육을 제한하도록 한 반투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을 제정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발족 이후
1958년 헨드릭 페르부르트Hendrik Frensch Verwoerd(1901~1966, 재임 1958~1966) 총리 내각이 집권하였다. 1960년에 샤프빌Sharpeville에서 통행증명서 휴대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평화적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여 67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같은 해 1960년, 페르부르트 정부는 흑인 민족주의 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African National Congress)와 아프리카민족회의의 강경파가 분리해 나와서 결성한 범아프리카회의PAC(Pan Africanist Congress)를 불법단체로 규정하여 흑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억압을 본격화했다. 페르부르트 총리는 1960년 10월 5일, 백인들만 참여하는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제로의 이행을 단행했다. 1961년 3월, 페르부르트 정부는 영국연방 수상회의에서 정식으로 영국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1961년 5월 31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독립을 하였다.

1966년 페르부르트 총리가 암살을 당하자 발타자르 요하네스 포르스터르Balthazar Johannes Vorster(1915~1983, 재임 1966~1978)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포르스터르 정부는 1971년 반투 홈랜드(Bantu Homeland) 헌법안을 발효시켜, 1959년 반투 자치정부법 제정 후 실시해오던 흑인의 민족분리정책을 가속화해 나갔다. 1976년 6월에는 인구 100만 명의 흑인 집단거주지 소웨토(Soweto)에서 학교 수업의 절반을 아프리칸스어(Afrikaans)로 진행하기로 한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며 폭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77년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무기금수(Arms Embargo)를 결의했다. 

1978년 포르스터르 총리가 사임하자 피터르 빌럼 보타Pieter Willem Botha 국방장관이 총리직을 승계했다. 1983년 보타 정권은 대통령제의 시행을 골자로 하는 신헌법을 채택했고, 1984년 9월에는 신헌법의 발효에 따라 백인, 유색인, 인도인에 의한 인종별 3원제 의회가 구성됨으로써 혼혈인 및 아시아인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다. 보타는 1984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85년에 인종차별과 관련된 모든 규정을 수정하거나 철폐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85년 4월에는 1927년에 제정된 ‘부도덕법’과 1949년에 제정된 ‘이종족 간 결혼금지법’이 폐지되었다. 1985년 9월 흑인 거주지역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한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폭력 소요가 잇따랐다. 보타 정부는 1986년 6월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한편, 언론 검열과 보안군의 권한을 강화하고 나섰다. 한편, 1987년 5월에 치러진 백인의원 선거에서 집권 국민당이 압승을 거두자 개혁 분위기는 퇴조하고 보수성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1988년 2월에는 17개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단체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조치가 단행되었고, 이어 해외정치자금 도입금지법과 반정부 성향 2개 신문의 정간 및 노동법 개정안이 의회에 상정되는 등 일련의 흑인세력 탄압책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흑인들의 소요를 수차례 강경 진압하고,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동맹Youth League을 창설한 흑인민권지도자 만델라의 석방도 거부하면서 국제적 고립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런 정세 속에서 1989년 보타 대통령이 사임하고 프레데리크 빌럼 데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가 1989년 총선 승리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흑인과의 권력 공유를 통한 민주화정책 추진을 내세우고, 대통령 취임 즉시 완전한 민주주의의 정착을 선언하면서 인종차별정책을 완화해나갔다. 1990년 만델라의 무조건 석방과 함께 정치범들의 석방이 단행되고, 아프리카민족회의의 합법화 등 혁명적 조치를 잇따라 시행했다. 1990년 6월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비상사태가 해제되었고, 1991년 6월에는 거주지역법, 토지법, 주민등록법 등 인종차별을 주도해오던 3대 악법이 폐지되었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1991년 7월 공산당SACP(South African Communist Party)과 연합하여 당 체제 정비에 착수했고, 넬슨 만델라를 의장으로 선출하여 민주화 활동을 가속화해 나갔다. 1994년 4월 마침내 최초의 흑백 다인종 민주총선이 실시되었고 이 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는 63%의 지지로 압승을 거두며 320여 년간 인종차별정책으로 남아프리카를 착취해온 백인정권을 종식시켰다. 1994년 5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넬슨 만델라 의장을 대통령으로 하는 흑백 연합정부가 수립되었다. 

흑인 정부 수립 이후
1994년 4월 최초로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민주적 총선거가 실시된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정부, 타보 음베키Thabo Mbeki 정부, 그리고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 정부가 차례로 들어섰다.

1994년 5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국민당NP (National Party)과 잉카타자유당IFP (Inkatha Freedom Party) 등 3당이 참여한 거국연립정부GNU (Government of National Unity)가 수립된 후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주도 아래 민주화 과정이 추진되었는데, 넬슨 만델라의 신정부는 급진적 개혁보다 화합을 통해 흑백의 공존사회를 건설해가는 온건한 개혁 추진 쪽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4년 하반기에는 국제연합UN(United Nations)과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아프리카연합AU(Africa Unity), 비동맹운동NAM(Non-Aligned Movement), 영국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등 관련 국제기구에 모두 가입했다.

1996년 7월 국민당이 연립정부를 탈퇴하자 이후부터는 사실상 아프리카민족회의 단독으로 정부 운영을 해나가게 되었다. 1996년 10월, 제헌의회는 신헌법을 채택하여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인권보장을 강화했다. 1999년 6월 에 치러진 제2차 민주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는 다시 압승을 거두었고 부통령이던 타보 음베키Thabo Mbeki는 같은 해 6월 아프리카민족회의 후보로 만델라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어 제2대 흑인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 음베키 대통령은 2004년 4월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2005년 6월에는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 부통령을 뇌물수수 혐의로 해임시켰다. 그러나 주마는 2007년 12월, 림포푸Limpopo 주의 주도州都 폴로콰네Polokwane에서 개최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전당대회에서 음베키 대통령과의 접전 끝에 당 의장에 당선되었다.

2008년 9월 타보 음베키 대통령이 사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국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대통령실 장관이던 칼레마 페트루스 모틀란테Kgalema Petrus Motlanthe가 과도기간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아프리카민족회의를 떠났던 이탈세력은 2008년 12월 새로운 정당인 국민회의COPE(Congress of the People)를 창당하였다. 그러나 2009년 4월 22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는 하원의석 400석 가운데 264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다음 달인 2009년 5월 9일,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내각책임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중심제의 공화국이다.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는 드물게 다당제를 운영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 및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입법권은 대통령과 양원 의회에 귀속되어 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되며, 각료도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는 2개 이내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의원 중에서 임명된다. 대통령은 의회의 과반수 찬성에 의한 제한적 하원해산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의회는 대통령 및 내각에 대한 불신임권을 가지고 있다. 의회 선거는 정당명부제政黨名簿制에 입각하여 정당별 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2016년 현재 남아공의 대통령은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정당으로는 집권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African National Congress) 외에 백인계 야당인 민주동맹DA(Democratic Alliance),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 이탈한 세력이 창당한 국민회의COPE(Congress of the People), 콰줄루나탈KwaZulu-Natal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줄루Zulu계의 잉카타자유당IFP(Inkatha Freedom Party) 등이 있다.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양원제로, 5년 임기의 하원National Assembly과 상원National Council of Provinces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 의석은 400석으로, 의장과 부의장, 그리고 그 아래에 상임위원회와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별도로 구성되는 특별위원회가 있다. 우선 각 위원회에서 현안을 협의하고 검토한 후 필요한 법안은 전체(본)회의에 회부하게 된다. 상원 의석은 90석으로, 전국 9개 주에서 각 10명씩 선출된다. 하원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조정 역할을 맡고 있다.

행정부
행정부는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장관 및 부장관 등의 각료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부처 신설을 포함한 각료의 구성과 임명에 대한 전권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헌법상 국가원수 겸 정부의 수반으로 군 최고 통수권자이다. 부통령은 제1당과 하원의석 80석 이상을 획득한 정당에서 선출된다. 대통령 유고 시에는 부통령이 승계하며,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할 때 부통령과 상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사법부
남아공의 일반법 체계는 관습법으로 네덜란드의 고법古法인 로마-홀란드법(Roman Dutch Law)을 따르며, 민사, 형사소송, 증거, 상사 문제 등 일부 분야에서는 영미법식을 수용하고 있다. 법원은 대법원Supreme Court of Appeals, 각 주에 1개꼴인 10개의 상급법원High Court, 그리고 310개의 하급법원Magistrate's Court으로 구성되며, 3심제의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다.

대법원장은 7년 단임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헌법재판소장을 겸임한다. 헌법재판소는 1994년에 설치되었다. 모든 법관은 법무장관의 추천을 받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회의 요구가 없는 한 해임은 불가능하다. 법관 임명 및 법행정 관련 주요 사항은 법무장관, 헌법재판소장 등 행정부와 사법부의 핵심 인사로 구성된 사법위원회(JSC, Judicial Service Commission)의 자문을 받도록 되어 있다.

지방행정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방 행정자치단체는 중앙정부(Central Government) 아래에 9개의 지방정부(Provincial Government)와 284개의 시정부(Local Government)로 구성되어 있다. 9개의 지방정부를 구성하는 9개의 주는 가우텡Gauteng 주, 음푸말랑가Mpumalanga 주, 림포푸Limpopo 주, 콰줄루나탈Kwazulu-Natal 주, 프리스테이트Free-State 주, 노스웨스트North-West 주, 노던케이프Northern Cape 주, 이스턴케이프Eastern Cape 주, 웨스턴케이프Western Cape 주 등이며, 각 주의 주도州都는 각각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음봄벨라Mbombela, 폴로콰네Polokwane, 피터마리츠버그Pietermaritzburg, 블룸폰테인Bloemfontein, 마피켕Mafikeng, 킴벌리Kimberley, 비쇼Bhisho, 케이프타운Cape Town이다.

남아공의 최근 정치정세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흑인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18년이 경과한 2012년 현재, 정치적 안정과 보수적 거시경제정책 운용에 따른 제반 경제지표의 안정화는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경제상황의 개선 수준은 대다수 흑인들의 기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5년에 백인-흑인 간의 소득차가 4:1이었으나 2000년의 호구조사에서는 6:1로 더욱 벌어졌다. 2012년 기준으로 흑인의 56%가 빈곤층이었지만 백인 중 빈곤층은 2% 정도에 불과했다. 21세기의 첫 10년간 남아공에서는 흑인 중산층(일명 ‘블랙 다이아몬드’)이 상당히 증가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백인과 흑인간의 빈부격차는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2011년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천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전 국민의 25%가 하루 1.25달러 이하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또한 남아공에서는 계속되는 실업과 빈곤, 범죄, 그리고 감염자 수가 58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와 에이즈AIDS(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 면역 결핍증)의 만연이 주요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2009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가 3분의 2에 가까운 득표율로 압승함에 따라 아프리카민족회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여전히 확고하다는 것이 증명된 가운데, 2009월 5월 국민적 지지와 기대 속에 제이컵 주마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철저한 인종분리정책, 즉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절부터 투쟁을 이끌어온 아프리카민족회의에 대한 뿌리 깊은 대중적 지지기반이 여전하고, 아프리카민족회의를 대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아직 미약한 상황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독주체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2011년 2월에 행한 신년 국정연설에서 2011년을 ‘일자리 창출의 해’(Year of Job Creation)로 규정하고, 2020년까지 50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신성장전략’(New Growth Path) 이행을 위해 민간과 지역공동체의 일자리 창출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부 및 공공 부문의 일자리 창출 대책도 함께 제시했다. 특히 인프라 개발, 농업, 광업 및 제련 분야, 제조업, 녹색산업, 관광 분야 등 6대 분야를 일자리 창출 가능성이 높은 중점 분야로 선정하고 이들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세제 혜택과 규제 철폐 등을 약속했다.

2011년 5월 18일에 실시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방선거에서는 아프리카민족회의가 62%의 득표율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2006년 선거에서 얻은 66%의 지지율보다 낮은 수치로, 하락세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제1야당인 민주동맹DA은 전통적 강세 지역인 웨스턴케이프Western Cape 주뿐만 아니라 이스턴케이프Eastern Cape 주에서도 선전하여, 2006년보다 9% 상승한 24%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런 결과는 혼혈계와 인도계의 지지율이 하락한 것과 높은 실업률 등 아프리카민족회의의 경제정책에 대한 흑인들의 불만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2011년 5월 지방선거는 주마 행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선거에서의 지지율 하락은 제이컵 주마 대통령의 아프리카민족회의 내에서의 입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평가되었다.

경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고도화된 산업국으로 아프리카 경제를 이끄는 선도국가이자 아프리카 최대의 시장이기도 하다. 또한 남아프리카 지역이나 블랙 아프리카(Black Africa Countries)에서는 최강국이며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의 실질적인 수장국이다. 2010년 기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내총생산GDP은 3544억 달러로, 아프리카 전체 53개국 국내총생산의 약 21%를 점유하고 있다. 또 1인당 국민소득은 2010년 기준으로 약 7101달러로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품교역 규모 또한 2010년 기준 아프리카 최대 규모로, 아프리카 대외 교역의 약 16%를 점유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금융, 유통 등 3차 산업 위주의 성숙된 산업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부가가치 창출 측면으로 볼 때,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에서 3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기준 65.8%에 달한다. 이에 비해 1차 산업 비중은 3%, 2차 산업 비중은 31.2% 수준이다.

3차 산업을 제외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산업으로는 광산업, 철강업, 석유화학산업, 자동차산업 등을 들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일찍이 광산업이 발전했는데, 이 광산업은 2010년 기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총생산의 8.8%를 점유하고 있다. 또 10억 톤에 이르는 철광석의 매장량은 세계 14위 규모로, 이처럼 풍부한 철광석을 바탕으로 발전한 철강산업은 2010년 기준 전체 제조업 생산량의 약 22%를 차지했다. 석유화학산업은 철강산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제조업으로, 2010년 기준 남아프리카공화국 제조업 생산량의 약 21%를 점유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자동차산업육성정책MIDPThe Motor Industry Development Program을 시행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세우고 있다. 그에 따라 BMW, 벤츠, 도요타 등 세계 주요 자동차업체들의 생산공장이 속속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자동차 및 관련 산업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체 제조업 생산량의 약 28%를 점유하고 있다.

부존자원 및 개발현황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풍부한 광물자원과 에너지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석탄 및 석유가스 연관 산업, 나아가 원자력 분야에서도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크롬과 금의 매장량은 모두 세계 2위, 우라늄과 니켈의 매장량은 각각 5위와 8위를 차지할 만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광물자원이 풍족하다. 광산업(mining)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총생산GDP의 8.8%를 점유하면서 49만 명의 고용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또 총 수출액 가운데서는 31.7%를 차지하는데, 가공광물(processed minerals)을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50%에 이른다. 금과 백금류 금속, 다이아몬드, 그리고 석탄이 전체 광물 수출 물량의 89%를 차지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규모 산업용 에너지 수요로 인해 에너지 집약적Energy-Intensive인 경제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매장량이 적은 석유와 천연가스에 비해 석탄자원은 상당히 풍부한데, 이를 잘 활용하면서 전기의 생산 비용을 낮출 수 있게 했다. 매장량이 세계 9위인 풍부한 유연탄은 저렴한 가격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기술과 함께 석탄 액화(CTL, Coal-to-Liquids)와 가스 액화(GTL, Gas-to-Liquids) 같은 액화석유 추출 기술을 보유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석유의 생산은 주로 석탄으로부터 액화석유를 추출하는 데 의존하고 있다. 에너지산업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총생산의 15%를 차지하면서 25만 명의 고용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1994년 민주정부가 출범한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과거의 인종차별정책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시키고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흑인경제육성정책BEEBlack Economy Empowerment을 채택했다. 흑인경제육성정책은 액화연료Liquid Feul 부문에서 소유권 이전과 합작 추진 등을 통해 2012년까지 흑인들의 관련 지분을 26%까지 확대시키겠다고 명시해놓고 있다. 그러나 2010년에 발표된 신성장전략에서는, 흑인경제육성정책이 일부 소수 흑인들의 비즈니스 이권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것인 만큼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경제동향 
2000년대 중반 이후 광물 등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대외 경제 여건이 호전되고, 이런 분위기 속에 소비와 설비투자가 늘어남에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는 5%대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견실한 성장세를 지속해가고 있었다. 2009년에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마이너스 성장(-1.8%)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2010년에는 월드컵 인프라 투자 확대로 2.8%의 성장률을 보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중기재정운용계획에서 2011년 성장률을 3.5%, 2012년 4.1%, 2013년 4.4%로 예상하며 지속적으로 성장률이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글로벌 경제 여건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건설 부문 등의 2010년 월드컵 관련 투자를 기반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성장 추세는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내부의 권력 분점에 따른 경제정책의 기조 변경 가능성이 남아 있고, 580만 명에 이르는 에이즈 보균자 등 국민건강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강력범죄율과 기능인력 부족 문제, 그리고 백인 고급인력의 해외유출 등 구조적 제약이 존재하고 있다. 광업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산업구조를 탈피하고 빈부격차 및 실업문제 해결, 거버넌스(governance) 개선, 인프라 확충, 전력 사정 개선 등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ZAR)가 미국 달러화(USD) 대비 강세 흐름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미국의 양적 완화 조치에 대해 공개 비판하고 외환거래 규제 완화 등을 통해 랜드화의 가치 하락을 시도하고 있다. 2011년 6월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는 달러당 6.8랜드(Rand)로, 달러당 8랜드 대를 유지했던 2009년도에 비해 강세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2010년 월드컵 이후 둔화된 경제 성장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중앙은행은 2010년 11월 기준금리를 35년 이래 최저 수준인 5.5%로 인하하고 경기 부양을 시도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최근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동남아프리카공동시장COMESACommon Market for Eastern and Southern Africa, 동아프리카공동체EACEast African Community 등 3개의 지역기구 사이에 2013년까지 상품의 자유로운 교역을 목표로 하는 3자 자유무역지대Tripartite Free Trade Area를 창설하자는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역외 국가들과의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보다는 자국 기업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역내 교역 확대와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연계하는 인프라 건설을 촉진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 가운데 최대의 무역 규모를 가지고 있는 국가로, 2010년 기준 아프리카 전체 상품교역액의 약 16%를 점유하고 있다. 2010년 기준 상품수출액은 858억 달러, 수입액은 818억 달러로, 아프리카에서는 최대 규모이지만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0.6%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금, 백금류(Platinum), 철합금(Ferro-Alloys), 석탄, 자동차 등이며, 주요 수입품목은 원유, 자동차, 자동차 부품, 항공기, 무선송신기기 등이다.

사회와 문화


남아공의 사회 특성 - ‘무지개 국가’

민족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많은 종족이 혼재해 살고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이 가운데 아프리카 흑인Black African은 79.4%로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 아프리칸 또한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민을 이루는 주요 민족은 반투어Bantu languages족에 속하는 은구니Ngunis족, 역시 반투계의 소토Sothos족에 속하는 츠와나Tswanas족, 총가Tsongas족, 벤다Vendas족 등이다. 은구니족 안에는 줄루Zulus족과 코사Xhosas족, 은데벨레Ndebeles족, 스와지Swazis족 등이 포함되는데, 줄루족과 코사족, 벤다족 등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만 있는 종족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민의 거의 8할을 차지하는 흑인 다음에는 백인White이 9.2%의 비율로 존재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옮겨온 식민 이주자들의 후손들이다. 유색인Colored 또는 혼혈인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체 주민의 8.8%를 차지하고 있다. 또 인도인 또는 아시아인Indian or Asian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민의 2.6%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
남아공에서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Afrikaans), 그리고 9개의 흑인부족어 등 모두 11개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9개의 토착어는 줄루어IsiZulu, 코사어IsiXhosa, 은데벨레어IsiNdebele, 북소토어Sesotho saLeboa, 소토어Sesotho, 츠와나어Setswana, 스와지어Siswati, 벤다어Tshivenda, 총가어Xitsonga 등이다. 공식어로서 가장 일반적으로 소통되는 언어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로, 아프리칸스어는 네덜란드 이주 정착민들의 언어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주민의 언어 및 후기 이주자들의 언어(말레이어,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와 접촉하면서 1650년부터 1850년까지 2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언어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의 약 57%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그와 유사한 수의 인구가 아프리칸스어를 구사할 수 있으나 아프리칸스어 구사자는 점차 감소 추세에 있다. 아프리칸스어는 주로 백인 농부들에 의해, 지역적으로는 서부 케이프Cape 주 등 주로 남서부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종교
남아공의 종교 분포를 보면 주민의 대다수인 79.8%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고, 다음으로 이슬람교 1.5%, 힌두교 1.2% 순이다. 종교가 없는 주민도 15% 정도 된다. 국민의 8할이 기독교를 믿지만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토착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혼재하고 있다. 기독교는 대부분이 신교이지만 ‘아프리카 독립교회’(African Independent Church)라는 분파가 있다. ‘아프리카 독립교회’는 유럽 선교사들의 설교에 반발한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세운 토착 기독교 집단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2500여 개의 독립교회가 존재하며 그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독립교회에는 아프리카인의 조상 숭배 사상이 일부 반영되어 있으며, 일부다처제를 용인하고 있다.

현장에서 보는 ‘동물의 왕국’

역사적으로 불안과 역경, 고난의 시절을 살아온 남아공은 역설적으로 희망의 땅이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축복받은 땅’이다. 이 나라에는 생물학적 다양성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풍부하다. 국가 정책도 자국의 다양성을 개발하는 데 치중되어 왔다. 다양한 종류의 국립공원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그런 정책의 결과가 이룬 성과중 하나다. 

남아공의 크루거 국립공원은 세계 최초로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공원은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남아공 역사’와 다른 과정을 밟으며 성장해 왔다. 공원에는 많은 동물들이 자유롭게 뛰어 다니고 있다. 매년 약 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 이유다. 관광객들은 현장에서 ‘동물의 왕국’을 경험할 수 있다. 크루거국립공원은 주변의 다양한 공공 및 사설 야생동물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공원의 영역을 모잠비크와 짐바브웨까지 확장하게 된 것은 이 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범 (남)아프리카 사람들의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아공 노던케이프 주에는 또 하나의 국경을 초월한 공원인 칼라가디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남아공의 칼라하리 겜스복 국립공원과 보츠와나의 겜스복국립공원을 통합한 것이다. 이 외에도 남아공에는 식물계와 동물계를 보호하기 위해 18개의 국립공원이 지정되어 있다. 

남아프리카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남아공 요리는 그 역사와 인종만큼이나 다양한 조리법, 독특한 맛의 조화로 유명하다. 케이프 지역에 가장 먼저 정착했던 네덜란드 요리는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민, 특히 케이프 지역 가정 요리사로 일한 말레이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토착민들의 지역 특유 음식이 합해졌다. 사냥꾼이나 개척자들이 떠돌이 생활로 인해 야생에서 먹던 독특한 방식의 요리도 개발되었다. 이후 콰줄루나탈 지역에 터전을 잡은 인도인들과 같은 다른 이민자들은 남아공 음식에 색다른 맛을 더하며 새로운 조리법과 향료를 가미했다.

콩과 메론, 호박, 땅콩 등은 남아공 본토인들이 즐겨먹던 음식이었다. 이들 식재료를 이용한 조리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남아공 음식에서 ‘밀리’로 불리는 옥수수는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식재료이다. 팝이나 부드럽게 찌거나 푸석한 죽처럼 조리한 옥수수 요리가 가장 흔한 음식이다. 전통 아프리카 요리에서 생선이나 닭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등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사냥으로 잡은 동물이나 새는 먹었다.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 메뚜기나 개미, ‘마숀자’로 불리는 모파니 나무에서 자라는 커다란 애벌레(남아공 별미 요리) 등을 요리해 먹기도 한다.

오늘날 팝 요리는 포이키코스(삼발로 된 무쇠솥에 만든 음식)와 함께 남아공 음식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야생 동물 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요리도 브라이 등과 함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 외에도 개척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음식으로는 빌통(남아공식 육포로 소고기나 영양, 타조 고기로 만든다), 브레비스코이트(딱딱한 비스켓류), 폿브루이트(납작한 냄비에 구운 빵) 등이 있다. 남아공 요리의 전통은 남아공의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남아공의 문화 예술

남아공 사람들은 다양한 남아공 지형의 아름다움을 그들의 문화에서도 다양하게 표현해 왔다. 풍부한 문화 속에서 긍지를 갖고 사는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곳에서는 많은 영웅들과 투쟁의 역사, 인류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인류의 요람’을 비롯하여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유적지들이 세계인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3백만 년 이상, 리틀풋(Little Foot)과 미시스 플레스(Mrs. Ples) 등과 같은 최초의 인류는 남아공 지역에 살았다. 그들이 남긴 화석은 ‘인류의 요람’으로 불리는 요하네스버그 북쪽 스터크포테인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의 영향이 역동적인 조화를 이루는 국가이다. 이 나라의 다양성은 독창성과 창의력의 산실이 됐다. 다양한 문화의 상호작용과 각 민족의 전통 유산을 기반으로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오늘날의 ‘무기개 국가’ 남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역동적인 조화가 남아공의 문화 예술에 표현되고 있는 것도 자랑이다.

남아공에는 석기시대의 그림과 벽화 등의 유적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다. 음악 역시 식민지 시대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다양성 속에서 꽃을 피웠다. 음악은 외부 세계로부터 들여온 형식에 현지의 독창성을 가미하여 창조되었다. 오늘날의 남아공 음악은 혁신적인 장르와 전통 클래식 장르가 조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찬송가에서 재즈로부터 쿠웰라 또는 콰이토에 이르기까지 남아공의 음악인들은 국제적인 추세를 반영하는 동시에 남아공만의 독특한 취향을 추구한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함께 주어진 새로운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된 장르는 무용이다. 남아공 무용의 세계는 생동감과 활기, 열정이 넘치는 독특함을 자랑한다(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조). 

물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남긴 유산의 그림자도 아직까지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백인의 정치권력 독점이 철폐되고, 흑인에 대한 법적인 규제도 철폐되면서 수천만 명의 흑인 노동력이 도시로,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제대로 된 직업 교육을 받지 못했던 흑인 인력은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다수의 토착 흑인들은 중산층에 진입하지 못하고 빈곤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남긴 최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남아공이 풀어야 할 ‘숙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남아공은 희망이 있는 나라다. 15세기, 부와 명예를 찾아서 동인도제도를 찾아가던 유럽인들이 남아공은 물론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을 발견하고, 그들의 이정표로 삼았다. 남아공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나라 안에 위치하고 있는 또 하나의 ‘희망봉’을 찾아서 힘차게 행군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과 남아공의 관계


정치 외교 관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호주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참전 우방국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은 1개 비행중대를 포함하여 826명의 병사를 한국전쟁에 파병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이러한 우호관계는 1978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의 제재에 따라 모든 공식적인 관계가 단절되면서 중단되었다. 이후 1990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부의 인종차별정책이 철폐되는 것을 계기로 양국 간에 관계 개선이 모색되다가 1992년 12월 수교에 합의했다.

1994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최초의 다인종 선거에 의한 흑인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양국 관계는 급속히 발전해나갔다. 1995년 7월에는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고, 2010년 11월에는 제이컵 게드레이레키사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 대통령이 주요 20개국 정상회담, 즉 G20(Group of 20) 서울회의를 계기로 방한했다. 이러한 고위급 인사들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양국 간에는 다양한 협력 모멘텀이 조성되고 있다.

경제 통상관계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간의 교역은 1992년 12월 수교 이후 매년 증가하여 약 15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6년 이후에는 30억 달러대로 증가했고, 2014년에는 31억 달러(수출 14.76억 달러, 수입 16.24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국은 광물 수입으로 인해 2005년과 2006년을 제외하고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교역에서 만성적인 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양국 간 경제구조의 상호 보완성이 크기 때문에 한국 기업의 남아프리카공화국 투자 진출 등을 통해 경제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풍부한 지하자원 보유국이자 아프리카 최대의 공업국으로, 중장기적 관점에서 경제·통상 협력관계가 발전 입법수도 케이프타운Cape Town을 주도州都로 하는 웨스턴케이프Western Cape 주에 약 1,800명, 그리고 아프리카의 주요 무역항이자 상공업도시 더반Durban이 있는 콰줄루나탈KwaZulu-Natal 주에 약 150명, 기타 도시에 5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한인회는 프리토리아와 요하네스버그 지역 남아프리카공화국 한인회, 케이프타운 한인회, 그리고 콰줄루나탈 한인회가 있다.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8년 8월 10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4년 5월에 북한의 수교 제의가 한 차례 있었으나,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정부는 북한 핵문제 미해결을 이유로 수교 제의를 거부했다. 이후 1998년 8월 비동맹운동(NAM, Non-Aligned Movement) 정상회의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하게 되면서, 비동맹의장국으로서 보편적 외교원칙에 따라 1998년 8월 10일 북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2002년 3월 5일에 남아공에 북한상주공관이 개설되었다. 북한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간의 교역 규모는 2010년 기준 2억 2700만 달러 수준이다. 이 가운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북 수출액은 2억 2500만 달러에 이르고, 북한으로부터의 수입액은 150만 달러 정도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철광, 망간, 구리 등 광물자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수입품목은 와이어로프, 파이프, 가구 등이 주종을 이룬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1948년 남아공에서는 우익 국민당이 집권하면서 종래의 인종차별관행을 제도화한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실시됐다. 또한 1950년대에 유색인들의 의회 진출 금지, 피부색이 다른 민족들 간의 성관계에 대한 금지법 등과 같은 반민주 악법들도 시행되었다. 흑인들은 고용된 경우가 아니면 도시 지역에는 출입조차 허가되지 않았다. 그들이 출입했다고 해도 케이프타운이나 더반의 해변, 공원 내 벤치, 공중화장실 등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됐고, 남아공 내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를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감옥에 갇혀 있던 만델라의 영향력은 컸다. 그러나 남아공 정부는 변하지 않았다. 1961년 ‘그들만의 리그(백인들만의 국민투표)’에 의한 개헌이 이루어졌고 영국의 통치를 벗어나 대통령제 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

남아공의 현대 정치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1918.7.18.~2013.12.5.)이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철폐된 후 처음으로 실시된 평등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백인정권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에 맞선 투쟁을 이끌었던 인권운동가였다.

1918년 남아공 동남부 음베조에서 출생한 만델라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43년부터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각종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Youth League)을 결성했는데, 여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월터 시슬루(Walter Sisulu)와 넬슨 만델라 등 흑인 인권운동가들이었다. 넬슨 만델라는 1950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의 의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

1952년 넬슨 만델라는 흑인으로서 최초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1961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 내에 군사조직 ‘움콘트 웨 시즈웨’(Umkhonto We Sizwe)를 창설하여 최고사령관에 취임했다. 무장 군사조직 ‘움콘트 웨 시즈웨’는 ‘국가의 창’(Spear of the Nation)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MK라는 약칭으로도 불렸다. 1964년 10월 사보타주 및 정부 전복 음모죄로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1963년에 웨스턴케이프Western Cape 주 케이프타운Cape Town 항구 인근에 있는 로벤 섬Robben Island 교도소에 수감되어 19년간 복역하였으며, 1982년에 케이프타운 교외의 폴스무어Pollsmoor 교도소로 이감되어 다시 8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1982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만델라 석방운동이 전개되었다. 1990년 2월에 출감한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이 되어 1991년 9월에는 민족평화협정(National Peace Accord)에 서명했다. 협정은 폭력사태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며 평화적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넬슨 만델라는 백인정부와 협상하여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공로로 1993년 데클레르크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 4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모든 인종이 참가하는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여기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하면서 만델라는 대통령에 선출되어 다음 달 5월 10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9년 6월 음베키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정치 일선에서 은퇴했다.

넬슨 만델라는 1992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즉 유네스코(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의 국제평화상을 수상했고, 1993년에는 프레데리크 빌럼 데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대통령과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95년에는 영국 영예작위 훈장Honorary Member of the Order of Merit을 받았다. 또 영국의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 짐바브웨 대학교University of Zimbabwe, 미국의 하워드 대학교Howard University 등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6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전 세계 각지의 수많은 대학교로부터 수많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투쟁은 나의 인생』(The Struggle is My Life, 1961)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 1995)이 있다.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은 뉴욕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취미로 권투, 축구, 럭비, 육상 등 운동을 즐기며 정원 가꾸기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부인 에벌린 은토코 마세Evelyn Ntoko Mase와는 종교적인 차이와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참여 문제 때문에 생긴 갈등으로 이혼했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1남 1녀가 있었다. 두 번째 부인 놈자모 위니프레드 마디키젤라Nomzamo Winnifred Madikizela-Mandela와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정책노선 차이와 부인의 일탈행위로 1996년 4월에 합의 이혼했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두 딸이 있다. 넬슨 만델라는 1998년 7월 18일 80회 생일에 그라사 마셸Graca Machel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1995년 7월과 2001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방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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