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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독특한 민족이다. 유대인들은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항하다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수 세기 동안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았다. 이른바‘ 디아스포라Diaspora(유대인의 이산離散)’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서든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지키며 살았고, 끝내는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이라는 작지만 강고한 나라를 건설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및 주변 아랍국들과 대립하며 생존을 위한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유대인이 지닌 힘과 문화에 대한 엇갈린 평가 속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

시원민족과 왕국의 형성

이스라엘Israel 지역은 고대에 가나안Canaan이라 불리우는 땅이었다. 이 땅에 살았던 원주민인 가나안족은 BCE(기원전) 7000년 경부터 농경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지역은 고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위치하여 두 문명이 자주 충돌했던 관계로 셈족, 히타이트족 등 여러 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BCE 17세기에 족장 아브라함이 이끄는 히브리족(헤브라이족, Hebrew)이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의 시원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데, 히브리족은 엄청난 기근 때문에 이집트의 나일 강 하류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집트에서의 탄압과 노예 생활에 견딜 수 없었던 히브리족은 BCE 13세기 경 다시 모세Moses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출애굽 사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후 BCE 1020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Saul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 가나안 땅의 선주민 펠리시테인(필리시티아인)과 싸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이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다윗David 왕과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설한 솔로몬Solomon 왕이 뒤를 이으면서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로마의 지배와 유대인의 추방

솔로몬왕이 죽은 뒤 왕위 다툼으로 인하여 BCE 930년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유데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BCE 722년에 앗시리아 왕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고, 유대 왕국도 BCE 586년 신新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멸망하면서 유대인(유태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바빌론 유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BC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 때 유대인들은 풀려나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켰으나, BCE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해 그리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속주屬州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BCE 1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 동방으로 세력을 뻗치던 로마가 유대 왕국의 내란에 개입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유대 왕국은 로마 제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유대 지방이 로마의 정식 속주가 되어 로마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CE 6년이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와 전통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유대인들은 66년에 로마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와 유대인들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수년 동안 벌어지다 결국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으나 일부 극렬파 유대인들은 사해 인근의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까지 저항을 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73년 집단자결로 끝이 났다. 이 전쟁 때 이스라엘 왕국의 도성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신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었는데 이제 이 성전이 사라져 하나님에게 예배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이후 유대교는 회당(시나고그) 중심의 종교가 되었다. 131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하고 옛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터에 로마의 주신 유피테르를 제사하는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유대 속주의 이름도‘팔레스티나’로 바꿔버렸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시몬바르 코크바를 지도자로 하여 맹렬히 저항하였으나 반란은 진압되었다(CE 135년).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었다.

시온주의Zionism 운동의 등장

로마의 탄압 속에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고향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새로운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 벌어졌을 때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 수는 수만 명에 불과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종교 때문에 현지인들에 잘 동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게토ghetto(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 강제 격리를 위해 만든 거주 지역)에 모여살고 직업선택에 제한을 받는 등 천민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살던 곳의 주민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기 시작한것은 프랑스혁명기부터였다. 프랑스는 혁명의 주된 이념인 자유와 평등에 입각하여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것이 유대인 해방의 첫걸음이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서유럽에서는 점차 철폐된 반면 동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더 나아가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논의와 운동이 19세기말 시작되었다. 이러한 운동을‘시온주의Zionism’라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시온’ 산에서 온 말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대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1860-1904)에 의해 명확한 강령과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896년 『유대 국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세계 시오니스트 총회가 스위스 바벨에서 개최되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어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현실적인 방안으로 영국 정부가 추천하는 아프리카의 우간다, 시나이 반도에 있는 엘 아리쉬 등이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오로지 팔레스타인만이 유대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그리고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 실용주의적 입장이 우세해져 일단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는 것보다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와 정착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 초에 들어 유럽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주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것은 러시아 유대인들이었는데 당시 러시아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유독 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이 등장할 무렵 팔레스타 인에는 유대인들이 3만 5,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물결이 있었는데 도합 45만명 정도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고 추정된다. 

이스라엘의 건국

유대인들의 이민과 건국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측에 가담하였는데 그 때문에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싸웠던 영국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용의가 있음을 선언한 ‘벨푸어 선언’은 유대인들이 전쟁에 협력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인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위임통치를 맡은 영국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이주는 계속되었다. 특히 나치의 탄압을 피해서 독일에서 많은 난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영국 위임 통치 당국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발생 하였다. 유대인들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영국과 싸워 결국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유엔UN(국제연합)에 위임하였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어 독립시킨다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아랍 국가들은 모두 이 안에 반대했지만 소련이 적극 찬성하고 동구권 국가들도 찬성표를 던져 안건이 쉽게 통과되었던 것이다. 이는 소련이 소수민족의 독립을 후원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소련은 이스라엘이 친미 국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미소의 냉전이 조금만 일찍 시작되었더라도 소련과 동구권의 반대로 이 스라엘의 건국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국가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곧 바로 전쟁이 시작되었 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 주변 아랍권 국가 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75만명 정도였는데 주변의 아랍국가들 인구는 3천만이 넘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일 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호언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초반의 불리한 전세를 뒤엎고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점령하였다. 전쟁은 유엔의 중 재로 다음 해 봄에 끝이 났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그 후에도 서너 차례 이상 계속되었다. 시나이 전쟁(1956), 6일 전쟁(1967), 욤 키푸르 전쟁(1973)이 있었고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여 일어난 소규모 레바논 전쟁도 있었다. 이 다섯 차례의 전쟁 가운데 독립전쟁과 욤키푸르 전쟁을 제외하면 나 머지는 모두 이스라엘의 선공으로 일어났다. 6일 전쟁은 단 6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을 통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가자 지구,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구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골란고원Golan Heights은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이 있는 높은 산지로 이스라엘의 방어를 위한 전 략요충지로서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시 리아에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점령하고 있다.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상실한 영토를 되찾기 위한 복수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 때 이집트는 수에즈운하까지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1979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하였다.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문제로 남부 레바논을 공격, 점령한 전쟁으로 이전 전쟁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존립이 문제된 것은 아니었다. 

1988년에는 이스라엘의 건국에 의해 내쫓긴 팔 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선언하였다.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회담을 통해 국가의 지위를 달성하였다(2012년). 그 전까지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 았으나 그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이스라엘이 점 령하고 있던 요르단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자 치권을 획득하는 타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완전 해결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하마스 Hamas 같은 단체가 테러 활동을 그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지속함으로써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영토와 자연환경

이스라엘의 지형은 평원, 산악, 사막, 해안으로 이루어진 좁고 긴 형태(남북 470km, 동서 135km)로 되어 있다. 현재 가자 지구와 요르단 서안지구(동예루살렘 포함)은 팔레스타인의 자치영역에 들어가 있다. 이러한 지역들을 제외하면 이스라엘의 영토면적은 2 만 평방킬로미터 정도로 우리나라의 경상북도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이다. 그런데 이 땅 중에서도 적지 않은 부분이 황무지다. 황무지는 ‘네게브’라고 하 는데 히브리어로 건조하다는 뜻이다. 식물이 살기 힘든 이런 황무지가 이스라엘 영토의 절반을 넘는다. 기독교 바이블에 나오는 유대 광야가 바로 이 곳에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비옥한 지대가 없지 않다. 예수의 고향 마을 나사렛이 위치한 갈릴리 지방이 대표적인 곳이다. 골란 고원에서 시작 된 계곡의 물이 모였다가 흘러나가는 갈릴리 호수가 있는 이 지방은 수자원이 풍부하여 농업에 아 주 유리한 곳이다. 또 갈릴리 지역으로부터 서쪽의 카르멜 산지까지 길게 뻗어 있는 이즈르엘 평원도 비옥한 농경지대이다. 건조지대에 위치한 이 스라엘에는 요르단강을 제외하면 강이 거의 없 다.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왕국의 경계선을 이루며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중요한 수자원 노릇을 하고 있다. 요르단 강은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사해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해수면보다 300m 나 낮은 곳에 위치하여 물이 흘러들면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다. 그리하여 물이 흘러들 뿐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에 염도가 매우 높다. 보통 바다보다 대여섯 배나 염도가 높다. 그래서 사해에는 소금이 둥둥 떠다닐 정도인데 이 때문에 소금을 원료로 하는 화학공장들이 부근에 여럿 들어 서 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수도는 예루살렘이지만 경제중심지는 지중해에 면한 현대식 도시인 텔아비브이다. 인근에 오랜 항구도시인 야파가 있었는데 20세기 초부터 유대인 이주민들이 몰려들어 텔아비브에 도시가 형성되고 독립 직후에는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합쳐졌다. 금융과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중동에서는 두바이 다음가는 경제중심지이다. 이스라엘은 서쪽 해안지대는 대체로 평탄한 반면 동쪽으로 가면 지대가 높아진다. 예루살렘은 고도가 750m에 달한다. 그리고 온통 바위투성이 산지이다. 적어도 예루살렘을 보면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이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세계적인 종교중심지였다. 유대교의 성전이 있었고 또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고 또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성지일 뿐 아니라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다. 마호메트가 이곳에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현재 구예루살렘에 있는 알 아크사 모스크는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곳에 세워졌다. 

예루살렘은 옛 이스라엘 왕국의 2대 왕인 다윗 때부터 수도가 되었는데 다윗은 이 도시를 여부스 인들이라는 이방 족속으로부터 뺏었다고 한다. 여부스 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정복 한 다윗은 이곳에 성과 궁전을 세웠으며 그 아들 솔로몬 왕은 화려한 성전을 건립하였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으로부터 치 자면 적어도 3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로 따지자면 이보다 훨씬 오랜 도시가 있다. 바로 여리고(영어로는 ‘제리코’)이다. 여리고는 구약성서의 여호 수아(BCE 14세기) 이야기에 나오는 도시인데 광야에서 방랑하다가 가나안으로 들어 온 이스라엘인들이 원주민들로부터 빼앗 은 첫 번째 도시였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여리고에는 BCE 9,000년 전으 로 거슬러 올라가는 도성이 있었다. 성벽 과 탑의 유적이 그것을 말해준다. 여리고는 현재는 팔레스타인의 서안 지구에 속 하는 곳이다. 

이스라엘은 지중해를 제외하고도 바다에 면한 곳이 있다. 홍해에서 북쪽으로 쑥 들어온 아카바만이 이스라엘의 영토이다. 정확히 말해 이 지역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이 몰려 있다. 홍해로 나가는 요충지인 이곳 에는 고대로부터 유명한 항구가 있었는데 요르단의 아카바가 그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유명한 휴양도시 에일라트가 있다. 

정치 및 행정

이스라엘의 정치체제는 의회민주주의 공화정이며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나라이므로 유대인의 전통 및 유럽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영향을 받아 각종 이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표출하는데 익숙하며, 주변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의회민주주의가 잘 정착되어 있다. 입법부인 이스라엘 의회 크네셋Knesset의 의원 선거는 의원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정당을 뽑는 방식이다. 크네셋은 전국을 하나의 선거구로 하여 정당별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선출된 12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각 정당은2%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의원을 낼 수 있고 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최근 총선으로 구성된 18대 의회에는 14개 정당이 의회에 진출할 정도로 이스라엘에는 정당들이 난립해 있다. 의회에는 절대다수당이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여러 정당들이 연립하여 정부를 꾸리게 된다. 주요 정당은 리쿠드당과 노동당으로 전자는 민족자유주의(보수), 후자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진보)을 가지고 있다. 양당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형태는 1965년에 갖추어졌다. 2013년 총선에서는 리쿠드-베이테 이누 연합을 제1당으로 하여 연립정부(총 68석)가 구성되었고, 중도성향의 예쉬 아티드, 노동당, 극우성향의 유대인 가정당Jewish Home이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행정부인 정부수반은 제1당에서 선출된 총리가 맡으며 국가수반인 대통령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권한만을 갖는다. 대통령은 개인적 위상과 국가에의 공헌도를 기준으로 선정된 후보 가운데 의회의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며, 임기는 7년이고 연임은 금지되어 있다. 2013년 현재 이스라엘의 대통령은 시몬 페레스Shimon Peres(2007~현재)이며, 총리는 리쿠르당의 당수인 벤야민 네탄야후Benjamin Netanyahu(2009.3~현재)이다. 네탄야후 총리는 역대 수상 가운데서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수상이라고 한다. 그 동안의 수상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으로 온 이주민들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행정부는 국가의 안보를 포함한 국내외 관련 업무 등을 관장하는데, 정부의 정책결정 권한은 매우 방대하여 법에 의해 위임받지 않은 다른 기관의 업무도 수행토록 되어 있다. 의회와 마찬가지로 내각도 4년을 임기로 하며 총리의 사임이나 서거, 의회의 불신임으로 임기가 단축될 수 있다.

사법부는 독립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법관은 대법원 판사, 법조계 인사, 공직자(장관, 의회 의원 등)로 구성된 특별 지명위원회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법관의 정년은 70세이다. 법원은 치안판사재판소(판사 1명), 지방법원(판사 1명 또는 3명), 대법원(홀수의 판사), 특별법원(판사 1명), 종교법원(판사 1명 또는 3명)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방자치 단체는 교육, 문화, 보건, 사회복지, 도로관리, 공원, 상수도, 위생, 소방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법률을 보완하기 위해 내무부 승인을 받은 조례에 따라 기능을 수행한다. 일부 지자체는 조례를 어긴 사람들을 심리하는 특별 법정을 운영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는 법률상 세 종류의 지자체가 있는데, 시municipality는 인구 2만 이상, 군local council은 인구 2천 내지 2만, 면regional council은 여러 개의 부락을 관할한다. 현재 69개의 시, 141개의 군, 54개의 면이 있다. 각 지자체는 시장과 지방 의회가 관리하며, 의원의 수는 관할지역의 인구에 따라 내무부가 결정한다. 지방선거는 매 5년마다 비밀 투표로 행해지며, 시장과 군수는 직접 투표로 선출된다. 면 선거에서는 각 부락의 최다득표자가 의원으로 선출되고 면장은 의원들이 선출한다.

경제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국방과 안보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진국 가운데서는 GDP나 예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편이다. 한국이 GDP 대비 국방비가 2.5% 반면 이스라엘은 6%를 넘는다. 또 병력확보를 위해 특이하게도 남녀 모두에 대한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다. 복무기간은 남성의 경우 3년이며 여성은 그보다 약간 짧다. 이스라엘은 과학기술 수준도 매우 높기 때문에 첨단 무기들도 많이 갖추고 있다. 주변 적대국가들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체제를 개발하였으며 핵무기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군사정찰 위성들도 운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미국 다음으로 첨단기술을 이용한 창업이 활발한 국가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의 높은 교육수준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 많은 세계적 IT 기업들이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 해외 연구개발(R&D) 센터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첫 번째 해외연구개발 센터를 이스라엘에 세웠다. 이스라엘은 또 주변의 중동국가들과는 달리 농업도 매우 생산성이 높은 선진적인 농업으로 만들었다. 초기 유대인 이민자들은 키부츠Kibbutz라는 농업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했는데 키부츠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적 공동체이다. 그 구성원들은 모두가 각자의 능력에 맞게 노동을 하고 분배하는 공동체로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키부츠가 많이 존재한다. 최초의 키부츠는 1910년 갈릴릴 호수 남쪽에 세워진 드가니야 키부츠였다. 초기의 키부츠들은 대부분 농업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산적인 옥토로 바꾸어나갔다. 이스라엘은 키부츠에서 볼 수 있듯이 소농 중심이 아니라 기업농 중심이다. 높은 교육을 받은 이주민들이 운영한 키부츠는 하이테크 농업을 개발하였다. 물을 최대한 절약하는 스프링클러, 점적설비 및 다양한 제어기기 등은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농업기술이다. 농업에서 보듯 자원도 없고 국토도 협소한 이스라엘은 뛰어난 인적 자원을 이용해서 선진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현재 이스라엘의 1인당 GDP는 31,691 달 러에 달해 중동에서는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자랑한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노력 여부에 따라 불리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얼마든지 선진적인 경제를 이룩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여준 귀중한 사례라 할 것이다.

문화와 종교

사회 문화적 특성

이스라엘은 국토는 좁지만 다양한 윤리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채 세계 각국에서 이주한 유대인과 아랍인, 그 밖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회가 역동적이고 활력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전체 인구 중 0~24세의 비율이 43.5%로서 OECD 국가의 비율(24%~31%) 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젊은층이 많은 구조적 배경으로 인해 사회가 비교적 역동적이며 생산성이 높은 특성도 보인다. 사회구성원간의 관계도 예의보다는 실리를 앞세우고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유대인들의 융합은 상대방의 차이를 용납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2000년이 넘는 유랑생활Diaspora의 경험은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시온주의Zionism를 통하여 조상의 땅을 되찾으려는 열망을 구체화시켜, 이스라엘 안에서 자발성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유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와 함께 건국을 전후하여 개척정신에 입각, 소련 및 중동부 유럽으로부터 이주한 유대인들이 평등주의와 공동 사회 원칙에 기초하여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을 시도한 키부츠Kibbutz는 새로운 사회의 모델로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 건국 선언문(1948)은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각각의 종교 공동체는 안식일, 신앙생활, 내부 문제를 관리하는데 있어 자유롭다. 각 종교는 법에 의해 종교 의회와 법원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되어 있으며, 종교 법원은 결혼, 이혼과 같은 개인의 신상 문제에 대해 관할권을 가진다. 종교 사원으로는 유대인 회당Synagogue과 이슬람교 사원Mosque 및 교회Church 등이 있다. 성지聖地는 각 종교의 직권으로 관리되고 접근과 예배의 자유도 법에 의해 보장된다. 예를 들어, 유대교도에게는 ‘통곡의 벽Wailing Wall’과 성전산 등이, 이슬람 교도의 경우 성전산에 있는 하람 아슈 샤리 프 복합 건물로 ‘바위 사원’과 알악사 이슬람 사원 등이, 기독교 교도의 경우 예루살렘의 겟세마네, 마가의 다락방(최후의 만찬) 등이 중요한 성지로 꼽힌다. 

이스라엘에는 코셔Kosher 및 코셔 인증제도라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코셔Kosher 혹은 코셔 음식은 유대교의 율법 카쉬룻kashrut에 의하여 먹기에 합당한 음식을 의미한다. 카쉬룻은 먹기에 합당한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을 철저히 구분하고 있다. 채소와 과일은 일반적으로 코셔로 합당하지만, 육류와 어류, 조류 등은 코셔 판정 기준에 따라 먹을 수 있느냐의 여부가 좌우된다. 율법에서는 돼지와 같이 굽이 갈라지지 않은 동물,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 비늘이 없는 해산물 등은 먹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문어나 오징어, 돼지고기 등은 먹지 않는다. 또 코셔라 하더라도 육류를 우유, 치즈 등 유제품과 함께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함께 요리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같이 먹어서도 안 된다. 유대교는 율법의 음식물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코셔 인증서를 별도로 유대교 랍비(율법학자)로부터 받아야 하는데, 해외에 있는 외국기업이 이를 취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코셔 인증을 획득한 업체의 수는 100여 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대인과 유대교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국가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유대인 가운데에는 다양한 혈통들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어머니만 유대인이면 모두 유대인으로 친다. 그래서 중국인의 얼굴을 한 유대인도 있고 아프리카 흑인의 모습을 한 유대인들도 있다. 유대인들은 유럽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터라 적지 않은 혼혈이 이뤄졌다. 그리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금발도 적지 않다. 혈통으로 유대인들을 규정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크게 쇠퇴하였다. 그렇다면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런데 이것도 좀 곤란한 것이 현재 이스라엘인들의 절반 이상이 유대교를 믿지 않는 세속파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핵심은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선택한 야훼 하나님과 그가 내려준 율법을 믿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 율법은 ‘가르침’이라는 뜻의 ‘토라Torah’에 들어 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내려주었다고 믿는데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에 그 율법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다섯 권의 책들을 토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토라에는 무려 613개에 달하는 율법 조항이 들어 있다.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248개, 하지 말라는 금령은 365개라 한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대체로 준수하는 편이다. 안식일 즉 사바트Sabbath는 금요일 해 질 때부터 -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가 질 때부터 시작된다 - 토요일 일몰시까지인데 이 날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대중교통은 운행하지 않으며 실제로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가스불도 켜지 않고 전기스위치도 올리지 않는다. 모두 일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율법 중에는 명절(절기)에 관한 조항들이 많은데 이방인들에게 신기한 것 가운데 하나가 무교절無酵節이다. 유대력으로 1월 15일부터 칠일동안 누룩(효모)이 들어 간 빵이나 누룩이 들어간 술 등 누룩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되며 집에서도 치워버린다. 이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도망 나올 때 누룩이 든 빵을 해서 먹을 겨를이 없이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조상들의 고생을 맛본다고 해서 무교절 기간에는 반드시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먹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모두 이러한 율법준수자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조상 전래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전체 국민의 20%를 넘지 않는다. 이들은 하고 다니는 복장부터 남다르다. 여름에도 검은 중절모와 검은 외투를 입고 다닌다. 수염을 기르고 머리는 양옆으로 꼬리 모양으로 길게 땋는다. 학교는 일반 학교가 아니라 ‘예시바’라고 부르는 율법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좋은 직업을 가지기도 힘들고 결혼을 해서도 피임을 하지 않고 자식도 많이 낳는다. 그래서 생활이 힘든 사람들 이 많은데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시대와 역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보수적이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양보나 평화공존에도 반대하는 경우가 많아 평화정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관계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중국, 인도 등의 지지를 얻어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싱가폴 등 아시아권의 경제력이 있는 국가와 경제통상협력 확대를 추진한다는 기본 입장을 갖고 있다. 특히 최근 유럽과 미국의 경제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와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배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2년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우리 나라와 FTA 체결을 추진함으로써 아시아 지역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하고 있고, 국제무대에서도 상호 교환 지지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등 우리나라와의 관계 증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외교관계 수립 이후 교역이 급속히 확대되다가 2008년 하반기에 본격화한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교역액이 급감하였고, 2010년도 들어 교역이 다시 증가하여 2011년도에 25억불을 기록하였다. 2011년 기준으로 한국에 있어 이스라엘은 수출규모로 제39위, 수입규모로 제52위의 대상국이다. 한국의 대對이스라엘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 휴대전화기, 평면 TV 등이며 이들 상품에 대한 이스라엘 내 인지도가 상승하고 있어 미국, 일본, EU 등의 동종제품과 수위 경쟁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로부터의 수입품은 주로 반도체 등 하이테크 제품으로 완성품이 아닌 부품 형태로 들여와 국내에서 이를 활용하여 완제품으로 제조하여 재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시장규모가 작아 제조업 발달이 미약하나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하이테크 산업이 발달해 있어 한국의 건실한 제조업 기반 및 마케팅 능력과 이스라엘의 창의성 및 발달된 하이테크 기술을 결합해 세계 시장 진출을 도모할 여지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다. 이스라엘은 북한이 이란과 시리아 등 중동지역 내 미사일 및 기술 판매, 여타 대량살상무기(핵기술 포함)의 확산에 관여했거나, 향후 관여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최근 이란핵 문제가 부각되면서 이스라엘은 이란과 북한간의 핵 및 미사일 커넥션에 주목하고 있으며, 북한의 이란 연계를 차단하기 위한 외교적 조치 방안도 연구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북한의 동향에 대해 요주의하면서, 한국과 미국 등 관련국들과 북한관련 정보 교류를 더욱 확대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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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년 파라오의 나라 이집트

이집트는 나일강의 고대문명을 이룩한 아랍의 대국이다. 오랫동안 파라오 중심의 화려한 문명을 구가하여 왔으나, 그리스 로마와 이슬람 등 약 2300년간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를 거친 끝에 근대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2010년말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불어닥친 아랍의 봄 재스민혁명의 여파로 이집트는 많은 내홍을 겪고 있으며 현재는 군부가 주도하는 과도정부로 운영되고 있다. 5000년의 세계적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 역사의 명암을 살펴보기로 한다. 

역사와 영토환경

영토와 자연환경

이집트는 세계에서 30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중앙아메리카 전역과 비슷한 넓이이며, 스페인의 두 배, 영국의 네 배, 대한민국의 약 열 배 정도의 크기이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인구는 좁은 나일강 계곡과 삼각주에 집중되어 있다. 즉, 아프리카 북동부 구석의 거대한 사각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이집트 국토의 99%이상이 불모의 사막지대이므로, 인구의 99%가 전 국토의 3%에 해당되는 지역인 비옥한 나일강 계곡과 나일강 삼각주에 밀집해 있다.

이집트 국경은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 수단, 북쪽으로 지중해, 동쪽으로 홍해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수에즈운하의 동쪽 지역은 시나이 반도로, 캐서린 산(2642m)과 시나이 산을 비롯한 산맥으로 비탈진 지역이다. 카이로 북쪽에서 나일강Nile river은 수많은 지류로 갈라져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던 동물 대부분(표범, 치타, 오릭스 영양, 하이에나 등)은 오늘날 이집트에서는 멸종되었다. 현재는 길들여진 낙타와 당나귀가 이집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동물이다. 

이집트 날씨는 연중 대부분 덥고 건조하다. 12월, 1월, 2월의 겨울동안 일일 평균 기온은 지중해 연안에서는 섭씨 20도 정도, 아스완Aswan에서는 섭씨 26도 정도이다. 겨울밤에는 섭씨 8도까지 내려가는데 이집트 기준에서는 아주 추운 날씨라 할 수 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으로 1년에 190mm정도 내리고, 아스완은 연 강수량이 2mm로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다. 3월에서 4월에는 서부 사막으로부터 캠신khamsin 열풍이 시간당 150km까지 올라가는 속도로 분다. 시나이의 산지와 다미에타, 발팀, 시디 바래니 등 북부의 일부 해안 도시에는 눈이 내리며,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드물게나마 내리기도 한다. 서리는 시나이 중부나 중부 이집트에서 볼 수 있다. 

이집트는 해마다 나일강에 일정한 홍수가 일어나, 이집트의 토양을 다시 비옥하게 만들어준다. 덕분에 이집트는 연중 내내 수확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인구가 밀집한 이집트의 해안 지대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집트 경제, 농업, 산업에 중대한 결과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 기후 전문가에 따르면 인구 증가 압력과 더불어 해수면 상승으로 금세기 말에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이 환경 난민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한다.

이집트의 역사

고대이집트(파라오 왕조)
이집트 역사는 나일강을 빼고 논할 수 없다. 나일강은 그 지역에 처음 사람이 정착했을 때부터 이집트의 경제, 사회, 정치, 종교 생활의 중심이었다. 5000여년 전(BCE 3100년) 메네스Menes왕이 남·북 이집트를 통합해 멤피스Memphis에 도읍을 하면서 이집트 최초의 안정적인 왕조가 확립되었다. 그 후 2700년간 50명 이상의 파라오Pharaoh(고대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와 30여개의 왕조가 명멸했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침공(BCE 332년)한 후부터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외국의 지배가 이어졌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BCE 2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그 후 500년간 파라오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사원과 피라미드도 점점 더 웅장해지고 규모가 커졌다. 군주의 권력은 제4왕조 시기에 극치를 이루었고 케오프스, 케프렌, 미세리누스 왕은 기자Giza에 세 개의 대大피라미드를 세웠다. 제6왕조와 제7왕조 시기에 권력이 분산되어 작은 공국들이 나타나 봉건제가 확립되었으며, 테베(오늘날의 룩소르Luxor)에 독립된 왕국이 세워졌고 메투호텝 2세의 치하에서 이집트는 다시 파라오 한 사람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50년 후 이집트는 귀족과 장관들의 분열로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힉소스Hyksos족이 북동쪽으로부터 침략해 왔고 1세기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다음 400년 동안 투트모시스 1세를 비롯한 여러 통치자 아래에서 신왕국이 번영했다. 투트모시스 3세는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제국을 서아시아까지 확장했다. 아크헤나텐(아메노피스 4세)의 사위인 투탄카문이 9년간(BCE 1361~BCE 1352) 이집트를 다스린 후 이집트는 장군들, 즉 람세스Ramses 1,2,3세와 세티Seti 1세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스 로마시대
이집트 고대왕조는 BCE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침입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프톨레마이오스Ptolemies 왕조를 세움으로써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국가통합 차원에서 파라오왕조 시대의 건축 양식을 답습한 신전을 건축하고(Dendarah, Philae, Edfu 지역), 파라오 왕조 시대의 이집트 신들을 모방한 그리스신화를 도입하였다. 

이후 BCE 30년에는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Octavian(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Antonius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연합군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물리치고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합병되었다. 3,4세기에 들어서 로마 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외부 세력이 다시 이집트를 침략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령의 이집트는 아랍인들이 들어올 때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이슬람시대
CE 640년에는 칼리프Khalif(이슬람 수장) 우마르Umar의 명령에 따라 이슬람군이 동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우마이야Ummayya(다마스커스) 왕조 및 아바스Abbasid(바그다드) 왕조 등으로부터 파견된 이슬람 총독이 이집트를 지배하였고 이 기간중 많은 콥틱 교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가 콥틱어를 대체하였다. 

이어 969년에는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마호메트)의 사위인 알리Ali(예언자의 딸 파티마Fatimah와 결혼)를 정통 칼리프로 인정하는 시아파 이슬람 왕조인 파티마Fatimah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969-1171)하였고, 이 시기에 가와르라고 불리는 그리스인 알무이즈의 통치하에서 알카히라Al-Qahira(카이로Cairo: 승리자라는 뜻)시가 세워져 수도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로 천도하였다. 

11세기에는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십자군전쟁이 일어났는데, 이집트를 침입한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셀주크튀르크Saljuk Turkey의 술탄Sultan이 파견한 살라흐앗딘Salah Ad Din이 십자군을 물리친 후 이집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여 아이유브Ayyub 왕조(1171-1250)를 열었다. 살라흐앗딘은 카이로를 요새화하였으며 1187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살라흐앗딘 자신이 고용한 터키계 노예 출신인 맘루크Mamluk족 용병에 의해 아이유브 왕조는 무너지고 맘루크Mamluk 왕조(1250-1517)가 세워져 2세기 반 동안 이어졌고, 이어 터키계의 오스만Ottoman 왕조(1517-1882)의 지배로 넘어가 나폴레옹 침략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 시대
1798년에 이르러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하여 1801년까지 잠시 동안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프랑스 학자들에 의해 로제타석Rosetta Stone 발견(1799) 등 많은 고고학적 유물 및 유적이 발굴되어 이집트 문화가 재조명을 받기도 했다. 

이집트에 근대 왕조가 들어선 것은 프랑스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805년 오스만 제국에서 파견한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가 이집트 총독 자리에 오르면서였다. 그는 이집트 정착 후 정치, 군사, 경제개혁 단행 등 근대 이집트 건설의 기초를 닦고, 수단 정벌(1820), 팔레스타인 지역 및 아라비아 반도 파병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었던 이집트를 1801년 영국이 다시 빼앗았지만 결국 영국인들도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축출되었다. 알리의 장손 이스마일Ismail은 대규모 국토 개발계획(수에즈운하 건설, 철도, 통신, 공장, 관개수로 등)을 추진하였으나 그로 인한 외채의 누적(1875년 영국 정부의 수에즈운하 주식 43% 매입)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1876년 외채 상환이 정지됨에 따라 공채정리위원회(영, 불, 독, 이, 오)에 의한 국가재정 관리가 실시되어 이집트 식민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82년에는 아라비Arabi 등 민족주의 그룹이 주도한 알렉산드리아 반영反英폭동이 발생했는데 이의 진압을 구실로 영국군이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고 카이로를 점령한 이후 사실상 영국 총영사에 의한 이집트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보호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이집트는 1922년 명목상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입헌군주국이 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였으나 영국의 실질적 지배는 지속되었다. 하지만 전세계에 불어닥치던 민족자결주의 열풍과 함께 와프드Wafd당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격렬해져 1936년 독립국이 되었으나, 여전히 영국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끌려다니며 연합군에 참전했기 때문에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거의 누리지 못했다. 

이집트공화국의 출범
그러던 중에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제1차 중동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패전하면서 이집트는 국정의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에 1952년 나세르Nasser 중령 휘하 자유장교단의 혁명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이집트아랍공화국이 건립되었다. 이로써 BCE 4세기 이래 약 2300년간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 나세르가 대통령이 되어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 및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으로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미국과 소련이 나선 국제연합UN의 중재로 휴전하게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이집트가 승리한 형국이 되어 아랍의 자존심을 회복한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나세르 사후 1970년에는 사다트Sadat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친서방 온건 노선을 추구하였다. 1973년 10월에는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연합군이 시나이 반도 등의 회복을 위해 이스라엘과의 제4차 중동전쟁(10월전쟁;욤키푸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전과 달리 이스라엘측에 심각한 타격을 줌으로써 아랍에 대한 서구 및 이스라엘의 인식 전환이 이뤄졌고 이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상으로 이어졌다. 1978년 미국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고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1982년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추진하던 사다트 대통령이 공식 행사 도중 이슬람 과격파에게 암살당한 뒤, 부통령이던 무바라크Mubarak가 대통령에 취임하여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와 사다트의 친서구주의의 장점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중도주의를 추구하였다. 

최근 급변하고 있는 이집트 정세
무바라크는 2005년 5선 대통령에 오르는 등 장기독재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2010년말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불어닥친 아랍의 봄 재스민혁명의 여파로 인한 2011년 1월 25일의 이집트 시민혁명에 의해 국민들로부터 축출되었다. 이후 무르시Morsy 대통령 정부가 들어섰다가, 다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2013년 7월 군부가 개입하여 무르시를 축출하고 만수르Mansour 대통령 권한대행의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무르시 축출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 양 진영의 전국적 시위가 격화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이집트 정국의 향방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이집트의 정치체제는 대통령 중심제에 내각책임제 요소를 가미한 중앙집권적 정부형태이다. 이집트는 2011년에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30년간 독재정치를 해 온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고, 2012년 6월 이집트 사상 첫 자유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결과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이 지원하는 무르시Mohamed Morsy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무르시는 무바라크 축출 이후 실권을 쥐고 있는 세속주의 군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사법기관의 의회 해산권을 제한하고 대통령이 공포한 법령이나 규칙이 최종적인 효력을 갖는다’는 내용이 담긴 새 헌법 선언문을 내놓음으로써 군부의 반발뿐만 아니라 이집트 전체의 여론을 악화시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야기시켰다. 시민혁명을 이끈 이집트국민들은 권력을 잡은 무슬림형제단의 무능과 제정일치 신정회귀의 초헌법적 정치행보 등에 크게 실망하고 ‘혁명이 탈취당했다’라고 분노하며 거국적인 반反무르시·반反무슬림형제단 시위를 고강도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자 이집트 군부는 2013년 7월 3일 무르시를 강제 축출하고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아들리 만수르Adly Mahmud Mansour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하젬 엘베블라위Hazem el-Beblawi를 총리로 내세웠다. 하지만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무르시의 복권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진압경찰 간, 무르시 찬반세력 간의 유혈 충돌이 전국 각지에서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1천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이집트 최대 이슬람 조직 무슬림형제단의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만수르 과도정부는 2013년 12월 이집트 신헌법안 230조를 공표하여 2014년 헌법안 국민투표와 대통령 선거 및 의회 선거 실시를 로드맵으로 제시한 상태이다. 

입법부인 이집트 의회는 현재 해산 상태(해산 이전 하원People's Assembly 508석, 상원Shura Council 270석)이다. 양원 모두 시민혁명 이후 해산되었다가 2011.11월~2012.2월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으나, 2012년 6월 최고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하원이 해산되고, 2013년 7월 군부의 대통령 축출 조치 이후 상원도 해산되었다. 

새로 공표된 이집트 신헌법안 230조에 의하면 향후 예상 정치일정은 2014년 1월초(중순)에 헌법안 국민투표 통과 및 발효, 2014년 2월초(중순)~4월초(중순)에 대통령 선거 또는 의회선거 실시 개시로 잡혀있다. 신헌법안에 의하면 국가 원수이고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며, 의회는 최소 4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 또한 대통령은 필요시 국민투표를 통해 의회를 해산할 수 있으며, 의회는 재적 과반수의 서명을 거쳐 3분의 2 동의를 얻으면 대통령에 대한 신임을 철회하고 초기 대통령 선거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법부는 헌법상 법원과 재판관의 독립성이 보장되어 있으며, 기초법원(Primary Court)과 행정법원(Administrative Judiciary) 및 대법원(The Supreme Court of Appeal or Cassation Court)의 3개 기관으로 조직되어 있다. 쟁송 단계는 3종의 하급법원과 최고법원으로 구성된다. 제1심은 각 주에 있는 지방법원, 제2심은 19곳의 중앙법원, 제3심은 6대 도시에 있는 공소법원이 담당한다. 각 법원에는 형사·민사 법정이 있으며, 최종판결은 카이로에 있는 최고법원이 내린다. 최고법원은 장관·부장관 외에 36명의 판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집트의 근대적 사법제도 시행은 영국이 사실상 이집트를 지배했던 1883년부터 시작되었다. 

지방행정은 카이로주·알렉산드리아주 등 27개 주로 되어 있고 그 밑에 군과 읍이 있다. 임명제도에 의해 각각 주지사·군수·읍장을 두고, 주·군·읍에는 각각 지방자치의회가 있는데 의원은 일부 지명된 의원 외에는 일반투표로 선출된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하다.

경제

이집트는 부분적으로 자유기업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다.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증가율보다 더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만, 1인당 GNP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다. GNP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부문은 공업(석유생산 포함)이며, 농업, 공공사업과 방위산업, 무역과 금융이다.

이집트의 농업은 나일 강 계곡과 삼각주 평야 및 몇 군데의 오아시스 주변에서 매우 집약적으로 행해진다. 경지총면적은 국토의 2.3%에 불과하며, 주민의 49%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 농토에서 연간 2∼3모작으로 각종 작물을 생산한다.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매우 높으며, 경제작물로는 면화재배가 중심이고, 식량작물로는 옥수수, 밀, 보리, 쌀, 콩, 과실, 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기름야자 등을 생산한다. 면화는 최고급이며 총수출의 60%를 차지한다. 토지개혁의 결과 대지주의 수는 줄었으나 영세농민이 전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정부는 이들의 협동화를 추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구가 급증하고 많은 농지가 환금작물의 재배에 충당되기 때문에 국내 소요 식량의 절반 이상을 수입한다. 

광업은 석유와 천연 가스의 채취가 주종을 이루며 제조업을 합쳐 GDP의 22%를 차지한다. 광업은 노동인구의 0.3%를, 제조업은 16%를 차지한다. 주요제품은 정유제품, 시멘트, 면직·모직의 직물과 의류, 밀가루 등이다. 고대와 중세의 기념물들, 온화한 겨울기후, 지중해안의 해수욕장과 휴양지들은 관광산업을 이끌고 있다.

이집트는 산업의 약 70%가 국유화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5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를 관리하며, 자유기업과 외국의 투자를 장려한다. 수에즈 운하의 소통이 1975년 재개되고 석유와 천연 가스가 생산되면서 경제는 호전되었으며, 외국의 자본 투자가 개발계획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총노동력은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며, 노동조합 활동은 합법화되어 있다. 높은 인구증가율 때문에 이집트는 계속 저개발의 진통을 겪고 있다. 

철도망은 국유회사인 이집트철도에서 운영한다. 내륙수로는 총길이가 3,200km를 넘는데, 160km가 넘는 수에즈 운하Suez canal를 제외하면 전부가 나일 강 수로이다. 수에즈 운하로는 해마다 2만여 척의 배가 지나다닌다. 정부 소유의 이집트항공에서 국제·국내 항공편을 제공한다. 수출은 주로 원유와 정제품 및 면직물과 면사로 이루어지며, 이집트의 최대수출국은 이탈리아이다. 수입액은 통상 수출액보다 훨씬 많다. 주요수입품은 식료품, 기계류와 전기기구, 수송장비, 화학제품 등이며, 주로 미국, 독일, 프랑스로부터 수입한다. 해외근로자들의 송금이 큰 폭의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문화와 종교

사회 문화적 특성

이집트는 피라미드와 신전으로 대표되는 수천 년의 문화적 전통과 지중해의 여러 문화, 이슬람, 서유럽 문화가 혼재되어 있으나 이슬람의 영향이 가장 강하다. 하지만 이슬람교 계율을 지키는 일은 다른 나라처럼 엄격하지 않다. 카이로에는 전 인구의 8분의 1이 살고 있는데, 주택난과 계층간 소득격차가 심하고 실업률이 높아 많은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주변의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으로 일거리를 찾아 나간다.

대부분 이집트인의 삶과 생활 방식은 수백년간 거의 바뀌지 않았다. 물론 현대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 농민들의 현재 생활은 달라진 것이 없다. 대부분 이집트인들은 숙명론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고, 회화는 이집트인 생활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현대 화가로는 가즈비아 세리Gazbia Serri, 인지 에플라툰Inji Eflatoun, 압델 와합 모르시Abdel Wahab Morsi, 아델 엘-시위Adel el-Siwi, 와힙 나세르Wahib Nasser 등이 있고, 대중음악 가수로는 '이집트의 어머니' 옴 콜트훔Om Kolthum, 압델 할림 알-하페즈Abdel Halim al-Hafez와 모하메드 아브드 엘-와하압Mohammed Abd el-Wahaab, 이헵 터픽Iheb Tawfik, 모하메드 푸아드Mohammed Fouad, 하킴Hakim 등이 있다. 작가로는 나귑 마푸즈Naguib Mahfouz는 1988년 '카이로 삼부작(The Cairo Trilogy)'으로 노벨 문학상을 탔고, 다른 작가로는 나왈 엘-사다위Nawal El-Saadawi, 터픽 알-하킴Tawfiq al-Hakim, 야흐야 하키Yahya Haqqi, 유수프 이드리스Yusuf Idris 등이 있다. 

이슬람(혹은 Hjira) 달력은 그레고리안(서구) 달력보다 11일이 짧으므로 공공 휴일이나 축제는 매년 11일씩 일찍 열린다. 라스 아스-사나Ras as-Sana는 이슬람력의 새해 첫날을 축하하는 것이고 모우리드 안-나비Moulid an-Nabi는 예언자 마호멧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으로 7, 8월경이다.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 동안(현재는 1,2,3월 경) 열리는 행사로 이슬람력에서는 아주 중요한 행사이다. 이 달은 모하메드에게 코란이 계시되었으므로 신앙에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매일 해지기 전까지는 음식도 물도 입에 대지 않는다. 라마단이 끝날 때(Eid al-Fitr)에는 축하의식과 잔치를 벌이며 단식을 깬다. 에이드 알-아드하Eid al-Adhah는 메카Mecca로의 순례 기간으로, 모든 이슬람교도는 적어도 일생에 한 번 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거리는 다양한 색깔의 등불로 장식되고 아이들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뛰어 논다. 각 마을에서 마흐말Mahmal 의식이 열리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여행을 위한 깔개와 수의를 얻는다. 이 행사는 4, 5월경에 열린다. 

이집트의 일반 공립교육은 초등(6년)·예비(3년)·중등(3년)의 3단계로 되어 있다. 6∼12세의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계속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정부의 일반교육제도와 병행하여 이슬람교 기관들이 제공하는 교육제도가 있다. 알아자르 대학교는 세계 유수의 이슬람·아랍 학문의 중심지이다. 교육 서비스의 확대에도 15세 이상의 주민 가운데 55%가 문맹자일 정도로 이집트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다. 이집트의 언론은 1973년 검열이 해제된 이후 비교적 자유롭게 정치·경제 문제들을 비판하고 있다. 전파 매체는 정부에서 관리한다.

이집트의 종교

이집트에서는 고대 창조신화의 신들을 숭배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전통들이 축제 등의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오늘날 이집트의 종교 분포는 수니Sunni파 이슬람교도가 약 90%로 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외 7~10%는 이집트의 전통적인 기독교인 콥트교회Coptic Church나 19세기에 들어온 개신교를 믿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왕조 시대 피라미드 유적에서부터 종교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된다. 주로 태양신 라Ra, 빛의 신 아툼Atum, 공기의 신 슈Shou, 수증기의 신 테프누트Tefenut 등 창조신화 중심의 신들을 모시는 종교적 의식이 왕(파라오Paraoh) 또는 제사장 주재로 매일 신전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는 형태로 거행되었다. 일반 대중들은 일상적인 제사의식에는 참여할 수 없었으나, 질병 치료 등을 위해 신전 출입은 허용되었다. 각 신전들은 1년에 몇 차례씩 고유의 축제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나일강 범람 익월에 지내는 오페트Opet 축제처럼 농경생활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이집트에서는 부활의 신 오시리스Osiris 신화 등의 영향으로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미이라 수술이 왕족 및 귀족층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인간에게는 생명이 끊어져도 파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믿음에서 사후세계에 대비하여 무덤 속에 노예의 모형, 배, 식량, 집모형 등을 함께 부장하였다. 

이슬람교는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Gabriel을 통해 계시받은 알라Allah신의 메시지를 그대로 기록한 코란Quran을 신앙의 지침으로 삼는다. 이슬람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으며 모스크(이슬람 사원) 예배는 연장자인 남자 또는 이슬람 교리에 밝은 남자가 인도한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은둔주의 또는 수도원 생활 등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 교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그룹(Sufi)을 형성하여 사회현실에 참여하면서 이슬람원리주의에 따라 사회개혁을 추구하려는 전통이 있다. 

콥틱교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주교제의 기독교 교파로서 마가Mark가 CE 50년경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근교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창설해 포교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3세기 후반까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284년(콥틱 순교 원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로마 황제 즉위 후 이집트 지역을 점령하고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였으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는 312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의 인성보다 신성만 강조해 인정하는 단성설 신학으로 인해 양성설(예수의 인성과 신성 양면성 인정)을 주장한 로마 교회와 분리되었다. 콥트 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수도원 운동 등의 초대교회(고대교회) 신앙과 전통을 보존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들의 콥트어 성서는 성서학적으로 가치가 큰 고전 문헌이다. 

한국과 이집트의 관계

이집트는 아랍권내 최대 인구를 가진 국가이며, 아프리카·중동·유럽을 잇는 중심지로서 한국은 이집트와의 우호·협력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중동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정책 기조를 갖고 있다. 중동 지역의 안정은 우리나라 에너지 안보 및 경제이익 확보에 긴요하기 때문에 중동 평화 및 안정을 위한 이집트의 노력을 평가하고 지지하는 입장에 있다. 이집트 또한 한국과의 실질 협력관계 중시 정책을 기조로 하고 있다. 1970년대 중후반 실용주의 정책에 따라 우리와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보다 중시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책을 전환해왔으며,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공유하고 한국 기업들의 이집트 투자진출 확대를 희망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 비핵화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및 한반도 긴장 완화지지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이집트는 나세르 대통령과 사다트 대통령 초기인 1970년대 중반까지는 1950년대 이래의 비동맹 운동, 1973년 중동전쟁시 북한의 대이집트 군사 지원 등 국제무대에서 친북한 일변도 정책을 견지하였고 1963년 북한과 국교를 수립하면서도 한국과는 영사관계(1961년)만 유지하였다. 사다트 대통령은 1970년대 후반부터 문호개방 정책을 표방, 친서방 정책을 추구함에 따라 한국과의 경제·통상관계도 점차 신장되어 한국과의 실질적 경제관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미수교 상태는 계속 견지하였다. 1973년 중동전쟁 당시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무바라크 대통령은 북한의 공군 지원을 의식하여 한국과 미수교 상태를 유지해오다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한반도 정세 변화에 편승하여 1995년 4월 13일 한국과 국교를 수립, 비로소 공식적으로 남·북한 동등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이 과정에서도 한국과의 실질적 경제 관계는 계속 증대되었다. 

수교 이후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양국간 협력관계는 더욱 긴밀화되었다. 1999년 4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국빈 방한,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이집트 국빈 방문이 이루어졌고 특히, 경제·통상 분야의 협력이 꾸준히 확대되었다. 1990년대 초반 2억 달러 수준의 교역액이 2010년 31.8억 달러(수출 22.4억 달러, 수입 9.4억 달러)로 15배 이상 증가하였고, 이집트 교역 순위 10위(수입은 미, 중, 독, 이, 불, 러 에 이어 7위)로 부상했다. 2012년 현재 양국의 교역량은 26억 달러인데, 자동차·전자제품 등이 이집트로 수출(18억 달러)되고 있으며 천연가스 등이 이집트에서 수입(8억 달러)되고 있다. 대이집트 투자 규모는 KOTRA 및 39개 업체가 참여하여 72건, 3.21억 달러(1980~2012년 누계, 신고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문화·학술 분야 협력도 확대되어 2010년 수교 15주년 기념 한국문화 페스티벌 및 한·중동 학술세미나 개최를 비롯하여 한국영화제, 태권도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등을 연례적으로 개최,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제고와 한류의 확산이 지속되고 있다. 

2011년 이집트 시민혁명으로 인한 무바라크 대통령 하야와 민주 선거에 의한 2012년 무르시 대통령 취임, 그리고 다시 군부의 개입으로 2013년 만수르 대통령의 과도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국의 큰 전환기를 맞이한 이집트는 현재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전반적인 점검 과정에 돌입해 있다. 하지만 경제우선 정책하에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공유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이집트는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집트 신화


고대 이집트인들은 수백, 수천에 이르는 신과 여신을 섬기는 다신 숭배 신앙을 가졌다. 고대에 태양신인 라Ra가 딸 마아트Maat를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와 이집트를 세우고 다스렸다. 진리와 정의의 여신인 마아트는 지혜의 신인 토트Thoth왕과 결혼하고, 아들 ‘오시리스’, ‘세트’, 와 딸 ‘이시스’, ‘네프티스’를 낳았으며,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세트는 네프티스와 각각 결혼하여 호루스를 낳고, 세트는 아누비스를 낳았는데, 세트는 형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는데, 오시리스 사이즈에 맞는 관을 만들고, 누구든지 관에 들어가 사이즈가 맞는 사람에게 관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자, 오시리스가 들어가니 관을 닫고 나일강에 띄워 보낸다. 그러나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기적의 힘으로 남편을 지하 세계에 부활시키고 아들 호루스를 낳게되고, 호루스는 자라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왕위를 되찾아 지상 최고의 신이 되어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시리스는 죽은 후 저승의 왕이 되어 영생을 심판하는 신이 되었고, 이시스는 사랑의 여신으로 섬겨진다.

헤브루나 고대 그리스 문명은 오늘날까지 세계문명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고대 이집트 문명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단절되어 버렸다. 오시리스나 아누비스 같은 신들은 단지 머나먼 과거의 존재에 불과할 뿐, 오늘날 그 누구도 이 신들에게 의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신비에 둘러싸인 이집트 문명 앞에 그저 경탄할 뿐이다. 왜냐하면, 독일의 이집트 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는 ‘차가운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뜨거운 사회’가 변화를 수용하는 사회라면 ‘차가운 사회’는 역사의 변전變轉이 불러오는 모든 변화를 거부하고 무화無化시켜 버리는 사회이다. 모든 문명과 문화는 글로 쓴 것이든 아니든 그 문명을 이루는 중심 텍스트들이 있는데, 정전의 주석과 주해를 받아들이고 또 다시 질문함으로써 혁신을 이루는 헤브루 문화권이나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이집트는 이 텍스트를 완벽한 정전으로 만들어 주석과 재해석을 거부한다. 이러한 문명권에서는 한번 정립된 진리는 단지 반복만 되어 자기 스스로 갇혀 버린 세계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파라오


이집트의 국왕은 파라오(Pharaoh: 큰 집)라 불리웠고, 살아있는 신으로서 전지전능한 힘을 갖는 절대적인 존재로 여겼으며, 왕이라기 보다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그의 영혼은 신적인 것으로 항상 새롭게 재탄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머리에는 네메스라는 두건을 쓰고, 의식용 가짜 수염을 달고,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왕홀을 들고 있었으며, 머리 가운데에 있는 코브라는 적이 나타날 경우 언제라도 불침을 쏘아 왕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미이라


이집트인들은 죽은 뒤 다른 세상에서 영원히 다시 산다고 믿었으므로. 죽음을 정복하여 오시리스 왕이 다스리는 영생의 왕국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오시리스 신의 심판을 받아 내세로 들어 갈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이 세상으로 돌아와 자신의 몸에 다시 찾아온다고 믿어 죽은 후에도 영혼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몸을 썩지 않게 보존하고자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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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이며, 지형적 복잡성만큼이나 인종, 언어, 문화도 매우 다채로운 나라이다. ‘다양성 속의 통일’을 기반으로 개방과 통합을 추구하는 인도네시아의 국정 철학은 국가를 상징하는 국장國章(Garuda Pancasila)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해 거대한 잠재력으로 다져나가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오늘을 조명해 본다.

김선주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자연환경

인도네시아는 아시아의 동남부, 인도양과 남태평양 사이에 위치해 있는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로서, 크고 작은 1만 7,508개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끝의 수마트라Sumatra섬, 자바Java섬에서 북동쪽의 할마헤라Halmahera섬까지 약 5,100km에 걸치는 호상弧狀(활등처럼 굽은 모양)의 순다열도Sunda Islands와 그 내부에 위치한 보르네오Borneo섬(칼리만탄Kalimantan), 술라웨시Sulawesi섬(셀레베스Celebes) 등의 큰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해역은 테티스해海 구조대와 환태평양 구조대가 이어지는 곳으로 지반의 변동이 격심했던 지역이다. 

현재 이들 제도諸島에 의해 둘러싸인 바다는 수심 50m 이하의 얕은 바다로, 이른바 순다Sunda 해붕海棚(대륙붕大陸棚: 영해의 밖에 있는 비교적 얕은 공해의 해저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 해붕과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의 사풀 해붕은 마카사르Makassar·롬복Lombok 양 해협을 연결하는 월리스선線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순다열도 및 몰루카제도Moluccas에는 현재 화산火山활동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화산의 수가 전국을 통틀어 400개에 달하며, 이 중 활동 중인 화산은 78개이다. 화산은 특히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에 집중되어 있으며 보르네오섬과 술라웨시섬에는 극히 적다. 이 화산들은 자주 발생하는 폭발과 지진으로 인간생활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준다. 화산은 3,000m를 넘는 것이 대부분이며, 자바섬 최고의 스메루Semeru산(3,676m)을 비롯하여 롬복섬의 린자니Rinjani산(3,726m) 등이 대표적이다. 높은 산들 사이에는 많은 고원 및 분지盆地가 이어지며 수마트라섬 서안의 파단 고원, 자바섬의 반둥, 말랑 고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고원에서는 기온이 체감률에 따라 낮아지므로 거주에 유리하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지역의 산지와 해안부근에 있는 정글에는 넓은 저습지대低濕地帶가 분포하며 그 중간을 많은 하천이 곡류한다. 수마트라섬의 무시강Musi Riverㆍ잠비강Jambi River, 보르네오섬의 카푸아스강Kapuas Riverㆍ바리토강Barito River 등은 길이에서 인도네시아의 유수한 하천에 해당한다.

인도네시아의 기후는 여러 섬들이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5°에서 남위 10°사이에 위치하므로 완전한 열대성 기후를 나타내며 동남아시아 계절풍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연중 높은 기온을 나타내 거의 전지역이 평균기온 25∼27℃를 기록하며 적도변의 중앙지대에서는 월별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강수량은 몬순의 영향을 크게 받아 중심부에 해당되는 적도 부근의 연중 강우지역을 제외하면 대체로 건기乾期와 우기雨期의 구별이 뚜렷하다. 주요지역의 연평균강수량은 폰티아나크Pontianak(보르네오섬) 3,175mm, 파당Padang(수마트라섬) 4,172mm, 자카르타Jakarta(자바섬) 1,755mm이며, 소小순다열도Lesser Sunda Islands의 동쪽은 훨씬 더 건조하다.

인도네시아의 역사


고대왕국 시대
인도네시아의 역사는 4세기 무렵부터 등장하는 고대 왕조들로부터 출발한다. 300년대의 쿠다이 왕국에 이어 358년에 성립한 타루마너가라 힌두교 왕국이 자바 서부지역을 지배하였고 500년대에는 가릉 왕국이 존재하였다. 이어 689년 인도계 이주인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불교 왕조 스리비자야Sriwijaya 왕국(중국의 문헌에는 실리불서室利佛逝, 삼불제三佛齊라고 기록됨)이 주로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13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는데, 특히 강력한 해상세력을 형성하여 수마트라, 자바서부,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으며 남중국해무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부를 자랑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 자바섬의 중앙에 샤일렌다르라고 불렸던 왕조가 일어나 보로부두르와 같은 불교유적을 남겨놓았다. 이 왕조는 수마트라섬의 스리비자야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9세기 중엽에 이 두 왕통王統이 합병됨으로써 한때 남중국해의 강대한 해상제국이 성립되었다. 

1292년에는 힌두교 왕조인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이 현재의 전全 인도네시아 영토와 말레이 반도, 필리핀 남부에 걸친 거대한 해상 제국을 형성했다. 이 왕조는 나중에 포르투갈 영토가 된 동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여 인도계 국가로서는 최후의 번영을 누렸다.

이슬람왕국 시대
한편 아랍인들이 남중국해로 진출해온 것은 꽤 오래된 일로 추정되는데, 10∼11세기 무렵 베트남의 참파 근방으로 유입해온 이슬람교는 13세기에 수마트라섬 북부의 사무두라와 페들라크에 이슬람 왕국을 성립시켰다. 15세기에는 이슬람교가 확산되었는데, 수마트라와 자바, 칼리만탄 해안 지역에 말라카Malacca, 반튼Banten, 마타람Mataram 등 여러 개의 이슬람 왕국이 성립했다. 15세기에 자바로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특히 중부지방에서 기반을 굳혔으며, 마자파히트 왕조는 북부해안 부근의 테마크를 지배하였던 이슬람교 군주에게 멸망하였다. 그 뒤 이슬람교는 서부 자바를 비롯하여 보르네오섬, 셀레베스섬 등 여러 섬으로 전파되어 발리섬을 제외한 동인도제도를 휩쓸었다. 

식민통치 시대
근세에 와서는 이슬람교도의 해상세력을 격파한 서유럽인들이 진출해왔다. 

포르투갈Portugal은 암본을 차지하고 몰루카제도의 향료 무역권을 독점하였으며, 스페인Spain은 필리핀을 세력권으로 하여 몰루카제도의 향료무역에도 손을 대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식민지정책에 서툴렀기 때문에 네덜란드Netherlands가 이들에게서 동인도의 해상권海上權을 빼앗았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이곳으로 진출해온 영국인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쿤은 자카르타에서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바타비아를 건설하여 자바섬에 네덜란드 세력을 심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마자파하트 왕조의 뒤를 이은 마타람왕국을 잠식해 들어갔다. 

1602년 인도네시아에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었으며, 1824년에 이르러서는 인도네시아 전체가 네덜란드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한편 1942년~1945년 사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점령통치 방식은 매우 강력하고 잔혹해서, 점령 기간은 3년 6개월 정도였지만 350년에 이르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보다도 더 가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출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전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는 공화국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채택하였으며, 수카르노Achmed Sukarno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식민지 지배의 부활을 꿈꾸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4년간의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치열한 독립 항쟁이 결실을 맺어 1949년 12월 인도네시아는 주권국가임을 승인하는 헤이그 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인도네시아 연방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연방공화국은 자바인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네덜란드가 만든 각지의 괴뢰국가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으므로, 연방의 일원이었던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괴뢰국가를 편입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로 1950년 8월 연방을 해산하고 현재의 인도네시아 전지역을 아우르는 중앙집권국가인 인도네시아 공화국Republic of Indonesia을 재출범시키고 국제연합(UN)에도 가입하였다.

의회민주주의와 교도민주주의
1950년 인도네시아는 헌법개정을 통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의회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국가건설에 착수하였으나, 정당간 대립의 심화와 중앙과 지방간의 갈등,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과 국군을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의 정치적 대결로 인해 정치는 혼란을 거듭하였다. 한편, 미소냉전체제하에서 독립을 달성한 인도네시아는 동서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중립의 외교노선을 견지하였으며, 1955년 4월에는 수카르노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자바 서부의 도시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를 개최하였다.

1959년 수카르노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제도가 인도네시아에 적합하지 않음을 호소하고 1950년 헌법을 폐기한 뒤, 대통령인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체제를 수립하고 종신대통령이 되었으며, 4개 정치세력(민족주의, 종교, 공산주의와 인도네시아 군부)의 균형에 기초한 NASAKOM(민족주의nasionalisme, 종교agama, 공산주의komunisme의 첫 글자를 딴 조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한편 교도민주주의체제하의 수카르노는 이리안Irian 해방투쟁,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등을 통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 대외적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인도네시아의 통일을 유지하려 하였다. 1963년 1월 수카르노 대통령은 말레이시아 연방형성을 영국의 신식민주의로 규정하면서 말레이시아 연방에 대한 대결정책을 선언하고 말레이시아와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이어 1964년 말레이시아가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출되자 1965년 유엔UN을 탈퇴하고 중국,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등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1965년 9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수하르토Haji Mohammad Suharto 장군(당시 전략사령관이자 육군소장)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1966년 3월 수카르노 대통령은 수하르토 장군에게 실권을 이양했다.

수하르토 시대
1968년 3월에 수하르토가 제2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여 신新질서 정부(New Order Government)가 출범했다. 수하르토는 경제개발과 정치적 안정을 최우선시 하는 정책에 기조를 두고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 복귀를 추구하였고, 정치적 안정과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정당시스템과 의회제도의 개편을 실시하여 이를 통해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수하르토의 신질서New Order 체제하에서 권력은 수하르토에게 집중되었고 그 결과 인도네시아의 통일은 강화되고 경제발전도 이루었지만, 다양성의 추구는 통제되고 억제되었다. 1997년에 발생한 아시아통화위기를 계기로 수하르토의 개발독재체제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루피아의 폭락과 물가폭등, 실업자 증대로 이어지는 침체와 혼란에 빠졌다. 1998년이 되자 학생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경제재건, 부패척결을 요구하는 거리 시위가 일어났고, 5월에 군부대가 뜨리삭띠Trisaskti 대학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자카르타에서 대규모 폭동이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었다. 이 사태로 인해 총 6선에 걸쳐 32년간 장기 집권했던 수하르토 대통령은 몰락하게 되고 대통령직을 하비비Bacharuddin Jusuf Habibie 부통령에게 이양했다.

민주화 시대
1999년 10월 인도네시아 최고 권력 기구인 국민협의회MPR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와히드Abdurrahman Wahid 대통령과 메가와티Megawati Setiawati Sukarnoputri(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맏딸) 부통령이 당선되었다. 2001년 7월 국민협의회 특별회의에서는 탄핵을 받은 와히드가 물러나고 메가와티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2004년 7월에는 헌정사상 최초로 국민 직접투표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과반수 득표 후보가 없어 상위 1, 2위 후보인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전 정치·안보 조정장관과 메가와티 대통령 간에 결선 투표가 진행되어 유도요노 후보가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04년 10월 유도요노 대통령이 취임하여 통합정부(United Indonesia Government)가 출범했다. 이어 2009년 10월에는 유도요노 대통령이 재선되면서 제2기 인도네시아 통합정부(United Indonesia Government II)가 출범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정국 개황
인도네시아의 국체國體는 공화국, 정체政體는 대통령 중심제이다. 판차실러Pancasilla라 불리는 ‘건국 5원칙’, 즉 신앙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통일 인도네시아, 대의정치, 사회정의 구현 등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1945년 헌법을 제정하였고, 이를 토대로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는 민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정권(32년간 통치) 하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진통을 경험한 나라이다.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로 운영되던 국정은 1998년 수하르토 대통령 퇴진 이후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DPR의 권한을 강화하는 변화를 겪었고, 2004년 7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헌정사상 최초로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대통령·부통령이 선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민협의회MPR가 국가주권기관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수하르토 퇴임 이후 혼란기를 겪던 인도네시아의 정국은 유도요노 대통령 집권하에서 괄목할 만한 민주화를 성취하였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2009년 재임 후 발리민주주의포럼Bali Democracy Forum을 창설하여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발전 경험을 다른 국가들과 공유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각 정당은 본래 판차실러 민주주의에 기초한 우당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1999년 및 2004년 총선을 거쳐 이슬람계 정당과 민족주의 정당으로 크게 양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14년에 실시될 국회의원 선거(4월) 및 대통령 선거(7월)는 향후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발전 및 정착에 주요 고비가 될 전망이다. 이와 더불어 앞으로 풀어가야 할 주요 국가적 도전 과제로는 군도群島 국가로서의 지역간 불균형과 다종족 등으로 인한 통치상의 난점 해소, 심각한 빈부격차, 인프라 시설 미비 등의 문제 외에도 전통과 근대의 혼재,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잔존, 종교적 관용 유지, 테러리즘 잔존 문제 등도 거론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외교정책에 있어서 자유롭고 독자적인 외교(Free and independent diplomacy)를 정책 기조로 한 비동맹 중립노선을 추구하면서 친서방 외교정책을 통한 실리외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ASEAN의 주도 국가로서 지역협의체에서 ASEAN의 중심적 역할을 유지하고 남중국해에서의 갈등 방지를 도모하고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아체, 서부 파푸아 등 일부 분리독립 요구 지역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재확인하고 영토 일체성의 유지를 위한 지지 확보에 힘을 쏟고 있다. 

행정부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 원수로서, 임기는 5년이며 국민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1968년 6월 경제안정과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목적으로 제1차 개발 내각이 발족한 이후 수하르토 정권 하에서 7차에 걸쳐 개발내각이 구성되었고, 1998년 5월 하비비가 새 과도정부를 구성한 뒤, 1999년 10월 국민협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와히드가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와히드는 국가통합 유지와 경제위기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모든 정파를 포함하는 국민연합 내각을 발족, 취임 직후에는 비교적 정세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방의 분리주의 요구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처리 문제 지연, 정파간 갈등의 표면화 등으로 인해 갈수록 정국이 혼미해지고, 2001년에 들어서면서는 와히드 자신이 조달청 자금 횡령 및 브루나이 국왕의 기부금 유용 혐의 등을 받으면서 국내 정세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결국 와히드는 2001년 7월 23일, 국민협의회MPR의 탄핵에 의해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메가와티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잔여 임기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2004년 7월 5일 인도네시아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유도요노가 메가와티를 물리치고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제1기 인도네시아 단합(United Indonesia) 내각이 출범하였다. 2009년 7월 9일 유도요노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면서 제2기 인도네시아 단합 내각을 출범시켰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2004년 집권 이래 안정적인 정치를 펼치며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 민주주의 발전 등을 이루면서 국민적 신임을 얻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부패 청산과 정치 개혁에 있어서의 가시적 성과가 미흡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재선 당시에 비해 지지율이 하락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입법부
국민대표기관은 국민협의회(MPR : People’s Consultative Assembly)이며, 의회는 국회(DPR: The House of Representatives)와 지역대표협의회(DPD : Regional Representative Council)의 2원적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협의회는 헌법제정, 주요 국가정책 방향 결정, 대통령·부통령 선출 및 해임 등과 관련된 일을 하며 임기는 5년이다. 국회의원 560명과 지역대표협의회의원 132명 등 총 692명으로 구성되어 양자의 총괄기구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국회는 입법권, 예산 결정 및 집행·감독, 행정부 견제 기능을 하며 임기 5년에 총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지역대표협의회는 국회의 기능을 보완하고 지역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해 2004년 10월에 구성된 것으로 ‘상원上院’과 유사한 기관이며, 33개 주에서 각 4명씩 총 132명으로 구성되고 임기는 5년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민주당PD, 골카르당Golkar, 투쟁민주당PDI-P, 복지정의당PKS, 국민수권당PAN, 통일개발당PPP, 그린드라당Gerindra, 국민계몽당PKB, 하누라당Hanura, 나스뎀당Nasdem, 월성당PBB, 정의통일당PKPI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제도는 3심제로서 대법원·고등법원(26개)과 지방법원 및 분원(326개)으로 구성되며 대법원은 하급법원을 지도 감독한다. 그밖에 국방부가 관할하는 군사재판소, 종교부가 관할하는 종교재판소가 별도로 설치되어 각 관할사건을 담당하고 있고, 검찰기관으로는 대검찰청, 고등검찰청, 지방검찰청이 있다. 2003년 12월에는 법률의 합헌성 여부를 심사하는 헌법재판소가 신설되었으며, 국가사법위원회도 설치되어 국회의 승인을 받아 대법관을 임명한다.

지방자치
인도네시아의 지방자치 제도는 수하르토 실각 이후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 지방정부는 34개 주, 98개 시, 403개 군, 6,415개 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도 자카르타와 족자카르타는 특별행정주, 아체와 파푸아 및 서부 파푸아는 특별자치주이다. 행정구역 계층은 크게 두 단계인데, 1단계인 주Propinsi 아래에 2단계인 군Kabupaten(농촌지역)과 시Kota(도시지역)가 구성되어 있고, 군과 시 아래에는 우리나라의 면 또는 구와 유사한 크차마딴Kecamatan, 그 아래에 마을Desa(또는 Keluarhan)이 존재한다. 

외교, 안보, 국방, 통화, 종교 등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지방정부가 권한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는데, 중앙정부의 권한이양 미흡과 지방정부의 준비 부족 등으로 실질적인 지방분권·자치를 이루는 데에는 많은 한계에 봉착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정부간 격차, 부패 등의 문제가 이슈화되어 2004년에 지방자치제도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2005년부터 주지사Governor, 시장Mayor, 군수Regent는 주민들이 직접 선거로 선출하고 있다. 

경제

인도네시아의 경제

인도네시아는 농업과 광업에 기초를 둔 개발도상국형의 혼합경제 체제이다. 인구에 기반한 거대 내수시장과 자원·에너지 개발의 활성화, 외국인 투자의 지속 유입 등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풍족한 자원활용은 경제 운영의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인도네시아는 광물자원에 있어서 수출량 기준으로 석탄(1위), 주석(1위), 니켈(3위), 동(6위) 등이 풍부하고, 국토의 69%가 산림(131만㎢)인 세계 2위의 열대산림자원 보유국으로서 동남아 최대의 목재산업국이기도 하다. 또 석유매장량 세계 27위, 석유생산량은 세계 22위의 국가인데 외국인 투자 축소의 영향으로 석유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하락해 2004년부터 석유 순수입국이 되었으며 2008년에는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석유수출국기구)에서 잠정 탈퇴하였다. 한편 천연가스natural gas 자원의 경우에는 매장량이 세계 11위이고 생산량은 세계 10위로서 석유보다는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네덜란드 식민 통치를 받던 시절의 인도네시아는 서유럽 기업에 의한 단일재배경제형單一栽培經濟型:monoculture의 식민지로 기능하여 왔으며, 민족사회 내부에 민족 부르주아를 형성하지 못한 관계로 독립 후에도 기간산업基幹産業 부문은 물론 생산수단의 생산부문이나 소비물자의 생산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1942년 네덜란드 식민지 권력의 붕괴, 일본군정(1942~1945), 독립전쟁(1945~1949), 그리고 수카르노 정부에 의한 네덜란드 기업의 접수활동이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적 대지주제와 전통적 토지소유제도의 2중구조를 타파하려는 국민경제의 형성이 촉진되었으나, 수카르노 정부 시책을 받쳐주는 경제적 기초가 약했을 뿐만 아니라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뒤를 이은 수하르토 정부는 식량자급을 목표로 하는 비마스 계획을 실시하고 식량·의료 등 국민생활의 구체적인 개선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시책을 실시하였고 외자 도입 정책을 시행함으로 인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하였고 1989년 시작된 제5차 5개년계획에서는 농업부문의 식량자급량 확보와 수출진흥, 고용기회 확대를 위한 공업부문의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다. 1997년 6월부터 시작된 루피아화의 가치폭락은 경제에 큰 위기를 몰고왔으나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와 원조공여국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극복할 수 있었다.

최근 인도네시아 경제는 중산층 증가에 따른 내수와 활발한 해외투자 유입,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최근 3년간 6%대의 고성장을 지속했다. 특히 2012년에는 세계적인 경제불황 속에서도 6.2% 성장하여 G-20국가 중 중국을 제외한 가장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2012년 인도네시아의 명목기준 GDP는 8,949억 달러(세계16위, IMF 기준), 1인당GDP는 3,557달러(세계104위, World Bank 기준)를 기록했다. 2012년도 매킨지McKinsey 보고서는 인도네시아 경제가 주요 도전요인들을 극복할 경우 2030년에 독일과 영국을 초월하여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2013년 들어 인도네시아 경제는 높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환율변동과 보조금 석유 가격인상과 이에 따른 인플레, 국제 원자재 가격(석탄 등) 약세에 따른 수출 부진, 경제성장을 주도하던 외국인 투자의 증가세 둔화 및 소비심리 위축, 생산성 증가를 넘어서는 급격한 임금 인상 등의 요인들로 인해 경제성장이 다소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종교와 문화

종교와 인종

인도네시아인의 대다수는 이슬람교(85.2%)를 신봉하며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 외의 종교는 기독교 8.9%, 천주교 3%, 힌두교 1.8%, 불교 0.8%, 기타 0.3%의 분포를 보인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가 다수일 뿐 세속 국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아랍국가들처럼 전형적인 이슬람 국가는 아니다. 종교 분포상 다수의 세력을 지닌 이슬람 문화가 자연스럽게 사회 생활문화의 저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무슬림과 기독교도들 간의 종교적 충돌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최근 추세는 사회적인 불안과 우려를 야기시키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헌법 29조에서 5개 종교(개신교,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며, 종교가 없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신분증에 반드시 종교가 명시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지만(인도네시아의 대통령 6명이 모두 이슬람교 신봉) 발리 섬에서는 힌두교가, 술라웨시 섬 북부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우위이다. 인도네시아 기독교는 1960년대에 크게 성장하는데, 그 이유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당원들을 교우로 받아들여서 정부와 극우파들의 박해와 학살로부터 보호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인종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부지역은 대부분 말레이족이고, 반면에 동부지역은 멜라네시안섬 출신인 파푸안족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출신지방, 지역별로 각기 종족들이 다르고 언어로 각각 다르다. 예를 들면, 중부자바, 동부자바는 자바인, 서부자바는 순다인, 북부수마트라는 바탁인종이다. 또한 중국, 인도, 아랍후손들의 소수인종도 있다. 이들은 기원전 8세기부터 무역 상인으로 교류하다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다.

문화유산

다양한 인종집단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문화적인 동화작용을 거쳤으며, 그 결과 풍부한 문화양식을 형성하였다. 대승불교의 유적, 힌두교 사원, 금속세공, 장식예술 등은 인도네시아의 문화유산으로 보호, 계승되고있다.

인도네시아의 미술은 인도미술의 한 갈래가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 제국의 경우와 동일하며 역사시대 초기부터 오랫동안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유품은 수마트라섬, 자바섬 동부, 보르네오섬, 셀레베스섬에서 각각 하나씩 발견된 불상(수마트라섬의 것은 석불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청동불상)이다. 모두 4∼5세기 남인도 양식의 작품으로 수마트라섬의 불상을 제외하면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이 가져온 것과 동일한 것이다. 4∼5세기 전후에 인도계 미술은 이들 섬들에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 민족 자신의 미술활동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7∼8세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내구재료인 돌을 이용하는 건축 및 조각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많은 유물을 남겼다. 이것은 자바섬ㆍ수마트라섬에 관한 것으로(특히 자바가 중요하다) 다른 섬들에는 이와 같은 유품이 없다. 이 밖에 인도네시아계 미술이 행하여졌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자바섬은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제국 중 가장 우수한 종교예술을 전개시킨 지역으로, 인도의 불교 및 힌두교 미술의 수용을 필두로 8∼9세기에는 중부 자바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가 도래하였다.

인도 굽타계의 우아하고 가지런한 양식을 기조로 하여 보로부두르Borobudur(불교) 및 칸디 롤로전그란(힌두교)과 같은 동양미술사상의 우수한 걸작을 창조하였다. 그 후 정치의 중심이 동부 자바로 이동한 후부터는 인도와의 교섭이 줄어듦에 따라 미술도 점차로 쇠퇴하고 대신자바의 민족적 요소가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자바의 미술사美術史는 전형적인 쇠퇴의 과정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오랜 유품으로는 팔렘방 부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석불 외에 스리비자야 초기에 속하는 돌 및 청동의 불교존상佛敎尊像이 여러 개 있는데, 중부 자바의 미술과 양식상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주목된다. 동부 자바에서 발견된 찬디 유적, 힌두교 및 불교의 존상 및 숭배물 등이 있다.

약 5천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그린 동굴벽화가 인도네시아 남부 술라웨시Sulawesi와 이리안자야Irian jaya 등에서 발견되었다. 또, 기원전 10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천연색 그림을 남부 수마트라Sumatra 등의 대규모 고분 내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인도네시아 회화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특히 양초와 염색을 이용한 인도네시아 특유의 바틱batik 기법은 일종의 회화 장르이다. 초기 자바인 문학에서는 바틱을 만드는 사람들을 화가로 명명했다. 현재는 중부 지역의 욕야카르타Yogyakarta와 발리Bali가 바틱으로 유명하다.

발리풍 회화의 기법은 꽉 찬 공간을 활용하여 힌두 설도입하는 한편, 전통적인 힌두 설화, 전설 그리고 일상생활상을 화폭에 담고 있다. ‘와양Wayang’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그림자 인형극(Wayang kulit, Wayang golek)이다. 와양은 인도네시아에 전래되는 민속 내용을 소재로 하여, 다랑dalang이라는 변사가 가죽, 나무, 바틱으로 만든 꼭두각시 인형을 무대 뒤에서 조종, 표현하는 전통 연극이다. 주로 자바에서 매우 인기가 높으며 최근에는 민주화 추세에 힘입어 현 사회 상황을 은유적으로 풍자한 인형극이 자주 공연되고 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

인도네시아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남북한의 상주공관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과는 1973년 9월에, 북한과는 1964년 4월에 국교관계가 성립되었다. 1949년 12월 한국은 인도네시아를 승인하였고 1966년 8월에 영사 관계를 수립했다. 같은 해 12월에 주駐자카르타 총영사관을 개설하였고, 1973년 9월에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981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데 이어 이듬해 10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자원개발을 비롯한 양국의 협력관계가 확대되었다. 이후 양국 정상은 상호 방문 및 국제회의에서의 꾸준한 교류를 바탕으로 협력 증진을 확대하여 왔다. 최근에는 2012년 3월 인도네시아 유도요노 대통령의 국빈방한(서울 핵안보정상회의), 2012년 11월 이명박·유도요노 대통령의 정상회담(발리 민주주의포럼)이 있었고, 2013년 10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하는 등 정상외교를 통해 양국간의 유대관계가 강화, 발전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을 자국 경제발전의 모델로 인식하여 양국의 경제협력 증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6년 12월 한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한 인도네시아는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Asia Europe Meeting)등과 국제기구에서 한국에 협조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우호관계국이며 비동맹 회원국으로서의 북한 입장을 의식해 대남북한 균형 기조를 유지한다는 원칙을 표명하고는 있으나 실질적 협력관계는 미미한 상황이다.

양국의 최근 경제 협력 교류로는 제4차 한·인도네시아 민관합동 경제협력실무 T/F 개최(2012.6월, 자카르타), 제6차 에너지 포럼 개최(2012.4월, 발리), 자카르타 세계일류상품전 개최(2012.6.26~28, 자카르타), 제7차 한·인도네시아 산림포럼 개최(2013. 7월, 자카르타)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인도네시아의 제7위 교역국이고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제8위 교역국인데, 양국간 교역규모는 2004년 100억달러를 돌파하였고, 2012년에는 2011년 대비 5.5%감소한 296.3억달러를 기록(대對인도네시아 수출은 139.5억달러, 수입은 156.8억달러로 17억달러 적자)했다. 한국에게 인도네시아는 ASEAN 국가 중 두번째로 큰 교역 파트너이다.

양국간에는 문화교류도 활발해서 정부 차원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2007년 9월에 발효된 한·인도네시아 문화협정으로 문화교류 활성화 기반이 구축되어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계속 증대되고 있으며, 중앙 및 지방 TV가 K-POP과 한국드라마를 지속적으로 방영 중이다. 2011년 7월에는 자카르타에 한국문화원을 개설하고 문화원 내의 세종학당에 한국어 강좌를 마련하여 현지인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보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수카르노Sukarno가 1963년 선언한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의 발단은 1961년 5월‘ 말라야 연방’(말레이시아의 옛 이름)수상에 의한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북보르네오의 사바, 사라왁으로 구성되는 말레이시아 연방 구상 발표에 있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구영국식민지의 통합에 의한 말레이시아 결성을 신식민주의 및 제국주의 세력인 영국의 음모라고 비난, 보르네오 북부지역인 사바와 사라왁이 식민지화되기 이전에는 인도네시아의 영토였음을 강조하며 말레이시아 연방에 대한 대결정책을 선언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가 사바와 사라왁 그리고 말레이 반도에 군부대를 침투시키자, 영국이 말레이시아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편 미국과 IMF로부터의 경제원조가 중단되자, 급격한 물가상승과 식량부족으로 인도네시아의 국내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 사건은 1965년 9.30 사태(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를 군부가 진압한 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수하르토Suharto가 말레이시아와의 화해정책을 추진하여 1966년 8월 국교정상화를 실현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러한 양국간의 화해 협력은 이듬해인 1967년 ASEAN 창설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인의 특성과 관습

인도네시아인의 국민성은 열대성 기후와 풍요로운 식생활 자원, 광활한 영토 등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온순하고 여유가 있는 편이다. 대체적으로 인도네시아인은 대국 기질을 갖고 있으며 가부를 명확히 표시하지 않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말하여 결과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슬람 사회의 경우 여성의 사회 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나, 인도네시아는 비교적 개방된 이슬람 사회로서 여성의 사회 참여가 보장되어 있고 경제발전에 따라 사회진출이 더욱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회 관습에 있어서 인도네시아인들은 악수나 물건을 주고 받을 때 오른손 또는 두 손을 모두 사용하며, 왼손 사용은 불경한 것으로 여긴다. 지방의 경우 노인 및 어린이들은 통상 낮 시간(오후 2시~4시)에 휴식을 취하며, 땀을 흘리는 일이 많으므로 기상 시와 취침 전에는 반드시 목욕을 한다. 머리는 영혼을 담은 곳이라고 생각하여 어린아이라도 머리를 만지지 않으며, 술에 취한 사람을 매우 싫어하는 관습도 갖고 있다. 또한 고성으로 질책 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소리 지르는 사람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관습도 있다.

지역별로 특성을 살펴보면, 대통령을 비롯해 사회지도층 인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자바인은 전체인구의 약 60%로서 상대를 존중하면서 감정 없는 표현과 사려 깊은 판단을 하는 성향이 있어 서로 다투는 일이 드물며, 모든 문제를 서로 협의하고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반면, 수마트라인은 다소 직선적이고 거칠어 보이나 사귈수록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특징인데, 군부, 법조계, 종교계, 학계에 주로 진출해 있고 과격한 인사가 많으며 한국인과 비슷하게 매운 음식을 선호한다. 또한 파푸아인은 사회지도층이 적으며 경제적 기반도 취약하나 강인한 체력을 인정받아 체육선수로 선발되는 경우가 많다.

인도네시아는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위(2억 5,116만)의 인구 대국이며, 300여 종족이 사용하는 언어도 600여 종에 이르고 종족별로 상이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인도네시아 표준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sia)는 인도네시아 국민의 사회통합 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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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상흔의 역사를 지닌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이다. 고대에는 ‘실크로드Silk Road(비단길)’의 중심지였지만 중앙아시아와 이란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1919년 독립 이후에도 여러 분쟁 요인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내전 상태로 빠져드는 바람에 세계적인 극빈국이며 위험 요소가 많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는 다민족ㆍ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고 과거와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정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노종상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자연환경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있는 내륙국이다. 동쪽으로는 파키스탄과 중국(일부), 서쪽으로는 이란, 북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ㆍ타지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 등 6개국과 각각 접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이 메마르고 기름지지 못한 산악지대 또는 사막지대이다. 북부와 남서부 평원지역 일부는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춘 농업지대. 전국토의 1/8가량을 차지하는 농경지(약 12.13%) 가운데 1/3에 관개시설이 되어 있으며 이 관개지역에서 전국 작물의 80% 이상이 생산된다. 

아프가니스탄은 3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주요 농업지역인 북부 평원지대, 리게스탄 사막을 비롯해 주로 사막과 반半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서부 고원지대,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힌두쿠시 산맥을 포함해 히말라야 산맥의 연장지대인 중부 산악지대 등이 그것이다. 

북쪽의 여러 공화국들과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는 아무다리야 강(고대에는 옥수스 강)이 흐르고 있다. 남서부 고원지대에는 길이 1,150km의 헬만드 강이 여러 차례의 관개공사를 거쳐 이 지역의 필요한 농업용수 대부분을 공급한다. 

아프간은 대륙성 기후로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다. 해발 1,770m의 고지에 위치한 수고 카불의 여름 최고기온은 35~40℃, 겨울 최저기온은 -5~0℃이지만 지방 산악지대의 겨울 최저는 -35℃, 사막지대의 여름 최고는 55℃에 이른다. 중부 산악지대는 아亞북극기후로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는 기후이다. 나머지 지역 역시 겨울에는 대부분 춥지만, 여름에는 더운 반건조 스텝 지대이거나 사막지대이다. 

강우량은 극히 적어 연평균 101~406㎜ 수준이다. 좀 구체적으로 남서부 사막지대의 75㎜ 미만에서부터 힌두쿠시 산맥의 1,270㎜ 이상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아프간에는 막대한 양의 고급 철광석을 비롯해 중요한 여러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채광과 수송상의 문제 때문에 거의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북부 평원지역에 매장된 천연가스만이 유일하게 개발되어 상당량 생산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고대 이민족 지배 시대
아프간의 역사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규정되어진 측면이 크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 또는 동·서양의 주요 육상 연결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여행자, 유목민, 상인, 군인들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전략적인 지점에 위치한 아프간 지역은 그만큼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의 명칭으로 처음 이슬람 자료에 나타난 것은 982년이다. 하지만 그 이전 고대 역사부터 살펴보면 아프간 지역은 페르시아(고대 이란)와 인도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인도와 그리스, 페르시아계 국가들에 의해 번갈아가며 지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BCE(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인도, 아프가니스탄까지 확대하였다. 이후 BCE 4세기에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대왕Alexandros the Great에게 아프가니스탄이 정복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아프간 일부 지역은 시리아에 거점을 둔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인도 북부에 근거를 둔 마우리아Maurya 제국에 넘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박트리아(지금의 ‘발흐’ 지방) 총독통치령에서는 박트리아Bactria 왕국이 생겨나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선보였다. BCE 2세기에는 인도 쿠샨Kushan 왕조의 카니슈카 왕(78~144경)에게 정복되었다. 이어 에프탈Ephtalite 왕조와 페르시아 사산Sasan 왕조를 거치면서 힌두교의 영향권에 들어섰으며, 870년경 사파르Saffarid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교가 뿌리내렸다. 1219년에는 칭기즈 칸의 몽골Mongol 제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몽골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독립된 제후국들로 분리되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인도 무굴Mughul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비Safavid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최초의 근대 통일국가 두라니 
1747년 이란장교 출신인 두라니Ahmad Shar Durrani는 칸다하르에 자치정부를 수립, ‘두라니Durrani 제국’을 건설하였다. 자신의 부족인 파슈툰족 사도자이 부족을 중심으로 통치했던 두라니는 동으로 인도 무굴제국을 격퇴하고 서로는 페르시아로부터 헤라를 탈환하는 등 아프간 영토를 공고화하고 가장 광대한 회교제국을 형성하였으므로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출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1772년 두라니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티무르 샤Timur Shah가 즉위하고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Kabul로 옮겼다. 혈족에 바탕을 둔 티무르의 통치는 비 파슈툰족 및 같은 파슈툰족의 길자이 부족으로부터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1818년 사도자이족 왕조가 멸망한 후에는 왕권쟁탈을 위한 내전이 아프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26년 두라니 부족 출신의 도스트Dost가 집권하였다. 도스트는 아들을 동부지역으로 파견하여 시크Sikh군을 격퇴한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도스트는 시크족의 위협에 대한 방어를 위해 당시 인도에 주둔 중이던 아우크랜드Auckland 영국총리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는 영국이 아프간 분쟁에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아프간 내전의 원인은 이데올로기적, 제도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의무와 충성심에 바탕을 둔 개별적인 요인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 이는 아프간 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3차 아프간전쟁과 독립 군주국 시대
19세기 이후 아프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대로서 두 제국에 의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즉 제국주의적 경쟁과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남쪽 부동항을 찾으려는 남하 정책의 거점이면서 자국의 영향권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내륙국들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방지하려고 했다. 반면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까지 진출할 것이라고 판단, 이를 막기 위해서 인도로 넘어오는 길목인 아프가니스탄을 세 차례나 침공해 자국의 세력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것이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아프간-영국간의 전쟁(아프간 전쟁)이다. 

영국은 도스트Dost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시르알리Shir Ali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1838∼1842)ㆍ제2차(1878∼1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년 아브도르 라흐만Abdor Rahman 칸 때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년 하비브알라Habib Allah가 이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제정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反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 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한 결과 제3차 아프간전쟁이 벌어졌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였으므로 영국은 더 이상 전쟁의 여력이 없었던 탓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그 해 8월 아프간과 영국간에 라왈핀디Rawalpindi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어 아프간은 독립 군주국 체제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공화국 수립과 공산독재정권의 등장
1919년 8월 독립하며 군주제를 유지하게 된 아프간의 집권자는 아마눌라Amanullah왕이었다. 그는 1880~1901년간 재위했던 라만Rahman왕의 셋째아들이다. 아마눌라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종교 및 부족세력의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1929년에 즉위한 나디르 칸Nadir Khan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열었으나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 샤Mohammad Zahir Shah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자히르는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며 신중하고 온건한 정부를 운영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도 했으나 1973년 7월 국왕이 외유를 하던 도중에 좌익 파르캄(‘깃발’이라는 뜻)당이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모하마드 다우드 칸Mohammad Daoud Khan 전前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다우드 칸은 새 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겸 총리가 되었고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간 사회를 바꾸려고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외교적으로 친소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다우드 대통령은 친소련 정책을 펼치면서도 자국 내의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을 탄압했고 나아가 이슬람주의자들까지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국내의 불만을 키웠고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과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PDPA)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 민주당 당수였던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인민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쿠데타로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운 인민민주당은 급진적인 공산화 정책을 펼쳤으나 이러한 정책은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종교를 부정하면서 이슬람교 세력들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소위 ‘무자헤딘(مجاهدين; mujaheddin)’이라 불리우는 이슬람주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공산 독재 정권에 저항해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정부군과 무자헤딘간의 충돌로 인해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한 집권한 인민민주당 내부에서도 여러 파벌들의 분열상이 나타났고 1979년에는 당내 권력 투쟁에서 타라키가 실각되고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이 대통령이 되었다. 아민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내정간섭을 거부했고 이슬람 세력들과 반공 세력, 당내 정파 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아프간의 분열과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으며 공산 정권을 붕괴 위기로 몰고갔다. 

아프간-소련 전쟁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인접국 소련은 아프간 내부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자국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이슬람 인구가 밀집된 소련남부의 공화국들로까지 그 여파가 미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결국 소련은 1979년 12월 27일 기존 정권 수호라는 명분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해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아민 대통령을 사살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소련 전쟁이 개시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에 성공한 소련은 인민민주당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해 체코 영사로 밀려난 바브라크 카르말Babrak Karmal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친소련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군 및 친소 카르말 정부군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무자헤딘은 산악지대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과 게릴라전 형태의 전투 방식으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이때 수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은 소련군의 반군 진압작전을 피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도피했다. 소련군 침공 후 게릴라군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소련군이 도시지역과 지방수비대 부근지역을 나누어 지배하며 대치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소련은 막대한 전비를 쓰고 병력도 쏟아부었지만 전세를 회복하지 못하자 1985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고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군 병력 철수를 시작해 이듬해인 1989년 완료함으로써 아프간-소련 전쟁은 소련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나지불라-무자헤딘 내전
그러나 카르말에 이어 집권한 친소 정권인 모하마드 나지불라Mohammad Najibullah 정권이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반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주요 도시들을 계속 지배하려 하자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 사이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주둔 소련군이 두고 간 무기들과 소련의 추가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우세했지만 무자헤딘이 산악지대를 거점삼아 강력한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면서 나지불라 정부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무자헤딘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정부군의 공군기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에 대한 약탈과 강간, 방화 등이 자행되면서 나지불라 정부는 국민들의 민심마저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정부군은 패퇴를 반복했고 무자헤딘에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장병들이 늘어났으며, 1991년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지원이 끊기는 등 악재가 계속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무자헤딘은 점차 세력을 넓혀 카불을 제외한 아프간 전역을 장악했고, 마침내 1992년 4월 25일 나지불라 정권의 최대 거점인 수도 카불의 점령에 성공하면서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고 14년(1978~1992)간 계속된 장기간의 내전은 무자헤딘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는 참화를 겪었다. 종전 후 이슬람 집권평의회 의장 모자데디는 5월 내각을 발족시키고, 6월 랍바니Burhanuddin Rabbani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12월 랍바니는 임기 2년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탈레반-북부동맹 내전
하지만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장악한 무자헤딘은 강고한 통일체 조직이 아니라 여러 무장군벌과 파벌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이를 극복하고 단일 조직체로 통합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결국 무자헤딘 세력들간에 전후 처리와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충돌하면서 아프간은 다시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내전의 혼란속에서 이슬람 성직자였던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Mullah Mohammed Omar가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서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던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1994년 10월 남부 도시 칸다하르에서 탈레반Taliban이라는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결성하고, 랍바니 대통령과 다른 무자헤딘 세력들을 대상으로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원리주의Islamic fundamentalism를 표방했다. 탈레반의 무장투쟁은 정권과 군벌의 학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따라 탈레반은 무장투쟁 2년 만인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랍바니 대통령을 축출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극단적인 원리주의 독재 정치를 시작하여 TV 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하는가 하면 음주, 담배흡연, 면도, 영화를 금지하고 연날리기나 부즈카시같은 아프간의 전통놀이도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며 금지했으며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을 가했다. 또한 문화재 파괴에 민간인 학살, 법 위반자에 대한 손목절단과 잔인한 총살형 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포로 몰아갔다.

이에 탈레반 정권 성립 후 부르하누딘 랍바니 등 몇몇 무자헤딘 세력들이 북부 산악지역으로 달아나 결성한 북부동맹(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이 탈레반 정권에 맞서 내전을 지속하였다. 

아프간-미국 전쟁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건물이 비행기 테러(9.11테러)를 당했다. 그런데 이 테러의 주모자로 알려진 이슬람 근본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가 이끄는 국제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Al-Qaeda가 아프간의 탈레반들과 연합했으며 그들이 아프간에서 은신하며 신변을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미국은 이들의 신변을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과 미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아프간 반군인 북부동맹도 공격을 강화하여 2001년 11월 수도인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이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2001년 11월 26일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정파(로마그룹, 페샤와르그룹, 북부동맹, 키프로스그룹)가 참여해 파슈툰족 출신인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2005년 9월 개최된 아프간 총선 이후 2005년 12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개원되고 이 의회에서 카르자이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미국에 패한 탈레반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카르자이 정권에 끈질기게 항거하고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현재 3만 3000명 규모의 미군을 아프간에 주둔시키고 있는데, 과거 소련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나토NATO 진영은 아프간 반군과의 오랜 소모전으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고 있는 상황이므로 2014년부터 치안권을 아프간 정부에 넘겨주고 서서히 철수할 전망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국제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시아파 교도들과 이란에 있는 180만 명의 난민을 이유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일정 부분 관여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란 견제세력을 지원했다. 파키스탄에는 15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 파슈툰족의 영원한 고향이므로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밖의 나라들은 아프가니스탄 군벌 세력이 양성하는 테러리스트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당량 생산·거래되는 마약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관련된 러시아ㆍ유럽연합(EU) 등 초강대국들이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한층 더 복잡한 상태에 놓여있다.

정치 및 행정

정국 개황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체제는 이슬람공화국이고,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이며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은 2014년 5월 22일 임기가 종료되는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사는 여러 정치적 세력간의 다툼과 정변 및 권력 이동의 불안정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1919년 독립 이후 아프간은 왕정(1919), 공화정(1973), 공산 통치(1978), 소련의 침공(1979), 원리주의 신정(1996), 미국의 침공(2001) 등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의 정치 형태를 겪었다. 무자헤딘이 나지불라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 1992년 이전까지 아프간은 PDPA(인민민주당)가 주요 도시들을 지배했고, 농촌지역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중앙정부를 무너뜨린다는 목표 아래서만 협력하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되자 옛 게릴라 반군, 종교지도자, 지식인 등으로 이루어진 폭넓은 이슬람교 단체 연합이 의장을 포함해 51명으로 구성된 통치회의를 카불에 결성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뒤 미국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나서 카르자이 과도정부가 구성된 후, 2003년 로야지르가Loya Jirga(아프간 종족 대표자 회의)에서 비준되고 2004년 1월에 채택된 신新헌법에 의해 아프간은 3부(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로 이루어진 현재의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신헌법의 주요 내용은 이슬람 외 여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대통령 중심제 및 양원제 채택, 여성의 정치·사회 진출을 허용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2014년 올해 차기 대통령 선거 등 주요 정치일정들에 당면해 있는 아프간의 정국은 선거준비 미비와 치안 불안 등의 요인들 때문에 예정대로 정치일정들이 치러질 지에 대해 일부에서 우려를 제기하고 있을 정도로 미래가 아직 불확실한 상황이다. 또한 아프간은 2009년 11월 국제 투명성 기구의 연간 부패 지수에서 세 계단이 떨어져서 소말리아 다음으로 부패가 심한 세계 2위의 나라가 되었다. 

정부와 의회 및 법원
아프간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이다.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는 2004년 10월 55.4%의 지지율을 얻어 임기 5년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9년 8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치안 부재와 낮은 투표율, 각종 선거 부정들로 얼룩진 가운데 다시 당선되어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행정부의 내각은 대통령과 함께 국민 직선으로 선출되는 2명의 부통령과 대통령이 국회의 승인을 얻어 임명하는 25명의 각료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 의회 결정비준권, 장관ㆍ판사ㆍ장교 임명동의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을 가지며, 내각은 대내외 정책을 집행하고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한다. 

입법부의 의회 형태는 양원제로, 원로회의로 불리는 상원Meshrano Jirga은 102명의 의원(임기 4년의 34석은 주선거에서, 임기 3년의 34석은 지방선거에서 선출되며 임기 5년의 나머지 34석은 대통령이 지명)으로 구성된다. 하원Wolesi Jirga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249석이 구성되고 임기는 5년이다. 의회는 3분의 2 이상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법안을 제출ㆍ수정ㆍ폐지할 수 있다. 양원의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 합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정한다. 족장회의에서 유래된 로야지르가Loya Jirga는 독립, 국민 주권, 영토 통합, 헌법 개정, 대통령 탄핵 등을 의결하며 국회의원, 주 및 지방 정부장으로 구성된다. 

아프가니스탄의 사법부는 한때 과도정권하에서 근본주의자 종교인들이 장악을 한 결과 케이블 텔레비전 금지령이나 여성 권리의 제약 등에 대해 판결하거나 헌법상의 권한을 무시하고 법원에 맡겨지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기도 하는 등의 파행을 겪었다. 하지만 현행 법원은 과거에 비해 더욱 온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전 법원보다는 기술 관료들이 더욱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행정구역
아프가니스탄의 지방 행정구역은 34개 주Province로 구성되어있으며, 각 주는 영내에 주도를 두고 있다. 각 주는 10여개의 군District으로 나뉘며, 전국적으로 364개의 군이 존재하는데, 각 군은 보통 한 도시나 여러 마을로 되어 있다. 각 주에는 주의회Provincial Council가 구성되며, 아프간 전체 주의원 수는 420명이다. 주지사는 내무부에서 임명하고, 군수는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지사는 아프가니스탄 중앙 정부의 대표자이며, 모든 행정 및 공무를 담당한다. 주의 경찰국장도 내무부에서 임명하는데, 주지자와 협력하여 주내 모든 도시나 군의 법 집행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수도 카불Kabul은 예외적으로 시장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임명하며, 카불 주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경제

191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아프간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전근대적인 종교 관습, 공업기반의 결여 등으로 경제 전체가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전형적인 농업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79년 소련 침공 이후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도입되었다. 이후 계속된 내전으로 피폐한 경제기반조차 파괴되었고 경제활동에 필요한 인력 및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아프간 경제는 지속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다. 2001년 말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아프간은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국제사회의 원조 및 지원에 힘입어 2007년까지 연평균 11.9%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경제성장의 밑바탕에는 농업분야를 중심으로 건설, 무역, 최근에는 무선통신 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GNP의 2/3는 농업이, 나머지는 광업·제조업·공공사업 부문과 교역이 차지하며, 주요 교역국으로는 파키스탄, 인도, 미국, 타직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아프간은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국이다.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의 생산 조건이 아프간의 건조한 기후와 맞아 떨어지고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적발이 힘들며 전쟁으로 인한 치안 부재 상태로 인해 아프간은 완벽한 아편생산지가 되었다. 과거에는 탈레반이 아편 생산을 금지하였지만, 미국과의 전쟁 이후 오히려 탈레반이 자금 확보를 위해 아편 생산을 독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IMF 및 관련 국제기구인 UN마약범죄사무국(UNODC) 등은 아편산업 규모가 아프간 전체 GDP 규모의 40%에 달하고 있으며, 지하경제 규모가 전체 경제규모의 80~9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아편산업 및 지하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아프간 정부는 경제 재건을 위해 필요한 세금 및 수입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8년 아프간 정부는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전략 및 정책 수립을 위해 IMF와 공동으로 아프간 개발 종합전략(Afghanistan National Development Strategy)을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종교와 문화

인종, 언어와 종교

아프가니스탄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파슈툰Pashtun족이다. 타지크족ㆍ우즈베크인ㆍ하자라인이 다음을 차지한다. 파슈툰족은 주로 남부와 동부 지역에 살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한다. 타지크족들은 대부분 농민과 장인匠人들이며 주로 헤라트 북동부와 서부 주변지역에 산다. 우즈베크인들은 주로 농민으로 힌두쿠시 산맥 북쪽 지역에 살며, 하자라인들은 중부 산악지대에 살면서 유목을 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토(파슈투)어와 페르시아어의 일종인 다리어로서 2가지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다리어를 쓰며 약 1/3(주로 타지크족ㆍ하자라인ㆍ샤하르아이마크인ㆍ키질바시인)은 파슈토어를 쓴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에서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ㆍ투르크멘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3/4가량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약 1/4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이다.

인구는 전쟁과 난민들의 대대적인 탈출로 1980~1985년에 연간 약 2%씩 감소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인구성장률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평균수준으로 다시 돌아왔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지만 인구의 45%가 15세 이하의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의 4/5 이상이 시골에 살며 1/5 정도는 유목생활을 한다. 가장 큰 도시는 카불Kabul이며 다른 주요도시로는 칸다하르ㆍ헤라트ㆍ마자르에샤리프ㆍ잘랄라바드ㆍ콘두즈 등이 있다. 도시의 거주지 대부분은 카불에서 남서쪽으로 칸다하르, 북서쪽으로 헤라트, 북동쪽으로 마자르에샤리프를 거쳐 다시 남쪽 카불로 돌아올 수 있도록 건설된 주요 순환도로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다. 농촌 인구는 주로 강변에 집중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평균수명은 약 46세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결핵과 세균성ㆍ아메바성 이질의 발생률이 높으며 의료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성인의 문자해독률은 약 25%에 지나지 않는다. 1979년 정부에서 7~15세의 어린이를 위한 무료 의무 교육제도를 처음 실시했으나 초등학교 취학연령 어린이들 가운데 실제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1/3에 불과하다. 거듭된 전쟁으로 고등교육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언론매체는 철저히 정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선전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 문화적 특징

전통적인 아프간 사회는 험악한 산악과 사막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종족들은 독립성이 강하고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며,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아프간의 개인주의는 단순히 개인중심주의가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강조하는 특성을 띠고 있다. 

특히 파슈툰족은 아프간의 지배적인 종족이다. 이들 종족은 약 200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해 왔다. 파슈툰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적으로 용기, 활력, 호전성을 강조해 왔다. 자신들의 문화적 유사성 및 동질성을 수호하기 위해 어떤 투쟁도 불사한다. 

파슈툰족은 강력한 부계사회와 대가족제를 유지하고 있다. 부족의 혈통을 종교나 사상적 요소보다 중시한다. 따라서 종족수호를 위한 충성심, 협동심, 희생과 봉사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파슈툰족 사회에서 개인은 파슈툰왈라Pashtunwali라고 불리는 기사도 규범(일종의 불문법)을 엄격히 추종한다. 이 불문법의 주요 골자는 바달Badal(복수), 멜마스티아Melmastia(환대), 나나와티Nanawati(보호)이다. 이중에서 특히 바달은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으로 되어 있다. 직계가족의 복수는 그 마을뿐만 아니라 종족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파슈툰족 사회의 유일한 통치기구는 지르가Jirga(부족장회의)이다. 지르가는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오면서 관습적으로 제도화되었다. 전쟁이나 평화와 같은 중요한 문제는 모두 이 지르가에서 논의되어 결정된다.

파슈툰족의 오래된 집권은 다른 종족과의 대립을 유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비파슈툰족은 하자리족ㆍ우주베크족ㆍ타지크족 등이다.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이 대립은 아프가니스탄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8세기 중엽 아흐마드 샤가 파슈툰족 중심의 아프간 왕조를 건설하였을 때 비파슈툰족은 자신들의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슈툰족의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비파슈툰족은 ‘파슈툰’의 동의어인 아프간이라는 단어가 국가적 시민권으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이와 같은 종족적 소외감은 아프간 단일국가 건설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과의 갈등은 근친결혼과 사회경제적 이동이 강하게 나타나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어왔다.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

아프가니스탄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1973년 12월에 한국과 아프간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5년 한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1978년 9월 아프간에 좌경 성향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 정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공관을 폐쇄했다. 그러다가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과도정부가 수립되면서 2002년 1월에 양국의 외교관계가 재개되었고 그 해 9월에는 주아프간 한국대사관이 재개설되었으며, 동년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아프간이 참가하기도 했다. 2004년 1월에는 주한 아프가니스탄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아프간에 체류중인 교민은 2013년 현재 86명이며,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인 아프간 방문자는 379명, 아프간인 한국 방문자는 1,008명을 기록하고 있다. 양국간 교역은 1.4억 달러(2012년 기준, 수입은 없고 수출만 1.4억 달러)이며, 대對아프간 투자도 2012년까지 58만 달러 정도에 그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등으로 많은 상처를 입은 탓에 국가적인 재건 지원 사업이 필요한 나라이다. 한국은 2002년 2월 아프간에 최초로 공병지원(다산 부대)과 의무지원(동의 부대)의 병력을 파견하였다가 파병기한이 연장되지 않아 2007년 12월 철수하였다. 2007년은 아프간에 선교활동을 간 한국 교회 선교자들의 피랍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2008년 6월에는 카불 북방 60km 지역에 소재한 바그람Bagram 기지에서 재건사업(병원 운영)을 개시하였으며, 2010년 7월에는 오쉬노Ashena(현지어로 ‘동료’, ‘친구’의 의미를 지녔다고 하여 붙인 애칭) 부대가 재파병되어 파르완Parwan주州에서 독자적인 PRT 활동을 시작하였다. ‘PRT’란 외교관, 군인, 재건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아프가니스탄에 국제안보지원군(ISAF) 소속으로 활동 중인 각국의 지역재건팀(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2011년 1월에 독자 PRT기지인 차리카르Charikar 기지에 입주하였으며, 2012년 2월에는 차리카르 기지 주요 재건시설을 개소하였다. 이어 2012년 12월에 차리카르 기지를 아프간 정부로 이양하였지만, 바그람 기지 재건사업은 지속하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과 북한은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아프간의 공산 정권이 붕괴된 후 1993년부터는 사실상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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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자원과 자연환경의 천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은 선진국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이다. 또한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5위이며, 군비 지출은 세계 13위이다. 인력개발 지수가 세계 2위이고, 삶의 질, 건강, 교육, 경제적 자유, 시민 자유와 정치적 권리 등과 같은 국가 성취도가 상위권에 속한다. 호주라고도 불리는 이 나라는 G20에 속하는 유엔 회원국, 영연방국, OECD,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기구, 태평양 도서국 포럼의 회원국이다. 최근에는 한국 정부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믿음직한 우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백인이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지 불과 200여 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 다방면의 급성장을 이룩한 이 나라의 면모에 대해서 알아보자.

자연환경과 역사

자연환경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라는 나라 이름은 ‘Terra Australis Incognita’(남쪽의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은 약 774만 ㎢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세계 6위의 대국이다. 이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 그리고 태즈메이니아Tasmania 섬을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호주濠洲’로도 불리는 이 대륙은 남북 3,700㎞, 동서 4,000㎞, 해안길이 약 36,000㎞에 달하는데, 서부·중부·동부로 나뉜다. 남쪽에는 남극대륙, 북쪽에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파푸아뉴기니, 북동쪽에는 솔로몬제도와 바누아투, 뉴칼레도니아, 남동쪽에는 뉴질랜드가 위치한다. 서부의 서호주평원은 호주 면적의 60%를 차지한다. 이곳에 대규모 모래사막인 그레이트 빅토리아Great Victoria 사막, 그레이트 샌디Great Sandy 사막이 있다. 중앙에는 맥도넬MacDonnell 산맥이 있고, 태반이 평원으로서 기후는 건조하다. 동부 고지는 습곡산맥이 형성한 완만한 지형인데, 고지도 300~1,000m정도에 불과하다. 고지는 준평원이지만 동쪽 가장자리는 하천이 깊은 계곡을 이룬다. 

동남부에 치우친 오스트레일리아 알프스Australian Alps 산맥은 주봉 코지어스코 산이 해발 2,234m로서 이 대륙에서 눈이 내리는 유일한 지역으로 수자원 개발이 이루어진다. 중앙 저지는 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지역으로 에어 호수 주위에는 해수면 아래의 저지도 있다. 그리고 이 대륙에서 가장 큰 머리, 달링 강Darling River이 흐른다. 중앙저지의 중앙부는 달링강을 비롯해 대부분의 하천이 간헐천이다. 따라서 지하 깊숙이 삼투된 물을 찬정이라는 굴착 우물로 만들어 끌어올려 사용한다. 대체로 중서부는 사막이기 때문에 건조하다. 남회귀선이 국토의 중앙을 지나므로 국토의 40%가 열대권에 속하여 덥다. 동북연안은 무역풍이 불어 열대우림기후다. 동남부는 온대 해양성기후이므로 쾌적하다. 남부와 서남부지역은 겨울비가 내리는 지중해성기후다. 북부지방은 사바나기후이며, 내륙으로 감에 따라 스텝기후를 보여준다. 유카라와 아카시아가 대표적인 수종이며, 캥거루와 코알라, 오리너구리, 가시두더지, 원벳, 듀공, 포섬 등의 특이한 동물들이 서식한다. 선사시대부터 격리되어 있어서 동물계는 세계의 다른 동물과 다른 계통으로 진화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유럽인의 이주 이전
호주에는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이동해 온 것으로 추측되는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s이 5~6만년 전부터 살기 시작했다. 약 6,000년 전 뉴기니아에 이르는 육로가 범람하기까지 뉴기니아와 북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는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약 4,200년 전에는 인디아 본토인들의 이주와 이로 인한 애버리진들과의 혼혈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갑자기 식물 가공과 석기 제조가 행해졌고, 오스트레일리아 들개Dingo가 등장한다. 약 1,000년 전에는 토레스해협의 여러 섬들에 멜라네시아의 항해자들이 이주했으며, 이로 인해 그들과 북오스트레일리아인들 사이에 교류가 일어났다. 중국과 인도의 상인 및 인도네시아의 어부들은 아마도 수세기간 호주 해안을 상륙하거나 지나쳤을 것이다. 이들의 문화적 영향은 애버리진의 암각화나 나무껍질 그림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유럽인들에 의한 발견
호주 대륙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유럽의 식자들은 ‘호주 대륙’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이론에 의하면 북극의 육지 무게에 해당하는 만큼의 육지가 남반구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00년대 이전에는 호주 원주민과 인도네시아, 토레스해협 원주민들이 무역활동을 벌였으며, 16세기에는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특히 네덜란드의 항해가들이 호주의 해안에 도달하거나 육지에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06년에는 스페인인 토레스Luis Vaez de Torres가 토레스해협을 항해하였고, 같은 해에 네덜란드인인 윌리엄 얀츠W. Jansz가 케이프 요크Cape York 반도를 발견했다. 1616년에는 덕 하톡D. Hartog이 호주 서부 해안에서 섬을 발견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덕 하톡이라 불렀다. 1619년에는 프리드릭 핫맨F. de Haoutman이 연구차 이 해안을 따라가다가 그의 이름을 딴 핫맨 아브롤오스를 발견했다. 하톡과 마찬가지로 후일 1696년 플라밍W. de Vlaminh도 호주 대륙의 최서단을 발견했다. 

네덜란드의 항해가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발견을 결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서부지역은 메마르고 생산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을 탐험해볼 흥미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1642년에야 비로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지역에서 지리학적 관계를 탐험하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인 타스만Abel Tasman은 동쪽을 향해 나아갔는데, 온전한 호주 대륙은 아니지만 타스마니엔 섬을 발견했다. 1688년에는 항해가 댐피어William Dampier가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호주 북부 해안 피쵸리 강가에 있는 킹 사운드 근처에 다다랐고, 1699년에는 호주 최서단에 도달했다. 

식민지화와 계속적인 탐험
1770년 마침내 영국 해군의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은 인데버Endeavour호를 타고 호주 동해안 보타니 만Botany Bay에 도달했고, 그곳을 측량하여 지도를 만든 다음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영국 식민지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라 선포했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에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이 증가하면서 사회불안이 야기되고 범죄가 늘어나 죄수들의 처리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영국내의 감옥들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죄수들을 유배할 새로운 식민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식민 영토가 상실되었으므로 새로운 식민지의 개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779년 죠셉 뱅크스Joseph Banks는 호주의 뉴 사우스 웨일즈를 죄수들의 유배지로 적합한 곳이라 제안하였고, 이에 영국 정부는 호주를 죄수들을 유배하기 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1787년 아서 필립Arthur Phillip 선장이 이끄는 해군함 11척을 현재 시드니의 보타니 만Botany Bay을 향해 출항시켰다. 필립 선장의 함선은 1,530명(이중 736명이 죄수)의 인원을 태우고 항해를 하여 1788년 1월 18일 보타니 만에 도착하였으나, 1월 26일에 정착여건이 보다 양호한 잭슨 항Port Jackson으로 옮겼다. 그들은 죄수 유배지로 건설한 이 새로운 정착지를 시드니Sydney라 불렀는데, 당시의 영국 내무부대신 로드 시드니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필립 선장이 시드니에 도착한 1788년 1월 26일 이 날은 호주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Australian Day)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다양하고 볼만한 경축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죄수의 호주 유배는 뉴 사우스 웨일즈에는 1840년까지, 서부 호주에는 1868년까지 계속되어 80여 년간 16만 명이 이주하였다.

새로운 식민지 건설
1792년 프랑스 탐험대가 호주 타스마니엔 섬에 도착했다. 이에 영국은 가능한 한 빨리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1803년에 더번강변의 리스던 골짜기, 1804년에 호바트Hobart 타운, 그리고 테이머 강가에 죠지 타운을 건설했으며, 1813년에는 서부에 택지를 개발하기 위해 처음으로 블루 마운틴을 넘었다. 1823년 도입한 스페인산 메리노양merino羊으로 인해 양모산업 등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적 가치가 인정됨에 따라, 영국은 죄수유배지를 식민지로 전환하고 육상 및 해상탐험 등으로 식민지역을 확장하여 6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이는 현재의 호주 6개주로 발전하였다.

1824년에 브리스번Brisbane 강 어귀에 새로운 죄수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1825년에는 당시의 판-디멘스-랜드Van Diemen's Land가 가장 자립적인 식민지가 되었으며,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는 1826년 올버니Albany, 1829년 프리맨틀Fremantle이 식민지로 건설되었다. 또한 자유 주거지가 북부의 풍부한 목초지로 뻗어나가면서 식민지는 새로운 주거지를 보급했다. 1835년 타스마엔의 상인들은 애버리진들과 오늘날의 빅토리아 주 멜버른Melbourne 지역의 240,000헥타르의 땅을 취득하여 필립 항Port Phillip을 건설했다. 비록 이 거래가 불법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증가하는 인구 압력에 따른 식민지 확장을 가져왔고, 여기서 공식적으로 주거지를 위한 택지가 공급되었다. 

1836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 건설된 아들레이드Adelaide는 죄수가 없는 최초의 자유 식민지로 계획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개척자인 에드워드 웨이크필드Edward Gibbon Wakefield의 기획에 따른 체계적 식민지화의 일환으로 땅이 매도되고 그 대금은 자유로운 정착민들을 식민지로 받아들이는 데 사용되었다. 1840년대에는 죄수노동을 점차 자유이민 노동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호주대륙이 시드니·멜버른 등 수개의 식민지역으로 분리되어 각 식민지 별로 독자적 행정 조직과 조세 체계를 보유하게 되었다. 1851년에는 새로운 식민지 빅토리아Victoria가 공식적으로 뉴 사우스 웨일즈로부터 분리되었으며, 퀸스랜드Queensland도 1859년 뉴 사우스 웨일즈에서 독립한 식민지가 되었다. 

자본주의 발달과 국가를 향한 여정
1851년 호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골드러시gold rush의 물결이 일어났다. 호주 멜버른 북쪽 빅토리아라는 곳에서 금金이 발견되었는데, 이 금을 채광하려는 사람들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골드러시로 인한 경제호황으로 중국, 유럽, 미국 등지로부터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850년의 호주 인구가 40만명이었으나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명으로 증가하였다.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와 장사꾼도 모여들어 호주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개 식민지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인 영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건설붐과 교통 및 체신, 각종 산업이 발달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가 정착하는 한편 노동운동도 발달하였다. 

1854년 9월에 일어난 ‘유레카 혁명’ 사태는 호주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더불어 노동운동의 발전을 촉진한 광부들의 소요 사건이었다. 일명 ‘유레카 방책 봉기’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건은 호주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무장 폭동으로 기록된 사건으로서, 금광 지역에 몰려든 채굴업자와 광부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폭력적 징세절차 등 가혹한 압제 때문에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1854년 12월 영국군과 지방 경찰력에 의해 의해 유혈진압이 되었으나, 식민지 전역에 미칠 파장과 봉기의 확산으로 인한 금광의 상실을 우려한 영국의 유화책으로 인해 자치와 민주적 개혁 등 요구 사항들이 대부분 수용되는 진전을 이루었다. 경제적 불만에 대한 광부들의 희생이 호주의 기반을 닦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자유롭게 호주로 들어왔고 고유한 국가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23년 뉴사우스웨일즈가 제한된 입법권을 취득한 이래 식민지 각 지역은 서서히 자치체제를 확립하였다. 1855년과 1859년 사이에 영국은 호주 내 각 식민지의 헌법 및 자치정부를 승인함으로써 개별적인 식민지들은 책임있는 정부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대영제국으로부터 한층 더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런던은 우선 외교정책과 국방, 무역을 관장했고, 식민지에서는 개별국가들의 결합을 위한 기획이 시작되었다. 1887년 골드러쉬에 의한 노동력 수요 충족을 위해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 유입됨으로써 임금 경쟁이 초래되었으며, 이때부터 백인 노동자들은 유색 인종에 대한 배척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백호주의白濠主義(White Australia Policy, 백인 우선주의 및 백인 사회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정책)의 기원이다. 결국 1888년에 중국인 이민의 제한이, 1896년에는 모든 유색인종의 배척이 결정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1890년대에 접어들어 호주는 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무역, 관세, 교통 및 체신의 통합운용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저임금 유색인종의 유입 저지, 국방문제 및 백색 단일인종의 공동운명체 의식 고조 등의 요인들로 인하여 연방제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891년에 연방헌법의 초안이 작성되어 각 지역간 논의를 거쳐 영국 의회에 제출되는 과정을 거친 끝에 서로 독립적이었던 식민지들은 1900년에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1901년 1월 1일에는 영국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연방을 출범시켰다. 오스트레일리아연방은 기존의 정부관리, 대농장주 및 상업자본가 등의 지배계층과 유배죄수 및 하층민을 중심으로 한 피지배계층의 구분이 매우 강한 정치풍토 속에서,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미국식 연방제도를 혼합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연방헌법에 따라 호주 연방의 수도는 잠정적으로 멜버른Melbourne으로 정해졌으나 191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수도주(首都地域: Australia Capital Territory)가 결정되었고, 그 중심에 해당하는 지역을 1913년에 캔버라Canberra로 명명하였다. 1922년에 최초의 연방의회가 열렸고, 1927년 7월에는 연방수도인 캔버라에 연방정부 및 의회의 이동을 완료하였으며, 1931년에는 영국으로부터 완전자치 승인을 얻게 되었다. 호주는 영국을 따라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새로운 안보·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영국 대신 미국과의 동맹관계로 대체하고 영국에 의존해 외교를 펼치던 이전과 달리 직접 국제외교에 뛰어드는 변화를 추구했다. 또한 비영국계 유럽인의 이주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강력한 이민 정책을 폈는데, 백인 이민정책이 주를 이루었지만 아시아나 다른 대륙에서도 이민이 이루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는 1967년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을 했으며, 1986년에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헌법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하워드Howard 총리 제2기 내각 출범 후인 1999년 11월, 호주에서는 영국과의 유대에서 벗어나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장된 ‘공화제’의 도입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호주 국민 55%의 반대로 부결됨으로써, 호주는 아직까지 형식상 군주국을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호주는 시드니올림픽(2000)을 개최하기도 하였지만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의 독립과 불법 이민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국내에는 토착 원주민의 토지소유 문제 등이 불씨로 남아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 체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은 영국여왕(현재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을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로서, 정치제도는 미국의 연방제도와 영국식 의회주권에 입각한 내각책임제를 혼합한 형태이다. 호주는 1901년 6개 영국 식민지(현재 주)가 합의하여 창설한 연방제 국가로서, 권력은 연방정부와 주정부(6개 주 및 2개 자치지구)에 분산되어 있다. 연방정부는 헌법에 열거된 권한만을 보유하고 잔여권한residual power은 주정부에 귀속되는데, 조세나 경쟁정책, 노동법 등 연방과 주정부에 권한이 중첩되는 분야의 경우에 변화나 개혁을 위해서는 연방과 주정부간에 협상과 타협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연방정부와 주정부간 권력 분산내용은 주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호주의 국가원수는 형식상 영국여왕(Queen of Australia)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연방총독이 여왕을 대신하여 국가원수 기능을 수행한다. 최근에는 외교문서에 국가원수로서 총독을 명기하게 되어 의전상으로도 총독이 국가원수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등 호주의 독립성을 보다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방총독은 외국 국가원수와 대사 접견, 내각선서, 의회개원 등의 의례적 역할 외에, 내각의 권고에 따라 의회의 소집, 정회, 해산, 법률안 동의 및 거부, 각료임명, 법관임명, 사면 등의 권한을 행사하며, 국군 총사령관으로 국군통수권을 보유한다. 

총독은 총리의 제청에 의해 여왕이 임명하며, 모든 국가행위는 헌법 기관인 연방추밀원Federal Executive Council의 자문(실질적으로는 총리가 주도하는 내각의 결정)을 받아 행사한다. 총독은 일반적으로는 내각의 결정에 따라 의례적이고 공식적 역할만을 하고 있으나, 헌법규정에 의해 때로는 강력한 권한 행사가 가능하다. 현재 호주연방의 총독은 최초의 여성 총독이었던 전임 쿠엔틴 브라이스Quentin Bryce가 퇴임하고, 동티모르 국제평화유지군 사령관직을 수행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 피터 코스그로브Peter Cosgrove가 2014년 3월 28일자로 임기 5년의 제26대 호주 총독에 취임하였다. 

행정부
호주는 성문헌법을 채택하고 있으나, 미국과 달리 행정부의 권한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 행정부의 권한은 의회의 신임confidence, 부처 운영에 대한 장관의 자율성과 책임성ministerial responsibility, 내각의 연대책임cabinet responsibility이라는 3가지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 행정부의 수반은 하원의 다수당 당수가 되는데, 동 수반은 의회에서의 다수당 지위(특히 상원까지 장악한 경우)를 이용, 3가지 관습에 대한 해석을 변경함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호주의 정당은 1909년 노동당, 1919년 국민당, 1944년 자유당, 1977년 민주당, 1992년 녹색당이 차례로 창당되었고, 진보를 대변하는 노동당과 보수정당인 자유당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전형적인 양당 정치체제를 정착시켰다. 1983년 총선에서 승리한 이래 1996년까지 노동당이 4회 연속으로 13년간 집권하다가, 1996년 총선에서 자유당-국민당 연합이 승리하면서 2007년까지 존 윈스턴 하워드John Winston Howard 총리가 이끄는 보수 연립 정권이 4회 연속으로 집권하였다. 2007년에는 다시 노동당이 집권하여 2013까지 6년을 이어갔다. 2007년 노동당 정권 출범시에는 케빈 러드Kevin Rudd가 총리를 맡았으나 2011년 노동당 리더십 투표에서 줄리아 길러드Julia Gillard가 승리하면서 노동당 당수와 총리직을 수행하였고, 2013년 노동당 2차 리더십 투표에서 케빈 러드가 다시 승리하면서 노동당 당수와 총리직에 재취임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이어진 2013년 9월 7일 총선에서 자유당-국민당 연합이 승리해 연정을 대표하는 토니 애버트Tony Abbott가 제28대 연방 총리에 취임하여 현재 호주 정국을 이끌고 있다. 

연방의회(입법부)
의회Parliament는 호주 연방정부 시스템의 핵심으로, 상·하 양원제를 택하고 있으며, 하원과 상원에 동등한 권한을 배분하고 있다. 하원은 영국의 경우처럼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정부를 구성하고, 상원은 미국과 같이 각종 법률안(예산안 포함)에 대한 권고와 동의(advice and consent)의 권한을 보유한다. 호주에서 권력구조의 변화는 주로 연방-주 사이에 권한이양 차원에서 다수 시도되었으나, 경미한 경우 외에는 대부분 국민투표에서 실패로 끝났다. 연방의 6개 주와 2개 자치구는 각기 상하 양원을 가지며 연방주의 지방정부 지사는 수석장관으로 불린다. 연방의 주는 교육, 건강, 법률, 경찰, 교통에 관한 배타적 법제정권을 가진다.

연방 상원은 상위 입법 기관으로서 연방을 구성한 각 주의 이익을 동등하게 대변한다는 원칙에 따라 인구수에 관계없이 6개 주에서 각 12명씩, 연방직할 2개 자치구(캔버라 수도권인 ACT와 Northern Territory)에서는 각 2명씩 선출되어 총 76명으로 구성된다.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3년마다 정원의 절반이 선거에 의해 새로 선출되며, 2개 자치 지구 상원의원 임기는 3년이다. 상원 의원 선거는 각 주의 선거구에서 경쟁하는 대선거구제와 비례투표제도에 따라 실시되므로 군소 정당의 의원 진출이 다소간 용이할 수 있는데, 이는 시대적, 지역적 여론의 흐름을 보다 많이 반영할 수 있고 주요 정당간 세력균형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연방 하원은 하위 입법기관이지만 상원보다 더욱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그 다수당 지도자인 연방 총리가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연방 하원은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 내각과 제1야당 당수를 중심으로 하는 음영내각(Shadow Cabinet)간의 정책대결 토론 형식으로 운영된다. 연방 하원은 인구비례에 의해 설정된 선거구에서 선출되는 150명(인구 증감에 따라 조정가능)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3년이다. 하원 의원 선거는 주요 정당에 유리한 소선거구와 선호투표 제도Preferential Vote(투표자들이 각 후보자 모두에 대해 우선 순위를 기재하는 제도)로 선출되며, 이에 따라 의회에서 다수당이 분명하게 형성되고 정부 구성이 용이한 장점이 있지만 군소정당들에게는 매우 불리하다. 

사법부
연방차원의 사법부는 대법원High Court, 연방법원Federal Court, 가정법원Family Court으로 구성되며, 각 주는 통상 주 최고법원Supreme Court, 중급법원Intermediate Court, 즉결재판법원Court of Summary Jurisdiction 및 소액청구법원Small Claims Court으로 구성된 독립된 사법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밖에 연방법과 관련 행정 처분에 대한 소송을 관할하는 행정심판소Administrative Appeals Tribunal와 원주민 소유권법에 따라 원주민 소유권과 관련된 소송을 전담 처리하는 원주민소유권재판소National Native Title Tribunal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구역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방 행정구역은 뉴사우스웨일스 주(NSW), 빅토리아 주(VIC), 퀸즐랜드 주(QLD),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SA),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WA), 태즈메이니아 주(TAS) 등 6개 주와 북부자치주(NT),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특별자치주(ACT) 등 2개 자치주, 그리고 722개의 지방자치정부로 구성되는 연방정부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경제

호주에서 천연자원은 육류와 양모생산보다 더욱 중요한 분야이다. 금광의 발견은 호주 경제 발전의 전기가 되었으며 세계 제3위의 산출량을 자랑하는 납과 아연, 철, 보크사이트, 석탄, 갈탄 등도 산출된다. 2013년에 호주 중부지역인 아르카링카 베이즌에서 약 2,330억 배럴의 유전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사우디아라비아 유전 다음으로 큰 규모다. 아직 수익성이 있는 석유가 채굴될지는 알 수 없지만 원유 추출에 성공한다면 이 나라 전체 사용량을 넘어서 수출까지 할 수도 있는 많은 양이다. 이 유전은 고대에 형성되었으며, 석유와 천연가스를 함유한 케로겐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목축업은 호주 중심 산업의 하나이다. 양羊은 식민 초기부터 도입된 메리노종을 중심으로 북부의 열대지역과 중앙의 건조대를 제외하고는 널리 방목되고 있으며, 양모 생산량은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을 넘는 세계 최대의 생산국이다. 소는 양보다 고온인 북부나 내륙에서도 방목되며, 연안의 다습지역에서도 행해진다. 젖소는 동남연안지역을 중심으로 인구밀집지역과 관련지어 분포하고 있다. 목축은 방목을 위한 넓은 국토와 대찬정분지의 지하수 개발, 냉동선의 발명, 양모 소비의 증가 등을 조건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국토의 66%가 농업과 목축에 적합한 토지인데, 그 가운데 90%가 방목지이다. 이 나라의 목축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농업도 밀을 중심으로 매우 왕성하다. 식민지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시작된 밀 경작은 오늘날 세계 굴지의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총생산량은 2011년 기준 27,410,100톤으로 세계 생산량의 3.89%, 세계 6위를 기록하고 있다. 밀의 경작지는 동남부와 동부 고지의 내륙쪽과 내륙 남서부에 주로 분포한다.

공업은 대체로 침체되어 있었다. 1차 상품을 수출해서 필요한 상품을 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식민지에 공통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더욱 촉진되어 겉보기와는 달리 공업생산량은 제1차산업의 생산량을 넘어서고 있다. 철강산업과 함께 급속히 발전한 자동차산업 등 중공업의 발전도 괄목할 만하다. 

수출의 7할은 20세기 초까지 주로 영국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영국 의존도가 감소하여 1970년대에는 4%까지 낮아졌다. 수입도 영국의 비율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던 것이 1970년대에는 23%로 낮아졌고, 최근에는 3% 이하로 크게 개선되었다. 그 대신 미국, 일본, 독일로부터의 수입 비중이 증가하였고 유럽연합과 캐나다로부터의 수입도 증가일로를 걷고 있다. 그 이후 아태지역 국가들과의 교역 비중이 급증하여 2009년에는 중국, 일본, 한국이 가장 중요한 수출 상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중국으로부터의 수입도 빠르게 증가하여 이 나라 최대의 교역국이 되었다.

관광업은 이 나라 수출량의 8%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이래 관광객은 매년 증가하여 2003년 호주를 찾은 관광객은 435만 명, 2012년에는 610만 명을 기록했다. 호주 관광청은 2020년까지 이 숫자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관광객들은 주로 네덜란드, 중국, 영국, 미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한국, 홍콩, 인도, 독일 등지로부터 온다. 호주에서는 약 51만명 이상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호주에 와서 쓰고 가는 돈은 1년에 약 350억 호주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와 문화

사회적 특징
호주를 처음 개척한 건 영국인들이지만, 오늘날의 호주는 미국이나 캐나다보다도 이민자 비율이 높을 정도로 여러 인종들이 섞여 사는 다문화 국가이다. 백인과 비非백인을 포함해서 이민 1,2세대가 무려 절반을 차지하는 나라가 호주다. 본래 호주 대륙의 원주민은 아직도 수렵시대의 생활을 영위하고 그 인구도 크게 감소하였으므로, 오늘날 호주 사회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럽계 백인의 천하라 해도 좋을 정도다. 호주는 식민지 개척 이래 지속적으로 이민에 의한 인구 증가를 꾀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원개발과 경제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이민 수용 정책을 편 결과 주로 이탈리아, 그리스, 네덜란드계의 이민자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1850년대의 골드러시 때 중국인 광부들과의 사이에 일어난 문제의 해결책으로 생겨난 백호주의白濠主義(White Australia Policy) 정책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으나, 1973년 이 정책이 공식 폐지되었고 1975년엔 인종차별금지법Racial Discrimination Act이 제정되었다. 지금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히려 국민들 대다수가 다문화 정책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며 여러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호주에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다. 고령자, 장애인, 실업자, 병약자, 무주택자에 대한 지원이 눈길을 끈다. 또 오전과 오후에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으며, 크리켓, 론 볼링, 럭비 등의 스포츠가 활발하다. 골프나 경마, 수상스포츠, 캠핑을 즐기고 일요일 오후에는 ‘아르보’(오후라는 뜻)라는 정원 맥주 파티에서 서로 어울린다. 또 예고 없이 친구나 친척집을 방문하여 잡담하는 관습이 있고, 호주식 바비큐를 즐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노동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일년에 4~5주의 휴가와 연중 다수의 공휴일이 지정되어 있다. 

호주의 문화
초기에 호주 대륙의 문화는 식민세력에 의해서 각인되었지만, 고유한 국가적 동질성이 생겨나면서 호주의 국가 문화도 생겨났다. 오늘날 호주의 문화는 다양한 집단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원주민인 애버리진의 토착 문화와 혼합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즉, 현대 호주 문화의 정체성은 원주민 애버리진의 유산, 활기찬 문화의 융합, 혁신적인 사고와 활발한 예술 현장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모방예술의 가장 오랜 형태는 기원전 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애버리진의 석굴묘다. 자연 안료로 나무껍질에 그린 그림에서 아크릴로 화포 위에 그리는 그림으로 바뀌면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고, 1960년대 이래 애버리진 예술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호주에 거주하는 최초 유럽인들의 회화는 동물이나 애버리진을 모티브로 삼고 있으나 톤과 색조에 있어서 유럽의 회화를 범례로 하고 있다. 멜버른에 있는 하이델베르크학파에 의한 프랑스 인상주의에 동화됨으로써 19세기 후반 경에 호주 예술은 처음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오늘날 호주 예술가들은 점차 아시아 나라들의 예술 형태에 영향을 받고 있다. 

자립적인 호주 문학의 발전은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헨리 로슨이나 페터슨 같은 초기 작가들의 시詩는 ‘부시 발라드(bush ballad)’라 불리면서 호주 숲 속 농촌지역의 다채롭고 모험적인 생활을 다루었으며, 그 이후에도 초점은 호주 대륙과 그 주민들에 맞추어졌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많은 호주 작가들은 농촌 생활과 아울러 도시 생활에 관해서도 작품을 썼는데, 소설가 패트릭 화이트Patrick Victor Martindale White(1912~1990)는 ‘폭풍의 눈 The Eye of the Storm’이라는 소설로 1973년에 호주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세기 호주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칭송을 받고 있다. 

호주는 영화 산업을 선도하고 발전시킨 역사를 갖고 있다. 1896년 호주 시드니에서 최초의 영화관이 문을 열었으며, 1906년 호주의 구세군이 상영한 ‘십자가의 병사들’은 세계에서 최초의 진정한 영화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호주의 영화 산업은 20세기 초에 붐을 이루었다가 1930년대 말 이후 미국과 영국의 영화에 밀려 사실상 소멸했으나, 1969년에 호주 정부가 영화 산업의 촉진 정책을 강화하면서 부활했다. 이후 호주적인 테마를 취한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975년 피터 와이어 작 ‘성 발렌틴제의 소풍’이다. 1998년 시드니에는 대형 영화촬영장인 폭스 스튜디오Fox Studios가 문을 열었으며, 이후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의 제작사가 호주로 옮겨졌다. 오늘날 호주는 1년에 20편 이상의 장편영화를 제작하며 갈수록 많은 작품을 해외에 배급하고 있다. 

호주는 또한 풍부한 공연예술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국제적 면모를 갖춘 클래식 음악 연주 분야만 해도 6개의 전문 심포니 오케스트라, 2개의 극장용 오케스트라(오페라와 발레용), 2개의 전문 챔버 오케스트라, 수많은 챔버 뮤직 앙상블이 존재하며 이들 대부분은 국제 투어를 하고 있다. 시드니에 있는 오페라하우스The Sydney Opera House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이자 공연장으로 매년 약 300여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고, 멜버른에 있는 국립 발레 앙상블은 1961년 세워진 호주 발레단으로 매년 185명의 고전 무용수와 현대 무용수들이 호주 각지를 돌며 순회 연주를 하고 있다. 

스포츠는 호주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며, 야외 활동을 뒷받침하는 기후의 영향을 받고 있다. 120개의 국립 스포츠 단체와 수천 개의 지역 및 주 체육 조직이 있는 호주에서는 약 650만 명의 국민들이 스포츠 단체에 등록되어 있고, 15세 이상의 호주인 가운데 23.5%가 규칙적으로 조직적인 체육 활동을 즐긴다. 호주인들은 한국에서는 생소한 스포츠인 럭비와 크리켓, 그리고 럭비와 축구의 중간 형태인 ‘호주축구(Australian rules football)’에 뜨거운 관심을 보인다. 호주는 1956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으며,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호주오픈테니스선수권대회는 매년 1월 멜버른에서 개최되는 4대 그랜드슬램 대회 중 하나로 호주에서 가장 외국인들이 많이 참관하는 스포츠 행사이기도 하다. 

현재 호주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이며 40% 이상이 한 가지 이상의 문화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언어도 226개가 사용 중이며 영어 다음으로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광동어 그리고 아랍어가 많이 사용된다. 이처럼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은 음식에도 반영되어 호주에서 전세계 음식 대부분을 맛볼 수 있으며 예술적으로 융합된 퓨전 음식도 상당히 많다. 호주의 요리는 전통적으로 영국의 요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점차 비영국적인 주민이 이민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다양한 요리가 발달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 요리, 그리고 그리스, 이탈리아 등의 요리가 많이 퍼지고 있다. 

종교적 성향
호주는 한마디로 국교가 없는 나라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이전에 토착민들의 애니미즘적 신앙은 천년간 지속되었다. 본토의 애버리진의 영성은 꿈꾸는 시간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땅에 대한 귀속감을 매우 강조한다. 이런 내용의 설화는 애버리진의 법과 관습에 남아 있다. 그들의 예술, 설화, 춤은 이러한 영성적인 전통을 묘사하고 있다. 호주와 뉴기니아 사이의 섬들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우 영성과 관습들은 그들의 멜라네시아적 유래와 섬에 대한 귀속성을 말해준다. 1996년의 호주 센서스에 의하면, 전통적인 애버리진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은 7000명 이상이다. 영국의 함선이 호주에 도착한 1788년 이래, 기독교는 호주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공식 휴일이 되었고, 호주 도시들의 스카이라인은 교회의 첨탑이 장식하게 되었다. 교회는 교육, 건강, 복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있고, 가톨릭 교육 시스템은 가장 큰 비정규 교육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호주인의 종교적 성향을 살펴보면,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 중 67%를 차지하며 무종교가 26%, 기타(불교ㆍ이슬람교ㆍ힌두교ㆍ유대교 등)가 7% 정도인데, 무종교인의 수치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비영리적인 한 독일 싱크 탱크인 베르텔스만Bertelsmann의 보고에 의하면, “호주는 서방 세계 가운데 종교심이 가장 박약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거의 4인의 호주인 가운데 3인은 종교를 거의 믿지 않거나 종교가 삶에서 거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답한다.”고 한다. 2009년 1718 명의 호주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 연구에 의하면 호주에서 매달 종교 봉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1993년 23%에서 2009년 16%로 감소했으며, 1993년 15~29세 응답자의 60%가 기독교인과 일치했으나 2009년에는 33%로 대폭 감소했다. 호주인이 급격하게 종교의 영향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

한국과 호주의 교류는 1884년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양국의 관계는 호주가 1947년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6·25때 참전함으로써 매우 긴밀해졌다. 1961년 양국의 수교 이래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등 범세계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정치, 외교 분야에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한 실질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양국은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양국의 번영에 직결되어 있다는 기본 인식 아래 역내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미국의 지역적 역할을 지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공히 통상국가이면서 상호 보완적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태지역의 중견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제반 문제에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는 유사성이 강하다. 양국간의 상호 보완성과 유사성을 근간으로 양자관계 뿐만 아니라 지역 및 세계적 차원에서 안보·군축·경제·통상분야의 협력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호주는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와 남북 대화 촉진, 1953년의 휴전협정을 대신할 영구적 평화 협정 체결을 위한 강대국들의 움직임에 지지를 보내왔다. 이를 위해 2000년 5월에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복원, KEDO(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에 2,190만 호주 달러를 지원했다. 또 기술 원조와 인도주의 차원에서 6,000만 호주 달러를 제공하기도 했다. 2002년 5월 호주 수도인 캔버라에 북한 대사관이 개설됐지만, 2008년 1월 재정난을 이유로 북한은 캔버라 주재 대사관을 폐쇄했다. 그러다가 2012년 말 호주 외무부의 제안으로 대사관 재개설에 대한 협의가 진행이 되었으나, 북한이 3차 핵실험(2013.2.12)을 강행하자 이에 대한 제재의 일환으로 호주 정부는 북한 대사관 재개설 승인 입장을 철회하기도 했다. 

한국과 호주 양국은 인적 교류 촉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교육·문화·관광·미디어 교류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현재 호주에는 약 15만 명 이상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도 호주인 수가 증가하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인 호주 방문자는 약 19만 명, 호주인 한국 방문자는 약 12만 명에 달하고 있다.




호주 전통 종교의 숭배 대상 추룽가Tjurunga

사람과 땅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호주 원주민 문화는 영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들은 땅을 자신들의 어머니라고 하며, 따라서 그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땅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보통 호주의 전통 종교에서 신화적 존재이자 그 숭배 대상을 추룽가Tjurunga 혹은 추링가Churinga라고 부른다. 대개 나무나 돌로 만들며, 그것을 그러한 존재의 상징 혹은 현시顯示로 삼는다. 아란다족의 용어인 추룽가는 특정 의식儀式, 돌과 나무로 만든 물건, 끈을 묶어 소리를 내는 판자, 땅에 그린 그림, 고분, 의식용 장대와 문장紋章, 머리의 쓰개, 신성한 노래 등 전통적으로 성화하거나 금기시하는 비밀스럽고 신성한 사물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납작한 타원형으로 다듬은 뒤 신성한 무늬를 새긴 돌이나 신화적인 의미를 가지는 복잡한 형태의 무늬를 새긴 나무판자를 말한다. 

대부분의 추룽가는 남자들의 비밀스럽고 신성한 의식에 사용되었다. 여자들의 의식에서도 작은 물건들이 사용되었으며, 더욱 작은 물건은 남자들의 사랑의 주술에 사용되었다. 모든 사람은 추룽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 입문식 때 청년은 자기가 사는 지방의 의식과 추룽가에게 소개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추룽가와 함께 지내는 법을 전수받는다. 죽을 때 추룽가는 시체와 함께 묻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이 추룽가를 다시 찾는다고 한다. 

추룽가는 본질적으로 그들과 연관된 지역의 전통적인 집단 구성원들의 불멸성을 나타낸다. 그들은 모두 생명의 연속성과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다. 그들은 사랑과 신화적인 시간, 사람과 위대한 존재들, 일상의 물질적인 면과 인간의 영적 유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류의 상징이자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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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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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 미국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지리적으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먼 나라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미국만큼 우리와 가까운 나라도 없다.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한국의 맹방이며 또 우리나라 교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이며 한국 학생들이 가장 유학을 많이 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미국이 세계를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데 반감을 가지며 또 미국이 미국인들의 가치와 이념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강요한다고 비난한다. 심지어 남북한 간의 긴장상태도 그 태반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본다. 아마 이런 비난들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좋던 싫던 미국은 우리에게 가까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미국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미국을 객관적으로 한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김현일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U.S.A.)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서, 영토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유럽과 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와 통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대서양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태평양 지역, 즉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동쪽에는 2,000미터 높이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고도 4,000m 이상의 험준하고 큰 봉우리들이 많은 로키 산맥Rocky Mountains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로키산맥에는 유명한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다. 두 산맥 사이에 펼쳐진 대평원 지역에는 광대한 농경지가 존재하여 기계화 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영토가 크다보니 서부에는 사막Desert도 존재하는데, 도박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Las Vegas도 네바다 주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

기후 역시 다양하다. 중북부와 동부, 오대호 부근은 겨울에는 북극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대륙성 기후인데 비해 서부 캘리포니아California 일대는 지중해 지역처럼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겨울에도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작물도 지중해지역처럼 오렌지와 포도를 많이 재배한다.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기후가 좋아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또 하나의 주는 플로리다Florida이다. 햇볕비치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별명이 ‘선샤인 스테이트sunshine state’이다. 플로리다 반도 남부에는 아열대기후가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열대식물들이 자라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미국의 태평양 연안지역은 온난한 기후로 인해 살기가 좋지만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해 있어 지진地震이 잦은 편이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의 많은 건물들을 파괴한 1906년의 지진(진도 7.8)은 역사에서 잘 알려진 지진이다. 미국에서 유명한 자연재해로는 카리브 해 연안에서 발생, 멕시코 만으로 상륙하여 동부 연안을 휩쓰는 열대성 저기압 허리케인Hurricane과 중서부 평원지대에서 빈발하는 돌풍 토네이도Tornado가 있다.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발생하여 집과 자동차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돌풍인데 지나가는 길목의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기도 한다. 강력한 뇌우를 동반하는 토네이도는 허리케인과는 달리 발생과 진행방향의 예측이 쉽지 않다. 최근 많은 피해를 남긴 허리케인으로는 2005년의 카트리나Katrina를 들 수 있는데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남부의 뉴올리언스 시의 태반을 물에 잠기게 만들고 2,500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낳았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강은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이다. 그 이름 자체가 큰 강이라는 뜻이다. 오대호 근처의 미네소타 주에서 발원하여 미국의 중부 평원지대를 구불구불 만곡하여 멕시코 만으로 흘러가는데 길이가 3,700km에 달한다. 지나는 주들이 31개에 달하며 오하이오 강Ohio River, 미주리 강Missouri River, 아칸소 강Arkansas River, 테네시 강Tennessee River, 일리노이 강Illinois River 등 주 이름의 원천이 된 많은 지류를 갖고 있다. 미시시피 강은 철도시대 이전에는 증기선을 통한 중요한 내륙교통로였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의 무대가 바로 이 미시시피강이다. 미시시피 강에는 몇몇 지역에 얕은 여울이 있어 항해가 어렵지만 연방정부는 운하와 우회수로를 건설하여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대호의 하나인 미시간 호와 연결하는 운하(1848년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도 건설하였다. 19세기 중엽 철도시대에는 미국에서 철도건설 붐이 불면서 많은 철도가 놓여 졌으나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광대한 자동차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미국의 역사

식민지 시대와 미국의 탄생
오늘날 미국의 역사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West Indies 발견으로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이 유럽 지역에 소개된 이후, 16세기 유럽 각국은 남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게 되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Virginia주에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James Town을 건설한 이후 1733년까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프랑스와의 식민지 영토 분쟁에서 승리하면서 캐나다, 5대호 및 미시시피강 상류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식민지들은 계속해서 이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고 경제도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남부에서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이 세워지고 유럽, 카리브 해 제도, 아프리카 등과의 무역도 활발하였다. 남부 식민지에서 주로 재배한 사탕수수, 담배, 면화 등은 유럽에서 수요가 많은 작물이었는데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남부 농장들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를 구입하여 노동력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영국은 내전 및 명예혁명과 같은 국내의 혼란과 지리적 거리로 인하여 효과적 식민지 정책 집행에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지역의 식민지들은 영국 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았지만 18세기에 경제성장을 이루며 자치 확대의 욕구가 점차 커져갔는데 이를 억압하려는 영국 정부와의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식민지에 부과한 설탕조례Sugar Act(1764)와 인지조례Stamp Act(1765) 등 무리한 세금 정책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영국에서 수입되는 종이, 차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쉔드 법령Townshend Acts(1767)을 둘러싸고 영국과 식민지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5명의 보스턴 시민이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1770.3.5)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Lexington과 콘코드Concord 전투(Battle of Lexington and Concord)를 계기로 영국과 미 식민지 양자 간의 무력충돌로 발전하였으며, 1775년 5월에 소집된 식민지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버지니아Virginia주 출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을 상대로 전쟁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인들은 정식군대가 아닌 일종의 민병대로 이루어진 부대였으나, 과거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패배한 프랑스·에스파니아·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 등이 참전해 반反영국 진영에 서면서 영국에서 파견된 정규군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이러한 독립전쟁의 결과로 드디어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열린 제 3회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개 주의 대표들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채택 공포하였는데 이 날이 후에 미국독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외국의 원조를 얻어 식민지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1783년 9월 3일에는 파리조약Treaties of Paris이 체결되어 미국의 독립전쟁은 공식 종결이 되고 영국은 미국 13개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미국은 강력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1787년 5월부터 9월에 걸쳐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가 모여 제헌회의를 개최하였고 연방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안을 채택하여 각주에 회부한 결과 13개의 주 중 9주가 비준을 완료함으로써 헌법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1789년 연방의회가 구성되고, 1789년 4월 30일에는 독립 전쟁의 영웅인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듬해 수도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정해졌다가 1800년에는 워싱턴Washington으로 옮겨졌다.

영토의 확장과 남북전쟁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미국은 점차적으로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1803년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루이지애나Louisiana주를 사들여 국토 규모를 2배로 확장한 것을 시발로, 병합·할양·구매 등을 통해 미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59년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50개 주가 성립되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영토 확장과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미국은 남북전쟁南北戰爭American Civil War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거쳐야만 했다.

흔히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도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노예 문제는 표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노예제로 대변되는 남과 북의 생활 방식, 특히 경제 구조의 근본적 차이에 있었다. 이미 17세기부터 미국의 남부는 전원적이며 농업 위주였고, 북부는 도시적이고 공업 위주의 경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노예를 통해 면화를 재배하여 이를 영국으로 수출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북부와 동부지방에서는 제조업과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이 둘이 그런 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나라가 커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북부의 생활 양식이 남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입지는 자꾸만 좁아져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으로 몰려갔으며, 급기야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의 생활 기반을 붕괴 지경으로 몰아가면서 남부는 앉아서 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연방의회는 이미 북부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1860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남부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노예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링컨Abraham Lincoln이 당선됨으로써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남부 7개주가 반발하며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를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북부에 맞섰다. 1861년 4월 남부의 섬터 요새Fort Sumter 공격으로 남북 간에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우수한 공업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북부가 우세를 보여 결국 1865년 4월 26일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은 종결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전쟁에도 승리했으나, 1865년 노예해방 반대론자 존 윌크스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한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에 따른 영토확장의 움직임 속에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1823년 제5대 대통령 먼로James Monroe의 연두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것은 외부 세력(특히 유럽)이 미주 대륙에 간섭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비동맹·비식민·불간섭을 골자로 한 고립주의 외교방침으로,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 대해 정치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한 천연자원과 산업의 기계화가 결합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정부와 사회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이 활성화되고 독점 기업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 후반부터는 금융자본이 활성화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 잠수함의 미국 기선 루시태니아Lusitania호 격침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연합국측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28대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을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경제적 성장을 공고히 하고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대전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성적 공급과잉 및 실업상태가 지속되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로 빠지는 대공황의 위기를 맞았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통제 정책을 도입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노동조합 결성 및 소외집단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치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규모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영국), 루스벨트(미국), 스탈린(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하는 경제적 발전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냉전체제와 미국의 번영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유럽권을 장악한 소련의 위협을 크게 인식하고 전후에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제33대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는 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기 위해 소련에 대한 포위정책을 수립, 1947년 3월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약속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는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제의하는 마샬계획Marshall Plan을 수립하고, 1949년에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서방 12개국을 규합해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보수세력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크게 인식해 격렬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국가보안법인 매캐런법McCarran Act이 제정되었고,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일련의 반反공산주의 선풍이 미국을 휩쓸기도 했다.

1950년대에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원리를 기본으로 복지국가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고, 한편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을 중심으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본격화되는 등 민권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뿌리 깊은 인종차별 관습의 철폐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 되었다. 진보적 성향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을 인정하고 빈곤을 없애기 위한 경제원조를 추진하였으며, 1962년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단행해 소련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 쿠바 미사일 사건을 계기로 1963년 핵전쟁 방지를 위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TST(일명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어 미·소간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36대 존슨Lyndon Baines Johnson 행정부 시절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 움직임이 강화되어 반체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층과 흑인 등 소수자 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과격한 흑인민권 운동과 급진적인 학생운동이 이어졌다.

데탕트에서 대對 테러전까지

제37대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이전 정권과 달리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하였으며 1970년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통해 베트남 철수를 명시하고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국제외교관계에서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6년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시기에 제3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터Jimmy Carter는 경제문제와 자원보존을 정부개입주의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대외정책에서는 인권정책을 강화하였으나 1979년 이란 과격분자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건 발생시 구출작전의 실패로 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보수주의 성향이 강화된 미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을 안고 1981년 취임한 제40대 대통령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줄임으로써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정책에서는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공산주의 팽창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군비를 확충했다. 레이건 노선을 승계한 제41대 대통령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국가 재정적자 증가 및 경제상황 악화가 지속되는 상황 하에서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소련의 개혁개방으로 촉발된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상승하게 되었다.

1992년 지속적인 경제침체 해결에 대한 기대로 정부개입과 복지국가노선을 추구하는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Clinton이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클린턴은 소수인권과 근로자 권익을 강화하고 의료보험혜택을 확대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지만, 경제 호황에 힘입어 2차 대전 이후 민주당 출신 최초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냉전의 종식 이후, 국제적 규모의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2001년에는 항공기를 이용해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청사(Pentagon)를 공격한 ‘9.11테러’가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제43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행정부는 대對테러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축출(2002.12)하고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축출(2003.5)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했고, 대테러전 차원에서 대량파괴무기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확산 저지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미국통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를 추구하였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2008년 실시된 제44대 대통령 선거에서 ‘희망hope과 변화change’를 주창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가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 역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국내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했고 적극적, 전향적 대외 정책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설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12년 대선에서도 승리해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는 2014년 4월 25일, 재선 후 처음으로 방한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정치 및 행정

정치 체제의 특성

미합중국은 ‘연방공화국’이라는 국가체제를 토대로 하여, ‘대통령중심제’의 정치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다. 즉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는 연방공화국 체제라 할 수 있는데, 미국 정부는 연방주의Federalism, 권력분립Seperation of Powers,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라는 헌법의 주요 원칙에 입각해 구성되고 운영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의 권한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에 나누어지고, 다시 각자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세 기관 사이에 나누어진다. 그 이유는 정부의 권한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건국 당시에 만든 헌법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계속해서 수정조항들이 추가되었는데 권리장전의 10개 조항을 제외한 17개의 조항(수정헌법 11조~27조)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노예제 금지(제13조 1865년), 대통령 3선 금지(제22조 1951년) 등이다. 현행 미국의 연방헌법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규정하여 두고 그 이외의 사항은 모두 주정부의 권한으로 해 두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연방정부가 주정부를 규제할 수 있는 사항은 연방헌법이 연방의회에 권한을 부여한 사항에 한정된다. 다만 연방법과 주법이 상충할 경우에는 연방법이 우선한다.

행정부(내각)

헌법상 미국의 국가원수이자 연방정부의 수장인 대통령The President은 직접 선거가 아니라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을 통한 간접선거로 선출이 된다. 특이한 것은 주에서 한 표라도 더 많이 얻는 후보가 주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간다는 승자독식 제도winner takes all이다. 그래서 실제 득표수와 확보한 선거인수가 어긋나 더 높은 표를 얻었지만 선거인단수에서는 지는 경우도 간혹 일어난다. 최근의 경우로는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엘 고어 후보가 국민들의 표는 더 많이 받았으나 선거인단 수의 차이로 공화당의 조지 부시에게 패배한 바 있다. 선거인단의 수는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수를 합치고 여기에 미국 연방정부가 소재한 컬럼비아 특별구에 배당된 몇 명을 합한것으로 현재는 538명이다.

현행 미국 행정부 내각Cabinet은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과 바이든Joseph Biden 부통령, 그리고 국무부를 비롯해 연방정부 집행기능의 주축을 이루는 15개의 중앙행정부처로 구성된다. 중앙 행정부처 각 부의 최고 책임자는 장관Secretary이며 연방 내각의 구성원이 되고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진다.

또한 중앙정보국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이나 연방준비은행제도Federal Reserve System 등 대통령을 위해 일을 하는 독립 행정기관들이 있는데, 이는 업무가 특수하여 행정 각 부에 소속되기가 어려우며 그 업무가 초당적 입장에서 추진되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설치된 기관들이다. 4년 임기의 대통령은 헌법상 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가지며 주요 권한으로는 공직임명권, 의회소집권, 의회법률안거부권, 조약체결권, 사면권 등이 있다.

연방의 구성원인 각 주State의 정부 수장은 주지사Governor라고 하며, 주정부는 외교권과 교전권 등을 제외하고는 주권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권력의 거의 전부를 보유하고 있다. 즉, 주정부에는 주 자체의 의회, 법원, 행정부가 있어 각주에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각 주가 담당하는 사항에 관하여는 각 주 스스로가 정한 방식에 따라 규제방식도 달라지게 되므로, 각 주에 따라 동일한 사항에 대한 규율방식이 조금씩 다른 경우도 많다.

입법부(의회)

미국의 의회Congress는 상원Senate과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나뉘는데 상원의원은 주의 대표이고 하원의원은 지역대표이다. 하원의석이 인구비례에 의해 결정되는 반면 상원은 인구와 관계없이 주당 2명으로 되어 있다. 양원제를 택하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과는 달리 미국의 상원은 하원보다 더 명예롭고 권한도 크다. 하원이 갖지 못한 조약비준, 장관 및 연방판사, 군軍고위장교 등에 대한 임명동의권 그리고 연방관리들에 대한 탄핵심 판권이 있다. 임기도 2년인 하원의원보다 길어 6년이다. 대통령은 의회의 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나 의회가 다시 결의하면 그 법안은 법으로서 효력을 갖도록 대통령의 거부권을 제한하였다.

미국은 양당제도가 정착되어 있는데 현재의 공화당 Republican Party은 보수주의를, 민주당Democratic Party은 진보적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많은 국민들이 양당의 당원으로 등록, 활동하고 있는데, 이는 소수 엘리트의 정당이 아닌 대중정당의 성격을 띠면서 견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징표로 해석되고 있다. 양당 외에도 소수 정당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상당 기간 사회당도 존재하였지만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미국 사회가 비교적 유동성이 큰 사회여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약하기 때문이다. 빈부의 실제 격차는 크지만 하층민들도 창의성을 발휘하고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미국인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법부(법원)

미국의 사법부는 연방주의 원칙에 따라 연방법원과 주법원이라는 이원적인 사법 체제가 병존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법률 및 권한을 가진 50개 주와 연방정부가 서로 다른 재판관할권을 보유한다. 연방법원과 주법원은 서로 독립 병존해 있으므로 연방법원은 주법원의 권한에 간섭이 불가하지만, 연방헌법이나 연방법률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주법원의 사건이라도 연방대법원이 최종 심판권을 보유한다. 연방법원은 연방 대법원US Supreme Court, 연방 항소법원 US Court of Appeals, 연방 지방법원US District Court의 3심급 구조로 되어 있으며, 연방법관은 헌법에 의해 독립된 지위가 보장되고 탄핵을 받지않는 한 자의에 반하여 파면이 불가한 종신 임기제이다.

주법원의 조직은 대체로 1개의 대법원(Court of Last Resort 혹은 Supreme Court)과 항소법원(Court of Appeals), 일반관할권 또는 제한적 관할권을 가진 1심 법원(Trial Courts)으로 구성되나, 주에 따라서는 2심 제도를 채택하기도 한다.

경제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다.

GDP를 보면 16.7조 달러로 인구 13억이 넘는 중국의 13.3조 달러를 넘어선다. 인구도 3억 20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이다.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로서 이민자들이 지속적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미국은 인구는 줄기차게 증가해왔다. 그러나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 미국의 비밀은 다른 데 있다. 발명을 장려하고 기업을 통한 성공을 높게 평가하는 친기업적인 문화가 그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많은 혁신적 발명들과 기업들이 미국에서 나왔다.

전기는 유럽에서 발명되었지만 전기를 이용한 현대식 조명은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하였고, 자동차 역시 유럽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지만 표준화된 대량생산은 미국의 헨리 포드 자동차 회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20세기의 IT 산업은 대부분 그 기술이 미국인들에 의해 발명되고 주요한 기업도 거의 미국기업이었던 그야말로 미국적 산업이었다. 미국에는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만을 갖고 벤처창업에 나서는 젊은이들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다. 이는 기업을 통한 성공에 큰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친기업적 문화뿐 아니라 사업에 실패해도 재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법제도와 벤처사업에의 투자를 용이하게 하는 금융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근대금융업은 영국에서 발전하였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금융업의 중심도 미국으로 옮겨갔다.

이는 미국에서 대기업이 대거 탄생하고 주식시장이 활기를 띠어 대규모 금융회사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미국금융업의 역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 모건J. P. Morgan이다. 투자은행부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모건은 기업간의 합병을 주도하여 U.S.스틸, 제네랄 일렉트틱 같은 대기업의 탄생을 도왔다. 1907년 경제공황을 이겨내도록 은행가들을 협력을 끌어낸 것도 그였는데 오늘날의 미연방은행도 모건의 그러한 활동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미국의 농업 역시 미국이 내세울 만한 경쟁력 있는 경제부문이다. 미국은 일찍부터 농업을 산업처럼 키웠다.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도 상업적인 농장이었지만 19세기 중엽부터 미국의 중서부 초원(프레이리) 지대가 농지로 활용되고 정부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미국의 농업은 산업적 농업으로 발전하였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중서부의 농작물들은 철도를 이용하여 시카고로 운송되어 그곳에서 대량으로 거래되었고, 세계시장으로도 수출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세계를 먹여 살리는 역할도 하게 된 것인데 오늘날 한국에도 저렴한 미국 농산물들이 대거 수입되고 있다.

종교와 문화

미국 사회의 특징

미국은 16세기 유럽으로부터 이민이 시작된 이래,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지로 부터 온 이민자들이 모여 구성된 다
인종ㆍ다민족ㆍ다문화 사회이다. 이러한 다원적 미국 사회를 동질성을 강조하여 ‘용광로melting pot’라고 부르거나, 각 문화의 이질성을 강조해‘ 샐러드 볼salad bowl’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울러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다. 초기 이민자들이 종교박해를 피해 또는 계급상 제한에서 벗어나 토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미국은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는 미국에서는 개개인이 계급·종교·인종의 제한에 관계없이 근면(hard work)과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삶의 목표를 추구, 실현할 수 있다는 소망을 의미한다.

미국의 종교문화

미국은 헌법에 정교政敎분리를 명시(수정헌법 1조)하여 국교를 금지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으며,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교회지원 및 학교 내 예배 등은 불가하다. 그러나 정교분리 규정에도 불구하고 법원에서의 증인 선서나 대통령 취임식 등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할 정도로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며, 미국인들은 종교가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 사회의 종교적 성향은 기부 문화를 강조하고, 고아 입양을 증진시키는 등 개인 능력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공적 부조 시스템이 부족한 미국 사회의 약점을 보완하는 순기능도 있으나, 때로는 지나친 종교원리주의, 사이비 종교의 발흥, 타 종교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 문화 등 역기능도 초래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역에 따라 종교적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로 다른 이민 집단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각기 정착을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루터교는 독일인들과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많이 믿는 종교인데 그들이 중서부 지역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중서부 지역에 많은 루터 교회가 있으며, 침례교는 남부에서 발달했는데 남부주에는 아직도 많은 침례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 서부의 유타Utah주는 모르몬 교도들이 정착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몬교 신자다. 남부 지역과 서부의 일부는 ‘성서 벨트(Bible Belt)’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에는 성서가 문자 그대로 진리이고 성서의 내용이 인간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 성향의 신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청교도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했던 동북부(뉴잉글랜드 지역) 지역의 경우, 19세기 이후 아일랜드, 이태리출신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가톨릭 세력이 강한 지역으로 변화했으며(케네디 가문이 그 일례), 멕시코 접경지역에서의 히스패닉 인구의 유입으로 바이블 벨트 이외의 남부지역 또한 가톨릭 인구가 증가 추세에 있다. 미국은 종교적 자유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며 기독교 이외에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이다. 20세기에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의 여러 종교들이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성공한 데에는 이러한 관용적 분위기가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미국 사회의 흑백문제

미국사회의 최대 고민은 흑백문제이다. 흑인과 백인간의 갈등은 그 역사적 뿌리가 식민지시대 아프리카 노예무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부의 농장들은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면화, 사탕수수, 담배 등을 재배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토착민들이나 유럽 이민자들로부터 확보하지 못하자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노예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1830년대부터 노예제 폐지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서부에서 새로운 영토가 추가되면서 흑인 노예 존폐 문제는 첨예한 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이와 같은 갈등은 끝내 양 진영으로 갈라져 내전을 벌인 남북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전쟁 중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선포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의회가 나서 수정헌법 제13조를 제정하여 미국 내 모든 지역에서의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노예해방으로 흑인들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KKK단(Ku Klux Klan)과 같은 백인 비밀결사들의 테러행위가 자행되는가 하면, 법원에서는 ‘수정헌법 제14조가 주 정부의 인종차별을 금지하지만 사조직이나 개인의 인종차별에는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판결(1883년 연방대법원)과 기차좌석의 흑백분리를 인정하는 판결, 학교의 흑백분리를 인정하는 판결 등이 나왔다. 이러한 흑인에 대한 차별이 그대로 지속되자 1960년대에 들어와 흑인들의 불만은 민권운동으로 폭발하였고 때로는 인종폭동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으로 등장했고, 말콤 리틀 Malcolm Littl‘e(말콤 X’라고 불림)같은 급진적인 흑인운동가도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국의 흑인문제는 흑인 사회의 문화적 특징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인식도 일고 있다. 전문적 지식이 중요시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상승수단인데 흑인사회에서는 교육이 등한시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흑인사회 내부로부터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을 자꾸 언급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 문화의 대중성

세계 최초의 상업 영화 상영이 1894년 뉴욕에서 이루어진 이래,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영화산업은 부동의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영화계는 미국의 다원적 문화 배경 및 거대 자본에 기반을 두고 블록버스터에서부터 인디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생산해내고 있고, 이는 TV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미국 드라마 역시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으며,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및 인디영화를 선보이는 선댄스Sun Dance 영화제 등 세계 주요 영화제들이 매년 개최되고 있다.

또한 미국 음악은 다인종·다문화적 사회답게 다양한 장르를 지니고 있으며, 20세기 이래 세계 대중음악을 선도하고 있다. 흑인 이주자들의 민속음악에서부터 비롯된 재즈·소울·블루스, 블루스와 백인 육체노동자들의 컨트리 음악이 혼합된 락앤롤 그리고 최근의 힙합, 미국 팝 음악 등이 미국의 대표적 음악 장르이다. 주간지 빌보드Billboard가 앨범 판매량·방송횟수를 집계하여 발표하는 ‘빌보드 차트’는 대중음악의 지표로 유명하다.

아울러 미국의 문학도 전통이 깊다. 대표적인 미국 작가로는 마크 트웨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J.D. 셀린저, 에드가 앨렌 포, 스캇 피체럴드 등이 있으며, 싱클레어 루이스(1930)부터 토니모리슨(1993)까지 11명의 미국인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

한미 관계는 1882년 양국 사이의 수교 조약인 조미우호통상항해조약朝美友好通商航海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진출을 막기 위해 청나라가 주도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나, 당시 고종 임금을 비롯하여 조선의 지식인들은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도덕적 나라로 매우 호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조선의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였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인 1905년 7월 29일 체결한 ‘미일협약(카스라·태프트 협약)’에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였다. 이어 1905년 11월 17일‘을사늑약’체결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한미관계는 단절이 되었다. 이후 양국관계는 1945년 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등을 기점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제2차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1945년 한반도를 소련과 분할하여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남한을 3년간 통치하였고, 1949년 1월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 승인하였다. 군정軍政 이후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였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곧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반도로 들어와 침략군을 물리쳤다. 종전 후 1953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체결로 양국 간에 동맹관계가 수립됨으로써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게 되었다.

한미 동맹의 수립에 초점을 둔 1950년대의 한미관계는 1960~1970년대를 통해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한국의 근대화 및 경제적 도약이 이뤄지면서 점차 심화·발전되었으며, 1978년 한미 연합군사령부 창설과 함께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한미 연합방위체계의 공고화가 이루어졌다. 1980~1990년대에는 한국의 경제성장 지속, 한국 내 민주화 정착,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제고됨에 따라 한미 관계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핵심적 가치를 공유하는 보다 성숙한 동맹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탈냉전 및 북한 핵문제 대두라는 안보환경의 변화와 한국의 제고된 위상을 반영, 양국간 안보협력 강화를 위한 조치들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1994년 평시작전권 전환 및 1991년 방위비 분담특별협정체결 등에 따라 한국의 안보 역할은 더욱 증대되었다. 오늘날 한미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 및 번영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공유하면서, 21세기 전략동맹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미국은 군사적 맹방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풍요로운 나라가 되는 것, 사회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자유로운 나라가 되는 것이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기에 미국이 한국의 독재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면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국민들 사이에서 확연히 갈라지게 되었다. 좌파는 한미관계를 신식민주의적인 관계로 보았던 반면 우파는 미국을 여전히 우리가 가까이해야 할 맹방이자 발전의 모델로 간주하였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이러한 좌우파간의 입장차이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한국전쟁 직후와는 달리 현재 한미관계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변화로부터 기인한다. 하나는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한국이 일방적으로 미국의 시혜를 받던 빈곤한 원조대상국에서 호혜를 추구해야 할 협력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발전이다. 예전에 중국은 한국의 적대국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로서 그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더욱이 중국은 정치적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을 유효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한미관계 역시 이러한 상황에 맞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와 대외정책

미국의 식민지 정책
미국은 해외식민지를 대거 보유하고 지배한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탄생한 나라였지만 19세기말이 되면 미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뒤를 이어 후발 제국주의국가로 발전하였다. 당시 유럽은 아프리카를 분할하고 이제는 아시아의 거대한 나라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나라마다 제국주의에 대해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미국도 이러한 경쟁에서 뒤질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해외식민지를 보유해야 하며 해외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미국도 전함 건조 사업에 나서 1900년경에는 세계 3위의 해군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미국은 먼저 하와이의 미국인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요구에 응해 하와이 왕국을 병합하였으며, 쿠바 문제를 계기로 스페인과 전쟁을 하여 굴복시킨 다음 푸에르토리코 섬과 필리핀을 미국의 영토로 차지하였다. 미국은 필리핀 획득을 계기로 아시아에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영토확장은 필리핀으로 끝이 나서 여타 다른 지역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대신 미국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었던 중국에서의 영토분할을 반대하면서 각국이 자신들의 세력권 내에서 다른 나라들의 자유로운 무역활동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의 향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직접적 영토획득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ㆍ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국의 세계 개입
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예를 들어 1903년 도미니카 공화국이 파산 지경에 몰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채무를 이행할 수 없게되자 미국은 그 세관을 장악하여 세관수입의 45%를 도미니카인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외국의 채권자들에게 분배하였다. 미국이 도미니카 공화국의 재산관리인 역할을 맡은 것이다. 도미니카에 대한 미국의 재정간섭은 30년 동안 지속되었다. 또 1906년 쿠바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미군이 쿠바에 파견되어 폭동을 진압하고 3년간 주둔하였다. 미국은 니카라과에도 군사개입을 하여 군대를 10년간 진주시켰다. 미국은 유럽의 영향력이 니카라과에 미치는 것을 염려하여 니카라과 정부와 조약을 맺어 어느 나라도 그곳에 운하를 건설할 수 없도록 보장을 받았다.

미국의 개입과 간섭은 미국의 앞마당처럼 여겨진 중남미 지역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경제력이 커짐에 따라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 도처에서 외교적, 군사적 개입을 하였다. 직접 공격을 받아 참전하였던 유럽에서의 양차대전은 말할것도 없고 2차대전 후에는 한반도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의 침공을 물리쳤으며 베트남 내전에도 개입하였다. 소련의 위협에 맞선 냉전 시기에는 미국의 우방들에게 공산주의가 파고들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경제적 지원 정책을 펼쳤는데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마셜 플랜이 그 대표적인 정책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경제지원을 크게 받은 나라의 하나였다.

미국의 중동정책
미국은 2차대전 이후에는 중동에도 세력을 크게 확대시켰다. 이 지역에서 미국이 필요로 하는 석유가 대거 생산되면서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권위주의적인 친미정권들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중동의 석유자원에 대한 외국인들의 지배에 반발하는 아랍민족주의가 흥기하면서 미국에는 강력한 적이 생겨나게 되었다. 더욱이 미국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친이스라엘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아랍인들의 반미 정서를 부채질하였다. 중동인들은 이스라엘인에 의해 그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의 고난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유럽과 미국 등 서방 기독교권을 악마시하고 기독교 세력에 대한 투쟁을 성전으로 미화하는 이슬람 과격세력은 이러한 반미정서를 바탕으로 그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였다. 현재 미국은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북한, 남미에서는 쿠바와 베네수엘라 같은 반미국가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등 만만치 않은 적들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나라들보다 더 다루기 힘든 골치 아픈 세력이 중동의 이슬람 과격파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등 미국과 공유 할 수 있는 가치들이 적지 않은 반면 후자의 경우는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빈 라덴과 9.11 테러, 아프간 전쟁 등은 미국이 중동에서 직면한 어려움을 잘 드러낸 사건이었다.

미국의 영토확장 스토리

미국은 넓은 영토와 개척의 역사를 상징처럼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영토에 얽힌 사연과 배경을 가진 스토리가 다양한 편이다. 미국이 1766년 독립할 당시 13개의 주가 있었는데 모두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 영국의 식민지들은 서쪽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을 대체적인 경계로 삼았는데, 산맥 너머에는 모피교역을 주업으로 하던 프랑스인들이 사냥을 하여 자신들에게 모피를 팔던 인디언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애팔래치아 산맥 저쪽을 지배하던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은 결국 영토를 놓고 충돌하였는데, 이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간의‘ 프랑스 인디언 전쟁’(The French and Indian War, 1755~1763)으로서 유럽에서 벌어진 7년전쟁의 아메리카 버전이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미시시피 동쪽의 영토를 영국에 내어놓았고 영국 식민지의 영토는 크게 늘어났다. 오하이오Ohio, 일리노이Illinois, 인디아나Indiana, 켄터키Kentucky, 미시시피Mississippi, 테네시Tennessee 주 등이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다음으로 미국 영토를 크게 확대시킨 것은 루이지애나Louisiana영토 구입이었다. 루이지애나 즉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부터 로키산맥 일대에까지 펼쳐진 땅은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땅이 된 곳이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를 통치했던 나폴레옹은 돈이 쪼들려 미국에 1500만 달러를 받고 이 땅을 팔아넘겼다. 루이지애나 준주로 명명되었던 이 땅에서 많은 새로운 주들이 생겨났는데 루이지애나Louisiana, 미주리Missouri, 아칸소Arkansas, 아이오와Iowa, 캔자스Kansas, 네브래스카Nebraska, 콜로라도Colorado 등 13개의 주들이다. 한반도의 열 배에 달하는 루이지애나 영토를 구입함으로써 미국의 영토는 순식간에 배로 늘어났다.

이러한 영토 확대로부터 힘을 얻은 미국인들의 서부로의 이주물결은 계속되었다. 오늘날의 텍사스Texas와 캘리포니아California 일대는 원래는 멕시코 땅이었는데 이곳으로 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멕시코 정부도 미국인 이주민들을 환영하였지만 곧 미국인 정착민들과 멕시코 정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져 결국 ‘미국-멕시코 전쟁’(Mexican-American War, 1846~1848)으로 비화하였다. 전쟁에서 진 멕시코 정부는 텍사스Texas와 뉴멕시코 New Mexico뿐 아니라 캘리포니아California도 양도(1848~1850)하였다. 텍사스Texas는 한반도의 세 배에 달할 정도로 큰 주인데 얼마 있지 않아 땅 속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매우 부유한 지역이 되었다. 캘리포니아California 역시 영토의 크기가 한반도의 두 배에 달하는 큰 주이다. 이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기 직전인 1848년 새크라멘토 근처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일어났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미국인들은 물론 유럽인과 중국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캘리포니아에 모여들며 혼성적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영토 편입으로 미국은 동으로는 대서양, 서로는 태평양에 면한 큰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이외에도 멕시코 만으로 쭉 뻗어있는 온화한 기후의 플로리다 Florida(1819)를 스페인으로부터, 오리건Oregon은 영국으로부터(1846) 그리고 알래스카Alaska(1867)는 러시아로부터 각각 양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국의 영토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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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과 조화를 지향하는 다문화 선진국 캐나다

캐나다는 세계 2위에 해당하는 북미 대륙 북부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며, 영연방국의 일원으로서 풍부한 자원과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 8대 선진국(G8)의 대열에 올라 있는 나라이다. 캐나다는 복합 민족으로 구성된 이민 국가이지만, 각 민족의 고유문화를 적극 보호, 지원함으로써 ‘융합’이 아닌 ‘조화’를 지향하는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흔히 ‘용광로Melting Pot’ 사회로 불리는 미국에 비해 캐나다는 ‘모자이크Mosaic’ 사회로 비유되기도 한다. 다문화주의를 기반으로 개방적 사회 건설을 추구하고 있는 캐나다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본다. 

스튜어트 스몰우드 Stuart Smallwood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캐나다Canada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로, 1763년 영국이 프랑스와 맺은 파리조약 이후 영국의 식민 상태로 있다가 1867년 캐나다 자치령으로 독립하였으며, 1951년에 정식 국명을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캐나다라는 국명은 원주민인 휴런-이로쿼이Huron-Iroquois족 언어 중 ‘마을’ 또는 ‘정착’을 뜻하는 ‘카나타(kanata)’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캐나다는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영토가 큰 나라로서, 그 영역은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태평양 남쪽으로는 미국과 접해 있고 북으로는 북극해와 만나고 있다. 특히 미국과 분리되어 있는 남쪽의 접경은 세계에서 제일 긴 국경선으로 기록되어 있다. 캐나다의 국토는 동서로 5,514㎞, 남북으로 4,634㎞에 이르러 비행기로 동서대륙 횡단시 6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이렇게 영토는 넓지만 국토의 절반 정도가 한랭한 툰드라Tundra 지대이고 극북 지역은 얼음과 영구 동토층으로 덮여있는 북극권 국가라서, 실제로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은 동서 약 6,000㎞에 걸쳐 뻗쳐 있으며, 미국과의 국경에서 200∼300㎞ 사이에 있는 남부 지대에 한정된다. 캐나다의 북쪽 끝 정착지는 엘즈미어 섬Ellesmere Island의 북단인 얼러트Alert 마을에 있는 군軍기지(누나부트Nunavut 특별지역 소재)로, 북위 82.5도에 위치하고 북극에서 817㎞ 떨어져 있는 전 세계 최북단의 정착지로 알려져 있다. 또한 캐나다는 265,523㎞에 걸친 세계에서 제일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캐나다는 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국가로서 평방 킬로미터당 3.48명에 불과하다. 

캐나다는 최후빙하기부터 아한대삼림 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아한대삼림들 중에 하나는 캐나다 순상지의 아주 넓은 북쪽 수림대이다. 캐나다는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은 31,700개의 큰 호수들이 있고 캐나다 록키산맥Rocky Mountains과 코스트산맥Coast Ranges의 빙하도 담수 수원이다. 캐나다의 호수, 강과 담수 빙하를 추가한다면 캐나다의 담수 공급은 1위 브라질, 2위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이다. 

캐나다는 북위 41°선과 북극권 사이에 위치한 북국이므로 전체적으로 추운 나라라고 하겠으나, 국토가 방대하므로 지역에 따라 기후에 큰 차이가 있다. 태평양 연안은 캐나다에서 가장 온난한 지역으로 가장 추운 달의 평균기온이 0℃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부 평원지대는 건조하고 기온 차이가 심한 대륙성 기후(4계절과 혹독한 겨울 기온)가 나타나며, 중앙 평원지대는 멕시코의 열풍과 북극의 한랭 기온이 맞부딪치는 극심한 기후의 변화를 보인다. 남동부 호수지역 및 허드슨Hudson만 일대는 비교적 안정된 온대 기후(4계절이 존재하며 비가 많이 오는 따뜻한 겨울 기후) 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캐나다는 총 6개의 표준시간대가 있으며, 최동쪽(뉴펀들랜드 섬)과 최서쪽(태평양 연안)간의 시차는 5시간 30분이나 된다. 캐나다 대부분의 주에서는 4~10월 사이에 서머타임 제도를 채택하여 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게 된다. 

캐나다의 역사

캐나다의 원주민
고고학 연구와 유전분석에 의하면 최소한 BCE 24,500년부터 인간들이 현재의 캐나다 유콘Yukon 주에 살기 시작하였고, 지금 캐나다의 인구밀도가 제일 높은 남북 온타리오Ontario 주에는 BCE 7,500년부터 살기 시작하였다. 캐나다 원주민의 민족들은 다양하였고 민족마다 습관과 문화에 있어 차이점이 많았다. 캐나다 원주민 사회들의 특징은 영구 정착, 농업, 복잡한 사회 계급과 무역망들이 포함된다. 일부분의 원주민 민족들은 15세기 후반 유럽인 개척자들의 캐나다 착륙 전에 벌써 멸망하였고 고고학의 조사로만 발견되었다. 유럽인들이 캐나다에 최초로 정착했을 당시 캐나다 원주민들의 인구는 5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최소 20만 명부터 최대 2백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캐나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함께 가져온 인프루엔자, 천연두, 홍역 등 새로운 질병들에 직면했고, 이 질병들을 예방할 자연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인이 정착한 후 몇 세기 동안 원주민들의 인구는 최소 40퍼센트, 최대 80퍼센트까지 감소했다고 추측된다. 1982년 캐나다 헌법에서는 3대 주요 캐나다 원주민 집단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최초의 원주민 집단인 캐나다 토착민(First Nations, 한 때 ‘인디언’이라 불림)과 이누트(Inuit, 과거 에스키모라고 알려짐), 그리고 캐나다 정착 이후 부상한 메티스(Métis,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 등이며, 이외에도 더 다양한 민족들이 여전히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캐나다 초기 개척시대
유럽인들에게 캐나다가 알려진 것은 10세기 경에 바이킹족들이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지역에 정착하면서부터이고, 14세기 전반까지는 덴마크인이 거주하였으나 그후 소멸하였다. 1497년 영국 국왕 헨리 7세의 명을 받은 이탈리아인 지오반니 카보토Giovanni Caboto(영어: John Cabot)가 뉴펀들랜드 등 캐나다 동해안을 탐험하였다. 1534년에는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세인트로렌스 만gulf of Saint Lawrence을 발견하였는데, 일반적으로는 자크 카르티에를 캐나다 발견자로 인정하고 있다. 1553년에는 프랑스인이 캐나다에 정착하였으며, 1583년 퀸 엘리자베스 1세 재위 당시 영국 또한 뉴펀들랜드 섬의 항구 도시 세인트존St. John's에 상륙하여 영유권을 선언하였다. 프랑스는 1608년에 퀘벡Quebec 시를 설립하였고, 1642년에는 몬트리올Montreal 시를 세웠으며, 1663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 가 뉴프랑스New France를 식민지로 선언하였다.

1689년부터 176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 지역 식민지를 놓고 여러 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그 중 유럽의 여러 나라가 두 편으로 나뉘어 벌인 7년 전쟁(1756~1763)에서 영국이 프랑스에게 승리하면서 1763년 파리 조약Treaties of Paris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퀘벡 등 캐나다의 영토와 미시시피 강 동쪽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에 할양하고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 할양함으로써 북미 지역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이로써 영국은 북미 식민지 패권을 확립하게 되었으나, 한편으로 장기적인 식민지 항쟁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난을 초래했다. 따라서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 대해 여러 가지 조례들과 강압적 법령들을 통해 경제적 수탈과 지역적 통제를 강화했는데, 이는 북미 식민지 이민자들의 반발을 불러 미국 독립전쟁을 초래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자치연방 및 영토 확장 시대
1775년 북미 지역의 13개 식민주가 영국 본토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이 패배하였다. 그 결과로 맺은 1783년의 파리조약에 의해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토를 미국에게 할양하였다. 또한 영국은 1791년의 입헌법Constitutional Act을 통해 오늘날 퀘벡 주보다 훨씬 광대했던 당시의 퀘벡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세인트루이스강 서쪽은 ‘어퍼 캐나다’Upper Canada, 동쪽은 ‘로어 캐나다’Lower Canada로 분리함으로써 처음으로 ‘캐나다’라는 호칭이 인정을 받았다. 어퍼 캐나다는 영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재의 온타리오 지역에 설립되었고, 로어 캐나다는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재의 퀘벡 지역에 설립되었으며, 두 지역 모두 스스로 선출한 그들만의 입법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처럼 영국이 세 개로 나뉜 북미 식민지(퀘벡ㆍ노바스코시아ㆍ뉴펀들랜드)를 더욱 쪼갠 배경은 미국 독립전쟁시 영국에 충성하며 독립을 반대했으나 영국의 패배로 설 자리를 잃은 국왕파(Loyalists) 식민지인 10만 명 중에서 본국으로 돌아갔거나 카리브해 도서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제외한 4만여 명이 캐나다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프랑스계 주민들과 곳곳에서 충돌을 벌인 데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가 100년을 넘는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패배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어 불만이 쌓여 있던 식민지의 프랑스계 주민들은 미국에서 탈출하여 밀려든 영국계 주민들을 반기지 않았다. 이에 영국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퀘벡 식민지의 분리였던 것이다.

1837년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 양 지역에서 민주정부를 요구하는 소요 반란 사태(Rebellion of 1837)가 격화되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1839년에 이 지역의 소요를 조사토록 더럼 경卿Lord Durham을 파견하였는데, 그는 보고서에서 2개 지역을 ‘캐나다’로 불리는 하나의 식민지 연합(Union)으로 통합할 것을 건의하였다. 1840년의 연합법Act of Union에 의해 캐나다 식민지는 내부에 자치정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1866년에 캐나다(온타리오Ontario 및 퀘벡Quebec), 뉴브런즈윅New Brunswick 및 노바 스코시아Nova Scotia 대표단이 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BNA Act, British North America Act)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런던London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1867년에 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가 영국 의회를 통과함에 따라 영령 캐나다 자치연방Dominion of canada Confederation이 성립되었다. 캐나다 연방을 선언한 1867년 7월 1일 이 날은 캐나다의 건국 기념일로서 캐나다 사람들은 이 날을 미국의 독립 기념일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 

영령 캐나다 자치연방은 처음에 온타리오와 퀘벡, 노바 스코시아, 뉴브런즈윅 등 4개의 주로만 구성되었으며,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자치권이 인정되었으나 조약 체결권은 영국이 행사하기로 하였다. 단, 캐나다는 영국이 외국과 체결한 조약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무를 이행할 부담을 지게 되었다. 

자치연방 이후 캐나다는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1869년에는 노스웨스트 준주Northwest Territories 지역을 영국으로부터 편입하였고, 1870년 캐나다 의회에서 매니토바Manitoba 주를 신설하였다. 1871년에는 영국 칙령에 의거하여 브리티시 컬럼비아British Columbia 주를 편입하였으며, 1873년에도 마찬가지로 영국 칙령에 의거하여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 주를 편입하였다. 이어서 1898년에는 유콘 준주Yukon Territory를 설치하였으며, 1905년에는 캐나다 의회에서 서스캐처원Saskatchewan 주 및 앨버타Alberta 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48년에는 마지막으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Newfoundland and Labrador 주를 편입하였다. 1909년 특별 대영제국회의British Imperial Conference에서 캐나다는 제국 해군사령부 구성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해군 보유를 추진하였다. 또한 캐나다 의회에서는 캐나다의 해외이익을 보호하고 촉진하기 위해 외무부Department of External Affairs를 창설하였다.

1차대전과 독립의 실현
캐나다는 외교정책을 통제하고 있는 영국의 선전포고로 인해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야 했는데, 런던에 독자적인 캐나다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캐나다인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캐나다는 제1차 세계대전에 625,000명의 캐나다인을 참전시켰고 그들 중 6만 명이 사망하고 17만 3천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에 승전국들 사이에 열린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에 캐나다는 자국 대표를 참석시켰으며, 베르사이유 강화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세우는 데에도 창립 멤버로 가담하였다. 1920년에는 주미 영국대사관에 캐나다 공사를 파견하였으며, 1923년에는 미국과 최초로 영국의 공동서명이 없는 독자적인 조약을 체결하였다. 

1926년 런던에서 열린 대영제국회의에서는 발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 채택되어 자치령Dominion이 영국에 종속되지 않고 대등한 지위를 지닌 자치체임을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캐나다의 매켄지 킹William Lyon MacKenzie King 총리는 여러 자치령의 대표들과 함께 캐나다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총독은 더 이상 영국 정부를 대표하지 못하고 군주의 대표자로 지위가 변경되었다. 

1927년에는 캐나다 최초의 대사가 워싱턴 D.C.Washington D.C.에 파견되었다. 1931년에 캐나다는 웨스트민스터 조례Westminster Statutes에 의거하여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영국의 자치령Dominion들에 대한 전면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1926년 발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인준하여 합법화한 것으로, 이때부터 캐나다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캐나다 헌법인 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BNA, British North America Act의 개정 권한은 계속 영국이 보유하였으므로, 이후 캐나다는 계속해서 헌법 개정 권한을 취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생 국가 시대
1930년 대공황 시기에 캐나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경제침체를 겪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뎌내야 했다. 1940년과 1950년대의 경제 침체에 대응하여 서스캐처원주의 주지사 토미 더글러스Tommy Douglas는 사회 복지 제도를 도입하였고 이후 전국의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는 토미 더글러스의 개척정신에 바탕을 둔 사회복지제도를 발달시켰다. 

1939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뒤 사흘 후에 캐나다는 독립적으로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캐나다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큰 이익을 얻으며 경제가 폭발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연합국의 무기고이자 식량 창고로서 이바지했다. 1944년 퀘벡 주에서 일어난 징병제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는 세계대전 후에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캐나다는 2차대전이 끝난 뒤 1945년에 국제연합UNUnited Nations이 만들어질 때 창설 멤버로 참여하였다. 1947년에는 영연방 가운데 최초로 자체 시민권을 규정한 캐나다 시민권법Canadian Citizenship Act을 도입하여, 캐나다인을 영국 신민이 아닌, ‘캐나다 시민’으로 규정하였다. 1949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가 결성될 때 창립멤버로 참여하였으며, 1950년에 한국(Korean War이 발발하자 국제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 1952년에는 최초로 캐나다 태생 총독이 임명되었으며, 1960년에는 캐나다 의회에서 ‘캐나다 권리장전canadian Bill of Right’을 의결하였다.

캐나다의 현대 역사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적 발전은 자유당 행정부의 지속적인 정책과 결합되면서 캐나다의 정체성(Canadian identity)을 형성하게 되었다. 1965년 중앙정부는 이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전까지 사용하던 영국의 유니언잭(Union Jack) 국기 대신 독자적인 단풍잎 국기(Maple Leaf Flag)를 제정하였고 1969년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 이는 정부의 다문화주의 지원 정책 및 여러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의 채택과 더불어 캐나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1978년에는 캐나다 연방정부에서 헌법 개정에 대한 견해를 공표하고, 헌법 수정안을 의회에 상정하였다. 1980년에는 퀘벡 주민이 주민투표에서 주권연합sovereignty-association 독립안을 부결시켰으며, 1967년에 의회 승인을 받았던 ‘오 캐나다O canada’가 캐나다 국가國歌로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1982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여왕이 캐나다 여왕 자격으로 캐나다 헌법Constitution Act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으며, 이로써 캐나다는 헌법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다. 1983년에는 헌법회의에서 원주민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한 헌법 개정에 합의하였다. 1984년에는 총독이 원주민 권리에 대한 헌법 개정을 선포하였으며, 1989년에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을 발효하였다. 1992년 10월에는 샬럿타운 협정(Charlottetown Accord)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1994년 1월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이 발효되었으며, 1995년 10월에는 퀘벡 주 분리독립안이 주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1997년 9월에는 연방제 관련 헌법 개정의 가이드 라인이 될 캘거리 선언calgary Declaration에 합의하였다. 1998년 8월에는 연방대법원에서 퀘벡 주 분리독립에 관한 연방정부의 법적 질의에 대해 회신하였고, 1999년 4월엔 노스웨스트 준주에서 독립하여 누나부트Nunavut 준주가 새로 출범되었다. 2000년 6월에는 연방의회에서 퀘벡 주가 또 다시 분리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질문의 내용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일명 클래러티 법Clarity Act을 제정하였다. 2006년 2월에는 그동안 4기 연속 재집권에 성공한 자유당을 누르고 보수당 정부가 1997년 이후 약 13년 만에 집권에 성공하면서 스티븐 하퍼Stephen Joseph Harper가 총리로 취임하였으며, 2008년 재집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캐나다는 의회민주주의 연방제 국가이다. 국체는 입헌군주국(영英 연방)이고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로 운영되고 있다. 의원내각제를 바탕으로 연방 단위 행정은 연방 정부, 입법은 연방 의회, 사법은 연방 법원에서 처리하는 3권분립이 형성되어 있다. 캐나다의 국가 수반은 엘리자베스 2세Queen Elizabeth Ⅱ 영국 여왕이고 여왕의 권한은 대리권자인 캐나다 연방총독이 대신 행사하는데, 현 총독은 2010년 10월에 취임한 데이비드 존스턴David Lloyd Johnston이다. 내각제 하의 정부 수반은 2006년에 취임하고 2008년 재집권에 성공한 스티븐 하퍼Stephen Harper 총리이다. 

행정부

최고 행정기관인 캐나다 연방 정부는 연방하원House of Commons 선거에서 승리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이루어지며, 내각의 수장인 총리는 연방 하원 내 다수당 대표가 맡게 된다. 연방 정부는 외교정책, 국제무역, 국방, 어업, 교통, 통신, 조세, 통화제도 및 은행, 형법, 이민, 인권 등의 국가적 사안을 관장하며, 주 정부는 정의 실현, 시민권, 자연자원, 주 정부 조세, 교육, 문화, 지방자치정부 등의 분야에서 관할권을 갖는다. 연방정부와 지방(주/준주)정부는 환경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진다. 지방정부는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고유의 입법 의회를 두고 있다. 

캐나다는 두 가지 법률 체계를 가지고 있다. 연방법, 10개 주 중 9개 주의 주 법률, 준주 법률의 기초가 되는 영국 관습법과 퀘벡 주에 적용되는 민법전이 그것이다. 캐나다의 지방자치제는 각각의 지방 주 정부Provincial Government가 외교권과 군대통수권 외의 거의 모든 통치권을 가지고 있으며, 주 단위에서도 삼권 분립이 형성돼 사법부와 입법부가 운영되고 있다. 

입법부

캐나다의 의회는 상ㆍ하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105석의 상원Senate 의원은 총리가 지명하는 임명직이며 75세를 정년으로 한다. 308석의 하원House of Commons 의원은 인구비례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상원은 정부재정 지출과 관련된 사안이 아닌 법안을 입법하거나 하원의 결정을 형식상 인증하는 기관으로 실질적인 입법은 하원에서 이루어진다. 

캐나다의 주요정당은 보수당Conservative Party,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자유당Liberal Party, 퀘벡블록Bloc Quebecois, 녹색당Green Party 등이 있다. 보수당은 2003년 진보보수당과 캐나다 동맹당의 연합으로 설립되었는데, 2006년부터 보수당의 당수인 스티븐 하퍼Stephen Harper가 캐나다의 총리로 선출되어 재임 중이다. 자유당은 1867년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절반 이상의 기간 동안 정부를 구성하고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정당이고2006년 이후로는 야당이 되었다. 신민주당은 캐나다의 주요 정당 중 가장 좌파에 가까운 정당이며 2011년 총선 이후 처음으로 공식 야당이 되었다. 퀘벡 블록은 캐나다의 지역주의 정당이며 퀘벡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사법부

캐나다의 사법부는 독립이 보장되어 있고 법관은 정년제(75세)로 운영되고 있으며, 법원의 체계는 대법원Supreme Court과 연방법원Federal Court 및 지방법원Provincial Court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법원은 연방의회 법에, 지방(주)대법원 이하는 지방의회 법에 의거해 설립되며, 주ㆍ지방의 최고심에서 연방 대법원으로 상고가 가능하다.

대법원은 1명의 대법원장과 8명의 대법관으로 구성(최소 3명은 퀘벡 출신)되어 있고, 지방법원 및 연방법원의 상고심으로 최고심(민ㆍ형사사건)을 관할한다. 대법원장 및 대법관은 총리의 제청에 의해 총독이 임명하며, 특별한 절차에 따라 연방정부의 자문이나 상·하원의 법안 심의 시의 자문 요청에 응하기도 한다.

연방법원은 제1심부와 항소부로 구성되고, 각 주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 및 연방정부와 주 사이의 분쟁, 지적재산권, 경쟁법, 연방정부 부처 및 공사 관련 분쟁을 관할한다. 또한 특정 분야의 분쟁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행정법원, 조세법원, 군사법원 등을 별도로 설치하고 있다.

지방법원은 지방의회 제정법에 의해 설립되므로, 주마다 그 명칭 및 운영이 다르나 조직은 거의 대동소이하며 3심제(주법원-주상급법원-주항소법원)를 채택하고 있다.

경제

캐나다는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는 국가이고,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지표에서 14위(2012~2013)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이며, 미국, 독일, 영국, 이태리, 프랑스, 일본, 러시아와 함께 G8 국가 그룹의 일원인 나라이다. 캐나다는 자유시장 경제와 개방경제를 추구하고 있으며, 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이 약 30%로 G8 국가 중 최저 수준일 만큼 경제의 기초 여건을 중시한 건전 재정 운영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캐나다는 미국에 비해 금융 분야를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편이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시에도 미국보다 여파를 덜 겪었다. 2013년 기준으로 캐나다의 국내총생산GDP는 1조 8,250억 달러(세계 10위)이고 1인당 GDP는 51,871달러(세계 10위)이며, 청년 일자리 창출, 제조업 경쟁력 강화, 수출시장 다변화가 최근 캐나다 경제 정책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경제구조 측면에서 캐나다의 3대 주요 산업은 서비스Service산업(교통, 교육, 의료, 건설, 금융, 통신, 소매, 관광, 정부 분야)과 제조Manufacturing산업(종이, 고급 기술 장비, 항공 기술, 자동차, 기계류, 식품, 의류, 기타 생산품 분야) 및 천연자원Natural Resource산업(임업, 어업, 농업, 광업, 에너지 분야)이다. 캐나다에서 천연 자원 산업은 수출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부가가치가 큰 산업 분야로, 경제 운용에 있어서도 여전히 천연 자원 개발 분야에 많이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실제 직업을 갖고 있는 캐나다인의 75% 이상은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실태를 보이고 있다.

캐나다는 온타리오Ontario, 퀘벡Quebec, 브리티쉬 콜럼비아British Columbia, 앨버타Alberta 등 4개 주에 인구(86%) 및 경제력(GDP의 87%)이 집중되어 있다. 또한 무역 의존도가 약 60%에 달하며 천연자원의 3분의 1, 제조상품의 2분의 1 이상을 수출하는 고도의 개방경제체제인데다, 총 교역규모의 63%가 미국에 편중되어 있는 압도적인 경제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1988년 캐나다는 최대의 무역 파트너인 미국과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하였고, 1994년에는 기존의 미국에 멕시코가 가세하여 3국 간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을 체결하여 그 교역 범위가 확장됨으로써 3억6천만 명의 사람들 간에 연간 5,000억 규모의 무역과 투자가 이뤄지게 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주요 교역국가 중의 하나인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많이 늘어나고 있고,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도 예전과 다르게 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함으로써 시장다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캐나다는 석유 매장량 세계 3위, 천연가스 생산 세계 3위, 천연가스 수출 세계 2위, 우라늄 생산 세계 2위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에너지 자원 보유국이며, 연간 1천억 달러 규모의 석유(석유 생산량의 99%), 가스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에너지 수출의 대미 의존도를 감소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아시아 지역에 에너지 자원을 수출하기 위해 앨버타 주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송유관, 가스관을 건설하고 LNG 설비를 구축하는 등 인프라 확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초기의 캐나다 무역은 목재나 펄프 등의 원재료를 수출하고 자동차 등의 완제품을 수입하는 것이 기본적인 구조였지만, 최근에는 중공업이 크게 성장하여 완제품의 수출 비중이 높아졌다. 주요 수출 품목으로는 수십억 불 상당의 에너지 생산품, 공산품, 기계류, 장비류, 자동차, 농산품, 수산물, 임산물 그리고 소비재 제품 등이다.

사회와 문화

국제연합UN은 국민 생활수준, 평균수명, 교육수준 등을 바탕으로 캐나다를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꾸준히 선정하고 있다. 문화 분야의 창조적 우수성을 지향하는 캐나다는 다양한 인구와 언어 및 다문화주의 정책이라는 사회문화적 특성에서 그 동력을 발굴해내고 있다. 

다문화주의多文化主義

캐나다는 원주민 부족과 프랑스, 영국 두 유럽국가 국민의 만남으로부터 탄생한 나라이다. 인구 5명당 1명이 외국 태생일 만큼 세계 전역의 이민자들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줄지어 몰려들면서 오늘날 캐나다는 계속되는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최근 40년 사이에 캐나다의 민족적, 문화적 인구는 갈수록 더 다양해졌다. 1971년 캐나다는 세계 최초로 다문화주의 정책을 채택한 나라가 되었으며, 자국의 풍부한 민족적, 인종적 다양성을 주지하며 소중히 여기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1년 발표한 각국의 사회지표 중 ‘소수자에 대한 포용력 지표’에서 캐나다는 1위(84%)를 기록했다. 동 지표의 OECD 평균은 61%이고 한국은 43%였다. 캐나다에는 200여 개 민족 집단이 어울려 살고 있고, 40여 개의 문화가 캐나다 민족 언론을 통해 표출되고 있으며, 현재 이민자는 캐나다 인구 성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캐나다 다문화주의법Canadian Multiculturalism Act은 서로 태생이 다른 개인과 지역사회 간의 상호교류는 물론, 캐나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민족의 완전하고 공평한 참여를 장려하고 있다. 캐나다는 다문화주의를 통해 모든 캐나다인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한편, 이들이 사회에 융화되어 사회, 문화, 경제, 정치의 모든 측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지원을 하고 있다. 3,5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캐나다는 민족의 다양성을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인식하고 매년 20만 명 이상의 이민자를 흡수하고 있으며, 그 문화와 사회를 끊임없이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출신 배경과 새로운 견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의 정체성과 고유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공존을 추구하는 캐나다와 같은 다원화 사회를 ‘모자이크 사회Mosaic Society’라고 부른다. 반면, 미국처럼 이민자들을 미국적인 가치와 문화 속에 녹여서 하나로 통합ㆍ흡수하려는 정책을 빗대어 도가니 또는 용광로Melting Pot 사회, 오일 페인팅Oil Painting 사회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2개 국어의 사용

캐나다는 공용어법Official Languages Act을 제정하여 영어와 불어를 캐나다의 공용어로서 존중받도록 하고 연방기관에서 두 가지 공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동등한 대우, 권리, 특권이 보장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영어 및 불어 소수 언어집단의 계발을 지원하고 캐나다 사회에서의 영어와 불어에 대한 완전한 인정 및 사용을 장려한다. 대규모 불어 사용 집단이 온타리오Ontario 주와 동부캐나다 지역, 특히 뉴브룬스윅New Brunswick 지방에 거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불어 사용 인구의 대다수는 퀘벡Quebec 주에 거주하고 있다. 

예술과 미디어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넓고 탁 트인 국토로 오랫동안 칭송을 받아온 캐나다는 현대의 예술적 창조의 중심지로서도 명성을 쌓아왔다. 캐나다 예술의 독창성은 캐나다의 지리적 조건, 기후 및 민족문화적 다양성, 역사 등의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나온다. 오늘날에는 문학, 무용, 영화 등 여러 형태의 예술적 표현에 있어 캐나다인들이 세계 주요 문화행사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화 분야에 있어서, 텔레필름 캐나다Telefilm Canada는 지난 수년간 600여 편의 장편영화와 1,500여 편의 TV쇼 및 시리즈 제작비를 지원해왔고, 세계 최대의 정부 영화기관인 국립영화위원회National Film Board는 1939년 이래로 1만여 편의 작품을 제작, 동 기간 중 3천 개에 달하는 국내외 영화상을 휩쓸었다. 토론토 국제영화제는 1975년 이후 세계 최대의 대중 영화제 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영화 ‘터미네이터’, ‘타이타닉’, ‘아바타’ 등을 감독한 제임스 카메론James Francis Cameron이 캐나다 출신이며, 유명 배우들로는 짐캐리James Eugene Carrey,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 캐리앤 모스Carrie-Anne Moss, 마이클 J폭스Michael Andrew Fox, 도날드 서덜랜드Donald Sutherland와 키퍼 서덜랜드Kiefer Sutherland 부자 등이 있고, 음악 분야에서는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 셀린 디온Celine Dion, 에이브릴 라빈Avril Lavigne,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 등의 음악가와 가수들도 캐나다 출신이다. 캐나다에는 100여 개의 전문 무용단과 350개에 달하는 전문 극단이 있으며, 거의 모든 주요 도시마다 전문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두고 있다. 또한 토론토Toronto는 뉴욕과 런던의 뒤를 바짝 쫓으며 세계 3대 공연예술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캐나다는 공영ㆍ민영 방송의 전통이 강한 국가로서 다언어, 다문화 인구의 니즈needs를 충족시켜 줄 전국적으로 다양한 방송 매체들이 산재해 있다. 방송사로는 공영 CBC, 민영 CTV, Global TV가 전국 방송 매체이고, 주요 일간지로는 Globe & Mail, National Post, Ottawa Citizen, Toronto Star, Vancouver Sun, Montereal Gazette 등을 들 수 있다. 

스포츠

캐나다는 풍부한 스포츠 역사를 향유하고 있다. 시 단위 리그에서 국제 경기에 이르기까지 여름이나 겨울이나, 캐나다인들은 스포츠를 국민 단합의 장으로 융합시켜 왔다. 캐나다인들이 참가하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활동에는 골프, 아이스하키, 야구, 수영, 농구, 배구, 축구, 테니스, 스키, 사이클링 등이 있지만, 캐나다의 국민스포츠로 불리는 것은 아이스하키이다. 캐나다는 1976년 몬트리올Montreal 하계올림픽, 1988년 캘거리Calgary 동계올림픽에 이어 2010년에는 밴쿠버Vancouver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다.

한국과 캐나다의 관계

캐나다와 한국의 관계는 1888년 토론토 출신의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이 한국에 파송되며 시작되었다. 게일 이외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한 올리버 에비슨 박사Dr. Oliver Avison와 1919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프란시스 스코필드 박사Dr. Francis Schofield 등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캐나다인이다. 

캐나다와 한국의 공식적인 관계는 1947년 캐나다가 한국의 선거과정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Commission에 참여하며 시작되었다. 캐나다는 1949년 한국을 국가로 공식 인정하였으며,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외국 참전군으로서는 세 번째로 큰 규모인 26,791명의 캐나다 군을 유엔군의 형태로 파병하여 그 중 516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지금까지 캐나다는 유엔군사정전위원회UN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및 유엔사령부UN Command에 대한 참여를 통해 한반도의 안보를 유지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캐나다와 한국은 1963년 공식으로 수교를 맺었고, 10년 후인 1973년 처음으로 한국에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지난 2013년 한국과 캐나다는 각각 ‘한국의 해’와 ‘캐나다의 해’로 이름 지어 수교 50주년의 관계를 축하했고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또한 캐나다는 정전기념일인 7월 27일을 한국전쟁 참전군인의 날(day of Remembrance in Honour of Veterans of the Korean War)로 지정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캐나다 군인들을 기리는 날로 지정하였다.

한국은 국제연합(UN)의 회원국이고 아세안지역포럼ASEAN Regional Forum,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와 주요20개국G20을 비롯한 많은 경제ㆍ안보 기구의 회원국으로서 캐나다와 군축, 평화유지, 개발원조, 다자무역체제의 강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개혁 등 다양한 현안들에 있어서 상호 의견을 교환하고 상호 협력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한국은 캐나다의 7번째 무역국이며,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뒤이어 3번째 무역국이다. 양국 간의 상호 무역은 2013년 기준 99억 달러에 달한다. 캐나다의 대한국 수출은 47억 달러, 대한국 수입은 52억 달러였다. 캐나다의 대한국 주요 수출품목은 광물 연료 및 석유, 곡류, 광물, 그리고 육류이며, 캐나다의 주요 수입품목은 자동차, 전자 전기기기, 기계류, 광물 연료 및 석유, 그리고 철강이다.

양국의 인적교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해왔다. 그동안 한국인 이민자는 꾸준히 늘어나서, 캐나다에는 2012년 말 기준으로 1만 9천여 명의 유학생을 비롯하여 20만 6천 명의 한국 교민이 있다. 또한 한국에는 대략 3천5백여 명의 캐나다인 영어교사를 비롯하여 총 2만 3천명의 캐나다인이 있다. 2012년 한 해 한국인의 캐나다 방문은 12만 2천명, 캐나다인의 한국방문은 11만 9천명이었다. 캐나다 한국 교민은 약 90%가 온타리오, 브리티시 컬럼비아, 퀘벡주에 거주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앨버타주, 매니토바주 등 여타 지역으로의 이민도 증가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이민 역사가 비교적 짧고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아 한국 교민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으나 최근 들어 동포사회의 정치 참여가 증대되고 있으며, 2009년 1월 하퍼Harper 총리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지명된 Yonah Martin(한국명: 김연아)이 한국계 캐나다인 중 최초로 연방의회에 진출하였다. 

현재 캐나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반도 및 동북아지역의 지속적인 안정을 보장하고 나아가 양국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는 데에 맞춰져 있다. 캐나다와 한국은 세계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는데 있어 좋은 협력자이다. 중견국으로서 두 나라는 모두 유엔 체제를 따르는 적극적 다자주의국이며, 국제연합(UN)과 아세안지역포럼ASEAN Regional Forum,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와 주요20개국G20을 비롯한 많은 국제 기구들을 통해서 경제ㆍ안보 문제에 서로 협력하고 있다. 양국은 또한 미국과 중요한 동맹국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캐나다는 2001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마지막 남은 냉전시대 대치지역인 분단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남한의 지속적인 노력을 굳게 지지하는 입장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있다. 캐나다는 핵과 미사일 등의 실험 및 확산과 인권침해와 같이 안정을 저해하는 북한의 도발적 행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고, 6자회담이 북핵 위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강력히 지지하는 입장에 있다. 캐나다는 지난 3년간 UN군사령부UNC: United Nations Command에서의 역할을 강화하며 역내 연합 훈련에 대한 참여를 확대해왔다. 현재 UNC에는 5명의 캐나다군이 상주하며 전략정책 기획, 다국적 군 조율 및 긴급사태 대응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캐나다는 2013년 8월 진행된 을지 프리덤 가디언 연합훈련에 UNC 파병국 참여인원의 절반에 가까운 수의 캐나다 군인을 참여시켜 한반도의 안보와 안정을 지지하기 위한 노력에 기여하였다. 평화와 안정이라는 양국 공통의 관심사는 무역과 경제협력의 증대와 함께 크게 증가해왔다.



퀘벡 분리주의 문제

캐나다의 퀘벡Quebec 주州는 분리주의 성향으로 문제의 중심이 되어 온 지역이다. 캐나다 내의 또 다른 나라로 불리우는 퀘벡 주는 캐나다의 10개 주 중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GDP도 전체의 약 20%를 점하고 있는 곳이며, 17세기 초부터 프랑스계 이민자들이 유입되어 현재는 프랑스계 주민이 주 인구의 82%를 차지하고 있다. 이 프랑스계 중심의 퀘벡 주가 캐나다에서 분리 독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퀘벡 내셔널리즘’으로 불리는 분리주의운동이다. 이는 1791년 당시의 넓은 퀘벡 주를 두 개로 나누어 불어 사용자 그룹을 ‘로어 캐나다’Lower Canada(현재의 퀘벡 지역)로 분리하면서 잠정적으로 예견되어 온 문제이기도 했다. 퀘벡 내셔널리즘은 캐나다에 머물면서 특별한 자치권을 요구하는 연방파와 캐나다에서 분리하여 주권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파의 2개 조류가 있는데, 특히 분리주의를 내세운 독립파측의 움직임들로 인해 여러 사건들이 발생했다. 

1960년대 퀘벡 주에서 현대적인 퀘벡 민족주의 운동이 탄생한 이래, 1970년에는 과격파 퀘벡 주 분리독립운동 조직인 퀘벡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du Québec이 몬트리올에서 폭탄을 터뜨렸고 퀘벡 주의 노동부 장관과 다른 공무원 한 명을 납치하였으며 결국 피어 라포트 장관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캐나다 연방총리 피에르 트뤼도Pierre Elliot Trudeau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76년에 분리주의자들로 구성된 퀘벡당Parti québécois은 퀘벡 주의 선거에서 승리한 후 불어를 퀘벡주의 유일한 공식 언어로 선포하는가 하면 1980년에 처음으로 통치권 국민투표(퀘벡 주의 캐나다에서의 분리 독립 여부)를 실시했지만 트뤼도 연방 총리가 헌법 개정을 약속하고 캐나다에 머물도록 활동을 벌인 결과 독립파는 패배하였다. 그러나 1982년 캐나다 헌법은 퀘벡이 기대하였던 자치권 강화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퀘벡은 수용을 거부하였다. 정권교체 후 퀘벡은 헌법 수용을 위한 조건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퀘벡의 ‘특별 사회’ 인정을 골자로 하는 1987년의 ‘미치 레이크 협정Meech Lake Accord’으로 발전하여 진전을 이루는 듯했지만, 연방 내 영어계 2개 주의 비준 거부로 이 협정은 성립되지 않았다. 퀘벡은 이것을 프랑스계에 대한 영어계 캐나다의 거절로 받아들이고 독립 경향을 강화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퀘벡연합Bloc Québécois이라는 분리주의 정당은 퀘벡 주의 선거에서 승리한 후 1995년 두 번째 통치권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찬성 49.4%, 반대 50.6%로 역시 실패했지만 아주 아슬아슬한 표 차이였다. 하지만 그 후 퀘벡 분리운동의 기세가 꺾여 2014년 4월에 치러진 퀘벡 주 총선에서 퀘벡연합은 자유당에 참패했다. 이것은 퀘벡 분리주의의 잠정적인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고 퀘벡 독립이 제도적으로 실현이 어렵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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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성장 잠재력 그리고 삼바와 축구의 나라 브라질 연방 공화국

브라질 연방 공화국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이고, 세계에서 다섯 번째의 대국이다. 또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국가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고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 흔히 삼바와 카니발의 나라로 알려져 있고, 전통적인 축구 강국으로서 펠레와 호나우두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하였으며 2014년 6월 FIFA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이기도 하다. GDP 규모가 세계 7위에 해당하는 브라질은 브릭스BRICS 구성국의 한 축으로 세계 경제의 성장에서 잠재력이 가장 큰 나라 중 하나이고, 무한대의 자원과 농산물의 보고, 또 엄청난 산소 생산량 등 미래의 성장 잠재력을 갖춘 나라로 평가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도 끊지 못할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코르코바도 산에서 본 리우데자네이루 시내 전경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브라질Brazil(Brasil)이라는 국명은 원래 ‘브라질’이라는 나무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 나무는 붉은 색깔을 내는 염료로 사용되는데, 이 때문에 ‘불타는 숯처럼 붉은 나무’라는 뜻의 ‘파우-브라질’(pau-brasi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브라질 나무를 유럽으로 대량 수출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언제부터인지 브라질이라 불리게 되었다. 브라질 연방은 약 850만㎢의 면적에 약 2억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다. 이 나라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미에서 에콰도르와 칠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브라질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파서국巴西國으로도 불리는 이 나라는 남미 대륙 최대의 국가로 대륙의 약 48%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나라이다. 북부는 아마존 강Amazon River이 흐르는 세계 최대의 열대우림, 남부는 브라질 고원이 자리한다. 최근에는 아마존 유역의 삼림을 개발해 농토를 만들면서 환경 파괴로 인한 사막화가 사회적인 문제, 지구적인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와의 국경과 북부 기아나 고지의 피고 다 네블리나Pico da Neblina 산은 3,014m로 이 나라의 최고봉을 이룬다. 열대지역은 케라도Cerrado라 불리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지며, 이곳에는 에마스 국립공원Emas National Park이 위치한다. 북동부는 건조한 셀 톤이 펼쳐져 가뭄에 시달리는 곳이다. 남서부의 파라과이와의 국경 부근에는 남미 최대의 이구아수 폭포Iguazu Falls가 있고, 라플라타강으로 흘러드는 파라나 강Paraná River이 흐른다. 또 네그로 강Negro River, 상프란시스쿠 강São Francisco River, 싱구 강Xingu River, 마데이라 강Madeira River, 타파조스 강Tapajós River이 있다. 볼리비아 및 파라과이와의 국경 부근에는 세계 최대의 열대 습지인 판타날Pantanal 자연 보전 지역이 있다. 남부의 세 개 주는 브라질 고원에서 우르과이 및 아르헨티나로 이어지는 대평원 팜파스Pampas와 마이그레이션이 있고, 예로부터 목축업이 성행하고 있다. 국토의 93%는 열대지역이고, 남회귀선이 지나는 상파울루São Paulo 이남은 온대 기후에 속한다. 그리고 열대 기후도 다시 적도, 열대, 스텝, 고지대성, 아열대 등으로 나뉜다. 기온은 열대지역에서 연중 25도 이상이 유지되며 기온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다. 강우량은 연중 1,000~1,500㎜이며, 대부분 여름인 9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내린다. 그러나 아마존 지역은 연중 2,000㎜, 벨렘 지역은 3,000㎜에 이른다. 한편 브라질은 콜룸비아, 멕시코, 인도네시아보다 훨씬 풍부한 동식물의 종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약 5만 5천 종의 식물, 3천 종 이상의 민물고기, 921종의 수륙양생 동물, 749종의 파충류, 51종의 영장류가 발견되었다. 숲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이 종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브라질보다 12시간이 빠르며, 일광절약 시간이 실시되는 10월 중순부터 익년 2월 중순까지는 11시간 빠른 시차를 보인다. 마나우스 등 서쪽에 위치한 지역과 동부 지역 간에는 1시간의 시차가 있으며, 북동부 일부 주는 일광절약시간제를 실시하지 않는다. 

브라질의 역사

브라질의 원주민
브라질 지역의 원주민은 BCE 11000년 경 베링해를 건너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베링해를 건너 온 그들은 BCE 8000년 경 현재의 브라질 지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주로 해안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잉카Inca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직 원시적인 농경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두나무를 경작한 것은 약 8500년 경이며, 진정한 농업은 기원전 6000년에서 2700년 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 유럽인들이 보통 인디오라고 부른 원주민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16세기 전반에는 이러한 원주민들이 해안에만 약 200만 명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이주하기 이전까지 이곳 원주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행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브라질 원주민들은 언어 사용 형태에 따라 투피어계, 알아크어계, 카브리어계 등으로 나뉘는데, 포르투갈인들은 처음 접촉한 투피어Tupian language가 브라질어의 근본이라고 여겨 그 말을 원주민들에게 가르쳤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
1494년 포르투갈Portugal과 스페인Spain은 미지의 신세계 탐험 지역들에 대한 소유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바다의 국경선을 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에 따라 남아메리카를 분할하기로 약정했다. 이 조약을 중재한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는 오늘날의 브라질과 나머지 남아메리카의 분할을 확정했다. 1500년에 포르투갈 항해사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이 브라질의 남부에 도착하여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다. 그런데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인디안들과 목재를 위한 상품 교환을 행한 프랑스인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유럽인들을 브라질로 보내기로 했다. 또한 1549년 초대 브라질 총독으로 토메 데 수자Thome de Souza가 부임했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연합하자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는 브라질을 공격하여 북동부의 일부를 점령했다. 

브라질을 대표하던 파우 브라질Pau Brasil이 고갈되자 북동부에 사탕수수가 도입되어 인디오들이 설탕 농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었고, 브라질 서부와 앙골라Angola, 모잠비크Mozambique에서 흑인들을 대량 유입하여 노예로 혹사를 시켰다.

1680년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라플라타강 하구의 좌안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맞은편에 콜로니아 델 세크라멘토Colonia del Sacramento라는 식민 정착지를 건설했기 때문에 이후 반다 오리엔탈Banda Oriental 지역(당시에는 아르헨티나의 일부였던 식민 시대의 ‘우루과이’ 지역)에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나 브라질의 중심부가 북동부에서 남서부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이동했다. 이 금광은 18세기에만 무려 30만 명의 포르투갈인을 브라질로 이주하도록 했고, 금광 개발을 위한 노예를 더 많이 유입하도록 했다. 

이즈음 미국 독립의 영향을 받아 브라질 식민지 사회에서도 독립 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789년 민병대의 장교인 티라덴테스Tiradentes를 중심으로 하여 브라질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시켜 공화국으로 만들려는 운동이 추진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 일은 브라질 독립운동의 선구가 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아이티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으로 독립운동이 진행되었지만, 식민지 시대 브라질에는 대학이 설립되지 않아 지적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관계로 대중적인 기반을 가진 독립운동의 추동력을 갖지는 못하였다. 

제정 및 독립왕국시대
1807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포르투갈로 진군하자 포르투갈 왕인 동 주앙 6세Dom João VI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피신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게 된다. 이로써 브라질은 모국 포르투갈과 같은 지위를 가지게 된다. 또한 수도 리우데자네이루는 당시 포르투갈제국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1821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에서 철수하자 포르투갈왕은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철수하면서 브라질을 자신의 아들인 페드루 1세Dom Pedro I에게 맡겼고, 그는 1822년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여 스스로 최초의 브라질왕국 황제가 된다. 1828년 3년에 걸친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이 끝난 뒤 우루과이Uruguay 지방이 독립을 선언했다. 얼마 후 군인들의 반란으로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의 아들인 페드루 2세Dom Pedro Ⅱ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864년에는 파라과이Paraguay가 브라질에 전쟁을 선언했고, 개전 5년 후 브라질은 우루과이Uruguay, 아르헨티나Argentina와 연합(삼국동맹)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브라질의 독립은 황제라는 구심점으로 인하여 공화제와 입헌군주제 사상이 충돌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했다. 또 세계 탄성고무 생산의 독점으로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농장의 노예제도가 문제였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가 남은 나라는 브라질이 유일하였기 때문에 삼국동맹전쟁 후 지식인들에 의해서 노예제가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888년 이른 바 “황금법”이 공포되어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페드루 2세는 대농장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이듬해 다 폰세카Manuel Deodoro da Fonseca 장군의 쿠데타로 인해 제정이 붕괴되면서 브라질 왕정시대는 종료되었다. 

공화정과 세계대전 시대, 군정에서 민정으로
1889년 브라질은 연방헌법을 갖춘 연방공화국으로 출범을 하였고 다 폰세카는 브라질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브라질이 제정에서 공화국 체제로 바뀐 이후, 초기 브라질 제1공화국 시기의 정치는 대농장주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커피 재배를 주된 산업으로 삼는 상파울루São Paulo 주州와 목축업을 주로 하는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 주의 대농장주들 영향력이 가장 커서, 이 두 주에서 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정치적 관행이 생겨났다. 이는 커피와 목축업을 주로 영위하면서 영향력을 키운 이 두 주州의 대농장주들이 정치 권력을 행사하면서 생겨난 관행이었으며, 이렇게 두 주가 브라질 정치의 흐름을 주도해 나간 관행을 커피와 우유라는 뜻을 가진 ‘카페 콩 레이치Café com leite’ 체제라 불렀다. 당시에는 커피와 고무 수출이 브라질 경제를 지탱하는 주력 산업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 관행이 가능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브라질은 농장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제정시대부터 유럽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여 왔지만,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유럽 외에 아시아로부터도 이민자들의 유입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라질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의 편에서 독일에 대항했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전쟁과 세계대공황을 거치면서 브라질은 커피 수출에 많은 차질이 생겼고, 기존의 카페 콩 레이치 체제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높아지면서 1920년대에 청년 장교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기도하는 등 많은 국민들은 과두정치의 종식을 요구했다. 그러던 차에 1930년 히우그란지두술Rio Grande do Sul 주의 주지사였고 ‘군軍의 아버지’라 불렸던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이로써 카페 콩 레이치 체제는 붕괴되었다. 1932년에 반 바르가스 혁명이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한 바르가스는 브라질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는 1937년 쿠데타를 통해서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국가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대학의 정비, 국가 주도의 공업화, 민족주의의 추진과 이민자 동화 정책,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 등이 이루어졌다. 1942년 바르가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여했으나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과 군 자체의 반발, 그리고 1945년의 군사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각한 지 5년 후, 국민은 다시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에 바르가스는 사회주의 정치를 내세우면서 국가 경제의 국민화를 도모했으나 미국이 이를 반대하고, 군이 그의 퇴임을 요구하자 1954년에 자살하고 말았다. 

후임자 쥬세리노 쿠비셰키Juscelino Kubitschek 대통령은 브라질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외자를 유치하려고 노력했고, 이후 1961년 취임한 새 대통령 콰드루스Quadros는 미국으로부터의 자립을 추구하고 국가 재정을 견고히 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새 수도가 된 브라질리아로 천도한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부통령 골라르Goulart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골라르 역시 새 수도 건설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1964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스텔로 브랑코Castelo Branco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브랑코는 새 대통령이 되어 군사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친미반공 정책과 외자 도입을 통해 급속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1967년 브랑코가 갑자기 사임을 하면서 코스타Artur da Costa e Silva 장군이 새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외자를 유치하여 브라질 경제를 활성화시키려 노력했고 이듬해인 1968년에 학생 운동과 파업이 일어나자 정치 정화작업과 검열을 실시했다. 그러나 1969년 코스타가 축출되고 가라스타추 메디치Garrastazu Me’dici 장군이 후임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압제를 강화함으로써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군정軍政의 시대는 ‘브라질의 기적’이라고 했을 정도의 고도 경제 성장이 가능했지만,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경제 성장은 추락하고, 소득 격차의 증가로 인해 범죄 발생 비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또한 군사 정권에 의한 인권 침해도 큰 문제가 되었다. 그동안 각지에서 카를로스 마리게라의 민족해방행동(ALN)과 10월 8일 혁명운동 등 도시 게릴라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외국대사를 납치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친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1974년 대통령에 취임한 에르네스투 가이세우Ernesto Geisel 장군은 국민적인 불만이 팽배해지자 군정의 노선을 전환했고, 1979년 대통령이 된 주앙 피게이레두João Baptista Oliveira Figueiredo는 군정의 민정 이관을 약속했으며, 1985년 탄크레두 네베스Tancredo Neves가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비로소 민정이 부활했다. 그런데 네베스가 취임 전에 종양으로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부통령 당선자인 사르네이José Sarney가 대통령직에 취임했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로 인해 경제는 악화되었고, 사르네이 정권은 국내에서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라울 아르혼신Raúl Alfonsín 정권과의 사이에서 브라질-아르헨티나의 관계는 이 시기에 크게 개선되었고, 오랫동안 계속된 양국의 적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1989년에는 29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어 1990년 국가재건당 후보인 페르난도 콜로르Fernando Collor de Mello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경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해 수많은 부패와 각종 기행을 남기고, 1992년에 의회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고 부통령인 이타마루 프랑코Itamar Franco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어 1995년 집권한 사회민주당PSDB의 페르난도 엔리케 카르도조Fernando Henrique Cardoso 대통령 재임시에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4개국이 무역장벽을 전면 철폐하면서 메르코수르Mercosur(남미 남부 공동 시장)를 발족시켰다. 

2003년 노동자당의 룰라 다 실바Luiz Inácio Lula da Silva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세계 경제가 호조를 보이자 브라질 경제 역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룰라는 두 번의 연임을 했고, 2010년 10월 실시된 대선에서 여당인 노동자당PT의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 국무부 장관이 당선되어 2011년 대통령에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치 및 행정

브라질연방은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그 임기는 각각 4년이다. 의회는 상하원으로 구성된다. 현재 대통령은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 여성 대통령으로 노동자당PT 출신이다. 현행 브라질 헌법은 1988년 제정된 것이며, 1985년까지의 군사정권에서 관행이 되어 온 부정부패가 정치와 행정에 만연되어 있는 상태이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군사통치를 받은 기간에 인디오들은 인권을 침해당했고, 경제는 유지되었으나 성과 부풀리기가 많았다. 그 결과 공공연한 과오와 실익 없는 욕망만이 난무했다. 

1988년의 신新헌법은 연방정부에 광범한 권능을 수여했다. 대통령은 4년의 임기로 직선제에 의해서 선출되고 1998년 이래 연임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포괄적 권력을 소유하고 국가를 대표하며 정부 수반으로서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1993년부터는 국가 형태나 정부 형태에 관한 국민투표는 금지되고 있는데, 브라질 국민들은 정부 형태로서 공화제와 내각제를 선택했다.

브라질의 정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확립된 프로그램이 없는 정당들이 많다는 데 있다. 주요 정당들이 정강정책으로 중도 좌파적 이념을 내세우고 있으나 뚜렷한 차이가 없다. 1979년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양당제가 폐지되고 다당제의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정당정치의 전통이 없어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탄생하거나 기존 정당이 이합집산을 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짧게 일시적으로만 유지되는 연정이 이루어진 결과 대부분의 법률들이 거부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많은 군소 정당과 부패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조장했고, 거의 무기력한 통치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단순한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도 의회를 이끌면서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현재 집권 여당은 노동자당PT과 브라질 최대 정당인 브라질 민주운동당PMDB를 주축으로 연합하고, 야당은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과 민주당DEM을 주축으로 여야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행정부
브라질 연방 행정부의 수장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고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법률공포권, 주요인사 임면권, 군통수권, 조약체결권, 의회소집 및 해산권, 비상사태 선포권, 사면권 등의 권한을 갖는다. 현행 대통령 선거는 국민의 보통 및 직접선거제이며, 임기는 4년이고 중임이 가능하다. 또한 지방(주)정부의 수장인 주지사도 임기 4년에 중임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브라질은 연방주의 및 3권 분립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통치권한을 분배하고 있으며 각기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존재한다. 연방정부의 주요 권한은 외국과의 외교관계, 국제교역, 이민정책수립, 국경획정, 국제기구 참여, 전쟁선포 및 강화, 국방, 계엄령 선포, 화폐 발행, 국가경제 및 사회발전 계획수립, 각 주간의 통상관계 조정 등이며, 주정부는 연방헌법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체의 주 헌법을 제정할 수 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으로 다루어야 할 노사관계, 환경, 조세문제 등은 연방법과 주법이 공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입법부(연방의회)
연방 의회Congresso National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다. 상원Senado Federal(원로원)은 각 주 및 연방특별구에서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직접·비밀선거에 의해 3명씩 선출한 총 8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8년의 임기가 주어진다. 하원은 각 주별로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open list 제도)를 적용하여 직접·비밀선거에 의해 선출(최소 8, 최대 70명)된 513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상원은 외교정책 검토, 주요인사 임명 사전승인, 대통령의 전쟁선포에 대한 사전승인, 군대의 해외파견 승인, 조약의 비준 등을 의결하며, 하원은 법률제안 등 입법 활동, 대통령의 전쟁선포 사전승인, 국가예산의 심의 및 승인 등을 의결한다. 2012.10월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노동자당PT은 압도적인 승리를 통해 2014년 10월 대선에서 지우마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주의회는 인구비례에 의한 비밀·직접선거로 의원을 선출하고 임기는 4년이며, 주운영에 관한 입법 활동과 대정부 질의, 토론, 정부불신임권, 국정감사권, 예산안 승인 등의 안건을 처리한다. 

사법부
브라질의 사법부는 지방법원, 고등법원, 연방대법원의 3심제로 운영되고 있다. 사법제도의 특징으로는 헌법재판소 역할을 수행하는 연방최고법원 외 최종심 기관으로 대법원, 최고노동법원, 최고 선거법원, 최고군사법원이 각각 존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연방최고법원(STF: Supreme Federal Court)은 법률의 위헌 여부를 판단 및 행사하는 헌법재판소 기능, 중앙정부와 주정부간의 분쟁 및 주정부 상호간의 분쟁에 대한 배타적 관할권을 갖고 있으며, 상원의 승인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원장과 10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대법원(STJ: Superior Court of Justice)은 연방법상 헌법과 무관한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을 담당하는 일반 사건 최고법원이며, 고등법원은 과거에 존재했던 연방 고등법원(TFR)을 1988년 헌법개정시 철폐하고 전국에 5개의 신 연방고등법원(Federal Regional Courts) 창설해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 특수법원으로 노동, 선거, 군사에 대해서는 각각 별도의 심리 법원인 최고 노동법원, 최고선거법원, 최고군사법원이 설치되어 있다.

행정구역
광활한 브라질 국토는 26개 주 및 1개 연방특별구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지는데, 자연조건 등 지역적 차이에 따라 크게 북부 지역(전 국토 면적의 45%), 북동부지역(18%), 남동부지역(11%), 남부지역(7%), 중서부지역(19%)의 5개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경제

브라질은 건국 이래 오랫 동안 영국,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의 주요 채무국이었고, 1970년대 경제 정책의 잘못으로 채무가 급증했다. 1980년대에는 멕시코, 아르헨티나, 페루와 마찬가지로 재정 파탄 국가였으며, 인플레이션과 막중한 국가 채무를 안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세계적인 금리 상승으로 브라질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해외 자본의 유입은 정지했고, 국내 투자도 둔화되었다. 그리고 대외 채무의 부담으로 공공부문의 적자가 증가하여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인플레이션이 100% 이상이었고, 1992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1175%에 달했으며, 1993년에는 2500%라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결국 통화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고심 끝에 브라질은 크루화를 4회에 걸쳐 개혁하여 그 가치를 무려 2조 7500분의 1로 인하하여 헤알화라는 새로운 통화로 교체했다. 1994년 이 헤알화를 기반으로 ‘헤알 플랜’이라는 달러 PEG제(고정환율제)를 도입하여 가까스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막는 데 성공했다. 1998년에는 IMF의 구제 금융을 받는 등 경제 위기를 맞았으며, 세계 최고의 채무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었다. 드디어 1999년 외환위기로 국가 부도 직전까지 갔으나 IMF와 미국의 긴급 구제 금융으로 파탄은 막았다.

2003년부터 룰라Lula가 이끄는 노동자당 정권은 개도국에 무역을 확대했고, 이에 지속된 채무 문제를 해결하고자 팔을 걷었다. 천연자원 개발과 제조업의 약진으로 경제가 안정되면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4.7%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으며 2005년에는 국내 총생산이 전년도 대비 31%가 증가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IMF에 채무를 청산하고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되었다. 2010년도에는 소비 및 투자확대에 힘입어 7.6%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유로존 위기, 중국으로부터의 원자재 수요 감소 등의 대외 요인과 함께 브라질 경제의 고질적 문제인 생산성 대비 높은 임금, 구조적으로 높은 이자율, 복잡한 조세 시스템, 인프라 부족 등에 의한 산업 경쟁력 취약성 누적 등의 산업경쟁력 저하로 인한 수출 부진 등이 맞물려, 2011년 이후 저성장 기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브릭스BRICS의 일원인 브라질은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서 향후의 성장에 있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철강업이 산업의 30%를 차지하며, 제조업 기술은 남미 최고를 자랑하고 있으며, 최근 성공적으로 마친 2014년 월드컵 행사와 2016년 올림픽 개최 등도 브라질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정책의 일환이다.

한편 여객과 화물 수송은 주로 도로에 의존하고 있는데, 국토가 넓어 항공 운송도 성행하며, 긴 해안선과 풍부한 하천을 바탕으로 수상 교통도 성행하고 있다. 중공업, 특히 항공 산업이 발달했고, 국책 회사인 엥브라에르Embraer는 현재 소형 제트기 시장의 절반 가까운 점유율을 자랑하며 유럽이나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공공 서비스의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고, 해안과 대륙 내부의 경제 격차와 빈부 격차가 심한 편이지만 경제 호전을 배경으로 최근 급속히 개선되고 있으며, 빈곤층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 내수 증가에 기여하고 있다.

농업인이 경제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6%로서 아직 중요한 역할을 하나 생산성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한때 파우 브라질Pau Brasil이라는 적갈색의 나무와 고무를 주로 하는 농업이 발달했다. 파우 브라질은 붉은 염료의 원료로서 경제적 가치가 높았으며, 지금도 이 원료로 토산품을 만들어 현지에서 판매하고 있다. 19세기까지 브라질은 고무 재배를 독점하다시피 했으나 이후 페루와 볼리비아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 고무 재배가 확대됨으로써 고무 재배는 크게 퇴색했다.

도시 근교의 목축업과 상파울루 등 대도시 주변의 양계업 등은 현대적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며, 가공육을 중심으로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북동부에서는 사탕수수의 재배가 활발하다.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받아들였으나 1888년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커피 수출량은 세계 1위이다. 커피 역시 노동집약적 농업이지만 값싼 노동력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재배에 적합한 고산지대가 많아서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커피 가격의 폭락으로 커피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옥수수와 콩, 사탕수수 등의 재배를 장려하고 있다. 커피 산업은 19세기 이후 브라질 경제를 뒷받침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 은, 다이아몬드, 철광석, 크롬 등이 있고, 석유와 천연가스도 풍부하다. 아마존에서 연간 60여 만 톤의 목재를 생산하는 임업 대국이기도 하다. 한편 사탕수수에 의한 바이오 에탄올 생산은 2007년 현재 내수를 감당하고도 남아 수출을 할 수 있는 품목이다. 브라질이 차지하는 세계 시장에서 바이오 에탄올 생산은 약 7% 이상에 이른다. 또한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수력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한편 브라질의 금융 시장은 점차 국제 금융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고 있다. 브라질 금융의 중심은 국제은행, 국내은행 그리고 주식시장이다. 특히 주식시장은 매우 투명하고 국제적 투자자의 높은 참여를 보여준다. 현재 브라질 중앙은행은 ‘Banco Central do Brasil’이다. 과거의 중앙은행은 1986년부터 그 기능을 상실했다. 또한 국제 자금은 브라질로 쉽사리 들어올 수 있다. 브라질 헤알화는 자유롭게 다른 통화와 환전할 수 있으나 정부는 중앙은행의 기능을 통해서 환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회와 문화

사회

브라질은 유럽계 백인, 혼혈인종, 아프리카계 흑인 및 기타 동양계 이민과 브라질 원주민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다인종 국가이며, 인종간의 혼혈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보편화되어 있어 인종적 편견이 상대적으로 적다. 백인은 포르투갈계와 기타 유럽계로 구분한다. 포르투갈계는 식민지시절부터 이주를 계속했으며, 브라질이 독립한 이후에도 상당히 많이 이주해 왔다. 독립 이후에는 포르투갈만이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많이 이주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들어왔다. 흑인은 식민지시절 들어온 노예의 후손이 많다. 그 밖에 중국계와 한국계도 있다. 2005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백인이 50%, 흑인이 6%, 혼혈인이 43%, 기타 1%이다. 브라질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주변에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아서인지 최근 스페인어 사용이 늘고 있으며, 이탈리어나 독일어도 쓰이고 있다. 

브라질은 부의 불균등한 분배가 심한 나라이다. 이것은 토지의 불균등한 분배와 연관되어 있다. 1998년에 이르기까지 농부의 2.8%가 농토의 57%를 소유한 대지주인데 반해서 농부의 90%는 농토의 22%를 소유할 뿐이다. 약 500만 가구의 농가가 소작농인 셈이다. 브라질에서 재생에너지의 이용을 위한 연구, 예컨대 수력발전소 건립에 이용되는 연구는 유명하며 자동차 공장도 매우 중요하다. 브라질 최초의 자동차는 1979년 알콜엔진을 단 것이었고, 엔지니어 빈센트 캄아르구Vincente Camargo는 2005년 최초의 알콜엔진을 비행기에 장착했다. 항공 연구는 브라질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는 분야이다. 빈부 격차가 심한 브라질의 범죄율은 세계 평균을 상회하며 전쟁 중인 국가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이다. 경찰은 특히 도시에서 살인, 납치, 강도, 조직적인 마약범 및 범죄단체와 싸워야 하는데, 경찰에 대한 처우가 매우 낮기 때문에 부패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문화

브라질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투피 과라니계의 원주민인 인디오와 유럽 및 아프리카, 아시아의 이민자 등이 유입되어 만들어 낸 다양한 모자이크라고 표현되곤 한다. 예로부터 음악과 건축,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 세계적인 뮤지션이나 스포츠 선수, 예술가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광고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02년 헌법은 국내 매체에 대한 외국 기획의 비율을 30%가 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브라질에는 약 650만부를 가진 530여 개의 일간지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폴리아 지 상파울루Folha de São Paulo, 에시타우 지 상파울루Esta de São Paulo, 오 지아O Dia, 오 글러부O Globo 등이다. 오 글로부는 글로보그룹에 속하는데, 브라질의 매체를 지배하며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선호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1997년에는 국영 라디오방송국이 세워졌는데, 2,900여 개의 사설 중개소 이외에 전 브라질에 7,000만 대의 라디오 수신기가 있다. 그 밖에 19개의 국영 및 250개의 민영 텔레비전 방송사가 있다. 텔레비전 보급률은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2003년 기준으로 약 90.3%의 가정이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의 미술은 종교에서 발생했다. 식민시절에는 성당 미술이 지배적이었다. 다양한 미사를 드리는 수많은 교회가 예술적으로 형성되었다. 목공, 석공, 화가 사이의 공동 작업이 매우 긴밀하게 이루어져서 색상의 선택도 서로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 교회 건물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이 있다. 유럽에서 이미 19세기 말에 나타난 인상주의가 점점 의미를 얻어가고 있다. 이 시기에 유명한 미술가는 아니타 말파티Anita Malfatti, 마누에우 산치아구Manuel Santiago, 죠세 판세티Jos’e Pancetti, 그리고 칸지두 포르치나리Candido Portinari 등이다. 포르치나리는 20세기 브라질의 최고 미술가로 여겨진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사회적 사실주의가 발달했다. 사회적 테마를 갖춘 포르치나리의 미술 작품이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오늘날 상파울루 비엔날레Biennale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미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전시회의 주안점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들의 회화에 있다. 리우데자네이루도 미술의 중심도시다. 인디안 미술은 매우 무상한 형태를 취한다. 보통 작품에서 형태에 색칠을 하는 데 며칠을 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칠한 색채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모자로 쓰이는 깃털 장식은 드물게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브라질의 음악은 포르투갈, 아프리카, 인디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식민시대 이전의 인디언 음악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568년에야 이에 관한 서술이 보인다. 당시 프랑스의 한 신부가 어떤 책에서 그곳으로 여행을 하다가 원주민의 춤과 노래를 들었다고 썼다. 음악은 유럽인 거주자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의 영향을 받아 변화되었다. 19세기 중반 이래 음악 생활은 브라질을 향한 유럽 이민자들의 러시에 의해서 새롭게 전개된다. 1930년대 다양한 음악 그룹이 결성되고 한 음악당이 리우에 세워짐으로써 대도시에는 많은 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수도 리우에는 유럽적, 특히 이탈리아적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브라질의 음악 형태는 삼바samba다. 그것은 아프리카 원주민 스타일의 음악에서 유래했다. 삼바는 매년 열리는 리우 카니발에 의해서 대중화되었다. 

브라질 문학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문서는 페루 파즈 지 카미냐Pero Vas de Caminha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에게 쓴 편지이다. 여기에는 1500년 경의 브라질이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에는 단순 조잡한 형식으로 역사를 다룬 무정형의 문학 시대였다. 1600년대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바로크 주의 영향으로 바로크문학이 유행하였고, 1768년부터는 전원주의 문학이 유행하였다. 이후 18세기와 19세기에 여행자들이 ‘포르투갈적 아메리카’와 그 주민들에 관하여 서술한 것이 식민시대의 브라질 문학을 형성하였다. 1822년 브라질 독립 전까지는 민족주의와 독립정신이 문학에도 반영되었으며,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후인 1836년부터 유럽의 낭만주의가 브라질 문학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 시기에 향토문학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 나왔다. 그리고 낭만주의에 이어 사실주의가 나왔고 상징주의와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의 흐름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브라질의 건축은 포르투갈을 모방하여 브라질 자연조건에 맞게 개조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1930년 이후 근대 건축이 도입된 이래 리오데자네이로시의 문교부 건물에 새로운 조형 미술을 결합하였다. 또한 수도 브라질리아의 도시계획 및 건축 설계, 근대미술관 설립 등을 통해 근대건축이 발전되어 왔으며, 브라질의 세계적인 건축가로는 유엔본부 건물설계 등을 맡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가 있다.

브라질의 스포츠는 축구와 배구, 모터 스포츠와 브라질 유술 등 격투기가 강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역시 축구다. 최초의 축구 경기는 1894년 열렸으며, 약 10년 후부터 최초의 선수들이 축구를 했는데, 유색인이었다. 브라질의 대표 축구팀은 월드컵 대회에서 5회 우승했으며, 이로써 세계 최고의 강팀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1회부터 본선에 연속 출전한 유일한 대표 국가이다. 1950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한 데 이어 2014년 6월에도 월드컵대회를 개최하였고, 2016년에는 리우 하계올림픽을 개최한다. 축구 선수도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와 레오, 자갈로, 가린샤, 펠레, 토스탄, 지코, 소크라치스, 호마리우, 카푸, 히바우두, 호베르투 카를로스,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등 수많은 선수를 배출하고 있다. 많은 축구 펜들은 펠레를 전무후무한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 

브라질의 음식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의 식사였다는 페이조아다와 목동의 고기 요리였다는 슈하스코, 바이아 지방의 무케카, 바타바, 카루루, 미나스 지방의 투투아 미네이라 등이 있다. 그 밖에 러시아 계열의 요리인 비프 스트로카노프도 브라질 풍의 요리다. 

브라질의 종교에는 특이한 것이 없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국민의 약 64.6%가 로마 가톨릭 신자이고 세계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데, 1960년에는 91%, 1985년에는 83%, 2003년에는 73.6%였다. 브라질 가톨릭은 아프리카의 종교적 전통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건너온 흑인들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토착 종교가 광범하게 융합되어 있다. 국교는 없으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브라질 성공회,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신자들도 있다. 최근 개신교도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나는데, 성령 운동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가 최대의 교파다. 이는 대부분 중남미 개신교회들의 특징이다. 개신교는 약 22.2%를 차지한다. 이 종파는 19세기 이래 독일의 방랑객과 더불어 유입되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특히 북미의 선교 교회가 세력을 떨치고 있다. 오늘날 브라질에는 약 35000개의 자유 교회가 있고, 약 0.3%는 칸돔블Candomble이나 움반다Umbanda와 같은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종교도 있다. 그 밖에 약 140만 명의 여호와 증인, 22만 5천명의 몰몬교도, 24만 5천 명의 불교도, 10만 7천 명의 유대교도, 3만 5천 명의 무슬림, 5500명의 힌두교도, 8%는 종교를 믿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

한국과 브라질은 1959년 10월 31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브라질은 한국에 대해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취해 왔다. 한국의 경제발전상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양국 간 보완적인 산업구조에 기초하여 실질적인 협력관계 증진을 희망하고 있다. 브라질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궁극적 통일을 위한 한국의 적극적 자세를 지지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남한과 북한 당사자 간의 대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향상되고, 한국의 2002년 월드컵 개최와 2004년과 2005년에 이루어진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 등으로 대對한국 인식이 제고되었다. 특히 교육과 경제 및 과학기술 발전에 관심이 많으며 상호보완적인 교류 증대를 희망하고 있다. 

2013년 기준 우리나라의 대對브라질 수출은 전년대비 5.8% 감소한 96억 8천만불을 기록했고, 수입도 전년대비 8.4% 감소한 55억 7천만불을 기록해 41억 1천만불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브라질은 우리나라의 12위 수출대상국이며, 20위 수입대상국이다. 대브라질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부품, 전자제품, 철강제품, 석유화학제품, 기계류, 섬유류 등이고, 주요 수입 품목은 농·축산물, 금속광물, 철강제품, 제지, 석유화학제품, 가죽제품, 전자부품, 임산물, 수산물, 화학제품, 기계류 등이다.

한국인의 브라질 이민 역사는 1918년, 재일교포 4세대 6명이 일본인 신분으로 브라질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956년에는 반공포로 50명이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도착했으며, 1961년에는 한백협회가 구성되어 이민을 추진했다. 1963년 2월, 한백협회의 주선으로 제1차 이민자 103명이 브라질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1970년 한국개발공사의 주선에 의해 제6차로 기술고용이민 허가 210세대 1,200명이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정착하기까지 일련의 이민 과정들이 이어졌다. 1970년도 이후에는 단체이민은 끝이 나고 개별적으로 기술, 취업, 초청 이민 등으로 1976년 말까지 상당한 숫자의 교민 이주가 성사되었다. 1976년 이후로는 브라질 정부의 이민법 강화로 인하여 직접이민이 대폭 감소했다. 현재 브라질은 기술 이민과 직계 초청 이민만을 허가하고 있다. 1980년도 이후에는 인접국인 볼리비아, 칠레, 파라과이, 수리남 등의 교민들이 남아메리카 최대 상업 도시인 상파울루로 재이주하고 있다. 2004년 10월 15일, 브라질 노동고용부 산하 국가이민위원회는 외국인 이민투자 한도액을 종전 미화 20만 달러에서 5만 달러로 하향 조정하는 법령을 발효시켰다. 이에 따라 향후 브라질로의 투자이민 증가가 예상된다. 

브라질 교민사회의 주요 행사는 1996년 9월, 김영삼 대통령이 상파울루를 방문하여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을 격려한 것이 시초다. 2003년 2월에는 브라질 한인 이민 제40주년 행사가 치러졌다. 2004년 11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8년 11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각각 상파울루를 방문하여 동포사회를 격려했다. 2009년 3월에는 브라질 한인 이민 제45주년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10월 1일에는 브라질 한인회 문화의 날 행사가 치러졌다. 2010년 1월 12일에는 브라질에 코리아타운이 공식 지정되었고, 2010년 5월에는 코리아타운 지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2011년 5월에는 한국 문화의 날 행사가 열렸으며, 2013년 3월에는 브라질 한인 이민 제50주년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2012년 기준 브라질 재외동포 수는 총 49,511명(상파울루 지역 46,600여 명, 리오데자네이로 360여 명, 브라질리아 150여 명, 여타 지역 약 2,400여 명)이며, 우리 기업이 진출한 지역(삐라시까바, 마나우스, 포르탈레자 등)은 일시 출장자 등으로 인해 유동인구가 많은 상황이다.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실용주의적 외교노선에 따라 우리나라와의 실질협력 증진을 중시하고 북한의 수교 제의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관계 변화에 따라 한반도 내 평화정착을 지원한다는 차원에서 2001년 3월 북한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브라질과 북한은 경제·통상 분야에서 실적 및 협력이 미미하며, 인적교류면에서 브라질 정부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한 사례가 수 건에 지나지 않으나 북한은 주로 외무성 및 노동자당 대표단을 빈번히 파견하여 브라질과 협력 강화를 추진했다. 브라질은 남북한 문제가 당사국간의 대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시험 시에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규정을 준수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필요한 협상에 적극 나설 것을 요청하며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했다. 브라질-북한 간 정상 교류는 전무하며, 양국 정책협의회가 2008년 평양, 2010년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바가 있다. 2013년 브라질의 대북한 교역은 수출 1,645만 달러, 수입 6,875만 달러이며, 2011년 6월 브라질 정부는 북한 등을 인도적 지원 목적의 식량 공여 대상 국가로 포함하는 법령을 공표하고, 2012년 WFP(유엔세계식량계획)를 통해 옥수수 16000톤, 콩 4600톤을 지원하였다.




브라질의 카니발Carnival 문화

정열의 나라 브라질을 상징하는 문화 코드 중 하나는‘ 카니발 Carnival’이다. 카니발이란 흔히‘ 축제’와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으나, 본래는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부활절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고 회개하며 금식을 행하는 40일간의 사순절四旬節 직전 3~7일에 걸쳐 행하는 제전祭典, 즉‘ 사육제謝肉祭’를 뜻하는 말이었다. 사육제란 라틴어‘ 카르네 발레Carne Vale(고기여 안녕)’ 또는 ‘카르넴 레바레carnem levare(고기를 먹지 않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순절 기간 동안 못 먹는 고기를 그 전에 마음껏 즐기자는 뜻을 담고 있다.

카니발은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서 탄생하였으나 현재와 유사한 형태는 중세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지금은 영국, 독일, 스페인,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남미의 브라질을 비롯한 콜롬비아, 페루, 우루과이 등 많은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 카니발은 브라질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를 잡았는데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 살바도르Salvador, 상파울루SãoPaulo 카니발이 가장 유명하며, 특히 2013년 카니발에는 한인이주 50주년을 맞이하여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루에서 한국을 주제로 한 카니발이 있었고, 리우 데 자네이루와 살바도르 카니발에는 한국 가수 싸이가 등장하여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브라질의 카니발 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바samba이다. 삼바란 아프리카와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는 브라질의 음악 장르 또는 그 리듬에 맞추어 추는 춤을 말한다. 삼바의 기원은 아프리카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던 바이아Bahia 주에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이 고된 노동을 이겨내기 위해 추는 춤이었다고 하는데, 점차 그 리듬이 대중적으로 변화하면서 지금과 같은 음악과 춤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강렬한 삼바의 리듬에 맞추어 추는 삼바춤은 브라질 사람들의 열정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브라질에서 카니발은 매년 30만 명의 고용과 10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창출하는 문화산업이다. 보통 50달러에서 2000달러까지 다양한 입장료 수입만 10억 달러가 넘고 음료 판매량도 2000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반면 카니발의 이면에 도사린 사회 문제들도 있다. 카니발 기간 동안에는 범죄율이 더 높고 지나친 음주와 잘못된 성 문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특히 카니발 기간에 더욱 심각한 추세이므로 브라질 정부도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여러 대책들을 강구하고 있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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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유럽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유럽’으로 불리는 나라다. 동일한 유럽의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는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아르헨티나는 원주민의 비율이 현저히 낮고 유럽계 백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여 문화도 유럽풍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축구에 열광하고 탱고 춤의 본산지이며 최근 한국을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출생국이기도 하다. 근대사에 있어서 많은 부침을 겪은 아르헨티나는 서민의 우상 ‘에바 페론’과 불세출의 혁명가 ‘체 게바라’라는 두 영웅의 이야기가 세월과 함께 회자되기도 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국가이다.

김현일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아르헨티나Argentina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에서 동쪽의 대서양과 서쪽의 안데스 산맥 사이에 위치하는 큰 나라이다. 현재 인구는 남한보다 적은 4,300만 정도이지만 영토 면적은 한반도의 약 열두 배인 278만㎢나 된다. 이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 남미에서는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면적이다. 국토가 상하로 길게 뻗어 있어 남북 최장거리는 3,700㎞, 동서 최대거리는 1,700㎞에 달하고, 고원지대와 사막을 포함하여 열대우림에서부터 한랭지대까지 전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기후지역을 갖고 있으며, 북쪽으로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북동쪽으로 브라질과 우루과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칠레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남극 중 97만㎢의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파라과이와 브라질에 가까운 북부 지방은 열대와 아열대 기후가 나타나는 곳으로 면화와 사탕수수가 주로 재배된다. 남쪽으로는 남극권까지 영토가 길게 뻗어 있다.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곳이 파타고니아 지방인데 위도가 높아 빙하가 다수 존재한다. 그 남쪽에는 마젤란 해협이 있고 해협 너머로는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가 있다. 그 가운데 큰 섬은 남한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데 서쪽은 칠레, 동쪽은 아르헨티나 영토이다. 기후는 극지방의 특성을 나타내지만 원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칠레와의 경계에 안데스 산맥Andes Mountains이 있는데 6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최고봉은 멘도사 시에서 100여㎞ 떨어져 있는 안데스 산맥의 아콩카구아 봉Cerro Aconcagua으로 높이가 거의 7000m에 달한다. 이 봉우리는 남북아메리카를 통틀어 가장 높다. 

사막도 몇 개가 있는데 안데스 산지에서 가까운 몬테 사막Monte Desert, 남쪽의 파타고니아 사막Patagonia Desert 등이 있다. 사막이 생긴 것은 높은 안데스 산맥이 태평양으로부터 오는 습기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파타고니아 사막은 예전에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막에는 숲의 화석들이 많이 발견된다. 

오늘날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이 있는 곳은 라 플라타 강La Plata River 연안이다. 200여㎞ 길이에 불과한 이 강이 엄밀한 의미의 강인지 아니면 바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정도로 그 폭이 넓다. 파라과이 쪽의 파라니아 강과 우루과이 강이 합류하여 만들어진 이 강은 강폭이 좁은 곳은 2㎞ 정도지만 넓은 것은 그 폭이 200㎞가 넘는다. 라 플라타 강은 스페인어로 ‘Río de la Plata’, 즉 ‘은(銀: silver)의 강’이라는 뜻이다. 강물 빛이 은빛이라서가 아니다. 당시 스페인인들 사이에서는 은이 엄청나게 많이 나는 땅이 강의 상류 먼 곳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강의 하구에서 1500㎞를 거슬러 올라가면 볼리비아의 포토시 광산이 있다. 안데스 산지의 이 광산은 16세기 중엽부터 엄청난 양의 은을 토해낸 곳이다. 유럽인 탐험가로서 스페인 왕실의 명으로 이 지역을 탐사하였던 세바스티안 카보트Sebastian Cabot가 은이 많이 나는 지역이 근처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강 이름을 ‘은의 강’이라 불렀던 것이다.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이름도 은銀을 뜻하는 라틴어 ‘아르겐툼ărgéntum’에서 온 것이다.

이 라 플라타 강 남북으로 팜파스Pampas라고 불리는 광활한 초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중부 지역을 차지하는 이곳은 면적이 무려 75만㎢에 달하는데 북쪽으로는 파라과이와 우루과이는 말할 것도 없고 브라질의 일부도 포함된다. 기후는 온난하고 강우량도 500~1200㎜ 정도로 농업에 적당하다. 목축은 말할 것도 없고 밀과 다른 농작물 재배에 유리한 지역이다. 오늘날 팜파스 지역은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한 농업의 중심지이자 제조업 또한 발달해 있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중심지로 작용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역사

스페인 식민지 시대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00년밖에 되지 않지만 독립 이전에는 약 300년간 스페인 왕의 영토였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더불어 남아메리카를 나누어가졌다. 포르투갈은 오늘날의 브라질 지역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스페인의 차지였다. 아르헨티나 지역은 1516년 스페인 항해사 후안 데 솔리스Juan de Solis에 의해 발견된 후 1580년 스페인 식민이 시작되었다. 당시 스페인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오늘날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가 들어서 있는 라 플라타La Plata 강 연안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이곳에 정착촌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원주민들의 반발로 쉽지 않았는데 금이나 은 등 자원이 많아 굳이 정복을 강행할 대상 지역도 아니었으므로 아르헨티나는 16세기 내내 스페인 식민지 변경 정도의 취급을 받았고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토지는 광대하고 비옥하였지만, 이곳에 정착해서 살려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인구는 오랫동안 매우 희박하였다. 

라 플라타 지역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관심이 급상승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페루를 관할하고 있던 스페인 총독의 지배를 받으며 페루와 인접한 북서쪽 지역(투쿠만Tucuman, 코르도바Cordoba 등)이 교역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정도였으나, 177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아르헨티나 총독부가 독립하여 설치된 후부터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유럽과의 중심 무역항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에 오랫동안 스페인과 대립관계에 있던 영국과 그 동맹국 포르투갈이 라 플라타La Plata 지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자 스페인 당국은 군사적인 이유에서 라 플라타 지역을 새로운 부왕령(총독부)으로 독립을 시킨 것이다. 스페인의 관리들이 몰려들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도 번창하게 되었다. 기존에 페루를 경유하여 교역을 하도록 제한했던 스페인 정부의 상업정책도 바뀌어 스페인 식민지 내의 다른 항구들로부터 직접 선박이 물건을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으로 들어올 수 있게 허용하였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 지역의 경제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인구가 늘고 산업활동도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구는 1750년 12,000명 정도였는데 1800년에는 5만으로 늘어났다. 

독립과 국가 형성기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스페인의 부왕체제가 붕괴(5월 혁명)되고 1816년 투쿠만Tucuman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Las Provincias Unidas del Rio de la Plata)를 결성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었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는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의 동맹국을 공격한다는 입장에서 스페인의 영토인 라 플라타 지역을 몇 달간 점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왕의 백성들인 이들 현지 주민들은 스페인 주둔군과 힘을 합해 저항하여 영국군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군사적 저항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 아메리카 현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인 크리오요Criollo들이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자신감을 얻어 내친 김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수년간에 걸친 독립전쟁(1810~1817)이 일어났다. 이 독립전쟁은 라 플라타 지방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었고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오늘날의 아르헨티나인들이 독립 영웅으로 여기는 호세 데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칠레와 페루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함으로써 스페인은 1817년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마르틴 장군에 의해 칠레와 페루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물론 새로이 탄생한 나라는 오늘날의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큰 나라로서 남아메리카 연합제주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1811년 파라과이가 떨어져나가고 1825년 볼리비아가 떨어져나갔으며 우루과이 역시 아르헨티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후 브라질에 합병되었다가 1828년 영국의 중재 하에 양국 사이의 완충국이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렇게 하여 새로운 나라로 탄생한 것이다. 

독립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함하는 전지역 합병을 주장하는 중앙집권주의자(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의 상업자본가)와 현상유지를 지지하는 연방주의자(서부 내륙지방 군벌, Caudillo) 간의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어 쿠데타와 반란이 빈발하였고 심지어는 내전도 몇 차례 벌어졌다. 양측의 대립으로 인해 국가원수가 없이 주provincia 연합이라는 형태로 국가를 유지(1831~1852)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지사가 외채관리와 대외관계를 맡았지만 국가원수는 아니었다. 

연방정부의 출범과 발전
1853년 아르헨티나는 내전 끝에 연방헌법(임기 6년의 대통령제 및 양원제)을 제정함으로써 지방 군벌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연방주의적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후스토 호세 우르키사Justo Jose Urquiza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함하는 최초의 단일 연방국가 탄생은 1861년 바르톨레메 미트레Bartolomé Mitre 장군의 대통령 취임으로 실현되었다. 독립 이후 반세기만인 미트레 대통령 재임 중에 비로소 국고, 관세청, 국민군, 민법전 등 국가의 구성 원칙들이 반포되고 제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시가 주에서 분리, 연방수도가 되면서 실질적인 아르헨티나 연방정부가 출범하였고, 1880년 이후 1930년대까지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서 농목축업에 기초한 곡물 및 육류의 유럽 수출로 거대한 국부를 축적하여 세계 5대 경제 부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외국 자본(특히 영국 자본 등)의 투자에 의해 철도, 도로, 전기, 통신 등 국가 기간시설들이 건설됨에 따라서 외국자본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수출의 감소와 농촌인구 도시이주 및 노동 빈민계층의 형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증대와 국가주의 의식 확산 등 여러 가지의 사회정치적인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페론Peron과 군사정부
1943년에 국가주의적 의식을 가진 청년장교 중심의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로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 대령이 부통령 겸 노동장관으로 취임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1946년 6월 대통령에 취임한 페론은 재임 기간 중(1946.6~1955.9) 서민 대중과 노동자들의 경제적 지위 및 복지 향상을 표방한 페론이즘Peronism정책을 추진(1949년 헌법개정)하는 한편, 수입 대체 산업육성을 위한 공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페론 대통령은 1955년 군부 쿠데타로 스페인으로 망명하였다가, 1973년 대통령으로 다시 복귀했으나 1974년 7월 서거하여 3번째 부인이자 부통령이던 마리아 마르티네스 페론María Estela Martínez de Perón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보통 ‘이사벨Isabel’이라는 예명으로 불리는 마르티네스 페론은 이로써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군부독재시대
하지만 1976년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도 실각하고 호르헤 비델라Jorge Rafaél Videla 군사평의회의장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비델라 정권은 곧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실상 헌법을 정지시켰으며, 의회해산, 노조활동 금지 등 좌익인사와 노동운동가에 대한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 불리는 탄압 정치와 함께 반정부 인사 납치·살인 등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군부통치 기간에 실종자만 최하 9천명에서 높게는 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부 정권은 1978~1980년 사이에 금융자유화, 무역자유화 등 대외개방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이로 인해 과도한 외자도입이 이루어진 결과 외채 증가 및 대규모 금융파동이 발생되고 경제혼란이 야기되었다. 1981년 3월에는 로베르토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 Redondo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8개월 만에 사임했고, 그해 12월 레오폴드 갈티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82년 4월에 말비나스Malvinas(포클랜드Falkland)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과 전쟁을 벌이다가 175일 만에 패전하였고, 당시 경제 상황이 외채 450억 달러, 인플레이션 430%에 달할 만큼 악화로 치달았으므로 정치 사회적 국정 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이어 1982년 7월에 레이날도 비뇨네Reynaldo Bignone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국민들의 민정이양 요구로 1983년 10월 총선거를 실시해 같은 해 12월 혁신당UCR의 라울 알폰신Raul Ricardo Alfonsin이 대통령에 올랐다. 

군부 통치 기간 중인 1960년대에는 인민혁명군ERP이라는 이름의 좌익 게릴라 집단이 태동되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대기업 경영자, 군부인사들을 납치 살해하는 등 도시게릴라로서 활동하였는데 쿠바의 지원을 받았다. 1983년 군부 통치의 종식과 함께 이들의 게릴라 활동도 차츰 사라졌다. 

민주주의 회복과 메넴 정부
알폰신 대통령 취임과 민간 정부의 출범은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는 했지만, 인권위반 조사를 둘러싸고 벌인 군부와의 마찰과 노조 파업 등 사회적 혼란으로 초인플레(1989년 4,900%)가 발생하고 서민층의 폭동과 약탈 사태 등이 이어져 알폰신 대통령은 5개월을 앞당겨 조기 정권이양을 단행했다. 그 결과 1989년 7월 정의주의당PJ(일명 페론Peron당)의 카를로스 사울 메넴Carlos Saul Menem이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는 화폐를 개혁하고(austral에서 peso로) 고정환율정책(미 달러와 페소화의 환율을 1:1로 고정), 시장 개방조치 등 물가안정 정책과 및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집권 2기(1995. 5월 재선)에 들어 고정환율정책의 부작용과 방만한 경제운영으로 재정적자 확대를 초래하였다. 

루아 대통령의 하야 및 디폴트 선언
1999년에는 혁신당UCR과 국가연대당(Frepaso당)의 연합야당(Alianza) 후보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Fernando de la Rúa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하지만, 2001년 12월 긴축재정 정책의 일환으로 예금인출 제한조치가 실시되자 피케떼로Piquetero 운동(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으로 특히 실업자운동의 대표적 투쟁방식)이라 불리는 과격한 민중시위에 의해 루아 대통령은 결국 하야하게 되었으며, 아르헨티나는 1,32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에 대한 디폴트default(채무불이행)를 선언함으로써 국가 부도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아르헨티나 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는 루아 대통령의 잔여임기 기간 동안의 임시대통령으로 에두아르도 두알데Eduardo Duhalde 상원의원을 선출했다. 두알데 대통령은 절박한 경제난 타개를 위해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의 구제금융 지원 획득을 위한 교섭과 정치안정에 주력하면서 2002년 1월 고정환율 정책을 폐지하고 평가절하를 추진(1미불=1페소를 1미불=3페소로)하였으며, 예금동결 해제 방안으로 예금의 강제 채권화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예금주들의 강력한 반발과 의회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법안 제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동결된 예금의 즉각적인 반환을 요구하는 시위와 연이은 각종 시위의 발생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2002년 6월에는 시위대와 경찰 간에 유혈충돌 사태가 발생하였다. 두알데 대통령은 경제사정 악화에 따른 사회불안과 IMF와의 교섭부진 등 총체적 위기 극복을 위한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2003년 대통령 선거 실시와 정권교체 계획을 발표하였다. 

키르츠너Kirchner와 페르난데스Fernandez 정부 
2003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과 여당의 네스토르 키르츠너Nestor Kirchner 산타크루스 주지사가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키르츠너 대통령의 부인인 정의주의당PJ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 상원의원이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아르헨티나 역사상 직접 선거로 당선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고, 선거를 통한 부부 간의 정권 이양을 실현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직선 부부 대통령이라는 진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취임 초기 60%대 이상의 지지율을 보였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08년 3월 곡물류에 대한 변동 수출세 부과로 시작된 정부와 농업계간의 갈등, 지속적인 인플레이션과 경제활동의 둔화로 생긴 페론당 내의 반대 여론과 함께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통치 스타일에 대한 중산층의 거부감 등이 겹쳐서 신뢰도가 하락하였으며, 2009년 중간 선거에서 야당에 참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2010년 10월 집권 정의당 총재이자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부군으로서 사실상 통치권력의 핵심역할을 수행해 오던 키르츠너 전대통령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서거한 직후 페르난데스 대통령에 대한 동정 등 요인으로 지지율이 급상승하였고 국제곡물가 상승에 따른 경기 호황도 정국의 안정 및 페르난데스 정부 지지율 상승에 기여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2011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여 중남미 국가 중 연임에 성공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아르헨티나는 연방공화국 체제로서 각 주의 자치권을 대폭 인정하면서도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연방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3권분립 원칙에 따라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각각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존재한다. 19세기 초 형성된 강력한 주州중심의 연방체제는 1930년대 이후 수입대체산업화 과정에서 약화되면서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1970년대 군사정부 및 1980년대 민간정부 출범 이후 지방분권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행정부는 3권분립 원칙하의 대통령 중심제로서,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이며 군 최고 통수권자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고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으며, 중임제한 규정은 없다.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직한다. 2014년 9월 현재 대통령은 페르난데스C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이다. 

입법부

아르헨티나의 연방의회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며, 상원은 개별 자치주(또는 자치도시)를 대표하고 하원은 국민을 대표한다. 상원 의석은 72석이고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6년이다. 각 자치주(또는 자치도시)별로 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매 2년마다 선거를 실시하여 의석의 1/3을 교체한다. 상원은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고위 군 간부, 대사, 대법관, 연방법원 판사 후보 등의 임명에 대한 승인권과 대통령, 수석장관, 행정 각부의 장관 및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 

하원 의석은 257석이고 인구 비례에 의한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인데 매 2년마다 선거를 실시하여 의석의 1/2을 교체한다. 하원은 예산안 승인 및 조세부담이 있거나 병력 소집을 요하는 법안을 발의할 권한을 지니며 이러한 법안들은 하원의 의결을 거친 후 상원에 상정된다. 또한 대통령, 수석장관, 행정 각부의 장관 및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 발의권을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 의회는 연방헌법 제75조에 따라 무역세 부과 및 관련 규정 제정, 조세의 신설 및 폐지, 연방 세입 시스템의 설정, 외채의 도입 및 상환, 정부 예산의 확정, 필요시 지방 정부 정책에 대한 연방 정부의 개입 명령, 아르헨티나 군대의 파견 및 외국 군대의 아르헨티나 주둔, 국경선 획정, 조약의 승인 등에 관한 사항을 의결한다. 

주요 정당으로는 정의주의당PJ(Partido Justicialista, 일명 Perón당), 혁신당UCR(Unión Cívica Radical), 사회당Partido Socialista, 시민연합당Coalición Cívica, 공화당PRO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제도는 연방법원과 주법원이 공히 3심제(1심, 항소심, 대법원)로 운영된다. 법원의 체계는 국가의 최고 법원인 연방법원과 주州법원으로 구성되며, 연방법원은 국가적인 사안이나 서로 다른 주나 주민들이 상호 당사자인 사안을 관할한다. 또한 1994년 개정 헌법에 의해 창설된 사법위원회Consejo de la Magistratura는 연방판사 임명 및 징계 등 사법부 운영을 관장하는 기구인데, 2006년 당시 키르츠네르 대통령이 위원회 규모를 20명에서 13명으로 축소함으로써 동 기구의 친여 성향이 강화되었다. 

행정구역

아르헨티나는 23개주, 1개 자치시(부에노스아이레스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는 독자적인 행정부, 사법부 및 입법부를 운영하고 있다. 

경제

아르헨티나의 경제현황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GDP 교역 면에서 멕시코·브라질에 이어 3위의 경제대국이고 스페인어권 남미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8위, 남미 2위의 국토면적을 가진 아르헨티나는 전국토의 60%(1억 7,000만ha)가 농업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대평원 지대(팜파스Pampas)여서 ‘목축의 천국’이라 불리우며 전통적으로 농목축업 중심의 경제를 영위하여 왔다. 1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대규모의 유럽 이민자들이 유입되며 농업발전이 본격화되어 한때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농업국가로서 쇠고기와 밀 뿐 아니라 대두와 옥수수, 해바라기도 유명하다. 

우호적인 자연조건으로 세계적인 농업국가가 되었지만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아르헨티나 100대 기업 가운데 70 퍼센트 이상이 외국계 기업이라고 하니 제조업의 취약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공산품은 대부분 외국에서 직접 수입하거나 국내에 투지한 다국적 기업의 생산에 의존한다. 유통업도 1990년대 이후 카르푸, 월마트 등의 다국적 대형유통업체들이 진출하여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계 연쇄점들도 그 수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또한 풍부한 자원과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광물자원(금, 은, 동, 납, 아연, 리튬 등) 잠재보유량은 세계 6위이며, 자본 부족으로 전체 국토의 75% 지역이 미개발된 상태에 있다. 현재 칠레, 볼리비아 국경과 인접한 길이 4,500㎞에 달하는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다양한 탐사 및 채굴 활동이 진행 중이다.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으로 노동권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로 노조 활동이 활발하여 생산활동에 많은 애로 사항이 존재한다. 노사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정부, 법원은 대부분 근로자의 입장에서 법규를 해석하며, 사용주의 해고 비용이 매우 높은 실정이다. 2011년 아르헨티나의 최저임금은 2,300페소(약 547달러)로 중남미 최고 수준이다. 

아르헨티나의 외채 딜레마

아르헨티나 경제가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외채 문제이다. 아르헨티나는 다른 남미국가들처럼 독립전쟁 시기부터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여 유럽 은행들로부터 돈을 끌어다 썼다. 독립 직후에는 철도나 항만 등을 놓기 위한 개발자금을 위해 외채에 의존하였다. 아르헨티나가 외채를 갚지 못할 정도로 경제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군부독재 시절이다. 과도한 외자유치, 부실기업에 대한 공적 자금 투입 등으로 외채가 급속히 늘어났다. IMF의 구제금융 지원까지 받으며 분투를 벌였지만, 결국 2001년 외채의 상환을 중단한다는 디폴트 선언을 하였다. 그 뒤를 이은 긴축정책에 따른 대규모 정리해고, 페소화 평가절하, 월급 및 연금의 공채지불 등으로 빈곤층이 급속히 늘어났다. 2003년에 취임한 네스토르 키르츠너Nestor Kirchner대통령은 환율의 평가절하 정책과 함께 수입대체산업 육성으로 수입을 억제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경제를 안정시키고 외환 사정도 호전시킨 결과, 2006년 IMF 차관 95억 달러를 조기상환하였다. 그 전해에는 채권자들의 대다수와 협상을 벌여 2001년 디폴트 선언된 외채의 3분의 1만 상환하는 것으로 외채조정에 성공하였다. 2005년과 2010년에 실시된 부채 스와프(서로 다른 금리 또는 통화로 표시된 부채를 상호 교환하는 거래)에서 부채액의 약 93%(US 758억 달러)를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채권 재조정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던 NML Capital 등 미국의 일부 채권자(헤지펀드)들은 미국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자신들은 그 협상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자신들의 외채 전액을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액수는 원금과 이자를 합해 15억 달러 정도이다. 이 미국의 헤지펀드들은 2008년에 해당 아르헨티나 국채를 4,870만 달러에 사들였다. 부도난 아르헨티나 국채에 투자하여 엄청난 돈을 번 것이다. 양측이 벌인 여러 차례의 협상이 결렬되고 항소 끝에 미 대법원은 “아르헨티나 정부는 2010년 부채 스와프 당시 참여하지 않은 NML Capital 등에게 15억 달러를 배상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탐욕스런 미국 헤지펀드들의 외채 전액 상환요구를 거절하고 2014년 7월 31일, 13년만에 다시 디폴트default(국가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지난 2001년의 디폴트 선언과 달리 이번에는 정부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음(2014년 7월말 현재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고는 305억 달러)에도 불구하고 디폴트를 선언한 것이어서 그 양상이 조금 특별하다. 아르헨티나의 채무조정 채권에는 ‘채권자 동등 대우 조항(RUFO)’이 명시돼 있는데, 이 조항에 따라 아르헨티나가 미국 헤지펀드에 채무액 전액을 물어줄 경우 채무를 재조정한 나머지 채권단에게 빌린 돈 역시 전액 갚아야 한다. 이것이 아르헨티나가 빚을 청산하는 대신 디폴트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 할 수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 정부는 미 법원의 판결로 인해 집행하지 못했을 뿐, 디폴트의 직접적인 이유라 할 수 있는 국채 이자 5억3900만 달러를 이미 대외결제은행에 예치했기에 자국의 상황을 디폴트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딜레마에 빠진 아르헨티나가 향후 모색해 나갈 전략과 협상 방안 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유럽인이라는 기층 의식

아르헨티나인들은 팜파스 지역의 넓은 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주로 도시에 몰려 산다. 도시에 사는 주민의 비율은 90% 정도로 영토가 좁은 남한과 비슷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 전체 4천만 명 중에서 1,700만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도 유독 유럽계 백인의 비중이 높은 나라이다. 중남미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아르헨티나가 원주민들의 비율이 낮은 이유는 원래 이곳이 유목생활을 하던 소수의 인디오들만 살던 곳이기도 하지만 스페인인들의 군사적 공격과 노동력 착취, 유럽으로부터 도입된 전염병 등으로 인해 원주민 인구가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원주민은 주로 북부 지역에 산다. 노동력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는 유럽의 이민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1860년부터 1910년까지 3백만 명 이상의 유럽인이 이민을 왔다. 최근에는 중국인들도 많이 이민을 가고 있지만 아르헨티나 국민 중 유럽계 백인의 비중은 97% 정도에 달하며 대부분 이태리계 및 스페인계이다. 그래서 유럽인이라는 의식이 아르헨티나인들의 의식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들도 유럽식 건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레콜레타Recoleta 지역은 파리를 옮겨놓은 것처럼 프랑스풍의 건물과 식당이 밀집해 있다. 이곳에는 국립미술관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 수준 높은 묘들이 많이 있는 레콜레타 묘지가 위치해 있다. 에비타 페론의 묘도 이곳에 있는데 예술성이 높은 묘들 때문에 이 묘지는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이다.

종교와 문화 형태

아르헨티나는 식민지 시대 이후 가톨릭이 주된 종교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2014년 8월 한국을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본명 Jorge Mario Bergoglio)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1282년 만에 선출된 비유럽 출신 교황이자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첫 미주 출신, 첫 예수회 출신 교황이라는 기록을 지니고 있다. 아르헨티나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이지만 교회출석자는 20%도 되지 않는다. 유럽처럼 종교적 열정이 식어가는 것이다. 현대 유럽인들은 종교에 대한 열정을 이제는 다른 곳에 쏟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럽인의 후손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 축구를 좋아한다. 아니 축구에 열광한다. 축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국민들의 사랑을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월드컵에서 두 번 우승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되었던 1978년 대회와 멕시코에서 개최되었던 1986년 대회에서였다. 유명한 마라도나Diego Maradona가 활약한 것이 멕시코 대회였다. 축구천재 마라도나는 16세에 벌써 국가대표선수가 되었는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아르헨티나의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그 때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처럼 아르헨티나는 독일과 맞붙었는데 아쉽게도 1대 0으로 패했다. 

아르헨티나 축구팀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곳이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 클럽이다. 보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네로 원래 항구가 있던 곳이다. 지금도 서민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지만 예전에도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출신의 세 형제가 이곳에서 만든 축구 클럽이 보카 주니어스였고, 마라도나도 이 팀 출신이다. 보카 주니어스와 라이벌이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누네스 지역을 근거로 한 리버 플레이트River Plat 클럽이다. 이 두 팀의 경기는 ‘수페르클라시코’라고 해서 최고의 경기로 여겨진다. 두 팀 모두 영국식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은 20세기 초 축구가 전파된 것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 정착한 영국인 노동자들로부터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탱고Tango라는 춤으로도 유명한데 남녀간의 노골적인 성욕을 포현하고 있어서 보고 있노라면 좀 낯이 뜨거워지는 춤이다. 이 춤도 보카 주니어스처럼 19세기 말에 서민들의 동네 보카 지역에서 탄생하였다. 원래는 남자끼리 추는 춤이었으나 점차 남녀가 짝을 지어 추는 춤으로 변했다. 탱고가 지금처럼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이 춤이 프랑스로 전파되어 그곳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음식은 문화의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아르헨티나는 소가 많이 사육되는 나라라서 쇠고기를 많이 먹는다. 소갈비를 큼직하게 잘라 소금을 뿌려서 구운 요리인 ‘아사도Asado’가 유명한데 흔히 와인과 함께 먹는다. 아르헨티나의 와인은 우리나라에도 최근 칠레 와인과 함께 많이 수입되고 있는데 안데스 산지에 인접한 멘도사Mendoza 주에서 많이 생산된다. 이 지역은 1000m에 가까운 고지대로 와인 생산에 적합한 기후를 가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마테 차Mate Tea도 우리나라에서 건강음료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감탕나무 과에 속하는 식물에서 딴 잎을 볶아 만든 차이다. 마테는 원뜻이 표주박이라고 한다. 표주박을 자른 그릇으로 먹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차를 만드는 방법은 우리나라의 녹차와 비슷하다. 미네랄과 비타민이 풍부해서 남미인들이 많이 마시는 음료이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관계

아르헨티나는 1962년 한국과 국교를 수립한 이래 전통적으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UN 등 각종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지지하고 있다. 남북 당사자간 직접 대화를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지지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과 한국의 경제발전 및 경제위기 극복을 높이 평가하고, 양국간 통상, 경제협력, 투자, 기술이전 등 실질협력관계 심화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의 아주지역 제3위 교역국이며, 양국간의 교역액 추이는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이전인 1997년에 9억 달러를 기록한 후 계속 감소하다가 2003년 이후 반전되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2013년 현재 양국 교역규모는 약 22.6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대對아르헨티나 주요 수출(10.7억 달러) 종목은 자동차, 무선통신기기부품, 액정디바이스, 폴리에스 테르수지 등 공산품이며, 한국 브랜드 핸드폰, 가전제품 등은 주로 브라질, 멕시코 등을 경유하여 수출이 이뤄지고 있다. 또한 주요 수입(11.9억 달러) 종목은 대두유, 동광, 박류, 사료, 가죽, 원유, 은 등 농산물 및 원재료 중심인데, 특히 대두유 수입량의 70~80%를 아르헨티나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한국의 아르헨티나에 대한 투자 진출은 아직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에너지·자원 분야와 문화 교류 분야 등에서는 양국이 비교적 활발한 협력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아르헨티나 이주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반공포로로 석방된 후 아르헨티나를 택한 반공포로 12명(현재 2명 생존)이 현지에 도착해 정착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후 1965년 대한민국 최초의 농업이민단 18세대(93명)가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에 도착 후 라 마르께 농장에 정착하면서 한국인의 아르헨티나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66년 파라과이 등지서 교포들이 대규모로 재이주하여 집단 거주를 시작하였고, 1970년엔 해외개발공사 추진으로 취업이민이 성사되었다. 1984년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지에서 재이민 교포가 급증하였으며, 1985년에는 한-아르헨 양국 간에 투자이민을 허용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5년에는 한국과정 6년제의 아르헨티나 한국학교가 개교하였고, 1999년에는 아르헨티나과정 7년제의 한국학교가 문을 열었다. 2005년 10월에는 아르헨티나 이민 4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아르헨티나의 한국인 거주 지역은 플로레스Flores(일명 109촌), 아베쟈 네다Avellaneda, 온세Once 등 3개 지역에 밀집되어 있고 교민 수는 1980년대 중반부터 크게 늘어 한때는 3만6천명에 달하고 코리아타운도 형성되었으나 장기간 계속된 주재국 경제불황으로 상당수 교민이 본국, 미국, 멕시코, 브라질 등으로 재이주하여 1만5천명 선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2003년 무비자 입국 조치 이후에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서서 2011년 현재 교민은 약 2만 내지 2만5천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유의 근면함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쌓은 한인 이주민들은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학력 인정을 받는 한국 학교, 한국 병원, 한인 골프장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우리 교민의 대부분은 원사 공장을 제외한 원단생산, 의류 봉제, 도·소매업, 수입업 등 섬유 의류에 관련된 전후방 연관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 이민역사 46년이 되면서 교민들의 높은 교육열로 1.5세대 내지는 2세대들이 현지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약 100여 명이 전문인(회계사, 변호사, 의사, 치과의사)으로 활동하면서 현지 주류 사회에 진출해 있는 상태이다. 



에비타의 주인공, 에바 페론Eva Peron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두고 떠나지 않아요.....) 

이것은 1978년 런던에서 초연이 되고 미국에서도 공연 및 리바이벌이 된 바 있는 뮤지컬 ‘에비타EVITA’에서 여주인공 에비타가 부르는 대표곡 가사이다. ‘에비타’(꼬마 에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불린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이 영부인에 오르고 난 뒤 발코니에서 대중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대중들을 높이며 부르는 유명한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노래의 주인공 에바 페론Eva Peron(본명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Maria Eva Duarte)은 1919년 아르헨티나 시골마을 대지주인 아버지와 그의 가정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온갖 역경과 풍파를 겪고서 극적으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인물이다. 15세 때 성공을 꿈꾸며 과감히 가출을 한 에바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출하여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영화배우에 도전하였지만 단역과 조역 배우를 전전하다가 여러 남자들을 편력해가면서 점차 배우와 성우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데, 25세였던 1944년 지진 자선행사에서 군부의 권력자요 ‘통일 장교단’의 리더였던 49세의 후안 페론Juan Domingo Peron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후안 페론은 국가 사회주의의 성격을 띤 ‘페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동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권을 잡은 반 페론주의자들에 의해 후안 페론이 구금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에바 페론은 정치적이고 선동적이며 설득을 할 줄 아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후안 페론의 석방운동을 벌였다. 자신의 출생과 가난 및 인생 역정의 스토리가 노동자들과 빈민들에게 동질감을 안겨주었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연설을 통해 노동자들을 부추겨서 총파업을 일으킨 결과 파업 10일 만에 후안 페론은 전격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후안 페론은 1945년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며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은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에바 페론의 인기 덕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은 외국자본의 추방, 기간 산업의 국유화,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입법 추진, 노동자 생활수준 향상,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의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획기적인 정책들을 내세우며 정권유지를 도모했는데, 그의 뒤에는 에비타가 있었다. 

에비타(에바 페론)는 에바 페론 재단을 만들고 여성 페론당을 창당하였으며 노조들을 장악하고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의욕적이고 거침없는 활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아르헨티나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을 벌이면서 성녀聖女를 자처하였고,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식량 배급, 위생 시설 등을 전격 지원함으로써 노동 계층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가는 곳에는 항상 지지자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에바 페론은 1952년 척수 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34세의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 달간의 장례식 동안 에바 페론의 빈소는 국민들이 바친 꽃으로 뒤덮일 만큼 아르헨티나 대중들은 거의 광적으로 에비타를 애도했다. 

에비타는 한편으로 ‘국민들의 성녀’, ‘국민들의 영웅’이라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실질적인 나라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포퓰리즘populism(인기영합주의)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 선심성 정책과 허세를 남발하고 사치와 부패에 물들어 나라를 몰락시킨 장본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페론의 집권 시기에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 있는 부富의 재분배가 이뤄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60%를 차지했던 극빈 서민들이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 받았고 산업은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후안 페론은 반대세력과 군부의 견제를 받아 실패한 통치자로 낙인찍히고 물러나 망명 길에 올랐다. 에바 페론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후, 페론의 시대는 그렇게 한 시절 역사의 장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노동자, 여성, 빈민들은 여전히 에비타를 그리워했다. 후안 페론은 죽은 아내 에바 페론의 후광을 등에 업고 18년 만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1973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10개월 만에 사망하자 이번에는 재혼한 아내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민중들은 에바 페론을 그리워하고 추앙한다. 아르헨티나의 시골 농가에서 지금도 종종 발견되곤 하는 에비타의 초상화가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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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희망의 나라 폴란드

폴란드는 참으로 혹독한 역사를 살아온 국가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절망과 비극만으로 읽는다면 오독이다. 폴란드는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전반에서 그들의 저력과 꿈과 희망을 읽을 수 있다. 외세에 의해 123년의 세월을 국가가 소멸된 채 지내오다 1918년 독립을 한 폴란드는 2차대전 중 겪은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학살이라는 통한의 상처와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연대連帶)’의 역사적 상징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나라이다. 유서 깊은 과학적 전통과 더불어 유럽의 심장부라는 위상에서 비롯된 ‘경계의 문화’ 특성을 민족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폴란드를 찾아가 본다. 

노종상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폴란드Poland의 정식 명칭은 폴란드 공화국(Republic of Poland)이다. 폴란드는 북위 49˚~54˚, 동경 14˚~24˚의 중유럽 대평원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동·서 유럽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반시계 방향으로 독일Germany, 체코Czech, 슬로바키아Slovakia, 우크라이나Ukraina, 벨라루시Belarus, 리투아니아Lithuania, 라트비아Latvia 등 7개국의 국경을 접하고 있어 이 나라의 운명이 예사롭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북으로는 유럽 대륙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이에 있는 발트해Baltic Sea와 면하고 있고 북동쪽에는 러시아Russia연방이 위치해 있다. 국토는 동서로 400마일, 남북으로 440마일의 크기로 약간 일그러진 사각형 모양을 이루며 해안선의 길이는 491㎞이다. 영토 면적은 312,685㎢로서 유럽에서 8번째로 큰 나라이다. 국토 대부분이 북유럽 평야 지대에 위치해 있고 지형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남쪽 국경에 있는 수데티Sudety와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을 제외하고는 350피트(106m) 이상인 곳이 거의 없다. 폴란드 최고봉은 슬로바키아의 국경에 있는 해발 8,200피트(2,499m)인 리시Rysy 산이다. 폴란드에서 가장 긴 강은 비스툴라Vistula 강(비스와Wisła 강, 667마일)인데 국토 중앙을 가로질러 흘러 광대한 유역 평야를 이루고 하류 지역에 운하를 발달시켜 발트 해 여러 항구와 내륙 여러 시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동맥을 이루고 있다. 또한 비스툴라 강과 함께 하천 수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오데르Oder 강(오드라Odra 강, 530마일)은 서쪽 국경을 따라 흐르고 있다. 

폴란드의 기후는 온대 기후에 속하는데, 습도가 높은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로부터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로 옮아가는 점이지대漸移地帶에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으며, 여름에는 따뜻하다. 연평균 기온은 7℃~10℃로, 겨울 최저기온은 -21℃, 여름 최고기온은 34℃이다. 강수량은 남부 국경 산악지대가 연평균 1000㎜~1100㎜, 가장 적은 중부가 연평균 600㎜이며, 삼림이 국토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데 서유럽의 활엽수림에서 동유럽의 침엽수림으로 옮아가는 점이지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폴란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지형에 따라 6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북쪽이 발트 해 연안 지역이고, 그 아래가 많은 호수가 있는 빙하 평원 지대, 세 번째가 폴란드 중심부인 중앙 저지대이며, 네 번째가 구릉지대를 포함한 고지, 다섯 번째가 수데티Sudety 산맥(크루슈네 산맥 포함)으로 이루어진 남서부 지역, 마지막이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과 그 기슭이다.

폴란드의 역사

왕조국가 시대
폴란드 땅에는 원래 게르만 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0세기 경, 폴라니에족을 중심으로 나라가 형성되어 처음으로 민족과 국토의 명칭이 생겨났다. 966년 가톨릭을 받아들이며 미에슈코Mieszko 1세에 의해 폴란드 최초의 왕조인 피아스트Piast 왕조(966∼1385)가 성립하였다. 1039년 카지미에쥬Kazimierz 1세는 수도를 그니에즈노Gniezno에서 크라쿠프Krakow로 천도하였고, 카지미에쥬 3세(1333∼1370) 시기에는 영토 확장을 통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385년에는 피아스트 왕조가 막을 내리고 왕권계승자 야드비가Jadwiga 여왕이 리투아니아의 야기에오Jagiello 대공과 결혼함으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조 형태인 야기엘로니안Jagiellonian 왕조를 열었으며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 발트해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569년에 양 왕조간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항구적인 제도적 장치로 통합하는 일종의 국가연합을 결성함으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위계승자 부재 문제가 발생하여 1572년 야기엘로니안 왕조는 막을 내리고 귀족들이 국왕을 선출하는 일종의 귀족 공화정(Noble Republic)이 등장했으며 1596년 지그문트Zygmunt 3세는 수도를 남부 크라쿠프Krakow에서 중부 바르샤바Warsaw(폴란드어 Warszawa)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폴란드는 선거왕제選擧王制의 채용, 바르샤바 천도 후 강대해진 귀족계급 및 투르크, 스웨덴과의 전쟁 등의 요인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면서 국운이 기울어졌다. 18세기 후반에 폴란드는 왕권의 강화와 국가 개혁이 시도되기도 하였으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프러시아(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폴란드를 자주 침입해 왔다. 이들 3개 국가는 1772년, 1793년과 1795년 3차에 걸쳐 폴란드 영토를 분할하여 통치했다. 나폴레옹에 의한 바르샤바 공국 시대(1807~1815) 외에는 1795년부터 1918년까지 폴란드는 3국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123년간 국가가 소멸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폴란드는 이에 맞서 1830년 독립을 위한 혁명 정부를 조직하고 여러 차례의 봉기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독립투쟁은 실패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1908년 오스트리아에 의한 보스니아 합병, 1912~1913년의 발칸 전쟁으로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당시 폴란드 민족운동 단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러시아의 보호 하에 폴란드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방법과 독일에 협력하여 폴란드 자치권을 최대한 확대하는 방안,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지원 하에 폴란드 자치 국가를 오스트리아의 제국 내에 건설하는 방안 등 세 가지였다. 그러나 당시 어느 국가도 폴란드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선을 긋지 않았다.

제 1, 2차 세계대전기간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 윌슨 대통령에 의해 제창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언되면서 폴란드는 1918년 11월 11일 독립국가로 재등장하여 1939년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19세기의 독립운동의 전통과 제1차 세계대전을 기회로 국가 재건을 수행한 것이다. 이 시기에 폴란드는 러시아와의 전쟁(1920~1921)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1926년 피우수트스키의 군사쿠데타 이후 기존의 프랑스가 아닌 독일과 협력관계를 맺게 되면서 정권의 성격도 파시스트화되어 갔다. 폴란드 정부는 1932년에 소련, 19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폴란드는 다시 비극의 역사 속으로 빠져 들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들어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소련도 뒤이어 9월 17일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폴란드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의해 양분되었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부터 1945년 연합국에 패망할 때까지는 독일의 단독 지배를 받았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점령 후 ‘죽음의 수용소’를 만들어 잔혹한 대량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 1944년 8~10월에는 대 독일 항전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 시민 24만 명이 사망하고, 63만 명이 오시비엥침Oświęcim(독일어로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학살되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만이 아니라 소련 치하의 폴란드 동부지역 역시 참극을 피해갈 수 없었다. 최근 연합뉴스에서 「스탈린 시절 집단 학살된 1천명 유해 우크라서 발견 -피해자는 폴란드 병사·민간인… “새로운 카틴 학살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한 기사는 당시의 참상과 비극, 절망이 아직도 폴란드라는 나라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현주소임을 전하고 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6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와 국민 재산의 38%에 해당하는 재산피해를 입었다. 2차대전 전후 처리 결과로 폴란드가 다시 독립을 하게 되면서 폴란드 동부지역은 소련에 편입되었고 대신 독일 북동부 및 서부지역은 폴란드로 편입되는 영토 조정이 시행되었다. 

공산주의 시대
1945년 폴란드는 해방되었다. 그 해 6월에 폴란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1947년 1월에 치러진 총선 결과 공산-사회당 양당 중심의 인민전선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공산 정권은 이후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소련의 영향력 아래 묶여 있었는데, 경제 실정과 지도층의 부패 등으로 인해 1980년 7~8월 노동자 파업이 단행되었고 자유화 운동이 확산되었다. 1980년 9월에는 ‘연대連帶(Solidarlity;솔리다르노시치)’라는 이름을 가진 자유노조가 동구권 최초의 합법적 독립노조로 법원에 등록이 완료되었다. 1981년에 접어들어 9월에 자유노조 전국회의가 개최되었고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전국자유노조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10월에 당 서기장에 취임한 야루젤스키Jaruzelski 장군은 12월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노조 활동 금지 및 바웬사 의장 등 반체제 지도자에 대한 구금 등의 강경조치를 단행하였다. 1988년 9월 실레지아 지방 광부, 슈체친, 그단스크 항구,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 1만 3천여 명이 자유노조 인정과 임금 인상 및 경제개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민주정부 체제 수립
1989년 공산당 정부와 자유노조측은 ‘원탁회의(Round Table)’라는 타협 방식을 통해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끌던 자유노조 ‘연대Solidarlity’의 합법화와 하원의 40%만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단계적 민주화 추진에 합의하였고, 마침내 1989년 6월에 치러진 부분적 자유총선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하였다. 7월에 열린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야루젤스키Jaruzelski 공산당 서기장이 단독 출마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8월에는 야루젤스키 대통령과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와의 회담에서 자유노조가 주도하는 연정 수립이 합의되고 차기 총리로서 마조비에츠키Mazowiecki가 지명되었다. 12월에는 폴란드 의회가 사회주의 관계조항 삭제 및 민주·자유경제 조항을 삽입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부 유럽과 동유럽 최초로 비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1990년 1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공산당)이 자진 해산하였고, 이 해 12월 치러진 대선에서는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첫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1월 비엘레츠키Bielecki 내각이 성립되고 10월에 치러진 총선 결과 자유노조 계열 24개 정당이 하원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이후 자유노조 계열 정치세력의 내분으로 정국 혼란이 지속되자 1993년 9월 조기 총선이 시행되었고 그 결과 제1, 2당으로 각각 부상한 구 공산당인 민주좌파연합(SLD)과 농민당(PSL)이 연정을 구성하여 1997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1995년 11월 대선에서는 민주좌파연합 총재 크바시니에프스키Kwasniewski가 바웬사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97년에는 우파인 자유노조선거운동(AWS)이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2000년에는 크바시니에프스키Kwasniewski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2001년에 민주좌파연합(SLD)이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다시 좌파가 집권을 하게 되었으나 2005년 9월 총선 및 10월 대선을 치르면서 좌파세력은 쇠퇴하였다.

2005년 9월 PiS(Law and Justice:법과 정의당) 후보로 출마한 레흐 카친스키Lech Kaczynski가 대통령 당선되었고, 11월 총선에서는 우파인 법과 정의당이 승리하면서 소수정부로서 마르친키에비츠Marcinkiewicz 내각이 성립하였고 2006년 5월에는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내각(PiS-SO-LPR 연정)이 성립하였다. 하지만 집권한 법과정의당의 혼란한 정국운영으로 인해 2007년 10월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고 중도우파인 시민연단(PO)이 승리하여 투스크Donald Tusk 내각(PO-PSL 연정)이 성립하였다. 2010년 4월 특별기 사고로 인해 카친스키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동년 7월에 치러진 조기 대선 결과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하원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1년 10월 총선 결과 시민연단(PO)이 집권 여당 사상 처음으로 연속하여 승리함으로써 투스크 내각(PO-PSL 연정)은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투스크 총리는 최근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이끌 차기 상임의장(2014년 12월 취임 예정)으로 선출되어 2014년 9월 11일 사임하였으며, 총리 후임자로는 시민연단 소속의 코파츠Ewa Kopacz 하원 의장이 지명되었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코파츠 의장은 1989년 폴란드의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1990년대 초에 총리를 지낸 한나 수호츠카Hanna Suchocka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총리가 된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폴란드는 대통령제가 가미된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입헌공화국이다. 직선제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임기 5년(1회 연임 가능)의 대통령은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예산안을 승인할 수 없거나 정부를 수립할 수 없을 때에 국회를 해산할 권리와 법률안 거부권, 대사 임명 및 소환권, 외국사절 접수 및 추방, 군 통수권(총사령관), 국방위원회 의장, 각료회의 의장(총리) 및 국립은행 총재 임면권, 사면권, 조약 비준 폐기권, 전쟁 상태 및 비상사태 선포권 등을 갖고 있다. 자유노조의 지도자로 유명한 레흐 바웬사Lech Walesa는 1990년 11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95년 임기를 마쳤고, 현 대통령은 2010년 취임한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이다. 

1989년 체제 전환 이후 폴란드는 2000년대 중후반까지 좌우파 정치세력이 교대로 집권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2007년 중도 실용주의 정당인 시민연단(PO) 집권 및 2011년 재집권으로 정치적 안정이 구현되었다. 2007년 10월 집권 후 2011년 10월 재집권에 성공한 시민연단-농민당 연정은 집권 경험을 바탕으로 2008년 경제위기 후에도 마이너스 성장 없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등 원만한 국정운영을 수행 중이나, 경제 위기에 따른 긴축재정과 정년연장, 연금제도 개혁 등 비인기성 개혁 정책 추진으로 최근 지지율이 하락 추세이다. 하지만 집권 시민연단의 지지율 하락세가 제1야당 법과정의당의 지지율 상승으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으며, 시민연단 출신의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이 70%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2015년 예정된 대선에서 재선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 정부는 2015년 총선 및 대선을 염두에 두고 고속도로 건설, 외자 유치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정책 추진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외교정책에 있어 폴란드는 21세기 국가안보 및 경제 번영을 위한 국가적 전략목표로서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역할의 증대를 추진하고 있다. 유럽연합 내 주요 정책결정 국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유럽연합 동방 파트너쉽(Eastern Partnership) 추진 제안 등 유럽연합의 대 동방정책 및 대 동아시아 정책 수립에 적극 참여 중이다. 또한 2004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 아시아 등 역외 국가들과의 선린 협력관계 강화 정책을 강조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및 일본,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증진, 특히 경제협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행정부(내각) 
국정을 맡은 내각은 일반적으로 하원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의 당수가 총리로 선출되어 구성하게 된다. 여당이 의석의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정권의 안정을 위해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시민연단(PO)은 여당으로는 1989년 민주화 이후 사상 처음으로 2011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농민당(PSL)과 연정을 구성하여 2014년 현재 7년째 집권 중이다.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는 헌법상 국가권력의 최고 집행 및 행정기관으로 총리 및 각 부 장관, 각료급 위원회 위원장으로 구성된다. 대통령이 하원 다수당과 협의하여 총리 후보를 지명하고 총리 지명자가 내각을 구성 후 하원에 신임을 요청하며, 각부 장관은 총리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형식적으로는 총리 및 각료를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대통령은 총리 해임권이 없으며, 실제로는 총리가 하원의 신임을 받고 하원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되어 있어 국가 권력의 집행상 실질적인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입법부(의회) 
폴란드의 의회는 상하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Sejm은 의석수 460명에 임기 4년이고 41개 선거구에서 의원을 직접 선출하며 정당 및 후보자에 대한 이중 투표제로 운영한다. 하원은 헌법상 예산 심의 및 의결권, 대 정부 질의권, 전쟁상태 의결권, 총리 및 내각 인준권 등의 권한을 갖는다. 상원Senat은 의석수 100명에 임기 4년이며 40개 선거구에서 의원을 직접 선출하고 정당 및 후보자에 대한 이중 투표제로 운영되는데, 하원과 동시에 선거를 치른다. 상원은 하원이 의결한 국가, 사회, 재정 등 제반분야 법안 및 예산안에 대해 7일 이내에 하원에 대해 입장을 제시하며, 하원에 대한 법안 제출이 가능하다. 폴란드에는 다양한 복수 정당이 존재하며, 현재 시민연단PO, 농민당PSL, 민주좌파연합SLD, 팔리코트운동RP, 폴란드연대SP, 법과 정의당PiS, 대화를 위한 구상ID 등의 정당 및 정치적 연맹이 입법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5% 미만 득표 정당은 원내 진출이 불가하고 공석 발생시 하원은 해당 선거구 차석 득표자가 당선되며, 상원은 보궐선거를 실시한다. 일정 요건에 따라 하원이 해산되면 상원도 자동적으로 동시 해산된다. 

지방정부 
폴란드의 지방정부는 총 16개 주州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에는 총리가 임명하는 주지사Voivode와 주의회에서 간접 선출되는 주총리Marshal가 병립한다. 주지사는 전반적인 국가 행정 관련 사항을 관장하고, 주총리는 지방정부 관련 사항을 관장한다. 기타 주·시의회 의원 및 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이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사법부 
폴란드의 사법부는 대법원과 최고행정법원, 일반법원, 특별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법원(Supreme Court)은 형사재판부, 민사재판부, 행정재판부, 노동사회보장재판부, 군사재판부 등으로 나뉘고, 일반법원(Common Court)은 주 법원(Voivodeship Court)과 지방법원(District Court)으로 구분되며, 특별법원(Special Court)으로는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Tribunal)와 국무재판소(Tribunal of State, 탄핵재판 담당)가 있다. 법관은 국가사법위원회(National Council of the Judiciary)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First President of the Supreme Court)은 대법관 가운데 대통령 제청으로 하원이 임명하며,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경제

폴란드는 전체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중간 크기의 국가이지만, 중앙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큰 국가이다. 폴란드는 중부유럽과 동유럽 국가들 중 경제 성장 분야에서 리더로 꼽힌다. 현재 폴란드는 근본적인 시스템 개혁을 계속 이루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폴란드가 시장경제와 그 기반시설에 있어 극적인 위험 요소들이나 사회적인 불안 요소들이 거의 없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동유럽과 서유럽에 대한 밀접한 협력관계는 폴란드의 민족 정체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폴란드의 이웃 국가 중 4개국은 유럽연합 회원이다. 폴란드 또한 2004년 5월 1일에 유럽연합EU에 가입하였다. 폴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1989년 체제 전환 후 적극적인 친서방 정책과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연합EU 내 입지를 제고시켰다. 공산권 붕괴 후 동유럽국가 가운데 가장 신속한 성장(90년대 연평균 6%의 경제성장률 기록, 유럽 내 최고치)을 달성, 시장 경제 및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에 성공하였으며, 1998년 이후 전반적인 세계 및 유럽경제 침체의 영향으로 2000초까지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으나(2001년 1%, 2002년 1.3%), 2003년부터 수출 및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 급증으로 다시 6%대의 경제성장률을 회복하였다. 폴란드 경제는 2005년 이후에도 꾸준한 성장을 거듭, 2007년에는 저 인플레이션 가운데에도 6.7%에 달하는 고성장을 실현하는 등 2004년 유럽연합EU 가입 후 유럽연합 자금 및 활발한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 등으로 건실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2013년 기준 무역규모는 4,092억 달러(수출 2,030억 달러, 수입 2,062억 달러)이고, 국내총생산GDP(명목기준)는 5,139억 달러(세계 23위), 1인당 GDP는 13,333 달러(세계 54위)를 기록하고 있다. 

폴란드의 성장은 수출의 급증, 산업 생산의 증가 그리고 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1990년 초반 이래로 폴란드에 대한 해외 투자는 840억 달러를 넘어섰다. 중·동부 유럽에서 선두로서의 위치와 과거 유럽 연합 가입국들에 영향을 줄 해외투자지로서 폴란드의 경제는 향후 더욱 큰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폴란드에서 가장 큰 투자자들은 전자통신 부문(France Telecom)과 금융 중개, 은행들이다. 자동차 분야의 투자자들이 폴란드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항공 산업과 가정용품 분야에서도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은 2000년 이후 폴란드에 투자를 늘려왔다. 한국과 폴란드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양국 모두 외침을 당했다가 다시 독립을 되찾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폴란드의 경우는 러시아와 독일의 사이에, 한국의 경우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상대적으로 싼 고급 노동력 그리고 빠른 성장과 좋은 전망을 보이고 있는 경제성장 지표를 고려해 볼 때, 한국과의 협력 관계에서 폴란드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유럽연합에 폴란드가 가입한 것은 향후 더 많은 한국의 폴란드 사업 유치와 투자를 이끌어 낼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폴란드 간의 경제 협력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은 전자와 기계분야뿐만이 아니라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을 폴란드에 수출하고 있다. 한국의 무역은 앞으로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폴란드를 투자 국가로 선택하려는 한국 기업들의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에 있어 관광 산업은 1990년대 들어 꾸준한 신장세를 거듭하여, 현재 주요 외화 획득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12년 외국인 관광객 수는 1,484만 명이며 연간 관광 총수입은 약 65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주요 관광지는 크라쿠프, 아우슈비츠, 그단스크, 브로츠와프, 자코파네 등이며, 국가별 관광객 수는 독일이 최다인데 한국인 관광객은 2012년 약 4만 명을 기록하였다. 

사회와 문화

경계의 문화 특성
폴란드의 문화는 유럽의 심장부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된 ‘경계의 문화’로 지칭되고 있다. 동유럽과 고전 라틴문화의 전통에서 비롯된 신비주의, 유대교의 하시디즘(Hasidism, 18세기 폴란드에서 시작된 유대교의 한 유파) 전통에서 비롯된 성화 숭상, 민속 문화에서 비롯된 바로크 신화를 가진 유럽 서쪽 문화가 만나는 지점이 그것이다. 중앙유럽과 동유럽의 교차 지점에 위치한 폴란드에서는 많은 예술가들이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문화적 전통의 독특한 조합이 이루어져 왔다. 

폴란드 문화는 유럽 통합의 시작과 함께 새롭게 주목을 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폴란드 예술은 통합된 유럽에 중요한 교훈이 될 만한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폴란드 문학과 예술의 중요한 특징은 20세기 후반 품위를 빼앗긴 시대에 정신적인 독립을 지키려 했던 ‘시민혁명’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폴란드 예술가들은 인간의 근본 가치들에 대해 언급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회적 역할과 예술의 필요성에 관한 논쟁을 피하지 않는다. 폴란드 예술은 뭔가 의미를 갖길 원하고 자유라는 주제로 끊임없이 귀착한다. 

폴란드의 문학
폴란드 문학은 중세 이래 독자적이고 우수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다수의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역사를 갖고 있다. 966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의 수 세기 동안은 로마 가톨릭교회 문화의 영향으로 라틴어에 의한 문학이 발달했다. 이 시기의 초기 문학은 12~13세기에 속하는 연대기年代記·성인전들이다. 폴란드어에 의한 문헌은 13세기경부터 출현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신을 낳은 자’라는 뜻의 종교가宗敎歌인 보구로지차Bogurodzica이다.

15세기에 들어 폴란드 문화의 최초의 개화기가 시작되었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인 16세기 후반은 폴란드 문화의 황금 시대라 불리는데 이 시기에 폴란드어 문학의 첫 거장은 미코와이 레이Mikołaj Rej이고 최고의 시인으로는 코하노프스키Jan Kochanowski를 꼽을 수 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폴란드 문학은 주제와 표현 양식에 있어 지방색을 띠게 되고 장르도 다양화되었으며, 역사적 서사시가 새로운 장르로서 애호되었다. 18세기 후반계몽주의 시대에는 크라시츠키Ignacy Krasicki가 대표적 시인이며, 외세에 의해 120여 년간 나라를 잃었을 시기에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고무하기 위한 낭만주의 문학이 크게 유행하여 A.미츠키에비치, J.스워바츠키, Z.크라신스키, C.노르비드와 같은 독특한 시인이 출현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프랑스로 망명했고 망명지에서 예술적 절정을 이루었다. 

19세기 후반의 실증주의 문학가로는 B.프루스, E.오르제슈코바, H.시엔키에비치가 유명한데,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는 <쿠오 바디스Quo Vadis>를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무렵에 성행하였던 모더니즘의 대표적 작가로는 S.비스피안스키, S.제롬스키 등을 손꼽을 수 있으며, <농민Chlopi>으로 알려진 레이몬트Wladysilaw Stanisilaw Rey´mont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제1·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의 대표적 작가로는 Z.나우코프스카, M.돔브로프스카, S.I·비트케비치, W.곰브로비치, B.슐츠, J.이와슈케비치 등의 소설가와 투빔, 스워남스키 등의 시인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J.안제에프스키, 루드니츠키, T.루제비치 등이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폴란드 작가 중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많은데, 폴란드 태생으로 이스라엘로 건너간 슈무엘 아그논Shmuel Agnon은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간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Isaac Bashevis Singer는 1976년, 체스와프 미워시Czeslaw Milosz는 1980년, 여류시인이자 비평가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는 1996년에 수상하였다.

폴란드의 음악과 미술
폴란드의 음악은 초기에 중부 유럽 음악의 영향을 받아 여러 민요와 무도들이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되었다. 17세기부터 폴란드의 민속무용은 유럽의 예술음악(폴로네즈·마주르카) 속에 자리를 잡았으며, 폴란드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J. 에르스네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제자인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1810~1849)은 폴란드를 대표하는 음악가로서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시대를 통해서 중앙 유럽 이외의 나라에서 대 작곡가는 탄생되지 않았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쇼팽은 헝가리의 리스트Franz Liszt, 독일의 슈만Robert Schumann 등과 함께 낭만주의의 새로운 세계에 꽃을 피웠다. 19세기 후반의 작곡가로는 노스코프스키Sigismund Noskowski, 젤렌스키Wladyslaw Zelenski가 특히 유명하며,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파데레프스키Ignacy J. Paderewski와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도 19∼20세기에 걸쳐 활약하였다. 

20세기 전반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는 시마노프스키Karol Szymanowski가 널리 알려져 있고, 작곡가 헨리크 고레키Henryk Goreck는 수차례에 걸친 심포니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폴란드의 미술은 12세기 이후 고딕 시대에 활기를 띠었고, 16세기에는 역사화·초상화가 등장하였다. 특히 초상화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전형적인 회화양식이 되었다. 근대 회화는 고전주의·낭만주의를 거쳐 리얼리즘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19∼20세기에는 세계의 모든 작풍作風이 도입되었다. 현대에는 코바르스키 등의 사실파 이외에도 스타지에프스키, 야레사 등의 새로운 경향도 볼 수 있다.
오늘날 폴란드는 연극, 영화, 음악 등 분야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방 소도시에도 다수의 문화시설을 설립, 일반시민들이 문화생활을 항유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고 있다. 폴란드에는 국립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명한 교향악단이 있고, 연간 연극 및 음악 공연 규모는 약 5만회에 달하며, 쇼팽 국제피아노 콩쿠르, ‘바르샤바의 가을’ 국제 현대음악제, 베토벤 페스티벌, 모차르트 페스티벌, 바르샤바 국제영화제, 국제 거리 연극제 등 다양한 국제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폴란드의 과학
폴란드의 과학적 전통은 유서가 깊다. 폴란드의 과학은 특히 천문학에서 빛나는 업적이 이루어졌다. 폴란드 천문학자들 중 역사적인 획을 그은 인물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이다.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는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의 주인공이다. 그는 기존의 지구 중심 우주론(천동설)과 달리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정지해 있는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근대과학의 출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뒤를 이어 대형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한 얀 헤벨리우스Jan Heweliusz와 태양의 코로나(corona, 태양 둘레의 둥근 빛)로부터의 편광 방출을 발견한 아담 프라즈몹스키Adam Prazmowski, 최초로 명왕성의 궤도를 계산해 낸 타데우스 바나히에비츠Tadeusz Banachiewicz 등도 폴란드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현대 폴란드 천문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태양계 밖에 있는 행성들을 최초로 발견한 알렉산데르 볼스찬Aleksander Wolszczan이다. 1922년 그는 처녀 별자리에 있는 펄서(pulsar, 전파 천체의 하나) PSR B1257+12 중성자 별을 선회하는 세 개의 행성을 발견했다. 

폴란드 과학이 천문학에서만 빛난 것은 아니다. 폴란드의 가장 유명한 여성 과학자인 마리아 스크워돕스카 퀴리Maria Skłodowska-Curie는 1903년 방사능 연구로 첫 번째 노벨화학상을 받았고, 1911년에는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으로 두 번째 노벨화학상을 받는 위업을 이루었다. 그밖에 현대 열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노벨상 후보에 두 번 오른 보이체크 쉬비엥토스왑스키Wojciech Świętoslawski와 초원자로 알려진 기초 미립자, 중성자neutron와 양자proton들을 포함하여 중핵자hyperon를 함유한 특별한 원자핵을 발견한 예지 프니에프스키Jerzy Pniewski와 마리안 다니쉬Marian Danysz는 화학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폴란드가 배출한 뛰어난 과학자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이룬 과학적 업적은 조국 폴란드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국과 폴란드의 관계

폴란드의 종교
폴란드는 전 인구의 95%가 가톨릭Catholic(러시아정교 1.5%, 개신교 1%) 신자로서 폴란드 가톨릭 교회는 평신도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부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톨릭의 국민에 대한 영향력은 지대하며, 과거 폴란드의 탈공산화를 위해 자유노조와 긴밀하게 협조하기도 했다. 폴란드 정부는 1972년 가톨릭 교회와의 장기간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교회의 신규건설 허가 등 바티칸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 중이며 1993년 7월에는 교황청과 정교화약Concordat 협정을 체결하였다. 폴란드내 외교단장직을 교황청 대사가 맡고 있으며, 1990년 가을부터는 공립학교에서 자발적인 종교교육이 부활되었다. 

한국과 폴란드 양국은 1989년 수교 이래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빠른 속도로 심화 발전 중에 있다. 양국은 견고한 경제통상관계를 기반으로 고위인사 교류에 의한 돈독한 정무관계 및 학술문화관계로 확장 발전을 꾀하고 있다. 폴란드는 자국의 경제개혁 과정에서 한국을 주요 경제·통상 협력 대상국으로 간주하여 한국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진출을 기대하고 있으며, 우리 기업의 진출도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우리나라의 대對폴란드 수출은 2010년 43.8억 달러 이후 계속 감소하였으며, 2013년에는 36억 달러로 전년 대비 -2.1%를 기록하였다. 최근 대對폴란드 수출 부진은 유럽 경제위기로 인한 폴란드 내 우리 투자기업의 생산 원자재 및 부자재 수입 감소에 기인한 바가 크다. 반면 우리나라의 대對폴란드 수입은 2009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23.9%를 기록한 이후 계속 증가세인데, 2012년에는 42.2%가 늘어난 5.3억 달러, 2013년에는 7.8억 달러로 44.9% 증가하여 최근 수년간 증가추세를 지속하고 있다. 주요 수입품목으로는 피스톤식 내연기관, 돼지고기, 차량부품, 철강재 등이며 특히 돼지고기와 자동차 부품의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폴란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무역수지 흑자 대상국으로서 2012년 기준 대對폴란드 무역수지는 31.5억 달러를 기록했으나, 2013년에는 대對폴란드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함에 따라 28.3억 달러로 흑자폭이 감소했다. 흑자 규모 기준으로 폴란드는 전체 교역대상국 중 15위,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는 2위에 해당한다. 지난 1991년부터 시작된 우리의 대對폴란드 투자는 1990년대 중반 대우자동차와 협력 업체들이 진출하면서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1990년대 후반 대우자동차의 파산과 철수 등의 요인으로 2000년 초반까지 대對폴란드 투자는 부진하였다. 그러다가 2004년 폴란드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따른 여건 호전과 전자, 가전을 중심으로 우리 기업의 대형 투자 프로젝트가 재개되었다. 2013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대對폴란드 투자누적총액은 14.2억 달러이며, 투자누적총액 기준으로 유럽연합 국가 중 영국, 네덜란드, 독일, 아일랜드, 노르웨이에 이어 6위를 기록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對유럽 투자 주요국으로 부상하였다. 한국 수출의 많은 부분은 현지 투자 기업의 생산활동을 위한 원부자재 또는 기계장비 반출이 차지하지만 현지 진출 한국 제조업체들이 현지 생산품을 서유럽 등지로 수출함으로써 폴란드 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관계에 있어서도 한-폴 양측은 각종 공연과 문화 행사 교류를 하고 있으며, 2010년 1월 27일에는 중동부유럽 한국 소개의 거점인 한국문화원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심가에 개원하였다. 또한 지자체 간의 자매결연도 서울시와 바르샤바시(1996)를 필두로 경상남도와 포모르스키에주(1997), 충청남도와 비엘코폴스키에주(2002), 경상북도와 마조비에츠키에주(2009) 등으로 확대되었다. 

폴란드는 북한과 1948년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89년 폴란드에 비공산계 연립정부가 출범하고 같은 해 11월 한국과 폴란드 사이에 수교가 이루어지자 1995년 4월 북한은 주駐폴란드 박상암 대사를 조기 소환하고 북한의 중립국 감독위원회(NNSC,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폴란드 대표단을 강제 추방했다. 이에 폴란드도 주駐북한 대사를 소환하고 외교 관계를 대리대사급으로 격하시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995년 11월 폴란드 좌파 정권 집권을 계기로 양측은 다시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였지만 양측 정부 차원의 실질적인 주요 인사 교류는 저조한 상황을 보이고 있다. 양측 간의 교역규모는 2008년도 9,497만 달러를 기록한 이후 감소 추세로 돌아서 2010년 1,773만 달러, 2011년 1,144만 달러, 2012년 676만 달러(대북 수출 20만 달러, 수입 650만 달러)를 기록중이다.



폴란드 망명정부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망명한 정부를 가리킨다. 1939년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었다가 1940년의 프랑스 공방전으로 파리를 떠나 영국 런던으로 옮겼다. 국내 게릴라 활동단체로는 망명정부 지휘하의 국내군과 폴란드 노동자당이 편성한 인민군 등이 있었다. 망국의 폴란드인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는 동맹국인 영국이나 프랑스로 망명해서 독일과 싸우는 방법, 두 번째는 조국에 남아 지하활동을 벌여 독일과 싸우는 방법, 세 번째는 앞의 두 방법과는 달리 3~4년 후에야 이루어지는데 독일과 싸우게 되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일과 싸우는 길이었다.

폴란드 공화국이 독일과 소련에게 유린당할 때 파리에 체류 중이던 상원의장 라츠키에비츠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세워진 정부가 임시 정부(provisional government)가 아닌 망명 정부(government in exile)였던 것은 제2공화국의 법통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1935년 헌법 개정에 따라서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개정 헌법에는 전쟁 중에는 대통령직의 임기가 전쟁 종료 3개월 후까지 연장되고, 그런 상황에서 공화국 대통령은 전쟁 종료 전에 대통령직이 궐위될 경우에 대비해 후계자를 지명하며, 지명된 후계자가 승계할 경우 그 임기는 전쟁 종료 후 3개월까지로 한정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 헌법 덕분에 4년 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파리로 피난하여 바르샤바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폴란드 대통령 라츠키에비츠가 파리에 망명해 있던 58세의 전직 총사령관 라디슬라스 시콜스키Ladislas Sikolski 장군에게 망명정부를 결성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시콜스키는 1921년에 폴란드군 참모총장, 1922년에 수상 겸 군사장관을 역임했다. 1924~1925년에는 국방장관을 맡았으며 피우수트스키 반대파의 수장이 되었다. 1925년에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로 인해 감금되었던 시콜스키는 1928년에 풀려나 다음해 대장으로 퇴역하고 프랑스로 망명해 있었다. 

1939년 9월 30일, 파리에서 시콜스키와 소슨코프스키 장군, 농민당의 미콜와이치크 등이 중심이 되어 폴란드 망명정부가 결성되었다. 망명지에서 조국의 정부와 군을 맡은 시콜스키는 탁월한 능력으로 폴란드의 지도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는 망명정부의 수상과 군 사령관을 겸임하였다. 피우수트스키의 부하였던 마리안 쿠겔은 국방장관을 맡았다. 폴란드 정부의 법적인 계승자였으므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주요 서방국가들은 이 정부를 승인했다. 영토는 없었지만 이 정부에 10만 명이 넘는 폴란드인들이 합류하여 ‘폴란드군’을 구성하게 되었다. 

폴란드 망명군의 첫 부대는 제1산악여단이었다. 1940년 봄까지 4개 보병사단과 1개 기계화여단이 편성되어 훈련에 들어갔다. 공군 조종사들은 리용에서 프랑스 전투기를 타고 적응훈련에 들어갔다. 시콜스키 사령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본국에 지하정부와 지하군을 조직했다. 비록 외국에게 점령당했다지만 폴란드라는 국가와 국민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폴란드 지하군은 게릴라전으로 독일군의 후방을 괴롭혔다. 조국에 남아 싸우기로 한 사람들은 ‘낫과 망치’, ‘해방투쟁연맹’, ‘인민 폴란드’ 등 지하 저항조직들을 결성하였다. 일부는 카르파티아 산맥이나 숲으로 숨어들어가 게릴라가 되었다. 상당수는 바르샤바나 크라쿠프 같은 대도시의 도시 게릴라가 되어 독일군의 식당, 카페, 극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곳곳에서 활약을 하였으나 그 ‘정체’는 문자 그대로 ‘망명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폴란드 망명정부는 중국대륙 상해와 중경을 떠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리할 것이다. 그렇게 폴란드와 한국은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이 극악을 향해 줄달음치던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신음하던 암울한 1930년대, 모더니스트 김광균金光均 시인의 시 <추일서정秋日抒情〉 첫 머리에는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당시 폴란드 망명정부에서 발행하는 지폐의 가치가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망국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시인의 눈에는 가을날, 망국의 거리에 흩날리는 한 잎 낙엽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슬프게 보였던 모양이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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