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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적이고 활동적인 다세계의 교차로 멕시코 Mexico

멕시코는 북아메리카 지역 고급 원주민 문명들의 거점으로 출발해 오랜 역사를 이어 온 나라로서,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300년간 식민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후 개발 독재 정치를 거쳐 멕시코혁명으로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회 정치적으로 계층별 빈부 격차가 심하고 마약카르텔과의 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는 어두운 이면을 갖고 있는 반면, 열정적이고 낙천적인 국민성과 더불어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적 잠재력과 문화적 역량 등을 무기로 떠오르는 차세대 강국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멕시코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멕시코(United Mexican States)는 북아메리카 남서단에 위치하며 북으로 미국과 3,200㎞의 국경을 접하고 있고 남으로는 과테말라, 벨리즈Belize와 접경해 있다. 국토는 세로로 북쪽에서 남쪽까지 3,000㎞ 넘게 펼쳐져 있다. 가로 폭은 위치에 따라 다른데, 북쪽에는 폭이 2,000㎞가 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남쪽 테우안테펙Tehuantepec 지협의 폭은 220㎞ 이하까지 줄어든다. 시에라마드레Sierra Madre 산맥이 남북으로 국토 중앙을 통과하고, 국토의 절반 이상이 고지대로서 해발 평균은 중부 2600m, 북부 1200m에 이른다. 바하칼리포르니아Baja California 반도는 멕시코 서쪽의 1,250㎞짜리 반도로서 코르테스Cortés 해(캘리포니아 만)를 구성한다. 동쪽에는 멕시코México 만과 멕시코의 또 다른 반도인 유카탄Yucatán 반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캄페체Campeche 만이 있다. 멕시코 중부는 광대하고 높은 고원 지대이다. 멕시코의 큰 강으로는 북쪽 국경의 리오그란데Rio Grande(리오브라보Río Bravo) 강이나 남쪽 국경의 우수마신타Usumacinta 강이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9220㎞로 캐나다에 이어 아메리카대륙에서 두 번째 규모이며 국토 면적은 196만 4375㎢로 세계 14위(한반도의 약 9배) 크기이다.

멕시코는 고도에 따라 다양한 기후 분포를 보이는데, 열대 저지, 온대 고원, 냉대 침엽수림, 알프스형 초지, 만년설 고산대가 고도에 따라 관찰된다. 해안 지대는 열대성 기후로 연중 고온 다습하고, 북서쪽 연안의 저지는 반사막이 펼쳐지는 건조지대이다. 중부 고산 지대는 우기를 제외하고는 건조한 온대성 기후이며 나머지 국토는 아열대 기후이다. 해발 2,300m에 자리 잡은 수도 멕시코시티는 연중 온난한데, 6월~9월에는 우기로서 기온이 온화하고, 11월~1월은 기온이 낮은 겨울 기후이며, 나머지 2월~6월은 한국의 봄 기후와 비슷하다. 연중 기온은 통상 5℃~25℃ 사이를 기록하고 있다. 강우량은 일반적으로 적으나 남쪽으로 갈수록 많아져서 남부에서는 약 600㎜, 북부에서는 약 200㎜ 정도이다.

멕시코의 남부지역에는 지진이 자주 나며 대표적인 예로 1985년 멕시코시티 지진을 들 수 있다. 이 지진으로 사망자만 5,000명이 나왔지만 이 지진 이후 법이 바뀌어 많은 건물들이 내진 설계를 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지진은 거의 일본처럼 자주 일어나는 편인데, 특히 멕시코시티는 아스테카 왕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이었을 때부터 호수를 매립하여 발전해왔기 때문에 시 전체가 지반이 약하여 다른 도시에 비하여 지진에 취약한 상황이다. 

멕시코의 역사


멕시코의 고전기 문명
멕시코 지역에는 BCE(기원전) 2만 년경에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빙하기 시대에 아시아인들이 베링해협을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BCE 1000년경 현재의 베라크루스 지방을 중심으로 멕시코 고원 최초의 문명인 올메카Olmeca 문명이 발흥하였다. 올메카 문명은 그들의 지배자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흑인 인종의 특징을 가진 거대한 석상 두상으로 알려져 있다. BCE 200년~CE 900년 사이에는 멕시코 중앙 고원 텍스코코Texcoco 호수 남쪽에 원형의 대형 피라미드로 알려진 쿠이쿠일코Cuicuilco 동쪽으로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 문명이 세워졌다. 멕시코 지역은 그 후에도 마야Maya 문명(전기 300~600년, 후기 11세기~16세기)과 메시카Mexica(아즈테카Azteca) 문명, 톨테카Tolteca 문명(1세기~11세기)과 같은 여러 고급 원주민 문명의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메시카/아즈테카 제국
14세기 후반, 텍스코코Texcoco 호수 서쪽에 있던 테파넥Tepaneca 족 국가의 아스카포찰코Azcapotzalco에 테소소목Tezozómoc이라는 지도자가 등장하였다. 그가 이끌던 용병부대였던 아즈텍은 테소소목 사후, 15세기 초반에 텍스코코, 틀라코판Tlacopán과 함께 아즈텍 삼국 동맹을 맺었고, 텍스코코의 이름난 군주였던 네살왈코요틀의 사후에 비로소 완전한 지도력을 갖추고 주변국을 정복하여 아즈텍 호수 위에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을 중심으로 아즈테카Azteca 제국을 형성하였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미주 도착 이후, 1519년에는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멕시코에 상륙하였다. 코르테스가 이끄는 정복자들은 아즈테카의 내분과 전승 신화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였으며, 1521년에 황제 쿠아우테목을 처형하고 아즈테카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후 스페인은 이 땅에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새로운 스페인)이라는 부왕령을 창설하였다. 페루 부왕령과 함께 인디아스 식민지의 중심으로 멸망된 테노치티틀란 위에 멕시코시티Mexico City가 건설되었다. 이후 약 3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스페인어와 가톨릭교가 보급되고, 인디오와 스페인인 사이에 혼혈이 진행되었으며, 스페인 기원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 제도가 생겨났다.

멕시코의 독립 시대
스페인의 통치는 300년간 이어졌으며, 18세기에 들어서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의 영향을 받아 토착 크리올료Criollo(스페인 본국인들이 식민지 태생 자녀들을 지칭하던 말)들 사이에 독립의 환경이 급증되었다. 크리올료들은 생김새는 본국인과 똑같지만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차등대우를 받았다. 이들이 유럽 각지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유행이던 프랑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고 자신들이 스페인의 신민이라기보다는 식민지 땅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하면서 독립의 싹이 태동하였다.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가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를 스페인 왕 호세 1세로 즉위시켰다. 그것에 반발하는 스페인 민중 봉기를 계기로 스페인 독립 전쟁이 시작되면서, 인디아스Indias(라틴 아메리카; 중남미) 식민지도 가짜 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다. 1809년부터 1810년까지 키토, 라파스, 산티아고, 카라카스, 보고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인디아스 각지에서 크리올료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가운데 멕시코에서도 1810년 9월 15일 오늘날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크리올료 출신의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신부 등이 최초로 독립을 선포하는 종을 침으로써 멕시코 독립 전쟁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멕시코의 크리올료는 페루의 크리올료와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의 민중 반란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독립 운동에는 소극적이었고, 이달고 신부와 그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주도한 메스티소의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 신부도 스페인 왕당파 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렐로스의 난이 진압된 후 1820년경에는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와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등이 이끄는 해방군이 남아메리카 각 지역을 해방시켰고, 인디아스에 남는 식민지는 도서 지역과 브라질을 제외하면 페루, 중미, 멕시코 만밖에 없었다. 

1821년 9월 15일에 독립 지도자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가 멕시코시티에 침투하였고, 반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멕시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독립해방군을 격파한 스페인 왕당파군의 사령관이었지만 이후 본국에 반기를 들고 멕시코에 주둔하던 스페인군을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투르비데가 멕시코 왕으로 추대하고 싶었던 반대파 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멕시코 입국을 거절하였으므로, 이투르비데가 스스로 멕시코 제1제국의 초대 황제(아구스틴 1세)에 올라 멕시코 제1제국(1821~1823)이 건국되었다.

공화정 시대와 대외 전쟁
멕시코 독립 이후 1823년에는 아구스틴 1세 황제가 중앙아메리카 원정 실패 등의 이유로 재위 10개월 만에 산타 아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가 지도하는 공화혁명에 의해 퇴위하고 제국이 붕괴하면서 멕시코연방공화국República Federal de Mexicanos(멕시코제1공화국, 1824~1935)이 성립되었다. 연방공화국 초대 대통령에는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 장군이 취임하였다. 멕시코는 독립 후 내전에 의한 농업 생산력의 저하, 광산의 생산력 저하, 카우디요Caudillo(독립과 함께 탄생한 돈과 권력을 가진 지방 실력자) 등의 군웅 할거로 인한 유통의 혼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가 이어졌다. 그리하여 1835년에는 1824년에 제정된 연방공화제 헌법을 폐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인 멕시코공화국República Mexicana(República Centralista)으로 전환되기도 했으나, 1846년 8월에 이전 헌법이 부활하여 다시 합중국으로 복귀하였다. 

멕시코는 코아우일라이테하스Coahuila y Tejas 주에 미국 이주민의 정착을 인정하였는데 1835년에 앵글로색슨 계 이주민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멕시코령 코아우일라이테하스는 1836년에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을 하였다. 그 후 미국이 1845년 텍사스를 합병하자, 1846년에는 텍사스를 둘러싸고 멕시코와 미국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하지만 멕시코는 멕시코시티를 점령당하고 1848년에 패배하면서 텍사스를 매각하고 뉴멕시코 주, 캘리포니아 주 등의 땅을 1,50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게 팔았다. 뒤이어 1854년에도 지금의 뉴멕시코New Mexico 주와 애리조나Arizona 주를 미국에 매각(1,000만 달러)하였다. 결국 멕시코는 리오브라보Río Bravo(리오그란데Rio Grande) 강 이북의 영토(이른바 멕시코 할양지)를 상실하였다. 

영토 상실 과정에서 미국과의 갈등이 깊어졌지만, 멕시코는 한편으로 국가적 위기에서 미국의 결정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한 틈을 타서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를 차지하기 위해 출병하여 1863년 멕시코시티가 함락되고 말았고, 나폴레옹 3세가 내세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막시밀리안Maximilian 황제가 멕시코를 통치하는 멕시코 제2제국(1864~1867)이 세워졌다. 이에 맞서 원주민 인디오 출신으로는 최초로 1858년 멕시코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군에 항전하였고, 1867년 멕시코군에 의해 막시밀리안 황제가 처형됨으로써 괴뢰 황제는 종말을 맞이하고 멕시코는 주권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두고두고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1871년 재선에 성공한 후아레스 대통령은 자유주의자로 레포르마Reformar(개혁)을 추진하였지만 1872년 재직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후아레즈의 뒤를 이은 테하다Sebastián Lerdo de Tejada 대통령은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지도력의 부족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개발 독재 시대와 멕시코 혁명
이 틈을 타서 1876년 프랑스 개입 전쟁의 영웅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디아스는 자유적 보수주의자와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아 7번씩이나 재당선을 하며 35년 동안 강압적인 개발 독재를 펼쳤으며 외자를 도입하고 경제를 확장시켰지만 비민주적인 정권 운영으로 국내 각지에서 소요를 유발시켰다. 1907년 미국에서 일어난 공황(금융 위기)의 영향이 멕시코에 미치자 각처에서 농민반란, 노동쟁의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910년에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다. 이 때 디아스가 상대 후보인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를 선거일에 체포 감금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계기로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멕시코 혁명Mexican Revolution’이 일어났다. 판초 비야Pancho Villa,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 알바로 오브레곤Alvaro Obregon 등이 이끈 혁명군은 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군을 물리치고 1917년에 혁명 헌법을 반포하면서 혁명은 완료되었다. 멕시코 혁명 헌법에는 삼권분립, 노동자의 제 권리, 봉건적 토지소유(아시엔다hacienda) 해체 규정 등 기존과 다른 혁신적 조항들이 명기되었다.

멕시코 혁명에 성공한 마데로는 이듬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17년에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가 최초로 혁명 헌법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20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은 의회 존중, 농지 개혁 추진, 노동조합 장려, 교육 문제 등에 주력해 근대화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1933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라자로 카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정부(1934~1940)의 업적은 멕시코 근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카르데나스는 1910년 혁명 후 혼란스럽던 노동자, 농민 조직을 와해시키고 정부 여당인 국가혁명당(PNR)의 지휘 아래 모든 노동자 조합을 복속시킴으로써 오늘날 정부-노조 관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석유산업 국유화를 단행하여 디아스 정부 시절 외국 자본에 종속되었던 경제구조를 재편하고 국가주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근대화 이후 멕시코의 정세
멕시코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전쟁 특수로 경제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46년에는 미겔 알레만 발데스Miguel Alemán Valdés 대통령이 취임하여 외자 도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본격적인 공업화 시대로 전환하였다. 1968년 멕시코는 올림픽을 개최하였는데, 이 해 10월 2일 틀라텔롤코Tlatelolco 광장에서 진행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는 사건으로 인해 공식 사망자 25명, 인권단체 추정 사망자 350명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멕시코는 2009년부터 민주화 시위에 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1985년 9월 19일에는 멕시코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으며, 1986년 5월 ∼ 6월에는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렸다. 1988년에는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Carlos Salinas de Gortari 대통령이 취임하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s)을 체결하는 등 과감한 시장개방 및 민영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1994년 12월에 취임한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 Ponce de León 대통령은 개방정책의 지속 추진과 더불어 긴축재정, 물가 안정, 구조 조정을 통한 경제 안정화에 주력하였다.

2000년의 멕시코 총선에서 여당인 제도혁명당PRI은 만연한 부패와 침체된 경제 실책,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봉기 등에 대한 책임론의 여파로 야당인 국민행동당PAN(Partido Acción Nacional)에게 패배하였고, 같은 해에 치러진 대선에서도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 케사다Vicente Fox Quesada가 승리를 거두어 같은 해 12월 1일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멕시코는 71년 만에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룸으로써 멕시코 정치 발전과 민주화 성숙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2010년 7월 전국 32개 주 중 14개 주에서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야당인 제도혁명당(PRI)이 압승(지사 선거가 실시된 12개 주 중 10개 주에서 당선)함으로써 10년 만에 제1당의 위치를 회복했다. 또한 2012년 7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제도혁명당(PRI)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가 당선되어 12월 1일에 6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16년 현재 집권 4년째를 맞은 니에토 정부는 대통령의 주도로 제2, 제3 야당인 국민행동당(PAN) 민주혁명당(PRD)과 ‘멕시코를 위한 협약’을 체결하고 정치, 교육, 통신, 에너지, 조세 등 각 분야의 개혁 법안을 마련해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교육대 학생 43명이 경찰과 결탁한 갱단에 의해 집단으로 피살된 치안 불안 사건과 대통령 부인 리베라가 고가의 주택을 관급공사를 수주한 업체로부터 제공받고 대통령의 오른팔 격인 루이스 비데가라이 재무장관도 같은 기업으로부터 주택을 취득한 정경유착 스캔들이 드러나자 정권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페냐 니에토 대통령의 입지도 많이 위축된 상태이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멕시코의 정치는 대의민주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삼권분립제와 연방제를 2대 원칙으로 하는 공화정치 체제이다. 정부형태는 1917년 헌법에 따라 대통령 중심제를 취하고 있으며 2016년 1월 현재 대통령은 제도혁명당(PRI)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이다. 

행정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은 멕시코 군의 통수권자이고, 상원의 승인을 받아 내각의 각료와 여러 공무원을 임명할 수 있으며, 법을 집행하고 법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임기는 6년이고, 직접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연임을 금지한다. 부통령 및 수상제도는 없고, 대통령 유고시 의회에서 임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을 두고 있다.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임기 6년의 상원 128석과 임기 3년의 하원 50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회 의원은 상하원 모두 연임이 금지되어 있다. 상원의원은 96석을 32개 주에서 각 3명씩 직선으로 선출하고 나머지 32석은 비례대표제로 선출하는데 3년마다 2분의 1씩 개선한다. 하원의원의 경우 300석은 직선으로 200석은 비례대표제로 선출한다. 의회는 연 2회(1차: 9월 1일 ~ 12월 15일, 2차: 2월 1일 ~ 4월 30일) 정기 회기를 열며 개원 시 대통령이 참석하여 국정 전반에 관한 교서를 발표한다. 휴회 중에는 37명(18명의 상원 의원, 19명의 하원 의원)으로 구성되는 상설위원회(Comisión Permanente)가 기능을 대행한다.

상원(Cámara de Senadores/Senado de la República)은 일반 입법 활동을 하며 외교정책을 검토한다. 또한 행정부 주요 인사(장관, 대사, 장성 등) 임명을 인준하며 대통령의 전쟁 선포를 사전 승인한다(하원의 동시 승인 필요). 이 외에도 대통령 해외 방문 승인 및 군대의 해외 파견을 승인하며 조약을 비준하고, 요청이 있을 경우 행정부 간의 분쟁 조정을 한다. 고위공직자 부정심판소 재판관을 선출하고 주정부에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임시 주지사 임명의 인준과 대법관 임명의 인준을 맡는다.

하원(Cámara de Diputados)은 일반 입법 활동을 하며 예산을 심의한다. 또한 상원에서 인준된 행정부 주요 인사를 인준하며 대통령의 전쟁 선포를 사전 승인한다. 

멕시코 헌법은 상·하원 의원이 유고(사고, 휴직, 사망, 부재) 등으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총선 시 상원 의원 및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 및 하원 의원대행(suplente)을 동시에 선출하도록 하고 있다. 이 의원대행제도는 의원의 유고 시 보궐선거를 하지 않고도 신속히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의원들이 장관 등 타 직무를 맡으면서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도 이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하원 의원이 장관직을 맡을 경우, 의원대행으로 하여금 의원직을 대신하게 하고 입각하였다가,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다시 의원대행에게서 의원직을 이어 받아 하원 의원으로 계속 재직할 수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제도혁명당(PRI), 국민행동당(PAN), 민주혁명당(PRD), 노동당(PT) 등이 있다.

지방행정
멕시코는 31개의 주와 1개의 특별구(연방관구)로 나뉘어 있다. 멕시코의 각 주에는 의회(Congreso Local)가 있으며, 인구 규모별로 21명∼75명의 의원(Diputado Local)들이 있다.

사법부
멕시코의 사법부는 대법원(Suprema Corte de Justicia)과 고등법원, 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은 11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며 대법관의 임기는 15년이고 연임은 불가하다.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며, 상원의 인준이 필요하다. 대법원장의 임기는 4년이며 연임은 불가능하다. 대법원장은 임기가 개시되는 해 1월 1일 대법관회의에서 선출된다.

고등법원은 11개 순회재판소로 구성되는데 6개는 일반, 민사, 형사사건을 담당하고, 5개는 인권 보호를 담당한다. 지방법원은 각 지방에 자리 잡고 있다. 멕시코는 헌법재판소를 따로 두고 있지 않고 미국식으로 대법원에서 헌법 사건을 담당한다. 대법원이 맡는 전체 사건 중 헌법 사건은 약 40%에 달한다.

경제


경제구조와 동향
멕시코 경제는 20세기에 세 가지 측면에서 주요한 변화를 겪었다. 우선 농업 경제에서 제조업 경제로 바뀌며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에서 차지하는 농업 비중이 1940년대 19%에서 1999년 5%로 축소되었으며, 폐쇄경제에서 개방경제로 바뀌면서 1980년대 초반에 수입 대체형 산업 전략을 포기하고 무역 장벽 완화 및 수출 증대를 추진하였다. 또한 국영 기업에서 사유 기업으로 바뀌며 1990년대에 공기업 대부분이 민영화되었다.

멕시코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됨으로써 고도로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되면서 크게 성장하였지만 경제 기반이 수출 가공산업 위주인 탓에 글로벌 차원에서 경쟁력 있는 국민 기업을 육성하는 데 소홀히 하는 등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시장이 인접해 있다는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對미 제2위 수출국의 지위를 2003년 중국에 넘겼으며,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했으면서도 제조업의 기술 개발 등 혁신 능력이 취약하고 경제 전반이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대외 충격에 취약하여 1980년~1990년대에는 경제 위기가 반복되었다. 이러한 멕시코의 경제 위기는 1982년 라틴아메리카 외채 위기의 진원지, 1987년 ‘블랙먼데이’, 1994년 외환 위기(테킬라 파동), 2001년 미국 경기 침체에 따른 동반 침체 등으로 요약된다.

세계 은행에 따르면 멕시코의 경제 규모는 표면적으로 13위이고 구매력 기준으로 11위에 있다. 1994년 위기 이후로 행정 기관들은 국가의 거시경제 여건을 개선해 왔다. 멕시코는 2002년 남미 경제 위기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2001년의 짧은 불경기 이후로 저성장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또한 물가상승과 이자율을 낮추고 인구 소득을 증가시키는 등 전례가 없는 거시경제적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도시와 지역 인구간의 격차는 상당한 편이다.

향후의 전망
하지만 멕시코 경제는 꾸준한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전 세계에서 경제성장이 가장 빠른 국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거의 타격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순항 중인 소수의 국가 중 하나이다. 제조업 기준으로는 중남미 최대로 브라질보다 규모가 크고 업종도 의류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항공기 제작 같은 첨단 분야까지 두루 망라되어 있다. 멕시코는 세계적인 금융 기관과 언론 등에서 멕시코의 잠재력을 주목하면서 세계경제의 차세대 강국으로서 빈번히 언급되고 있다. 그 예로 멕시코는 2010년 1월 칠레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확정되기 전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한 경제개발협력기구 회원국이었으며, 미국의 경제 전문 사이트인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가 향후 10년간 주목할 나라로 지목한 마빈스MAVINS(Mexico, Australia, Vietnam, Indonesia, South Africa)의 일원이었다. 2006년에는 골드만삭스가 브릭스BRICs(Brazil, Russia, India, China) 이후 떠오를 나라로 꼽은 넥스트11(Next11)의 일원이었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2015년 멕시코의 경제성장률을 2.5%로 발표하였고, 2016년에는 중남미 국가 평균보다 높은 2.8%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은행측은 2016년 멕시코 경제가 재정지출 긴축으로 영향을 받더라도, 지속적인 대미달러 대비 페소화 환율의 상승으로 인한 수출 호조에 따라 긍정적 효과가 경제를 뒷받침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에너지 분야 등 외국인 투자유치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멕시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조치의 이행으로 성장의 걸림돌을 제거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은행측은 멕시코의 경제성장을 2017년 3%, 2018년 3.2%로 각각 예상하면서 점진적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와 문화


사회문화적 특성
멕시코 사회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중성과 극심한 빈부 격차의 공존, 혼합 문화 속 계층별 양분화 경향, 낙천적이고 보수적 성향의 국민성 등을 들 수 있다. 

멕시코에서 죽음은 금기의 단어가 아닌 삶과 더불어 함께하는 존재의 또 다른 측면이며, 멕시코인들은 죽음을 희롱하면서 삶을 달관하고자 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11월 첫 번째날과 두 번째 날을 죽음의 날(Día de Muertos)로 정하고 죽은 친지나 친구를 기억하면서 명복을 비는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데, 설탕이나 초콜릿, 아만토 등으로 해골모형을 만들고 이를 제단에 놓고 죽은 이의 명복을 빈다. 

멕시코는 2010년 빌 게이츠를 제치고 세계 제1위 부호로 발표된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과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원주민이 공존하는 극심한 빈부 격차가 있는 곳이며, 혼합된 문화 속에서 계층별로 양분화되어 있는 사회적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정치나 언론 및 경제계에는 주로 백인들이 진출해 있고 상류층은 스스로를 북아메리카나 유럽 사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멕시코시티에서 길거리 동냥을 하거나 신호대기 중인 자동차에 다가와 앞 유리창을 즉석에서 닦아주고 푼돈을 버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원주민이며, 사회적 신분이 출신 인종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멕시코 사람들은 친절하고 매우 열정적이며 낙천적이지만 성이나 가치관에 관해서는 보수적이며 배타적이기도 하다. 대가족 위주이며, 핵가족으로 살아도 사촌들과 교분이 두터워 주말에는 친척 생일파티나 돌잔치, 교회 의식 등 많은 모임이 있어서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경향이 있다.

인종 및 종교
멕시코의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약 1억 1950만 명이다. 종족 구성은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계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 60%, 원주민인 인디오 30%, 백인 9%, 기타 1%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 지도층은 대체로 백인이다. 사탕수수 농장으로 인한 노예 무역의 결과로 베라크루스Veracruz 주, 오악사카Oaxaca 주에는 소수지만 흑인들이 분포한다. 밀림이라는 지형적 요인으로 스페인의 정복이 19세기에서야 이루어진 유카탄Yucatán반도 일대와 오악사카에는 상대적으로 원주민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이다.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 경험의 영향으로 대부분 토착화한 로마가톨릭을 믿으며(83.9%), 기독교는 7.6% 정도이다. 이 외 원주민 고유의 토착 종교도 소수 남아 있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1911년 멕시코혁명 전까지 기득권층을 형성했으나 혁명정부의 사회개혁으로 기득권을 잃었으며 혁명정부는 로마가톨릭 교회 성직자의 투표 참여를 막아 교회가 정치 문제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3세계의 종교가 다 그렇긴 하지만 원주민 문화의 영향으로 멕시코의 가톨릭은 토착화된 측면이 많다. 최근 중남미 지역의 전반적인 동향에 따라 멕시코도 주류 가톨릭 교세는 정체되거나 줄어들고 개신교, 독립교회나 기타 그리스도교 종파 인구가 늘어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가톨릭교회가 절대적인 다수를 유지하고 있다. 

언어와 교육
멕시코의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로 인구의 97%가 사용하고 있으며 원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토착어는 65개이다. 전 세계에서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의 3분의 1이 멕시코에 살고 있다. 멕시코에서 사용하는 스페인어는 스페인에서 쓰는 스페인 스페인어와는 다른 어휘와 어법을 사용하는 멕시코 스페인어라고 하는 별도의 방언을 사용한다. 원주민들은 아메리카대륙에서 쓰이는 케추아Quechua 어, 아이마라Aymara 어, 과라니Guaraní 어와 대표적인 토착어인 나우아틀Nahuatl 어(사용 인구 150만 명)를 사용한다. 멕시코 정부는 일부 원주민 지역사회에 2개 언어를 병용하는 초등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멕시코는 유치원 2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6년으로 구성된다. 사립학교를 제외하고는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이며, 이 가운데 초등교육 6년은 무상의무교육, 중학교 3년은 무상교육이다. 사립학교의 학비는 공립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으며 일반적으로 등록금 수준이 학교의 평판과 일치한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대학이자 라틴아메리카 최대 규모의 대학인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는 1551년에 설립된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대학으로 노벨상 수상자 3명 및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몇몇 학과에서는 세계 20위권 안의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멕시코가 2010년 현재까지 배출한 3명의 노벨상 수상자는 1982년 평화상을 수상한 알폰소 가르시아 로블레스Alfonso García Robles, 1995년 화학상을 수상한 마리오 호세 몰리나 엔리케스Mario José Molina Henríquez, 1990년 문학상을 수상한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등이다. 이 가운데 알폰소 가르시아와 옥타비오 파스는 외교관 출신이다. 

문학과 미술
멕시코 문학은 스페인어 권의 영향력 있는 문학 국가들인 스페인, 아르헨티나, 쿠바와 더불어 왕성한 창작과 파급력 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멕시코 문학에서는 17세기 바로크 시의 절정을 여실히 보여준 시인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Juana Inés de la Cruz 수녀와 1990년 멕시코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를 꼽을 수 있다.

멕시코에서는 20세기 초 멕시코혁명 이후에 국가의 주도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프로젝트가 사회, 문화, 예술에 걸쳐 이루어졌다. 문맹률이 높았던 민중들에게 메스티소 혼혈 인종의 긍정과 멕시코 역사에 대한 자긍심, 정체성을 불어 넣기 위한 목표로 공공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벽화 운동’이 멕시코국립자치대학UNAM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바스콘셀로스José Vasconcelos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계몽운동은 예술 분야에 그치지 않고 사회, 문화, 정치적 분야에까지 파급력을 보였는데, 근대 멕시코의 3대 벽화 운동가로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1886∼1957),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1883∼1949),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1896∼1974) 등을 들 수 있다. 벽화 운동 이외의 현대 멕시코 화가로는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루피노 타마요Rufino Tamayo(1899∼1991) 등이 있다. 

축제문화와 대중음악 마리아치
멕시코는 거의 매달 주요한 국경일과 축하 행사가 있으며, 각 마을마다 수호성인의 날이나 축제가 개최된다. 2월 하순 또는 3월 초순경의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근처에 열리는 카르나발carnaval(카니발)은 40일간의 사순절 전까지 커다란 축제가 된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축제로는 과나후아토 세르반티노 축제, 과달라하라 국제도서전 축제,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죽은 자들의 날) 축제 등을 들 수 있다. 

멕시코에는 ‘마리아치Mariachi’라 불리는 전통 대중음악 문화가 있는데, 멕시코 전통 선율을 연주하는 5~10명 사이의 민속악단 혹은 그들이 연주하는 민속음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광장이나 고급 레스토랑 등지에서 멋진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은 뮤지션들이 낭만적인 연주와 노래를 들려주는 모습은 사진이나 영상 등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들이 바로 마리아치 악단이다. 마리아치는 국경을 넘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멕시코의 전통 기악합주단이며 멕시코의 상징이자 멕시코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처음에 마리아치 음악은 결혼식이나 마을의 다양한 행사를 빛내는 향토색 짙은 음악으로 출발했으며, 낭만적인 멕시코 사람들은 마리아치 밴드를 동원해 한 밤중에 사랑하는 사람의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전하기도 한다. 마리아치의 레퍼토리는 매우 광범위해서 전통적인 노래 이외에도 여러 지방의 노래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연주된다. 기본적인 리듬은 물론 멕시코인의 생활과 감정들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 가사 또한 멕시코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총체이다. 아울러 마리아치 음악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고전 레퍼토리를 통합하였고, 시각적인 효과와 함께 음악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비우엘라Vihuela와 기타론Guitarrón 등 기타를 개량한 악기를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포함시키고 있다. 멕시코인들의 사랑과 슬픔 등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대중음악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볼레로’와 ‘란체라’이다. 볼레로Bolero는 멕시코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열정 및 인생의 희로애락이 낭만적으로 표현된 음악으로 멕시코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스페인어권 국가에서 사랑받고 있는 음악이며, 란체라Ranchera는 농민의 춤곡에서 비롯된 향수와 염세적인 감성이 지배하는 음악을 말한다. 

스포츠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 복싱, 야구, 레슬링 등이다. 멕시코는 북중미에서 축구를 가장 즐기는 나라로서 그 수준은 북중미카리브 지역에서 미국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야구도 미국의 이웃 나라답게 인기가 많고 상당히 잘하는 편으로 동남부 유카탄Yucatán 지방과 서북부 바하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 반도 지방에서는 축구보다 야구가 매우 인기가 있다. 미국 영향을 많이 받아서 농구도 상당한 수준급이며 구스타보 아욘Gustavo Ayon을 비롯한 정상급 NBA 리거도 보유하고 있다. 멕시코는 루차 리브레Lucha Libre(자유로운 싸움이라는 뜻)라는 형태의 프로레슬링을 하는 루차도르들의 본고장이기도 한데, AAA와 CMLL의 양대 단체를 축으로 자체 흥행도 활발하며 수많은 훌륭한 레슬러들을 배출해 왔다. 

전통의상
멕시코 전통의상으로는 ‘우이필’과 ‘레보소’가 있다. 우이필Huipil은 멕시코의 토착 원주민이나 멕시코의 농사일을 하는 여자들이 입는 민족 의상으로서, 소매 없는 블라우스 모양의 관두의貫頭衣 또는 중남미, 특히 과테말라의 토착 원주민 여성들이 이용하는 폰초식의 의복이다. 레보소Rebozo는 얼굴을 감싸는 일 및 숄이나 베일의 의미인 스페인어인데, 멕시코 등 중남미의 여성이 머리나 어깨를 덮거나 얼굴의 일부를 덮어서 사용할 수 있는 무지나 자수를 한 긴 스카프를 말한다. 

멕시코를 상징하는 모자는 솜브레로Sombrero라 불린다. 솜브레로는 ‘넓은 챙이 있는 모자’를 말하는데, 본래 스페인의 코르도바Cordoba 지역에서 만들어져 ‘솜브레로 코르도베Sombrero Cordobés’라고 불리던 것이 멕시코로 건너가면서 현지 기후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화한 것이다. 멕시코 솜브레로는 머리, 얼굴뿐 아니라 목과 어깨까지 햇살로부터 보호할 만큼 챙이 넓은데, 한편으론 멕시코인의 여유와 낙천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게으름과 무력함을 상징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음식문화
옥수수가 주식인 멕시코에서는 말린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 얇게 밀어 만든 토르티야tortilla에 다진 고기 등 각종 음식을 넣어 먹는 타코Taco를 대표 음식으로 친다. 멕시코식 케밥이라 할 수 있는데 동그랗게 부쳐낸 토르티야에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각종 육류 및 고추, 피망, 선인장 등 다양한 야채들을 각기 볶아낸 것을 쌈처럼 싸먹는 전형적인 멕시코 요리다. 손에 들고 다니면서 먹기 쉬워 한 끼를 간편하게 때우기에는 최고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타코는 대중적인 멕시코 요리이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가게를 찾을 수 있다. 아주 전형적인 멕시코 음식으로는 우리의 감자탕과 비슷한 포솔레Pozole가 있으며, 주요 음료는 오르차타Horchata가 있는데 식혜와 비슷한 음료이며 약간 계피향이 난다. 주류는 메스깔Mezcal 등이 있고, 그 종류 중에 잘 알려진 술로는 선인장의 일종인 아가베(용설란)의 줄기를 쪄서 발효시킨 테킬라Tequila가 있다. 

언론과 한류 문화
멕시코의 주요 일간지로는 엘유니버설El Universal, 레포르마Reforma, 라호르나다La Jornada, 엘 솔 데 멕시코El Sol de México (OEM) 등이 있고, 주요 주간지로는 프로세소Proceso, 시엠프레Siempre, 임팍토Impacto, 에포카(Época) 등이 있다.

TV방송은 카날Canal 11, 카날 22 등 2개 공영 채널과 텔레비사Televisa, TV 아스테카Azteca가 운영하는 7개 민영 채널 이외에 외국 TV 방송, 유선 중계 방송망 등 전국 220여 개의 TV 방송국이 있다. 멕시코는 특히 브라질과 함께 한국의 드라마에 해당하는 텔레노벨라Telenovela가 강세를 띤다. 멕시코에서는 그동안 한국 드라마가 수차례 방영되었다. 수도권 지역 방송인 TV 멕시켄세(카날 34에서 방영)에서는 월드컵 직후인 2003년부터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기 시작하여, ‘별은 내 가슴에’를 시작으로 ‘이브의 모든 것’, ‘겨울연가’, ‘내 이름은 김삼순’, ‘대장금’ 등을 방영함으로써 멕시코 한류 열풍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멕시코의 한류 팬클럽들은 한국 문화 전반에 큰 관심을 표명하며, 한글은 물론 사물놀이, 부채춤 등 한국 전통 문화의 습득과 전파에 힘쓰고 있다. 멕시코시티에는 현지 한류 팬클럽 회원으로 구성된 사물놀이팀 ‘휘모리’가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 2개월마다 지방을 순회하며 한국-멕시콘 문화 교류전을 개최하고 있다. 한편 멕시코의 어린이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원제 Carrusel)이 1990년경 한국 KBS 2TV를 통하여 국내에 방영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관광산업
멕시코는 세계 10위의 관광국으로 관광이 국내 3대 산업 중 하나이다. 광활한 영토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동식물 생태계, 아스테카와 마야문명으로 대표되는 인류학 및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 식민지 시대에 300년간 건축된 식민지풍의 도시, 교회, 수도원 등의 문화유산이 풍부하다. 멕시코는 나라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마야, 올멕, 아스텍 문명 지역과 에스파냐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종교 건축물까지 자그마치 27곳의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2008년 멕시코를 찾은 관광객은 2300만 명이었으며(이 가운데 미국 관광객이 80%) 총 130억 달러의 관광 수익을 올렸다. 2009년 관광 부문의 외화 수입은 글로벌 경기 침체 및 4월에 발생한 신종인플루엔자 사태로 전년 대비 15.2% 감소하였다. 

한국과 멕시코의 관계


기본 관계
멕시코는 1948년 12월 12일 한국을 정식 승인하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UN 정회원국 자격으로 UN의 대한對韓 지원 결정에 따라 물자 원조를 한 역사가 있다. 1962년 1월에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62년 7월 주멕시코 한국상주대사관이, 1978년 3월 주한 멕시코상주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85년 8월 2일에는 멕시코 대외무역청(IMCE) 서울사무소를 개설하였다. 멕시코는 보편주의 외교라는 기본 원칙 아래 북한을 포함한 세계 모든 나라와 관계를 수립하고 있으며,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원칙에 따라 한국 문제는 한국인 스스로가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반도 문제는 원칙적으로 남북한 간의 대화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특히 아시아 제3의 경제 파트너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멕시코는 경제, 교역, 기술 협력 등 제반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함으로써 ‘21세기 공동 번영을 위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1991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이 멕시코를 최초로 공식 방문하였고, 멕시코에서는 1996년 11월 일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 Ponce de León 대통령이 공식 방한하였다. 이후 1997년 6월 김영삼 대통령 멕시코 공식 방문, 2001년 6월 비센테 폭스 케사다Vicente Fox Quesada 대통령 공식 방한, 2002년 10월 김대중 대통령 멕시코 방문(APEC 정상회의 참석),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 멕시코 공식 방문, 2005년 11월 비센테 폭스 케사다 대통령 방한(APEC 회의 참석), 2008년 7월 이명박 대통령과 펠리페 칼데론Felipe Calderón 대통령의 정상회담(일본 G-8 회의 계기), 2010년 7월 이명박 대통령 멕시코 국빈 방문, 2012년 6월 이명박 대통령 멕시코 방문(G20 정상회의 참석), 2013년 10월 박근혜 대통령과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 대통령의 정상회담(인도네시아 APEC 정상회의 참석 계기)에 이어 2015년 11월에도 박근혜 대통령과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 대통령의 정상회담(필리핀 APEC 정상회의 참석 계기)이 이루어졌다.

멕시코와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유사한 경제 규모를 가진 중견 국가로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G20, 동아시아·라틴아메리카 협력포럼(FEALAC, Forum for East Asia-Latin America Cooperation) 등 국제 무대에서 인권 안보 개발 환경 노동 금융위기 등 다양한 글로벌 이슈에 대해 유사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대對멕시코 정책
한국은 멕시코를 한국 기업의 대미對美 수출 및 라틴아메리카 진출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대對멕시코 투자는 1988년 삼성전자의 티푸아나Tijuana 생산법인 투자가 효시이며,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와 함께 미국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국내 기업의 대미對美 수출과 라틴아메리카로 진출하는 활동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멕시코는 2009년 한국의 대對라틴아메리카 수출액 267억 6000달러 가운데 26.6%인 71억 3000달러를 차지하여 라틴아메리카 무역 대상국 중 제1위 수출 대상국이었으며, 대對라틴아메리카 무역 흑자액 151억 1000달러 가운데 40.8%인 61억 6000달러를 차지하여 제1위 흑자 창출국을 차지하였다.

한국은 멕시코와 한국 양 국민 간의 문화 교류 증진 등 상호 이해 및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라틴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한인 이주 및 정착국으로서 역사적 문화적 유대를 활용하고 있다.

교역 및 동포 현황
한국의 대對멕시코 수출은 97억 달러, 수입은 23억 달러(각 2013년)에 달하여 멕시코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12위의 수출국이자 제32위의 수입국이다. 우리의 대對멕시코 주요 수출품은 평판디스플레이, 칼라TV, 무선전화기,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동, 아연광, 무선통신기기 부품 등이다. 

멕시코에 거주하는 한국 재외동포는 약 11,300여 명 수준으로 집계되고 있다(2014년 8월 기준). 지역별로는 멕시코시티, 과달라하라, 과나후아또, 바하칼리포르니아 등지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교민이 6,000여 명으로 가장 많고, 상기 주요 도시 이외의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약 2,900여 명은 1905년 멕시코 이주 한인 1,033명의 후손으로서 멕시코 국적을 소지하고 있다. 거주 교민 중 일부는 에콰도르, 과테말라, 아르헨티나 및 파라과이 등 중남미 초기 이민자들로서 멕시코에 재이주하여 거주하고 있다. 많은 수의 교민들은 한국에서 의류 및 악세사리 등을 수입, 판매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멕시코 시내 센트로Centro 시장에 밀집하여 도소매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업종이 다양해져 소나로사Zona Rosa 일대에는 식당, 미장원, 수퍼마켓 및 학원을 운영하는 교민이 늘어나고 있다. 교민들의 주요 영업 지역은 치안이 다소 불안한 구역이어서 강도 등 강력범죄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2015년에는 총기 강도사건으로 한국인 교민 여성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북한과의 관계
멕시코 정부는 다원주의 외교정책에 입각해 북한과 1980년 9월 수교한 뒤 1992년 3월 상주공관 설치를 허용하였다. 멕시코 정부는 1998년 1월 북한 공관원 2명의 코카인 35㎏ 밀반출 사건을 계기로 대사를 추방하고 공관원 숫자를 축소하였다. 또한 북한 외교관 체류 비자 기간 및 북한인 출입 제한 등 대對북 제재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 마약 밀반출 사건으로 북한 공관은 대사대리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한동안 양국 관계는 멀어졌다. 이후 북한은 2001년 8월 멕시코와 외교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였으며, 2002년 3월 북한 대사의 신임장 제정 후 양국 관계가 다소 정상화되었다. 2009년 5월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멕시코 정부는 북한 정부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의 핵 계획 포기와 6자 회담 복귀를 촉구하였다. 2010년 현재 멕시코는 주한駐韓 대사가 북한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멕시코 남동부 최남단 과테말라 국경 지대에 있는 치아파스Chiapas 주는 멕시코 정부가 아닌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라는 무장 세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사실상의 해방구 지역이다. 1994년에 발효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미국, 캐나다와의 무역을 확대하고 멕시코의 제조산업을 강화하는 이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빈부격차를 일시적으로 확대하고 전통적인 공동체에 사는 인디오의 공유지를 해체하며 미국산 옥수수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농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부작용도 발생시켰다. 이에 NAFTA가 발효되는 1994년 1월 1일에 마르코스 부사령관 등이 이끄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멕시코 최빈곤 지역인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하여 원주민의 권리 확대를 요구하며 12일간 정부군과 교전을 벌였고 수십 명의 사망자를 냈다. 1996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나 사파티스타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고, 정부 측의 반응이 없자 사파티스타는 자체적인 사법, 보건,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 

‘사파티스타’란 명칭은 멕시코 혁명 당시 남부 해방군(Ejército Libertador del Sur)의 사령관이었으며 국민적 영웅 중 하나로 칭송되고 있는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자신들이 그 이념적 계승자라고 보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투쟁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받던 원주민들의 생존권 수호 운동이지만, 더 크게는 가중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를 선포하며 세계적 저항을 호소하는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사파티스타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 견해들이 회자되고 있다. 먼저 기존과는 다른 운동 자체의 성격 측면인데, EZLN은 여타의 정치운동들과 달리 국가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국제주의, 위계에 대한 반대, 소수자의 권리 등을 지향하는 탄력적인 운동이라는 점이며 이는 ‘새로운 권력개념’ 또는 ‘포스트모던한 반란’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두 번째는 운동 공간의 특성 측면으로, EZLN은 지구적 통신망을 새로운 운동 공간으로 잘 활용하는 능력과 가능성으로 그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코스는 “정부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보통신기술을 다루는 한 사람의 전문가”라고 이야기하며, “만약 칼 마르크스나 체 게바라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궁금하다”라는 한 리포터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그밖에 EZLN 운동을 자율주의적 관점에서 ‘계급의 자기가치화’로서 해석하고 있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추가적인 담론의 소재가 되고 있다. 

EZLN 지역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에밀리아노 사파타, 체 게바라,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함께 있는 벽화를 볼 수 있다. EZLN은 치아파스 주를 해방구로 선포하고 반세계화 운동의 최대적 존재로서 내외의 지원을 받아 현재도 정부군과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멕시코의 마약전쟁(Mexican Drug War)

멕시코의 사회 문제 중 심각한 사안은 마약 전쟁 사태이다. ‘마약 전쟁’은 멕시코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라이벌 마약 카르텔들과 그들을 제압하려는 멕시코 정부군과 시민 자경단 간에 현재 진행 중인 무장 충돌을 말한다. 2006년 집권한 국민행동당의 펠리페 칼데론Felipe Calderón 대통령은 마약과 관련된 모든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을 최선의 과제로 삼고 군부를 동원해 강력한 마약 카르텔들을 와해시키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멕시코 마약 조직들은 현재 불법 마약 도매 시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2007년에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코카인의 90%를 공급하였다. 거대 조직인 티후아나와 걸프 카르텔의 중심 인물들이 검거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더 심각한 폭력 사태들을 초래하였고 미국으로의 밀매 경로를 차지하고자 하는 카르텔들의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마약 전쟁이 시작된 후로 마약 카르텔의 폭력으로 인해 4만 명 이상이 피살되는 참상이 벌어졌다. 칼데론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에서 군대에 심하게 의존하였는데, 단속에 참여하는 장교들의 많은 수가 부패 혐의가 있는 상태에서 대단한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제도혁명당(PRI)의 최장기 집권과 정권교체

멕시코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계속적인 집권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1929년에 국내의 다양한 혁명 세력을 하나로 묶어 국가혁명당(PNR)을 창당하였으며, 이 정당은 1938년 멕시코혁명당(PRM)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1948년 현재의 제도혁명당(PRI: 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으로 개칭된 후 2000년까지 71년 동안 집권하여 세계 최장기 집권 정당을 기록하였다. PRI는 국내에서는 일당 독재를 추진하고 미국과 서방의 자본에 의해 경제를 확대하였지만, 다른 한편 외교적인 면에서는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권과의 관계도 밀접하게 가져갔으며, 정책이 모순된 체제면서도 냉전이 종결된 20세기 말까지 여당으로서 정치를 지배하였다. 멕시코는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석유와 실버의 생산과 수출로 큰 부를 획득했지만, 동시에 진행된 근대산업화 과정에서 막대한 대외 부채를 안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산업화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만성적인 물가 상승과 일부 부유층에 집중된 부의 불균형, 그리고 자원 가격 폭락에 따른 경제 위기 등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민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정책적 실패와 정치적 부담 등으로 인해 제도혁명당은 2000년 총선과 대선에서 국민행동당에 패배하면서 71년간의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The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은 1990년 3월 멕시코 살리나스 대통령의 제의로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 정부 사이에 1992년 조인된 자유 무역 조약이며 1994년 1월부터 캐나다-미국 자유 무역 협정이 확대 개편되면서 발효되었다.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동일한 노동법과 환경보전법 적용, 역내의 관세 및 수입제한을 낮추고 15년 이내에 원칙적으로 철폐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미국의 자본,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노동력이 결합된 단일시장 구축이 NAFTA의 의미라 할 수 있다. 2013년 기준으로, 북미 자유 무역 협정은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 블록이며, 인구 4억 7천만 명에 이르는 단일시장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북미환경협력협정(NAAEC)과 북미노동협력협정(NAALC)이라는 2가지 보충협정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시티의 역사 지구와 소칼로 광장

멕시코시티는 끊임없는 볼거리로 관광객들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수도이다. 멕시코시티는 16개의 자치구와 300개 이상의 지역을 포함하는 거대한 규모를 갖고 있다. 멕시코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멕시코시티의 명소는 소칼로Zocalo 광장, 국립궁전Palacio Nacional, 메트로폴리탄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멕시코 예술궁전Palacioo de Bellas Artes(국립예술극장) 그리고 알라메다 공원Alameda Central 등이 있는 역사 지구에 집중되어 있다. 

멕시코 예술궁전에서 북쪽으로 몇 블록 이동하면 멕시코시티에서 마리아치 음악을 듣기 가장 좋은 가리발디 광장Plaza Garibaldi이 있다. 역사지구 서쪽에 위치한 레푸블리카Republica 광장은 새롭게 개장된 혁명 기념물이자 국립박물관이다.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큰 차풀테펙Chapultepec 공원은 차풀테펙Chapultepec 성, 현대미술박물관Museo de Arte Moderno, 국립인류학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ia으로 나뉘어져 있고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다. 소나 로사Zona Rosa, 로마Roma, 꼰데사Condesa, 꼬요아깐Coyoacan, 산 앙헬San Angel 등의 명소를 가볼 수 있다. 공원, 광장, 상점, 시장, 카페들과 유명한 관광지가 모여 있는 이 지역들은 특히 외래 방문객들과 외국인 거주민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근처 플랑코Polanco 지역에는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과 근사한 레스토랑이 있다. 

보다 남쪽에 위치한 멕시코국립자치대(UNAM) 캠퍼스는 근대 건축물과 멕시코의 유명 화가들이 그린 벽화들로 유명하다. 대학의 문화센터에서는 다양한 이벤트와 공연이 열린다. 고대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로 불렸던 멕시코시티는 고대 텍스코코 호수 너머 멕시코 계곡에 건설되었다. 아즈텍인들은 도시로 항해하기 위해 복잡한 운하를 건설했다. 1519년 스페인의 정복 이후 아즈텍의 건축물과 운하들은 파괴되고 근대적인 건물과 도로로 대체되었다. 남쪽 소치밀코Xochimilco 자치구와 북쪽의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유적지에서 당시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엿볼 수 있다. 도시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는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 피라미드 유적이 있다. 

소칼로Zocalo 광장은 멕시코 수도의 살아 숨쉬는 심장이자 멕시코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곳이다. 몇 미터 옆에는 스페인 정복 이전의 폐허와 장엄한 식민지시대 건물이 있고, 도로 주변에서는 경영인, 직장인, 패션리더, 행상인, 악사, 아즈텍 댄서가 교차하는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 도시의 주요광장인 이곳은 소칼로라고 불리지만 공식명칭은 헌법광장Plaza de la Constitucion이다. 이는 도시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연중 도회적, 문화적 이벤트와 기념행사가 열린다. 해가 지속될수록 소칼로는 다양한 변모를 보이고 있다. 소칼로의 동쪽에 있는 국립궁전Palacio Nacional(대통령궁)은 아즈텍 시대 통치자 목테수마Moctezuma가 세운 곳으로 멕시코시티에서 반드시 들려야 할 관광지이다. 중앙 계단과 2층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벽에는 스페인시절의 시작부터 현대까지의 멕시코 역사가 벽화로 남겨져 있다. 소칼로 북부에 위치해 있는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a 성당은 아름다운 식민지시대의 종교미술과 재단위의 장식품들로 가득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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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세계테마여행 방송일시: 5월 30일 ~ 6월 2일 오후 8시 50분


지중해의 푸른 전설,몰타 (큐레이터 오동석 여행스토리텔러)


제주도 면적의 6분의 1 면적의 작은 섬나라지만 지중해의 정 가운데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7000년의 역사와 고대부터 중세, 현재까지가 공존하는 나라, 몰타! 

전 세계를 통틀어 1㎢ 당 가장 많은 유적지가 있는 곳.발 닿는 곳이 곧 유적지이고 박물관인 나라니 (7000년 역사가 남긴) 고고학적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울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부. 중세 성채 도시를 거닐다, 발레타 - 5월 30일 오후 8시 50분

☞제2부. 지중해를 온몸으로 느끼다, 고조 - 5월 31일 오후 8시 50분

☞제3부. 이토록 눈부신 파랑, 코미노 - 6월 1일 오후 8시 50분

☞제4부. 중세로의 시간여행, 임디나 - 6월 2일 오후 8시 50분


https://youtu.be/-mrJ-3ElRIo


http://ebstheme.blog.me/220719823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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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인내와 관용의 나라 불가리아 Bulgaria

불가리아는 북방 유목민 계열인 불가르족이 세운 나라로서, 비잔틴 제국의 지배에 이어 500년간의 터키 지배를 겪고서도 독립을 이뤄낸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와 인내와 관용의 민족으로 표현한다. 이 나라는 독립 후 공산화가 되었다가 1990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을 했지만 여러 여건의 불비로 인해 경제 운영 등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고유의 민족적, 문화적 자산과 저력을 바탕으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우리와 여러 모로 친숙한 점이 많은 불가리아를 만나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불가리아Bulgaria는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로서 남쪽으로는 그리스, 터키, 동쪽으로는 흑해, 북쪽에는 루마니아, 서쪽에는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와 접한다.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넓은 11만㎢ 정도이나 인구는 우리보다 훨씬 적다. 2014년 통계로 692만 명 정도로 남한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는 소련의 위성국가의 하나로서 우리에게는 머나 먼 나라였다. 1989년 소련이 무너지고 난 후 이 나라는 급속히 서방 진영에 가까워졌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고 2007년에는 유럽연합(EU)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전의 종주국 러시아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 

직사각형 모양의 불가리아는 두 개의 큰 평원과 두 개의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루마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다뉴브 강을 따라 다뉴브 평원이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그 평원 남쪽으로 동서로 뻗어 있는 것이 발칸 산맥이다. 발칸 산맥은 세르비아와의 국경 지역부터 동쪽 흑해 연안까지 560㎞ 가량 길게 뻗어 있는데 발칸 반도라는 지명도 이 산맥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발칸 산맥은 고대에는 ‘하에무스 산’이라고 불렸다. 이는 이곳에 오랫동안 살던 트라키아 인들의 이름인데 불가리아 사람들은 이 산맥을 ‘스타라 플라니나’라고 부른다. ‘오래된 산’이라는 뜻이다. 발칸 산맥 남쪽에 동쪽으로 세모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평야가 트라키아 평원이다. 그리스 역사서에도 많이 등장하는 트라키아 지방이 바로 이 평원을 말한다. 또 하나의 산맥인 로도페 산맥은 그리스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길이가 240㎞이다. 로도페 산맥 서쪽 끝에는 또 릴라 산지가 높이 솟아 있는데 여기에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높은 무살라 산(2925m)이 있다. 이 산은 발칸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불가리아의 유명한 릴라 수도원 역시 릴라 산맥 깊은 골짜기에 있다. 

불가리아 땅은 상당한 높이의 산맥들이 가로지르기때문에 산지의 비율도 높다. 고도 600m 이상의 산지가 국토의 30%를 점하며 여기에 높이 200~600m의 구릉지대를 합치면 그 비율은 70%나 된다. 수도 소피아 역시 큰 산에 인접해 있다. 비토샤 산이라는 이름의 높은 산이 소피아를 감싸고 있는데 그 높이가 2,300m에 달하는 덩치가 큰 산이다. 그러나 높은 산에 인접한 소피아에서부터 트라키아 평원이 시작된다. 이 트라키아 평원은 동쪽으로 뻗어 터키 이스탄불까지 이어진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소피아(당시 이름은 세르디카였다)에서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군사도로가 놓여 있었다. 유럽 대륙에 큰 제국을 세웠던 훈족이 몇 차례에 걸쳐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였을 때 이용하였던 도로가 이 군사도로였다. 

불가리아는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발칸 산맥은 대륙의 기단들이 넘어오는 데 방벽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북쪽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이 크고 남쪽은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은 영하로 살짝 내려가는 정도이며 여름 7,8월의 평균기온은 20도를 살짝 넘어선다. 연평균 강우량은 630㎜로 우리의 절반 정도이다. 장마나 태풍처럼 많은 비를 내리는 기상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강우량의 분포 역시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겨울은 월평균 40~55㎜, 여름은 30~45㎜ 로서 지중해의 영향으로 여름보다 겨울이 조금 많지만 대체로 연중 골고루 비가 내리는 편이다. 

불가리아의 역사

북방 유목민에 의해 세워진 나라 불가리아
고대 불가리아 지역에는 약 2만년 전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트라키아Thracia인(불가리아인의 조상)이 최초로 거주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CE 480년경에는 트라키아인에 의해 도시국가가 건설되었고, BCE 46년 로마제국이 트라키아인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대다수 트라키아인들이 모에지아 및 트라키아 지역에서 이탈해 분산되었다. 로마제국의 몰락 후에는 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으로 발칸지역이 황폐화되었다. 

‘불가리아’라는 나라를 세운 주체는 불가르Bulghar족이다. 불가르족에 대한 언급은 480년 비잔틴의 제노 황제가 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동원하였다는 비잔틴 사서의 기록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 불가르족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었던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유목민이라는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이상의 정확한 기원은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신용하 교수 같은 경우 불가르족이 부여夫餘족이었다는 주장도 내어놓고 있다. 4세기 후반 부여족의 일파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프카즈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불가르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체로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사료상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단지 부여가 ‘부르’라고도 불렸다는 등 몇 가지 명칭이 유사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좌우간 7세기 이전에는 카프카즈 북부로부터 흑해 북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과 약탈, 비잔틴 제국의 용병 등으로 활동하며 살았던 불가르족은 7세기에 들어와 동유럽 역사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불가르족의 한 우두머리인 쿠브라트Kubrat라는 인물이 불가리아라는 이름의 나라를 635년경에 세웠던 것이다. 비잔틴 역사가들의 기록에는 쿠브라트가 세운 나라를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라고 부르고 있다. 그 영토가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불가리아는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흑해 북안의 땅에 세워진 나라였다. 대불가리아가 세워질 당시 이 일대는 무주공산이 아니라 또 다른 아시아 유목민인 아바르Avar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바르인들은 그 이전의 훈Hun족처럼 6세기 중반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으로 들어와 흑해 북안에서부터 헝가리 평원 일대에 걸친 대제국을 세웠는데 바로 이 아바르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불가르인들이 세운 나라가 대불가리아였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비잔틴의 한 연대기 기록에 의하면 쿠브라트는 훈족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에 발견된 『불가리아 칸 명부』라는 문서에 의하면 쿠브라트는 훈족의 아틸라Attila 왕의 후손이다. 옛 슬라브어로 기록되어 있는 이 문서에서는 쿠브라트 가문이 아틸라로부터 전해져 왔으며 2대가 아틸라의 막내 아들인 이르니크이고 4대가 바로 쿠브라트라고 한다.

아틸라가 453년 돌연사 한 후 그 지배하에 있던 게르만 족속들이 대거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거대한 훈 제국이 무너졌는데 아틸라 왕의 세 아들들에 대한 기록이 라틴 사서들과 비잔틴 사서들에 남아 있다. 그 기록들에 의하면 이르니크(혹은 에르나크)는 형들과는 달리 비잔틴 제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세력 보존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다뉴브 강 하구 도브루자 지역에 정착하여 조용히 세력을 확대해갔는데 그 후손이 쿠브라트였던 것이다. 7세기 말에 씌어진 이집트 콥트파 주교 요한의 기록에는 쿠브라트는 어릴 때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그곳 황궁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는데 이런 연유로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쿠브라트는 비잔틴 사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훈족의 양대 부족인 우티구르 훈족과 쿠트리구르 훈족을 통일하여 그를 기반으로 대불가리아를 세웠다. 

그러나 대불가리아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브라트의 사후인 670년경 하자르Khazar인들의 공격으로 대불가리아는 멸망하였다. 그 아들들은 불가르족을 이끌고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장남은 볼가 강과 카마 강 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볼가 불가리아Volga Bulgaria라는 나라를 세웠다. 쿠브라트의 3남 아스파루크Asparukh는 다뉴브 델타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앞에서 말한 그의 선조 이르니크가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이 불가르족 집단이 다뉴브 강을 넘어 도브루자 지방으로 진출하자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콘스탄틴Constantine 4세는 이들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패한 콘스탄틴 4세 황제는 681년 아스파루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도브루자 지방의 점령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다뉴브 강과 발칸 산맥 사이에 위치한 모에시아 주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에 불가르족의 나라가 세워졌다. 이것이 ‘다뉴브 불가리아’ 혹은 ‘불가리아 제1 제국’이다. 발칸 반도의 이 불가르족 국가는 9세기 말에 마자르Magyar족에 의해 세워진 헝가리Hungary와 더불어 대표적인 북방 유목민 국가였다. 불가리아는 정확히 말해서 유목민 출신의 군사엘리트인 불가르족과 일반 백성을 이룬 슬라브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그러나 그 지배층이 훈족의 후예인 기마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성격 역시 오랫동안 북방 유목민 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의 왕은 아시아 유목민들의 왕 호칭인 ‘한汗(칸Khan)’으로 불렸다.

9세기 초에는 영토가 서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드디어 유럽의 최강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크룸Krum(그리스 사서에서는 ‘크루모스’라고 한다) 칸은 아바르인들, 비잔틴 제국과 싸워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그리하여 당시 불가리아 제국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의 영토를 포괄하여 남쪽으로는 비잔틴 제국, 서로는 프랑크 제국과 어깨를 겨루는 큰 세력이 되었다. 

슬라브화와 기독교화
불가리아에는 슬라브Slav족의 수가 꾸준히 늘어갔다. 슬라브족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슬라브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언어도 슬라브어가 주된 언어가 되었다. 지배층인 불가르 귀족들(볼리야르Bolyar)은 전통적인 천신(텐기르) 신앙을 하였지만 슬라브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소수 지배층인 불가르족의 통치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수용이 불가피하였다. 861년 보리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불리한 전세를 벗어나기 위해 비잔틴 황제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는 몇 년 뒤 자신의 가족들 및 일부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서양에서는 기독교권 내부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틴 정교회 간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보리스Boris 1세는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적 지위를 얻어내었다. 기독교의 도입으로 불가리아 칸의 권력은 일층 강화되었다. 예전에는 칸은 불가리아 부족 연합의 우두머리 성격을 띠었으나 이제는 신의 지상 대리자임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을 하나의 불가리아 인민으로 통일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927년 불가리아 정교회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는데 이는 세르비아 정교회 독립보다 300년 앞선 것이며 러시아 정교회보다는 600년 앞선 것이다. 그리하여 불가리아 총주교좌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 이은 여섯 번째 총주교좌가 되었다. 

보리스 칸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종교를 통한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애를 썼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한 그리스 성직자들이 불가리아의 성직자 양성 교육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보리스 칸은 모라비아 왕국으로부터 추방된 키릴Cyrill과 메토디우스Methodios의 제자들을 적극 환영하고 그들에게 불가리아 성직자들의 교육을 맡겼다.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는 그리스 출신으로서 슬라브 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에 몸을 바쳤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사후에 그 제자들은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모라비아로부터 추방되었던 것이다.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플리슈카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오리드에 각각 학교를 세워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칸의 명에 따라 그리스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교육을 하였다. 또 불가리아의 공식문자도 그리스어가 아닌 키릴문자Cyrillic alphabet를 채택하였다. 키릴문자는 855년 키릴이 슬라브어로 된 기도문을 적고 바이블을 번역하기 위해 만든 글라골릭 문자를 개량하여 만든 문자로 피레슬라브 학교에서 창안된 것이다. 프레슬라브 학교는 예전에 플리슈카에 있던 학교로 보리스 1세가 귀족의 반란 때문에 수도를 플리슈카에서 프레슬라브로 옮기면서 따라 이전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몽골에서 사용하는 키릴문자는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불가리아는 1018년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Basilius 2세에 의해 정복되어 독립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불가리아는 공식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불가리아 속주(테메)가 되었는데 그 수도도 지금의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Skopje로 옮겨졌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지배는 불가리아 인들의 저항과 외침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1185년 아센Asen 형제가 일으킨 반란으로 제국의 지배는 종식되어 불가리아는 다시 부활하였다. 수도는 타르노보Tarnovo에 세워졌다. 이것이 제2 불가리아 제국이다. 아센 왕조가 지배하던 불가리아 제국은 발칸 반도의 태반을 지배한 강력한 국가였으나 봉건영주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위협이 재개되었다. 또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몽골족의 간섭도 빈번해지면서 일시적으로 몽골족이 지배한 적도 있었다.(1300년 차카의 지배)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에 진정한 위협이 된 것은 중앙아시아부터 소아시아를 차지하고 발칸으로 진출한 투르크Turk족이었다. 투르크인들의 발칸 침공은 134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1396년 최종적으로 불가리아를 멸망시켰다. 이후 불가리아는 ‘루멜리아 총독관구’로서 술탄이 파견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루멜리아Rumelia는 로마인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관구의 수도는 처음에는 오늘날의 터키 국경도시인 에르디네(고대의 아드리아노폴리스)에 두었으나 후일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sofia로 이전되었다. 

오스만 투르크Osman Turk는 불가리아를 여러 개의 군(빌라예트vilayet)로 나누어 태수(산자크베이sanjakbey)를 보내 다스렸다. 그리고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크기에 따라 ‘티마르Timar’ 혹은 ‘지야메트Zeamet’라고 불린 봉토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봉토는 봉토보유자가 죽은 후에는 그 점유권이 술탄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투르크의 지배는 근 500년간 계속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무슬림보다는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져야 하였다. 문화적 엘리트인 기독교 성직자들은 투르크의 지배를 피해 대거 인근의 슬라브 국가로 망명하였다. 투르크 당국은 불가리아 기독교도들을 비잔틴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두었다. 

불가리아의 독립과 발칸전쟁
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가리아 인들의 항거는 여러 차례 무장반란으로 터져 나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불가리아의 독립은 18세기 이후 같은 그리스 정교를 믿는 제정 러시아의 세력이 발칸 반도로 뻗쳐오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1768~1774년간의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토만 지배하에 있는 발칸 반도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얻어내었다. 이는 오토만 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중요한 권리였다. 1876년 4월에는 대규모 무장봉기가 있었는데 이 봉기는 잔학하게 진압되어 3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다시 투르크와 전쟁을 하여 산스테파노San Stefano 강화조약(1878)을 체결하였으며 그 결과 불가리아는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가 큰 나라로 독립하는 것을 영국이나 오스트리아 같은 강대국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해에 열린 열강들의 베를린 회의에서 불가리아로부터 동루멜리아East Rumelia, 마케도니아Macedonia를 분리하여 별개의 나라로 만들었다. 동루멜리아는 불가리아의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몇 년 뒤에는 불가리아에 합쳐졌다. 모두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공국이었다. (이 시기부터 2차 대전 직후까지 불가리아는 줄곧 왕정 체제를 유지하였다. 물론 입헌군주제였다. 왕정 초기에 불가리아인들을 독일인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반투르크 봉기를 계기로 1908년 투르크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12년에는 그리스, 세르비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하였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이다. 발칸 동맹국의 승리로 발칸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사라졌다. 제2차 발칸전쟁(1913)은 영토분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그리스와 세르비아 그리고 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으나 이 전쟁에서는 져서 제1차 발칸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 러시아와 사이가 크게 나빠진 불가리아는 적의 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 

공산화와 민주화의 정치 과정
영토상의 불만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섰던 불가리아는 결국 패전국이 되었고, 1919년 승전국과 맺은 뇌이Neuilly 조약으로 영토의 일부를 상실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30년대 이후 독일과의 밀접해진 경제관계 때문에 독일 편에 서게 되었다. 그 결과 1944년 9월 소련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소련군의 침공에 맞춰 불가리아의 좌익 진영인 ‘조국전선’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46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공산당은 조국전선의 모든 세력들을 축출하고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마침내 1946년 9월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소련헌법을 모방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농업과 산업이 국유화되고 불가리아는 이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소련의 가장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동구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소련 군대가 직접 주둔하지는 않았다. 

공산당의 지배는 소련의 붕괴로 인해 종식되었는데, 1989년 11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있은 후 공산당은 일당독재를 포기하고 35년 동안 불가리아를 통치한 토도르 지프코프 공산당 서기장을 퇴진시키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민주화를 수용했고 당명도 사회당(BSP)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불가리아의 민주화 혁명은 루마니아의 유혈혁명과 구분지어 ‘푸른 혁명’이라고 불린다. 1990년 6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으며, 1990년 11월에는 국명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1990년 10월 민주세력동맹에 대한 지지율이 사회당의 지지율을 웃돌고 사회 정치적 불안이 가중됨에 따라 루카노프Lukanov 총리가 퇴진하였으며, 12월 포포프Popov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전후戰後 최초의 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 1991년 7월에는 민주주의 신헌법을 채택하고 1991년 10월 신헌법에 의한 총선 및 지방 선거에서 민주세력동맹(UDP)이 승리하여 필리프 디미트로프Philip Dimitrov가 총리에, 공산주의 시절의 반체제 인사였던 젤류 젤레프Zelyu Zhelev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취임하는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다. 불가리아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서방진영으로 급속히 기울어졌다. 1999년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신청을 하여 2007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당시 유럽연합은 경제의 민영화를 비롯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요구하였다. 

불가리아 정부와 불가리아 국민들은 유럽연합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군사적으로도 불가리아는 친서방 지향을 분명히 하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서방진영에 가담하였지만 불가리아는 아직도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천연가스를 러시아에 85%를 의존하고 핵발전소 연료의 경우 100% 의존하는 형편이다. 공산주의 몰락 후 불가리아의 경제는 레슬러 출신의 사업가들에 의해 대거 장악되었는데 이들은 폭력이나 부패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러시아는 이들 반불법적 기업가 집단과 밀접히 연계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논자들은 공산주의 체제 붕괴 후에 이러한 새로운 방식으로 불가리아에 영향력을 행사는 것을 일컬어 ‘러시아 신제국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많은 불가리아 인들은 불가리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 경제가 급속히 좋아질 것으로 낙관하였으나 현실은 기대와는 달랐다. 그 때문에 많은 불가리아 인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 현재 불가리아는 서유럽에 비해서는 경제수준이 아직은 크게 뒤떨어진다. 일인당 명목 GDP는 7,400 달러 정도로 유럽연합 평균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그래서 불가리아는 현재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서 최빈곤 국가라는 오명을 듣고 있다. 불가리아는 유럽연합에 가입했지만 통화동맹에는 가입되지 않아 유로화를 쓰지는 않는다. 불가리아 화폐는 ‘레브’(복수는 레바)라고 한다. 현재 1유로에 1.95레바로 고정환율제를 시행하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불가리아는 1947년 인민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으나 공산정권이 붕괴된 이후인 1991년에는 자유 민주주의 신헌법을 제정했다. 현행 헌법에 의하면 불가리아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혼합형의 의회민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직접 선거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 중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주요 권한으로는 총선실시권(대통령이 총선 이후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 대해 3차례의 조각을 의뢰했으나 모두 실패할 경우, 의회 해산 및 총선실시권 행사), 법률 거부 및 공포권(의회에서 통과되어온 법률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으나, 의회 재통과시에는 대통령이 이를 공포), 기타 군 통수권, 외교사절 임명접수권, 사면권 등이 있다. 현재 불가리아 대통령은 2012년에 취임한 로센 플레브넬리에프Rosen Plevneliev이다. 

행정부
총리는 정부의 수반으로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총선 결과를 놓고 제1당, 제2당, 자신이 지명하는 정당에 대해 차례로 정부 구성 권한을 부여하는 바, 동 권한을 받은 정당은 총리와 내각 구성원(각료) 명단을 의회에 제출해 동의를 받아야 하며 의회 재적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면 내각이 성립된다. 내각(Council of Ministers)은 국가의 내정 및 외교 정책 이행을 총괄하고 공공질서와 국가안보를 보장하며 명령(Decree), 포고(Ordinance), 결의(Resolution) 등을 채택하고 시행한다. 민주화 이후 불가리아는 여러 차례의 총선을 통해 내각이 교체되어 왔는데, 최근 2014년 10월 치러진 총선 결과 유럽발전시민당(GERB)과 개혁블록(RB)의 연립정부 출범이 결정되어 11월에 보이코 보리소프Boyko Borisov(유럽발전시민당GERB)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지방행정
불가리아는 28개의 지역(region)으로 구분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가교 역할을 하는 각 지역별 지사(governor)는 내각에 의해 임명된다. 각 지역은 1개(소피아시) 또는 1개 이상의 자치 단체(municipality)로 구성되는데, 자치단체는 시장(mayor)과 지방의회(council)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시장과 지방의회 의원은 해당 지역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입법부
의회는 단원제로서 4년 임기의 의원 240명으로 구성된다. 선출 방식은 비례 대표제(209) 및 다수 대표제(31)가 혼합되어 있는 형태이다. 주요 정당들로는 유럽발전시민당(GERB), 사회당(BSP), 권리자유당(MRF), 불가리아부흥대안(ABV), 아타카Ataka당, 애국전선(PF), 검열없는 불가리아당, 개혁블록(RB), 푸른연대(The Blue Coalition), 사회정의당(OLJ)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부는 독립적 국가 기관이며, 법관의 독립이 헌법에 근거하여 보장되고 사법부의 예산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사법제도는 3심제로 운영되고 일반적으로는 시·군법원(Regional Court), 지방법원(District Court), 항소법원(Appellate Court), 대법원(Supreme Court of Cassation)의 단계를 밟는다. 행정사건의 경우에는 항소법원과 대법원 대신 최고행정법원(Supreme Administrative Court)이 그 역할을 하며, 군사 사건의 경우에는 군사법원(Military Court), 군사항소법원(Military Appellate Court), 대법원(Supreme Court of Cassation)의 절차가 적용된다. 이외에도 특정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최고사법위원회, 검찰(Prosecuting Authorities), 수사기관(Investigation Services)을 사법부 내에 설치해 운영한다. 대법원장, 최고행정법원장, 검찰총장은 7년 임기로 임명되고 중임이 불가하며, 법관에 대한 임명, 승진, 파면 등의 인사 조치는 최고사법위원회에서 담당한다. 

경제구조와 동향
경제구조 불가리아의 경제구조는 국내총생산 가운데 서비스업이 54.3%, 공업이 32.1%, 농·임업이 13.6%를 차지하는 형태(2006 기준)로 이뤄져 있다. 불가리아의 농업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감소하고 있으나 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작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곡물류와 채소· 과일 등 외에 장미유薔薇油 생산은 연간 약 1,000kg으로 세계 제일이다. 어업 외에 축산에서는 전통적인 양돈이 유명하다. 

1989년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도입 이후 농·공업부문의 생산 비중이 감소된 반면 서비스 부문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관광업도 성장 가능 산업으로 중시되고 있다. 석탄 석유 철 망간 납 아연 등의 광업은 개발 가능성이 높다. 전력電力은 90%가 화력발전이며, 에너지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가스 원유 석탄을 수입한다. 기계, 화학(비료 황산 등), 경전기輕電機 공업이 비교적 발달하였으며, 경공업은 면직을 중심으로 모직 견직 등의 섬유공업과 식품공업이 두드러진다. 

경제동향 불가리아는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늦게 경제개혁에 착수한 나라였다. 후발 주자였던 데다가 공산권 시장의 붕괴, 높은 외채비율, 중요 교역국인 이란 이라크 리비아 등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해 여러 가지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1989년에는 채무 상환의 어려움으로 지불 유예 조치를 선언했고 1987년부터 루세, 부르가스 등에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해 외국의 투자를 유도했으나 1990년대 초반까지는 불안정한 경제개혁으로 외국인 투자는 미미했다. 

세계은행의 국가진단보고서(2015년 7월)에 의하면 불가리아는 1997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1998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바뀌면서 소비증가, 소득증대, 고용확대가 계속되었고, 국내정치 및 경제가 안정된 2000년에서 2008년 사이에는 외국인 투자와 고정투자의 급증으로 PPP GDP(구매력평가 국내총생산) 9.1%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 위기의 해인 2008년 이래 경제발전은 부진하고 빈곤은 증가하였으며, 최하 40%의 소득 증가는 미미한 상태로서 현재 불가리아는 EU내 가장 빈곤이 심한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2009년 세계 경제 위기는 유로존의 위기와 자본 유입과 은행 대출을 활성화시키던 불가리아 투자붐을 중단시켰다. EU 통계청(Eurostat) 자료에 따르면 2008~2013년 불가리아의 PPP GDP(구매력평가 국내총생산) 성장이 1.2%까지 둔화되었다(같은 시기 주변지역은 평균 1.6% 달성). 

불가리아가 경제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기업 자원과 산업 분야의 잘못된 분배와 그 정도의 심화 때문이다. 불가리아의 경우 산업 분야가 다양하지 않으며 2000년 이후 생산성이 낮은 분야인 산업 및 서비스업 분야에 고용이 증가했다. 타 국가의 경우 수출 분야의 증가가 많은 변화를 초래해 왔으나 불가리아는 1990년 중반 이후 이 분야 역시 침체되어 있다. 불가리아는 중/고 첨단기술의 활발한 수출에도 불구하고 그 수출량과 수출의 생산성 증가는 제한이 되어 있다.

경제 개선책 및 향후 전망
불가리아는 더욱 신속하고, 보다 포괄적이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 포괄적인 개혁을 이행할 필요가 있다. 보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모든 국가들의 장기 성장에 대한 주요 결정요인인 높은 생산성 증가가 요구된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2015년 국가 경쟁력 분석 자료에서는 불가리아가 법인세 등 저렴한 세금, 안정적인 생활비 수준, 경영인력 임금 수준 등은 강점으로 평가되지만, 경제탄력성 부족, 경쟁력 강화 입법 미비, 금융 규정 준수 취약, 대학교육, 교육경영 및 지식교류 저조 등은 약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2014년 은행위기, 정부지출 증가도 경쟁력을 약화시킨 요소로 평가되며, 실업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으나 여전히 높은 편에 속한다. 더불어 2015년 불가리아의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극복해야할 과제로는 부정부패 척결, 공공행정 효율성 향상, 혁신-성장을 추구하는 교육개혁, 에너지 복지 및 에너지원 다원화, 국가브랜드 구축 등을 들었다.

2015년 불가리아의 경제성장률에 대해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는 1.7%, IMF는 1.2%, EBRD(유럽재건개발은행) 및 EU 집행위원회는 1.0%로 각각 전망했다. 성장 요인으로는 유로존으로부터의 해외수요 증가, 낮은 국제유가, EU 자금 흡수 증가 등이 있으며, 성장 저하 요인으로는 그리스 사태, 높은 실업율, 저조한 국내수요, 높은 대출금리 등이 존재한다.

교역현황 
불가리아는 2014년 무역 적자 79억 레바를 기록했다. 수출이 전년 대비 0.7% 감소한 432억 레바, 수입은 전년 동기대비 1.2% 증가한 511억 레바였다. 한국과 불가리아의 2014년 교역규모는 총 3억 788만 달러로, 한국의 대對불가리아 수출은 1억 1780만 달러(합성수지 승용차 폴리에스텔섬유 타이어 및 기타 전자응용기기 등), 대對불가리아 수입은 1억 9008만 달러(판유리 사료 직물제의류 및 곡류 등)였다. 

사회와 문화


인구, 언어 및 민족 특성
불가리아의 전체 인구는 692만 명(2014 통계)이다. 이는 EU 전체 인구의 1.5%를 차지하며 EU 내 16위에 해당한다. 인구의 69%가 도시 거주로 집중돼 있으며 주요 도시별 인구는 소피아 120만 명, 플로브디프 34만 명, 바르나 33만 명 등이다. 평균 수명은 남자 70.6세, 여자 77.6세를 기록하고 있다. 

불가리아의 언어는 불가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러시아어와 영어, 불어, 독어, 터키어, 마케도니아어 등은 상용어로 쓰이고 있다. 불가리아어를 구사할 경우, 슬라브 민족 나라의 국민과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한 편이며, 최근 젊은층에서는 영어 구사자가 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불가리아는 북방유목민의 자취가 남아서인지 제천문화의 전통과 가족 단위의 유대감, 언어의 구조와 풍습 등에서 우리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또한 불가리아인은 서양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반점(일명 몽고반점)이 있는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종교 및 교육
종교 분포는 인구 중 83%가 불가리아 정교이며, 12%는 회교, 기타 카톨릭 및 개신교로 구성된다. 종교적 차별 또는 분규는 없으나 개신교에 대해 비교적 배타적인 성향이 있다. 불가리아의 교육시스템은 16세까지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는데, 취학 이전의 교육과 초등(1~7학년) 및 고등 교육으로 구분이 된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교육은 경영, 경제, 금융, 회계, 관광, 서비스 분야 2년의 과정으로 수료자에게 자격증(diploma)이 부여되며, 해당 분야 취업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대학교육은 전국 50여 개의 대학이나 전문 고등교육기관(Academy,Institute)에서 실시되는 바, 각 대학이 독자적으로 학생 수, 입학시험을 포함한 제반사항에 대해 결정하며, 각 과정은 시험 등 소정의 절차를 거쳐 입학한 이후에 각각 4년, 1년-2년, 3년 이상의 수학이 필요하도록 되어 있다. 

한-불 문화교류
한국과 불가리아는 문화 협정과 한국과 불가리아 간 청소년 분야 협력 약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양국 간에 다양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불가리아에서의 한국학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한국학 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교에 한국학 센터를 두고 있으며, 매년 한국학 학생 교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고, 동유럽 한국어 교육학회 학술대회를 지원한다. 또한 불가리아 4개 도서관에 한국 소개 기초 자료를 배포하고 있으며, 18번 외국어고등학교에 한국어반을 개설하였다.

그밖에도 한국 정부는 최초로 불가리아에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 사업을 시행한 바 있으며, 2008년과 2010년 불가리아 국립문화궁전이 개최한 국제영화제에 한국 영화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정보통신협력센터(ITCC, Information Technology Cooperation Center)에서는 2011년 6월부터 매주 수요일 한국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한국과 불가리아의 관계


북한과는 공산주의 시절부터 외교관계를 맺어왔던 불가리아는 1990년 한국과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2년 후에는 한국어강좌가 소피아대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한국학과도 설치되어 있다. 최근 한류의 영향 때문에 한국학과도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아직 양국 사이의 경제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양국 간의 무역액은 3억 달러 정도이며 한국은 불가리아의 중요한 무역상대국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한국인들에게 점차 관심을 끌고 있다. 얼마 전부터 동유럽이 관광지로서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자 불가리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동유럽 진출을 원하는 삼성, LG 등 몇몇 대기업들이 이곳에 진출해 있다. 2013년 12월 현재 한국 교민의 수는 170여 명(공관원, 지상사원, 선교사, 유학생, 자영업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불가리아의 뿌리가 중앙아시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양국 간의 문화적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문화적 및 경제적 교류확대로 이끌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 생각된다. 

2015년 5월 14일, 로센 플레브넬리에프 불가리아 대통령은 한국과 불가리아 수교 25주년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 정상은 현재 양국 교역이 연간 3억 달러 규모에 불과하고 투자도 미흡한 상황이지만, 한ㆍEU FTA 및 양국간 보완적 산업구조 등을 감안할 때 교역과 투자가 확대될 여지가 크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10월 양국 정부간 제1차 경제 공동위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4년째 개최되지 않고 있는 양국 산업부처간 산업협력위도 조속히 개재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양 정상은 교육ㆍ투자 등 실질협력 확대를 위해서 민간 차원의 협력 강화가 중요하다는데 공감하며 2004년 이후 중단된 한ㆍ불가리아 민간경제협력위원회도 재개되도록 양국이 관심을 갖고 노력하자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더불어 과학기술 MOU를 체결하고 기초과학이 뛰어난 불가리아와 응용과학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한국이 서로 윈-윈할수 있는 협력모델을 구축해 나가기로 했다. 양국 정상은 불가리아의 에너지, 교통, 물류, 전자정부 분야 각종 대형 인프라 사업에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 인식을 같이 했다.




불가리아의 한류 바람

불가리아에는 한류 바람이 불고 있다. 신맹호 주불가리아 대사가 지난 5월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불가리아의 한류는 학교교육과 밀접하게 엮여 있어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국립 소피아 대학에 한국학과가 있고 석박사 과정도 개설되어 있다. 또 불가리아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공립학교에는 2011년 고등과정에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공부하는 반이 생겼고, 초등과정에도 2013년 한국어반이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의 유수한 지방대학 세 군데에 한국어 과정이 개설되어 있고, 전국에서 세 번째 큰 지방 고등학교에서도 주말 한국어반을 조만간 정식 한국어반으로 개설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에 개인적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다. 소피아에 2013년 세종학당이 생겼는데 수강생이 70명에서 100명으로 늘었으며, 한국어만 가르치는 사설학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큰 이유에 대해 신맹호 대사는 불가리아가 역사적으로 주변국들로부터 시달림을 많이 받은 데다 가족 간 유대가 강한 문화가 있어서 우리와 감정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휴대폰 등 한국산 제품에 대한 신뢰와, 한국의 빠른 경제발전에 대한 경이감도 작용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한류는 문화적 현상일 뿐 아니라, 우리의 기술과 경제력까지 결합된 종합적 현상이며, 서양의 문화적 틀에 우리의 감성과 상상력, 자본과 기술을 조화롭게 섞어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장미, 요구르트, 포도주의 나라 불가리아

우리나라에는 불가리아가 장미의 나라, 요구르트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불가리아 인들은 장미를 관상용이 아닌 향유생산을 위해 대량으로 재배한다. 발칸 산맥 남쪽 산록에는 ‘장미계곡’이라는 장미생산지가 있어 많은 양의 장미를 재배한다. 카잔라크 시 근처의 장미계곡은 기후로 볼 때 장미재배에 적합하다. 장미꽃은 5, 6월에 집중적으로 채취하는데 이 시기에는 장미축제가 열려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불가리아는 세계적인 장미유 생산지로서 전세계 생산량의 7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불가리아에 향유용 장미가 도입된 것은 오스만 시대 초기에 투르크인들이 이란으로부터 들여온 것이라 한다. 불가리아의 장미유는 그 품질이 세계 최고로 이 때문에 불가리아의 장미유 산업은 중요한 산업의 하나가 되었다.

요구르트(Kiselo Mlyako; Bulgarian Yoghurt)는 불가리아 인들의 주된 음식 가운데 하나이다. 불가리아는 요구르트를 자신들이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확인이 어렵지만 불가리아에서 세계 최고의 요구르트가 생산되는 것은 맞다. 이는 불가리아가 유목민족에 의해 세워진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가리아는 포도주로도 유명하다. 아마 유럽에서 가장 포도재배와 포도주 생산이 오래 된 나라일 것이다. 고대 트라키아 인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축제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현재 질 높은 포도주가 생산되어 수출되고 있다. 

수도 소피아와 플로브디브

수도 소피아Sofia는 유럽에서 매우 오래된 도시로 꼽힌다. 신석기 시대인 7천년 전의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소피아라는 이름은 투르크 시대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 도시에 있는 오래된 성소피아 성당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고대에 이 도시의 이름은 세르디카Serdica였다. 이는 세르디 부족이라는 이 지역에 살던 트라키아 부족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세르디카는 필립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다.(BC 29) 그 후 트라키아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가 로마식 도시로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 (98~117) 때였다. 로마식 광장과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신기두눔(현재의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과 비잔티움을 연결하는 군사도로 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3세기에는 다키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중요한 도시이다 보니 로마 황제들도 몇 명 배출하였다. 3세기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갈레루스 황제가 이곳 출신이다. 갈레루스 황제는 311년 기독교 박해를 끝내는 칙령을 이곳에서 발표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동로마의 수도를 정할 때 여러 후보 도시들을 고려하였는데 그 가운데 세르디카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세르디카는 447년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한 세기 뒤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 시대에는 근 4세기 동안 루멜리아 총독관구의 수도였다.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의 지배 하에서 소피아는 오스만 풍의 도시가 되어갔다. 성소피아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모스크로 탈바꿈하여 17세기에는 100 개 이상의 모스크를 헤아리게 되었다. 

1878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불가리아를 오스만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소피아 시내에 있는 큰 성당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은 바로 투르크와의 이 전쟁에서 죽은 러시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라는 이름은 키에프 시대에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러시아를 지킨 인물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반열에 오른 러시아의 영웅 이름이다. 이 성당은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성당으로 불가리아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꼽힌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성당이 성소피아 성당이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성당과 비슷한 시기인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지어졌다. 소피아는 그리스 말로 지혜라는 뜻으로 지혜를 신격화하여 숭배한 초기 기독교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소피아 성당은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는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래서 내부 건축도 이슬람 양식으로 개조되었는데 그 자취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에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20세기에 복원한 것이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걸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면 대통령 궁이 나온다. 대통령 궁 근처에는 국립고고학 박물관이 있는데 청동기시대 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고고학 발굴을 통해 얻은 로마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피아 교외 비토샤 산 밑에는 또 국립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시내에 있는 고고학박물관과는 달리 널찍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가리아의 최고 명문대학 소피아 국립대학이 있다. 1888년에 설립되었지만 이 대학의 정식 명칭에는 중세 때의 인물인 ‘성클리멘트 오리드스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성 클리멘트 오리드스키’는 오리드의 성클리멘트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보리스 칸 때에 성직자 양성을 맡았던 두 개의 학교 가운데 하나인 오리드 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오리드는 지금은 인접 국가인 마케도니아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불가리아에 속했던 도시로 한 때는 365개의 성당이 있어 ‘발칸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도시이다. 오리드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 뿐 아니라 중세 불가리아 시대의 성벽과 성당들이 한 곳에 밀집해 있는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소피아 대학교는 처음에는 규모가 아주 작아서 일곱 명의 교수와 49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역사문헌학부와 수학물리학부로 출발하여 법학부, 의학부 등이 추가되어 현재는 16개 학부가 있으며 24,000 명 이상의 학생이 여기서 학문을 연마하고 있다.

수도 소피아가 인구가 122만에 달하는 도시라면 불가리아 제2의 도시인 플로브디프는 인구가 34만 정도의 도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소피아에 뒤지지 않는 오랜 전통을 가진 도시이다. BCE 4천년의 신석기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오랫동안 이 도시는 트라키아인들의 도시였는데 BCE 6세기 말에는 다리우스 대왕에 의해 정복되어 페르시아의 지배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트라키아인들은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 필리포스 대왕이 이 도시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필리포폴리스’라고 부른 것이다. 플로브디프라는 현재의 이름은 필리포폴리스의 트라키아식 지명인 ‘풀푸데바’에서 왔다. 지리학자 스트라본에 의하면 이 도시는 필리포스 대왕에 의해 추방된 범죄자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트라키아 인들 마케도니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위에서 실질적으로 이 도시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1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트리몬티움’(세 언덕의 도시)이라고 불리게 된 플로브디프는 트라키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인들이 세운 공공건축물들이 즐비한 도시가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구시가지에는 극장, 경기장, 수로 등 다양한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로마시대에는 교역도 매우 번창하였는데 노예무역이 번창하여 ‘노예들의 도시’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이다. 많은 고대 유적지들을 가진 유수한 역사의 도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플로브디프는 번영을 구가하는 주요한 상공업 도시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상공업의 번영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유입된 해외자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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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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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국에 처한 아랍의 부국 리비아 Libya

리비아는 오랜 식민지 역사를 거쳐 왕국으로 독립한 후 42년간 카다피 정권하에서 자마히리야Jamahiriya(인민 직접민주주의) 체제를 경험하기도 했으나, 2011년 아랍 민주화혁명의 여파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후 군벌들이 난립하고 나라가 분열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맞아 이슬람주의 정신과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리비아의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리비아State of Libya는 지중해에 면한 북아프리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다. 북으로는 지중해에 면해 있고, 서쪽은 튀니지, 알제리, 동쪽은 이집트, 남쪽은 니제르, 차드, 수단과 접하고 있다. 국토는 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 지역, 동부의 키레나이카Cyrenaica 지역 및 남부의 훼잔Fezzan 지역으로 크게 나눠진다. 트리폴리타니아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점차 높아지는 구릉 지역이며, 해안 평야라 불려지는 제파라Jefara와 급경사로 이루어진 자발Jabal로 형성되어 있다. 수도 트리폴리와 함께 대부분의 인구가 집중돼 있는 지역으로 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 지대이다. 최남단은 중앙 사하라Sahara 산맥을 형성하며 해발 3,500m의 고원 지대이다. 

키레나이카 지역은 지중해를 따라 북쪽에 해발 600m의 협곡으로 된 고원이 있으며, 북쪽의 고지대는 ‘푸른 산’이라는 의미를 갖는 자발 악다르Jabal Akhdar가 있다. 이곳에 인구가 모여 살며 중요한 두 도시, 벵가지와 데르나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쟈발 악다르 서쪽은 시르테Sirte만으로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동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이집트까지 연결된다. 자발 악다르의 남쪽은 낮은 지역이며 주로 사막지대에 오아시스가 있다. 이 지역 동쪽이 사해沙海(the Sand Sea)이다. 이 지역의 남쪽에 중앙 사하라 산맥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훼잔 남쪽과 계속 연결되는 티베시Tibesi 산맥이 차드까지 연결된다. 훼잔은 사하라 사막이 연장된 곳으로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졌다. 

리비아의 기후는 건조함과 다양한 온도 변화가 특징이다. 산맥에 의한 장벽이 부족하기에 사하라,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겨울철 북쪽 지역은 언덕에 눈이 내릴 정도로 춥다. 여름철 트리폴리타니아의 제파라Jefara 지역은 40~45도까지 온도가 올라가며 매우 덥다. 남쪽 지역은 더위가 심각하며 49도까지 올라가지만, 겨울철에는 이곳에도 눈을 볼 수 있다. 북부의 키레나이카는 여름철 비교적 시원한 27~32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지만, 해안 근처는 매우 높은 습기를 유지한다. 특징적인 것은 무덥고 건조한 바람인 기블리ghibli이다. 이는 몇 시간 동안 15도나 심지어 20도까지 온도를 상승시키며, 1월에는 때때로 20~25도까지 기온을 상승시킨다. 이 건조한 모래 바람은 1년 중 어느 때라도 불 수 있지만, 봄과 가을이 가장 빈번한 계절이다. 이 때문에 농작물에 대한 상당한 패해가 발생하며 종종 인간에게도 커다란 피해를 입힌다.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 언덕은 300~500 mm의 강우량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약 200 mm를 밑도는 강우량을 유지한다. 빼놓을 수 없는 기후적 특징은 매 5~6년마다 한 번씩 뚜렷하게 가뭄이 찾아오며, 때때로 계속해서 두 계절 동안 지속된다. 따라서 실제적인 강우량은 믿을 수 없고 변덕스럽다고 할 수 있다.

리비아의 역사

이슬람 도래 이전의 리비아
원래의 리비아에는 베르베르Berber인이 살고 있었다. 리비아는 마그레브 문화권과 이집트 문화권 사이에 위치하여 고대에는 지중해 무역거점이었으며, 페니키아, 오스만 터키, 이탈리아 등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으로 오랜 식민지 역사를 가지고 있다. BCE(기원전) 1,000년경 고대 지중해 무역의 주역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이 무역 거점을 찾아 리비아의 서부해안(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에 진출하였고 BCE 800∼700년에는 3개의 식민도시, 즉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오에아Oea(현재 트리폴리Tripoli) 및 사브라타Sabratha를 건설했다. 페니키아가 건설한 카르타고(현재 튀니스 부근)가 지중해 최대 식민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리비아는 BCE 517년까지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들어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및 수단에서 들어오는 금 은 옥석 상아 노예의 무역 중계지로 번영했다. BCE 631년경에는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를 찾아 리비아 동부지역(키레나이카Cyrenaica)에 진출하여 키레네Cyrene, 벨루니스Belunis(현재 벵가지Benghazi), 아폴로니아Apolonia 등 그리스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키레네는 강성하였으나 알렉산더 제국 지배하에 들어가고, BCE 322년 이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Ptolemios 왕조 지배를 거쳐 BCE 96년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천도 후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로마의 북아프리카 식민지는 게르만German계의 반달Vandal족 영향하에 놓여, 리비아는 CE 431년 반달족에 의해 정복되었다. 약 100년 후인 CE 500년을 전후하여 이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차 정복되었으나, 원주민인 베르베르Berber 부족들의 계속되는 반란으로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아랍 및 터키의 지배
이슬람Islam의 선지자 사도 모하메드의 제자로 이집트에 근거지를 둔 아므르 빈 알-아스Amr bin Al-As가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일대)지역의 정복을 시작하였다. 642년 제1차 원정을 일으켜 키레나이카에 침입한 아랍군은 비잔틴을 패배시켰고, 644~645년간에 걸친 제2차 원정에서는 트리폴리Tripoli를 함락시켰으며, 이후 아랍인은 마그레브 전역으로 지배영역을 확장했다. 8세기 말 마그레브에 반란이 빈번해지자, 바그다드의 칼리프 하룬 알-라쉬드Haroun Al-Rashid는 800년 이브라힘 빈 알-아글라비드Ibrahim bin Al-Aghlabid를 총독으로 파견했다. 이후 튀니지 카이라완Kairouan을 수도로 한 아글라브 왕조Aghlabid Dynasty가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독립하여 리비아를 지배하게 되나, 10세기 초 시아파의 반란으로 붕괴되고 시아파의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가 성립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튀니지부터 이집트까지 정복하고 972년 카이로로 천도하였다. 11세기 초 지리드 아미르Zirid Amir가 시아파에서 정통 수니파로 개종한데 대한 응징으로 바그다드의 파티마 칼리프가 1049년 리비아를 침략하였으며, 그 후 500년간은 부족간 전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1세기에는 이집트로부터 바니 힐랄Bani Hilal족, 바니 살림Bani Salim족이 리비아로 대거 이주하여 원주민인 베르베르족과의 혼혈과 함께 아랍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급속한 아랍화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튀니지 카이라완과 이집트 카이로의 강력한 이슬람 정권사이에서 독자적 이슬람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채 한때 기독교 세력의 점령을 받기도 했으나, 155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터키Ottoman Turks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51년 오스만 터키의 시난 파샤Sinan Pasha가 트리폴리를 함락시킨 이후 1711년 오스만 터키군 장교였던 아흐마드 카라만리Ahmad Karamanli에 의해 카라만리 왕조(터키 황제의 분봉왕 형식)가 세워져 1835년까지 지속되었다. 1835년 프랑스의 튀니지, 알제리로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터키 황제는 리비아를 재차 점령하고 터키정부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그 후 제1차 대전까지 리비아에서는 부패, 압정, 반란이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장차 리비아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사누시 Sanusi 교단이 주요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탈리아 식민주의 시대
19세기 후반 식민지 획득 경쟁에 뒤쳐진 이탈리아Italy는 영국 프랑스의 영향력이 약하고 지리적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은 리비아를 진출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터키의 발칸전쟁 개입을 기회로 1911년 9월 29일 오스만 터키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10월3일 트리폴리 상륙작전을 감행했으나, 터키군과 리비아인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 이후에도 이탈리아는 리비아 식민지화를 적극 도모했으나 1차 대전 발발시까지 트리폴리Tripoli, 뱅가지Benghazi, 베르나Berna, 투브루크Tubruq(=토브룩Tobruk) 등 지중해 연안에 지배권을 미치는 정도에 그쳤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터키와 독일은 리비아에서 이탈리아 교란 작전에 나서 잠수함으로 리비아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고 고위관리를 파견하는 등 대 이탈리아 전열을 재정비했다. 1918년 1차 대전 종료로 이탈리아는 약해지고 리비아인들도 지치자 트리폴리타니아의 리비아인들은 가리안Gharian을 수도로 압둘-라흐만 아잠을 고문으로 하는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 이탈리아는 이들과 휴전하고 ‘행정적 독립’ 구상을 받아들여 이들 대표단의 로마행을 허용하였으며, 미수라타의 라마단 알-수에힐리는 수도를 트리폴리로 천도하였다. 

1921년 서트에서 트리폴리타니아의 지도자들이 모여 리비아의 독립을 획득하려는 세력과 합세하여 이드리스Muhammad Idris를 국왕으로 하고 충성을 서약하였다. 하지만 1922년 이탈리아에 파시스트Fascist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리비아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강력 추진하여, 1925년까지 트리폴리타니아주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러나 키레나이카에서는 이드리스가 지도하는 사누시 교단이 완강히 저항하였고, 사이드 오마르 알-무크타르Said Omar Al-Mukhtar가 무력투쟁을 주도해 이탈리아군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1931년 반식민 항쟁의 영웅 오마르 알-무크타르가 이탈리아군에 포위,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짐으로써 리비아인의 저항은 종식되고 리비아의 대부분은 이탈리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마르 무크타르는 리비아의 민족적 영웅으로 숭상되고 있으며, 그의 항전을 주제로 한 영화 ‘사막의 라이온’은 한국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리비아의 독립과 연방왕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리비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2차대전 중인 1942년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타니아는 영국군에, 페잔 지역은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각각 군정통치를 받게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간에 리비아 신탁통치 계획이 수립되기도 하였으나, 1949년 12월 UN에서 리비아독립 지지 결의가 채택되었고 1951년 12월 24일에 리비아는 무함마드 이드리스Muhammad Idris를 국왕으로 하는 연방왕국으로의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리비아는 독립과 더불어 심각한 정치 재정 경제적 난관에 직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국민적 동일성과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리비아인들은 여전히 촌락과 부족에 충성했고, 부족 지역간 대립이 수시로 표출되는 상황이었다.

1952년 2월 연방하원 선거 시 헌법을 지지하는 ‘독립당’이 의회 다수를 구성하였고, 트리폴리타니아의 '국민의회당'은 연방주의에 반대하고 단일국가 및 비례대표제 선거를 주창하였다. 이러한 대립의 결과 '국민의회당'은 불법화되고 당수 바쉬르 베이 알-사아다위Bashir Bey Al-Sa'adawi가 추방되었으며, 1952년 구성된 트리폴리타니아의 입법회의 역시 연방정부 및 국왕과의 계속되는 마찰로 1954년 해체되었다. 신생독립국 리비아 최초의 중요 대외활동은 1953년 3월 아랍연맹 가입이었으며, 리비아는 신생국의 경제적 곤란 타개 노력의 일환으로 서방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석유의 발견과 단일왕국
독립한 리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다. 1954년 세계은행World Bank 보고서에 의하면, 리비아의 주요 수출품은 아프리카 나래 새esparto grass와 과거 전쟁 중 나온 폐고물 등이었다. 그러나 1955~1956년간 미국회사에 석유 탐사권을 부여한 이래 석유 자원 탐색은 리비아 정부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1960년까지 35개의 유전을 개발, 일일 93,000배럴을 생산했으며, 1962~1966년간 석유생산이 크게 증가되어 석유 수출이 1962년 8백만 톤에서 1966년 7천만 톤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석유개발에 따른 국부 증가로 정부 역할이 더욱 복잡해져 1960~1963년간 수차례 개편을 거쳐 1963년 3월 모힛딘 페키니Mohieddin Fekini를 총리로 새로운 내각이 발족했다. 페키니 총리는 1963년 4월 정부행정의 효율성과 경제성 향상을 위해 국가체제를 종래 연방국가에서 단일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해 중요 개혁(여성 참정권 부여, 국왕의 상원의원 24명 전원 임명, 주정부 폐지 등)을 포함하는 법안을 하원에 상정하였고, 결국 1963년 4월 27일에 리비아는 국왕 포고로 단일 왕정국가가 되었다.

리비아는 석유수입 증가에 따라 재정적으로 독립하게 되어 국제 문제, 특히 아프리카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높이기 시작했다. 1962년 모로코, 1963년 알제리와 협정을 체결, 모든 마그레브제국(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의 나라들)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서방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고자 노력했다.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간 6일 전쟁 발발로 트리폴리와 벵가지는 심각한 소요사태를 겪게 되었다. 이집트의 선전책동에 자극받은 항구 노동자와 석유 노동자, 학생들은 미국 및 영국대사관을 습격하고, 유대인 사회를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이탈리아, 몰타 등지로 이주하였다. 

리비아 아랍공화국
리비아는 원유 수출에 의해 국가의 부富가 신장되는 변화를 겪었지만, 이렇게 새로 형성된 갑작스러운 부는 효과적으로 분배되지도 않았고, 고용기회도 제공하지 못했다. 낫쎌주의Nasserism와 아랍통합Arab Unity 사상이 중동 전역을 휩싸고 있을 무렵, 리비아는 왕정하의 부패가 만연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확산되었다. 리비아 정부의 친 서구적인 태도는 사회적인 불안을 가중시켰고, 1967년 아랍 이스라엘 전쟁 이후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1969년 리비아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이드리스 왕이 터어키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던 그해 9월 1일, 27세의 무아마르 알-카다피Muammar Al-Qaddafi 대위를 중심으로 한 청년장교 그룹이 트리폴리에서 무혈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수일 만에 전국을 장악하였으며, 이들 청년장교그룹 12명으로 구성된 혁명평의회(Revolution Command Council, RCC)는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 아랍공화국Libyan Arab Republic을 선포하였다. 리비아 아랍공화국은 처음에는 문민정부였으나, 카다피에 의해 주도되는 혁명평의회로 대치되었다. 

리비아 사회주의아랍공화국
리비아의 정치제도는 국회의 소집과 함께 1976년부터 급격히 변화되었다. 혁명평의회가 역할을 대신하던 국회는 1년 후인 1977년 총인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GPC)로 바뀌었고, 동시에 국명도 대중 국가인 리비아 인민사회주의 아랍공화국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일명,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인민주권 선언에 따라 인민 직접민주주의(자마히리야Jamahiriya)를 지향하는 통치체제로 전환한 것이었으며, 무아마르 알-카다피는 총인민회의 총서기국 서기장(국가원수직)에 취임했다. 직접민주주의와 체제 견고화를 위해 리비아는 1979년 해외 공관을 개혁하여 해외 유학생, 교민들로 하여금 해외공관을 접수하여 인민사무소(People's Bureau)로 개칭하고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토록 하였다. 또한 1985년 외국인 근로자 약 5만명을 추방하여 이집트, 튀니지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가하락으로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국민생활이 어려워지자 1988년에는 Green Perestroika로 불리는 녹색헌장을 선포하여 여행자유화, 소규모 사기업 인정, 체포·구금 제한 등 인권존중, 여성 사회참여 확대 등의 정책을 실시했고, 1991년에는 경제자유화 시책을 발표하여 경제난 타파를 위한 자유시장경제 체제 부분 도입과 중앙은행을 제외한 모든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을 추진하였다. 1998년에는 실용주의 정책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여 과거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기치 아래 시행하던 반정부단체 및 테러집단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한편, 이슬람국가로서 종교와 인종을 초월하여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AU) 창설 등 지역협력체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평화외교 및 경제 자유화, 개방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비아 내전
2010년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아랍의 봄 재스민혁명이라 불리는 민주화 시위의 폭풍은 알제리와 모리타니를 거쳐 이집트에서부터 본격화되었고, 수단, 예멘, 절대군주국인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까지도 파급되어 나갔으며, 리비아에도 예외 없이 불어닥쳤다. 

2011년 1월 13일 주택 건설의 지연과 정치적 부패에 저항하는 시위가 벵가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대규모 인원이 카다피 리비아 국가 수반 겸 국가평의회 의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반정부 시위는 2월 15일 저녁에 발생하였다. 이후에도 시위는 계속되어 반정부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17일에는 ‘분노의 날’로 선포되어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발생하였다. 반정부 시위의 물결은 리비아 전역으로 확대되며 봉기 수준으로 격화되었다.

반정부 시위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 진압작전은 불과 2개월 만에 6천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야기하였다. UN과의 밀고 당기기를 계속 하던 정부군은 3월 17일 반군에 대해 최후통첩을 하였고 이에 다국적군은 20일 오전 2시 24분 오디세이의 새벽 작전 하에 정부군을 향해 군사공격을 감행하였다. 서방 연합군의 공습은 카다피 세력의 승리로 기울어가던 리비아 시민봉기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나토NATO의 공중 지원에 힘입어 반군은 트리폴리를 제외한 서부지역 곳곳에서 카다피군을 몰아붙였다.

수도 트리폴리 이외의 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반정부 세력의 손에 떨어지자, 카다피는 지지 시민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반정부 운동의 봉쇄에 나섰다. 반정부 세력도 미스라타에서 의용병을 모으기 시작해 수백 명이 결집하였고, 이로 인해 수도에서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월 27일, 카다피 정권에 반기를 들고 사임한 무스타파 압둘 잘릴 전 법무장관이 벵가지에서 잠정 정권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 설립을 선언하고, 카다피 정권의 타도를 위해 리비아 국민의 결속을 호소하였다. 이날 수도 트리폴리 일부는 반정부 세력에 의해 제압되었다. 3월, 압둘 잘릴이 이끄는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 아래 당초 난립하고 있던 반정부 세력의 자치 정권이 결집하기 시작하였고, 3월 2일에는 벵가지에서 회합을 열어 압둘 잘릴이 정식으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 의장으로 취임, 리비아 혁명의 달성을 향해 결속을 강화하였다. 한편 정부 세력도 용병 출동이나 공군의 폭격 등으로 영토 탈환에 나섬으로 인해 리비아 전국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이 일어났다. 리비아는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었으며, 장기전의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해, 이러한 혼란을 봉기나 반정부 시위 대신 내전內戰이라고 표현하는 언론이 나타났다. 반정부 세력은 각국에 군사 개입과 비행 금지 구역의 설정을 요청하였다. 8월 23일, 트리폴리가 함락되었다. 카다피 정권의 마지막 보루였던 카다피의 관저 '바브 알아지지아'가 시민군측에 함락되면서, 수도 트리폴리 시내 전역이 시민군측의 통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10월 20일, 시르테가 함락됨과 동시에 하수도에 숨어있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시민군에게 발각되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카다피 정권의 종식을 공식 선포한 리비아는 새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리비아 반反정부세력의 구심점인 과도국가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NTC)를 리비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 과도국가위는 늦어도 8개월 내에 헌법을 만들어서 의회를 구성하고 권력을 이양하는 작업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혁명 이후 과도정부가 리비아 정국을 장악하지 못함에 따라, 리비아 내의 혼란과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시민군, 혹은 민병대들이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 세를 확장하면서 리비아의 치안 불안은 심각해졌다. 혁명 이듬해인 2012년 7월, 과도국가위원회를 대체하기 위한 제헌의회General National Congress(GNC)를 구성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출된 의회는 2012년 10월 인권변호사 출신인 알리 제이단Ali Zeidan을 총리로 지명했고, 그를 중심으로 과도 정부가 꾸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와 서로 다른 민병대들 간의 충돌, 민병대와 정부군 간의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치안 불안과 중앙 정부의 장악력 부족으로 인해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동부와 남부 주민들의 무력시위도 발생하였다. 시민혁명으로 카다피가 축출된 지 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리비아의 안정적인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제헌의회GNC는 원래 이슬람이 주류가 아니었으나, 2013년 6월 이슬람계 아부샤마인Nouri Abusahmain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이슬람 주도로 변질되었다. 이에 2014년 5월 18일, 퇴역 장성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가 조직한 비이슬람계 ‘국민군(Libyan National Army)’이 GNC의 해산을 요구하며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리비아의 존엄(Dignity ofLibya/ Diginty Operation)’이라는 대테러 및 이슬람 극단세력 소탕 작전을 주도한 하프타르는 리비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GNC는 임기를 더 연장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2014년 6월에는 제헌의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의회, 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CoD: 하원)를 구성하는 선거가 있었고 총선 결과 다수를 차지한 비이슬람계 세속주의 세력 중심의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투표율이 18%로 지나치게 저조하고 무장세력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슬람 세력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제헌의회 해산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총리를 따로 선출하는 등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결국 세속주의(비이슬람) 세력이 주도한 새 의회의 정부는 칼리파 하프타르가 장악하고 있는 리비아 동쪽 끝 도시 투브루크Tubruq로 피난하여 정착하였고, 이슬람 세력들은 8월 23일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고 새 의회에 참여하지 않은 기존 총국민회의 의회 의원들을 규합해 의회를 구성함으로써 양측이 서로 합법 정부라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 분단 상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트리폴리에 소재한 리비아 대법원은 2014년 11월 6일자로 6월 총선이 무효라고 선고하였고 세속주의 세력 측은 대법원이 이슬람 세력의 총구 앞에서 내린 판결은 무효라고 반발하였다. 국제사회는 대체로 투브루크에 있는 새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여러 혼란한 정국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리비아 내전 사태가 단기간에 정상화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리비아는 1951년 독립 이후 왕정체제를 거쳐 무아마르 카다피 집권기(1969~2011) 동안 아랍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자마히리야Jamahiriya(인민 직접민주주의) 체제가 시행되었다. 이 체제에서는 헌법이 없이 자마히리야 체제가 코란과 함께 리비아의 정치 사회질서를 규율하는 틀로 작용을 했다. 하지만 자스민 혁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이후,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에 의해 2012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총리가 선출되어 제헌의회NGC에 정권이 이양되었다. 임시정부 및 제헌의회의 최우선 임무는 리비아 국정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 수립 일정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일정이 1년 이상 지연되어 당초 예정한 2013년 신정부 구성은 무산되었고, 2014년 6월 25일 제헌의회를 대체할 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CoD: 하원)를 구성하는 총선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의회가 구성되면 이후 대통령선거, 신정부 내각 등의 정치 일정이 추진될 상황이었다. 

총선 결과 리비아 의회는 세속주의(비이슬람계) 의원이 다수를 점하여 압둘라 알 틴니Abdullah Abdul Rahman Al-Thinni 총리 정부가 새로 출범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소수의 이슬람계 의원들은 낮은 투표율과 무장세력 선거개입 등을 이유로 의회 참석을 거부하면서 대법원에 의회의 합헌성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이슬람 민병대가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면서 알 틴니 정부는 동부 투브루크로 근거지를 옮겼다. 결국 리비아는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는 세속주의 세력의 투브루크 정부와 별개의 정권을 수립한 이슬람 세력의 트리폴리 정부가 공존하는 사태를 맞았고, 극도의 치안 혼란과 함께 양 세력이 내전을 장기전으로 몰고가는 형국이 되면서 리비아의 헌법과 정치체제를 확정하는 정치 전환 과정은 지연되고 있다. 

42년간의 카다피 독재 정권 붕괴 후, 신정부에 대한 리비아 국민들의 기대감은 고조되어 있으나 뿌리 깊은 지역 부족주의, 내전 당시 붕괴된 경제기반, 광범위한 무기 유포(약 200만정)로 인한 치안 불안, 민병대(1,700여개 27만여명) 세력과 정부 간 갈등, 시민 사회 미성숙 등으로 민주주의 조기 정착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행정부
카다피 정권 붕괴 후 2012년 1월 28일 제정된 제헌의회GNC 선거법은 정당투표제를 거쳐 집권당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형태를 취했다. 2014년에 제헌의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의회(하원)으로 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CoD)를 구성하는 선거가 있었는데, 그 결과를 놓고 이슬람 진영과 비이슬람 진영이 대립을 벌여 서로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생겨나는 사태를 맞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외적으로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는 리비아의 정부는 투브루크에 거점을 둔 압둘라 알 틴니Abdullah Abdul Rahman Al-Thinni 총리 정부이다. 

지방행정
리비아는 2007년 전국 행정구역을 22개의 샤비아트Shabiat(광역 행정체계)로 구성하여 개편했다. 그 행정구역은 왼쪽과 같다.

입법부
리비아의 제헌의회GNC 선거법은 정당투표제를 채택하였으며, 2012년 7월 7일 실시한 제헌의회의원 선거에서는 마무드 지브릴Mahmoud Jibril 전 총리가 이끄는 자유주의 성향의 국민연합당이 39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획득하였으며, 무슬림형제단의 정의건설당(17석), 국민전선당(3석), 국민중도당(2석), 조국연맹당(2석), 민주건설당(2석) 및 여타 15개 정당이 각각 1석씩을 차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후 2014년 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CoD)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비非이슬람 세속주의 세력이 득세하자 이슬람주의 세력이 제동을 걸면서 선거 무효 주장과 함께 별개의 정부를 구성해 갈라서면서 내전에 돌입해 혼란을 겪고 있다. 

경제동향
리비아는 1988년 미국 팬암기 폭발과 1989년 프랑스 UTA기 폭발 사건에 리비아 정보기관원이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에게서 테러포기, 혐의자 인도 및 피해유족 보상 등을 촉구받았으나 이를 부인하고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미 영 프 3국이 주도한 1992년 UN 안보리 결의에 따라 리비아에 대한 두 차례의 제재 및 추가 제재를 통해 리비아 정부, 공공기관, 기업이 직간접으로 소유 지배하는 모든 해외자산 동결, 석유생산 및 공급 관련 기자재 수출 및 동 기자재 관련 용역 수출 금지와 같은 제재 압박을 받음으로써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리비아는 결국 1999년 협상을 통해 혐의자를 인도하면서 경제제재 조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 WMD) 개발 포기선언을 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도 이루어냈다. 

리비아는 석유산업이 정부 재정수입과 수출에 있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석유산업을 제외한 여타산업 기반은 취약한 것으로 분석된다(IMF). 카다피의 등장 이후 사회주의 경제이념에 따라 모든 토지의 국유화, 사막 오지에 대형농장 개발 및 농업인력 이주와 함께 대규모 산업생산형 공장 건설 등을 추진하였다. 1988년 이후 소규모 자영업 허용, 민간부문의 경제참여범위 확대 등의 경제 자유화시책이 발표되었고, 2003년 9월 UN제재 해제 및 2004년 9월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 이후에는 국내 경제회복을 위해 외국인 투자유치 및 경제개발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리비아 경제의 중추 원유산업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인 리비아는 2010년까지 경제제재 해제, 국제유가 상승, 원유생산 증대를 바탕으로 5% 수준의 견실한 성장세를 기록하였으나, 2011년 내전 발발로 원유 생산량이 급감하고 인프라 및 생산시설이 파괴되면서 무려 61.4%의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바 있다. 2012년부터 추진된 석유 생산 재개 및 정상화로 2012년 연말 기준 150만b/d의 원유 생산이 이뤄졌으나, 2013년 7월 이래 동부 연방주의자들의 원유 시설 및 수출항(60%) 무장 점거로 인해 원유 생산 및 수출량이 급감(100억 달러 이상의 석유수출 감소 피해)하고, 원유의 불법수출(북한 인공기 게양 모닝글로리호 사건)도 발생하여 정부 재정의 95%를 원유 수출에 의존하는 리비아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2014년에도 중앙정부와 동부 연방주의자(원유 최대수출항인 Es Sider항, Las Lanuf 항 점거)간의 협상 중단 및 일부 원유 생산 지역에 대한 부족 등의 사보타주 및 원유 관련 설비 노후 등으로 인해 오일 수출도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회복되었다.

교역현황
2010년 리비아 통계청이 발표한 수출입통계에 따르면, 수출은 2009년 대비 35.6% 증가한 462억 리비아 디나르(352억 6,718만 달러)를, 수입은 2009년 대비 39.3% 증가한 224억 리비아 디나르(170억 9,924만 달러)를 기록해 238억 리비아 디나르(181억 6,794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내전 이후 명확한 무역 동향을 발표하지 않고 있어, 2010년 이후의 정확한 실적은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석유가스 수출이 전체 수출의 97.7%, 화학제품이 1.3%를 차지하였다. 국가별로는 이탈리아가 전체 수출의 42.3%를 차지하여 최대 수출시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프랑스 15.5%, 중국 9.4%, 스페인 9.2%, 네덜란드 3.4%, 독일 2.6% 등의 수출시장점유율을 기록하였다. 주요 수입품목을 보면, 기계 및 장비류, 운송수단, 기초금속, 식물제품, 화학제품 등의 수입증가세 호조가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비아 경제의 과제와 전망
리비아는 2012년 카다피 사망으로 잠시 정국이 평온을 찾고 원유 생산이 재개되는 등 복구가 이뤄지면서 92.1%의 경제성장을 시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이후 정국이 다시 혼미해지면서 경제 상황도 점차 난국으로 빠져드는 형국이다. 리비아가 차후 안정을 찾고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를 검토하고 개선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고질적인 용수 부족’ 문제가 있다. 사하라 사막의 일부인 리비아 사막이 전 국토에 걸쳐 있으며, 용수부족으로 농경지 확대가 어려워 2007년 기준 농경지가 국토의 8.8%에 불과하다. 정부는 고질적인 용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부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북부 지중해 연안 도시들에 공급하기 위한 대수로 건설 공사를 진행 중이며 우리나라 기업이 이에 참여하고 있다. ‘치안 불안’도 리비아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정치 사회의 불안정과 제도 미비로 기업투자 환경이 열악한 점은 경제 운용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데, 정부가 두 개로 나뉘어 분단 상태가 돼버린 지금 치안의 개선 문제는 리비아 경제 개선에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외국 투자가들은 종전과 별반 다름 없는 투자법 및 환경, 불안정한 치안 등을 이유로 대 리비아 투자를 유보하고 있다. 더구나 2014년 하반기에 수립될 것으로 기대한 신정부 출범이 이슬람과 비非이슬람 세력 및 군벌들의 대립과 분쟁으로 비화되면서 당분간 리비아에 대한 투자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와 문화


민족구성 및 가족제도
현재 리비아 민족 구성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민족은 아랍족이다. 아랍족은 CE 643년 리비아를 정복한 이래 9~10세기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대거 진출하여 원주민인 베르베르족보다 다수 민족이 되었다. 주요 종족 및 부족은 아랍Arab인 48%, 베르베르Berber인 20%, 투아레그Tuareg인 12%, 아랍흑인 혼혈 15%, 유럽계 3%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7년 이전에는 트리폴리 지방을 중심으로 유태인이 많이 살고 있었으나 1969년 혁명 이후 이스라엘, 몰타, 기타 제3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은 유목민 전통에 따라 부족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혈연적 연대의식과 신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교우적 연대의식을 생활 기반으로 삼고 있다. 혈연을 신성시하고 혈연에 대한 충성이 생활과 사고에 크게 작용하여 누구나 가계家系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가계에 대한 비방은 용서할 수 없는 모욕으로 여기며, 이슬람의 영향으로 부족 구성원 간에는 남녀의 차별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랍인은 부족 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중심으로 생활하며, 석유개발 및 과거 카다피 정권의 사회주의 정책의 영향으로 생활·교육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사회 전반에 개인주의가 확산되어 핵가족 제도로 점차 변모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개인은 가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므로 개인의 혼인문제는 가족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어 결혼상대는 가족 구성원이 공동으로 물색하여 서로 상의한 후 택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리비아에서는 남녀 모두 18세부터 결혼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남자는 28세, 여자는 26세 전후에 결혼하며, 남자들의 평균 결혼비용(집 제외)이 20,000디나 정도 소요되므로 소득이 적거나 유산이 없을 경우 결혼이 지연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 아랍관습에 의하면 이혼할 수 있는 권리는 남자에게만 있었으나 1973년 법에 의하여 여자에게도 남자와 같이 이혼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혼한 남자는 외국인이나 리비아 외의 아랍국적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없으며, 외국인과 결혼한 남자는 정부기관 및 정부소속 기관에 취업하기가 어렵다. 장례는 3, 5, 7, 15일장이 있으며 화장은 인정되지 않고 조상에 대한 제사도 없다. 

생활관습
리비아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세계관은 모두 이슬람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 CE 622년 이슬람교 탄생 이래 1,400여 년간 아랍인의 생활과 그들의 의식구조는 이슬람 교리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신에게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타끄와Taqwa(fear of God)가 삶에 있어 인간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의복의 경우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흰색 면 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겨울에는 양털로 된 외투를 착용하며, 여자들은 넓은 천으로 몸을 휘감는데 이를 바라칸Barracan이라 부른다. 투아레그족 남자들은 푸른 물감을 들인 베일을 쓰나, 여자는 쓰지 않는다.

리비아의 음식으로는 밀과 곡식을 혼합한 가루로 만든 둥근 모양의 빵이 주식이고, 양羊은 최상의 음식으로서 옛날 유목생활 때부터 신에 대한 제물과 주식으로 이용되었으며, 가죽은 옷 또는 신발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아랍 차(茶)는 이들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기호품이며, 리비아에서는 식사 후 박하 잎을 띄우고 설탕을 첨가한 녹차(Green Tea)를 많이 마신다. 

리비아인들은 악수하기를 좋아하고 상대방 집안 식구 모두의 안부를 물어 보며, 오랜만에 만났을 때는 반가운 표시로 양 볼에 키스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외부인의 가정 방문을 꺼리나 손님을 초대하였을 때에는 접대를 아끼지 않으며, 이때 손님의 시중은 남자들이 하고 손님은 내실로 들어갈 수 없다. 초대를 받았을 경우 선물을 가져가지 않아도 좋으나, 차려 놓은 음식은 많이 먹을수록 좋아한다.

종교생활
리비아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 수니파이며,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무신론자를 부정한다.(이슬람교도 98%, 기독교 2%) 모든 생활의 규범은 꾸란Qur'an에 의거하며 꾸란은 개인생활은 물론 정부시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꾸란Qur'an(코란Koran)은 아랍어로 쓰인 이슬람 성전으로 알라가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인류에게 계시한 것을 예언자 사후에 편찬한 것을 말한다. 꾸란의 내용은 ‘메카’장과 ‘메디나’장으로 구분되어 CE 610~632년, 약 22년간 메카에서 계시 받은 사항과 메디나 천도 후의 사항을 구분하여 수록되어 있다. 메카장에는 신의 유일성, 도덕, 최후심판 등이 기록되어 있고, 메디나장에는 입법관계, 결혼, 술 돼지고기 도박 간통 금지 등이 명기되어 무슬림의 법전 구실을 하고 있다.

교육, 언론
리비아 교육정책의 주된 목표의 하나는 문맹 퇴치이며, 중등교육과정까지 의무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학교는 모두 국. 공립으로 운영된다. 학제 및 학기는 초등교육 6년, 중등일반과정 3년, 중등기술 또는 훈련과정 4년, 고등일반과정 3년, 고등교사 또는 특수훈련 과정 4년, 대학교육 4년으로 교육제도는 미국식의 6.3.3.4제로서, 매년 9월에 학기가 시작되며 연 35주, 1주 5일의 수업이 행해진다.

언론사로는 국영통신사 JANA (Jamahiriya News Agency), 라디오방송은 El-Jamahiriya, Arab Tripoli(트리폴리 지역), Benghazi Radio Station(벵가지 지역), Sebha Radio Station(세바 지역), Mediterranean Radio Station, Studio 5(영어 및 불어, 트리폴리 지역)이 있으며, TV 방송국은 El-Jamahiriya TV(리비아 전역), Channel 2 TV(영어, 불어, 트리폴리 지역), El-Jamahiriya space channel(아랍어 위성방송), Shaa TV 방송(아랍위성방송 중계 채널)이 있다. 일간지로는 Al-Fajr Al-Jadid(정부공식 기관지), Al-Jamahiriya, Al-Shams(The Sun), Al-Zahf Al-Akhdar가 있으며 주간 및 월간지로는 AL REYAH(스포츠), AL ELAN(광고지), AL MIZAN(경찰지), AL MUNTIGON(제조업소식), AL TALIB(학생지), AL MUAZAF(노동자지), AL THAGAFFA AL ARABIAH(문화지)등이 있다.

한국과 리비아의 관계


민주화 혁명 이전의 기본관계
리비아는 1980년 12월에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카다피 정권 시절 리비아는 국내적으로는 이슬람이 가미된 사회주의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이스라엘 강경정책을 추구했다. 이러한 정책방향이 서구국가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심화시키게 되자 리비아는 Look East 정책(동양권과의 관계증진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리비아는 한국의 국력신장 및 중동진출의 실적을 평가하여 1970년대 말부터 건설 분야를 중심으로 양국의 실질협력관계를 발전시켰으며, UN 제재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 관계는 꾸준히 확대되어 큰 성과를 거두고 상호신뢰를 구축하였다. 1978년 이후 한국 업체의 대규모 수주에도 불구, 로커비 사건(미국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 및 대對리비아 경제제재관련 UN 표결에서 표출된 우리정부의 태도 등으로 양국 간에는 불편한 정치관계가 지속되었다. 한편, 동아건설 파산에 따른 대수로 공사 문제의 원만한 해결, Al-Fateh대학 전산화 사업프로젝트 추진(2001~2003), 우리 전통예술단 공연 개최(2002, 2004, 2005), 우리 고위인사 리비아 방문 등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한 우리의 주도적 노력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확대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반도 통일정책과 관련, 카다피는 2003년 1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자주적 통일원칙, 북한의 무력 및 테러위협 포기, 핵프로그램 중단 등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하였고, 2003년 12월 한-리 친선협회가 정식 발족함으로써 민간차원의 교류 협력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민주화 혁명 이후의 관계
2011년 2월 리비아 민주화 혁명이 발발한 후 우리 정부는 카다피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5월말 대사관을 튀니지로 옮긴 후부터는 과도국가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NTC)와 관계 형성을 시작했다. 6월에는 정부 합동 대표단이 벵가지를 공식 방문하여 NTC를 접촉하였으며, 7월에는 NTC를 지지하는 국가들의 모임인 ‘Contact Group’ 회의에 참석하여 NTC를 다자차원에서 승인하여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다. 한국은 아시아국가 중에서 NTC를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로서, 내전 종식 후 대사관을 최초로 복귀시키는 등, 새로운 리비아와의 협력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나라는 리비아 민주화 혁명 및 내전으로 고통 받는 리비아 국민들을 위해 2011년 국제기구를 통해 100만 달러의 인도적 지원을 시행하였으며, 정부와 민간기업(14개사)를 통해 조성한 160만 달러 규모의 구호물자를 전달했다. 또한, 2012년 1월 국무회의를 통해 단기 경제적 이익보다는 리비아 국민의 ‘마음’ 확보 및 중장기적 국가재건 전략수립 지원, 민관합동 지원 및 우방국과의 공조 추진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수자원 관리와 농업협력, 인프라 구축 등 7가지 분야의 리비아 재건 지원 사업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다. 2012년 4월 30일에는 리비아와의 장기적 경제협력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한-리비아 경제협력 포럼’을 개최했고, 2013년 3월 3일에는 실종자 유해발굴 및 신원확인 사업 차량과 장비 인도식이 개최 되면서 본격적인 리비아 재건 지원 사업이 시작되는 등 다각도의 재건 지원 방안들이 집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통제력이 확고하지 못해 생기고 있는 리비아의 불안한 치안 상황이다. 2014년 1월 19일, 리비아 주재 한국 코트라KOTRA 무역관장이 한 군소 민병대 소속 무장 세력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사흘 만에 구출되었고, 2015년 4월 12일에는 트리폴리 아부나와스 지역에 있는 한국 대사관 앞에서 무장괴한이 기관총 40여발을 난사하여 대사관 경비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리비아 경찰관 2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도 발생했다. 케냐, 남수단에 이어 리비아 등 아프리카 분쟁국에서 발생한 사태가 한국민에게도 실제적인 위협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리비아 교역관계
한국과 리비아 양국의 2013년 총 교역규모는 전년대비 15.6% 감소한 15.4억 달러 기록하였다. 수출 10.6억 달러(-1.1%), 수입 4.8억 달러(-36.2%)로 무역수지 5.8억 달러의 흑자를 달성했다. 원유 수입 감소에 따라 교역규모는 줄었으나, 수입 대비 수출이 소폭 감소에 머물러 무역흑자는 전년대비 79.7% 증가하였다. 2013년 한국의 대對리비아 주요 수출품은 승용차, 화물자동차, 자동차부품, 타이어, 가열난방기, 건설중장비 등 중간재 산업재가 주종을 이루며, 자동차 이외의 수출품은 주로 프로젝트 기자재 관련, 가열난방기, 건설중장비, 축전지, 전선, 변압기, 밸브 등의 산업재이다. 대對리비아 주요 수입품은 원유, 나프타, 어육, 알루미늄괴 및 스크랩, 참치 등으로 전년대비 36.2% 감소한 4.8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한국의 대對리비아 수출품목은 일부 품목(자동차 등)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어 향후 수출 품목 다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리비아에서 한국 상품의 인지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한국산이 자동차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핸드폰, 컴퓨터, 전자제품 등의 한국산 시장 점유율이 매우 높다. 내전 이후에는 연식제한이 무의미해 지면서 한국산 중고자동차의 수입도 대폭 증가하였다. 거리에서 한국 상품의 홍보간판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리비아 소비자에게 한국산은 우수한 제품으로 인식되고 있어 ‘Made in Korea’라는 라벨인 붙인 제품은 최고 제품으로 손꼽힌다. 리비아 시장 수출이 유망한 한국 상품은 자동차 부품, 건설중장비 및 부품, 중소형 제조설비, 위성방송수신기(일명 셋톱 박스), 오일 밸브, 담요, CCTV 카메라 등 보안관련 제품 등이다. 

북한과의 관계
리비아는 1974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리비아는 체제의 유사성과 국제문제에 대한 외교노선의 동질성 및 군사협력 필요성 등으로 비동맹회의 등에서 한국문제 거론 시 북한지지 태도를 견지하였다. 하지만 리비아가 1980년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후 북한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남북한에 대한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2003년 12월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계획 포기 선언 이후 카다피의 북한에 대한 핵포기 촉구는 핵개발이 정당한 자주권 행사라는 주장의 명분을 약화시켜 북한에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 리비아-북한 간 양자관계는 위축되는 추세이나, 2006년 6월 임경만 북한 대외무역 부상 방리, 2008년 7월 바라니 외교차관 방북 등을 계기로 건설, 의료 인력의 리비아 재진출 추진 등 경제분야를 중심으로 관계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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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변화의 기로에 선 파키스탄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인도, 중국, 서역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 자취와 천혜의 다양한 지형에서 파생된 복합적인 문화 유산을 보유한 나라이다. 하지만, 과격한 이슬람 전사들로 상징되는 투쟁적이고 불안정한 이미지와 함께 파키스탄 탈레반과 마약 문제, 카슈미르 영토 분쟁 등 바람 잘 날이 없는 ‘위험한 나라’라는 오명도 함께 갖고 있다. 최근 평화적 정권교체를 달성하고, Look East Policy(동방정책)를 실행에 옮기는 등 미래를 향한 변화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파키스탄의 현재를 더듬어 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파키스탄이슬람공화국Islamic Republic of Pakistan은 북위 23도 30분~36도 45분과 동경 60도 55분~75도 31분 사이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인도,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그리고 북동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해에 접한다. 면적은 796,095㎢로 아시아에서 7번째로 큰 나라이며, 총 해안선의 길이는 1,046㎢이다. 한반도의 3.5배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파키스탄은 인도대륙 서쪽에,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으며 국토의 거의 중앙을 인더스Indus 강이 남북으로 관류한다.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카이버 패스Khyber Pass는 인도아대륙(인도반도)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파키스탄은 지형학적으로 대고원, 발루치스탄 고원, 인더스 평원, 사막지대의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대고원은 히말라야 및 트랜스히말라야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부와 남서부를 이루는 발루치스탄 고원은 해발 약 300m의 중단된 고원으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많은 산맥들이 가로지르고 있다. 동쪽의 인더스 평원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번창하는 농업지역이다. 남동부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탈, 촐리스탄, 타르 등의 사막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파키스탄은 많은 인구에 비해 공항, 도로, 철도 등 교통 인프라가 부족한 편이며, 대도시를 중심으로 버스 등 대중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항구는 신드 주의 카라치Karachi 항구와 콰심Qasim 항구, 발루치스탄 주의 과다르Gwadar 항구와 파스니Pasni 항구이고, 공항 수는 총 151개(세계 37위, 2010년 CIA 기준)로 국제공항은 진나Jinnah국제공항과 베나지르부토Benazir Bhutto국제공항 등 총 14개 국제공항이 있다. 도로는 총 262,256㎞(세계 20위, 2010년 CIA 기준)이고, 철도는 총 7,791㎞(세계 27위, 2010년 CIA 기준)이다. 

파키스탄은 극단적인 기후를 가지고 있다. 북회귀선이 지나는 자리, 그리고 몬순지역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매우 다양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 북부 산악지방은 고산성 기후이며, 중앙의 펀잡 지방은 스텝 또는 온대 기후이다. 주로 북부 쪽에 위치한 산악지역은 겨울에는 매우 춥다. 고산지의 경우에는 -30℃에서 -40℃까지도 내려가는 등 극단적으로 추운 기후를 보인다. 여름에는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며, 평야지방은 여름에는 40℃ 이상으로 매우 덥고 0℃ 근처의 겨울에는 쌀쌀한 기후를 보인다. 남부 신드, 발루치스탄의 해안지역은 연중 온도가 30℃ 이상으로 평야지방과 비슷하게 덥거나, 25℃ 정도의 따뜻한 날씨다. 해안지방은 온도가 낮아도 습도가 높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더 높을 수 있다. 계절은 대체로 3개로 구분 가능하며 1월~3월간은 비교적 건조하며 최저 4℃, 최고 18℃의 서늘한 기후이고 4월~9월간은 혹서기로서 낮 기온이 30℃~50℃까지 올라가기도 하며, 7월~8월간은 몬순기로서 비가 많이 온다. 10월~12월간은 건조하며 최고 기온은 20℃ 내외로 아침, 저녁은 서늘하여 지내기 좋은 계절이다.

파키스탄은 몬순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히말라야 남부산맥과 그 주변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강우량이 충분치 못하다. 지방에 따라 연간 5㎜~1,000㎜의 강우량을 보이고 90% 이상의 지역이 연간 510㎜ 이하이며, 강우량의 75% 가량이 7월에 집중된다. 발루치스탄의 건조지대는 연간 강우량이 210㎜인 반면 히말라야 남쪽산맥지역은 1,270㎜이며, 주요 도시의 연간 강우량은 이슬라마바드 900㎜, 카라치 196㎜, 라호르 452㎜, 퀘타 239㎜, 페샤와르 300㎜이다.

파키스탄의 역사

고대 및 중세
1947년 8월 독립 이전의 파키스탄 역사는 바로 인도의 역사이기도 하다. 파키스탄 서남부의 인더스강 하류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enjodaro에는 고대문명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BCE(기원전) 3000년경에 발전한 금석병용기시대의 도시국가 유적으로서 인더스강 상류의 하랍파Harappa유적과 함께 고대 인더스문명의 기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더스문명은 고도의 청동기 문명으로서 정연한 도로, 완비된 위생시설 등 탁월한 도시건설로 유명하며, 약 1천년 동안 지속되다가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북방지역에서 침입해 온 아리안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BCE 4세기경 알렉산더대왕의 인도 침입 이후 인도의 서북지방은 외래 세력의 침투로가 되어 그리스, 훈, 터키족 같은 제 세력이 침입, 성쇠를 거듭하였으며, 문화, 예술 및 언어 등도 이러한 외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슬람교(무슬림muslim) 세력의 서북지방 침입으로 델리를 중심으로 이슬람교 왕조의 성쇠가 되풀이되었으나, 이슬람교 세력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리안족이 만든 카스트 제도는 유지되었다. 

중앙아시아의 ‘티무르Timur’가 멸망한 후 그의 후예인 바부르Babur가 1500년경 북인도에 수립한 무굴Mughul 제국은 인도 전역과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포함한 대제국이었으나,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 대립, 농민반란 등으로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다가 세포이 반란Sepoy Mutiny(1857)을 계기로 1858년 영국에 합병되었다.

영국 식민통치기(1858~1947.8)
영국 식민통치하의 독립운동이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등 힌두교도의 지도하에 1885년 소집된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자, 이슬람교도들은 1907년 이슬람교동맹을 결성하고 1930년대 초 이슬람교 도시인 알라마 익발Allama Iqbal 등에 의해 태동된 이슬람 국가의 분리독립 이념을 토대로 인도 대륙에 두 개의 국가 건설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슬람교동맹은 1940년 3월 라호르에서 개최된 정당회의에서 독립국가의 영토를 이슬람교도 밀집거주지역으로 하는 결의안(일명 ‘파키스탄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파키스탄 독립 요구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46년 10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슬람교동맹은 임시정부 내에서의 투쟁을 위해 대표를 파견하였고, 국민회의 지도자들도 파키스탄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방안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1946년 초 영국정부의 각료사절단은 세 개의 연방그룹 결성계획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1947년 6월 3일 분리계획서가 공포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이슬람교도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벵갈Bengal과 펀잡Punjab 두 지역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었으며, 서부 펀잡, 동 벵갈, 신드, 발루치스탄의 지방의회와 퀘타 자치주가 파키스탄 편입을 지지하고 북서 변방 지역과 아삼 실헷 지역의 주민들도 국민투표로 파키스탄 편입을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1947년 8월 14일 이들 지방을 영토로 하여 파키스탄이라는 새 국가가 영연방에 속한 자치령으로 탄생하였다. 독립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 영토를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서로 떨어진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이라는 두 영토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독립초기(1947.8~1958.10)
파키스탄 독립과 동시에 분리 독립 운동을 이끈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가 초대 총독(Governor General)으로 선출되고, 초대 총리에는 리아콰트 알리 칸(Liaquat Ali Khan)이 취임하였다. 1948년 폐암으로 별세한 진나는 파키스탄에서 콰이드에아잠Quaid-e-Azam(우르두어로 ‘위대한 지도자’) 및 바바에쾀Baba-e-Qaum(‘국부’라는 의미)이라고 불리며 추앙을 받고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국명은 진나가 독립 당시 파키스탄을 구성하는 다섯 개 지역인 펀잡Punjab,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의 지명들에서 문자어를 따서 만든 조어로 알려져 있다.

신생 파키스탄은 법률 및 제도의 정비, UN가입 등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가다가 1948년 5월부터 인도와의 영유권 분쟁지역인 카슈미르Kashmir에서 이슬람교도들의 무장봉기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이 군대를 파견, 충돌함으로써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1949년 1월 UN 중재 하에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파키스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아유브 칸 정권(1958.10~1969.3)
파키스탄 독립 이후 정치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다가 1958년 10월 아유브 칸Ayub Khan 장군에 의한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칸 장군은 집권 초반기에는 통치기반을 군과 관료에 의존하였으나 1960년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포고령을 선포한 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유브 칸 대통령은 카슈미르 영유권 분쟁으로 다시 재개된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의 패배와 친인척의 관직 등용, 부패, 경제개발의 실패 등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서파키스탄에서는 그의 첫 외무장관이었던 줄피칼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로부터, 동파키스탄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벵갈인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아와미동맹Awami League의 세이크 무지부르 라만Sheigkh Mujibur Rahman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1968년 10월 서쪽지방에서 발생한 시위가 동쪽지방까지 확산되자 1969년 3월 아유브 칸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인 야히야 칸Yahya Khan 장군에게 정권을 인계하였다.

야히야 칸 정권(1969.3~1971.12)
야히야 칸 장군에 의해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총선이 1970년 12월에 실시되었다. 그 결과 서파키스탄에서 알리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PPP: Pakistan Peoples Party)이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였고, 동파키스탄에서는 무지부르 라만이 영도하는 아와미동맹이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동서 파키스탄 양 정치지도자간의 연합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은 양측 간의 심각한 의견 차이로 결렬되었다. 동파키스탄은 인종 언어 생활양식 등 모두가 서파키스탄과 달랐고 경제적 차별을 받아 일종의 식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여 항상 파키스탄 중앙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71년 3월 아와미동맹이 주도한 과격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동파키스탄 정국이 혼미해짐에 따라 서파키스탄은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유혈 진압 과정에서 많은 벵갈인이 살해되었다. 이후 파키스탄군과 벵골 자유 투사들 간의 전투가 계속된 내전으로 확산되자, 힌두교를 믿는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벵갈인이 인도에 유입되었다. 이에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사 개입을 하여 12월에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서파키스탄이 패하면서 동파키스탄은 국호를 방글라데시Bangladesh(‘벵골 국가’라는 의미)로 하여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1971.3.26)하였고, 서파키스탄은 현재의 파키스탄으로 재출발하여 4개의 행정지역으로 재편하였다. 

알리 부토 정권(1971.12~1977.7)
1971년 12월 야히야 칸 장군은 의회 다수당인 파키스탄인민당(PPP) 지도자 알리 부토에게 정권을 인계하였으며, 부토는 1973년 8월 신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내각책임제하의 총리로 취임했다. 부토 총리는 집권 이래 주요 산업의 국유화, 노동자의 경영 참여 및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노선을 채택하면서 농업의 증산 등 경제건설을 추진하였으나, 막대한 전비와 주력 수출상품인 구 동파키스탄의 황마 상실 및 노동운동 격화로 경제가 호전되지 않았다.

부토 총리는 1977년 3월 총선에서 압승하였으나 선거과정에서 투표조작과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비난이 뒤따랐으며, 야당연합체의 총선결과 불복 선언 및 총리 사임 요구로 정국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7월 지아 울 하크Zia-ul-Haq 장군에 의한 쿠데타로 실각하고 1979년 4월 야당인사 살인 연루혐의로 옥중 처형되었다.

지아 울 하크 정권(1977.7~1988.8)
지아 울 하크 장군은 1978년 10월 대통령에 취임 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6년 1월 정당법이 부활될 때까지 약 10년간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유례없는 강압통치를 실시했다. 지아 대통령은 집권기반 구축을 위하여 추진해 온 이슬람화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를 1984년 12월 실시하여 투표자 97%의 지지를 받았다. 기존 법제도를 이슬람법(샤리아Sharia)에 부합되도록 하는 이슬람국가 건설 프로그램에 의해 현재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람법과 서구 법제도가 혼용되고 있다. 지아 대통령은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알리 부토 전 대통령의 딸)의 파키스탄인민당(PPP)를 비롯한 야당 연합체인 ‘민주주의 회복운동(MRD: Movement for the Restoration of Democracy)’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지아 대통령은 1985년 3월 대통령직 재취임을 앞두고 민정이양 계획을 추진하여 2월부터 하원, 주의회, 상원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8월 모하메드 칸 주네조Mohammed Khan Junejo 총리 주도의 민간정부가 출범하였으며 12월에 계엄령이 해제되고 1986년 1월 정당법이 실시됨으로써 정당정치가 부활되었다. 1984년에 영국으로 망명한 베나지르 부토는 망명 상태에서 부친의 정당인 파키스탄인민당 당수로 취임하였으며, 지아 대통령의 종용으로 1986년 4월에 귀국하여 반정부 활동을 주도하였다. 1988년 5월 지아 대통령은 치안유지 실패를 이유로 하원을 해산하고, 이슬람화 정책과 정당의 역할에 관해 대립해 온 주네조 총리를 해임한 후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1988년 8월 지아 대통령이 의문의 항공사고로 사망하여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인 파키스탄인민당이 여당연합인 이슬람민주연합(IDA)을 누르고 승리, 파키스탄인민당 총재인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이슬람교국가들 중에선 처음으로 여성 총리로 취임하고 굴람 이샤크 칸Ghulam Ishaq Kahn 상원의장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1977년 7월 지아 장군의 군사쿠데타 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완전한 민선정부가 수립되었다. 

제1차 베나지르 부토 정권(1988.11~1990.8)
베나지르 부토 정부는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및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비동맹을 천명하면서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과 관계 강화도 추구하였다. 부토 정부는 출범 초부터 펀잡Punjab주에서는 주 다수당인 IDA(이슬람민주동맹)와 대립하고, 신드Sindh주에서는 연립정당인 MQM(Muttahida Quami Movement, 통일민족운동당: 1947년 독립 당시 인도에서 이주해온 무슬림들인 무하지르Mohajir가 설립한 정당)과 대립하였으며, IDA측은 치안 불안, 경제난, 대인도 유화정책을 이유로 1989년 10월 총리 불신임안을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신드주를 장악한 MQM의 경제력에 위협을 느낀 신드주 토착인들의 반발로 양측 간에 무력 충돌이 심해지고, 과세부담 증가, 인플레 심화, 집권층의 부정부패(부토 총리의 남편인 자르다리Zardari 의원의 이권개입, 주식시장 스캔들에 재무장관 연루 등)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1990년 8월 이샤크 칸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부정부패, 권력남용, 헌법위반 등 혐의로 부토 총리를 해임하였다. 굴람 무스타파 자토이Ghulam Mustafa Jatoi 과도정부 총리하에 1990년 10월 실시된 총선에서 IDA가 승리하여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 IDA 총재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제1차 나와즈 샤리프 정권(1990.10~1993.7)
샤리프 총리는 규제완화, 민영화, 민간주도 경제,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 경제개혁프로그램 실시하고 외국인투자 유치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부토 전총리 남편인 자르다리 의원을 살인과 테러 혐의로 수감했다. 1991년부터 대규모 금융스캔들, 신드주 사태로 인한 군부-MQM 간의 갈등, 참모총장 인선문제로 총리와 대통령 간의 대립이 심화되며 정국이 혼란해지자 칸 대통령은 1993년 4월 샤리프 총리를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샤리프 총리가 제기한 위헌 제소에 대해 대법원이 대통령의 권한 행사가 위헌이라고 판결함으로써 총리는 복권되었으나 결국 군부 중재로 1993년 7월 대통령과 총리가 동시에 사임하였다.

제2차 베나지르 부토 정권(1993.10~1996.11)
1993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한 파키스탄인민당(PPP)은 일부 정당과 연합하여 연립정권을 수립하여 부토 총리가 취임하고, 11월 대통령선거(의회 간접선거)에서 총리 측근인 파루크 아메드 칸 레가리Farooq Ahmed Khan Leghari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부패와 총리의 전횡, 테러의 증대, 급격한 물가 인상 등의 요인들로 인해 1995년부터 총리와 대통령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도 증대되었다. 레가리 대통령은 1996년 11월 하원을 해산하고 총리를 해임하였으며, 부토 총리의 남편인 자르다리 의원은 부패혐의로 수감되었다. 총리는 하원해산 및 총리해임이 위헌이라며 대법원에 제소했으나 패소하고 미라즈 칼리드Miraj Khalid가 과도내각 총리로 임명되었다. 

제2차 나와즈 샤리프 정권(1997.2~1999.10)
1997년 2월 총선에서 파키스탄 무슬림동맹 나와즈그룹(PML-N: Pakistan Muslim League-Nawaz)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당수인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샤리프 총리는 경제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자조적 노력을 통한 국가부채 상환 프로그램, 경제회복 계획 및 농업생산증진을 추진하였다. 샤리프 총리는 1997년 4월에 내각책임제 요소를 약화시키고 대통령 권한 강화를 지향한 제8차 개헌을 폐지하는 내용의 제13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총리 권한을 강화했으며, 7월에 ‘당적 변경, 소속당의 당헌 방침 위배 행위 국회의원 자격 박탈’을 추가하는 제14차 개헌을 통과시켰다. 

1997년 8월 대법관 임명 문제로 총리-대법원장, 총리-대통령 간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가운데 대법원장이 제13차 개헌을 정지시키고 대통령의 하원해산권을 부활시킴으로써 하원해산 위기가 대두되었으나 대통령이 자진 사임함으로써 정국이 수습되었다. 12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샤리프 총리가 추천한 무하마드 라피크 타라르Muhammad Rafiq Tarar 상원의원이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1999.10~2008.3.25)
샤리프 총리와 군부 간의 갈등으로 1999년 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육군참모총장 주도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무샤라프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이 출범하였다. 군사정권은 잠정헌법령 및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샤리프 총리는 2000년 12월 사우디로 망명하였다. 미국의 경제제재 등 압력에도 불구하고 2001년 6월 무샤라프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9.11 테러 사태를 맞은 미국은 대 아프간 전쟁을 위해 파키스탄의 협력이 필요함에 따라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였다. 2002년 4월 국민투표에서 무샤라프 대통령 임기 5년 연장안이 통과되었으며,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과 당초 자신의 약속대로 10월에 총선을 실시하였고 여당인 PML-Q(Pakistan Muslim League-Quaid-e-Azam, 파키스탄무슬림리그-콰이드에아잠)의 승리로 정국이 안정되고 자파룰라 칸 자말리Zafarullah Khan Jamali 총리 내각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정치역량 부족을 이유로 한 여당의 압력으로 2004년 6월 자말리 총리가 사임하고 PML-Q 당수인 차우드리 슈자트 후세인Chaudhry Shujaat Hussain 과도 총리에 이어 8월에 샤우카트 아지즈Shaukat Aziz 총리 내각이 출범하였다. 2007년 3월 무샤라프 대통령의 차우드리Chaudry 전 대법원장 직무정지 및 직권남용 혐의 조사에 대해 전국적인 항의시위가 격화되고, 7월에는 랄 마스지드Lal Masjid(붉은 사원)에서 무장항거하던 과격 무슬림교도들의 진압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망명 중이던 부토 전 총리와 샤리프 전 총리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한 가운데 2007년 10월 선거에서 무샤라프 대통령이 재선출되었다. 2007년 11월 무샤라프 대통령은 사법부의 월권행위로 인한 국가기관 업무마비와 테러 증가를 명분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임시헌법명령을 공포하였다. 12월에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초 2008년 1월로 예정되었던 총선이 2월에 실시되었고 이 총선에서 무샤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PML-Q가 참패하였다.

아시프 자르다리 정권(2008.3~2013.6)
총선에서 최대의석을 확보한 아시프 자르다리Asif Zardari 주도의 파키스탄인민당(PPP)은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가 주도하는 PML-N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파키스탄인민당의 유사프 라자 길라니Yousaf Raza Gillani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연립정부의 압력으로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하고 2008년 8월 실시된 선거에서 자르다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9년 2월 대법원이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와 동생인 샤바즈 샤리프Shahbaz Sharif 펀잡주 수석장관의 피선거자격 무효 판결을 내림으로써 PPP와 PML-N 간의 불신이 심화되었다. 2009년 11월 법무부가 발표한 국가화해법안(NRO) 수혜대상자 목록에 스위스에서 거액의 자금세탁 혐의를 받고 있던 자르다리 대통령과 장관들이 포함되자 야당이 반발하고, 대법원이 NRO 원인무효 및 NRO 수혜자에 대한 범죄사실 조사 처리 판결을 내림으로써 대통령이 큰 타격을 입었다. 2010년 4월 제18차 헌법개정으로 대통령 권한 축소, 총리 권한 강화, 의회 기능 강화, 지방정부 자치권 강화 등이 실현됨으로써, 40년간 지속된 군인정치로 인해 사실상 대통령제와 유사한 모습이었던 정치체제가 1973년 민주헌법 체제에 따른 내각책임제 헌법으로 환원되었다. 2012년 4월 대법원은 NRO 판결 미이행을 이유로 길라니 총리에게 법원모독죄 판결을 내리고 6월에는 의원자격 상실 판결을 내림으로써 길라니 총리가 실각하고 내각이 해산되었으며 라자 아시라프Raja Ashraf 전 정보통신기술부장관이 신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2013년 1월 이슬람 성직자 콰드리Qadri 주도의 대규모 정권퇴진 집회로 정부기능이 마비되고, 대법원은 과거 수전력부장관 시절 수뢰혐의로 아시라프 총리 체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정국이 혼미해졌다. 2013년 3월 콰드리측과 정부 간의 합의에 따라 정부가 해산하고 중립적인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제3차 나와즈 샤리프 정권(2013.6~현재)
2013년 5월 총선에서 PML-N이 대승하여 당수인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가 총리로 선출되고, 9월에 기업인 출신인 맘눈 후세인Mamnoon Hussain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전임 자르다리 대통령이 처음으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함으로써 파키스탄에서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파키스탄 탈레반(TTP)

파키스탄 탈레반(TTP: Tehrik-e-Taliban Pakistan)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을 지지하는 파키스탄 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13개가 연합해 2007년에 결성된 이슬람 무장단체이며, 2001년 미국에 의해 축출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는 다른 조직이다. TPP는 파키스탄 정부를 전복하고 이슬람법(샤리아Sharia)이 시행되는 강력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이들은 서구식 교육이 학교에서 이뤄지는 것을 반대하며, 특히 여성이 교육받는 것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TPP 조직은 2014년 기준 25,000명 규모로 파악되고 있으며, 알카에다와 연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TPP를 이끈 초대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와 2대 지도자 하키물라 메수드는 모두 미군 무인항공기(드론) 공격을 받아 사망했으며, 2013년부터는 마울라나 파즈룰라가 3대 최고지도자로 선출되었다. 

TPP는 2008년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을 차량 폭탄으로 공격해 60명을 살해했고, 2009년에는 페샤와르Peshawar의 펄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공격해 17명을 살해했다. 2014년 9월 페샤와르의 한 교회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켜 어린이 등 81명을 사망하게 했으며, 12월에는 페샤와르의 한 학교에 난입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해 10대 학생과 교사 등 최소 140여 명을 살해하는 테러를 자행했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전선국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파키스탄은 2007년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TTP와 전투를 벌였으며, TTP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파키스탄 전역에서 군과 경찰은 물론 일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빈번하게 자행하였다. 2013년 9월 샤리프 정부는 제정파회의 결의를 통해 TTP와 평화협상을 추진했으나 TTP에 의한 테러는 계속되고 실제 협상은 개최되지 않았다. 2014년 초부터 TTP에 의한 대규모 테러가 빈발하자 파키스탄 정부군은 적극적인 대응 공세에 나섰다. 특히 2014년 12월 학교에서 발생한 끔찍한 테러 사건은 파키스탄에서 테러범을 몰아내야 한다는 범국가적인 합의를 이뤄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파키스탄군은 공군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TTP 소탕 작전에 돌입하여 1년 만에 약 3000명이 넘는 탈레반을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올해 말까지 탈레반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TTP 테러와 관련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의 한 소녀가 있다. ‘여성은 학교에 가서는 안 된다’는 탈레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육 받을 권리를 주장하다 지난 2012년 얼굴에 총을 맞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18세)는 2014년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지금은 영국에서 거주하며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내각책임제
파키스탄은 1957년 3월 이슬람공화국 헌법을 공포한 이래 정치체제 등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헌법개정을 거쳤다. 그 결과 내각책임제를 기반으로 하되,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총리 권한을 강화하는 방식(2010년 4월 개정 헌법)으로 현행 정치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2013년 5월 총선에서 파키스탄무슬림리그-나와즈(PML-N)당이 대승을 거둔 후 6월에 당수인 나와즈 샤리프Muhammad Nawaz Sharif가 하원 투표에 의해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9월에는 기업인 출신인 맘눈 후세인Mamnoon Hussain이 국회(상하원)와 지방의회 의원 투표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행정부: 내각
파키스탄의 정치 행정은 내각 중심으로 운영된다.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 수반(Head of the State)으로서 총리가 추천한 각군 참모총장의 임명 해임권을 보유(형식적 절차)하고, 의회 해산시 퇴임하는 총리 및 야당 대표와의 협의 하에 과도정부를 구성하며, 적법한 입법절차에 따라 의회가 대통령에게 송부한 법안을 10일 이내 처리한다.

총리는 모든 행정에 관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행정부 수반(Head of the Government)으로 참모총장위원회(Chiefs of Staff Committee)의 의장과 각군 참모총장 후보 건의권을 보유하고, 국가 중요정책에 관해 대통령에게 통지할(to inform) 의무가 있다. 2010년 개정 전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의회해산권, 하원의 총리 불신임권과 함께 총리가 대통령과 협의할(to consult) 의무 등이 규정되었으나 총리 권한이 강화된 현행 헌법에서는 이러한 규정들이 사라졌다. 행정관료는 직급에 따라 장관Minister, 국무장관Minister for State, 수석차관Secretary General, 차관Secretary, 차관보Additional Secretary, 국장Joint Secretary(Director General), 과장Deputy Secretary(Director), 담당관Assistant Director으로 구분한다. 

지방행정은 발루치스탄Baluchistan주, 펀잡Punjab주, 신드Sindh주, 카이버팍툰콰Khyber Pakhtunkhwa주(북서변경주North West Frontier Province가 2010년 개칭) 등 4개 주와 부족자치지역(FATA: Federally Administered Tribal Area) 및 연방수도지역(FCA: Federal Capital Area)으로 구성된다. 주에는 주지사(Governor), 수석장관(Chief Minister) 및 주의회(Provincial Assembly)를 설치하였다.

입법부: 양원제 의회
파키스탄의 의회Parliament는 상하양원제로 운영된다. 상원Senate은 총 104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펀잡주와 신드주, 카이버팍툰콰주 및 발루치스탄주의 주의회에서 각각 23명씩 선출한 92명의 의원과 하원에서 선출한 FCA 대표 4명 및 FATA 대표 8명 등이다. 상원의 임기는 6년이며 매 3년마다 2분의 1을 개편한다. 상원의장단은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임기 3년)이고 대통령 공석시 상원의장이 대통령 직무 및 권한을 대행한다. 상원은 자체적으로 법안을 발의하거나 하원에서 이송된 법안에 대한 의결권을 보유한다. 통화법안(Money Bill)을 제외한 모든 법안은 상하원에서 발의가 가능하다. 법안 통과는 출석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정되는데, 예외적으로 헌법 개정안은 재적인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통과된다. 법안에 관해 상하원 간에 이견이 있는 경우 상하원 합동 회의에 회부되며, 최종적으로 의견 불일치가 있는 경우에는 부결된다. 상원은 적어도 1년에 3번 회기를 가지며, 최소한 90일 이상 개원해야 한다. 상원의 개원과 폐회 공고는 대통령이 한다. 상원의장은 상원의원 재적 4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대통령에게 개원을 요구하거나, 상원의장 명의로 개원 공고를 할 수 있다. 

하원National Assembly은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 342명으로 구성된다. 무슬림 하원의원은 272명으로 펀잡주 148명, 신드주 61명, 카이버팍툰콰주 35명, 발루치스탄주 14명, FATA 12명, FCA 2명으로 구성된다. 또한 여성 하원의원 60명과 소수 종교인 하원의원 10명이 비례대표로 선출된다. 하원의원의 임기는 5년이고 하원 의장단은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이다. 하원은 1년에 적어도 3번의 회기를 열고, 최소한 130일을 개원해야 한다. 회기 공고는 대통령이 하며, 4분의 1 이상의 하원의원이 요구하면 하원의장이 소집 공고를 낼 수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PPP(Pakistan Peoples Party, 파키스탄인민당), PML-N(Pakistan Muslim League-Nawaz, 파키스탄무슬림리그-나와즈), PML-Q(Pakistan Muslim League-Quaid-e-Azam, 파키스탄무슬림리그-콰이드에아잠), MMA(Muttahida Majlis-e-Amal, 이슬람정당연합), MQM(Muttahida Quami Movement, 통일민족운동당) 등이 있다. 

파키스탄의 주의회Provincial Assembly는 각 지방별로 투표에 의해 일반, 여성, 소수민족으로 나누어 일정 수의 의원을 선출해 구성한다. 의원의 임기는 5년이고, 의장단은 의장과 부의장 각 1명이다. 주의회 해산은 지방정부 수석장관(Chief Minister)의 권고를 받아들여 주지사가 행한다.

경제


경제 개관
파키스탄은 세계 6위(1.9억 명)의 거대 소비시장과 한반도 3.5배의 방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갖추고 있고,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위치한 미래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큰 국가이다. 가스, 석탄, 구리, 금, 철광석, 암염, 대리석, 크로마이트 등 풍부한 천연 광물자원과 52종의 미개발된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 중동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데다 18~40세가 전체 인구의 57%(약 1억명)를 차지하는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2014년 기준 GDP가 2,414억 달러, 1인당 GDP는 1,307 달러의 개발도상국이다. 또한 인더스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농업이 발달하였고, 주요 산업도 농업에 기초한 준 산업화 경제(semi industrialized economy)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농업이 전체 GDP의 21%를 차지하고 국민의 약 70%가 농업부문에 의존하는 농업중심 국가이다. 연간 교역액은 약 650억 달러로 전체 경제 규모대비 교역액이 크지 않은 국내 소비 위주의 내수형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산업도 경공업 위주의 저 개발형 산업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므로 수입이 전체 교역액의 65%를 차지하여 큰 폭의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으며, 산업의 90%를 중소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비재는 고관세로 수입 억제 정책을 실시하여 수입 품목의 대부분이 기계류, 석유, 화학제품 등 중화학 공업 제품으로 구성된다. 생필품 중 특히 가전제품 등은 상당 부분이 밀수로 들어오거나 여행자 짐을 통해 시장에 반입되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 소비재의 해외 제품 의존도는 정규 수입량보다 30% 정도 많은 것으로 추정 된다. 파키스탄 경제는 높은 성장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빈번한 테러 및 종파분쟁에 따른 불안한 치안상황과 만연한 부패문제, 만성적인 전력부족 사태, 열악한 인프라 등이 경제발전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장특성 및 주요산업
파키스탄 시장은 최근까지만 해도 전형적 프로젝트 시장으로 일반 소비재는 밀수가 주도적이었고, 도로, 항만, 통신 등 기간산업 설비 확충에 따른 입찰 비즈니스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1998년 핵 실험 이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 및 차관이 크게 줄어들면서 대형 프로젝트는 대부분 공급자 금융의 BOT(Build, Operate, Transfer) 또는 BOO(Build, Own, Operate) 베이스로 추진되고 있다. 

파키스탄은 세계 4위의 면화 생산국으로 인더스 강 유역의 풍부한 면화와 인구 1억 6,000 만 명의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섬유 산업을 전체 산업 인력의 38%, 전체 제조업의 46%,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국가 최대 산업으로 발전 시켜왔다. 가전 산업은 대부분 다국적 기업과 현지 파트너와의 합작을 통한 현지 생산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정보통신 산업은 2003년 통신산업 규제완화 정책을 발표하며 통신산업의 경쟁 체제를 도입하였고, 최근 유무선 통신 산업이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동통신 분야에 대한 투자 집중과 소득 수준 향상으로 이동전화 서비스 가입자 수가 최근에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교역 현황
파키스탄의 교역 상황은 원면, 면사, 카페트, 피혁, 쌀 등이 주종을 이루는 빈약한 수출 구조와 국내경제 기반 빈약에 기인하는 원자재, 기계류 및 소비재의 수입 증가로 무역수지 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 있다. 2011/12년도 무역수지 적자가 157억 달러에 달했으나 그 이후 정부의 수출확대 추진 및 수입 제한 정책 등으로 2012/13년도에는 약 154억 달러로 미미하나마 무역적자 규모가 감소하였다. 주요 수출대상국은 미국, 중국, UAE, 아프가니스탄, 영국, 독일, 이탈리아, 홍콩 순이고, 주요 수입대상국은 UAE,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일본, 싱가포르, 독일, 인도 미국, 영국 순이며, 한국은 2012/13년도 기준으로 파키스탄의 13번째 교역 대상국이다. 

신정부의 경제정책
2013년 6월 집권한 나와즈 샤리프 정부는 경제회생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외환부족 사태 해결을 위해 IMF로부터 66.5억 달러의 금융 지원을 수용하고, 전력난 해결을 위한 약 48억 달러의 전력요금미납금(circular debt) 지급 및 국영기업 민영화 추진 등 친기업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GDP가 4.4% 증가하고, 카라치 증시가 49% 상승하는 등 투자 심리와 경기가 점차 호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파키스탄은 경제정책 측면에서 ‘신정부 VISION 2025 국가 전략’ 수립을 진행하고 있고, 적극적인 외국인투자 유치 정책과 개방적 통상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수입규제 및 비관세 장벽이 높지 않은 개방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FTA 등을 통한 제3국 시장접근을 강화하고 수출 강화 정책과 재정 건전화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1990년대부터 진행해 온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공기업을 구조 조정하는 등 경제구조 개혁도 가속화하고 있다. 

사회와 문화


문화적 특성
파키스탄은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지만 지역적, 민족적 기원으로 살펴볼 때 인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의 접점 지역에 있고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동 유럽과의 교류도 있었으므로 이러한 다자적 문화 특성이 복합되어 있다. 10세기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고대 모헨조다로 문명 유적지나 간다라 불교 유적, 유물들이 보전되고 있으며, 이슬람 궁전과 힌두 사원, 앙골-몽골의 주택 등 다양한 문화 자원들이 많다. 실크와 보석 세공품, 목각 제품과 금속 조각품 등도 유명하다. 

이슬람 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만큼 파키스탄에서는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무슬림 운동이 강조되고 있는데, 일반생활 곳곳에서 무슬림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부심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복장은 전통 복장이 일반적이며 술과 돼지고기, 도박이 금지되고 있다. 예술 부문으로 눈을 돌려 보면 고유의 서예 분야를 제외하고는 서구적 개념의 일반예술 수준은 낮다고 할 수 있다. 대학 중에도 예술 부문의 학과가 있는 대학은 펀잡대학교(Punjab University)와 라호르Lahore 지역에 있는 국립대학(National College) 정도이다. 스포츠 분야에서 파키스탄은 하키Hockey와 크리켓Cricket의 강국이며 30여 개의 각종 체육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인구, 민족 및 언어
파키스탄의 인구는 1947년 독립 이후 약 50년 동안 거의 4배로 늘어 2014년 기준 1억 9천6백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증가율은 1960년대에는 3.6%, 1980년대에는 2.6%, 2011년에는 2.05%, 2012/13년에는 2%을 기록하고 있으며, 평균인구밀도는 1981년 1㎢ 당 106명에서 2013년에는 239명으로 증가하였다. 인구의 대부분이 펀잡과 신드지방의 비옥한 인더스강 유역에 살고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황무지로 인구밀도가 낮아 각 지방의 인구밀도는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평균수명은 2013년 기준으로 남성은 64.6세, 여성은 66.5세이다.

파키스탄의 민족 구성은 인도 아리안계가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드라비다족, 희랍족, 터키족, 페르시아족, 아랍족 및 무갈족 등이 있으며, 우르두(Urdu)어를 사용한다. 지방별 원주민으로 구분하면 펀잡인(Punjabi), 신드인(Sindhi), 발루치인(Baluchi) 및 파탄인(Pathans)으로 나누어지며 각 지방 원주민들은 상이한 특성을 갖고 있다. 펀잡인은 인구의 56%를 차지하고 있으며 체격이 건장하고 활동적이어서 군과 관료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지아 전 대통령과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펀잡주 출신). 과거 지아 대통령의 펀잡주 우선주의 통치는 타지방과의 반목을 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자치권 확대에도 장애가 되었으며, 특히 베나지르 부토 출신지역인 신드지방은 펀잡인이 주도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보여 왔다. 신드인은 손기술이 뛰어나 정교한 수공예품 생산에 능하고, 발루치인들은 단순하고 정직하며 신앙심이 깊고 주로 유목생활을 한다. 카이버팍툰콰주에 거주하는 파탄인은 발루치인과 더불어 인도 아리안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종족으로 투사적 기질이 두드러지며 원한 및 적대관계가 있을시 생명을 건 결투전통이 있다.

파키스탄의 국어는 우르두(Urdu)어이다. 비록 종족에 따라 모국어가 다를지라도 우르두어를 통해서 국민의 일체감을 가진다. 우르두어는 터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군대 또는 야영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군대용어처럼 단순하다. 우르두어는 공손하고 온화한 언어로 모든 인간의 동등성을 나타내는 언어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영국의 오랜 식민지 지배로 인해 영어가 널리 전파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상용 및 관용문서도 영어를 사용한다. 그 밖에 펀잡어, 신드어, 발루치어, 파슈트어 등 24개의 지방언어가 있다. 

종교 
파키스탄은 국가를 탄생케 한 역사적인 배경이 종교에 있었듯이 국민의 97%가 이슬람교도이며, 이중 대부분이 수니Sunni파이고 나머지 15~25% 정도가 시아Shiite파이다. 이슬람교는 국교로서 사회문화는 물론 정치, 경제, 법률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 밖의 종교로는 아마디종파가 있는데, 그들 스스로는 이슬람교도로 자처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비이슬람교도로 간주되며, 과거 종교문제로 수니파와 기타 종파 간, 수니파의 각 계파 간에 많은 충돌이 있었다. 소수종교로서, 신드주에는 힌두교도(전체인구의 1.5%)들의 소규모 공동체가 있고 카라치 등 주요도시에는 약간의 기독교인(1%)들도 있다.

지아 전前대통령은 1977년 7월 집권 이래 파키스탄의 무슬림화에 역점을 두고 하두드Hadood(무슬림식 신체절단 및 태형 등 형벌), 샤리아 코트Shariat Court(무슬림재판소), 자카트Zakat(부유층이 극빈자를 위해 제공하는 자선형태의 조세), 우샤르Ushar(무이자 금융제도) 등의 제도를 도입한 바 있으나 현재는 무슬림화 정책이 후퇴해 있다. 1999년 집권한 무샤라프 대통령은 집권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온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2006년에는 여성보호를 위한 개혁 입법 등 사회개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바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신앙고백, 희사, 예배, 금식 및 성지순례의 회교도 5대 의무가 모든 가치기준의 척도이며, 하루 5회 기도시간을 준수하며 기도시간이 되면 이슬람교사원에서 기도를 스피커로 내보낸다. 

언론 
파키스탄에는 APP(Associated Press of Pakistan, 국영), PPI(Pakistan Press International, 민영), NNI(News Network International, 민영) 등 3대 통신사가 있으며, 국영 APP의 시설 및 기술은 양호한 편이다. TV 방송으로는 국영 PTV(3개 채널)와 AJK TV가 있고 기타 Geo-TV, ARYONE, Indus TV 등 다수 채널이 두바이 또는 인도에 본사를 두고 방송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은 국영 PBC(Pakistan Broadcasting Corporation)가 있다. 

주요 일간신문으로는 파키스탄 최고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대중지 Jang을 비롯하여, Daily Times, Dawn, The News, The Nation, The Express Tribune, Pakistan Observer, The Frontier Post, The Post, Nawa-i-Waqt, Daily Khabrain, Daily Pakistan, Al-Akhbar 등이 있다. 

주간지는 Akhbar-e-Jehan와 Family Magazine이, 월간지로는 Urdu Digest, Herald, Newsline 등이 있다. 

관광
파키스탄은 1970년 파키스탄관광개발공사(Pakistan Tourism Development Corporation)를 설립, 관광 진흥을 위해 노력중이나 관광시설이 빈약할 뿐 아니라 무슬림화 정책 등 폐쇄적인 사회기풍과 치안불안 등의 국내요인 및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카슈미르 사태 등 국제 요인으로 관광개발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지정된 파키스탄의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으로는 모헨조다로 고고유적(Archaeological Ruins at Moenjodaro: 1980년 등재), 타흐티바이 불교유적과 사리바롤 도시 유적(Buddhist Ruins at Takht-i-Bahi and Neighboring City Remains at Sahr-i-Bahlol: 1980년), 탁실라(Taxila: 1980년), 라호르 성과 샬리마르 정원(Fort and Shalimar Gardens in Lahore: 1981년), 타타의 역사기념물(Historical Monuments at Makli, Thatta: 1981년), 로타스 요새(Rohtas Fort: 1997년) 등이 있다.

파키스탄의 주요 난제들 
파키스탄은 두 가지의 사회적, 국제적 난제를 안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마약상습자의 증대로 심각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다. 마약상습자의 숫자는 1980년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나, 최근에는 100만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형이 험난한 북서변방지역의 계곡은 양귀비 재배지와 헤로인 제조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에서 소비되는 헤로인의 1/5이 이곳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미얀마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양귀비 재배지로 알려지고 있으며, 2,250km의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두 국경지대에서의 아편과 헤로인 생산 잠재력은 각각 연간 800톤과 80톤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영국의 식민통치 당시부터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그 지방의 부족지배자가 통치한 것도 마약증대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국제적으로는 카슈미르Kashmir 영토분쟁 문제가 있다. 카슈미르 지역은 파키스탄이 1947년 인도로부터 독립할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국경 편입 문제를 놓고 명확한 조정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생겨난 분쟁 지역이다. 파키스탄은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파키스탄에 편입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이와 반면에 인도 측은 카슈미르는 역사적으로 인도의 영토라는 주장을 들어 상호 팽팽한 주장을 펴왔다. 55년에 걸친 카슈미르 분쟁은 종교 갈등에서 출발하였으나 지금은 인도-파키스탄 사이의 영토분쟁, 인도-중국 간의 지역 패권 갈등, 테러와의 전쟁 등 여러 문제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이다. 최근 인-파 분쟁을 계기로, 국제사회는 21세기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비극의 땅 카슈미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등 강대국들이 방관의 자세를 버리고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한국과 파키스탄의 관계


기본관계 및 한반도정책
파키스탄은 한국과 1968년 한국 총영사관 설치와 무역협정을 체결하였고, 1980년 이전에는 비동맹 중립노선에 따라 한국과 북한에 대한 남북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였다가, 제2차 인-파 전쟁 이후 친서방에서 친중국 노선으로 전환함에 따라 1972년 11월 북한과 수교하는 등 친북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국익에 기여한다는 인식 아래 1983년 11월 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한국과의 정치 경제 관계도 크게 강화되었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경제개발 우선 정책, 전 베나지르 부토 총리의 외국인 투자 유치, 동방정책(Look East Policy) 추진을 배경으로 파키스탄 언론에서도 한국과의 관계 강화를 강조하는 논조가 증대하였다. 

남북한 문제에 있어서 파키스탄은 남북한 간의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기본으로,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원칙에 입각한 남북통일과 2000년 남북 정상 간에 합의된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1983년 수교 이래 파키스탄 대통령과 총리 등 정상급 인사가 총 7회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가장 최근에는 2012년 12월 자르다리Zardari 대통령이 방한한 바 있다. 2013년 3월 파키스탄 정부는 북한의 제3차 핵실험 후 북한의 행동을 우려하는 성명을 신속히 발표하고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 2094호가 채택된 후에는 국내 이행조치를 신속히 취하는 등 대북제재 조치에 적극 동참하였다. 

경제·통상 관계
1983년 수교 이후 한-파 간의 경제교류는 지속적인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수교 당시 연간 천만 달러 수준에 불과하던 양국 간 교역액은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크게 감소했다가 이후 점차 회복되어 2012년에 16.2억 달러로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파키스탄측의 대한 수출 감소로 교역액은 2013년도 13.4억 달러, 2014년 11.7억 달러로 다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대對파키스탄 주요 수출품목은 철강제품, 합성수지, 농·의약품, 석유제품, 폴리에스터 섬유류, 화학제품, 플라스틱제품, 의료용품 등이고, 주요 수입품목은 석유제품(나프타), 천연섬유사, 동제품, 면직물, 가죽, 기호식품, 어류, 곡실류, 기타 비금속광물, 암염 등이다. 

1990년대 들어 파키스탄은 한국을 경제발전 모델로 삼고 적극적인 경제 협력을 추진하였으며, 우리 정부도 이를 지원하고 기업들도 적극 진출하면서 양국 간 경제협력관계가 한층 강화되었다. 우리 기업들은 고속도로건설, 관개시설, 발전소 등 주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전자, 섬유, 화학, 자동차 부문에서 합작투자 회사를 설립하는 등 대파키스탄 진출에 적극적 자세를 보였다. 1997년 대우건설이 시공한 라호르-이슬라마바드간 M-2 고속도로는 우리 기업의 파키스탄 기간산업, 인프라 진출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1997 IMF 경제위기 이후 우리 기업의 경영여건 악화로 파키스탄 진출도 상당기간 정체를 보였다. 2000년대 들어 양국 경제의 상호보완성이 부각되면서 교역 및 건설을 중심으로 경제교류가 활성화되는 조짐을 보이다 2009년 세계경제 위기로 다시 경제교류가 축소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에너지, 인프라 건설 외에도 화학, 철강, 제과, 철도 등 다양한 분야로 우리 기업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는 등 경제협력 관계가 점차 확대되고 있으나, 파키스탄이 보유한 잠재력에 비해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 파키스탄은 1968년 8월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의 친중 정책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총리의 비동맹 외교노선으로 인해 1972년 11월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무역을 비롯한 실질 관계는 거의 없었다.

1982년 3월 무함마드 지아 울 하크Muhammad Zia ul-Haq정권이 출범한 이후, 파키스탄은 한국과의 경제 협력이 필요함에 따라 1983년 11월 한국과 수교를 맺었다.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 발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그동안 북한에 치우친 외교관계가 완화되었다. 1993년 10월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총리는 재집권 후 그 해 12월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한과 파키스탄 간의 협력관계가 강화되는 징후를 보였다. 그러나 1997년 2월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Muhammad Nawaz Sharif 총리의 재집권 및 동방정책의 추진으로 북한과는 군사 부문 외에 진전이 없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aiz Musharraf 대통령은 대對테러전에 적극 동참하면서 미국의 압력을 의식하여 북한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2002년 10월 북한 핵 문제가 대두되면서 미국의 대對북 핵 협력 중단 압력 등의 이유로 북한과의 관계에 거리를 두고 있다. 북한과 파키스탄은 과거와 달리 관계가 소원하지만 간헐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협력은 미미한 것으로 관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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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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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체코


체코Czech Republic는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중부유럽의 내륙국이다. 동유럽 민주화 역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프라하의 봄’과 평화로운 무혈시민혁명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벨벳혁명’으로 유명한 체코는 동유럽의 꽃으로 묘사될 만큼 유서 깊고 고풍스런 자취가 곳곳에 스며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유럽의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유럽인들의 마음의 고향 체코를 찾아가 본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체코공화국The Czech Republic은 유럽 중부에 위치한 국가로, 북쪽으로는 독일과 폴란드, 서쪽으로 독일,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동쪽으로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남동쪽으로 흑해, 북쪽으로는 북해와 발트해를 나누는 유럽의 경계선에 있으며 영토의 대부분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체코는 크게 프라하Praha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의 체히Čechy 지방과 동남부의 모라바Morava 지방, 그리고 동북부의 슬레스코Slezsko 지방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체히는 보헤미아Bohemia(독일어: 뵈멘Böhmen), 모라바는 모라비아Moravia(독일어: 뫼렌Mähren), 슬레스코는 실레지아Silesia(독일어: 슐레지엔Schlesien)로 불리기도 한다. 북위 48°~51°, 동경 12°~19° 지역에 있는 내륙국 체코는 북부 유럽의 폴란드 평원에서 중부 유럽의 다뉴브 강 유역으로 통하는 관문인 ‘모라바’ 지역을 보유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지형적인 특성으로 볼 때 체코는 수도인 프라하Praha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수데티Sudety산맥, 서북쪽으로는 에르츠Erzgebirge(체코어로 크루슈네호리Krušné hory)산맥, 서남쪽으로는 보헤미아Bohemia산맥, 동쪽으로는 베스키트Beskid산맥 등과 같은 1,000~1,600m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악국가에 속한다. 또한 프라하를 중심으로 북쪽의 체히 지방은 다시 해발 200~400m 높이의 분지와 해발 700~900m에 이르는 고원지대로 나뉘는데, 분지에는 엘베Elbe 강이 북쪽으로 흐르고 블타바Vltava 강, 사자바Sázava 강, 베로운카Berounka 강, 오흐르제Ohře 강 등의 지류가 엘베 강으로 흘러든다. 모라바 지방의 북동부와 서부는 산지 및 구릉지대가 대부분이나, 남부에는 도나우Donau 강의 지류인 모라바Morava 강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좁고 긴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체코는 해안선이 전혀 없는 내륙국가이지만, 북부 유럽의 폴란드 평원에서 중부유럽의 다뉴브Danube(도나우Donau) 강 유역으로 통하는 관문이 모라바 지방에 놓여 있다. 전국토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38.82%, 순수 농경지는 3%, 산악 지역(기타 포함) 58.18%로 산림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기후는 국토의 대부분이 해양성 기후에 속해 연평균기온 약 7~10℃로 온화한 편이다. 프라하의 경우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이 -1.9℃이고, 가장 더운 7월의 평균기온은 17.5℃를 오르내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500~700mm 정도이나, 여름철에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 봄과 가을은 한국 날씨와 비슷하며, 여름은 한국보다 습도와 온도가 낮고 겨울은 흐린 날씨가 계속되면서 눈과 비가 자주 내린다. 강수량이 많은 여름철에 홍수가 자주 발생한다. 2007년 1월 시속 140㎞ 이상의 태풍으로 철도가 끊기고 국경이 마비된 일이 있었으나, 대체로 자연재해로 인한 인명 피해가 많지 않은 나라이다. 

체코의 역사

민족의 기원과 고대국가의 형성
체코의 고대 역사는 크게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개되었다. 사모 왕국(623~658), 모라비아 왕국(830~907)과 마자르 족의 침입 이후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옛날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 최초로 거주한 민족은 켈트Celt인이며, CE(기원후) 1세기경부터 게르만German인과 로마Roma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여 켈트인을 축출하고 그곳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분쟁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이 지역에 체코의 주요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슬라브Slav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CE 6세기경부터이며, 고대 체코인은 현재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고대 슬로바키아인은 현재의 슬로바키아에 정착하였다.

6세기경 아바르Avars 족이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의 슬라브 부족들을 침략하자 이에 대항하여 사모(프랑크 왕국의 상인으로 추정)가 몇몇 부족을 통합하여 623년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이 지역 최초의 슬라브족 국가인 사모Samo 왕국을 건설하였다. 사모 왕국은 658년 사모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었다.

9세기 초 모이미르 1세MojmirⅠ가 모라비아Moravia 왕국을 건립하였으며, 이 왕국은 계속하여 세력을 확장하여 보헤미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남부, 헝가리 서부까지 통치하였다. 모라비아 왕국의 역사적 의의는 고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였다는 것에 있다. 이 시기에 모라비아 왕국의 요청으로 비잔틴 제국의 선교사 키릴Cyril과 그의 형 메토디우스Methodius가 863년부터 기독교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최초의 문자인 글라골Glagol 문자(후에 키릴Cyril 문자)를 창제하였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들이 키릴Cyril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게르만 선교사들에 의해 최초로 전파되었다. 

907년 헝가리의 마자르Magyars 족이 모라비아 왕국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슬로바키아 지역은 체코와 분리된 채 1,000년 동안 헝가리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서 동방 슬라브 문화가 라틴어와 라틴 기독교 및 문화로 대체되었고, 체코인들은 보헤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체코 왕국(10세기~1526년)
907년 대大모라비아 왕국 멸망 후 10세기경 프르셰미슬Premysl족이 체코 부족을 통합하여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체코 왕국을 건설하고, 1029년 모라비아 지역을 완전 병합하였다. 14세기 초부터 프르셰미슬 왕조가 단절되고, 룩셈부르크Luxemburg 왕조가 지배하였는데, 이 시기는 체코 역사상 황금 시기로 손꼽힌다. 1355년 카를 4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후, 프라하Prague(Praha)는 제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왕관’으로 불렸다. 하지만 1415년 종교 개혁자이자 프라하 카렐대학교Univerzita Karlova v Praze 총장인 얀 후스Jan Hus가 부패한 교회제도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추진하다가 독일 콘스탄츠에서 화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419년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전쟁(후스전쟁)이 촉발되었다. 후스파는 교황이 파견한 십자군을 5회에 걸쳐 격파하였으며, 1436년 후스파의 승리로 전쟁이 종결되고 후스파와 교황청간에 화약(이흘라바Jihlava 협약)이 성립됨으로써 신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지배하의 체코(1526~1867)
1526년 모하치Mohacs 전투에서 체코와 헝가리의 야기에오Jagiello 왕가가 오스만제국에 패하고, 페르디난트 1세가 체코와 헝가리의 왕이 된 이후,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는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체코를 지배한 결정적 계기는 ‘30년 전쟁’을 통해서였다. 가톨릭을 지지하는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이에 저항하면서 발발한 것이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1620년 체코 저항군이 빌라호라Bila hora 전투에서 대패하여 많은 저항 세력들이 처형되거나 국외로 추방당함으로써 체코는 독립을 상실하였다. 1627년에는 토지에 관한 수정 법령에 따라 합스부르크가의 체코 지배가 확고해지고, 체코 왕국의 자치권은 거의 박탈되었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Westfalen 조약 체결로 30년 전쟁은 종결되고, 체코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로 합병되었다.

18세기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및 요셉 2세는 중앙집권 및 관료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체코 왕국을 합리적이며 효과적으로 통치하였다. 체코 왕국은 합스부르크가의 통치 아래 오스트리아제국의 1개 주로 편입되고 독일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으며 사회 경제 교육의 개혁으로 섬유와 유리 등의 제조업이 발달했다. 이러한 계몽전제군주의 통치(1740~1790)는 체코 왕국의 존재를 위협했으나, 반면 체코의 민족적 부활 의지를 키우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대의 정신을 체코인들은 흔히 민족부활 운동의 시기라 부른다.

체코의 민족 부흥운동은 J. Jungmann, F. Palacky와 같은 지식인과 인텔리겐챠에 의해 주도되었다. 1791년 찰스-페르디난트 대학에 체코어 및 체코 문화과가 설립되고, 1818년에는 체코 국립박물관이 설립되어 체코어 사전, 문법책, 신문, 잡지 등을 발간하는 등 민족 부흥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슬로바키아에서도 18세기 후반 안톤 베르놀라크Anton Bernolak 및 19세기 루도비트 슈투르Ludovit Stur 등이 슬로바키아 언어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그 영향으로 슬로바키아 언어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었으며 슬로바키아인의 민족적 주체 의식도 고양되었다.

1848년 2월에 발생한 파리혁명은 유럽 지역의 정세에 큰 여파를 미쳤고, 이에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국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 왕국에서는 독일인과 체코인을 포함하는 민족위원회가 구성되어 체코의 전통적 권리의 반환과 왕국 내의 다양한 슬라브 집단의 통일을 요구하였고, 헝가리 왕국의 통치 아래 있는 슬로바키아인도 루도비트 슈투르Ludovit Stur를 중심으로 민족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1867~1918)
19세기 유럽에서 싹튼 민족주의의 바람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계속 지탱하기를 원하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하여금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Dual Monarchy이다. 이 2중제국 체제하에서 오스트리아 황제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체코)의 왕을 겸임하였고, 체코는 오스트리아에 의해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 의해 각각 지배되었다. 1900년 체코의 토마스 마사리크Tomas Masaryk은 현실주의 정당(Realist Party)을 설립하여 의회정치와 보통선거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슬로바키아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당이 결성되어 민족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4년 12월 마사리크는 독립투쟁을 위해 런던으로 망명, 1916년에 파리에 본부를 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는 임시정부로 재조직되었고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프라하에서는 카렐 크라마르Karel Kramar를 대표로 하는 국민위원회가 공화국을 선포(프라하선언)하였고 슬로바키아 국민회의도 이에 동의하였다. 1918년 10월 31일 프라하 국민위원회의 카렐 크라마르Karel Kramar와 파리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의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가 제네바에서 회담을 갖고, 마사리크Masaryk를 대통령으로 크라마르Kramar를 수상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11월 14일에는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를 구성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1918~39) 시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며 해체되자 체코 지역과 슬로바키아 지역이 연합하여 1918년 11월 12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Československá republika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공화국은 1920년 2월 29일 헌법을 제정하여 국민의회(양원제)를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규정하고 국민의회에 대통령 선출권을 부여하였으며,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공화국 초기의 정책은 독일과의 접경 수데텐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냉담한 반응과 독일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의 해묵은 적대감으로 원활히 추진되지 못하였으나, 1930년대 대공황 전까지 성공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동구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번영을 누렸다. 1935년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여 국가안보를 견고히 하였고, 1935년 12월에는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가 초대 대통령 마사리크Masaryk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수데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수데텐 독일당’이 1935년 선거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의회의 제2당으로 부상하고 수데텐 지방의 자치 요구에서 나아가 독일로의 편입을 부르짖으면서 정치적 마찰이 계속 확대되는 상황을 맞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사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독일의 히틀러가 공공연히 수데텐 지역의 할양을 요구하며 위협하는 상황에서 조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이 문제는 1938년 9월 영국과 프랑스의 ‘대륙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상징하는 뮌헨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 영토의 38%가 독일에 병합되는 것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1939~45) 시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참여가 배제된 상태에서 뮌헨협상이 관철된 후 베네시 대통령은 1938년 10월 독일의 압력으로 사임하였고 11월에 에밀 하하Emil Hácha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하하 정부는 농민당의 루돌프 베란Rudolf Beran을 수상으로 하는 신내각(제2공화국)을 구성하면서 사회민주당을 탄압하고 공산당을 해체하는 동시에 중도파와 우파정권을 민족통일당으로 재조직하는 등 독일의 허수아비 역할만 수행하였다. 대통령직을 사임한 베네시는 런던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으려 하였으나, 1941년 7월에 와서야 영국과 소련 등 동맹국들의 인정을 획득하였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은 결국 나머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를 합병하였다. 보헤미아, 모라비아는 독일보호령으로 두고 슬로바키아에는 요제프 티소Jozef Tiso를 대통령으로 하는 괴뢰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1943년 베네시는 모스크바에서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공산당 지도자인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와 회담을 개최하였다. 그 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독일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펼쳐 지하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향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공산정권의 수립(1945~68)
1945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전선 연합으로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동년 5월 소련군이 프라하에 입성한 이후부터 체코슬로바키아는 서유럽과 대비되는 동유럽의 대표적인 공산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1938년 뮌헨조약과 관련하여 서구 동맹국들에 대해 배신감을 갖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공산당에 협조적 성향을 보여 공산당 세력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1945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망명지에서 귀국한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를 대통령으로 승인하였고, 1948년 2월에는 베네시 대통령과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 총리가 주도하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신내각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해 5월 공산당이 주도하는 의회에서 소련 헌법을 모방한 헌법의 제정이 이뤄지고 이 헌법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던 베네시 대통령이 사임하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공산당은 무혈공산혁명에 성공하였고, 후임 대통령에는 고트발트Gottwald가 취임하였다. 공산정권 수립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충실한 위성 국가로서 1949년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 및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WTO)의 창립국가로서 활약하였다. 1953년 고트발트 사후, 대통령에 안토닌 자포토츠키Antonin Zapotocky, 공산당 의장에 안토닌 노보트니Antonin Novotny가 취임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스탈린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체코의 개혁운동과 좌절(1968~89)
1956년 소련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은 같은 해 5월 자유를 요구한 프라하Praha와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의 학생시위를 강경 진압하는 등 스탈린주의를 고수하였다. 또한 공산정권은 1960년 7월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 시행하면서 국호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Československá socialistická republika으로 바꾸었다. 1960년대 초반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심각한 경제 침체에 시달렸으며, 1965년 공산당은 이를 타개하고자 약간의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한 신경제 모델을 승인하였고, 1965년 12월에는 정치적 개혁 요구에 대하여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에 약간의 제한을 가하고 국민의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1968년 1월 5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개혁에 미온적인 안토닌 노보트니Antonin Novotny를 실각시키고 알렉산드르 두브체크Alexander Dubcek를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했는데,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표방하여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운동에 당황한 소련은 1968년7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과 회의를 갖고 공산당 내 우익 세력 척결 등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장을 보냈으나, 두브체크는 이를 거부하고 소련과의 양자 회담을 요구하였다.

1968년 8월에 일어난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운동(프라하의 봄)은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조약 5개국의 무력 간섭으로 좌절되었다. 이들의 무력 사용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 개혁 운동이 자기 나라로까지 확산될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 10월 27일 국민의회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연방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연방의회로 개칭하였다.

1969년 4월 구스타프 후사크Gustav Husak는 두브체크의 뒤를 이어 공산당 제1서기에 선출되어 개혁 운동 이후 이탈된 사회 분위기를 ‘정상화’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숙청 작업을 실시하였다. 1975년에는 후사크 당 서기장이 대통령을 겸임하였고, 1977년 1월 1일에는 체코 내 인권 부재를 항의하는 소위 ‘77헌장’이 서독 일간지에 발표되어 전 세계에 알려짐으로써, 이 헌장에 서명한 지식인 및 과거 정치인들이 체포 감금되고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와 서방 국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87년 12월 후사크 공산당 서기장 겸 대통령은 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하고, 밀로시 야케시Milos Jakes가 당 서기장직에 취임하였다. 198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는 라디슬라프 아다메츠Ladislav Adamec를 총리로 임명하는 등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 침공 이후 최대의 공산당 및 정부의 대폭 개편을 단행하였으나, 새 지도부는 소련에서와 같은 급진적 정치 및 경제개혁에 반대하였다.

체코의 자유화시대
고르바초프Gorbachyov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 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1989년1월 프라하에서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자, 공산당 정부는 이를 강경 진압하였다. 체코 의회는 시위 및 불온 유인물 유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77헌장’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체제 활동을 저지하고자 노력하였다.

1989년 4월 인민의회 의원 보궐선거에서 공산당 정부는 1946년 이후 처음으로 복수 후보에 의한 경선을 실시하여 국민의 민주 개혁 욕구를 무마시키려 하였으나, 국민들의 본질적 개혁 요구에는 크게 미흡하여 국민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1989년 8월 이래 소련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재평가하고, 이 개혁 운동을 부정해온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층을 공격하는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1월 20일 20만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은 프라하의 바츨라프Vaclav 광장에 운집하여 11월 17일에 있었던 시위대에 대한 정부 당국의 발포 명령에 강력히 항의하고, 자유선거와 공산 지도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공산 통치의 종식과 자유화를 외친 이 시위는 하벨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으며,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으로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불린다. 1989년 11월 24일, 마침내 야케시 당 서기장이 사임했으며 12월 7일에는 아다메츠 총리가 사임했고 이어 12월 10일에는 후사크 대통령이 사임하였다. 12월 29일에는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프라하의 봄’의 주역이었던 두브체크가 12월 28일 연방의회 의장에 취임함으로써 자유 민주 정부가 탄생하였다. 1990년 4월 체코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CSSR, Czechoslovak Socialist Republic)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CSFR, Czech and Slovak Federal Republic)으로 변경하였다.

1990년 6월 44년 만의 자유총선에서 체코의 시민포럼Civic Forum과 슬로바키아의 폭력반대 시민단체VPN가 각각 제1당이 되었다. 1991년 6월에는 체코 주둔 소련군이 철수를 완료했다. 하지만 곧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 사이에 국명 분쟁을 비롯한 일련의 알력이 빚어졌으며,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양측은 연방을 해체하고 서로 갈라지기로 합의하였고 1993년 1월 1일부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이를 ‘벨벳 이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무혈의 벨벳 혁명처럼 아무런 군사적 마찰 없이 평화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1월 체코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체코공화국 의회는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을 체코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동년 3월에는 NATO에 가입하였다. 1997년 바츨라프 클라우스Vaclav Klaus 총리가 퇴임하고 1998년에는 요세프 토소프스키Josef Tosovsky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2002년에는 사회민주당 연정이 성립되었고, 2004년 5월에는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이 되었으며, 2006년에는 시민민주당ODS이 다수당으로 승리하였으나 정부 구성에는 실패하였다. 2007년 기독민주연합KDU과 녹색당SZ의 중도우파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2010년 5월 제6차 총선이 실시되어 시민민주당이 전통책임번영당Top 09 및 공공당VV과 연립정부를 수립하였고, 2013년 1월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밀로시 제만Milos Zeman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3년 6월 총리실장, 시민민주당 전의원이 연루된 부정부패 및 공권력 남용 사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네차스Necas 총리가 사임하고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2013년 8월 의회가 해산되고 10월에 조기총선이 실시되었으며, 2014년 1월 보후슬라프 소보트카Bohuslav Sobotka 총리 내각(사회민주당, 긍정의당, 기독민주연합 연정)이 출범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정치 및 행정


정치형태
체코의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를 가미한 의원내각제로 의회는 정부 불신임권을 가지며 대통령은 의회 해산권을 지닌다. 행정부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현실 정치에서는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로 임명된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장으로서의 권한이 아닌 국가원수로서의 형식적인 권한만을 갖는다. 

대통령 
체코 대통령의 지위는 국가원수로 국민의 직선제로 선출된다. 대통령에 선출되면 하원의장에게 취임 선서를 하며 임기는 5년이고 1회에 한하여 연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권한으로는 총리 및 각료 임면권, 의회 해산권, 대법원 헌법재판소 일반법원 판사 임명권, 법률안 거부권 등을 들 수 있다. 2015년 현재 체코의 대통령은 2013년 1월 최초의 직선제로 당선된 밀로시 제만Milos Zeman이다. 

행정부
행정부인 내각은 총리 이하 16개 부처에 부총리 2명을 두고 있다. 각료는 총리를 포함하여 총 17명으로 구성된다. 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의회의 승인을 거치며, 각료는 총리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의 승인을 거친다. 총리는 정부의 활동을 관리하고 헌법 및 법률에 의해 부여된 행정권을 집행하는데, 2015년 현재 내각 총리는 보후슬라프 소보트카Bohuslav Sobotka이다. 행정부는 행정권의 최고기관이며 동일체로 의사를 결정하고 하원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의회는 대통령이 임명한 새 정부에 대해 30일 이내에 신임투표를 해야 하며, 2차에 걸친 신임 획득에 실패했을 때 대통령은 하원의장이 추천하는 인사를 총리로 재임명해야 한다. 총리는 대통령에게, 각료는 총리를 경유하여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대통령은 총리가 해임을 요청한 각료를 해임해야 한다. 헌법상으로는 대통령이 실제로 국정운영에 참여할 여지가 매우 제한되어 있으나(국무회의 참석권, 정부와의 업무협의 및 보고서 제출 요구권 정도), 현 밀로쉬 제만Milos Zeman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체코의 지방자치 행정구역은 13개의 주kraj와 1개의 특별시hlavni mesto(프라하)로 이루어져 있다.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임기 4년의 하원 200석과 임기 6년(매 2년마다 1/3씩 개선)의 상원 81석으로 구성된다. 1996년 11월 선거를 실시하여 첫 상원을 구성하였다. 상원은 하원을 통과한 법률안의 심의 등 극히 제한된 기능만 수행한다. 1992년 헌법을 기초할 당시에 일반 여론은 상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었으나, 해체되는 연방의회의 의원들에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준다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서 상원 구성을 명시하게 되었다.

사법부와 감사원
체코의 사법부 체계는 법원과 헌법재판소로 구성된다. 법원은 최고법원, 고등법원, 지역법원, 지방법원이 있으며, 헌법재판소는 임기 10년의 판사 15명으로 구성되는데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동의를 받는다. 감사원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속하지 않는 ‘제4부’에 해당하는 독립 헌법 기관이다. 공산 정권 시절에는 행정부의 1개 부처로 존재하였으나, 1993년 1월 새 헌법에 따라 완전 독립성을 갖춘 기관으로 출범하였다. 감사원장 및 부원장은 국회의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기는 9년이다. 체코의 감사원은 회계 감사만 수행하며 타 국가기관의 고유 업무 집행에 대해서는 감사권을 행사할 수 없다.

3. 경제


체코의 경제 개황
체코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공업 기반의 60% 이상을 전해 받아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세계 10대 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전쟁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체코 경제는 공업을 중심으로 고품질의 기계류와 소비재를 수출하며 호황을 누렸다.

1948년 들어 체코 공산당KSC이 정권을 장악하자 소련식 계획경제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는 개혁을 시도하여 1952년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국유화하였다. 1950년대 초부터는 금속 위주의 중공업을 정책적으로 육성하여 주변 공산 국가들에게 기계류와 무기를 공급하는 중요한 국가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전체 무역 중 공산권 내 무역이 1948년에는 48%에서 1973년에는 79%로 크게 늘어났다.

체코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무리한 계획으로 1960년대 초 공황을 맞았으나, 이후 1968년까지 약 3년간 개혁을 단행하여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그 결과 중공업과 광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와 이에 따른 불균형 성장으로 소비재가 부족해지고 실업률이 증가함으로써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원의 비효율적인 이용, 투자의 비효율성 등의 내적 요인이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동서 관계 악화 등의 외적 요인과 겹치면서 성장이 정체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경제개혁 정책을 제한적이나마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는데, 1987년 1월 기존의 대외무역기구FTO(Foreign Trade Organization) 제도를 수정하여 외국과의 직접 교역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였고, 1988년 7월 경제생산협회(Economic Production Association)를 국영기업으로 대체하여 국가 경제의 기본 단위를 이루게 하였다. 이러한 부분적인 경제개혁에도 불구하고 중앙 통제 방식의 경제정책은 경기 침체, 특히 소비재 부족을 초래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졌다.

1990년 6월 총선을 통해 집권한 민주정부는 법제 정비, 계획 수립 등 준비 과정을 거쳐 1991년부터 본격적인 경제구조 조정 등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폴란드 헝가리 등과 비교할 때 관련 법규 및 제도 정비가 미흡하고 개혁 진전 속도가 상대적으로 완만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체코는 동유럽 국가 중 가장 산업화되고 안정된 국가였으며, 외채가 적고, 축적된 기술과 우수한 사회 간접자본을 기반으로 하여 바츨라프 클라우스Vaclav Klaus 총리 주도로 적극적인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89년 시장 개방 이후 1990년~1993년 사이 체코 경제는 갑작스런 체제 변화에 따른 충격으로 -23%의 경제성장을 기록해 국민들이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1994년 상반기부터는 개혁 성과가 가시화되기 시작하여 1996년까지 3~6%의 고도 성장을 기록하였다. 1997년 이후 아시아 금융 위기에 따른 세계적인 경제 불황의 영향으로 경제성장률이 다시 저조해져 1998년에는 -2.3%의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1998년 6월 출범한 밀로시 제만Milos Zeman 행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및 해외 자본 유치, 유럽연합EU 가입 준비를 위한 각종 제도, 법령 정비 등 적극적인 경제개혁 정책, 그리고 세계경제의 호전에 힘입어 1999년 상반기부터 회복세로 돌아섰으며 2000년도에는 2.5%의 성장률을 보였다.

2001년 2월 체코 정부는 유럽연합 가입 준비를 가속화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2650억 코루나 규모의 경제 활성화 2개년 계획을 발표하여 2001년에 4%, 2002년 5%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달성하였다. 2004년 5월 유럽연합 가입을 계기로 외국인 투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체코 성장률은 2005년 이후 수년간 6%대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2008년 말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 위기로 인하여 2008년 경제성장률은 3% 수준으로 떨어졌고, 2011년 하반기 이후로는 유로존 경제위기 등의 영향으로 경기침체 국면으로 진입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2013년 2/4분기부터 회복세로 전환하여 2014년에는 2.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2015년에는 2.7%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주요산업 및 교역
체코의 산업은 전통적으로 지리적 입지조건과 잘 정비된 경제 하부구조 및 공산정권 이후 추진된 정책적 지원 등에 힘입어 공업 부문의 비중이 특히 높았다. 하지만 경제개혁이 본격화된 1991년을 기점으로 공업 부문의 비중이 감소하고 상업 및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증가하는 변화 추세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주요 산업들로는 식료품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 관광업 등을 들 수 있다. 식료품공업 중에서 맥주 공업은 체코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UN 통계에 따르면 체코는 국민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이 세계 1위를 기록할 만큼 맥주를 애용하고 즐기는 나라로서, 투명한 황금색의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맥주를 만드는 플젠스키 프라즈로이Plzensky Prazdroj 맥주 회사가 체코에 있다. 한편으로 체코는 AVAST, AVG와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신 보안업체들을 보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Avast는 외국 백신프로그램 중 가장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 

2014년 체코의 대외 수출은 약 1,744억 2,9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7.5% 증가했으며 수입 또한 1,530억 1,4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6.0% 증가해 체코 경제가 전반적으로 정상궤도에 들어섰음을 시사하고 있다. 2014년 기준으로 체코의 주요 수출품목은 승용차, 자동차 부품, 자동자료처리기계, 무선통신기기 등이며, 수입품목으로는 자동차 부품, 원유 및 가스, 자동자료처리기계, 의약품, 컴퓨터 주변기기 등이다. 특히 레고(Lego) 제품을 중심으로 한 완구류는 체코의 대對한국 수출 1위 품목으로, 2011년 4,800만 달러에서 2014년 1억 1,500만 달러를 기록해 4년 사이 2배 이상 수출량이 증가하였다. 체코의 주요 교역대상국으로는 독일, 중국,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이 있다. 

경제정책과 법령정비
체코 경제정책의 기조는 경제의 서구화 및 EU 가입을 통한 선진화 추진, 외국자본 및 기업의 유치를 통한 체질강화 및 시장경제 체제 공고화, 시장경제원리 및 자유무역주의에 기초한 수출 증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따른 주요 시책들로는 수출진흥 정책과 교역확대로 인한 개방 가속화, 교역대상국 확대, 금융기관과 산업부문의 민영화, 다양한 외국인 투자유인 정책의 집행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체코 경제의 개선을 위해서는 높은 실업률과 낮은 경제성장률 문제의 해결 또한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체코는 효율적인 경제 정책의 집행을 위해 경제 관련 분야의 법령들을 정비해 시행하고 있다. 2006년 기존의 기업파산법(Bankruptcy Act)을 ‘지급불능법(Insolvency Act)’으로 전면 개정하였으며, ‘경매법(Act on Public Auction)’도 개정하여 파산절차와 관계없이 은행이 기업의 담보재산을 처리할 권한을 부여하고 자발적 경매 절차를 간소화였다. 또한 근로관계 부문 개선과 복수노조 허용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과 함께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정부 지원과 대상 분야 확대 등을 명시한 ‘외국인투자인센티브법’도 개정한 바 있다.


4. 사회와 문화


민족의 구성
체코의 인구는 2014년 기준으로 1,062만 명이다. 민족 구성은 체코인이 95.9%, 우크라이나인 1.1%, 슬로바키아인 0.8%, 베트남인 0.6%, 러시아이 0.3%, 독일인 0.2%, 폴란드인 0.2% 등이다. 체코에서 모라비아인은 특히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모라비아인으로 생각하며 별개 집단으로 인식한다. 이들은 남南모라비아 지방에 주로 거주하는데 1989년 이후로는 모라비아인으로 생각하는 인구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언어
체코의 공용어는 서西슬라브어에 속하는 체코어(체크어)로, 인구의 대부분이 체코어를 사용한다. 이 외에 슬로바키아어, 폴란드어, 독일어, 헝가리어, 우크라이나어, 루테니아어 등도 사용된다. 비즈니스 언어로는 영어와 독일어가 주로 사용된다.

종교
체코는 공산당 정권 시절 종교가 사회주의 이념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교회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왔다. 그러나 체코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깊은 연관을 지녀온 전통으로 인해 상당한 신도 수가 존재해왔으며, 민주화 혁명 이후 1990년 1월 과거 종교 탄압용으로 제정된 종교법을 폐지하고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허용하였다.
체코는 독립 이래 교황청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오지 못했는데 이는 얀 후스Jan Hus의 종교개혁 등 역사적 전통에 기인하며, 1925년 및 1933년에는 체코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교황청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교황청 대사가 철수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90년 4월 교황의 체코 방문을 계기로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재개하였는데, 이는 국민의 다수가 로마가톨릭임을 감안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가 개혁 정책에 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 국가에 비해서는 국민들의 종교적 성향이 약한 편이며, 전체 국민의 약 40% 내외만이 특정 종교를 갖고 있다. 종교 구성은 로마가톨릭이 39.2%이고, 프로테스탄트가 4.1%, 후스파 개신교 신자가 2% 내외이다.

문화예술
체코의 문화는 독특하고 그 역사가 매우 길다. 1348년에 설립된 프라하대학교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당시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요하네스 후스에 의해 다수의 문학 작품이 체크어語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또한 건축가인 페트르 파를레르시는 프라하의 명물인 성 비투스 대성당St. Vitus Cathedral과 카를교Charles Bridge(Karlv Most)를 설계하였다. 

17세기 초반 체코 지역이 30년 전쟁으로 분열된 이후 약 150년 동안 체크어로 된 성경의 구독이 금지되어 다수의 신교도들이 자신의 의사와 달리 체코를 떠나야 하였다. 이때 교육개혁자인 아모스 코메니우스Jan Amos Comenius도 강제로 모라비아로 추방되었다. 당시 그는 일련의 교과서들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이 거의 2세기 동안이나 유럽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그가 쓴 《The Visible world in pictures》라는 교과서는 그림이 삽입된 최초의 교과서이다.

19세기 초의 국가 부흥기에는 체크어가 문화의 매개물로 재등장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체코 낭만주의는 이라세크의 역사소설로 대표된다. 그는 체코의 역사에서 작품의 소재를 주로 찾았는데 최고걸작으로 꼽히는 《어둠Temno》은 국가 소멸기의 체코를 다루고 있다. 한편, 극작가인 카렐 차페크는 인간성을 노예화시켜 버린 기계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1920년의 연극에서 ‘로봇robot’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국제적인 언어로 통용시켰다. 

20세기에 들어 와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체코의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val(1914∼1997)과 국내에도 잘 알려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1929~), 전前 대통령이자 극작가인 바츨라프 하벨 외에 요세프 호라, 프란티셰크 할라스, 비테슬라프 네즈발,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 등이 체코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체코의 음악성은 민속음악에 근원을 둔다. 보헤미아의 걸출한 바로크시대 작곡가인 젤렌카Jan Zelenka는 빈, 베네치아, 드레스덴 등지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동시대인인 바흐에 의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최근에 와서야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체코 최고의 작곡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 Smetana와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in Dvorjak의 작품에는 체코인 특유의 향수와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은 보헤미아의 민족음악을 진정한 예술 음악으로 발전시켰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낭만주의 음악가이지만 음악의 목적을 조국과 모국어에 두었다. 그는 대표적 작품인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을 통해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기상을 표현하였고, 대표적 오페라인 《팔려간 신부The Bartered Bride》는 체크어로 작곡된 국민 오페라로서 체코 국민 음악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 또한 《슬라브 무곡》에서 보여지듯 작품 전반에 걸쳐 체코 민속음악의 요소를 도입하여 체코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레오슈 야나체크Leo Janacek는 드보르자크의 민속음악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누면서 체크어의 억양(활용)을 가진 민요의 멜로디와 음계를 조합한 체코 고유의 음악 양식을 창작하였다. 그의 《크리스마스 미사》는 크리스마스 때 체코의 교회에서 자주 불리고 있다. 

체코 국민은 축구와 스키를 국민스포츠로 가장 많이 사랑하고, 아이스하키와 테니스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축구는 유명 스포츠클럽으로 프라하에 스파르타와 보헤미안스Bohemians 등이 유명하며 월드컵축구대회 등 국제무대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1996년 유럽 선수권대회에서 독일에 아깝게 2―1로 패해 준우승에 머문 강호이며 유로2000(유럽 선수권대회) 본선에 진출한 적이 있다. 월드컵 본선에 8차례 출전해서 두 차례나 준우승(1934년, 1962년)을 했고 8강에도 두 차례(1938년, 1990년) 올랐다. 체코에는 산이 많고 겨울이 길어 스키에 적합하다. 또한 1998년 일본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 체코가 1위를 차지하여 체코의 아이스하키 실력은 세계 정상급이다. 겨울에는 크로스컨트리스키도 널리 행해진다. 아이스하키클럽 중에는 프라하에 있는 스파르타Sparta와 한국의 상무격인 두클라Dukla클럽, 그리고 실업팀인 폴디Poldi 등이 있다.

5. 한국과 체코의 관계


외교 및 협력 관계
체코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한국과 체코는 1990년 3월 외교관계를 수립, 같은 해 6월 13일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을 개설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연방 해체에 따라 1993년 1월 1일 체코 정부와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양국간의 교류를 확대해오고 있다. 체코에서는 1992년 하벨Havel 연방 대통령, 1994년 클라우스Klaus 총리, 2001년 제만Zeman 총리, 2009년 클라우스Klaus 대통령에 이어 2015년 2월 소보트카Sobotka 총리가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우리나라는 1990년 3월 최호중 외무장관이 수교의정서에 서명하기 위해 체코를 방문한 이래 1992년 박준규 국회의장, 1995년 김영삼 대통령, 2002년 이만섭 국회의장, 2003년 고건 국무총리, 2009년 한승수 총리 등이 체코를 방문한 바 있다. 

양국 간에는 체코-한국 의원친선협회(하원)와 체코-한국협회(The Czech-Korea Society)라는 친한단체와 함께 찰스대 한국어과(Seminar of Korean Studies,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체코 태권도협회, 체코 한류팬클럽(Czech Hallyu Wave), 체코-한국 문화포럼(Czech-Korea Cultural Forum) 등의 유관 단체들이 양국 문화 교류에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취업관광, 경제협력, 사회보장,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과학 및 기술협력, 문화협력, 사증면제, 조세, 투자 등에 관련된 다양한 조약 및 협정들이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 

체코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후 40년간 한국휴전중립국감시위원단 위원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9년 2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에 13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또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남북대화, 북핵 6자회담 등 한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지지하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긍정적인 역할 수행을 희망하고 있다. 아울러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서 EU의 대북 정책과 상충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체코는 ASEM, OECD, UN 등 국제무대에서도 각종 사안별로 우리의 입장에 대해 지지와 협력 입장을 밝히고 있고, 국제기구 진출 시 상호 지지하기로 하는 등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 통상관계
한국과 체코 양국 간의 교역은 2007년 현대자동차의 체코 생산 투자에 힘입어 본격화됐으며, 2011년에 최초로 20억 달러를 돌파 후 2014년에는 역대 최고인 23억 7,000만 달러(전년 대비 5.8% 증가)를 기록하였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의 대對체코 수출은 18억 1,000만 달러, 대對체코 수입은 5억 6천만 달러이다. 대對체코 주요 수출 품목은 체코의 수출산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동차 부품 및 원동기, 합성수지 등으로 체코의 수출 증가는 한국산 부품에 대한 수요 증가로 연계될 수 있다. 대對체코 주요 수입품목 중에는 전자현미경(전자응용기기)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자동차 부품, 자동차, 합성수지, 기계류 순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체코 사이에 본격적인 비즈니스 확대의 시발점은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관련 협력사 및 유관업체들이 현지에 진출하기 시작한 지난 2006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체코가 지난 2004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이후 자동차 및 전자 등 다방면의 많은 글로벌 기업이 체코에 진출하였는 바, 체코는 이미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기지로서 위상을 확보함은 물론 체코 산업 또한 이들 기업의 글로벌 생산 공급 가치사슬에 편입돼 튼튼한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2015년 2월 한국은 체코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협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체코 정부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프랑스에 이어 3번째로 성사시킨 중요 정책사안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향후 국방, 과학기술, IT, 인프라 및 에너지 분야 등에서 양국 간에 전반적인 협력이 예상되므로 이들 분야로의 적극적인 진출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그밖에 한국-체코 양국은 문화 학술 분야의 교류도 활발한 편이다. 2013년 체코-한국 문화포럼(The Czech-Korea Cultural Forum)을 창설하였고, 상호 정부장학생 초청 등 한-체코 문화교류협정의 이행안이 집행되고 있다. 또한 ‘체코내 한국어 능력시험(TOPIK)’ 매년 실시, 양국간 학술 교류 증진 지원 사업 실시,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동문회 활성화 지원, 체코 내 한류 확산 활동 지원, 한-체코 방송사간 협력(KBS와 CT, MBC와 TV NOVA), 양국 영화 스튜디오 간 협력 등과 함께 국가 이미지 제고 및 한국 알리기를 위한 공공외교 강화도 문화 공연 행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요즈음 한류붐을 타고 한국 여행객들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물론 심지어 시골 구석구석까지 답사하며 체코를 동유럽의 꽃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프라하의 카를교Charles Bridge 위에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어보라는 글이 인터넷에 떠 있을 정도로 카를 다리는 무척 유명하다. 또한 프라하성Praha Castle에서 카프카를 읽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여행객의 고백 등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유서 깊고 운치가 있으며 서유럽의 색채가 짙은 체코의 독특한 문화는 우리의 고유한 한류문화와 매치가 되면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수데텐Sudeten 귀속 문제

20세기 초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혼합국가로서 산업화된 체코 지역(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과 농업 중심의 슬로바키아 지역으로 구분이 되었고, 민족 구성에 있어서는 다수인 체코인 외에도 독일인(게르만족)이 당시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소수민족을 구성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북서부 수데텐Sudeten 지방, 이른바 수데텐란트Sudetenland에는 중세 이후 많은 독일인들이 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 수데텐 지역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발달된 공업지대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을 중시하여 여러 주요한 요새들을 구축하기도 했다. 수데텐 지역의 독일인들은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과 민족이 달라 갈등 관계에 있기는 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일원으로서 그런대로 큰 충돌 없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웃 독일에서 1933년 히틀러 나치Nazi 정권이 등장을 한 이후 상황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1935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선거에서 히틀러의 지원을 받는 수데텐 독일당Sudeten Deutsche Partei이 제2당으로 부상하였다. 이 당의 지도자 헨라인Konrad Henlein은 제1차 세계대전 말 수데텐 지방이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된 데 반발해 수데텐의 독일귀속운동을 전개하였고, 나치스 독일이 성립되자 1933년 10월 수데텐 독일인 조국전선Sudeten-Deutsche Heimatfront을 결성하였다. 그후 나치스의 원조를 얻어 1935년 ‘수데텐 독일당’으로 개조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독일인의 자치를 요구하며 그해 선거에서 대승하게 된 것이다.

수데텐 독일당은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합치는 데 기본 목표를 두고 적대적인 돌발사고와 선동적인 사건들을 일으켰으며, 1938년 히틀러의 수데텐 지방 할양요구에 호응하여 내부에서 수데텐 지방의 독일로의 병합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요청하여 크게 문제화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극단적인 국면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분주히 노력을 기울였으나 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이 참가한 1938년 9월의 뮌헨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에게 10월 10일까지 수데텐란트 지역을 양도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이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수데텐의 핍박받는 독일인들을 독일 정부가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까지 불사할 움직임을 보이는 히틀러를 상대로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대륙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 따라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 영토의 38%가 독일에 의해 병합되는 수모를 당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서부 산지를 잃어 국방상 불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50%의 석탄 산지를 잃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프라하의 봄과 벨벳혁명

체코 역사에 있어 자유화 민주화 개혁의 상징처럼 불리는 두 가지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1968년에 있었던 ‘프라하의 봄’과 1989년에 일어난 ‘벨벳 혁명’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체코어: Pražské jaro)
‘프라하의 봄’은 특정일의 사건이 아니라 자유 민주의 개혁을 위해 두브체크Dubcek라는 국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결국은 외세에 의해 좌절된 일련의 과정을 뜻하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 아래 있었던 1968년 1월, 슬로바키아의 개혁파 알렉산드르 두브체크Alexander Dubcek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됐다.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정치계획을 발표했는데, 그 바탕에는 ‘공산주의는 착취계급의 지배에서 노동 인민을 해방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민주주의 체제보다도 개인의 풍족한 삶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있었다. 그 개혁정책들에는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다당제 체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언론 보도 이동의 자유를 증진하며 소비재 생산을 강조하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비밀경찰의 권력을 제한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을 두 개의 동등한 나라(체코와 슬로바키아)로 연방화하도록 규정했고, 외교 정책면에서는 서방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함과 더불어 소련 및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협력하는 내용도 있었다.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에 대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프라하의 봄’이라 부르면서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체코사태가 냉전체제하의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소련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고 비난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1968년 8월 20일 밤, 바르샤바 조약 4개국(소련,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의 동구권 군대가 20만명의 병력과 2천대의 탱크로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했고, 8월 21일 아침 체코슬로바키아는 점령을 당했다. 바르샤바 조약군의 공격 당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72명이 사망하고 266명이 중상, 436명이 경상을 입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대중은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에 맞서 비폭력 저항으로 들고 일어났다. 1969년 1월 19일에는 얀 팔라흐Jan Palach라는 대학생이 프라하의 바츨라프스케 광장에서 언론 자유를 다시 억압하는데 반발하며 분신 자살하기도 했다. 침공 직후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난 사람은 7만여명, 최종 탈주자 수는 30만명에 이르렀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두브체크를 서기장에서 강제 해임하고 공산당에서 제명한 후 산림 공무원으로 좌천시켰다. 두브체크 외의 다른 개혁파 지도자들도 체포되었고 이들을 추종한 약 50만명의 당원들은 제명 또는 숙청되었다. 후임 서기장으로 임명된 구스타프 후사크Gustav Husak는 두브체크의 모든 개혁을 무효로 돌렸다. 개혁 정책 가운데 유일하게 그대로 남은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연방화로, 1969년에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1989년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체코어: sametová revoluce)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고 소련 고르바초프Gorbachyov의 개혁Perestroika 개방Glasnost 노선이 공표(1985년)되면서 체코를 포함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는 자유화 민주화의 거대한 물결이 밀려들었다. 이미 ‘프라하의 봄’ 사태를 겪은 바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개혁요구 시위가 줄을 잇는 가운데 1989년 11월 중순 학생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공산당 정부는 프라하의 나로드니 트리다Narodni Trida 광장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고 있던 학생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적인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 시민 봉기를 조직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민포럼Civic Forum인데, 이는 반체제 작가요 활동가로 명성이 높았던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것이었다. 시민포럼의 세력은 급속히 팽창했고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공산당 정권은 소련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40년간 지속되던 공산 독재체제가 드디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연방 의회는 시민포럼의 지도자인 하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그는 40년 만에 비공산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시민혁명이 성공한 후 하벨은 한 연설에서 “우리는 평화적으로 혁명을 이뤄냈다. 이는 벨벳혁명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벨벳혁명’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벨벳velvet은 부드러운 고급 비단으로 우단, 비로드로도 불리지만, 형용사로는 ‘조용한’, ‘부드러운’, ‘평화로운’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벨벳혁명’은 평화적으로 이룩한 혁명을 의미하며, 직접적으로 체코 시민혁명을 지칭하면서도 지금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이룩한 모든 혁명’을 비유하는 보통명사로도 쓰이고 있다. 체코에서는 이 사건을 계속 ‘벨벳혁명’으로 부르지만, 슬로바키아에서는 이를 ‘신사혁명’(체코어: nežná revolúcia)이란 말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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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뒤로한 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

이 영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오스트리아는 그 영토에 있어 과거와 현재가 극명하게 다른 국가이다. 무려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과거 이들 대부분의 나라들과 역사를 공유하는 대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까지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시대,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 나찌 독일과의 병합으로 이어온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유럽 내 수많은 전쟁과 세계를 흔드는 대전쟁의 1차 요인이라 할 만큼 유럽 역사의 큰 변곡점이 되어왔다. 현재 중립소국으로 칭해지는 위상은 과거 역사 속의 영광과 견주어볼 때 초라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뒤로 하고 새로운 도약을 일구어낸 오스트리아는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UN 등 중요한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수도 비인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이 되는 등 소위 국가 행복지수가 매우 높은 나라라 할 수 있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유럽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오스트리아Austria는 영세중립국으로서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8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83,878.99km²이다. 오스트리아라는 국명은 ‘동쪽 제국(eastern empire)’이라는 뜻으로 독일어로는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라고 표기하는데, 이는 ‘Old German Ostarrichi’에서 유래했다. 오스트리아는 산악지역이 알프스산맥을 중심으로 서부부터 남부로 뻗어 있으며 전체영토의 6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영토면적 중 국토의 32%만이 해발 500m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3,797m의 그로스글로크너Großglockner산이고, 거의 1000개의 3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산악 지형은 관광산업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스키 등 겨울 스포츠의 장소로 제공될 뿐 아니라, 여름엔 등반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동부는 주로 도나우강을 따라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강으로는 약 350㎞ 길이의 도나우Donau강을 들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서북부 지역은 대서양 기후의 영향을 받아 온난한 편이며 대체로 습기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동부지역은 대륙성기후를 띠고 있어 비가 적으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기후를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평야지대와 산악지대의 기후는 크게 다르다. 6~8월 여름은 평균 기온 23.2℃로 대체로 서늘하고 건조하다. 겨울은 12월경에 시작되어 3월 말까지이며 고도가 높은 지역은 5월까지 겨울이 계속된다. 평균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지 않지만 많은 눈을 동반하는 추위를 보이기도 하며 산간지대에는 특히 많은 눈이 내린다. 강수량은 연중 고르게 분포하지만, 평균적으로 1~3월이 가장 건조하고 7~8월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린다. 

오스트리아의 역사

오스트리아 고대 문명의 기원은 BCE 800~400년경 인도유럽계 일리리아IIIyrian족들이 오스트리아 지역에 할슈타트Hallstatt라고 불리우는 문명을 최초로 건설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켈트Celt족이 이 문명을 계승하였고 기원 원년경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지역은 알프스 및 다뉴브 연안 지역의 전략적 요충성이 인정되어 경제, 문화면에 있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고 2세기경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5세기 게르만족의 남진 이후 오스트리아 지역은 훈Hun, 아바르Avar, 슬라브Slav 및 마자르Magyar족들에 의해 순차적으로 점령되었으며 500~700년경에는 게르만계 바바리아Bavaria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 말엽에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 카롤루스Charlemagne 대제의 제국으로 편입되었으며 880년 마자르Magyar족의 침략을 받았으나 955년 오토Otto대제가 이들을 격퇴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게르만인들이 항구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뿌리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프랑크 왕국의 카를Karl 대제가 동프랑크의 변방으로 오스트마르크Ostmark(동쪽Ost의 변경Mark이란 뜻)라는 관구를 설정하면서 시작된다 할 수 있다. 이후 프랑크왕국이 분리되면서 동프랑크왕국이 게르만왕국을 거쳐 신성로마제국으로 변천해가는 과정은 지금의 독일과 그 괘를 같이 한다. 현재 오스트리아의 영토범위와 건국의 시원을 형성하는 최초는 신성로마제국의 2대 황제 오토 2세에 의해 바벤베르크Babenberg가에 부여한 동프랑크 남서부지역의 여러 영방 통치권이라 할 수 있다. 바벤베르크Babenberg 왕조는 976~1246까지 270년간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면서 비인Wien(Vienna)을 수도로 확정하고 수많은 건축물을 남기면서 안정된 지배체제를 형성했다. 996년에는 현재의 국명과 유사한 오스타리히Ostarrichi라는 국호가 처음 사용되기도 하였다. 1246년 마지막 군주 프리드리히 2세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이후 30여년간 군주가 없는 공위기간Interregnum이 지속되고, 독일제국도 1254년 이후 황제 없는 기간이 이어지게 된다. 1273년 독일 선제후Kurfürst(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들이 슈타우펜Staufen 왕가와 가까운 스위스 합스부르크Habsburg가의 루돌프Rudolf 백작을 독일제국의 황제로 선출하게 되면서 이후 640년간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유럽역사의 가장 강력한 지배왕조인 합스부르크Habsburg 왕국이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왕국
합스부르크Habsburg라는 이름은 슈바벤Schwaben 지방(현재의 스위스)에 세워진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 가문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되는 최대의 왕가王家로 그 위세를 떨쳤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체제는 지금의 오스트리아 역사의 범주를 넘어서는 광대한 영토를 포괄하고 있었다. 독일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당시 이 명문의 귀족 가문은 엘자스, 라인강 상류, 그리고 스위스 등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지속적으로 정략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의 시실리와 나폴리,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 네덜란드와 스페인, 헝가리, 보헤미아 등 많은 영토와 세력을 얻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고, 16세기 초 카를 5세Karl Ⅴ 때부터 제국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프 2세Felipe Ⅱ가 스페인과 네덜란드 영토를,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Ⅰ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 등을 차지하면서 나라는 스페인-네덜란드 노선과 오스트리아-독일 노선으로 나뉜다. 18세기 초 남편 프란츠 1세Franz Ⅰ와 공동으로 통치한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제는, 실질적으로 국정을 담당하여 행정 제도와 교육·문화 면에서 개혁 정책을 펴고 군대 육성에 주력한다. 그녀는 자녀를 열여섯 명이나 두었는데, 그중 맏아들 요제프 2세Joseph Ⅱ는 어머니의 개혁 정책을 더 강력하게 펼쳐 계몽 군주라 불렸으며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프랑스 루이 16세Louis ⅩⅥ의 왕비가 되었다가 프랑스 혁명 때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13세기 후반부터 지배해온 합스부르크왕조는 종교개혁 이후 카를 5세Karl 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황제들이 적극적인 구교 수호 의지를 유지했고,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는 1619년 등극하자마자 자신의 통치권 내에 있는 모든 왕국의 이단을 근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 급기야 신교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열린 프라하 신교도대회(1618년)에서 황제가 임명한 프라하의 부총독을 시민들이 왕성의 창밖으로 내던져 살해한 사건을 기화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세력 사이에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이 시작된다. 이 종교전쟁은 실제로는 합스부르크Habsburg 왕조와 프랑스의 부르봉Bourbon 왕조 간의 주도권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중부유럽을 피폐화시켰다.

요제프 2세Joseph Ⅱ의 뒤를 이은 프란츠 2세Franz Ⅱ는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는 세력과 손을 잡고 개혁을 반대하며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어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1806년).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2세Franz Ⅱ(1792-1835)는 1804년 오스트리아가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프란츠 1세Franz Ⅰ로서 오스트리아의 첫 세습황제 자리에 오른다.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가의 정략 결혼 정책에 따라 자신의 딸을 나폴레옹Napoléon과 결혼시키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힘이 약해지자 영국, 프로이센 등 연합군과 함께 1814년 나폴레옹을 몰아낸다. 

대 나폴레옹 전쟁의 전승국들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Metternich 수상의 주도 하에 1815년 비인회의를 가지게 되는데, 이때부터 1848년 혁명 발발시까지 33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럽의 정치문화를 주도하는 국가가 된다. 비인회의의 정치적 기저는 프랑스혁명 이전으로의 복귀, 왕정의 복고, 자유주의 운동의 철저한 배격이었다.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은 진압되지만, 그 해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의 국민회의의 여파로 하나의 독일로 통일시킬 독일제국의 헌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왕권이 헌법으로 제한되는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여 18세의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Ⅰ가 왕위에 오른다(184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오스트리아는 비인 회의를 통해 프랑스에게 잃었던 땅을 되찾으며 국경을 재정리하지만, 1866년 프로이센Preußen(Prussia)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유럽 내 위상이 극도로 저하된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은 소 독일주의로 통일을 추구하던 프로이센과 대 독일주의를 지향하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간에 독일 연방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연방 내의 오스트리아의 지위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오스트리아 내부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 헝가리 왕국Magyar Királyság이 세워진다. 그리고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양쪽의 국왕을 겸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Österreich-Ungarn Monarchie이 성립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중제국은 현 지도상 오스트리아, 헝가리 뿐 아니라, 체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폴란드,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세르비아까지 부분적으로 포함하는 당시 러시아를 이어 유럽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에는 잇달아 비극이 일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비가 암살되고 황태자는 자살했으며, 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 부부가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독립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에 세르비아Serbia와 전쟁이 시작되고, 독일과 러시아 동맹군이 오스트리아 쪽에, 프랑스와 영국이 세르비아 쪽에 서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사상자만 1천만 명에 이른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패전(1918.10.9)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 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군주제가 폐지되고, 임시 국민 회의에 의해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1918.11.12)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연합국과 오스트리아의 단독 강화 조약인 생제르맹St. Germain 조약(1919.9.10)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헝가리와 체코, 슬로바키아가 독립하여 오스트리아는 제국 시대에 비해 영토는 8분의 1, 인구는 9분의 1로 줄어들었으며, 독일과의 연합이 금지되어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Erste Republik(1919.10.21)으로 불리게 되었다. 

패전과 병합, 그 이후
1차 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는 승전국에게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치러야 했다. 이 상황에 세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고 정치적으로도 혼란에 빠지면서 1920년대 말, 오스트리아에도 나치세력이 생겨났다. 여기에 1934년 나치스Nazis 당원이 총리를 암살하고, 1938년 오스트리아 나치스의 총수가 정부를 조직하여 독일 나치스에 군대를 요청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었다. 국제연맹의 허가 없이는 타국과 오스트리아의 합방을 금하는 생제르맹 조약의 당사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의 위협 속에 이를 묵인하였다.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은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마르크Ostmark라는 이름으로 독일의 지배하에 놓였고, 독일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때는 수도 비인이 연합군의 공격과 독일과 소련의 전투로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1945년 독일이 패망하자 독일을 도왔던 오스트리아는 또다시 패전국이 되었고 영토는 미국, 영국, 프랑스, 구 소련 등 4국 연합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며, 1945년 사민당 출신 렌너Karl Renner를 대통령으로 모든 정당이 연합하여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2공화국의 영토는 1938년 독일 합병 이전의 상태로 복귀되었으며, 헌법도 1920년 제1공화국 헌법으로 복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4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나, 소련의 동구권 위성국가화에 반대하고 미국의 마샬 계획을 포함한 서유럽 경제에 의존함으로써 친 서방 경향을 취하게 되었다. 오랜 협상 끝에 1955년 5월 15일 4대 연합국과 오스트리아간에 주권회복을 위한 국가 조약이 서명되고, 동년 7월 27일 동 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다시 독립 국가가 되었다. 4대 연합국은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연합하지 않고 영원히 중립국으로 남으며, 합스부르크가를 되찾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물러갔다. 1955년 10월 26일에 오스트리아 영구 중립을 규정한 제2공화국 헌법이 선포되었으며, 12월에는 국제연합UN에 가입하였다.

1966년 집권한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경제를 안정시키며 나치스 역사를 씻어내는 데 힘을 쏟았다. 이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과거 두 번이나 세계 전쟁에서 패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을 자랑하는 선진 복지국가로 탈바꿈하였으며, 1995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4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와 슬로베니아가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하고는 EU가입국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방위정책이 테러에 대한 방위와 유럽공동체 및 유엔의 범주 내에서 국제적 차원의 군대투입에 집중되었다. 

냉전시기 오스트리아는 서로 대치한 동서방진영의 연결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1955년의 국가계약에 따라 이 나라는 형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민주주의, 경제, 정치적 차원에서 오스트리아는 처음부터 소비에트연방과의 관계보다는 서방진영의 요소가 강조되어 있었다.

외교정책은 종종 지역의 안정과 동서관계의 협력적 재조정에 기여하였고, 비인은 오스트리아가 나토에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에도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국제회의 장소로 매력적이었다. 이러한 지위는 하지만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사라지게 된 셈이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고 비인은 1980년 뉴욕과 제네바에 이어 유엔사무국의 3번째 장소가 되었다. 발트하임K. Waldheim은 1972~1981년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였고, 오스트리아는 2009년과 2010년 유엔의 비상임안정보장이사회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무려 5만명의 오스트리아인이 유엔 깃발아래 군인, 군관계자, 민간경찰, 민간 전문가 등으로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비인에는 유엔사무국 건물 외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엔공업개발기구UNIDO,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 그리고 산유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본부 등이 설치되어 있다. 독일과의 합병과 양대 전쟁의 결과로 받아들였던 중립국 정책은 현재 고전적 의미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오스트리아는 1920년 수립되어 1945년 재수용한 연방헌법에 의거 입헌제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9개 자치주)이다. 1920년에 만든 연방 헌법을 기초로 국가의 권력과 책임이 입법, 사법, 행정 기관 3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자치주 역시 각각의 독립적인 행정부, 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의 권한이 다른 내각제 국가들의 경우보다 좀 더 강화된 내각 책임제로, 의회 민주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국민투표와 국민발의 및 대통령 직선제의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하고 있는 체제를 이루고 있다. 2014년 12월 현재 오스트리아의 국가원수는 하인츠 피셔Heinz Fischer 대통령(2004.7~)이고, 정부수반은 베르너 파이만Werner Faymann 총리(사민당, 2008.12~)이다.

행정부
오스트리아 연방 대통령Federal President은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는 6년(1회 연임 가능)이다. 군 통수권, 외교에 관한 권한, 공무원, 장교 및 법관임명권, 사면권 등 국가 원수로서의 공식 업무 외에도 연방 정부의 행정 대표인 총리와 각료 임명권 및 해임권, 하원 해산권, 긴급명령권 등을 갖지만, 의회 민주제하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지위와 역할에 그치고 있다. 

연방의 행정 수반은 총리이며, 연방의회 선거에서 가장 지지도가 높은 당의 후보가 연정 등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인 행정권을 행사하게 된다. 총리와 부총리, 그리고 내각 각료들은 총리의 제안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은 이를 거부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하원의 다수당 당수가 단독 또는 연립의 형태로 조각을 하여 대통령이 재가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국무장관(State Secretary)은 각료와 같은 형식으로 임명 및 해임되며, 각료의 대 국회 관계 보좌가 주된 업무이다. 각료의 지시에 귀속되며 각료 회의 시 투표권 없이 참석한다.

오스트리아는 수도 비인을 포함하여 독자적인 주州의회와 주州정부를 가지는 9개의 주州로 나뉘어져 있고 총 80개의 관구로 구성되어 있다. 주 지방의회 의원은 각 지역에서 5년마다 16세 이상 지역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직업적이나 비직업적으로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 주정부의 수장인 주지사는 주의원에 의해 선출된다. 

입법부
오스트리아 의회는 상·하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원에 해당하는 연방의회Bundesrat는 각 주의 인구 비례에 따라 각 주 의회에서 간접 선거 방식으로 선출된 62명의 의원(각 주 법률에 따라 5년 또는 6년의 임기)들로 구성되며, 연방 정부와 의회로부터 지방 정부와 지방 의회를 보호하고 국제 조약 체결을 확인하고 허락하기도 한다. 하원에 해당하는 국민의회Nationalrat는 국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 183명의 의원(임기 5년)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새로 구성된 연방 정부를 허가하거나 새로운 법률을 만드는 입법을 담당한다. 입법권과 국정감사권은 상·하원이 각각 행사하나, 하원이 우월하여 실질적 권한을 지니고 있으며 내각 불신임권과 국정조사권 등은 하원이 보유하고 있다. 연방 의회를 구성하는 연방 공화국인 오스트리아에는 각 주마다 주 의회와 주 행정부가 있지만, 중요한 결정은 연방 정부와 의회가 맡아서 하며, 주요 정당으로 사민당SPÖ과 국민당ÖVP, 자유당FPÖ, 녹색당Grüne, Stronach당, 새로운 오스트리아NEOs 등이 있다. 1955년 제2공화국 탄생 이후 최근까지, 주로 양대 정당인 보수 국민당과 진보 사민당이 정권교체 및 연정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2013년 9월 29일 실시된 하원 총선 결과 이전 연정 파트너였던 사민당이 27.1%(53석), 국민당이 23.8%(46석)의 득표율로 간신히 과반수(183석 중 92석) 사수에 성공한 가운데, 이후 약 2개월 반 동안 계속된 정부 구성 협상이 12월 12일 최종 타결되어 12월 16일 대통령의 재가 및 임명을 받음으로써 5년 임기의 제2차 베르너 파이만Faymann 내각이 공식 출범하였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에게는 불운의 상징인 13일의 금요일(12월 13일이 금요일이었음)을 피하기 위해 하루 전날 극적으로 탄생한 사민-국민당 대연정에 대해 여론 조사 결과 만족한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24%에 머물 정도로 신임이 높지 않은 상황인 바, 향후 정국 운영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사법부
사법부는 행정부 및 의회로부터 독립적이며, 각각의 재판부는 항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위 법원의 결정에 구속되지 않으며 판사는 법률 또는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해임되지 않는 개별의 독립 결정 기관이다. 오스트리아의 사법제도는 연방법원이 관할하며, 개별 자치주는 자체의 법원을 갖지 못한다. 법원의 유형으로는 최고 법원인 연방대법원(OGH)과 연방보통법원 및 연방헌법재판소Verfassungsgerichtshof, 연방행정법원Verwaltungsgerichtshof이 있고, 연방보통법원은 구 법원Bezirksgericht, 지방법원Landesgericht, 고등법원Oberlandesgericht 및 대법원Oberster Gerichtshof으로 구성된다. 오스트리아의 사법제도는 3심제를 원칙으로 하는데, 특수법원인 행정법원의 경우 2심제이다. 구 법원에서 일부 민사사건과 형사사건을 다루고, 그 밖의 제1심사건은 지방법원에서 관할한다. 중한 범죄 및 정치범죄 등은 8명으로 구성된 배심재판부에서 재판한다. 고등법원은 제2심사건 및 일부 형사재판의 최종심을 관할한다. 최종심은 연방대법원이다. 

연방대법원과 연방행정법원, 연방헌법재판소의 관할권에 속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노동법원, 중재법원, 사회보장에 관한 각 주 별 위원회, 특허법원, 군사법원 등의 특별법원을 설치해 운영할 수 있다. 2007년 12월에 설립된 난민법원Asylgerichtshof은 난민의 수용 여부와 절차를 결정한다.

주요인물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정치적 인물로는 우선 합스부르크 왕조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나폴레옹의 몰락 후 1815년 유럽의 정치적 지형의 재편을 주도한 메테르니히Metternich,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오랫동안 헝가리-오스트리아의 도나우제국Donaumonarchie의 왕이었던 프란츠 요셉 1세Franz Joseph I를 언급할 수 있다. 현대로 오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Adolf Hitler가 태어난 나라이며,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이기도 했던 발트하임K. Waldheim은 그의 나치정권과의 밀접한 관련 때문에 국제적으로 고립되기도 했다.

경제

제2차대전에서 패한 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1947년에 이미 극도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개혁이 이루어졌고, 1948년 미국과 오스트리아 간에 마샬플랜에 관한 협약이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는 유럽 내에서 가장 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첫째 오스트리아가 2차대전 이전 산업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고, 둘째 독일과는 달리 소련에 대해 복구채무액을 갚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은 그 대신 1830년 이래 도나우강을 이용한 유럽 내 선박운송사업을 운용해 오던 오스트리아의 중요한 기간산업체인 DDSG(도나우 선박운송회사)를 이용한 30년간의 석유관련 사업권을 따내었고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있던 DDSG의 재산을 확보하는 이익을 챙겼다. 오스트리아는 소련점령지역에서도 마샬플랜을 통해 유입되는 자금을 활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유럽 내 유일한 경우였다. 

이러한 호조건을 발판으로 시작된 오스트리아의 경제부흥은 - 무엇보다 오스트리아 내의 독일자산에 대해 연합국이 손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추진한 - 기간산업 국유화 정책으로 시작하여 정책적으로 안정된 발전을 이룩해 나갔고 1990년대 국유기업의 민간 혹은 외국 기업으로의 이전까지 오스트리아 경제의 기본축이 되었다. 석유 화학, 제철, 자동차 등 중화학 공업 분야를 비롯하여, 전체 산업 생산량의 4분의 1을 담당하고 있는 국영 기업은 1970년부터 각 분야에서 다른 경쟁 기업 없이 경제를 이끌었고, 오스트리아는 이 강력한 국가 경영을 통해 1인당 국민 소득이 4만 3천 달러에 이르는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1995년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1999년 통화 화폐를 유로화로 바꾸었고, 유럽 연합 가입 국가들과의 무역 및 해외 투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중요한 무역국은 독일이다. 수출은 29.8%, 수입은 무려 40.6%에 달한다. 다음으로는 이탈리아, 스위스 등을 꼽을 수 있는데 EU내에서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수출은 72.7%가 유럽연합국과 이루어지고 있으며, 수입은 73.6%에 달한다. 그 밖에 농업과 축산, 임업도 발달하여, 오스트리아 내에 필요한 농산물 수요의 90%를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다. 주요 2차산업으로는 광공업을 들 수 있다. 알프스 지역에 묻혀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 아연, 납, 철광석 등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예로부터 철광과 제철 산업, 제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냉전구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이점을 활용하여 일찍부터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의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그 중 하나로 러시아와의 천연가스 수입 및 중개가 활발하게 되었고, 특히 정유산업 부문에서 유럽 내 독보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국제적 규모의 정유 및 가스회사인 OMV 콘쩨른은 오스트리아의 국영기업으로 출발하여 규모를 확장시켜 전세계적으로 26,800명(2013년)을 고용하고 있는 거대한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오스트리아에 적을 두고 있는 Rewe 주식회사도 이탈리아, 동유럽과 다국적기업을 형태를 띠면서 슈퍼마켓, 화장품 영업, 생필품 판매 및 요식업 등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는 다국적기업이다.

전력공급은 주로 수력발전(60% 정도)에 의존하고 있는데, 댐을 이용한 수차 발전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협약에 의해 재생 가능한 전력생산이 2010년까지 78.1%, 환경전력생산이 10% 상승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는 실제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으며 환경전력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2011년 현재 풍력발전은 3.3%에 달한다.

흥미로은 것은 핵발전소는 핵 방지법에 의거 허용되지 않고 있다가 1970년대 쯔벤텐도르프Zwentendorf에 핵발전소가 건설되었지만 국민투표(1978)에 의한 반대로 지금까지 한번도 가동된 적이 없다.

천연가스 수급은 거의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도 생산이 없지는 않지만 국내수요의 20%에 불과한 소량이다. 그래서 러시아(수입의 70%)에서 주로 공급을 받고 있는데, 오스트리아는 1968년 세계적 냉전구도 속에서 중서 유럽 최초로 동구권과 가스 수급계약을 체결한 나라가 되었다. 아무튼 5개의 가스관이 오스트리아를 관통하는데 이를 통해 서유럽과 중부유럽의 가스공급에 기여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지형적으로 숲이 많다. 이에 따라 수목을 활용한 삼림산업이 발전하게 되는데 목재와 종이 생산량이 많아 남유럽국가에 대한 원목수출은 중요한 교역물이기도 하다.

전반적인 오스트리아 경제의 현황을 정리하면 전통적으로 제조업 부문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관광 등 서비스 산업에서도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요 제조업에 있어서는 숙련된 노동력을 기반으로 철강, 기계류, 자동차부품 등이 중소기업 위주로 발전해 왔으며, 환경, 재생에너지 산업도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급성장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2013년 유로존 경제 부진 등 대외경제 악화로 2011~2012년 대비 성장세가 약화, 연간 0.3~0.4%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럽연합EU 평균(0.1%)은 상회하면서 선전중이며, 특히 실업률의 경우 4.9%로 EU 국가 중 최저 실업률을 유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경제연구소들은 향후 2014~2018년간 연평균 성장률도 계속 EU 평균(1.55%)을 상회하는 1.8%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여타 EU국가들에 비한 오스트리아의 성장 우위는 인접 중동부 및 남부유럽 시장의 성장, 이에 따른 오스트리아의 수출증대, 지속 증가하는 노동공급, 최근 증가된 연구·개발 관련 투자에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관광산업

전체적으로 보아 오스트리아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부문은 3차 산업(68%)이다. 오스트리아는 높은 산과 고지대, 그리고 아름다운 경관의 호수들이 있다. 또한 수많은 문화적 자산과 유적, 매력적인 도시 경관, 그리고 적절하게 마련된 관광 기간 시설,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형적 요인 등 나라 전체가 관광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관광 산업에서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사실은 여름이나 겨울 시즌이나 균등하게 관광객이 찾는다는 점이다. 관광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은 특히 티롤, 잘츠부르크, 케른텐, 비인 등을 중심으로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으며 외국인들의 평균 숙박일은 매회 4.2일 정도에 이른다. 

알프스 산의 천혜 자연을 이용한 스키와 레저 산업, 음악과 문화유산을 이용한 서비스 관광 사업은 전체 산업의 68%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분야이다. 관광산업으로 인한 1인당 연수입은 1,666유로(2009)에 달하여 전세계적으로 비교할 만한 국가가 없을 정도로 높다고 하겠다.

문화관광으로는 무엇보다 음악 쪽이 우세하다. 매년 여름 시즌에 모짜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되는 음악축제가 유명하며, 1946년 이래 매년 열리고 있는 브레겐츠Bregenz 축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호수무대가 설치된다. 그 외에 비인의 축제주간, 비인 국립오페라, 비인 필하모니커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음악을 중심으로 한 행사에 수많은 내외국인들이 방문하고 있는 셈이다. 관광산업은 그 자체로서 수익원이 될 뿐 아니라, 지역 상권의 활성에도 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 경제에 가장 기여도가 큰 부문이라 하겠다.

최근에 들어오면서 무제한적으로 증가추세에 있는 관광산업으로 인해 도로 및 공항 건설로 인한 아스팔트화, 공기오염, 쓰레기 처리, 하수처리 문제 등 동반되는 환경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대안적 관광프로젝트도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사회와 문화

오스트리아의 인구
오스트리아의 인구 증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이후 다양한 국내외적 요인에 의해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최초의 근대적 인구조사가 이루어졌던 1869/70년 이래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꾸준하게 증가해왔다. 요인은 무엇보다 이중제국 내의 이동에 기인한다. 전쟁이 끝난 1919년엔 34만 7천명의 인구가 전쟁으로 죽거나 제국의 동구권 지역주민들의 귀향으로 감소하였다. 이후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여 1939년 독일과의 합병 직후 이루어진 인구 센서스에서는 무려 총 인구가 665만에 달했다. 1946년 조사에서는 2차대전으로 인한 인구손실에서도 불구하고 피난이주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며 전쟁감소분을 상쇄하며 700만에까지 이르게 된다. 1980년 이후엔 유고 내전의 여파로 이주민들이 더 늘어나면서 2013년 850만에 이르고 있다. 2013년 현재 이주외국인은 총인구의 19.4%에 해당하는 163만명이다.

언어 및 종교
오스트리아의 국어는 독일어이다. 88.6%에 해당하는 인구 수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독일어는 어휘와 발음, 그리고 문법적 특이성에 있어 독일어 표준어와 차이를 가진다. 1951년 확정된 오스트리아어 사전은 독일어의 표준체계를 규정하는 두덴Duden과 달리 이러한 차이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관청과 학교에서는 이 오스트리아어 사전이 병용되고 있다. 독일어 외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지역별 공용어가 있는데 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 헝가리어가 이에 속한다. 또한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어와 수화手話도 소수언어로 인정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기본종교는 가톨릭이다. 2001년 73.6%에 해당하는 인구가 가톨릭 신자로 등록했고, 4.7%만이 개신교도에 속했다. 기독교인 중 2.2%(18만)는 정교 신자로 밝혔다. 이후 현재까지 기독교도는 꾸준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데 2013년엔 62.4%에 해당하는 530만명의 가톨릭 교도와 겨우 3.7%에 해당하는 31만명의 개신교 신자가 등록되고 있다. 2001년 4.2%를 기록한 이슬람교 신자는 점점 증가 추세에 있으며 최근의 비공식 자료에 의하면 2009년 50만명(전 인구의 6.2%)이 넘는 신도를 기록 중이다. 그 외에 유대교(8,140명, 비인에만 7,000명), 1983년 정식으로 인가된 불교(1만명), 여호와의 증인(2009년 5월 합법화됨, 2만명) 신도들이 있다.

정체성
오스트리아는 중세 이후부터 정치, 언어-문화, 그리고 이념적 연결로 인해 ‘독일’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인식되어 왔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19C 초엽만 해도 근대적 의미의 민족 정체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최초로 ‘우리’라는 동질성은 사실 중세 초기에 형성이 되어 합스부르크 왕국세대에서 1918년까지는 집단적 동질성이 주로 왕조와의 연관에서 인식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개의 독일국가’라는 의식이 태동되기 시작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종식되면서 ‘근원적인 집단정체성의 위기’로 내몰리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제 1공화국의 실패와 1938년 나치 독일과의 병합에까지 연결되었다. 하지만 나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자세, 그리고 패전이란 상황은 서서히 독자적인 오스트리아 정체성을 키워나갔고, 전쟁의 종식에 이은 독자적인 국가형성과 안정, 그리고 경제부흥을 통해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독자적 민족-국가의식이 완결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문화
오스트리아의 문화는 수세기 전부터 유럽문화의 중심권에서 발전되어 왔다. 거의 모든 양식사적 시기마다 중요한 건축물이 형성되어 왔고 그 중 많은 것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의 문화는 유럽을 대표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왕조의 특성상 비인, 프라하, 부다페스트는 다양한 방식으로 왕성한 문화적 교류를 이루어 냈고,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비인은 유명한 예술인, 지식인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1870년부터 1914년까지는 전쟁이 없던 평화의 시기였다. 1683년의 대 터키 전쟁 승리 이후 바로크 시대가 누렸던 문화적 융성기처럼 세기 전환기의 오스트리아에서는 세계적인 음악가, 작가, 화가와 지식인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면서 제국의 마지막 50년을 문화의 꽃으로 장식하려는 듯이 보였다.

이러한 오스트리아-비인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1918년 1차대전이 끝나고도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며, 제 1공화국 기간 동안 지속되다가 1938년 나치독일과의 병합을 맞아 끔찍한 종식을 맞게 된다. 오스트리아 문화권에서 유대계 지식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는데, 나치 정권의 대두로 목숨을 잃거나 망명을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45년 이후엔, 무엇보다 문화관광의 차원에서 이중제국의 전통을 다시 이어보려는 노력이 이루어졌고,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사조의 발전에는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과거의 문화적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영화, 음악 등의 분야에서 새로이 세계적 신조류를 형성해 나가는데 성공하는 듯이 보인다. 전통과 현대 사이의 이러한 문화적 긴장관계는 도시에 따라 독자적인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데, 2003년 그라츠Graz는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칭되었고, 비인Wien은 대체로 대표적인 문화대도시로 인정되고 있는 한편, 린츠Linz나 장크트 푈텐Sankt Pölten처럼 과거의 전통이 미약한 도시는 현대예술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음악 
18세기 이후 약 300년 동안은 세계 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났는데, 하이든Franz Joseph Haydn에서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로 이어지며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세계 음악사의 황금기이자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소나타에서 실내악, 협주곡, 교향곡 등에 이르는 많은 기악곡들이 발전하였고, 음악가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에 힘입어 당시 유럽의 예술과 문화, 사상의 중심지인 비인에서 명곡들을 만들어 냈다. 세기말(19C)을 전후하여 오스트리아의 음악세계는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와 같은 후기낭만주의의 거장을 거쳐 12음계 기법을 도입한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알반 베르크Alban Berg 등의 신비인파를 중심으로 현대음악에로의 접목을 이루어 냈다.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부자,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é와 같은 유명한 오페레타 작곡가들의 명성도 비인의 문화적 절정기를 이룩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음악의 도시 비인에는 극장과 공연장이 많아 일 년 내내 음악을 즐길 수 있고,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의 근거지가 있다. 또한 유명한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이 있어 세계적인 오페라와 음악회를 즐길 수 있다. 비인 시내에는 음악가와 관련된 곳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하이든 기념관과 슈베르트 기념관 등이 대표적이다.

오스트리아는 음악 뿐 아니라 문학, 건축, 미술, 과학, 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을 열거할 수 있다.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칼 크라우스Karl Kraus,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엘프리데 옐리넥Elfriede Jelinek 등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 출신 문인들이고, 화가로서는 작품 ’키스’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오스카 코코쉬카Oskar Kokoschka, 알프레드 쿠빈Alfred Kubin, 정신분석학의 선구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등이 오스트리아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상수상자는 20명으로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는 세계 5위이다.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관계

한국과 오스트리아는 1892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공식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1963년 국교수립에 합의하여 비인에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으며, 1985년엔 서울에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으로서 남한과 북한 양국과 수교하고 있으며 표면상 등거리외교를 견지하고 있다. 2013년 12월 현재 2,300명 가량의 한국인이 오스트리아에 교민, 상사 임직원, 유학생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데, 이 중 유학생이 약 1300명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현지 국적을 취득한 시민권자는 500명에 달한다. 비인, 그라쯔, 린쯔에 한글학교가 설립되어 있으며,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를 비롯해 대한항공, 삼성, LG, 기아자동차, 영산 등 30개 한국업체가 오스트리아에 진출하고 있다. 한국과 오스트리아 간엔 무역협정, 섬유협정, 사증면제협정, 항공협정, 이중과세방지 협정 등이 체결되어 있고, 점차로 교역량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한·오 교역량은 1996년 7억 6699만 달러를 정점으로 일정한 감소세를 보였으나, 2006년엔 무려 13억 유로를 기록함으로써 교역규모 기준으로 한국은 오스트리아의 4번째 교역국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대 한국 주요 수입품은 승용차, 통신장비, 전기부품 등이고,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으로 수출하는 제품을 보면 기계, 산업장비, 자동차 등이 총 수출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력발전소 및 철강 산업장비, 기계장비, 철도유지 장비, 산업용 고로, 임업용 쓰레기 소각 장비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인의 카페하우스

비인의 대중 문화 중 한 가지 언급할 만한 것은 카페하우스Kaffehaus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제조된 커피와 함께 간단한 식사가 제공되는 카페하우스는 세기말을 전후하여 사회생활에 깊숙히 파고들었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보헤미안, 예술가, 지식인들의 휴식처가 되면서 지적 토론과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찾아 들었고, 트로츠키 같은 이가 혁명을 꿈꾸던 공간이기도 했다. ‘홀로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옆자리에 벗들이 있어야 하는 곳’으로 지칭되던 비인의 카페하우스는 오스트리아 문화의 유명한 대표자들의 산실이 되었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으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고, 약속이 없었어도 의견을 나눌 벗이 찾아오는 장소였다. 하버마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 <여론의 구조변화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에서 카페의 기능을 시민사회의 공공여론이 자리잡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는 문화공간이라고 강조한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의 집무실에 인접한 ‘카페 그린스타이들(Griensteidl)’에서는 소설가 헤르만 바, 아터 슈니츨러, 후고 폰 호프만스탈 등이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하루 종일 죽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키스」를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히틀러의 나치정권에 의해 작품이 모두 불태워질 뻔한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 등의 20세기 미술계 거장들, 오토 바그너, 아돌프 로스 등 근대 건축가들은 ‘카페 무제움(Museum)’의 단골이었다. 

소설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비인의 카페하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도 비교할 데가 없을 아주 독특한 방식의 시설이라 하겠다. 일종의 민주적이고 값싼 한 잔이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클럽이다. 모든 손님은 푼돈 얼마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토론하고, 글을 쓰거나, 카드놀이를 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온 편지를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무수히 많은 신문과 잡지를 통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고 아무 것도 놓치지 않았다.”

비인의 카페하우스 문화는 2011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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