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의 Tetractys에 관한 고찰 / 박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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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Tetractys에 관한 고찰
박희영
【요약문】본 논문은 피타고라스의 초기 사상에 나타난 數 사상이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사유 발달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그 개념사적 발달의 관점에서 살펴봄에 그 목적이 있다. 1장은 피타고라스학파가 바라보는 자연 내지 우주가 인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순한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소우주로서의 인간이 닮고자 하는 대우주로서의 상응 관계를 지닌 세계이고 더 나아가 질서와 조화가 지배하는 예지적 세계임을 밝히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피타고라스의 세계는 특별히 코스모스라 불리며, 인간은 그 속에서 질서와 조화를 읽어내기 위한 관조(theoria)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2장은 이러한 우주에 대한 설명의 체계로서 나타난 형이상학적 일원론 및 다원론들이 어떻게 본래의 종교적 다원론과 일원론의 시각으로부터 발달되어 왔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3장은 그러한 형이상학적 일원론 내지 다원론의 시각에서 어떻게 수를 아르케로 보는 시선이 나오게 되었고, 그러한 시선이 질료인으로서의 수와 運動因으로서의 테트락튀스를 바탕으로 하여 예지적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하여, 본 논문은 결론에서 피타고라스의 수 사상이 세계에 대한 설명 체계 일반을 대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질적인 파악으로부터 추상적이고 양적인 인식 체계로 변환시키는 중간 과정의 작업으로서 철학사 내지는 개념사적인 관점에서 매개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I. 서론
우리는 일반적으로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삼각형의 빗변을 구하는 방법 내지 無理數를 발견한 최초의 수학 사상가를 연상하거나, 또는 영혼 윤회설과 금욕주의적 생활을 주장한 종교 개혁가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한 연상은 分地術(geodaisia) 내지 測地術(geometrike)과 같은 실용적 차원의 기술을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이론적 차원의 지식으로 체계화 시킨 그의 수학적 업적과, 특정한 시공 속에서 치러지는 의식을 통해 얻어지는 일시적인 종교적 체험만을 중시하는 초보적 단계의 종교를 개인적 차원에서의 정신적 자각을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함을 통해 얻어지는 상시화된 종교적 명상과 삶을 중시하는 종교에로 한 단계 승화시킨 종교적 업적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수는 만물의 아르케’라든가 ‘테트락튀스에 걸고 맹세한다’는 언설 속에 나타나 있는 그의 초기 수학 사상과 관련하여, 그의 수 개념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추상적ㆍ이론적 수 개념보다는 물리학의 원자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 더 나아가 그것이 사물의 성질을 좌우하는 특정한 힘(dynamis), 그것도 신비한 힘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일반적인 그러한 연상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잠시 당황하게 된다.
물론 수 개념에 대해 갖게 되는 이러한 당황감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을 수학사 내지 철학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쉽사리 해소되어질 수 있다. 또한 수 원자론(number atomism)이라 불리는 후기 수학 사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러한 질량과 힘을 지닌 것으로서의 수 개념은 수학적 사유가 아직 덜 발달된 초기 단계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연구의 대상조차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딴네리와 콘포드가 행한 이 학파의 사상에 대한 수학사적 관점과 철학사적 관점에서의 연구 속에서, 그러한 당혹감에 대한 일차적 해결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해결책들이 안내해주는 편안한 길로 들어서는 순간, 콘포드에 의해서 소위 신비주의라고 불렸던 초기 사상으로 이루어진 야생적 사유의 숲 속에 숨겨져 있는 진리 즉 자연 및 우주 그리고 인간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의 개념 틀이라는 진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모험심 내지 탐험심을 잃게 된다. 종교적 내지 신화적 세계 해석의 고목들 속에서 논리적 사유의 새싹들이 피어나고 있는 그 숲 속에서 형이상학적 사유의 뿌리를 찾는 작업은 단순한 철학사적 탐구의 단계를 넘어, 특정의 사유 방식이 철학 및 형이상학적 개념 형성에 끼친 영향을 추적하는 개념사적 고찰 내지 진리 발견적 탐구가 된다. 그러한 탐구는 앞선 철학자들의 사상을 자신의 개념 체계에 맞춰서만 인용하는 후대 철학자들--그 대표적 철학자로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에 의해 어느 정도 변주된 문헌들의 지층 속에서, 해당 철학자 본래의 사유 자체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내는 탐구, 푸꼬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피스테메(episteme)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가 될 수밖에 없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러한 차원의 탐구 선상에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초기 사상 속에 숨어 있는 야생적 사유의 특성을 드러냄으로써, 신화적ㆍ종교적 세계 이해로부터 철학적 세계 이해로 넘어감의 중간 단계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사유 방식이 창출해 낸 여러 개념들 - 아르케, 일자, 수, 규정성, 조화, 비례 - 이 대상 세계에 대한 예지적 파악과 설명의 체계를 발달시킴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었는지를 밝힘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본 논문은 1장에서 피타고라스가 생각한 우주관은 어떠한 것인지, 2장에서 수를 세계 설명의 틀 속에서 중심으로 놓는 그의 철학적 일원론 내지 다원론의 사유는 어떻게 종교적 일원론의 사유로부터 발달하게 되었는지, 3장에서 Arche로서의 수 개념은 세계에 대한 예지적 파악과 해석의 방법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Tetractys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완벽한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서의 코스모스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연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탐구함에 있어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작업은 그가 바라본 자연 내지 우주가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규정하는 일이다. 그 이유는 피타고라스의 자연관이 뿌리내리고 있는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의 자연관 일반이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관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이성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일찍이 콘포드가 왜 그리스어 Physis를 현대어로, 예를 들어 영어의 nature로 번역할 경우, 그것이 본래 내포하고 있는 운동성 내지 변화의 측면을 제대로 나타내주지 못하기 때문에 Physis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그리스인들의 자연관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것이 번역 용어를 무엇으로 선택해야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해석의 개념 체계 자체에 있어 그리스인과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차이에 대해 인식함 속에 있음을 밝힌바 있다. 사실 동양 문화권의 ‘自然’이나 라틴어의 Natura는 모두 어원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태어나다, 자라나다’를 뜻하는 동사 'phyo'에서 파생된 그리스어 Physis가 내포하고 있는 역동성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개념 체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세 유럽 문화권의 Natura는 모든 존재자들이 자신의 존재성(esse)을 절대적 유일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움직여지는 피동적 존재자들의 총체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동양 문화권의 自然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모든 동양인들에게 있어 사물의 정태적 구조만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자연의 구조 상태뿐만 아니라 그 변화하는 모습내지 운동하는 과정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리스인들의 정태적이면서도 동시에 역동적인 퓌시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태주의적 자연관과 역동주의적 자연관이 중첩된 그리스인들의 자연관을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퓌시스에 대해 ‘만상이 그곳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그 곳에로 소멸해 들어갈 하나의 궁극적 원질’이라고 규정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규정은 퓌시스의 일차적 의미가 성장이고, 그것이 연상시키는 것이 생명과 운동이라는 것, 따라서 그 성장하는 주체는 ‘모든 변화(pathos)를 다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궁극적인 것(ousia)’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이 전체로서의 자연에 대해 탐구하되 바로 이러한 ‘운동 및 변화 속에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궁극적인 것’에 초점을 맞춰 탐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은 특정의 장 속에서 구체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개별적 존재자들에 대한 種的 차원에서의 설명보다, 그러한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요소들에 대한 類 개념적 차원에서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시선을 가지고 자연을 예지적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일차적 단계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비구분적 단일체로서의 자연을 이루는 구성단위로서의 구분적 원소(stoicheion)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우주의 근원적 물질 내지 원리’로서의 아르케 개념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자연관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러한 퓌시스와 원소 그리고 아르케에 대해 갖고 있었던 그리스 철학자들의 개념 체계 일반에 대한 선이해 외에도, 특별히 종교적면서 동시에 수학적인 그의 시각을 고려할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사실 그의 시각은 대우주로서의 자연과 소우주로서의 인간 사이에 상응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종교적 초점과, 이 자연을 수적 비례와 조화가 지배하는 완벽한 우주(Cosmos)로 보는 수학적 초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각이 지닌 이중적 초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단순히 종교적 초점만 지닌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왜냐하면 종교적 명상과 실천을 중시하고 있는 이 학파는 퓌시스 내지 신과의 합일(Homilia)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시선에는 그러한 종교적 초점과 더불어 수학적 초점도 함께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합일은 원시 종교의 의식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이 신과의 종교적 차원에서의 합일이 아니라, 완벽한 우주 질서에 대한 인식을 통한 학문적 차원에서의 합일을 의미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개념 체계를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피타고라스가 왜 자연을 지칭하기 위하여 기존의 신화적 용어인 우라노스가 아니라, Cosmos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원학적 관점에서 볼 때, 코스모스가 어떠한 시니피에를 지닐지는 ‘군대의 열을 정렬시키다, 질서지우다, 식사를 준비하다, 질서 維持官(cosmotes)의 기능을 조직하고 수행하다, 치장하다, 존경하다’를 지칭하는 cosmeo 동사의 의미로부터 쉽게 추론될 수 있다. 즉 그것은 단순히 부분으로서의 개별자들이 아무렇게나 모여 이루어진 합쳐진 전체로서의 무질서한 자연 내지 우주가 아니라, 그 속에서 각각의 개별자들이 일정한 질서에 따라 조직됨을 통해 전체적 질서와 조화에 참여하게 되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자연 내지 우주를 의미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그것은 하나의 작은 우주 또는 응축된 우주(Microcosmos)로서의 개별적 인간이 끊임없이 합일하고자 하는 종교적 대상으로서의 대우주(Macrocosmos)이자, 동시에 인간 이성의 인식 대상으로서의 수적 비례와 조화에 의해 지배를 받는 예지적 차원에서의 인식론적 대상으로서의 대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지닌 자연 내지 우주에 대한 이러한 종교적이면서도 수학적인 이중적 초점의 시선을 고려하면, 우리는 왜 그에 있어 자연 내지 신과 하나가 되는 삶이 학문적 삶과 그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코스모스는 이렇게 수적 비례에 따른 질서와 조화가 작용하는 조직체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과의 합일은 오직 그러한 질서와 조화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르는 삶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한 삶은 당연히 학문적 차원에서는 자연 안의 질서와 조화에 대한 관조(theoria)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러한 관조는 수학 내지 음악 그리고 천문학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 속에서, 우리는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있어 자연은 어떤 때는 질서가 작용하고 어떤 때는 무질서한 운동이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험 대상의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질서와 조화만이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사유 대상의 예지적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인간 지성에 의해 논리적 차원에서 재구성되는 바로 이러한 예지적 세계를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해석하는 피타고라스의 시선이 왜 그렇게 전체적 질서와 조화뿐만 아니라, 개별자들 속에 구현된 부분적 질서와 조화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종교적 일원론과 철학적 일원론
전체로서의 자연 뿐만 아니라 부분으로서의 자연 속에 들어 있는 질서를 인식하고자 하는 시선은 피타고라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계가 어떤 하나의 또는 여러 개의 근본적인 등질적 요소들(homoiomere)―그것을 물ㆍ불ㆍ공기ㆍ4 원소ㆍ수ㆍ단자ㆍ원자라고 보든, 아페이론ㆍ존재ㆍ형상이라고 보든― 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규정해 주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개진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의 여러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접하면서, 특정의 철학자가 주장하는 그러한 요소들이 어떠한 성질을 지닌 것인지 그 내용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는 쉬워도, 그러한 개념들 자체가 어떠한 배경에서 발생하였고 더 나아가 그것들이 형이상학적 사유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는 쉽지가 않다.
피타고라스의 수나 원자론자들의 원자(atom)등과 같이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기본적 개념들의 근저에는, 타자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일자 일반에 대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관념 속에는 이미 철학자들이 대상을 논리적 차원 내지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규정하려는 시선과 태도가 작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적 차원에서 접하는 모든 대상들은 언제나 타자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법인데, 우리가 그것들을 타자와의 모든 연관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나의 독립된 존재자로서 즉 일자로서 대상화시키는 것은 논리적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자로서의 고유한 여러 특성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이러한 개체로서의 일자에 대한 관념은 역설적으로 그 존재자들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특성들을 捨象시킴을 통해 얻어지는 전체로서의 일자의 관념으로부터 발생된 것이다. 왜냐하면 개체로서의 일자의 관념은 마치 無에 대비되어 존재한다는 특성 하나만으로 모두가 존재로서 규정되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처럼, 어느 하나의 특성에 따라서만 무차별적으로 일자화되는 전체로서의 일자의 관념을 먼저 지닌 다음, 그것과 비교하여 그것과 다른 성질들을 지닌 개별자로서의 일자에 대한 관념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두 종류의 일자의 관념을 고려해야만, 우리는 전체로서의 자연 내지 우주와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에 대해 탐구하는 그리스 철학에서 왜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 체계로서 일원론 내지는 다원론에 대한 논의가 그렇게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사유 방식의 관점에서,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러한 종류의 사유가 전적으로 종과 유 개념의 체계를 통한 추상적ㆍ논리적 사유 작용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단순하게 결론내리기 쉽다. 사실 그러한 추상화(abstractio)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여러 다른 시점에서 나타나는 한 존재자의 여러 기능 내지 구조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존재자들이 지닌 공통적 기능 내지 구조들을 하나의 동일한 공간 속에 동시에 분석의 대상으로서 놓은 다음, 그 대상들을 비교하여 같은 점과 다른 점들을 구별해 내는 정신 작용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추상적 사유의 능력은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로부터 직접 나왔다는 신화가 상징하듯이, 그렇게 순수 이성의 저장고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20세기 후반에 발달한 인류학적ㆍ비교 종교학적 연구들 덕택으로, 그들의 논리적 사유가 종교적ㆍ신화적 사유의 오랜 축적을 통하여 나온 것임을 알고 있다.
추상화 작용의 극한치에서 전 존재자를 하나의 특성 아래 묶는 논리적 사유에 의해 형성된 형이상학적 일원론 내지 다원론의 관념은 본래 한 집단 내의 여러 구성원들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하나로 여기는 구체적이고도 질적(qualitatif)인 심리적 체험(vécu)에 기초한 사회적ㆍ종교적 일체감 내지 연대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일원론의 근원이 되는 이러한 동등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느끼는 사회적ㆍ종교적 연대감은 콘포드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원시인들이 지녔던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집단 그리고 자연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공감적 연속체(the sympathetic continuum)의 관념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신성한 힘(Potentia sacra)과 인간 사이에서 느끼게 되는 이러한 원시 종교적 연대감은 예를 들어 종교 의식과 같은 특수한 시공 속에서 체험되는, 소위 레비-브륄이 말하는 ‘신비스러운 함께함(la participation mystique)’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존재론적이고 심리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심리적 공감의 차원에서 획득되는 종교적인 일원론적 사유는 어떻게 순수 이성의 추상화 작업의 차원에서 얻어질 수 있는 철학적인 일원론 내지 다원론적 사유에로 발달할 수 있게 되었는가 ?
엄밀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일원론에 대한 관념 자체는 그리스의 경우 기원 전 6세기에 나타난 기존의 전통적 종교 사유들 -자연 내지 신과의 질적 공감에 대한 체험을 중시하는- 에 대한 반성과 갈등 속에서 잉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초기 단계에서의 종교적 사유는 혈연관계에 기초한 사회적 단위들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다원론적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콘포드가 잘 지적하였듯이, ‘혈연 집단 속에서의 사회적 유대 내지 연대감(philia)은 혈족들(philoi)의 범위 안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그들은 특정의 신ㆍ영웅ㆍ조상에 대해 공통적인 숭배를 할 수 있었고, 그러한 공통적인 종교적 유대감을 지닌 한에서 자신들의 폐쇄적 집단 안에서만 일원론적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사회 속에는 그러한 집단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세계는 당연히 그러한 일원론적 일체감을 고유하게 느끼는 각각의 여러 집단을 그 구성원으로 지니는 다원적 집합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다신교적 혈족의 유대 관계를 뛰어넘는 또는 무시하는 새로운 종교 집단의 출현은 그리스에서 종교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적 관점에서도 새로운 사유 방식을 창출하게 된다. 우선 종교적 차원에서는 단순히 동일한 혈연 집단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만 느끼던 폐쇄적 일체감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라고 느끼는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를 하나라고 느끼는 개방적 일체감으로 변하게 되면서, ‘모든 생명은 하나이고 신도 하나’라는 일신론적 공리의 관념이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관념은 피타고라스 종교 등과 같은 새로운 종교의 출현과 함께 종교 의식이라는 특정의 시공 속에서만 갖게 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종교적 믿음 및 체험 속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가질 수 있는 상시적인 것이 되면서,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설명의 사유 방식 자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신교의 사회적 기초가 묻혀 지면서 나타나게 된 이러한 변화는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파악에 있어 일원론적 개념 틀을 적용시키는 태도를 낳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일자성에 대한 종교적 자각을 통해 다원론적 개념 틀을 적용시키는 태도도 창출시키게 된다. 사실 예전의 사회 속에서 혈연 집단 간에 느끼던 연대감은 어떠한 구성원이 되었든 그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든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전파시킴을 함의하고 있다. 즉 그러한 사회 속에서는, 모든 행위의 책임을 그 행위의 주체자인 개인 속에서 찾지 않고 집단 속에서 찾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의 자의식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 속에서는 집단적 책임감이 사라지고 개인적 책임감만 남게 된다. 그 결과 특정한 행위의 죄는 이제 그 행위를 일으킨 자에게 개인적으로 따라다니게 되어, 타인 또는 전체로서의 혈연 집단에 의해 속죄되어질 수 없게 되었다. 개인적 일자성에 대한 자각을 낳게 되는 바로 이러한 시각을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영혼 윤회설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인간이 죽더라도 그의 영혼이 내세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영혼 환생에 대한 단순한 믿음은 원시 사회 어디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환생이 특정의 원죄를 씻어내 주고, 개인적 영혼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책임의 업보를 둘러매고 여러 생 동안 고통을 통해 순화되어 이승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환생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도덕적 견해는 피타고라스의 영혼 윤회설이 지닌 특수한 관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행위에 대하여 혈연 집단의 중간항을 거치지 않고 개인적 영혼 스스로가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그의 이러한 새로운 영혼(Psyche)의 관념 속에서, 우리는 전체 속에 함몰되어 각 개별자가 지닌 고유성의 차이가 전혀 나타나지 못하는 전체로서의 일자에 대한 관념의 다른 한편에, 그러한 전체로서의 일자와는 다른 각자의 고유성을 충전적으로 드러내는 개인으로서의 일자에 대한 관념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일자성에 대한 자각은 역설적으로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설명의 사유에 다원론의 모델에 대한 관념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사실 피타고라스의 영혼 윤회설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순수하게 정화시키는 과정 중에서, 심리적으로 자신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내적 투쟁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필연적으로 자각시켜 준다. 이러한 갈등에 대한 종교적ㆍ심리적 체험은 이원론 내지 다원론의 공리에 대한 관념 일반을 지닐 수 있게 해준다. 즉 그러한 체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마치 영혼 안에 두 개의 대립적 힘들이 서로 갈등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존하듯이, 이 세계 안에도 두 개의 대립적 힘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 이 공존할 것이라고 유비추리를 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영혼 윤회설은 우리가 종교적 사유 체계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에는, 우리로 하여금 일원론적 사유에 더 가치를 부여하도록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모든 영혼이 하나의 신적 기원으로부터 나와서 끊임없는 일련의 모든 형태의 삶 속에서 순환한 뒤에 궁극적으로 그 신에게로 되돌아감을 최상의 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근거에서, 선과 악의 갈등 속에 연루되어 있는 각각의 영혼은 생사의 연옥의 굴레에서 벗어나 단일성과 休止의 더 좋은 세상 속으로 회피하고자 하게 된다. 단일성의 관념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이러한 종교적 사유는 물론 생로병사를 통해 겪는 심리적 희로애락의 덧없음 내지는 삼라만상이 펼치는 영고성쇠의 무의미를 느끼는 경지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종교가 내지 현인이 세계를 철학적 차원에서 바라볼 때, ‘단일성은 좋은 것이고 실재는 하나이어야만 된다’는 관념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됨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예를 그리스의 철학자들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한편으로 파르메니데스와 같이 이러한 일원론적 사유의 습관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와는 달리 적어도 수를 통한 세계에 대한 설명의 방식 속에서는 다원론적 사유의 경향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사실 일원론과 다원론 가운데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신념 속에서 일원론만을 선택한 파르메니데스의 경우, 실재를 하나라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자연의 이원론적 체계를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경우에는 수를 만물의 아르케로 보면서 그 수들에게 모두 등가치적 존재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다원론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시선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처럼 모든 것을 비구분적으로 포괄시키는 전체적 일자로서의 수만을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개별자들이 겪는 다양한 파토스들을 고려하는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자들 속에 근본적 구성 요소 내지 지배 원리로서 내재하면서 현현하고 있는 개별적 일자로서의 수에 대해서도 시선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수에 대한 이 같은 규정 속에서, 우리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초기 사상의 경우, 一者(to hen)나 Tetractys와 같은 특정의 수들은 다른 수들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일자들은 이 근원적 일자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그것들은 테트락튀스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사실 보통의 일자들은 이 근원적 일자의 성격을 그 안에 지니게 되는데,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근원적 일자를 ‘닮거나, 모방하기(Mimesis)'때문이다. 피타고라스의 이 특별한 개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 의식과 같은 종교 의식에서의 ’신과 하나 됨‘이나, 그리스 비극에서의 ’극중 인물과의 하나 됨‘을 참조해야만 한다. 디오니소스 종교 의식에서, 이 하나 됨의 관계는 숭배 집단의 구성원들인 thiasos와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kathechein) 신 사이에서 존재하는 관계이다. ’축복받은 자‘는 자신의 영혼이 ’신들린 상태에 있는 자(thiaseutai)‘를 일컫는데, 그러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은 전체 집단이 하나의 정령에 의해 사로잡혀 있을 때, 아직 원자적 개인이 완전히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전체 집단이 그 구성원들 각자 속에 비슷하게 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되는 바로 그러한 집단 속에 침잠됨을 의미한다. 그러한 침잠 속에서, 신은 인간들을 사로잡게 되고, 신자들은 자신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되 그 신과 하나가 된 상태 즉 신의 속성을 자신이 완전하게 소유한 상태로서 전체적 일자이자 동시에 개별적 일자가 될 수 있다. 개별적 일자성을 해체시킴을 통해 전체적 일자성을 닮거나 함께하게 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닮음 내지 함께함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개별적 일자성을 획득하게 되는 이러한 상태는 비종교적 차원에서는 오직 형이상학적 사유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두 차원의 일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관계 맺음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脫我(ekstasis)나 聖事(sacramentum)의 수단을 통해 일시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신과 하나 됨’ 이나 연출의 수단을 통해 유희적 공간의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극중 인물과 하나 됨’을, 관조(theoria)를 통해 철학적 명상의 차원에서 상시적으로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됨’ 즉 神仙人(kosmios)에 대한 직접적인 체현으로 변환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관조는 우주적 질서에 대한 지적 성찰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성찰에 의해 소우주로서의 인간은 그 질서를 더 완전하게 재현하여(mimeisthai) 천상의 조화에 가락을 맞출 수 있는 신선인이 될 수 있다. 보통의 일자들이 근원적 일자를 ’닮는(Mimesis)‘ 과정을 읽어낼 수 있었던 수학적 시선은 소우주로서의 인간 속에서 응축된 대우주를 바라보는 형이상학적 시선을 형성함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초기 사상에 나오는 근원적 일자는 수라는 양적 범주에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모든 수들이 무차별적으로 일자가 되는 후기 수 원자론 속의 일자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지적 세계에 대한 설명 모델로서의 형이상학적 일원론과 다원론이 공존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자각은 바로 이러한 근원적 일자와 보통의 일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시선을 통해 형성되는데, 수를 만물의 아르케로 놓고 출발하는 피타고라스의 설명 체계도 바로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개별자의 고유한 특성이나 개별자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비구분적 전체만을 보는 종교적 관점에서의 일원론에 머물지 않고, 전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유적 차원에서의 일원론 외에도, 개별자들의 특성 ―비록 수적으로 하나라는 성질만을 그 유적 특성으로 지니지만―과 각 개별자들 간의 결합 방식도 고려하는 철학적 관점에서의 다원론적 사유에로 나아감으로써 세계 설명 방식의 모델을 다양화시킴의 기초를 놓게 된다.
3. Arche로서의 수와 테트락튀스
피타고라스 초기 사상에 나오는 아르케로서의 수와 테트락튀스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관점에서의 세계 설명의 체계 속에서 주도적 개념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피타고라스가 수를 아르케라고 규정할 때, 그러한 규정이 그의 전체적인 철학 사상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개념 자체가 지닌 형이상학적 함의성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고르돈은 ‘세계를 이루고 있는 근본 물질내지 만물을 지배하는 원리’라는 철학적 시니피에를 지닌 그리스 자연 철학의 아르케(Arche) 개념이 신화적∙ 종교적 개념 틀로부터 발전된 것임을 밝혔었다. 그의 이러한 고찰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탈레스가 왜 물을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이면서 동시에 다이몬과 같은 힘을 지닌 존재라고 주장하였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피타고라스의 초기 사상에서 논의되는 수는 바로 이러한 질료인이면서 동시에 운동인도 의미하는 아르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다중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즉 그의 수는 첫째로 근원적 일자로서의 수와 그것을 모방하고 있는 보통의 일자들인 원소(stoicheion)로서의 수를 동시에 지칭함으로써, 우주와 개별자들 간에 존재하는 상응 관계의 관념을 확보해주고, 둘째로 정삼각형수ㆍ정방형수ㆍ장방형수와 같이 만물을 구성해주는 질료인이 되기도 하며, 셋째로 비례와 조화의 원리들에 의해 사물들을 지배하는 운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초기 사상 속에 나오는 아르케로서의 형이상학적 수 개념은 후기 사상에서의 수 즉 추상 수열 안에 들어있는 수학적인 수 개념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수 개념은 우선 자기 동일성을 지닌 일자를 확정지음을 통해, 비구분적 내지 무규정적(apeiron)인 자연 속에서 그러한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구분적 내지 규정적(peras)인 원소를 확정짓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무규정적인 것으로부터 수적 일자를 규정해 내는 피타고라스의 작업 속에서, 태초의 카오스로부터 존재자들을 산출해내는 초기 단계의 우주 발생론적 시각이 담긴 신화적 사유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우주 발생론적 신화들은 일차적으로 무규정적 카오스로부터 존재자들을 산출해 낸 다음에, 이차적으로 그러한 존재자들의 이합집산의 과정을 지배하는 운동의 원리 및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즉 그러한 신화들은 일차적 작업인 분리(apokrisis)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지닌 존재자들을 확정시킨 다음에, 그러한 존재자들을 새롭게 종합시키는(synkrisis) 이차적 작업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음과 양 등과 같이, 주로 이분법적으로 대립되는 원리들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우주 발생론적 구조를 지닌 신화적 개념 체계의 원형을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피타고라스가 왜 존재자들의 이합집산을 지배하는 10 개의 원리를 규정하면서, 그 대립적 원리들을 기술한 목록 왼 쪽 기둥에 오는 모든 것들(규정성, 홀수, 일자, 오른쪽, 정지해 있는 것, 직선, 빛, 좋음, 정방형)은 좋은 것으로, 오른쪽 기둥에 오는 모든 것들(무규정성, 짝수, 多, 왼쪽, 여자, 움직이는 것, 구부러진 것, 어둠, 나쁜 것, 장방형)은 나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대립 쌍들로 이루어진 이분법적 원리들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한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그것들을 근원적 일자의 하위 개념들인 이차적 일자들의 조직을 지배하는 원리들로 해석할 때에만 비로소 파악되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짝수나 왼쪽, 여자 등과 같은 오른쪽 항의 것들은 이차적 일자들의 차원에서 홀수나 오른 쪽, 남자 등과 같은 왼쪽 항의 것들과 이분법적으로 대비되는 한에서만 나쁘다고 규정되는 것이지, 근원적 일자인 상위 개념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는 나쁘다고 규정되지 않는다. 즉 이때의 나쁘다는 형용사는 우주 전체의 질서와 조화를 거스르는 비규정적 성격을 공통치로 지니고 있다는 관점에서만 ‘질적으로 나쁘다’고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충전적 존재로서의 개별자 자체에 대해 규정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근원적 일자와의 연관 속에서 고찰되는 불완전하면서도 부분적인 존재로서의 개별자에 대해서 규정하는 차원에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시선이, 수많은 대립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전체적 조화와 로고스의 불변성을 읽어내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처럼, 그러한 대립된 원리들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그러한 원리들이 작용하여 얻어지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 속에 들어있는 숨어있는 조화에 대해서 훨씬 더 그 초점을 집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그의 근원적 일자는 수학적 일자라기보다, 만물 형성의 출발점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일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자는 2나 3과 같은 차원의 수가 아니라,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유출되고 다시 그것에로 되돌아가는 근원적 존재로서의 1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일자는 신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Apeiron)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일자가 일차적이며 미분화된 집단 영혼 또는 우주적 퓌시스이고, 수들은 분화 또는 떨어져 나옴(Apokrisis)의 과정을 거쳐 그것으로부터 산출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수들의 각각은 덧셈에 의해 구축된 단위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 자신이 좀 더 작은 집단 영혼의 일종으로 다양한 신비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자연이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오늘날의 수학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피타고라스의 수들은 1부터가 아니라, 2부터 시작된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콘포드와 같은 학자들이 ’피타고라스의 단일성의 원리‘를 어떤 형태상 '신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일자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신적 특성을 지닌 근원적 일자 개념을 고려해야만, 우리는 그의 수들이 왜 만물 구성의 질료인이자, 각각의 존재자들을 연결시켜주는 힘을 지닌 능동인으로 작용하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정삼각형수 내지 정방형수처럼 질량과 크기를 지닌 이러한 수들이 만물 형성의 질료인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는 쉬워도, 그것이 어떻게 능동인의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수 속에 생명적 운동의 또 다른 측면 즉 일자로부터 다에로의 그리고 빛으로부터 어둠에로의 創進的 운동(propodismos)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우리는 수들의 본성과 테트락튀스 속에 들어 있는 이러한 운동성을 수열의 진행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12: 8: 6이라는 조화로운 비례가 포함되어 있는 수열 속에서, 음악에 있어서의 8 음계, 5 음계, 4 음계의 비율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례들이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에 있어서는 만물 구성의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훗날 플라톤이 말하는 세계영혼의 테트락튀스에 들어있는 것들과 같은 두 종류의 진행 즉 1: 2: 4: 8의 진행 계열과 1: 3: 9: 27의 진행 계열이 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조화 사상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일한 근거에서, 우리는 피타고라스에 있어 왜 이 세계가 각각의 항을 그 앞의 항에 동일한 끈에 의해 연결시켜주는 로고스 또는 비례(1/2, 1/3) 즉 단일성의 원리에 의해 함께 짜여진 연속적 실체(continuous entity)라고 규정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수들이 근원적 일자를 닮은 각각의 고유한 수이자 동시에 그러한 다를 이루는 단위로서의 수들이고, 그러한 수들이 이와 같이 일정한 비율에 따라 다른 수들과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이러한 시선 속에서, 우리는 피타고라스가 어떻게 우주적 진화의 전 과정을 수열적 진행의 원리를 통해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일자는 자신으로부터 나와 다양성의 세계에로 이행하면서도 자신의 단일성을 상실하지 않으며, 다로부터 일자에로의 복귀는 모든 계열을 앞으로 그리고 뒤로 관통하며 이를 연결함으로써 ‘조화’를 만들어 내는 비례의 끈에 의해 보증을 받게 된다. 일자에서 다로, 그리고 다시 다에서 일자에로 이행을 하면서도 그 단일성을 잃지 않게 만들어 주는 바로 이러한 비례 속에서, 우리는 만물 창출의 또는 존재자들 간의 결합 방식을 지배하는 피타고라스적인 수학적 원리 내지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그의 수 체계 속에서 테트락튀스가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테트락튀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주적 조화(the cosmic harmony)와 동일시된다. ‘영원히 흐르는 자연의 샘(pege de aenau physeos)과 뿌리’를 내포하고 있는 테트락튀스는 네 개의 으뜸 수들로 구성된 것으로서 가장 완벽한(teleiotaton) 수이다. 우리는 10을 첫 번째 테트락튀스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수가 1, 2, 3, 4라는 네 개의 수들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것들이 이 첫 번째 테트락튀스의 비례에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우주는 조화(harmonia)에 따라 조직되어 있고(dioikeitai), 조화는 세 화음들(symphonia)의 구성체(analogiai)가 만들어 내는 수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피타고라스에 있어 통약 가능한 수 즉 어원에 따라 번역하자면 공통의(sym) 척도(metron)를 가질 수 있는 또는 공통의 비례에로 환원될 수 있는 수가 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모든 통약불가능한 수(Asymmetrike)들은 비례로 환원될 수 없는 수들이기 때문에 무리수(alogos)가 된다. 이때의 무리수는 현대 수학에서의 무리수와는 다른 것으로서, 페라스화가 불가능한 아페이론에 대한 표현 즉 일정한 비례로 환원되지 않는 기하학적 도형에 대한 산술적 표현이다. 어쨌든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정수로 즉 질서 내지 조화에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그들의 신념 체계에 그것에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심각한 모순이기 때문에, 무리수의 존재에 대한 공개적 발설은 철학적 신념 상으로나 종교적 믿음 상으로나 금지될 수밖에 없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초기 사상 속에 나타난 이러한 만물의 구성 요소로서의 수와 구성 원리로서의 조화력에 대한 사유는 비록 그 후에 발달하게 되는 소위 ‘기하학적 방법’(more geometrico)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후기에 나타나는 수 원자론은 한편으로 테트락튀스와 같은 특정의 수들에 부여하였던 존재론적 우위성을 박탈하고 모든 수들에 동일한 존재론적 가치성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수로부터 구체적인 질량의 특성을 사상시킴으로써, 형이상학적 시니피에를 지닌 수의 개념을 추상적 양이라는 수학적 시니피에를 지닌 수의 개념으로 변환시키고, 그 결과 현대적 의미에서의 추상적 수학 발달의 기초를 확립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전반적으로 피타고라스의 형이상학적 수 개념 속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개념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수에 관한 이론은 더 이상 발달시키지 못하고 단지 기하학에 관한 이론을 발달시키게 된다. 그들이 수론보다도 기하학을 훨씬 더 비약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연장성을 지닌 기하학적 도형 속에서는 정수 체계로 이루어진 수론 속에서 무리수의 존재 때문에 겪었던 형이상학적 불안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길이와 같은 구체적 선분 대신에 그러한 길이라는 특성만을 지닌 추상적 선분과 도형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고, 더 나아가 2차원적 공간 속에서 기하학적 탐구의 모든 과정에 대해 증명하는 방법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정다면체(정사면체, 정육면체, 정 12면체, 정20면체 등)를 만들어내는 방법, a2+b2=2ab로 표현되는 삼각형의 빗변을 내는 방법에 대한 증명은 그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
Ⅲ.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아르케로서의 수와 테트락튀스를 중심으로 하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초기 사상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위한 인식의 틀과 개념 체계의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어떠한 진리 발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었다. 그러한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이 바라보는 코스모스가 소우주로서의 인간이 닮을 수 있고 또 닮고자 하는 대우주로서의 자연이고, 그러한 코스모스는 일정한 비례와 질서에 따른 완벽한 조화체로서의 예지적 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에, 근원적 일자와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다로서의 일자들․ 아르케로서의 수․ 테트락튀스 등을 매트릭스(Matrix)적 개념 내지 원리로서 지니는 형이상학적 이론 체계에 의해 가장 잘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종교적 사유와 수학적 사유라는 이중 초점의 시선을 지닌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에 대한 이러한 지식 고고학적 탐구를 통해, 우리는 이제 질량과 신비한 힘을 지닌 수와 테트락튀스 때문에 겪었던 당황감으로부터 기존의 수학사적 내지 철학사적 연구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통하여 벗어나게 된 셈이다. 그러한 의아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갔던 야생적 사유의 숲 즉 인간의 지성이 세계 파악의 인식론적 그물망을 조금씩 짜 나가던 그리스 초기 자연 철학 시대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숲 속에서, 우리는 피타고라스 초기 사상이 우주를 단순히 우라노스가 아니라, 질서와 조화가 지배하는 코스모스로서 보고, 그것에 종교적 내지 학문적으로 합일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세계에 대한 예지적 내지 논리적 차원에서의 설명의 원형(Archetypus)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 속에서 바로 이러한 사유 방식의 원형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논리적 사유와 신화적 사유, 학문적 사유와 종교적 사유, 합리와 비합리가 완전히 대립자로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응적 관계를 맺으며 서로 접하고 있는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어, 그 두 종류의 영역이 지나치게 단절되어 있는 오늘날의 철학적 사유가 나아갈 방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후기 사상에 나오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수 개념을 통한 세계에 대한 설명 체계가 학문적 방법론의 발전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기여를 하게 되는지는 다음의 과제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