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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 편片씨

절강浙江 편片씨


시조 편갈송

절강 편씨의 시조인 편갈송片碣頌은 중국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자는 경수景修, 호는 모헌慕軒이다. 편갈송에 관한 역사는 조선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이르자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군사를 주어 돕도록 했다. 이때 편갈송은 이여송의 막료로 ‘동정명군총병사東征明軍摠兵使’가 되어 참전해 평양성 공략에 공을 세우고 개선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양호楊鎬 장군의 막료로 ‘제독군문섭병부상서중군제독提督軍門攝兵部尙書中軍都督’이 되어 재출정하여 직산稷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 승첩은 왜적의 서울 공략 야욕을 분쇄하는 중대한 계기였다. 편갈송은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마지막 보루인 울산 서생포의 왜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왜적을 이 나라에서 완전히 철수시켰다. 그 후 정응태丁應泰의 무고로 양호가 현지 파면되자 귀국하지 못하고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은거하였다. 그에게는 명나라에 두고 온 풍세豊世, 풍원豊源, 산보山甫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버지가 출병한 후 무고로 귀국 못함을 알자 가산을 정리,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우리들만 평안하게 모국에서 영화를 누리고 산다는 건 자식 된 도리가 아니다.’ 아들 3형제는 이렇게 결의하고 조선으로 나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금오산에 아버지가 은거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3형제가 그곳을 찾았을 때 편갈송은 이미 노환으로 세상을 뜬 뒤였다. 그들은 3년 동안 시묘를 하고 나서 의논 끝에 아버지의 뼈가 묻힌 조선 땅에 살기로 작정했다.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라도 나주羅州로, 편산보는 전라도 김제의 만경을 거쳐 영광靈光에 터전을 잡았다. 편갈송은 울산 서생포西生浦 창표당蒼表堂에 배향되었으며, 200여 년이 지나 공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전라도 유림의 계청啓請으로 나주羅州에 감명사感明祠를 세워 공을 기렸다. 충청도 직산면 소사평과 울산 서생포에 ‘동정승첩비東征勝捷碑’가 세워졌으나 일제 때 파손돼 현존하지 못한다.

편씨는 원래 당나라 황족으로 이李씨였다

편씨 성이 처음 생겨난 것은 1443년 명나라 영종英宗 8년이었다. 편씨의 원래 성은 당나라 종실宗室에서 나온 이李씨였다. 편씨 족보에 의하면 편갈송의 증조 할아버지는 명나라 조정에서 한림원학사 벼슬을 했던 이지李址로 되어 있다. 이지는 주자의 스승인 이통李侗 선생의 9세손이다. 당시 세자인 영종이 궁인 원袁씨를 총애하던 중 즉위하자 원씨는 황후의 꿈을 갖고 신하들을 포섭, 황제에게 접근했다. 이지는 임금께 ‘정실을 황후로 맞는 게 천리에 마땅하다.’고 극간, 처음엔 노여움을 샀으나 끝끝내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영종은 그의 충절을 높이 치하, 일편단심一片丹心의 편片 자를 사성賜姓하고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제수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편일片鎰이 절강백浙江伯에 봉해짐으로써 오늘날 편씨들은 그들의 본관을 절강으로 삼게 되었다. 

의병장 편성대의 활약

편갈송의 아들 편풍원이 중국에서 나올 때 부인 이씨를 데리고 나왔으나 형 풍세는 혼자였다. 그는 조선에서 오천烏川 정鄭씨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이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편성대片成大다. 편성대의 자는 형복亨福, 호는 은림隱林이다. 1605년 전남 나주군 곡강면 내동에서 태어났다. 성대는 얼굴이 백옥처럼 희고 준수한 데다 기골이 장대했다. 열다섯 살 때 화순和順에 사는 안동 김씨를 아내로 맞아들여 처가인 화순으로 이사를 했다. 화순에서 고향인 나주 내동까지는 1백여 리, 그는 이사를 간 뒤 매일 새벽 백마를 타고 나는 듯 달려 부모님 묘소에 인사를 드렸다. 기골이 장대한 헌헌장부가 백마에 높이 올라 거리를 질주하는 걸 보고 화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片 한량’이라고 불렀다. 당시 화순현和順縣에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 조수성曺守誠이 살고 있었다. 그는 편성대보다 35세가 위인 선비로 일대에서 추앙을 받고 있었다. 나주에서 태어난 편성대가 화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수성과 손을 잡게 된 인연은 다음과 같다. 청 태종이 10만군을 이끌고 서울에 육박한 것이 인조 14년. 정묘호란 뒤 9년 만에 다시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해 갈 시간조차 없어 남한산성으로 올라갔고 각지에 글을 내려 의병을 촉구했다. 화순 선비 조수성이 격문을 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온 게 편성대였다. 그의 직책은 독전군관督戰軍官 겸 훈련대장이었다. 편성대의 의병 일행은 청주에 도착, 청병淸兵의 배후를 기습해 적병 아홉을 베었다. 계속 진격 중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의거 한 달 만이었다. 의분을 못 이겨 자결을 하려다 주위의 만류로 미수에 그치고 ‘대명일월大明日月’을 좌우명 삼아 69세에 일기를 마치니, 나라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했다. 당시 사촌동생 영표(편풍원의 아들)는 “하늘을 차마 볼 수 없다. 어찌 원수들과 한 하늘 아래 살겠는가.” 하고 칼로 할복자살하였다. 그에게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추증되었다. 한편 시조의 첫째 아들 편풍세는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편강렬의 일편단심

편씨의 문혼門魂인 일편단심은 일제 치하의 조국 광복에 젊음을 사른 애사愛史 편강렬片康烈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에서 편상훈片相薰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이강년李康年 남도南道 의병 대장의 휘하에 들어가 17세에 선봉장이 되어 서울로 진격 중 양주楊州에서 왜적과 접전, 부상했다. 1911년 평양 숭실학교 재학 때는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 모살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소위 유동열·윤치호·양기탁 등이 관련되었던 ‘1백5인 사건’이다. 1912년 ‘1백5인 사건’에서 풀려나자 강렬은 선고향先故鄕인 금릉군金陵郡(김천의 옛 지명)으로 내려가 인근 청장년 30명을 모아 항일 사상을 가르치는 한편 무술을 연마했다. 이미 고인이 된 항일 독립 유공자 편덕렬片德烈씨(강렬의 동생)의 생전 진술에 따르면 강렬은 8척 장신에 얼굴이 말보다 길었고 힘세기로는 싸우는 두 마리 소 사이에 들어가 소를 떼어 내 말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 냇물을 건널 때 한 팔을 펴서 네 사람을 매달리게 해 건네주었으며 거구인데도 가볍게 초가지붕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월산九月山을 무대로 독립군을 규합하다 일경에 붙잡혀 1년 반을 복역한 그는 다시 중국으로 떠나 산해관에서 양기탁, 남정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했다. 요즘의 특전 게릴라인 셈이다. 편강렬은 중국 내 모든 단체를 합쳐 일대 항일군을 편성하려고 동분서주하다 김성근의 밀고로 1924년 하얼빈(Harbin, 哈爾濱)에서 잡혀 7년 형을 선고받는다. 반역자 김은 이범석 장군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다. 신의주에서 복역 중 병으로 보석, 선천 미동병원에서 1년 반을 치료받다 끝내 안동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숨을 거두었다.
“내 죽거든 만주 땅에 묻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국내 이장을 말라” 이는 37세를 일기로 순국한 편강렬의 유언이었다. 지금도 그의 유해는 만주 땅 안동현 진강산 기슭 장군봉에 묻힌 채 광복 후 국내로 이장하려던 뜻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현대 인물들

“우리들의 관적貫籍은 절강이지만 진정한 본향은 경주입니다. 이 땅 위에서 400년 가까이 살았고 시조의 영원한 유택이 경주 금오산에 있기 때문이지요.” 편홍기 전 「명의회明義會」 회장의 말이다. 「명의회」는 임진·정유재란 때 참전했던 중국 명나라의 동원東援 장군들의 후예 중 우리나라에 귀화해 정착한 자손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만든 단체다. 현재 「명의회」에 속한 귀화 성은 소주蘇州 가賈씨, 광주廣州 동董씨, 두릉杜陵 두杜씨, 상곡上谷 마馬씨, 절강浙江 서徐씨, 해주海州 석石씨, 절강 시柴씨, 제남濟南 왕王씨, 농서隴西 이李씨, 절강浙江 장張씨, 광동廣東 진陳씨, 절강 편片씨, 보양普陽 화化씨, 광녕廣寧 고高씨 등 아주 희귀한 25개 성씨들이다. 「명의회」의 기원은 조선 숙종 30년에 창덕궁 비원 안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명나라 고황제高皇帝, 신종神宗, 의종毅宗 황제를 제사하여 받든 것이 시초다. 그때 숙종은 임진·정유재란 때 참전했던 명 장군의 후예로서 귀화한 후손들을 불러 모아 함께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이를 계기로 후손들의 유대감이 형성된 것이다. 「명의회」는 이러한 선대의 정신을 자손들에게까지 이어 주는 뜻에서 1981년 5월 30일 설립되었다. 

현대 인물들을 살펴보면 편영완 씨는 서울고법 판사, 서울지법 부장판사를 거친 재야 법조계의 중진이다. 편정희 씨(한국성인복지시설협회장)는 우리나라 의정 사상 몇 안 되는 여성 의원(8대, 전 공화당)으로 ‘여성경제인협회’를 조직, 여권 신장에 힘을 쏟기도 했다. 육군 장성인 편동수 씨는 무장武將을 시조로 하는 편씨 문중에서 400년 만에 탄생된 장군이다. 그 밖에 편중렬(금산향교장의), 편재열(금천주조협회장), 편선자(서산군 영항국민학교장), 편재구(사법서사), 편재룡(인쇄업·대구화수회장), 편무실(명지대학 공과장), 편용낙(광명수지공업사장), 편인범(단국대 상경대학 교수), 편일자(서일개발 대표), 편송언(삼성전자 이사), 편도권(대자개발 전무), 편정조(공학박사, 미국원자력연구소), 편장원(육군 대령), 편부만(평통자문위원) 등이 있다.(전·현직 구분 안됨)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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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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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 순흥順興 안安씨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순흥 안씨는 성씨 별 인구 순위에서 14만 5254가구에 46만 8827명으로 평산 신씨에 이어 15위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안씨


안씨의 연원

문헌에 전하는 안씨는 모두 109본이다. 이 중 현존하는 주요 본관은 순흥順興, 죽산竹山, 광주廣州, 강진康津, 탐진耽津, 신죽산新竹山, 경주慶州, 안동安東, 수원水源, 평안平安, 순천順天, 공산公山, 태원太原 등 41개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순흥, 죽산, 광주, 탐진 안씨이다. 안씨의 뿌리에 대해 순흥, 광주, 죽산 안씨 측에서 각각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당나라의 농서 이씨가 동쪽으로 건너와 안씨가 되었다는 설과 고려 조에서 사성賜姓받은 우리나라의 토성土姓이 안씨라는 설이 그것이다. 광주廣州 안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 광주지방의 관리였던 안방걸安邦傑이다. 광주의 어떤 사람이 지방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대장군에 올라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성씨를 갖게 된 유래는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지방 호족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에 따라 안씨 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순흥 안씨에서 신죽산 안씨와 탐진 안씨가 분관되었다. 신죽산新竹山 안씨는 순흥 안씨 안자미安子美의 7세손 안원형安元衡이 시조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죽산(죽성)은 현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다. 안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19만 7668가구에 총 63만 77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중 순흥 안씨는 전체 안씨의 73.5%에 달한다.

시조 안자미

순흥 안씨의 시조는 휘가 자미子美이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으로 삼게 되었다. 부인에 대한 기록은 실전하여 알지 못한다. 묘소는 소백산小白山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비석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다. 1654년에 후손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이 의성현감義城縣監에 부임하였다가, 시조의 제사가 단절되고 선조들의 유적이 민멸된 것을 보고 경향의 종친들의 협력을 받아, 순흥 평리촌坪里村[현 석교리石橋里 203번지]을 고택유지古宅遺址로 추정하고, 시조공과 아들 태사공(太師公=휘 부孚)의 제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이후 1988년에 순흥 읍내리 비봉산 아래에 새로이 추원단追遠壇을 조성하여 이설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전국의 후손 2천여 명이 참배하고 세사를 올린다.

순흥의 역사

순흥은 한때는 남순북송(南順北松 남쪽에 순흥, 북쪽에 송도)이란 명예를 누렸던 번성했던 곳이었다.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소수서원^벽화고분^사찰^성지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유적들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또 ‘원단촌院壇村’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원단은 소수서원의 원院과 만고충절의 상징처인 성인단成仁壇(금성단의 단소 이름)의 단을 합친 이름으로 문충文忠의 고장이라는 뜻이다. 순흥은 고구려 시대에는 급벌산군及伐山郡이라 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6) 때 좌대야성 도독하장 죽죽左大野城 都督下將 竹竹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소백산 중턱을 넘는 도로를 개통하고 고개이름을 죽령竹領이라 하고 소백산에서 순흥, 풍기豊基로 흐르는 물을 죽계竹溪라 하였는데 여기서 순흥의 별호를 죽계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라가 점령한 후 35대 경덕왕 때(742~746)에는 급산군岌山郡이라고 고쳤다. 고려초에는 흥주興州라고 불렀다. 조선조 3대 태종 13년(1413)에는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승격시키고 별호別號를 순정順政이라 하였다. 조선조 7대 세조 3년(1457)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모의사건 이후 부를 폐하여 풍기군豊基郡에 소속시키고 각 면面을 마아령馬兒嶺과 문주산文珠山에서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나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분할시켜 놓았다. 조선조 19대 숙종 9년(1683)에 순흥부順興府로 복원되었고 조선조 28대 고종 32년(1895)에는 순흥군郡이 되었다. 1914년에 군을 폐하고 화천면花川面, 수민단면壽民丹面, 수식면水息面은 봉화군奉化郡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영주군榮州郡으로 들어갔다. 그 후 영주가 시市로 승격됨에 따라 시에서 제외된 지역과 풍기군을 합하여 영풍군榮豊郡이 되므로 여기에 순흥면이 속해졌다. 현재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주시 순흥면이 되었다. 

성씨의 변천과정


3파로 분파된 순흥 안씨

시조 안자미는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이며 이를 각각 1파 추밀공파樞密公派, 2파 별장공파別將公派, 3파 교서공파校書公派라 부른다. 다시 영유의 후손에 14개파, 영린의 후손에 4개파, 영화의 후손에 4개파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종가는 서울 도동에 있다가 다시 이북 연백으로 옮겨졌다. 특히 관향지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1파인 추밀공파 순흥 안씨는 시조의 증손인 안향安珦이 크게 현달하여 가문이 번창했다. 안향은 경기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 안우기安于器는 찬성贊成을 지냈고, 손자 안목安牧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또 안목의 후손에서 탐진 안씨와 신죽산 안씨가 분관되어 나갔다. 

제2파인 별장공파 순흥 안씨는 안영린의 후손으로 안문개安文凱가 유명하다. 그는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첨의참리가 되고 순흥부원군이라는 호를 받았다. 충혜왕 때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 등 33인과 함께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3파인 교서공파 순흥 안씨는 안영화의 후손으로 충숙왕 때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한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유명하다. 충혜왕 때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으며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주요 인물들

순흥 안씨는 시조 안자미의 증손인 안향安珦 이후 크게 일어나 11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20명이 봉군封君되었으며, 17명에 달하는 문형(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그래서 조선조에서는 김, 이, 박씨 등과 함께 6대 성씨의 하나로 인정되는 성씨였다. 11대에 걸쳐 과거급제를 한 사람은 안향安珦-안우기安于器-안목安牧-안원숭安元崇-안원安瑗-안종약安從約-안구安玖-안지귀安知歸-안호安瑚-안처선安處善-안정安珽이 그들이다. 또 6세 안축安軸, 7세 안종원, 8세 안경공, 9세 안순安純, 10세 안숭선安崇善 등 5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안향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렬왕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유학의 학풍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백이정白頤正과 우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으로 이어졌다. 또 이색의 문하에서 권근權近이 나와 조선조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되고 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아들 안우기는 찬성을 지냈고, 손자 안목은 정당문학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안침安琛, 안당安瑭과 안위安瑋, 안현安玹, 안상安瑺 등이 유명하다.

안침安琛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전라도 관찰사와 한성부윤, 대사헌,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5형제도 모두 현달하였다. 안당安瑭은 성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한 뒤 중종 때 형조·공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나,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처형당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안위安瑋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 안현安玹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명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안상安瑺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선조 때 거문고, 비파, 장고의 악보를 망라하여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발간하였다. 

교서공파에서는 고려 말의 명신 안축安軸, 안보安輔, 안집安輯의 3형제가 유명하다. 안축安軸은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고,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춘추관감사春秋館監事가 되어 충렬, 충선, 충숙왕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안보安輔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안집安輯은 밀직密直을 지냈는데, 3형제 중 안축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安宗源은 조선 개국 후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오르고,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安景恭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다. 안경공의 아들 안순安純과 손자 안숭선安崇善, 안숭효安崇孝도 명신으로 유명하며, 안숭선의 현손으로 안자유安自裕, 안명세安名世 등이 뛰어났다.

안천보安天保는 시조공(안자미)의 7세이고 양정공의 차남으로서, 자는 정지이고, 시호는 소의공昭懿公이다. 1365년(공민왕 때) 별장이 된 후 전객부령 등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전서에 올랐으며 고려가 망하자 16년 동안 독서와 거문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408년 조선조 태종의 부름을 받아 검교 한성윤, 검교찬성을 지내고, 1425년(세종 7년)에는 광록대부 좌의정 자리에 올랐다. 공은 본래 마음가짐이 곧고 충성스러웠으며 왕실의 인척이 됨에 이르러서는 더욱 행동과 처신을 삼가시어 교만한 빛이 전혀 없었다. 병환에 계실 때 아드님이 약 탕관을 올리니 “인생 80이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을 먹어 무엇하겠는가” 하고 소연히 87세에 돌아가셨다. 이 소식을 듣고 궁중에서는 3일간 궁중사무를 폐하고 시호를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답다 하여 소昭라 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하여 소의공昭懿公으로 내렸다.

그 외 시호를 받은 선조가 32명에 이르며, 그중 문文자 시호를 받은 이가 17명이다. 순흥 안씨에서 배출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641명이나 된다. 문과에 121명이며, 무과에 91명, 사마시에 327명, 역과에 42명, 의과에 24명, 음양과에 26명, 율과에 9명, 주학에 1명이다. 

순흥 안씨 근·현대 인물


순흥 안씨에서는 근·현대 인물로 독립운동가와 정치가 등이 특히 많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안중근安重根, 안병찬安秉瓚(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함), 안승우安承禹(충주의 황강 싸움에서 전사),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안익태安益泰(애국가 작곡), 백산 안희제安熙濟, 안재홍安在鴻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도산 안창호安昌浩는 독립협회에 가입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해 흥사단을 설립했다. 59년 일생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고 끝내 침략자의 형벌에 순국했다. 

안중근安重根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선천에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안명근安明根이 그의 사촌동생이다. 안중근,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가 순흥 안씨 집안에 가한 탄압 역시 순흥 안씨의 수난사 중 일부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의 순흥 안씨 가문은 백범 김구와 깊이 얽혀 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백범 김구를 숨겨주었고, 안중근의 친척인 안미생은 김구의 며느리이다. 하지만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도 순흥 안씨 가문이다.

현대 인물로는 종교계에 증산도의 2변과 3변을 개창하신 안운산安雲山 태상종도사太上宗道師가 계신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1922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유소 시절부터 보천교普天敎를 신앙하시던 부친의 영향으로 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접하게 되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태상종도사님은 혈혈단신 세상에 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선포하셨다. 이때 전국을 누비며 초인적인 열정으로 수십만을 포교하시어 증산도 제2변의 부흥을 열어놓으셨다. 1950년 6.25 동란이 터지면서 전쟁의 참화로 교단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라 대휴계기大休契期를 선포하시고, 대전에서 은신하셨다. 그후 1974년 아드님이신 안경전 현現 증산도 종도사와 함께 대전에서 증산도 제3변의 서막을 여셨다. 현재 전세계의 일꾼들이 증산도에 모여들어 후천 5만년 새 역사의 장을 크게 열고 있다. 태상종도사님은 지구촌 통일경전인 『도전』편찬, 전국 도장 순방, 태을궁 건축, 상생방송 개국 등 일꾼 양육과 증산도 세계화의 기틀을 놓으시고 2012년 등천登天하셨다.

정관계의 인물로는 안경모(교통부장관), 안응모(내무부장관), 안동혁(상공부장관), 안동일, 안동준, 안동선, 안갑준, 안종열, 안교덕, 안상수, 안철수(이상 국회의원), 안춘생, 안필준(예비역육군중장), 안철호(육군소장), 안우만(서울지법 부장판사)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안세희(연세대총장), 안병욱(숭전대교수), 안상원(건국대교육대학원장), 안림(성균관대교수), 안인희(이화여대교수)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안영모(한일은행장), 안철환(대한통운대표이사사장), 안상국(동서증권㈜대표이사회장), 안정식(세방기업㈜사장), 안영철(한국화학사장), 안영승(정우개발대표), 안원종(동진산업회장), 안인혁(한국바이엘약품회장), 안세영(대전일보사장) 등이 있다(무순, 전·현직 구분 없음). 이 외 영화배우 안성기, 가수 토니안(본명 안승호), 러시아에 귀화한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선수인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등도 순흥 안씨이다. 




안씨의 연원

죽산 안씨들은 1999년 발간한 죽산 안씨 대동보를 통해 광주, 순흥, 죽산 안씨가 한 뿌리라고 주장한다. 당나라 농서인 이원이 동래함으로서 우리나라의 안씨가 출발했다고 한다. 족보의 내용을 보면 ‘죽산 안씨 동원보에 이르기를 휘 이원李瑗 공은 중국 농서인隴西人으로 당헌종 원화元和 2년 신라 애장왕 8년 정해에 동생 이황 공과 같이 우리나라의 개성에 있는 송악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이 때 광주인廣州人이 그 성주를 죽이는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평할 때 형제분이 몸을 던져 이들과 맞서 용감히 싸워 이를 평정하였다. 이에 국왕이 두 형제분의 혁혁한 전공을 높이 치하하시며 나라를 평안히 하였다고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말씀하시고 형인 원공에게 안씨 성을 내리시고 동생 황에게는 본성을 지키라고 하시며 이씨 성을 그대로 하고 고성군固城郡에 봉하시었다(고성 이씨 시조-편집자 주). 원 공에게 세 아들, 맏이 지춘枝春, 둘째 엽춘葉春, 셋째 화춘花春 공이 계시니 신라 경문왕 4년(서기 864) 갑신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전기 삼형제 분들이 출정하여 이를 평난하시었다. 이에 국왕이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고 기뻐하시며 삼형제를 가리켜 안국지신이라 칭찬하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며 아울러 봉군封君 하시니 맏이 지춘 공을 방준邦俊으로 죽산군에 봉하시고 둘째 엽춘 공을 방걸邦傑로 광주군에 봉하시고, 셋째 화춘 공을 방협邦俠으로 죽성군에 봉하시니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안씨가 시작되었다.’ 죽산 안씨 측에서는 방걸의 11세손이 순흥 안씨의 시조 안자미라고 주장한다. 또 고성 이씨와 안씨는 동근同根 이성異姓의 한 종족이 된다. 이러한 죽산 안씨 측의 주장을 순흥 안씨와 광주 안씨에서는 속설俗說이라며 공식적으로는 인정치 않고 있다. 지난 2011년 죽산 안씨는 도시조都始祖 이원의 선계先系에 대해 ‘이원이 당나라 종실 이기李錡의 동생이며 이국정李國貞의 아들’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파기하고 미확인 상태로 두었다. 당나라 종실 세계표에는 이국정의 아들로 이원이나 이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은 북방 선비족 출신이다. 선비족의 발상지는 대선비산(대흥안령 산맥) 일대로 이들은 고조선의 후예들이다. 만약 이원이 선비족의 이李씨였다면 동방 한민족의 정통 혈통이라 볼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씨 성을 쓴 사람은 노자老子이다. ‘동방의 아들’임을 내세우기 위해 목자木子인 이씨 성을 썼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노자 이이李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 이름이 건乾이고 그 선조는 풍이족風夷族 사람(耳父의 姓은 韓이오 名은 乾이니 其先은 風人)’이라고 한다. 안씨의 연원이 이씨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 한씨, 풍씨에서 나왔음을 추론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참고로 태호 복희씨가 성을 풍으로 하여 인류 최초로 성씨를 가졌고 후에 풍씨는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庖, 이理, 사姒, 팽彭의 여덟 성씨로 갈라졌다 한다. 안씨의 뿌리는 앞으로 더 밝히고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순흥 안씨 수난사

정축지변丁丑之變(단종 복위운동)
1457년 6월 21일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오자 이때 영남의 순흥도호부에서는 이미 귀양 와 있던 세종대왕의 여섯째 왕자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이보흠李甫欽 부사府使가 뜻있는 동지들을 모아 단종 복위 모의를 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안동도호부의 감옥으로 이송되고, 이 부사는 박천으로 유배되어 후일 모두 죽었다. 이 사건으로 토호 안씨安氏를 위시하여 수백의 부민들이 참살되었다고 전한다. 순흥도호부는 8월 2일에 혁파革罷되어 관아는 불타 폐허화되었다. 이때 죽계수竹溪水가 혈루血淚로 변하여 영천의 제민루濟民樓까지 흘러내렸다고 한다. 순흥부는 풍기, 영천, 단양, 봉화, 영월 등에 분할 귀속되었다. 이 정축년의 변란으로 11세世~12세世의 수많은 안씨들이 관향에 살다가 무참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살육당하였고 남은 자손들은 뿔뿔히 흩어져야 했다. 순흥 거사 이후 숙종 37년(1711)에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왕의 윤허를 얻어 순흥에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금성대군과 이보흠 부사 그리고 당시 순절한 이름 없는 모든 충의열사들을 함께 모시게 된 지금의 금성단이다. 

신사무옥辛巳誣獄 의 변
기묘사화가 있은 지 2년 뒤인 1521년(중종 16년)에 소위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났다. 안당安瑭의 아들 처겸處謙은 이정숙李正淑, 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은 처형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에 따라 처겸^처근處謹 형제 외에 권전, 이충건, 이약수 등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피해를 입은 안씨를 보면 안정安珽, 안찬安瓚, 안경우安景祐, 안숭복安崇福, 안처순安處順 등이다. 신사무옥으로 순흥 안씨는 금성대군사건 다음가는 큰 수난을 겪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안씨들이 낙향 또는 은거隱居의 길을 밟게 되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변
을사사화 이래 5~6년간 비명횡사한 이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안명세安名世(14세손)는 사관으로서 을사사화의 자세한 전말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시정기時政記(당대 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로서 실록을 편찬하는 기본 자료)에 적어 넣었는데, 여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 등 3대신이 살해당한 것은 크나큰 불행이라는 지적과 함께 이기와 정순붕의 농간으로 무고한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한 사실과 이를 찬반贊反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기는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했는데, 그 때 안명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안명세가 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었다. ‘역적들의 편을 들어 사초史草를 바로 쓰지 않았다.’ 며 국문을 당하는 중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 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많은 순흥 안씨들이 낙향하여 몸을 숨기게 되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참고사이트〉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http://blog.naver.com/tlfdksro7)
순흥 안씨 대종회(http://www.shah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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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 인동仁同(옥산玉山) 장張씨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인동 장씨는 성씨 별 인구 순위에서 18만 4863가구에 59만 1315명으로 안동 권씨에 이어 13위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장씨


장씨의 연원

우리나라의 장씨는 크게 세 종족으로 나뉜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태사공 장정필을 시조로 하는 안동 장씨와 장경을 시조로 하는 흥성 장씨 일족과 장금용, 장계를 시조로 하는 인동 장씨 일족이다. 안동 장씨의 시조 장정필은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신라 말에 중국에서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들어온 장씨로는 덕수德水 장씨(시조 장순용張舜龍), 절강浙江 장씨(시조 장해빈張海濱)가 있다. 장순용은 회회계(아랍계)의 사람으로 고려 고종 때에 귀화하였고 장해빈은 중국 항주 조강현 출신으로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에 장수로 와서 군위軍威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그 외 대부분의 장씨는 인동 장씨와 안동 장씨에서 분적하였다. 장張씨의 본관은 문헌상 270여 본이 전하나 현존하는 것은 20여 본이다. 그런데 최근에 장씨의 연원을 추정해볼 수 있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등장했다. 서울대 사학과 송기호 교수가 「발해국지渤海國志」와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를 비롯하여 각종 사료와 외교문서에 남아있는 대진국(발해) 지배층의 성씨를 조사, 분석해 뽑은 적이 있다. 그 결과 조사대상 380명 중 왕족인 대大씨가 117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고高씨가 63명, 이李씨가 21명, 장張씨가 20명이고, 기타 성씨가 134명이었다. 이중 확실히 밝혀진 유력한 귀족 성씨는 고高씨, 이李씨, 장張씨, 양楊씨, 두竇씨, 오烏씨였다(KBS역사스페설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2005년 11월 25일 방영). 대진국은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 만큼 장씨가 적어도 고구려 시대부터 나라의 대성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장정필 이전에도 장씨가 존재했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백제의 장무張茂, 대진국의 장문휴張文休 장군, 신라의 장웅張雄, 장보고張保皐, 고려의 장일張一 등이다. 이제 장씨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약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인동의 장씨들

인동 장씨는 범 장씨계의 65%를 차지한다. 수로나 명성으로나 단연 장씨의 대표격이다. 인동에서 결성, 울진 등 20여 본이 분적해 본관을 따로 쓰고 있으나 크게는 역시 인장仁張이다. 분적한 집안에서도 일부는 그대로 인동을 본관으로 쓰기도 한다. 현재 인동을 본으로 하는 장씨는 현재 6개 파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시조를 모시고 있어 뿌리가 같은 집안이라 단정할 수 없다. 이중 대표적인 문중은 인동 장씨 장금용파와 인동 장씨 장계파이다. 보통 인동 장씨라 하면 이 2파를 통칭하는 것이다. 

1)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 계 시조는 고려 초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이다. 시조 장금용이 인동에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8대를 내려온다. 한때는 이웃인 칠곡漆谷·선산善山 등지에 이르기까지 2000여 호를 헤아릴 정도로 번창한 마을을 형성하였다. 1977년 구미공단의 개발로 구미시가 발족, 인동동으로 편입되면서 급속히 해체되는 변모를 겪게 되었다.

2)직제학直提學 장계張桂 계 고려 충렬왕 때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른 장계張桂를 시조로 한다. 장계는 고려 태사공 장정필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는데, 옥산玉山과 연복延福은 인동의 다른 이름이다.

3)문충공文忠公 장계임張繼任 계 고려 충렬왕 때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하고 후에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정승, 춘추관사春秋舘事의 증직이 내린 문충공 장계임을 시조로 한다. 이는 문충공의 8세손 문숙공文肅公 장순손張順孫이 중종 17년(1522) 병조판서 때 그 아버지 증좌찬성贈左贊成 장중지張重智와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 고씨의 묘비문에 첫 선조로 기록한 것에서 유래한다.

4)장수명張壽命 계 장정필의 장손 장금선張錦善의 후손 장수명張壽命이 시조이다. 본관을 안동과 인동으로 쓰는데 함경도의 함흥과 영흥, 북청지방北靑地方에 사는 장씨張氏는 옥산장씨로 족보를 해오다가 뒤에 인동으로 개관改貫하였다.

5)흥성장씨興城張氏 장연좌張延佐 계 흥성장씨 시조인 시랑侍郞 장유張儒의 둘째아들 호부상서戶部尙書 장연좌張延佐가 시조다. 장연좌가 옥산군에 봉封 해졌다하여 옥산 장씨라 하다가 관적貫籍을 인동으로 하였다고 한다. 흥성 장씨와 족보를 같이하고 있다.

6)예빈경禮賓卿 장용서張龍瑞 계 고려말 예빈경 장용서(張龍瑞 혹은 用瑞)계의 인동 장씨는 과거 황해도 장연張淵과 주로 북한의 평안도에 많이 살았다. 8.15 해방 후 월남하였으며 본관을 옥산玉山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인동仁同으로 많이 쓴다.

인동仁同의 역사

인동仁同은 본래 신라 때 사동화현斯同火縣이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서기 739)에 수동壽同으로 개칭하고 성산군星山郡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 주군현州郡縣 개편시 인동현仁同縣으로 개칭하고 8대 현종 9년(1018)에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2년(1390)에 경산부에서 분리되어 인동에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 전국의 감무를 혁파할 때 인동현仁同縣으로 하여 현감縣監을 두었다. 선조 34년(1601) 찰리사察理使 곽재우 장군이 인동 천생산天生山의 성곽을 수축하여 국방의 요새로 부각됨에 따라 선조 37년(1604) 7월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고종 32년(1895) 5월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인동도호부를 인동군仁同郡으로 개칭하면서 읍내면邑內面과 북면北面, 동면東面, 장곡면長谷面, 문량면文良面, 석적면石赤面, 북삼면北三面, 약목면若木面, 기산면岐山面 등 9개의 면을 관할하게 했다. 1914년 한일병탄 후 3월 1일 인동군을 폐지하여 칠곡군에 편입켰고, 그해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합쳐서 인동면仁同面으로 개편하였다. 인동면은 1977년 3월 2일 경상북도 구미지역출장소의 행정관할로 되었다가 1978년 2월 15일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 종전 인동면의 인의동仁義洞과 황상동黃桑洞, 구평동九坪洞, 신동新洞의 4개 동을 합쳐서 행정동인 인동동仁同洞으로 하였다. 따라서 인동면은 신라때부터 칠곡군에 병합될 때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관아의 소재지였다. 1914년부터 1977년 구미시에 편입 직전까지는 63년 동안 인동면사무소를 현재의 인의동에 두었다. 현재 인의동에는 인동 장씨 종가가 자리잡고 있는데 시조 장금용이 터 잡은 뒤 1,000년 이상 종손들이 그대로 보전하고, 중수, 보수를 하여 현재까지도 종손들과 종친들이 물려받아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인동의 이칭異稱으로 쓰이는 옥산玉山은 인동동에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사동화’, ‘수동’과 함께 ‘옥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옥산은 현의 동쪽 50보步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산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옥산은 천생산에서 뻗어 나와 주산主山을 이룬다.”라는 기록이 있어 옥산이 인동도호부의 주산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동 장씨 문중에서는 지금도 본관을 옥산과 인동을 혼용해서 쓰고 있다. 

성씨의 변천 과정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 계

장금용 장금용을 시조로 삼는 문헌적 근거는 조선 선조 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기술한 「여헌록旅軒錄」이다. 여헌이 “인동 장씨의 시조는 대광공 장금용(所及知最先之祖大匡公)”이라 하고 “대광공의 부와 조부가 누구인지, 그 이상의 조상이 있었는지 세계가 전해오지 않아 알 수 없다(其上所未及知考又幾許代乎)”라고 하였다. 장금용은 고려 때 개국공신 삼중대광三重大匡(정일품의 품계)에 올라 신호위神號衛(국방을 맡은 대위중의 하나) 상장군上將軍(정삼품의 무관직으로 각 군영의 수직)을 역임했다. 전체 25개 파가 있는데 인동 향내 지명을 파명派名으로 하는 5개 파와 타 지역 명을 파명으로 20개 파로 나뉜다. 조선시대에는 정승 1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55명을 배출하였다. 14세손 장보張俌의 자손들까지는 인동·성주 등지에 살다가 18세 이후로는 예산·진주·하동·원주·상주·무안·은진·공주·서천 등지로 흩어졌다. 

주요 인물 장금용의 아들 장선張善은 고려 문종 26년 반란을 토벌한 공으로 금오위金吾衛(수도 개경을 순찰, 점검하는 경찰 임무를 맡음) 상장군에 올라 인동을 세거지로 삼았다. 장금용의 증손이며, 봉정대부奉正大夫 내사령內史令을 거쳐 직사관直史館을 지낸 장국신張國伸이 있고, 통의대부通議大夫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에 오른 장위張偉가 가세를 일으켰다. 또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린 절신節臣으로 유명한 장안세張安世와 장중양張中陽 부자가 있다. 장안세는 직제학을 역임한 장계와 함께 활동한 인물로 덕령부윤을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절개로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의 한 명이다. 장중양도 친구였던 태조 이성계가 한성좌윤漢城左尹의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뿌리치고 ‘내가 죽은 뒤 고려조의 벼슬을 묘비에 써달라’고 유언했다. 

조선조에서는 임진왜란 때 군위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장사진張士珍, 성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장봉한張鳳翰,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의병으로 24세의 나이로 순절한 장홍한張鴻翰 등이 있다. 문무를 겸비하여 이괄의 난을 평정한 팔도도원수 장만張晩, 이인좌의 난에 공을 세우고 형조판서를 역임한 장붕익張鵬翼 등 인동 장씨는 문무에서 골고루 인물들을 배출했다. 학문에서 인장을 대표하는 인물은 조선조 중엽의 대大성리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있다. 장현광은 장안세의 후손으로 선조 28년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이 되었으나 곧 물러난 뒤, 이조판서, 대사헌 등 20여 차례 벼슬 제수도 거부하고 인동 향리에서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였다. 그는 퇴계학파의 거두로 정구鄭逑의 문인이자 조카 사위로 인조 때는 왕의 부름을 받아 정치에 대한 조언을 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와 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다음 해 삼전도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동해안 입암立巖에 들어가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허목, 김응조, 김지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강공文康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으로 ‘여헌록’이 있고 ‘성리설性理說’, ‘역학도설易學圖說’, ‘경위설經緯說’, ‘우주요괄록宇宙要括錄’ 등의 저서가 전한다. 율곡, 퇴계와는 또 다른 독자적 성리학설로 최근 국내학계는 물론 일본, 중국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泉谷書院,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선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장현광의 양자 청천당廳天堂 장청일張廳一은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는 간관諫官의 전형으로 전해진다. 효종 때는 대사간大司諫 김경록, 집의執義 송준길 등과 함께 권신 김자점의 탐욕, 방자함을 탄핵했다. 그는 청렴강직함 때문에 출세가 막히기도 했으나 후에 우승지, 부제학, 대사간까지 올랐으며, 사후엔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목공文穆公이란 시호가 내렸다. 

장옥정張玉貞(희빈禧嬪 장씨張氏)은 역관譯官이었던 조부 장응인, 아버지 장형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양반이었던 장옥정의 조부 장응인은 중국과의 무역거래로 역관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보고 장경인과 함께 역관이 되었다. 이후 인동 장씨는 역과에 7명이나 수석합격을 낸 역관 명문 집안이 되었다. 장옥정은 조대비의 조카인 조사석의 소개로 궁녀가 되어 숙종의 총애를 입었다. 그리고 역관이었던 인동 장씨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왕후까지 올랐으나, 인현왕후를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다.

직제학 장계계

시조 장계 장계는 고려 충열왕 31년에 국학진사國學進士 권지도평의록사權知都評議錄事 동진사同進士에 등과하여 진현전進賢殿 직제학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문관대제학에 이르고 옥산군에 봉해졌다. 상계는 고려의 개국공신 태사공 장정필에서 비롯하였는데 그를 상조上祖 또는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장정필의 후손 중에 장상겸이 있고 그 아들에 14세 기機, 익榏, 식拭, 식栻, 사楒, 계桂의 다섯 명이 있었다. 다섯째 계를 시조로 한다. 이와 같이 논증한다면 대제학 장계는 태사 장정필의 후손이 된다. 장계가 인동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아 후손들은 7세에 이르기까지 세거하면서 명문의 틀을 잡았다. 5개의 주요 파가 있다.

주요 인물 장계의 손자로 광주부사를 지낸 장용서張龍瑞가 있고, 장계의 6세손으로 홍산현감을 지냈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고 옥산군에 추증된 장안량張安良이 있다. 또 그는 5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가 현달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장안식張安式은 훈련원 판관을 지냈고, 장용서의 증손인 장자원張自遠은 검교檢校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왕세자 교육을 담당)을 지냈다. 그 후손들이 평안도 용천, 정주 등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장안량의 5형제 중 장남인 장선손張善孫은 의정부 첨서와 녹사를 역임했으며, 차남 장경손張敬孫은 사재감 주부를 지냈고, 또 인동의 다른 별호인 연복군에 봉해진 장말손張末孫은 호가 송설헌松雪軒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활약했다.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직접 문무文武의 선비와 장군 28인을 선발하여 토벌군을 조직했는데, 이때 여기에 포함돼 토벌에 참여했다. 반란이 종식되자 그는 변란을 제압한 공로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에 책봉됐다.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의 현손 장언상이 영주에 정착하였다.

장순손張順孫은 군수였던 장중지의 아들로 정언과 판관을 지내고, 춘추관의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연산군 때 직간하였다가 화를 입고 원방에 부처되었으나, 중종반정이후 복권되어 병조판서에 올랐다. 김안로 등과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축출하려 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이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장계가 인동현의 남쪽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은 이후 후손들은 7세에 이르기까지 세거하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조선 성종 이후로 임지에 따라 서울 창동倉洞을 비롯한 충청북도 제천堤川^단양丹陽과 경상북도의 영주榮州^예천醴泉^문경聞慶^의성義城^자인慈仁 등 전국 각지로 산거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5개 파로 분파되어 경상북도 영주, 예천, 문경과 충청북도 단양 지역에 살아왔다.

인동 장씨 근·현대 인물


장태수張泰秀는 전라북도 김제에서 출생하였으며, 철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정언, 지평을 역임하였다. 고종 때 병조참의, 동부승지, 경연참찬관을 지냈다. 하지만 단발령이 내려지자 사직하였다. 일본 헌병대에 아들 3형제가 붙잡혀가자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죽었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1894년 진사가 되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때는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했다. 그해 사예소의 직원으로 ‘대한예전’ 편찬에 참여했고 내부주사를 사임한 뒤에는 만민공동회의 총무위원으로 이승만 등과 함께 정부의 실정과 5적을 규탄하기도 했다. 위암이 언론에 투신한 것은 비교적 늦은 36세가 되던 1899년으로 격일간지 ‘시사총보’가 시발점이었다. 이어 황성신문사의 주필로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다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에 취임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06년 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구국운동을 벌이다 단체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대한협회로 개편하였으나 압력이 심하여 1908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을 떠났다. 상해, 남경 등지를 방랑하다가 귀국한 1909년 최초의 지방지인 진주 경남일보의 주필로 취임했으나, 다음해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 이로 말미암아 경남일보가 폐간되는 불운을 겪었다. 위암은 언론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니, 그의 저서 ‘조선유교연원’은 한국유교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저술로서, ‘일사유사’는 서민층 출신으로 특기할 행적을 남긴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근대 시민의식을 고취한 저서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망국의 설움을 폭음으로 달래다가 1921년 음력 10월 2일 55세를 일기로 마산에서 일생을 마쳤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승만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장택상張澤相과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장면張勉이 유명하다. 창랑滄浪 장택상은 1893년에 경상북도 칠곡에서 출생하였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청구회靑丘會 회장으로 있다가 8·15광복을 맞아 수도경찰청장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임하였으며, 제2대, 3대, 4대, 5대 국회의원(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엔 국무총리에 기용되었으며, 1959년엔 재일교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하여 제네바에 파견되기도 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재야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병사했다. 

운석雲石 장면은 1899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하고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해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6·25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기여하였다. 1951년에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야당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장면과 윤보선 순수내각제였던 제2공화국에서 신파를 대표하는 장면은 총리를, 구파를 대표하는 윤보선은 대통령을 했다. 1955년엔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창당였으며, 1959년엔 조병옥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다. 4·19혁명 후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집권 후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게 되자,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장도영張都暎은 1923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신의주고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신의주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광복 후 신의주 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월남하여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장면 총리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재직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에 추대되었으나, 곧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하고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백상栢想 장기영張基榮은 한국은행 부총재, 조선일보·한국일보 사장, 경제기획원장관, 국회의원, 대한체육회 회장, IOC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 장병상張柄祥의 가문이 호남의 명문가이자 천재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장병상씨는 4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자신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백범 김구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또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아버지의 명에 따라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중 둘째가 장충식 후지필름 대표이고, 셋째가 장재식(전 국회의원, 산자부장관)이며, 넷째가 뉴욕대 교수와 한전 사장을 지낸 장영식씨이다. 그 손자들 중에선 학계의 거목이 많이 나왔는데, 장하진 전 여성부 장관을 비롯하여 장하성(고대 교수),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교수), 장하석(옥스포드대 교수), 장하상(전 보잉사 이사)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 외에도 인동 장씨에서는 정관계 및 유명 인사들이 많다. 정관계 인사로는 장경순(전 국회부의장), 장기욱, 장성만, 장충식, 장동식(이상 전 국회의원), 장덕진(전 국회의원, 농수산부 장관) 등이 있으며, 학계와 언론계에는 장충식(단국대 총장), 장왕록(서울대 교수), 장강재(한국일보 사장), 장두성(언론인), 장명수(전 전북대 총장) 등이 있다. 또 배우 장동건, 가수 장우혁, 역도선수 장미란 등도 인동 장씨로 알려져 있다. 주요 집성촌은 경북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경북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 경북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 경북 구미시 인동동, 경북 칠곡군 석적읍 중리, 성곡리, 경남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노연리, 의창구 대산면 갈전리, 전남 담양군 담양읍 오계리,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평북 박천군 청룡면 응봉동, 대화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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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참고사이트〉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http://blog.naver.com/tlfdksro7)
인동 옥산 장씨 종친회(http://cafe.daum.net/jangground)
인동 장씨 직제학계(http://cafe.daum.net/jangjikje)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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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 평산 신申씨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평산 신씨는 성씨 별 인구 순위에서 154,612가구, 496,874명으로 김녕 김씨에 이어 14위로 조사됐다. 


시조 장절공 신숭겸(?~927)

왕건을 추대한 원훈공신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嵩謙의 원명은 능산能山이며, 원래 전남 곡성(현 곡성면 목사동현 구룡리, 용산재) 출신이다. 일찍부터 무예를 닦은 후, 강원도 광해주光海州(춘천)로 이거해 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궁예에게 발탁되어 태봉泰封의 기장騎將(기병 장군)으로 있었다.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고 특히 활쏘기 재주가 뛰어나 신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 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능산은 서기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더불어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왕건에게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였다. 고려개국원훈高麗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에 올라, 『고려사1』에는 ‘고려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산 신씨의 유래 역사에서는 능산이 평산 신씨를 하사받게 된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날 왕건이 평주平州(平山)로 사냥을 나가 삼탄三灘을 지날 때 마침 고공을 나는 기러기 떼를 보았다. 왕건이 수행하는 제장諸將에게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히겠는가?” 하고 묻자 그가 맞히겠다고 아뢰었다. 왕건이 그에게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며 쏘라고 하자 그는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 하고 물었다. 왕건이 웃으며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자 과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명중시켜 떨어뜨렸다. 왕건이 탄복하고 기러기가 날던 땅 3백결을 하사하고 본관을 평산으로 삼는 신申 성을 사성하였다. 이때 하사받은 땅을 궁위전弓位田이라 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지켜왔다. 

평산平山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 때 다시 복구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평산平山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고종 때 군郡이 되었다. 

위왕대사爲王代死와 왕건의 애도 고려태조 10년(927년) 10월, 견훤의 군대가 신라의 경주를 침입하여 경애왕을 살해한다. 급보를 받은 왕건이 직접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군사를 통솔하여 경주로 향하니 두 나라의 군대가 맞닥뜨린 곳이 공산公山 동수棟藪(현 대구 지묘동)지역이다. 처음에는 고려군의 매복공격으로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은 점차 수습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왕건군이 포위되어 점점 형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포위망을 뚫을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자 얼굴이 왕건과 흡사한 의제義弟 신숭겸이 왕건을 가장하고 대신 죽을 것을 자청하였다. 그는 태조의 수레(어거御車)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려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태조가 본진에 돌아와서 곧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분간할 수 없었더니 대장 유금필 등이 말하기를 “신장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의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습니다” 하는지라 이를 근거로 과연 찾아내었다. 이에 얼굴을 목공을 시켜 다시 만들어 황금으로 본을 뜨게 하니 생시의 모습과 똑같았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히고 자리에 앉게 하여 태조가 친히 제례를 행하고 통곡하였다. 장지는 도선대사가 자신을 위해 잡아준 묘터를 내어주어 예장하게 하였다. 태조는 명을 내려 그가 죽은 자리에 단(순절단殉節壇)을 모으고 절(지묘사智妙寺)를 지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왕건은 그에게 ‘벽상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지절지정공신壁上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고 장절裝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후 태조가 매양 팔관회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즐거워할 때 전사한 두 장수가 자리에 없음을 애통히 여겨 신숭겸과 김락의 상像을 짚으로 묶어 만들게 하여 조복을 입혀서 반열班列에 따라서 앉게 하였다. 임금이 술과 음식을 내리기를 명하니 술이 문득 닳아 마르고 가상假像(짚으로 만든 상)이 일어나서 춤을 추는 것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이로부터는 연회를 여는 행사에는 항상 이들의 자리를 만들어 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예종 15년(1120)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김낙과 신숭겸의 가상을 보고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두 장수의 공을 추도하였다. 

성씨의 변천과정

19파로 갈라진 평산 신씨 그후 평산 신씨는 신숭겸의 15대손에서 19개파로 갈리는데, 그 중 문희공파文僖公派(30%), 사간공파思簡公派(30%), 제정공파齊靖公派(25%), 정언공파, 한성윤공파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평산 신씨는 조선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상신相臣(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홍문관과 예문관의 장) 5명, 판서 20명, 문과 급제자 302명을 배출했다. 특히 평산 신씨에는 묘정에 배향配享★된 인물이 5인이나 된다. 고려 태조 묘정에 배향된 장절공 신숭겸을 비롯하여 조선 세종 묘정에 배향된 15세손 문희공 신개申槩, 인조 묘정에 배향된 20세손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 역시 인조 묘정에 배향된 21세손 중익공中翼公 신경진申景禛, 고종 묘정에 배향된 28세손 문경공文敬公 신응조申應朝 등이다.

신씨 본관은 본관은 평산平山, 고령高靈, 아주鵝州, 영해寧海, 은풍殷豊, 천안天安, 이천利川, 신천信川, 곡성谷城, 삭녕朔寧, 창주昌州 등 10여 본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평산 신씨로 70%를 차지하며, 그 다음이 고령 신씨로 약 17%를 차지한다. 

★배향配享 주신主神의 제사에 다른 신을 병행하여 제사함. 임금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나 공로가 있는 신하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거나 학덕이 있는 사람을 문묘文廟나 서원에 부제하는 일.


주요인물 신숭겸의 11세손인 신연申衍의 아들 신중명申仲明(병조참판에 추증), 신자명申自明(춘천부사 역임), 신헌주申憲周(상호군) 삼형제에서 가세가 크게 일어났다. 또 신중명의 첫째 아들 신집申輯은 전리판서와 수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둘째 신군평申君平은 공민왕 때 좌대언과 어사대부에 올랐고, 막내인 신현申賢은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신개申槩(문희공파 파조)는 신집의 손자로 조선 초기 문과에 급제한 뒤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와 좌찬성, 우의정을 지냈다. 우참찬으로 있을 때 ‘고려사’ 수찬에 참여했으며, 세종으로부터 궤장几杖(국가에 공이 있는 원로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신개의 세 아들 신자준申自準(관찰사 역임), 신자승申自繩(대사성 역임), 신자형申自衡(집의 역임)도 모두 현달하였다. 신사임당은 여류문인이자 화가이며, 효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신개의 현손녀玄孫女이자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딸이다. 2009년 6월 23일 첫선을 보인 5만원권 화폐의 도안인물이 되어 아들 이율곡과 함께 화폐의 주인공이 되었다. 

신립申砬은 문희공파의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의 손자이며 평원부원군 신국화申國華의 아들이다.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16년(1583) 북방에 쳐들어온 여진족 나탕개를 격퇴시키는 등 여진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부터 6진을 지켰다. 이러한 공로로 158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고,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전라·경상의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었는데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며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남한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로 평원부원군平山府院君으로 영의정에 오른 신경진申景禛, 부사府使를 지낸 신경희申景禧, 병마절도사를 지낸 신경유申景裕 등 부자父子 3형제가 이름을 날렸다. 신립의 세 아들은 모두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정언공파의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신립과 같은 항렬이다. 그는 인조 때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는데,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의 4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의 아우 신감申鑑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왕조실록을 복간하는데 공이 컸고, 아들 신익성申翊聖은 인조 때 척화 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으로 청淸나라에 잡혀갔다. 그는 아우 신익전申翊全과 함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문정文貞의 시호를 받았으며 인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이 밖에 숙종 때 명인 신정申晸,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신응조申應朝, 그리고 판서를 지낸 신응현申應顯도 정언공파의 후손들이다. 이렇듯 정언공파는 문희공파와 달리, 영의정 신흠 이후 문신집안의 길을 걸었다. 

사간공파에서는 어사대부 신군평의 손자로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사간공 신호申浩를 파조로 하고 있다. 신호의 6대손 신점申點, 신암申黯 형제가 뛰어났는데, 신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고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그의 직계후손 신율申慄이 대북파大北派에 가담, 소북파小北派를 숙청하는 옥사에 관여하게 되어 인조반정 이후로는 쇠퇴하였다. 하지만 동생 신암의 후대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아들 신민일申敏一이 대사성, 현손 신사철申思喆은 중추부영사를 지냈다. 사철의 아들 신만申晩과 신회申晦 형제는 영조 때 번갈아 영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도 숙종 때 공조판서, 참찬을 지낸 신임申銋, 이조참의를 지낸 신심申鐔, 현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신재식申在植, 형조판서를 역임한 신사운申思運, 예조판서였던 신석우申錫愚, 신석희申錫禧 등도 사간공파의 후손들이다. 신점의 조카 신충일申忠一은 선조 때 조선과 만주와의 관계를 서술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지도부기를 작성했으며, 근세 인물로는 고종 때 참정대신을 지낸 신기선申箕善과 판소리 여섯마당을 체계화한 신재효申在孝가 있다.

평산 신씨 근·현대 인물

위왕대사爲王代死의 충절을 자랑으로 삼는 평산 신씨 가문에서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칼을 들고 일어났다. 근·현대인물에서는 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申乭錫이 있다. 그는 평민출신의 의병장으로는 가장 먼저 군사를 모아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하여 1896∼1908년 영덕, 영양, 울진 등의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여 독립의병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래 있던 생가는 일본 관헌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불에 태워 없앴다고 하며 지금 있는 집은 1995년 복원한 것이다. 이외에도 경북의용단장이었던 신태식申泰植,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신팔균申八均이 있고, 신석구申錫九, 신우현申禹鉉, 신숙申肅, 신정백申正栢, 신현구申鉉九 등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투사, 건국 후에는 한국민주발전의 초석을 이루었으며 국회의장을 지내고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申翼熙선생(사간공파)도 평산 신씨가 배출한 거목이다. 

현대에는 한국경제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고, 보사부 장관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 등장 후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申鉉碻 등 각계각층으로 국가 사회발전에 공헌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 외 현대인물로는 정관계에서 신병현(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신두영(감사원장), 신직수(법무부장관), 신태영(국방부장관), 신현돈(내무부장관), 신상철(체신부장관), 신동원(외무부차관), 신태익(법제처장), 신응균(국방부차관), 신언한(법무부차관), 신상초, 신상식, 신경열, 신영국, 신옥철, 신하균, 신철균, 신옥철, 신윤창, 신동준, 신필균(이상 국회의원), 신정철(대법관), 신성철(대전지법천안지원장) 등이 있다. 또 학계에서는 신태환(서울대총장, 통일원장관, 건설부장관), 신석철(충남대의대학장), 신현천(경상대총장), 신태수(건국대총장), 신동훈(서울대의대학장), 신사훈(서울대교수), 신국주(동국대행정대학원장), 신석균(한국발명학회 회장), 신일철(고려대교수), 신동욱(연세대교수), 신영복(성공회대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신동관(태평양화학그룹부회장), 신덕균(동방유량회장), 신훈철(삼성항공사장), 신동호(조선일보대표이사) 등이 있으며, 기타 문화계에서는 신영균(영화배우), 신중현(가수), 신동우(만화가)씨 등이 있다. (전·현직 구분 없음) 주요 집성촌은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 강원도 이천군 방우면 가려주리, 경남 밀양군 무안면 중산리,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 경남 남해군 서면 중현리, 충남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 황해도 금천군 구이면 관문리, 전북 임실군 신덕면 수천리, 평북 영변군 남송면 봉지동 등이라 한다. 

평산 신씨 주요 유적지

〈춘천묘소〉 신숭겸의 묘소에는 봉분이 셋이다. 그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혹시 엿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는 부인을 합장한 것이라고도 하나 어느 봉분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제향을 지낼 때 중앙의 봉분 앞에서 행하고 있다. 묘소는 도굴꾼들이 수차례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때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모두 잡혔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장교가 말을 타고 묘소 앞을 지나자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내려서 분향 후 지나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묘역은 춘천 박사마을로 유명한 서면에 있으며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우리나라 4대 명당지明堂地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좌우에 울창한 소나무가 마치 도열하고 있는 듯하다. 묘역을 비롯 장절사裝節祠,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享祀한다. 

〈표충사〉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가 죽은 자리에 순절단을 쌓고, 지묘사智妙寺와,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그의 영정을 모시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폐사된 지묘사智妙寺 자리에 사당을 지어 공公을 모시도록 하였으며, 현종 11년(1670)에 유림이 허물어진 사당을 ‘충렬사忠烈祠’로 중수하였다가, 조정에서 그 명후년에 표충사表忠祠라 사액을 내리어 일명 ‘표충서원表忠書院’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표충서원이 훼철毁撤된 뒤로는 후손들이 순절단을 본거삼아 의지하고, 재사齋舍를 신축하여 제향을 모시며 지켜 왔다. 근래 표충사 중건사업重建事業을 일으켜, 1988년에 준공을 보아 1993년부터 공의 영정과 위패를 다시 모시고, 해마다 한식에 향사를 받들고 있다. 주변에 상절당尙節堂, 표충단表忠壇, 경의문景義門 등이 있다. 

〈영각유허비〉 신숭겸의 영정각影幀閣이 있던 곳에 영각유허비를 세웠다. 신숭겸의 영정이 원래 지묘사智妙寺에 봉안奉安되었더니 절이 헐린 뒤로는 이 곳 대비사大悲寺의 영정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순조 19年(1819) 대구영사 김철득金喆得의 투장偸葬 흉계로 절과 영정이 모두 불타버렸다. 1832년(순조 32)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있던 그의 후손 신정위申正緯가 비문碑文을 짓고 영각 유허비影閣 遺墟碑를 세웠으며 1848년(헌종 14)에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비각을 세웠다. 비각 아래 모영재慕影齋가 있다. 모영은 영각을 추모한다는 의미이다. [그림 모영재] #모영재#

〈경백사〉 1926년 신상과 신항, 신건 등 3명이 힘을 합하여 창건하였다. 3동으로 되어 있으며 평산 신씨 보존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신숭겸을 비롯하여 고려 말기의 학자인 신현, 성리학자 이색李穡, 은사隱士 원천석 등 4현을 모신 조두지소俎豆之所이다. 부속건물로는 장충문裝忠門과 영수정永洙亭, 호재당好在堂등이 있다. 사당에는 신숭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중정中丁에 평산 신씨 문중과 지방 유림에서 제례를 지낸다.

〈율리사〉 신숭겸을 주벽으로 하여 신현申賢, 신흔申昕, 신연申演, 신기申淇, 신철申澈, 신오申澳 등 평산 신씨 7위를 배향한 사당이다. 원래는 문중사당으로서 1851년에 ‘세덕사世德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당시는 신숭겸, 신철, 신오 등 3위를 제향하였다. 평산 신씨가 비인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혼란기에 신용申龍이 이곳에 은둔하면서 비롯되었다. 신용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들어갔던 신기申淇의 아들이다. 그후 신철과 신오의 후손들이 함께 옮겨와 살게 되면서 그 문족들이 번창하게 되었다. 1900년(광무8) 위의 3위 외에 신혼申琿, 신연申演, 온수감溫水監을 지낸 신기申淇 등을 추배하는 ‘율리사栗里祠’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1918년에는 사당을 중건하고 1920년에는 고려시대의 학자였던 신현申賢을 마저 추배하여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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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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