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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화타임즈】신광철의 『한국인의 근원을 찾아서』1편

우리는 우리를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위대함을 자각할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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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0년 전 평등사회 … 계급도 남녀 차별도 없었다 2017-07-31 문명의 뿌리를 찾아서 <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5&aid=0002740744  이희수 한양대(문화인류학) 교수는 “대사건의 현장”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로 꼽히는 터키 남부 차탈회이위크 유적을 보고나서다. 고도 1000m 아나톨리아 고원에 자리 잡은 차탈회이위크는 신석기 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대변하는 곳이다. 수렵·채취에 의존하던 인류의 농경 정착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보존 상태가 훌륭한 곳으로 평가돼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흙수저·금수저도, 성차별도 없었다는 8000년 전 선사인들 삶터 2017-08-1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376293  9000여년 전 그들에겐 ‘금수저’, ‘흙수저’가 없었다. 성별, 핏줄로 구분되는 가족조차도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세계적인 고고학 거장인 이언 호더(69)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8000~9000년 전 인류사상 최초의 신석기 농경주거지로 손꼽히는 소아시아 고원의 차탈회위크 마을터는 인류사의 상식을 뒤엎은 유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전체가 가족이었다. 동등한 넓이의 집터를 각기 꾸려 지붕 구멍을 통해 서로 오가며 소통하고 곡식을 나누고 후손을 함께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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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매니악] 1만2천년 전 ‘괴베클리 테페’, 정설을 뒤엎다① 2016-03-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16&aid=0001020118  1만1500년 전, 빙하기에 만들어진 석조 유적=1994년부터 20여년, 슈미트 박사의 주도로 이 지역에 대한 대대적 발굴이 이뤄졌습니다. 그는 수십년간 큰 진전이 없자 장소를 옮깁니다. 그는 고고학 문헌을 뒤져보며 주변을 샅샅히 탐사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고원에서 원형으로 배열된 돌들을 발견합니다. ‘괴베클리 테페’를 발견한 겁니다. 20여개에 달하는 원 모양으로 세워진 총 200개 이상의 T자 형태 돌기둥. 차가운 땅 밑에서 서서히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은 5.5미터에 달했습니다.
유적의 크기에 놀란 학자들. 그러나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습니다.

지층 분석, 탄소측정연대 결과 건축 시기가 무려 기원전 9500년경으로 밝혀진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1만1500년 전, 매머드가 뛰놀던때입니다. 고고학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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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서 11,500년전 주거 유적 또 발견..괴베클리테페와 동시대 2017.09.28.  http://v.media.daum.net/v/20170928175119934?rcmd=rn
터키 남동부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1만1천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 주거지 유적이 실체를 드러냈다.
28일 일간지 휘리예트 등 터키언론에 따르면 터키 바트만주(州) 하산케이프의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최고(最古) 9,500 B.C.에 형성된 주거지 유적이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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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구 전 교수, ‘일본이 고대에 남부지방 지배한 것 사실이다’ 2017.09.28  http://m.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319

임나일본부설라는 것이 있다. 서기4세기 중반에서 서기6세기 중반까지 약 2백 년 동안 일본 야마토 왜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지배했다는 식민사관이다. 지배한 곳은 구체적으로 임나인데 이 임나가 고대 가야라고 한다. 서기2017.09.27. 경남 국립김해박물관이 주최한 ‘한국 고대사의 재발견’ 시민강좌에서 이 임나일본부설이 맞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 고려대학교 교수, 김현구씨가 이같이 말했다. 김씨는 이날 <일본서기> 신공황후조를 근거로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지배한 것은 일본, 야마토왜가 아니라, 백제장군 목라근자 등 목씨 일족이다. 그런데 목라근자 아들 목만치가 일본으로 건너가 왜인이 되었다. 이후 목씨 일족은 소아蘇我씨 가문 조상이 된다. 소아씨 가문은 일본왜왕을 죽이기도 하는 등 일왕가를 좌지우지 했다. 이렇게 야마토 왜 정권을 잡은 목씨 일족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한다. 이 같은 김씨 주장을 종합하면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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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①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의 자취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819


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②치우천황 묘에 참배하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822


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③기자(箕子)묘를 찾아서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860


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④열하일기의 현장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875


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⑤ 홍산문화 중심지 적봉을 가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881


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⑥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895


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⑦ 꼭 봐야할 우리 고대사 현장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904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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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의 진상은 '상해영문대륙보'의 기자 내다니엘 페퍼(1890-1964)가 1919년 가을 한국에 파견돼 약 한 달간 체제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실상을 확인한 뒤 일제의 간교한 식민정책과 일제의 총부리에 맞서 대한독립을 외쳤던 우리 조상들의 용기와 투쟁을 생생하게 전한 기록이다.


그중에 국사박멸책이라는 부분을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국사박멸책 國史撲滅策

http://m.blog.naver.com/hwandanstory/50147958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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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말살에 앞장 선 「한겨레 21」

 

글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출처 : https://www.facebook.com/#!/newhis19?fref=ts

 

 백여 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포진한 항일혁명가들이 지금 유통되고 있는 「한겨레 21(2017. 6. 26)」의 표지를 봤다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표지에 단군을 그려놓고 ‘사이비역사의 역습’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정확히 조선총독부의 역사관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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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의 '사이비 역사의 역습'은 사실인가? 2017-06-2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154187

이덕일 소장의 기고글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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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역사관(3)

-훈민정음 이전의 고유 문자 이야기-


글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출처 : https://www.facebook.com/newhis19/posts/143459699596024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

지금 우리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우리 최초의 문자라고 보고 있거나 혹은 삼국 때 사용했던 이두(吏讀)를 우리 역사상 최초의 문자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은 『감시만어』에서 그 훨씬 이전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말했다. 성재는 “우리 한국은 나라를 향유한지 4천여년이고, 삼한시대 이후부터는 신빙성 있는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는 수많은 역사서와 경적(經籍), 그리고 고유한 문자 등이 있었는데, 네 번에 걸친 외국의 침략과 한 번의 내란으로 대부분 불타거나 사라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연(燕)나라 노관이 난을 일으키면서 위만이 들어와 ‘기자조선’의 역사기록이 모두 불탄 것이며, 두 번째는 당나라의 침략이고, 세 번째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구사(舊史:옛 역사서)와 경적을 불태운 것이며, 네 번째는 몽골의 침략이며 다섯 번째는 일제의 침략이다. 


-『신지비사』와 「구변진단도」

성재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문예품이 단군시대 글을 관장하던 신지(神誌)가 쓴 『비사(秘詞)』라는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비사』는 그 글씨의 모양이 기이하고 의미가 심오해서 해득하기가 쉽지 않은데, 고구려 대홍영(大弘英)이 한문(漢文)으로 번역하고 서문에 주석을 붙인 것이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라고 썼다. 그러면서 “우리 한인(韓人)은 상고시대부터 우리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우리 옛 선비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 고구려 대홍영이 『신지비사』의 내용을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구변진단도」는 고려 말 조선 초기 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태조 이성계 신도비명」에도 나오는 책이다. 권근은 고려 서운관(書雲觀:천체 관측을 관장하던 관서)에 예부터 비장해오던 『비기(秘記)』 중에 「구변진단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 란 말이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건목득자(建木得子)란 이(李)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뜻으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말한다. 성재는 진단(震檀)이란 우리나라를 뜻하고, 9변이란 나라 도읍이 아홉 번 변한다는 뜻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신지비사』라는 책

『신지비사』라는 책을 근거로 삼으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책 이름이라고 거품을 물겠지만 이 책은 『삼국유사』의 「흥법(興法)」조에도 나온다. 『삼국유사』 흥법조의 ‘양명(羊皿)이 개금으로 환생했다’는 대목이 그것인데, 여기에서 일연은 『고려고기(高麗古記)』라는 책을 인용해 재미있는 일화를 적어놓고 있다. 수 양제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던 영양왕 25년(614)에 고구려 왕이 거짓으로 글을 올려 항복을 청했다. 이때 고구려 한 무사가 작은 화살을 품에 감추고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에 올랐다가 양제가 표문을 읽을 때 활을 쏘아 가슴에 맞췄다. 양제가 “내가 천하의 주인으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하자 우상(右相) 양명이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서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수 양제가 죽은 후 고구려에 환생한 이가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것이다. 『고려고기』라는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일연 때만 해도 전해지고 있었던 고구려의 역사서였다.


-역사상의 여러 고문자들

 일연은 이외에도 연개소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실으면서 「『신지비사』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아울러 주석했다”고 했으니 소문(蘇文)이 곧 벼슬의 이름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되지만, 「전기」에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을 썼다”고 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일연은 연개소문의 ‘소문’은 벼슬의 이름이 맞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 「전기」에는 ‘문인 소영홍이 서문을 썼다’고 되어 있으니 어느 문헌이 맞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재 이시영이 본 문헌에는 ‘고구려 대홍영이 『비사』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하고 서문에 주석을 붙인 「구변진단도」를 썼다’라고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성재는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글자가 있었다는 여러 사례를 들고 있는데, 이를테면 문화 유씨 족보에 쓰여진 왕문(王文)의 서법이 전자(篆字) 같기도 하고 부적(符籍) 같기도 하다는 것이며, 평양 법수교(法首橋)의 고비(古碑)나 남해도 암벽의 글자 등도 모두 고대 한인이 사용하던 고대문자라고 보고 있다.


-국어학자 김윤경도 마찬가지 주장

 그런데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성재가 『감시만어』에서 처음 한 것이 아니다. 국어학자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로서 일제강점기 여러 학교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던 한결 김윤경(金允經:1894~1969)도 마찬가지 주장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김윤경은 1931년 경 『동광』에 「정음(正音) 이전의 조선글…」 등 여러 편의 논문을 실어,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유문자가 있었다”고 논증했다. 김윤경도 그 근거에 대해서 『문헌비고』, 『용비어천가』 등 여러 문헌을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 초기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 “신지(神誌), 단군 때 사람으로 스스로 선인(仙人)이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김윤경은 이 글에서 성재 이시영처럼 문화 유씨 족보의 왕문과 평양 법수교, 남해도 암각 문자 등을 인용해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해서 이런 인식이 당시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 및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는 널리 통용되었던 인식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탄압한 것이 국어와 역사가 결합한 이런 움직임을 식민지배 통치의 근본적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해방 후 사라진 우리 전통의 사유체계

 김윤경은 또한 “일본 하이(蝦夷)땅의 수궁(手宮)문자라는 것도 아마 북부 대륙조선에서 행하던 고대문자라고 추단”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고대 일본의 야마토왜가 고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임나=가야설’이 헛소리이며, 거꾸로 고대 일본은 한국인들이 세운 나라라는 사실을 언어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성재 이시영과 한결 김윤경 선생의 글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들이 가졌던 우리 역사, 언어에 대한 이런 광대한 생각이 해방 후 모두 삭제된 데 대한 깊은 아쉬움이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든 학제 및 교육사상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우리 전통의 교육사상과 교육체계의 토대 위에서 서구의 것을 선별적으로 수용했어야 하지만 일본인들이 만든 교육시스템이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내려온 것이 현재 한국 사회 학문이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란 생각이다. 우리 고유의 사상체계는 학문의 대상에서조차 제외되면서 우리 얼이 없는 껍데기 학문이 판치다 보니 OECD 국가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수상한 평화상 외에 노벨상 수상자 한 명 없는 부끄러운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를 읽으면서 해방 후 친일세력이 청산되어 성재같은 이들의 역사관과 학문관이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역사관과 학문관이 되었다면 지금의 모습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아직까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이들이 목청 높일 수 있는 사회는 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 사회의 정신세계가 지금처럼 황폐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사진: 육사를 방문한 부통령 이시영, 오른쪽이 교장 김홍일, 왼쪽이 부교장 이한림(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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