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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韓國史와 세계사世界史를 새로 쓰게 하는 홍산문명


중국 내몽골자치구와 요령성의 접경지역에서 세계 4대 문명권으로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보다 무려 1∼2천 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이 발견되었다. 이 만리장성 밖의 문명이 이른바‘홍산문화’, 일명‘ 요하문명’ 또는‘ 발해연안문명’이다.

홍산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내몽골 적봉시의 붉은 산인 ‘홍산’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단군왕검의 옛조선 이전의 상고문화인 환인의 환국과 환웅의 배달 문명을 알아야만 이 문명의 실체를 알 수 있다.

BCE 3500년을 기점으로 만리장성 밖의 홍산문화와 북방 초원문화가 황하 중류 만곡부인 오르도스 지역과 태항산 사이의 노선을 따라 중원으로 전파되었다. 이 문화 전수 경로를 중국 학자 쑤빙치蘇秉琦가 ‘Y벨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Y벨트를 따라 동방 신교의 제천문화와 삼족오, 용봉, 칠성과 같은 천자문화의 상징이 중원에 흘러들어 갔다. 이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신석기 문화인 앙소문화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한마디로 홍산문화는 황하문명의 원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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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와 환, 단, 한의 뜻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

注(주)에 曰(왈)
「桓仁(환인)은 亦曰天神(역왈천신)이시니 天(천)은 即大也(즉대야)며 一也(일야)오

桓雄(환웅)은 亦曰天王(역왈천왕)이시니 王(왕)은 卽皇也(즉황야)며 帝也(제야)오
檀君(단군)은 亦曰天君(역왈천군)이시니 主祭之長也(주제지장야)오
王儉(왕검)은 亦卽監群(역즉감군)이시니 管境之長也(관경지장야)니라.

『대변경』의「 주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인桓仁은 천신天神이라고도 하니 천天은 곧 큼[大]이며, 하나[一]다.
환웅桓雄은 천왕天王이라고도 하니 왕王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다.
단군檀君은 천군天君이라고도 하니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시다.
왕검王儉은 감군監群이라고도 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이시다.

환, 단, 한의 뜻

故(고)로 自天光明(자천광명)을 謂之桓也(위지환야)오
自地光明(자지광명)을 謂之檀也(위지단야)니 所謂桓(소위환)은 則九皇之謂也(즉구황지위야)라

韓(한)은 亦則大也(역즉대야)니 三韓曰風伯雨師雲師(삼한왈풍백우사운사)오

加(가)는 卽家也(즉가야)니 五加曰(오가왈) 牛加主穀(우가주곡)하며

馬加主命(마가주명)하며 狗加主刑(구가주형)하며 猪加主病(저가주병)하며
鷄加主善惡也(계가주선악야)니 民有六十四(민유육십사)하고 徒有三千(도유삼천)이라.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환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또 크다[大]는 뜻이다. 삼한三韓은 풍백·우사·운사를 말하기도 한다. 가加는 가家라는 뜻이다. 오가五加는 곧 곡식을 주관하는 우가牛加, 어명을 주관하는 마가馬加, 형벌을 주관하는 구가狗加, 질병을 주관하는 저가猪加, 선악을 주관하는 계가鷄加를 말한다. 백성은 64겨레요, 무리는 3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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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으로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세 태조 왕건] 후삼국을 통일하다

고려국본기의 시작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에 대한 이 야기이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왕족의 혈통인 안승安勝의 이야기로 서두가 전개되고 있다. 안승은 고구려 28대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자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668년 고구려 멸망 뒤, 숨어지내던 안승은 검모잠에 의해 후고구려왕으로 추대되었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며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분이 일어나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게 된다. 안승은 신라 문무왕에 의해 674년 금마저(지금의 익산) 일
대에서 보덕국의 왕으로 봉해지고 680년에는 문무왕의 누이동생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683년(신문왕 3년)에 신문왕은 보덕국을 폐하고 안승을 불러들여 소판蘇判의 벼슬을 주어 신라 귀족을 만들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부하 대문大文의 무리가 금마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 관군에 진압되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시작된 안승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200여년이 지나 안승의 후손 중에 궁예弓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태어날 때 집 위로 흰 빛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치는 것을 보고 신라 일관日官이 불길한 징조로 판단하여 궁예를 죽이려 했으나 어머니가 보물을 주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
다. 신분이 밝혀지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이었기에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때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그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점대였는데 거기에는 ‘왕王’ 자가 새겨져 있었고 궁예는 자신의 천명을 예감했다.

당시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에 대한 원망이 깊게 쌓여 있었다. 특히 궁예는 남으로 순행하다 흥주사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신라 왕의 초상화를 보고 칼로 베어버렸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 상당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를 삼켜버리려는 뜻을 품고 도읍을 멸하리라 부르짖으며 신라에서 귀화해 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였다.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896년 송악(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투항했고 이때 왕건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뒤에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01년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911년에는 태봉泰封으로 변경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하고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직접 경문 20권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聰이라는 승려가 이 경문을 보고 “모두 사설괴담邪說怪談으로 세상 사람에게 가르칠 것이 못 된다”고 한마디 하자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패 죽이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궁예는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며 왕후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다.

이렇게 포악한 정치가 계속되자 918년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궁예와 달리 유화적인 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해 나갔다. 926년부터는 대진국 유민을 받아들이고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문득 ‘이맥 선생은 왜 고려 건국과정에 안승과 궁예의 이야기를 길게 써 놓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고려 건국의 배경에는 고구려 계통의 힘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고구려 멸망의 한, 유민들의 쌓인 한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지도]

[6세 성종]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다

916년 통일국가를 세우고 946년 국호를 요로 정한 거란은 993년에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 침략의 명분은 고구려의 옛땅을 고려가 침식했으니 내놓으라는 것과 고려가 송과 교류를 끊고 거란을 섬기라는 요구를 수용하라는 것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요에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의견으로 갈렸다.

이때 나선 인물이 서희徐熙(942∼998) 장군이다.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된다. 서희는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대해 고려가 고구려의 맥을 이었다는 점과 고려의 도읍이 평양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준다면 친교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조리있게 설명하여, 결국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적진에서 거란과의 기싸움에서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을 편 강직한 인품에 소손녕이 굴복하여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에 서희를 전송한 것이다. 고려는 거란의 도움으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를 포함하는 강동 6주를 되찾게 되었다. 거란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 치 혀로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둔 서희는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모범이 되고 있다.

거란은 이후에도 계속 침략해왔는데 이때 물리친 대표적 인물이 강감찬姜邯贊(948∼1031) 장군이다. 그는 진주 강씨의 시조이자 고구려 26세 영양제 때 수나라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명장인 강이식 장군의 후손이다. 1018년 거란은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이때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곳곳에서 거란군을 물리쳤고 1019년에는 귀주에서 살아 도망간 적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거란군을 섬멸시켰다. 이것이 바로 귀주대첩이다. 이후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요나라의 침입
에 대비했다. [사진]

[16세 예종] 거란과 여진을 정벌하다

고려의 16세왕 예종은 여진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반대로 거란의 힘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서쪽으로는 거란에 내주었던 압록강변의 두 성(내원, 포주)을 찾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1107년 예종은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을 부원수에 임명하여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북지역의 여진을 선제공격하게 했다. 윤관은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평윤진 등의 9성을 쌓아 백성을 이주시킴으로서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9성을 유지하는 일이 고려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진이 9성을 회복하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여진은 동북 9성을 돌려주면 고려에 공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요 다시는 변방을 넘보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9성을 돌려주는 문제를 놓고 일대 논란이 벌어졌다. 9성 반환론을 처음 제기한 김인존은 9성 때문에 여진과 고려 양측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언급하면서 고려가 비록 9성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거란과의 국경 분쟁을 일으킬 조짐마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고려는 졸지에 여진과 거란을 상대로 불리한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9성을 돌려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대세는 이미 반환파에 기울어져 갔다. 물론 예종은 처음부터 영토확장 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내심 반환반대파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09년 여진에게 9성을 반환했다. 철수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여진과의 전쟁에서 몇번의 패배로 많은 군사를 잃은 윤관과 오연총에 대한 탄핵상소가 이어졌다. 예종은 간관들을 설득하여 결국 오연총은 파면하고 윤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 고려가 내부문제를 앓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급속도로 역학구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진은 꾸준히 성장하여 1115년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였고, 여진의 팽창에 따라 압록강변에서 거란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116년 발해 유민들이 고구려의 왕족 고영창을 내세워 대발해국을 세웠다. 

얼마 후 금나라가 압록강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공략하자 예종은 추밀원에 지시하여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하고 포주성은 고려의 옛 영토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금나라는 고려가 자체 힘으로 포주성을 차지해도 무방하다고 통보해온다. 금나라의 묵인을 받은 고려는 내원과 포주에 머무 르고 있던 거란의 야율령과 연락을 취한다. 야율령은 고려에 쌀을 원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두 성을 포기하면 쌀을 원조받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며 두 성을 고려에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야율령은 내원과 포주를 고려에 양도한다는 공문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고려는 1117년 거란에 빼앗겼던 내원성과 포주성을 되찾게 되었다(『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록』 266~278쪽 정리).[지도]

[18세 의종~31세 공민왕] 무신정권 100년& 몽골의 속국 100년 시대

고려의 18세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시작된 무신정권 시대는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면서 왕의 세력은 무기력해진 상태가 되었다.

1225년 몽고의 침입 1225년 몽고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귀국길에 도적에게 피살당하자 몽고는 보복을 선언하고 1231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했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과의 전면전을 벌이며 항전을 계속했지만 몽골의 연이은 침략으로 수많은 고려인이 살상되고 국토가 짓밟혔다.

1270년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24세 원종 때는 왕 중심의 친몽파親蒙派와 무신정권 중심의 반몽파反蒙派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고려에 친몽정권이 들어서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면서 고려 조정은 원에 복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며 대몽항쟁을 계속했지만 1273년 여몽연합군에 토벌되고 만다. 

원의 속국시대 고려 왕실에서는 원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25세 충렬왕(경효왕)부터 26세 충선왕(선효왕), 27세 충숙왕(의효왕), 28세 충혜왕(헌효왕), 29세 충목왕(현효왕), 30세 충정왕(저왕)까지 6대가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忠’ 자를 사용하여 왕호로 삼았다. 또 원나라가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이 내정간섭기구로 바뀌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는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원나라 배척운동 그러다 31세 공민왕(경효왕)이 즉위할 무렵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홍건적의 봉기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공민왕은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치면서 원의 1백년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공민왕은 먼저 변발, 호복 등 몽고풍속을 금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친원파 권문세족인 기철, 권겸, 노책 등을 제거했다. 당시 기철을 비롯한 일족은 여동생이 원나라 왕후가 되자 고려왕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려국본기에는 친원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로 정지상鄭之祥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묘청의 난에 연류되어 김부식에게 피살된 정지상鄭知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정지상鄭之祥이 전라도 안렴사로 전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고려인으로 원나라에 귀화하여 관리가 된 야사불화埜思不花가 고려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방종과 횡포를 일삼았다. 그가 전주에 오자 정지상은 이들을 공손히 맞이하였으나, 거만한 야사불화는 극진한 대접과 뇌물을 요구였다. 이를 거절하자 정지상을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때 미스테리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정지상이 “나라에서 기씨 일족을 처형하고 원과 국교를 단절하고 김경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고 호통치자 관리들이 정지상을 풀어준 것이다. 정지상의 카리스마에 눌려 거짓말이지만 통한 것이다. 정지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야사불화의 무리들을 잡아가두고 야사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金牌를 빼앗아 서울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공주에서 야사불화의 동생 서응려徐應呂를 잡아 철퇴로 쳐죽이고 이 사실을 공민왕에게 아뢰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화들짝 놀라고 원나라의 보복이 두려워서 도리어 정지상을 옥에 가두고 전주목사와 관리들을 체포하고, 야사불화에게 어주를 하사하고 금패를 돌려주었다. 정지상은 옥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반원개혁정치를 펴던 공민왕은 원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다가 다시 마음을 강하게 먹고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공민왕은 대궐에서 잔치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친원파 무리들을 불러들여 처형한 것이다.

이후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쌍성을 수복한다. 또한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중지했다. 이후 정지상은 석방되어 순군제공이 되었고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을 거쳐 판사가 되었다. 원나라를 믿고 횡포를 일삼던 무리를 물리치고 조국의 치욕을 씻고자 한 정지상의 뜻이 공민왕으로 하여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게 한 자극이 된 것이다.

[31세 공민왕 이후] 고려의 망국과정

『고려사』 권44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사관의 논평이 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쓸데없는 건축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史臣贊曰,“ 王之未立也, 聰明仁厚, 民望咸歸焉, 及卽位, 勵精圖治, 中外大悅想望大平. 自魯國薨逝, 過哀喪志, 委政辛旽, 逐殺勛賢, 大興土木, 以斂民怨. 『-국역 고려사』, 경인문화사)

여기서 말해주듯 공민왕은 1365년 노국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이후로 노국공주에 대한 집착으로 병적 증세를 보이며 개혁적인 성향을 잃고 정치를 소홀하게 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건국하자 고려는 신흥강국 명왕조와 북원(원왕조의 잔존세력)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난처한 입장에 있었고 백성들은 왜구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1371년 윤3월에는 북원의 요양성 평장사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은 명나라에 귀부하려 하다가 명나라가 이곳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까 우려한 나머지, 요양이 본디 고려 땅이니 고려 조정에서 귀화를 요청하면 이주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려에 사자를 보내 의사를 타진해왔다. 이때 고려 조정은 의론이 일치하지 않고, 국사에 어려움이 많아 대응을 못했다.

원나라 말기의 지방정권 정복활동을 계속하던 주원장이 대륙 서쪽의 명옥진明玉珍이 세운 왕국을 평정하자 고려는 정몽주를 보내 하례하게 했다. 당시 명나라는 전쟁에 필요한 말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고려는 거부를 못하고 있었다. 1374년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천 필을 가져가야 한다면서 채빈과 임밀 등 사신을 보내왔다. 공민왕은 할 수 없이 최영을 시켜 제주도의 말 1천 필을 빼앗아왔다. 그런데 이때 공민왕이 내시의 칼에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살인범을 체포한 이인임일파는 10살 나이의 어린 우왕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일은 계속 꼬여 이번에는 명나라 사신 호송책임을 맡은 김의金義가 채빈을 살해하고 임밀을 붙잡고 북원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처럼 고려 조정에서 의견이 분열되는 사이 귀화 의사를 타진했던 유익劉益 등 은 명나라에 투항하여 금주, 복주, 개평, 해성, 요양 등을 바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이맥은 고려국본기에서 “오호라! 당시 청론淸論을 떠들던 무기력한 자들이 한갓 편안함을 좇기만 일삼아 좋은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마침내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뜻 있는 사람의 한恨이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구나”라고 통탄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고 최영과 이성계는 왜구 토벌에서 공적을 세워나갔다. 1388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에 속하던 땅이니 이제부터는 명나라가 차지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우왕은 최영의 뜻을 받아들여 요동정벌 계획을 세웠다. 

팔도도통사로 임명된 최영은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명령했다. 그러나 친명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개경을 접수했다. 이후 이성계는 최영을 귀양보내고 우왕을 내쫓았으며 대신 아홉 살 창왕을 내세 웠으나, 창왕은 1년 만에 강화도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공양왕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이로써 500년의 고려 왕조는 문을 닫게 된다. [사진]



고려 왕조를 뒤흔든 묘청의 난(17세 인종, 1135년)

고려국본기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김부식의 모함에 대해 윤언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해표自解表에서 한번쯤 멈추고 갖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묘청이 이끄는 서경파와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파 사이에 얽힌 복잡한 갈등관계를, 그것도 천년 전 격동의 시기에 일어났던 복잡한 사건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기록에 의존해서 큰 맥락을 파악할 수는 있다.

윤언이尹彦頤(1090~1149)는 윤관의 넷째 아들로서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김부식金富軾(1075~1151)과 쌍벽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사실 윤언이와 김부식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뒤틀린 관계였다.

윤언이는 아버지 윤관이 지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비문을 예종이 김부식金富軾에게 고치게 하자, 김부식이 사양하지 않고 함부로 고친 것에 대해 섭섭함을 갖고 있었다. 1133년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주역 강의를 했는데 이때 윤언이는 김부식이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반론을 제기하여 이번에는 김부식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서경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경 천도운동이 결국 개경파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자 서경파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묘청이 조광, 유참 등과 함께 서경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인조로부터 묘청 토벌을 명받은 김부식은 먼저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인물들인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김안金安 등의 목부터 베었다. 이것은 개경파가 서경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고 한다.

윤언이는 김부식의 부하가 되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이 과정에서 김부식은 윤언이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부대를 작전 방향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이후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함께 진압했던 윤언이에 대해‘ 정지상 등과 결탁하여 칭제건원을 언급하고 붕당을 조성하여 반역을 꾀했다’는 상소를 인종에게 올려서, 윤언이마저 좌천시켜 버렸다. 이로써 김부식은 고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광주목사로 좌천된 윤언이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인종은 김부식의 상소문을 윤언이에게 보내 주었고, 이 상소문을 읽어 본 윤언이는 비로소 자신의 억울함을 표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것이 바로 윤언이의 자해표이다. 이후 윤언이에게 사면령이 내려져서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되면서 김부식은 수차례 은퇴를 청원한다. 이렇게 은퇴할 때가 된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고 만든 것이『 삼국사기』이다. 사실 윤언이는 묘청,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설을 주장하였을 때 서경 천도론에 동의하였으나, 묘청 등이 정변을 기도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김부식은 윤언이를 정지상과 내통했다고 모함한 것이다.

또한 김부식은 정지상과도 악연을 맺었다. 정지상은 서경파였기 때문에 묘청과 연결고리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태평스럽게 개경에 남아있었다는 것만 봐도 반란과는 연관이 적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전에 먼저 정지상을 죽여버렸다.

약 백년 뒤에 무신집권기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백운소설白雲小說』에 의하면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 날 헛간에서 쭈그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었는데, 원한을 품은 정지상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김부식의 불알을 잡아당겨 죽였다고 전해진다.



한민족의 역사를 전수해준 고성 이李씨의 맥

고려국본기에는 고성 이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이존비 선생으로부터 아들인 이우李瑀, 손자인 이암李?, 증손자인 이강李岡, 현손자인 이원李原의 맥과 연관된 부분이 있다.

이존비李尊庇(1233~1287)는 고려 25세 충렬왕 때의 문관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왕세자가 글을 배우던 곳인 서연에서 우리나라의 자주와 부강의 정책을 논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환단桓檀·조선·북부여·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自主를 유지하였습니다. 또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실행하였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충렬왕 당시의 사대적 사고가 후세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니 자강을 꾀해야 한다고 거듭 아뢰었다. 그의 주장은 비록 당시에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사랑하는 연녀 생각에 다시 연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이존비가 거짓으로 시를 지어 충렬왕이 연녀를 포기하고 고려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존비는 나중에 그 일로 인해 귀양가게 되었고 태자(충선왕)와 조정 대신들의 간청으로 다시 복직되었으나 사자가 이르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충렬왕은 몹시 슬퍼하며 왕례로 장사지내도록 했다. 

그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고려국본기에 실린 칠언율시는 이존비가 둘째아들의 스승인 원오국사에게 보낸 시이다. 이 시는 첫째 아들 이우李瑀가 원나라 조정에 숙위宿衛로 들어가 일하고, 둘째 아들 이복구李復丘는 회당 상인에게 출가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복구는 원오국사 양천영에게 출가하여 뒤에 각진국사가 되었다. [사진]

이우의 아들이 바로 환단고기의 세 번째 책인『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1297~1364) 선생이다. 행촌 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서 유람을 하다가 밤에 태소암太素庵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에 소전素佺이라 하는 한 거사가 기이한 옛 서적[奇古之書]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었는데, 모두 환단桓檀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의 진결[桓檀傳授之眞訣]이었다. 이 책을 바탕으로 행촌 시중侍中이 지은 저서가 3종이 있다.『 단군세기』를 지어 시원국가의 체통을 밝혔고,『 태백진훈』을 지어 환단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도학道學과 심법心法을 이어받아 밝혔다.『 농상집요』는 세상을 다스리는 실무實務관련 학문을 담은 것이다.

고려국본기에는 이암의 정신을 알 수 있는 글이 여러 군데에 있다. 고려 조정에서 국호를 폐하고 고려 내정간섭을 위해 행성을 세우고자 의논할 때, 이암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에서는“ 조국과 민속의 존재 당위성을 강조하며 태조왕건의 건국 정신을 일깨워주고 지금이라도 자주부강의 계책을 꾀하고 간신배의 죄를 엄히 다스리자”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또한 신교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는“ 환웅천황의 신시개천의 의미를 강조하고 아직도 우리는 신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구도자로서의 느낌을 말하고 있고, 어명을 받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릴 때 백문보에게 말한 내용을 보면 국가발전 차원에서 신교신앙을 강조하며 천제의 근본정신이 보은임을 말하고 있다. 혼란한 시기에 정치가로서 그리고 대학자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뇌하며 대책을 갈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려가 원나라의 침략과 통치를 받으면서도 끝내 문닫지 않고 다시 일어선 정신적 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암의 막내아들 이강李岡(1333∼1368)은 밀직사로서, 어명을 받들고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리고 나서 시를 지었다. 복잡한 세상을 떠나 고요하고 한가로운 풍경 속에서 잠시 여유를 느끼며 그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 해(1362년)를 특별히 기억하자고 말하고 있다. 이강의 친구 중에 고려국본기에는 이색이 나온다. 이색은 이암을 아버지처럼 섬겼는데 이암이 이색에게 선가적 기풍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색은 이암의 농상집요 서문에 글을 실었다. 이강의 사위는 권근으로 고려국본기에는 권근이 참성단에서 천제드릴 때의 서고문이 있다. 서고문에는 마리산은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지내시던 곳이라고 하고 사직이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삼신께 고하고 있다.

행촌이암 선생과 일십당 이맥 선생, 해학 이기 선생과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 모두 고성 이씨로서 이존비 선생의 후손이니 지금 우리에게 환단고기가 전해지는 것은 고성이씨 가문의 노력과 공헌 덕분이다.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낸 국난의 해결사, 충장 정세운鄭世雲 (1361년)

고려는 연이은 전쟁과 내란에도 불구하고 500년의 역사를 지속한 나라이다. 고려의 대외관계를 보면 11세기에는 거란과, 12세기에는 여진과, 13세기에는 몽골과 전쟁을 벌였고 14세기에는 홍건적의 침략을 물리쳤다. 홍건적은 원나라 말기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서 홍두적紅頭賊, 홍건적紅巾賊이라 불렸다. 홍건적은 원의 반격에 쫓겨 1359년 12월 고려를 침범하여 압록강 연안의 백성들을 짓밟았다. 이듬해 초가 되서야 최영崔瑩 장군의 큰 힘으로 고려는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1361년 10월에는 홍건적이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2차 침략을 감행했다.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런 국난의 상황에서 해결사로 등장한 이가 정세운 장군이다. 원래 정세운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수행원으로 있 었고 공민왕이 귀국한 뒤에는 왕궁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시작할 때 걸림돌이 된 친원파의 핵심인물 기철을 죽인 인물이다. 고려국본기에는 정세운의 성품을‘ 충성스럽고 청백하다[忠淸]’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임금이 파천播遷한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겼다.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고 임금 또한 그를 믿고 총병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빨리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자使者를 보내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소서”라고 임금에게 여러 번 청원했고 마침내 20만명의 군사를 모았다. 반격준비를 마치고 전선으로 출발하려 할 때 수문하시중이었던 이암이 격려의 말을 전했다.“ 강력한 외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황성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삼한三韓의 치욕이로다. 공이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어 무기를 들고 군사를 거느리니, 사직이 다시 편안해지고 왕업이 중흥함이 이번 한판 싸움에 달려 있도다. 우리 임금과 신하는 밤낮으로 공이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로다.”

정세운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개경을 완전 포위하여 총공격을 퍼부었고 홍건적 20만명 중에 10만명이 죽고 남은 무리는 패주함으로서 전쟁은 끝이 났다. 정세운이 아니었다면 몽골의 피해를 당한 고려의 백성들은 다시 한번 약탈과 살육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세운은 승전 후에 김용金鏞의 시기심으로 인해, 김용의 사주를 받은 안우安祐에 의해 죽게 된다. 김용은 다시 공민왕을 죽이려고 했으나 최영 장군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 고 결국 처형되었다. 나라를 구하자마자 시기질투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장군. 그나마 환단고기에 그의 역사가 기록되어 그의 한을 달래주고 있다. (고려의 대외관계, 맨앞 지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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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의리더십] 끝까지 백제를 지킨 충혼聖傑 계백 장군

계백장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열전에 황산벌 전투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 남아있고 다른 전해오는 기록은 없다. 「대동지지大東地志」라는 책에“ 階伯 名升 百濟同姓”(계백의 이름은 '승'이며 백제와 동성이다)이라는 기록이 있다. 성은 부여씨이고 계백을 별칭으로 추측한다. 흥수興首, 성충成忠과 함께 백제의 삼충신三忠臣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말기의 정세

641년, 무왕武王이 죽고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리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으나 신라와의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하자 자아 도취되어 향락과 사치에 빠져들게 된다. 좌평佐平이었던 성충이 나라를 위해 충언忠言을 올리지만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656년 성충은 외적의 침입이 있을 시 육로에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백강白江을 막아 험한 곳에 의거하여 싸워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다. 탄현은 보은報恩의 탄현(신채호)이고 백강은 흥수가 말한 바 기벌포伎伐浦이다. 성충을 이어서 흥수가 좌평이 되지만 역시 충언을 올리다가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황산벌 전투 상황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金庾信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것을 주장했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귀양 중이던 흥수가 왕의 요청에 응해,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白江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炭峴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 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신라군은 그 해 5월 26일 출발해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른 뒤, 7월 10일 백제의 도성인 사비에서 당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있었다. 탄현을 진수進守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기를“ 고구려의 안시성주 양만춘은 5천의 군사로써 당나라 군사 70만을 깨뜨렸는데, 우리 5천의 군사들이 한사람당 10명을 당해낸다면 신라의 5만 명을 어찌 겁내겠는가.” 라고 하였다.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道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 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황산벌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당군과 합세하기로 한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했다고 해서 소정방이 신라독군新羅督軍인 김문영金文穎을 참하려 했을 때, 김유신이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주려하니,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계백에 대한 총평

계백장군은 무너져 내린 백제의 운명을 알면서도 배수진의 자세로 깨끗하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의忠義를 지킨 장군이었다.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은 계백장군은 삼국의 충신 중 가장 으뜸이라고 평한 바 있다. 처자식을 죽인 것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이 행동은 전쟁 후 포로로 끌려가 노비가 되어 비참한 생애를 사느니 죽어 백제를 지키고 수호했던 충혼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온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나라가 무너져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백제의 대장군으로서 5천 결사대에게 보일수 있는 최후의 결의였을 것이다. 계백장군은 백제를 가슴에 품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가장 비극적인 장군이었다.

계백장군과 황산벌 전투가 주는 교훈

첫째로 계백 장군의 충의정신이다. 일신의 안위를 생각했다면 계백이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여러가지 있었겠지만 그는 의연히 죽음의 길로 나아갔다. 비록 방탕한 군주였고 무너지는 나라였지만 국록을 먹은 중신重臣으로서 의리를 다한 것이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과 조직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충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전세를 뒤바꾼 젊은 화랑들의 희생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는 4전4패의 상황에서 다시 사기를 충전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16세의 화랑이었던 반굴과 관창의 역할이 컸다. 이 나이 어린 화랑들의 충의로운 희생에 신라군 모두는 큰 힘을 얻어 승리할 수 있었다. 묵은 조직에는 젊은 피가 필요하다. 젊은이의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에너지가 타성에 젖은 조직을 새롭게 일깨워 한단계 더 도약시킨다. 상제님의 초립동이 도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셋째로 국가와 조직의 운명을 좌우하는 리더의 역할이다. 백제의 의자왕과 왕자들의 모습에서는 군주君主로서의 솔선수범, 책임감, 통솔력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에 신라는 태종무열왕 대에서 문무왕까지 일관되게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나라의 지도층에서도 먼저 솔선수범하고 희생하였다. 항상 윗물이 밝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조직의 중심에 있는 리더Leader의 역량과 덕성에 따라 조직의 운명과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은 잠시도 경책과 계발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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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교과서 논쟁 가열, 역사교육은 어디로…


한국사교과서 논란

친일·독재 미화와 표절 의혹에 휩싸인 교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 역사왜곡 서술이 300건에 달하고 한글맞춤법 오류가 1000개 이상이라는 주장 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등 진보성향 단체들은 “역사왜곡에 심각한 사실기술 오류까지 중요한 것만 지적해도 298건”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교학사 교과서 이념의 뿌리는 2011년 5월 만들어진 한국현대사학회다. 이 학회는 “한쪽으로 편향된 역사 연구를 지양하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한다”는 입장을 표방했다. 보수우익 성향이 강한 이 단체의 학자들이 바로 문제의 교과서 편집진이다. 논란이 불거지자 교육부 장관은 ‘수정 및 보완을 통해 재검토하겠다’고 발표, 수정·보완 조치를 단행했으나 또 다른 논란을 빚고 있다. 교학사뿐만 아니라 한국사교과서 8종에 대해 무려 829건에 달하는 수정·보완 조치를 내린 것이다. 일각에선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국정교과서로의 회귀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한국사교과서의 역사

대한민국 국사교과서는 광복 후 1973년까지 검정 시스템으로 발행됐다. 중·고교 11종씩 나오던 국사교과서는 1974년 민족주체사관을 세운다는 목적으로 박정희대통령 시절 단 한권의 국정교과서로 전환됐다. 30여년간 유지돼 오던 국정체제는 이후 정권을 정당화하고 역사의식을 일률적으로 주입한다는 시민사회와 역사학계의 지적에 의해 검정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2003년 고교 선택과목〈 한국 근·현대사〉등이 검정제로 발행되면서부터다.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국사교과서(이후 한국사·역사 등으로 이름 바뀜)도 국정에서 검정제로 전환됐다. 2010년과 2011년에는 (현재 필수과목이 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도 각각 검정 체제로 전환됐다.

현재 초·중·고 교과서는 국가가 개발한 국정도서, 민간이 개발해 검정심사를 통과한 검정도서, 시도 교육감이 인정한 인정도서 등 세 종류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국가 정체성 및 이념 편향성 논란의 우려가 있는 국어·사회·역사·도덕 교과서는 검증을 받도록 돼 있으며,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검증을 담당하고 있다. 집필진을 출판사가 섭외해 교과서를 만든 다음 정부의 심의만 받는 검정과 달리 국정은 정부가 집필진을 선정하고 내용 감수, 발행까지 한다.

여전히 관심 밖인 한국상고사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일제가 조작한 역사의 잔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대한의 뿌리역사인 환국과 배달에 대한 기록은 아예 없다. 단지 족장이 다스리던 부족사회가 있었다고만 서술되어 있다. 고조선 건국에 대해서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족장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다”라고 게재돼 있다. 그러면서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서술했다. 앞뒤 잘라버리고 밋밋하게 끝나버리는 이 서술조차도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2009년에 겨우 개정됐다. 그 전까지는“ 건국되었다고 한다” 또는“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남의 나라 역사를 말하듯이,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듯이 서술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공무원 수험서, 육·해·공군의 역사 교재, 아동용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역사책에는 일제가 조작하고 왜곡한 한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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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성姓 : 출생의 계통
성과 씨를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성과 씨는 엄연히 다르다. 설문해자를 보면“ 성은 인지소생야(姓, 人之所生也)”라 하듯이, 성은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모계시대에는 여계女系의 혈통을, 부계시대에는 남계男系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또「좌전左傳」에 “천자건덕 인생이사성(天子建德 因生以賜姓)”이라 한것처럼 천자가 유덕한 사람을 세워 제후를 봉할 때 그 조상의 출생지로써 성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각각 개인의 성에 의하여 각자의 소속된 혈통을 분별할 수 있다.

씨氏 : 우리의 본관(동일 혈통의 지역 분산 표지)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에 각기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씨이다.「 좌전」에서 다시“ 조지토이명지씨(??之土而命之氏)”라 한 바와 같이 씨는 지명에 의하여 명명命名됨을 말하고 있다. 씨란 것은 성에서도 소유한 지역으로써 분별한 것이므로 우리의 본관에 해당한다. 경주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 등의 씨자에는 존칭적 의미도 잠재하여 있지만,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성씨의 역사

인류 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의식이 매우 뚜렷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씨족은 다른 씨족과 차별되는 각자의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되었다.『 환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배달국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 태호복희씨가 풍산風山에서 살게 되어 성을 풍風으로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5700년 전의 일이니 인류 최초의 성이 풍씨다. 풍씨는 이후 15대만에 끊어지고 패, 관, 임,기, 포, 이, 사, 팽이라는 여덟 가지 성을 강姜씨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씨는 강姜씨이다. 성씨 제도는 기실 동이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시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국가의 초기부터 성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 했기 때문에 성을 고씨라 하였으며 충신들에게 극克, 중실仲室, 소실小室 등의 성을 내렸다. 백제는 시조 온조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夫餘씨라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박, 석, 김 삼성의 전설이 전해오며 유리왕 9년(32년)에 육부의 촌장에게 각각 이, 정, 손, 최, 배, 설의 성을 사성賜姓(임금이 성을 내려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한서漢書」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 때에는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다. 또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사람들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역시 처음 왕들은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하다가 「진서」,「송서」 등의 기록에서 근초고왕 때부터 위덕왕 때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부터 부여夫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의 경우도「 북제서」에서 진흥왕을 김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씨라는 성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7세기 이전에 기록된 진흥왕의 순수비,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진평왕 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서 인명에 성을 사용하지 않고 소속부명(村名)과 이름만 사용하였다. 이상으로 볼 때 삼국의 초기에 우리 선조들은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부터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을 사용한 사람들은 왕실, 귀족, 사신들, 유학자, 무역을 하는 사람들에 국한되어 있었고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고려 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 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 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 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사성賜姓
우리나라에는 성을 바꾸지 않는다는 성불변의 원칙이 있으나 임금이 성을 내리는 경우에는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 경우는다음 세 가지인데

우리 식의 한자 성이 없어서 임금이 새로 성을 지어서 내림
-신라 유리왕이 6부의 촌장에게 각각 이 최 손 배 정 설의 성을내림
-조선 태조가 여진인 퉁두란에게 이씨 성을 내림
-조선 선조가 일본인 사아에게 김씨 성을 내림

이미 우리식의 한자 성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임금이 다른 성을지어서 내림
-신하의 특별한 공을 생각하여 사성하는 경우: 고려 태조가 김행에게 권씨 성을 내림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사성하는 경우: 고려 현종이 순응에게 손씨 성을 내림

중국의 임금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성을 내림
고려 문종 때 송나라 임금이 전임간에게 문씨 성을 내림


조선시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수가 없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의 대략 40%를 차지하였으니 성이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신분 해방과 상승으로 성이 없는 천민들 중에서 일부가 족보를 만들고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 계급이 타파된 것은 성의 일반화를 촉진시켰다. 양반 상민의 신분 격차가 없어지자 너나 없이 양반임을 주장하게 되고 매관매직은 물론 족보까지 사고 파는 행위도 성행하게 된다.

일제시대

일제는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民籍法을 1909년에 시행했다.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 서기書記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이때부터 성씨의 종류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일제 말기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겠다. 일본인식 창씨는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가 일제가 패망한 뒤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이 개시되면서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공포되면서 그 시작부터 무효가 되었다.

족보의 역사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심지어는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곳이 있는 등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해 온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 종에 13,000여 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족보의 기원

성씨 관계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漢나라 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 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 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서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이라고 하는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족보의 종류

1.대동보大同譜 - 같은 시조 아래에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가지고 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하여 만든 족보책이다.
2.족보族譜, 종보宗譜 - 본관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한 족보책으로, 한 가문의 역사와 집안의 계통을 수록한 책이다.
3.세보世譜, 세지世誌 - 한 종파 또는 그 이상이 같이 수록되어 있거나, 한 종파만 수록된 것을 말하며 동보同譜, 합보合譜라고도 한다.
4.파보派譜, 지보支譜 -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한 종파만의 이름과 벼슬, 업적 등을 수록한 책이다. 이들 파보에는 그 권수가 많아 종보를 능가하는 것도 적지 않다. 파보는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증가되어 가고, 그 표제에 연안김씨파보, 경주이씨 좌랑공파보, 순창설씨 함경파세보 등과 같이 본관과 성씨 외에 지파의 중시조명 또는 집성촌, 세거지 지명을 붙이고 있으나, 내용과 형식에서는족보와 다름없다.
5.가승보家乘譜 - 본인을 중심으로 수록하되, 시조로부터 자기의 윗대와 아랫대에 이르기까지의 이름과 업적, 전설,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족보 편찬의 기본이 된다.
6.계보系譜 -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낸 도표로서, 한씨족 전체 또는 한 부분만을 수록한 것이다.
7.가보家譜와 가첩家牒 - 편찬된 형태, 내용에 상관없이 동족 전부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킨다.
8.만성보萬姓譜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국내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모아놓은 책으로 모든 족보의 사전 구실을 하는 것이다.『 청구씨보靑丘氏譜』,『 잠영보簪纓譜』,『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9.기타 - 『문보文譜』,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 『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와 같이 현달한 조상의 세계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나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등과 같이 조상 중 충, 효, 절, 의가 특히 뛰어난 사적과 공훈을 수록한 것도 있다. 또한, 환관(내시) 사이에도 계보를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이 다른 자손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를 보존하고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도있다.

우리나라 성씨의 수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으로 되어 있고 영조 때에 이의현이 편찬한 도곡총설에는 298성, 1908년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사성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있다. 1930년 조사에서는 250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 귀화 성씨는 442개로 집계되었다.



항렬표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사이의 세계世系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율법이며, 항렬자行列字란 이름자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돌림자라고도 한다. 항렬은 가문家門과 파派마다 각기 다르나 대략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한다.

1.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으로 쓰는 경우 : 金ㆍ水ㆍ木ㆍ火ㆍ土(금ㆍ수ㆍ목ㆍ화ㆍ토)를 변(한자의 왼쪽에 붙는 부수)으로 사용하여 세대순으로 앞뒤 이름자에 번갈아 쓰는 경우인데 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2. 십간十干순으로 쓰는 경우 : 甲ㆍ乙ㆍ丙……壬ㆍ癸(갑ㆍ을ㆍ병……임ㆍ계)를 순서적으로 쓴다.
3. 십이지十二支순으로 쓰는 경우 : 子ㆍ丑ㆍ寅……戌ㆍ亥(자ㆍ축ㆍ인……술ㆍ해)를 순서적으로 쓴다.
4. 숫자를 포함시키는 경우 : 일(一:丙ㆍ尤)ㆍ이(二:宗ㆍ重)ㆍ삼(三:泰)ㆍ사(四:寧)등으로 쓰는 경우

이름을 대신하는 다양한 이름들

아명兒名: 아이 때의 이름
나면서부터 가정에서 불려지는 이름으로, 대개는 고유어로 짓는데 천한 이름일수록 역신의 시기를 받지 않아 오래 산다는 천명장수의 믿음에서 천박하게 짓는 것이 보통이다. 아명은 가족뿐 아니라 이웃에서까지 부담 없이 불려지게 마련이지만, 홍역을 치를 나이를 지나면 이름이 족보에 오르고 서당에 다니게 되면서 정식 이름을 얻게 된다. 요즘에는 아명을 따로 짓지 않고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출생신고를 하고 호적에 이름을 올린다. 대신 요즘에는 뱃속의 아기를 부르는 이름인 태명台名을 짓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관명冠名: 관례 이후 부르는 이름
관명은 호적이름인데, 이를 얻게 되면 아명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얻은 이름은 평생을 두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입신양명立身揚名 현저부모顯著父母라 하듯이 과거장에서 이름이 드날리기만을 소망하는 것이다. 관명은 요즘으로 하면 출생신고를 하고 호적에 올리는 이름이다.

자字: 관명 대신 부르기 위해 만든 이름
이름의 대용물로서 가까운 친구간이나 이웃에서 허물없이 부르는 것으로, 대개는 이름을 깊고 빛나게 하기 위해서 화려하게 짓는 것이 보통이다.

호號: 본이름이나 자 외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
학문과 덕행이 높아져서 이웃에 널리 알려지고 존경을 받게 되면 호를 얻게된다. 호는 대개 학문이나 도덕, 예술에서 업적을 이루어 남을 가르칠만한 자리에 이른 사람만이 가지는 영예인데, 대개는 스승이 지어주거나 가까운 친구가 지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짓기도 한다.

시호諡號와 묘호廟號 : 죽은 사람을 부르는 이름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를 가리킨다. 이에 비하여 묘호廟號는 왕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때 붙이는 용도로 추증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두고 있는데,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주나라 주공周公 때부터 시법諡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한국에서는 신라때인 514년 법흥왕이 즉위한 뒤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라는 호를 증시贈諡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과 왕비, 종친, 실직實職에 있는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여 증시贈諡를 신중하게 진행하였다. 예를 들면, 조선 세종의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세종은 묘호이다.

우리나라에서 등록된 가장 긴 이름은?
대한민국 국적자: 박 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사랑스러우리(17자)
이중국적자: 프라이인드로스테주젠댄마리소피아수인레나테엘리자벳피아루이제(30자)
※이름의 글자 수는 당초에 제한이 없다가 10자가 넘어 불편한 경우가 생겨 1993년부터는 성을 제외하고 5자 이내로 제한하였다.



촌수 따지는 법

촌수는 기본적으로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한 마디로 간주하여 계산된다. 촌수로 정해지는 숫자체계는 친족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낸다. 나의 형제ㆍ자매는 부모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나와 부모 간의 1촌과 부모와 형제 사이의 1촌을 합하여 2촌 관계에 있는 것이다. 또 나는 아버지를 통해 할아버지로 연결되기 때문에 2촌 관계가 된다. 할아버지와 1촌 관계에 있는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나와 할아버지 사이의 2촌을 합하면 3촌 관계가 된다. 3촌의 자녀들은 4촌 관계에 있는 형제 자매가 된다. 촌수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한 마디로 추적하기 때문에 짝수(4촌 6촌 8촌)는 나와 같은 항렬의 사람들이고, 홀수(3촌 5촌 7촌)는 나보다 높은 항렬이거나 낮은 항렬의 사람들이다.



성씨의 고향, 본관本貫

본관은 관적貫籍, 본적本籍, 본本, 관향貫鄕, 적관籍貫이라고도 한다. 성이 아버지 쪽의 핏줄을 나타내며 시간에 따른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본관은 어느 한 시대에 조상이 살았던 거주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공간에 따른 연속성이 크다.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으로, 그 실시 시기는 지역적인 편차가 있으나 995년 (성종 14)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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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신시개천 5911년입니다!

배달은 동북아 역사의 출발

인류 최초의 국가인 환국의 종통과 국통을 계승하여 환웅천왕은 지금으로부터 5,911년 전 백두산 신시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습니다.

이로써 동북아 한민족사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환국 이래 배달, 조선을 거쳐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에 이르기까지 천자, 곧 상제님의 아들이 다스린 나라였습니다. 천자가 등극하면‘ 칭제건원稱帝建元’이라 하여 제일 먼저 황제라 칭하고, 대내외에 연호年號를 선포하였습니다. 연호를 통해 주체적인 세계관을 표현했고 새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사라져버린 단기연호

신교정신이 쇠퇴하기 시작한 고려는 말엽에 이르러 원나라에 충성하는 부마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연호를 사용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호칭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었습니다.

그 이후 오랜 사대주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 1897년 고종임금은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천자의 보위에 올라 새로운 국호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이 때 공포한 독자적인 연호가‘ 광무光武’입니다. 비록 천자국으로서 독자적인 연호는 사용하지 못하였지만 우리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단기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단기연호를 잃지 않았습니다.

1918년의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 3월1일의 기미독립선언서에서는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종 문서에서도 단기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광복 직후 법률 제4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는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라고 명기하고 국가 공식연호로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단기연호가 1962년 1월부터 금지되고 그때부터 서기연호가 일반화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의 경제협약에서 우리나라를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으며, 그들이 원하는대로 단기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서기(서력기원)를 사용하라는 제안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소중한 단기연호를 버린 것입니다.

배달연호사용은 역사광복의 출발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세계인이 부러워하는 경제·문화·IT강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이제 누천년간 중국과 일본이 심어놓은 거짓 역사를 청산하고 우리 스스로 만든 사대와 예속의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의 서막을 연 종주민족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여 새 우주 천지광명 역사의 주인공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배달연호 사용, 그것은 역사광복을 통한 우리의 정체성 확립과 자부심을 회복하는 출발점입니다.

나아가 지구촌 여러나라에 우리의 1만년 역사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알리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올해는 신시개천 5911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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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참성단은 문화사적 국보·보물

-국보1호 남대문, 보물1호 동대문! 이것은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로서 가슴 아픈 우리민족 역사말살의 대표 상징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보와 보물

대한민국의 국보1호는 남대문(숭례문)이고 보물1호는 동대문(흥인지문)입니다.※ 지난 2008년 2월 남대문이 방화로 인해 전소全燒되었습니다.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남대문을 국보1호로(1962.12.20), 동대문을 보물1호(1963.1.21)로 각각 지정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5년여 만에 온 국민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 속에 남대문이 복원되었습니다.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경복궁의 4대문으로서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다지만, 조선왕조의 궁궐도 아니고 4대문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이유를 아십니까?

남대문과 동대문은 일제의 전승기념문

남대문과 동대문은 원래 일제가 보물1, 2호로 지정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총독부는 1933년 8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제정, 남대문을 보물1호로, 동대문을 보물2호로 지정한 바 있다.

왜냐구요? 임진왜란 때 일본의 두 장수가 서로 먼저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을 탈취하려는 경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입니다.

1592년 음 5월 3일,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온 두 장수 중 고니시가 먼저 동대문을 돌파하여 한양으로 입성하였으며, 같은 날 가토는 길을 달리하여 남대문을 거쳐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남대문을 보물1호로, 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한 후 나머지 대문을 철거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일제에게는 대 조선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승기념문이었던 것입니다.

아직 해방되지 않은 한국역사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남대문을 국보1호로,
동대문을 보물1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일제가 만든 틀을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일제는 조선강점기 36년 동안 민족의 고유사서 30만권을 빼앗아갔고 그 밖에도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들을 약탈하고 말살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민족의 역사를 강탈하고 왜곡, 축소한 일제의 유산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보1호는 참성단

대한민국의 국보 1호는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이 되어야 맞습니다. 참성단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제천문화의 성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297년전, 옛조선의 초대 단군왕검께서 운사 배달 신하에게 명하여 장정 8천명을 동원하여 세운 제천단입니다.
역사적 가치로 보나 문화사적 가치로 보나 600년 역사를 가진 남대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한민족 원형문화의 국가적 유산입니다.
또한 『환단고기』는 현재 남아 있는 우리역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 고대사의 뿌리와 인류 창세역사의 원형을 동시에 밝혀주는 역사문화경전이 바로『 환단고기(桓檀古記)』입니다.
참성단이 국보1호라면,『 환단고기』는 보물1호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자격이 있는 1만년 인류사의 정통사서입니다.
※참성단塹城壇은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제천단’으로 단군조선부터 근세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주재자이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온 한민족의 고유한 제천성소祭天聖所이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상생출판 완역본 99쪽 )
戊午五十一年(무오오십일년)이라 帝命雲師倍達臣(제명운사배달신)하사
設三郞城于穴구(설삼랑성우혈구)하시고
築祭天壇於摩璃山(축제천단어마리산)하시니 今塹城壇(금참성단)이 是也(시야)니라.
재위 51년 무오(단기 51, BCE 2283)년에 왕검께서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강화도의 옛이름)에 삼랑성三郞城(강화도 정족산성)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摩璃山(=마니산摩尼山)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곧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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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의 제천문화

인류문화의 원형이며 한민족의 하나님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의례이자 문화행사인 천제. 수천년을 내려온 천제문화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요.

5,900년전 환국의 정통을 계승한 환웅천황은 신시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배달이라 하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습니다. 환국과 배달국의 신교를 계승한 단군왕검도 백성들과 함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며 조선의 개국을 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천년에 걸친 이웃나라의 침략과 역사왜곡, 그리고 우리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지금 한국인은 한민족 문화의 원형이 무엇인지, 계승해야 할 참 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STB스페셜 이번 시간은 한민족과 인류문화의 원형인 제천문화를 통해 진정한 한문화, 한류의 원류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 STB


제천문화의 뿌리는 하늘 인식

제천문화의 뿌리는 하늘 인식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늘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인식하는가 하는 사실을 모르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은 있을 수 없죠. 하늘인식의 뿌리는 환웅시대부터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뿌리를 좀더 고대 태초의 시간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 사학계에서 쓰는 시대구분의 상투성을 극복해야 제천문화의 뿌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중심으로 시대구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오늘 주제에 따라 제천과 하늘을 나타내는 데는 환웅이라는 말이 더 적절해서 인물 중심으로 환웅시대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사관이 따로 있고 역사해석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료와 사관이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사료에서 사관이 나오고 사관이 있어야 또 사료가 제대로 해석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논리로 봤을 때 우리나라 사료는 도외시하고 다른 나라 사료로 마련된 역사이론을 사관으로 가져와 역사를 보는 것은 우리 역사 이해의 올바른 길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는 물론이고 민족 국가의 출발점도 단군조선이 아니라 그 이전에 환웅의 신시고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봅니다.

환웅시대의 세계관

하늘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은 제천 양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 세계관을 아울러 이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전통이 후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한 지속의 원류, 뿌리에 해당되는 세계관을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는 사상적으로 홍익인간이념이고 또 하나는 종교문화적으로 천신신앙, 또는 제천문화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홍익인간과 제천문화는 서로 소통합니다.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과 하늘을 숭배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통합돼 있다 하는 점이 오늘 논지의 핵심입니다.

환웅시대는 정치적으로 말하면 천황시대이고, 국가적으로 말하면 신시고국(국호에 따르면)이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천신신앙시대이며, 사상적으로는 홍익인간이념을 추구하던 시대이고, 사회적으로 말하면 정착생활하는 공동체 시대,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농경문화 중심의 재세이화 시대입니다. 따라서 천신신앙, 제천문화는 천손강림, 홍익인간 이념, 재세이화 등 환웅천황께서 다스린 360여사의 여러 가지 맥락을 함께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천天=환桓=해(태양) 삼국유사의 표기에 의하면, 한자말 표기와 우리말 표기를 함께 해두었습니다. 환인+천제, 환웅+천황, 이렇게 해놨습니다. 환인이나 환웅은 우리말 표기죠. 환하다 또는 ‘밝다’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한자 천(天)과 환(桓)은 서로 일치되는 개념입니다. 환한 것이 하늘이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입니다. 환하다는 것은 빛이 밝다는 뜻도 있고 전망이 무한대로 탁 틔어 있다는 공간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는 환하다. 하늘이 곧 우주고, 우주의 중심 상징을 이룬 것이 해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말하려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환桓에서 단檀으로 그런데 환인, 환 웅시대에 이어서 단군이 등장합니다. 이때부터는 환 자 계열에서 단 자 계열로 바뀝니다. 천제와 천황에서 왕검으로 바뀝니다. 세상의 왕이라는 것은 천의 개념 곧 해하고 좀 다르게 단 자로 나타냈습니다. 박달나무 단 자를 써서 밝을 단, 박달 임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령 해의 밝음과 일반적인 빛의 밝음은 다릅니다. 해는 불덩어리잖아요. 볕이 있습니다. 해는 햇빛, 햇볕, 햇살, 이렇게 말하는데, 달은 밝지만 달볕이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달빛밖에 없어요. 우리가 불볕더위라 말할 때 불볕이 뜨거운 햇볕을 말합니다. 불(火)과 해(太陽)는 서로 통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해는 하늘이고 달은 땅이 아닌가. 아사달, 양달, 윤달 이런 말 속의 달이란 땅, 흙덩어리죠. 해와 달리, 지상세계를 우리말 수준에서 구분해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늘=해→하나님=조물주 그런데 잘 아시는 것처럼, 해라는 것은 달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해는 볕에너지를 통해 모든 존재 자체를 있게 할뿐만 아니라 해가 없으면 달도 아무 소용 없어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해로부터 비롯되었고 모든 생명은 해로부터 태어나고 생육됩니다. 그러니까 해는 뭡니까? 하나님이자 조물주고 어떤 의미에서 창조주입니다.

그러니까 환웅천황은 해를 상징하며, 환웅천황이 이 땅에 내려와서 신시를 연 것은 하늘에서 해가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강림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시는 무엇인가? 당연히 나라이름이죠. 왕이 있으면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으면 왕이 있는 법인데, 환웅을 천황이라고 했는데 나라가 없었겠습니까.

환웅은 천황=천신=천자, 신시는 신국(신정국가)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가 세운 나라 부여가, 고구려 이전에 이미 있어 해모수와 주몽이 서로 연결관계에 있습니다. 또 박혁거세 이전에 하늘에서 내려온 육부 촌장이 있어요. 육부촌장과 박혁거세의 신라, 이 둘이 세트(set)를 이룹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황의 신시와 지상에서 태어난 단군의 왕검조선은 하나의 세트를 이룹니다. 이 신화체계가 아주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환웅천황은 혈연적 계보로 말하면 신통神統이죠, 천자입니다. 천자는 정치적인 칭호로 말하면 천황이고 종교적인 존재로 말하면 천신입니다. 환웅은 신시고국의 천황이자 하늘 천제의 아들인 천자이며 종교적으로 말하면 천신입니다. 천황, 천신,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는 천국이죠. 그러나 하늘나라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신국입니다, 신정국가죠. 천을 환으로 환원시키면 환국, 환웅이라는 환한 주체가 다스린 나라, 환국이다.‘ 한’민족,‘ 한’국의 명칭이 이미 여기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황이자 해를 상징하는 왕이 다스린 백성들은, 당연히 하늘을 섬기고 해를 하나님으로 숭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태백산=크게밝은산, 신단수=신밝은나무 환웅천황이 내려온 곳 태백산 신단수. 태백산은 지리적으로는 높은 산을 뜻하지만 개념적으로는 크게 밝은산, 밝산이죠. 밝은 것이 붉은 것이고, 최대로 밝은 것이 흰색입니다. 그러니까 백산은 곧 밝산이죠. 신단수라고 하는 것은 신 밝은 산. 신은 곧 해이니까 해 밝은 산, 또는 해뜨는 산, 해가 하늘에서 내려온 해 내림 산,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백산 신단수라고 하는 것은 이 땅의 지상세계, 인간세계와 천상세계를 서로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태백산 신단수는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 공간,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공간으로서 신 내림과 신의 현현이 이뤄지는 제의 공간이자 신정국가의 정치적 성소라 할 수 있다. 

해모수=해모습, 혁거세=붉은해 그런데 왜 신시라고 했을까. 신단수 밑이니까 신수라고 해도 될텐데. 이런 문제들을 더 따져봐야 됩니다. 그 자체로 따지기 어려우면 그 후에 해모수라든가 박혁거세 같은 사상과 이념에 의해서 형성된 건국시조신화가 있거든요. 저는 태양시조사상에 입각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모수도 아침에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다스리다가 저녁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해, 그 자체입니다. 해모수라는 말이 해모습이다. 그 아들 해부루는 해의 뜨거움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다스린 나라가 부여죠. 부여는 한자말이지만, 원래‘ 부’가‘ 불(火)’을 나타냅니다. 지금도 불과 관련된 연장은 ‘불’이란 말을 쓰지 않고 부지깽이, 부삭, 부뚜막이라고‘ 부’ 자를 씁니다.

그 다음에 혁거세는 하늘에서 큰 자주빛알로 내려왔는데, 이것은 아침에 뜨는 해의 모습이에요. 거기서 아이가 나왔는데 몸에서 대광명의 광채가 났어요. 그게 해의 밝은 빛을 나타냅니다. 더욱이 이름 혁거세는 우리말로 붉은 해다, 붉은 해가 밝은 해잖아요.

神→申, 申의‘ |’는 햇살, 해 최근에 김양동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의 한자말 신(神)은 납 신(申) 자에서 왔는데 이것이 한 획, 세로로 뻗은 한 획에서 왔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해, 햇살을 나타낸다고 교수신문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분의 연구에 의하면 ‘불’이 원래 우리말인데 한자로 나타낼 때 날 일(日) 변에 나타날 출(出) 자 써서 한자말 소리값으로‘불(昢)’이다. 불을 뜻하는 한자어는 화(火) 자에요. 그러니까 해 뜨는 것을 불이라고 한 것은 동이족에서 온 것이죠. 그리고 이는 신단수라든가 아사달, 또는 환웅의 신시고국의 국명과 굉장히 밀접하다.
‘◀神’의 고본자는‘ 申’이며 그 뿌리는 빛살, 햇살을 상형해서 나타낸‘ ㅣ’자이다. 태양의 고유어로‘ 살, 날, 해, 불’이 있으나 살과 불은 현대어에 사용하지 않고 현재 해와 날만 남아있다. … 해가 뜨는 새벽을‘ 불’(昢)이라 쓰고 말하는 것은 해를 하느님으로 믿고 숭배하는 환웅시대의 태양시조사상에서 비롯된 것. -김양동『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신단수=신불[신밝은숲, 神巿(슬갑 불)] 〉 신시神市(저자 시로 오인)
신시의 우리말을 한번 추구해보면, 시(市)라는 것은 저자가 아니다. 시라는 것이 슬갑 불(巿) 자하고 같은 글자에요. 컴퓨터에 치면 똑같은 모양이 나와요. 그러니까 삼국유사에 오타가 많은데 슬갑 불 자를 신시로 새길 수 밖에 없어요. 슬갑 불이란 초목이 무성한 것을 나타낸다. 신단수란 신 밝은 숲인데, 초목이 무성한 숲이다. 신불이 한자말로 신시로 읽힌 거죠.

왜 신수라 하지 않고 신불이라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불 자의 소리값을 가져왔다고 봅니다. 아까 신이 하나님이자 해를 상징한다고 했죠. 우리말로 하면 신+불은 곧 해불이에요. 해불은 뭡니까? 해부루이고 부여이며, 이런 명칭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저는 해불이 아사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신불=해불=아사달)
◀신시(神市)라는 한자표기는 우리말‘ 신 밝은 숲’이란 의미이고 해불, 해부루, 아사달과 의미가 상응한다. 우리말이 한자로 기록되면서 ‘해불(昢)’은‘ 신시’로‘ 아사달’은‘ 조선’으로 표기된 것이다.

한울(하늘,우주)의 중심은 한알(해) 환웅시대의 왕이름이나 나라이름을 추적해보면 옛날 사람들이 하늘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령 무가에 하늘을 옛날표기로 〈한++ㄹ〉 해서 한알, 한을, 한얼, 한올, 한울, 하날이라고 표기되기도 합니다. 서로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어요.

한울이라고 하면 큰 울=우주를 나타내는데, 우주가 바로 하나님이죠. 한알이라고 했을 때는 그 한울의 중심이 되는 한알, 해가 아닌가. 그러니까 한울님이 하나님이고, 한알님=해가 곧 하나님이 아닌가, 이렇게 추론 가능합니다.

여기서 알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모든 생명의 태초는 알의 형태로 존재하죠. 특히 날짐승의 새끼는 알로 태어나잖아요. 주몽도 알에서 태어났고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납니다. 신라, 가야의 왕도 황금알의 형태로 태어납니다. 알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알은 바로 태양이고 생명의 씨앗이다.※ 위에서 혁거세가 붉은 알, 자주빛 알로 태어났고 우리말로는 붉은 해(밝은 해)라고 했는데, 홍익인간이념의 다른 표현이 혁거세 사상이다. 저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날짐승은 알이라고 하는데(날짐승은 천신하고 연결) 길짐승은 새끼라고 합니다. 사람은 아이 또는 아기라고 하는데, 이 말도 알에서 왔어요. 경상도 방언에는 아직도 아기, 아이라는 말을 안 쓰고 알라 또는 얼라, 이렇게 말합니다.‘ 알’을 낳은 것이‘ 알라’,‘ 아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주도는 달걀을 독새끼(=닭새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새끼, 알, 아기는 같은 말이다. 생명의 근원이자 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 알의 모양이 표주박 고지 같아서 박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밝다는 뜻입니다.‘ 환인+천제’‘ 환웅+천황’ 처럼‘ 박+혁’이죠. 박은 우리말이고 혁은 한자말입니다. 그 옛날 신화를 기록하는 세트와 룰, 문법이 그렇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응제시집주應製詩集註』
降於太白山(강어태백산) 神檀樹下(신단수하)
是爲桓雄天王也(시위환웅천왕야) 桓或檀山(환혹단산)



신시의 주무대는 홍산

역사적인 시점은 무형의 것이지만 역사적인 공간은 유형의 것입니다. 환웅시대의 신시라는 고국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건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환웅의 개념, 혁거세, 해모수, 밝사상, 또 신시의 순우리말 ‘해불’ 등을 생각했을 때 아, 거기였구나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응제시집주應製詩集註※』에 보면 태백산을 다른 말로 환산, 단산이라고 했어요. 환한산, 밝은 산. 그러면 해불, 환산, 태백산, 단산 같은 개념이 무엇이 있을까요? 홍산(紅山)입니다, 붉은 산. 지금 지도상의 홍산이 바로 신시 고국의 본거지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홍산 주변에 있는 같은 시기의 문화는 전부 다 홍산문화입니다. 그러니까 우하량에 있는 것은, 홍산에서 제법 먼 곳에 있어도, 적봉시에서 벗어나 있다 해도 다 홍산문화라고 합니다. 그렇게 수렴하는 것이죠. 그 지역의 흙은 온통 다 붉은 색입니다. 여기가 바로 해부루 도시, 신시, 홍산, 적봉, 이곳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형 천제단 모습 흥미로운 것은 유일하게 천제단이라고 돼 있는 곳에 보면 돌돌림으로 세 겹의 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문화유산이 한반도에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제단이 아닌가. 우리들이 해를 그리면서 햇빛의 강렬함을 제대로 나타낼 때 동그라미를 여러 겹으로 그리죠. 이것이 천제단이라는 것은 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적석총은 천제단 우하량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적석총인데, 무덤이자 제단입니다. 제가 볼 때는 ‘천제단’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주 공들여서 돌로 피라미드형 무덤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동원됩니까. 국가체제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런 문화유산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도 없고 만들어질 수도 없죠. 그런데 피라밋과 달리 위를 평평하게 했어요. 때로는 흙을 원형으로 다졌어요. 이런 제단들이 우하량 구릉 지역의 가장 높은 곳에 즐비하게 있습니다.

고조선시대 고인돌

고인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고인돌을 무덤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덤이자 제단구실을 했다는 거죠. 고인돌이 산등성이 아주 위에 있었어요. 그래서 지역주민들이 높은 데 있는 고인돌은 해를 상징하고 아래에 있는 작은 고인돌은 달을 상징한다 했어요. 해를 상징하는 고인돌에서 무엇을 했겠어요? 천제를 지냈다. 어디서 보든지 다 우러러볼 수 있고, 여러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중국 학자들은 적석총을 보고 묘지이면서 제단 구실을 한 것이 신통하다, 이것이 홍산문화의 특징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고인돌을 공부한 사람들은 무슨 소리냐,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고조선 문화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고인돌과 같은 양식이라는 것이죠. 쌓은 방식과 묘지를 쓴 방식만 다르지 기능은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인돌에 족장이 묻혀 있겠죠? 족장은 종교적으로 말하면 제사장이죠. 천제를 지내는 제사장. 환웅천황은 천자이자 천제를 지내는 제사장이었어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주권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인돌 문화와 적석총 문화는 이렇게 만납니다.

고구려시대 장군총의 천제단

장군총의 제일 꼭대기에 전각 건물이 세워졌다는것이 윤명철 교수의 연구 논문에 있습니다. 왜 평평하게 만들고 전각을 세웠을까요? 그것은 제단이었다고 봅니다. 개천절에 제사지낼 때, 야외에서라면 비가 올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비 맞지 않게 했겠죠. 우하량의 적석총이 노천형 천제단이라면, 장군총은 고구려시대에 만든 전각형 천제단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옥기문화의 세계관은 온생명론적이다 천제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의 또 하나가 옥기문화입니다. 시대구분 하면서 왜 토기시대와 옥기시대는 구분하지 않는가. 다른 나라에는 옥기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옥기시대가 있었다.

옥기를 보면 아주 여러 가지 유형이 있어요. 호랑이, 부엉이, 돼지, 나비, 자라, 물고기, 누에 등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날짐승, 물짐승, 지상에 있는 짐승, 벌레까지 다 있어요. 곰이라는 것은 극히 일부입니다. 그걸 가지고 곰 토템하고 연결시키지만, 토템문화 수준에서는 그런 옥기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발전된 농경문화, 오랜 정착문화가 있지 않으면 적석총을 쌓을 수 없고, 옥기도 만들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옥기가 적석총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옥기문화를 토템문화론(곰, 돼지 등)로 연관 짓는 것은 문화를 해석하는데 아주 요소적 해석이고 원자론적 접근입니다. 총체적인 해석을 해야 되요. 옥기문화가 가지고 있는 세계상을 인식해야 합니다. 옥기문화는 인간세상의 삼라만상의 뭇존재를 다 형상화했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게다가 옥기라는 것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신기, 제기 구실을 했다. 여러분, 옥이 좋은 것은 다 아시잖아요. 옥매트, 옥귀걸이 등 옥은 생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변하는 것이죠.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인간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 세상은 천상세계와 상대되는 개념이거든요. 물리학에 온생명 이론※이 있는데, 진짜 완전히 독립한 지속가능한 생명은 태양계고, 그 생명의 중추가 태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지구상에 사는 하나의 개체생명으로서 다른 모든 개체생명과 함께 독립불가능한, 서로 의존적인 생명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의 옛날 제천문화는 하늘의 해를 환웅천황으로 인식하고 이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사상을 갖고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온 생명론적 생태학적 세계관하고 만나고, 그 중 일부가 옥기의 여러 유형 중 동물형으로 전부 다 나타났다고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옥기 중에 둥근 링이 아주 많아요. 이것은 장신구로 말하면 팔찌인데 과연 장신구였을까? 제 생각으로 그것은 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곡옥형이 있습니다. 태아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모든 생명의 태아 형태는 같잖아요. 그러니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뭇 생명은 서로 형상은 다르지만 태초의 생명은 다 같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적인 동질성하고 연결되는 것이죠. 하늘을 섬기면서 인간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서로의 관계가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면서 모든 뭇 생명이 인간과 더불어 공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최근 이론인 온생명론과 만나는 그런 천신문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고대 축제는 태양신을 섬기며, 신민동락한 나라굿 옛날에 천제를 어떻게 지냈을까요. 영고※, 동명, 무천이라는 축제 이름은 국호와 같아요. 동명왕이니까 고구려는 이 축제를 동명이라고 했던 거죠. 동쪽을 뜻합니다. 부여의 영고는 부여 해불, 해뜨는 영고, 해맞이 굿을 한 것이죠. 예는 무천이라고 했어요. 무천이야말로 춤추면서 하늘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죠. 감응어신 한 것입니다.
※영고迎鼓 북을 치며 해가 뜨는 것을 환영하는‘ 해맞이 굿’을 말한다. 후대에 신년맞이 영신굿의 근원이 되었다. 영고는‘ 시조왕맞이’이자‘ 천신맞이’의 뜻을 지닌 태양축제의 다른 표현이다. -임재해「 한국 축제전통의 지속 양상과 축제성의 재인식」(2010)

우리 고대 축제에 관한 중국측 기록을 보면 네 가지 키워드가 있어요. ①군치가무=남녀노소가 무리지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는데 ②주야무유=밤낮을 쉬지 않았고 그 다음에 ③연일 음주가무를 며칠씩 했습니다. 여러분 국중대회 하는데 지금처럼 KTX도 없고 고속버스도 없는데 어떻게 모였겠어요? 몇날 며칠 걸려서 천제단 있는 데로 무리지어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우하량 지역은 사통팔달 교통이 다 뚫려 있는 곳입니다. 동서남북의 온 백성들이 몇날 며칠 걸려 와가지고 하루만에 끝내고 갔겠어요? 며칠씩 주야무유로 했다.

그러한 축제 전통이 무천, 동명, 영고로 이어졌다는 거죠. 그래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보면 그렇게 모여서 축제를 했고 또 국중대회에 참여하러 갈 때에 아이나 어른이나 다 노래부르며 갔다. ④노래소리가 길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고대 축제의 기사내용이나 천제단이 있는 위치 등의 문화유산들이 서로 잘 맞아떨어진다고 봅니다.
※『 三國志「』魏志東夷傳」
郡聚歌舞飮酒(군취가무음주) 晝夜無休(주야무휴) 其無數十人(기무수십인) 俱起相隨(구기상수) 踏地低昻(답지저앙) 手足相應(수족상응) 行道晝夜(행도주야) 無老幼皆歌(무로유개가) 連日聲不絶(연일성부절) 



이때의 천제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복종되어서 희생으로써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주체가 하늘이자 태양이다. 그래서 그 태양신을 섬기면서 대동굿, 신민동락하는 나라굿을 베풀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질의 응답]

태백산이란?

태백산은 단산, 환산, 홍산, 백산, 이렇게 얘기합니다. 장백산이니 태백산이니 뜻으로 말하면 밝은 산이죠. 해가 밝은 산, 또는 붉은 산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공간적으로 말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산입니다. 그러니까 높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인데 고산지역이든 야산지역이든 자기 지역에서 높은 산은 환산이고 태백산이에요. 또 그 산에는 천왕봉이 있어요. 높은 것이 천왕과 관계 있고, 천주 구실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 교감하는 거죠. 게다가 그 산을 더 높게 하는 것이 신단수와 같은 큰 나무죠.

단군이란?

신단수의 단(檀) 자는 나무 목 변에 박달나무 단 자를 씁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을 흙 토 변에 제단 단(壇) 자를 썼습니다. 환웅은 천황이잖아요. 그런데 단군은 인간 세상에서 태어난 땅의 왕입니다. 그런 점에서 박달나무 단 자를 써서 밝다는 기능적인 뜻을 나타낼 수 있고, 또 출현한 공간적인 땅을 대표하는 임금이다. 지군(地君)이다. 앞서 설명했듯 단은 달을 나타낼 수 있다. 양달, 응달, 아사달 할 때 땅을 나타내는 거라구요.

환웅과 곰족의 관계

그리고 같은 굴에 범과 호랑이가 같이 살았다. 이 문명은 어떤 문명이냐. 제가 다른 논문에 썼어요. 천신족인 환웅천황이 따르는 신시고국은 농경정착문화를 한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문명이고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었고, 곰족은 곰이 상징하는 것으로 봐서 채취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잡식생활을 한 거죠. 식성으로 보면 육식생활을 했고, 유목생활을 했다. 천지천날 주유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되려고 쏙과 마늘을 주고 100일 동안 햇빛 보지 말고 머물러 있으라 했는데 범은 그게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이탈했고, 곰은 어느 정도 천신족 환웅 신시고국의 문화에 가까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동화되어서 조선을 건국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홍익인간이란?

한자 뜻을 풀이하면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말인데, 여러 가지 맥락으로 보면 홍익인간 이념을 실현한 분이 누구냐면 환웅천황이거든요. 환웅천황은 어떤 분이예요? 하늘의 천신으로 살면서도 늘 탐구인세를 했고 지상으로 내려왔어요. 인간을 위해서 일한 거죠.

호족과 범족이 찾아왔을 때에도 원하는 대로 다 해줬어요. 인간 되기를 빌면 이렇게 하면 인간이 된다, 또 아기 배고 싶다하면 아기도 배게 해주고. 그런데 범족은 말을 안 듣고 내뺐지만 잡아다가 벌을 준 일도 없어요. 이것이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환웅천황이 우리에게 보여준 거죠. 천국 가길 바란 그런 신앙이 아니라, 자기보다 아래 세상에 대해서 늘 따뜻한 관심을 갖고, 감싸안고, 생태학적으로 서로 공생하는 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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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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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을 외워봅시다!!

무척 짧지만 담긴 의미는 그 어떤 경전보다도 심오합니다. 한민족의 뿌리시대인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시대 이후 북부여와 고구려를 거쳐 대진大震에 이르는 역사에서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까지 즐겨 강론하고 배워왔던 경전입니다. 바로 천부경天符經 81자입니다. 3분의 1이 숫자로 구성되어 있는, 1에서 10까지의 숫자가 나오는 인류 최고最古의 수학경전이 바로 천부경입니다.

천부경의 유래

천부경天符經은 인류 최초의 국가 환국桓國에서 탄생하여 동방의 백성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구전지서口傳之書입니다. 배달국倍達國 초대 거발환 환웅은 신지神誌(배달국과 고조선의 관직명)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이라는 옛 문자로 처음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고조선 시대에는 신지神誌가 천부경을 전서篆書로 태백산의 돌에 새겼으며, 이전고비篆古碑(전자篆字로 기록된 옛 비석)에 적힌 경문을 신라의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이 한문으로 번역하여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천부경은 인류 문화사의 첫 경전

천부天符는‘ 하늘의 법’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천부경은‘ 하늘의 이법을 기록한 경전’을 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 배달국의 성인 태호복희씨는 천부경을 크게 깨달아 하늘에서 하도河圖를 받아내렸습니다. 천부경의 음양론과 상수象數철학을 더욱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 하도에서 팔괘八卦가 나오고 팔괘에서 주역周易의 64괘 음양론이 나왔습니다. 현세의 음양오행 문화의 근원에는 바로 천부경이 있습니다.

천부경은 천지를 주재하는 삼신상제님이 내려주신, 인류 최초의 계시록이자 인류 문화사의 첫 경전입니다. 천부경에서는 천지인을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이라 표현합니다. 하늘은 창조운동 뿌리로서 첫째되고 땅은 생성운동 근원되어 둘째되고 사람은 천지의 꿈 이루어서 셋째가 됩니다. 천부경에서는 인간이 하늘과 땅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가장 지극한 존재로 자리매김됩니다. 그 속에는 동양의 천지인 사상, 우주관의 기본인 음양론과 그 궁극 자리인 무극, 태극, 황극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동방 신교의 인성론과 그 총 결론인 태일太一 사상 역시 천부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천부경은 한민족 정신문화의 뿌리이자 세계 정신문화의 출발입니다. 동방 의학과 우주원리의 성서聖書인 황제내경과 도덕경이 모두 81편으로 이루어진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천부경 암송은 모든 공부의 시작

천자문의 첫 머리는 천지天地현황玄黃으로 시작합니다. 옛 사람들은 이렇게 하늘과 땅을 아는 것을 모든 공부의 시작으로 삼았습니다. 천부경은 우주의 근원과 생명의 순환을 노래하고 하늘, 땅, 인간의 가치를 밝혀줍니다. 천부경은 한민족의 으뜸 경전이자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이제 천부경 암송이 모든 공부의 첫 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새롭고,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그 의미가 깊어집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다함께 천부경을 외워봅시다. 인류 문명을 개창한 1만년 종주민족의 영광을 회복하고, 천지의 뜻과 하나되는 태일의 인간이 되어 홍익인간의 도를 세계 만방에 실현하자는 결의를 다지며 천부경을 힘차게 암송해 봅시다.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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