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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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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0일 무한도전에서는 토토가,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준비하는 모습이 방송됐다.

가수 이정현은 무대 콘셉트를 염두에 두고 준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근데 와호장룡같은 컨셉의 무술동작후에 버튼을 하나 누르면 고대문자같은 컨셉의 천이 내려오도록하는 컨섭인데

이 장면에서 천부경이 등장했다.

인류최초의 국가인 9천 년 전 환국 시절의 우주론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 처음 나타난다. 그냥 갑골문을 검색해서 그래픽으로 쓴건지 아니면 천재 김태호 피디가 의도적으로 쓴건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운 장면이었다.

동북아 삼국의 역사문제가 심각한 지금 인류문화의 원형을 담고 있는 천부경이 무한도전에 선보인 것은 신선했다.



이정현이 무대 컨셉을 설명하고 있다.





돈 걱정하고 있는 멤버들...ㅋ





무한도전 이정현 천부경 4분 35초에 나옵니다. http://youtu.be/2bdoe-Jdeqk

드라마 연개소문 속 천부경(1:56) http://www.youtube.com/watch?v=nFxii_Tpxjc

환단고기 천부경  (6:38) http://www.youtube.com/watch?v=rVhJoc_j3xY


이 한장의 천부경에서

 

천부경 하늘의 마음과 하늘의 이법과 하늘의 우주 통치법의 기본정신을 그린 하늘문자. 그 상징 언어로 내려주신 경전이 천부경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전하는 구어. 인류 문화사는 언어의 발전사다. 마음과 마음으로, 마음의 진리 정신을 형상화한 최초의 문자다.


 

동서인류문명은 바로 이 그림한장에서 탄생한 것이다. 천부경은 동서 4대문명권 지금은 5의 문명, 요하문명, 북방문명, 다른 말로 홍산 문화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 요하문명이 동서 4대문명을 탄생하게한 시원, 진정한 원형 문화다. 그래서 그 문화를 만든, 이 창세문명의 원형정신이 바로 이 그림 한장 천부경에 담겨있기 때문에 천부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잇다는 것은 인류의 뿌리문화, 문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문화 창조의 혼을 되찾고 이를 확인하고 이것을 직접 81자 천부경전속에서 체험하는 일이다. 이렇게 정의를 해볼 수가 있다.

 

천부경은 이 글이 주로 수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류문화가 수와 더불어 탄생을 했고, 수학으로써 인간의 문화와 역사가 함께 발전해왔다. 천부경은 우리 한민족과 동서 4대문명의 시원, 근원, 뿌리가 되는 최초의 나라 환국에서 탄생했다. 삼성조 역사문화의 근본을 깨달아가면서 내 몸 속에서 체화되어 가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깨달음의 경계에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볼 수가 있다.

 

천부경은 반 정도가 수로써 이뤄져 있는데, 수가 언어의 근본이다. 1에서 10까지 수의 기본 알아야하는데,자연수를 발명한 최초로 우주의 수의 이치를 찾아내고 우주의 이법과 인간이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냐?인간의 역사는 태고 역사시대. 환국은 1,2,3에서 뭘 주장했냐? 천부경은 단군의 조선시대는 무엇을 주장한 것이냐?

천부경은 1 3의 원리에서 하나이면서 셋의 원리로 되어 있다. 상중하경 으로 나누기도 하고, 천경 지경 인경으로 나누기도 하고, 99 81자로 되어 있다.

 

81자를 보면 크게 천부경은 하늘과 땅과 인간의 도리를 천지인 삼위일체의 경계에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 나온 진리의 원천, 그걸 수로써는 1로써 전하고 있는데 천지인 삼위일체의 조화경계에서 부터 진리대의,이것을 전해주고 있다. 천부경은 하늘과 땅과 인간에 대한 각각의 가르침으로 구분해서 상중하 삼경으로 나눠서 구성틀을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하늘에 대해서 땅에 대한 인간의 가르침으로 나눠서 보기 어렵게 되어있다.


『천부경』은 인류의 창세역사 시대인 환국 때부터 구전되다가 배달 시대에 문자로 옮겨진, 한민족과 인류의 최고最古 경전. 천부天符는 ‘하늘의 법’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천부경』은‘ 하늘의 이법을 기록한 경전’ 또는‘ 우주 이법의 주재자인 상제님의 천명을 기록한 경전’을 뜻한다. 총 81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글이지만, 천지인의 창조와 변화원리를 압축적으로 밝혀 준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역주자 안경전 천부경 강독 중에서 발췌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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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이웃 나라 일본

편집부

일본은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나라이지만, 역사적 측면을 들여다 보면 가까이하기 어려운 여러 사건과 악연들로 얽혀 있다. 특히 제국주의 식민통치를 포함해 일본이 한민족에게 남긴 깊은 상흔들은 쉽게 망각되지 않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있다. 아시아 동쪽 열도의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외부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내부의 문화적 개성을 극대화시켜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만큼이나 그 역할과 관계에 있어서 건설적인 패러다임을 요청받고 있다.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 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한국인들로부터 흔히들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불리는 일본日本Japan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는 나라이다. 동북아시아의 동경 138도 북위 36도에 위치한 일본은 홋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큐슈九州라는 전 국토면적의 97%를 차지하는 4개의 큰 섬을 중심으로 6,852개의 섬들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일본열도로 구성된 섬나라이다. 면적은 37만 7915㎢로서 한반도의 약 1.7배에 달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2만 9751㎞에 이르고 굴곡이 몹시 심하다. 하지만 국토의 73%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사가 급하고 험해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지역은 전 국토의 21%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열도는 기본적으로 한국과 같은 온대몬순기후에 속한다. 따라서 사계절이 뚜렷하고 여름은 고온다습, 겨울은 한랭건조하다. 그러나 일본의 기후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고 지역차가 크다는 것이 특징이다. 홋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북부, 중부 내륙고지內陸高地가 아한대다우기후亞寒帶多雨氣候에 속하고, 그 외 지역은 모두 온대다우기후에 속한다. 남북으로 긴 일본열도는 가장 북쪽의 홋카이도에서 가장 남쪽의 오키나와沖縄까지 위도 차이가 22도에 이르고 기온 차이는 16℃에 이른다. 일본열도의 연 강수량은 1,600㎜~1,700㎜에 이르러 세계적으로도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 속하는데, 특히 장마와 태풍에 의한 강수량이 연 강수량의 10%~40%를 차지한다. 장마는 초여름에 잦고 태풍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찾아온다.

일본은 일명 ‘불의 고리(ring of fire)’라고 부르는 환태평양조산대環太平洋造山帶의 일부로 화산이 많은데 166개 화산 가운데 60%가 활화산으로 이는 전 세계 활화산의 10%에 해당하며 지금도 폭발할 위험이 있다. 일본에서 제일 높은 후지산富士山(3,776m)을 비롯하여 해발 3,000미터를 넘는 대부분의 산이 화산활동에 의해 생긴 것으로 후지산, 미하라야마, 운젠후겐다케, 아소산 등 7개의 화산대가 있으며, 아소산, 운젠후겐다케, 사쿠라지마, 아사마산 등은 현재도 활동 중인 화산이다. 최근 발생한 화산에 의한 재해로는 1991년 나가사키현 운젠다케雲仙岳의 최고봉인 후겐다케普賢岳의 분화에 의한 피해가 있다. 그리고 2013년 8월에는 가고시마현의 사쿠라지마화산이 폭발적인 분화를 보였으며 2013년 11월에는 태평양의 일본영해에서 수중분화가 일어나 새로운 섬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열도는 해양판인 태평양판, 필리핀판과 대륙판인 유라시아판이 만나면서 지진대地震帶가 형성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지구 지진에너지의 15%를 내포할 정도로 지진활동이 활발한 곳이기도 하다. 도쿄 수도권에만 매년 40∼50회의 유감지진이 일어나며, 2년에 한번 꼴로 파괴적인 지진이 일어난다. 일본열도 전체로 보면 지진은 연평균 7,500여 회 발생하며, 그 가운데 1,500여 회는 유감지진이다. 일본에는 관동대지진과 같은 대지진이 70∼80년마다 주기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며 특히 2011년 3월 11일 미야기현宮城縣 센다이仙台 앞바다에서 발생한 동일본대지진東日本大地震은 규모 9.0의 강력한 지진으로 사망자가 1만 3000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일본의 역사

고대 시대
일본열도의 인류의 역사는 약 10만년 전에서 약 3만년 전 사이에 시작되었다. 당시의 일본 열도는 아시아 대륙과 붙어있었기 때문에 시베리아나 화베이 일대의 몽골 인종과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에 한반도로부터 이주민이 육로로 건너가 지금의 일본 지역에 정착하였다. 시베리아와 한반도에서 흔히 발견되는 면도날처럼 예리한 세석기(좀돌날 몸돌)가 일본 큐슈섬 후쿠오카현 일대에서도 발굴되었음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인류의 왕래가 이루어진 일본 열도는 최후 간빙기를 거치면서 약 12,000년 전에 대한해협과 쓰가루 해협의 생성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지만, 그 후에도 일본 열도와 대륙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일본 열도도 동아시아 문화권에 점차 편입되는 한편 동북아시아 지역의 최동단에 있다는 지리적 요인에 따라 다소 이질적인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열도의 고대 역사는 구석기 시대를 지나 BCE(기원전) 3세기 경까지 조몬繩文 시대(신석기)가 전개되었고, 이후 야요이弥生 시대(BCE 3세기~CE 3세기, 청동기)와 고분古墳 시대(3세기~6세기)를 거쳐 아스카飛鳥 시대(538~710), 나라奈良 시대(710~794),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로 이어졌다. BCE 8세기 경 이후 대륙으로부터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문화 양식이 전해지면서 각지에 ‘무라’(마을), ‘구니’(초기국가)와 같은 정치 조직이 천천히 형성되어 야요이 시대인 1세기~2세기 전후에는 각 구니의 연합체로서 왜倭라는 대규모 정치 조직이 출현했다. 이 연합 정치 조직은 3세기에서 4세기 사이의 고분 시대를 거치며 점차 통합되어 일본 최초의 통일 지배 세력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성립하였다. 야마토 정권은 5세기에 일본 대부분을 지배하였고 이때부터 세습제를 확립해 국호를 야마토로 하고, 일명 대군으로 불리는 오키미(大君:王)가 군림하였으며 오키미 밑에는 귀족계급이 형성되어 성姓을 부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이 시기에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왜倭로 건너왔는데, 특히 4세기 말에 백제百濟에서 한자漢字와 유교가 전래되고 6세기 중엽에는 역시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일본의 문화 수준은 향상되었다. 이러한 백제의 선진 문화기술집단의 주도로 일본의 ‘아스카飛鳥문화’가 건설되었다. 아스카 시대 초기에 야마토 정권은 백제 불교의 수용을 이끈 소가씨蘇我氏가 집권을 했으나, 645년 황족皇族인 나카노오에中大兄가 소가씨를 몰아내고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통해 대왕 중심의 새로운 개혁정치를 시작함으로써 야마토 시대는 막을 내렸다. 672년 덴무天武천황 집권시부터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와 ‘천황天皇’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710년에는 겐메이元明 천황이 오늘날의 나라奈良 서쪽에 있는 헤이조쿄平城京에 일본 최초의 수도를 세움으로써 나라奈良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른바 율령律令 국가체제의 최성기에 해당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완성되었고, 백제 유민의 유입과 견당사遣唐使의 파견 등으로 백제와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다. 반면에 거국적인 조사造寺 조불造佛 사업의 시행은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가재정을 파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 『고지키古事記』(712)와 『니혼쇼키日本書紀』(720) 등 두 역사서가 완성되었다.

794년에는 간무桓武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헤이안平安 시대가 시작되었다. 헤이안 시대의 초기에는 천황에 의해 율령律令 정치의 수정, 강화가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승려의 세력이 커져서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국정 운영을 주도했으며 귀족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득세는 정치의 부패로 이어졌고 이에 불만을 가진 하급귀족들의 반란과 도적들의 출몰 등으로 국정이 혼란해졌다. 이와 같은 귀족들의 세력 투쟁 사이에서 발달한 정치세력이 사무라이武士 계층이다.

중세 시대 
일본의 중세는 무사武士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간 시대이다. 약화된 귀족 세력을 대신하여 사무라이武士가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최초의 독자적인 무사 정권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로,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간토關東 지방을 기반으로 했다. ‘막부幕府(바쿠후)’란 본래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장군의 집무실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무사들이 정치적 힘을 갖게 되면서부터 사무라이 정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주군과 종자 사이의 강한 사적 연대를 근간으로 삼았으며 고대 율령국가나 동아시아 왕조체제와는 크게 다른 특질을 띠었다. 할복割腹 자살 의식과 검劍에 대한 숭배도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이다. 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義朝는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하여 독자적인 막부를 세워 조정을 보좌했는데, 1192년 요리토모가 세습적인 군사독재자인 쇼군將軍으로 공인되자 천황은 그의 권한을 재가하여 무가武家 정권이 성립됨으로써 조정과 막부가 나란히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1199년 요리토모가 죽은 뒤 막부의 실권은 호조씨北條氏 가문에 넘어갔으며, 1272년과 1281년 몽골이 두 차례 침략해왔으나 일본 무사들은 몽골의 함대를 대량 침몰시킨 태풍 ‘가미카제神風’ 덕분에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몽골 침략의 여파로 재정이 악화되어 체제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었고, 1331년 가마쿠라 막부에 맞서 일으킨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 반란과 파벌 싸움으로 인해 1333년 가마쿠라막부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고묘 천황를 옹립해 북조를 수립한 뒤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에 남조를 수립해 일본열도의 왕조는 둘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난보쿠초(남북조南北朝) 시대를 거쳐 확립된 무로마치室町막부는 귀족(공가) 세력의 거점인 교토를 정권의 소재지로 삼는다. 이로써 교토와 가마쿠라로 이원화되어 있던 무사와 귀족은 본격적으로 융합되어갔다. 무로마치 중기가 되면서 잇키一揆라 불린 민중 저항과 무사 세력 내부의 분열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467년의 오닌応仁의 난과 1493년의 메이오明応 정변 등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계속되는 내란과 사회적, 정치적 변동의 시기를 센코쿠(전국戦国)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홋카이도와 지시마千島(쿠릴), 가라후토樺太(사할린)의 에조치蝦夷地(아이누족의 거주지)를 점령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일본의 영토 범위가 확장되었다. 하지만 전국 시대 이후 하극상 풍조는 더욱 확산되어 갔고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이를 틈타 전국 다이묘大名(지방의 유력자; 藩主)들이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무로마치 막부는 1573년 제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됨으로써 무너졌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받들어 교토에 입성하면서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즈치모모야마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한 시대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전국 통일사업을 추구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뒤를 이어 1590년 일본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후 1598년 사망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근세 시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에도江戶막부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일본은 근세로 이행하였다. 에도막부는 전국시대 이후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을 거치면서 이전의 막부시대에 비해 중앙집권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해진 체제였다. 한편 16세기 중반부터 서양 상인과 기독교 선교사들이 일본에 몰려들어 서양 문명과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일본은 중세 봉건 사회가 서서히 해체되고 근세에 돌입하는 전환기를 맞게 되었으며, 도쿄·오사카·교토 등의 도시가 발달하고 농촌사회는 무라(마을,村)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에도막부는 바쿠한幕藩 체제, 즉 절대 지배자인 쇼군이 막부를 장악하고 그 아래 여러 영주계급(寺社·公家)들이 한藩이라는 권력기구를 통해 영내의 토지와 백성들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중한 신분제 하에 묶어두고 다스리는 통치 방식을 펼쳤다. 또한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시키며 200년 가까이 쇄국 체계를 유지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평화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을 촉진시켰고,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겐로쿠元祿 문화, 화정기化政期의 문화를 번성케 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徳川家綱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도시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부유한 상인층들이 사회와 문화를 주도하는 한편, 기득권 세력이었던 무사층은 관료화와 빈곤화의 과정을 겪고 농촌에서는 체제에 저항하는 잇키一揆가 끊이지 않는 등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내게 되었다. 에도막부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1716~1735년 교호亨保 개혁정책을 펼쳤고, 1767~1786년에는 다누마田沼의 정치라 하여 상업의 발전과 무역의 확대를 꾀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시도했으며, 1787~1793년의 간세이寬政 개혁에서는 에도와 전국 주요 도시의 소요와 농촌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 다양한 경제 개혁과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1841년 덴포天保 개혁에서는 막부의 권위 회복을 위한 정책을 실시했으나 다이묘와 농민의 반발로 실패해 막부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다. 결국 19세기 중엽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교류 과정을 겪고 메이지 정부군이 1868년 에도 성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에도막부는 붕괴하였고 근대로 이행하게 되었다. 

근현대 시대 
에도막부의 바쿠한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 복고를 통한 중앙통일 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으로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을 맞이한 일본은 급속한 개혁정책으로 봉건 질서를 해체하는 한편 근대 국가의 건설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인접국들과의 국경 확정을 행하여 가라후토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 양도하는 대신 지시마千島열도(쿠릴열도) 전역을 일본령으로 하였고, 난세이제도南西諸島와 류큐국琉球國은 류큐 처분을 통해 실효적인 지배력을 확보하여 지금의 일본 영토 범위가 거의 확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유 민권 운동이 이루어져 1885년 내각內閣 제도가 성립하고, 1889년에는 천황에게 신이면서 동시에 군주라는 이중적 성격을 부여한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이듬해인 1890년 중의원 총선거를 실시해 제국의회를 설치함으로써 명목상의 입헌국가立憲國家가 되었다. 이와 함께 20세기 초반까지 제국주의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1894)과 러일전쟁露日戰爭(1904)을 통해 조선(대한제국), 타이완, 미나미카라후토(사할린 섬 남부)를 강제 합병하고 상하이 등 중국의 주요 도시에 조차지를 설치하는 등 주변국 침략에 뛰어들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Taisho Democracy를 통해 정당정치와 보통선거가 실현되기도 하였으나, 1930년대에 군부가 정치적으로 부상하여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며 무리한 주변국 침략을 감행하면서 해당 국가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쳤고, 결국 미국을 상대해 치른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주권을 상실했다. 일본은 전쟁 패배의 대가로 연합군의 지배(1945~1952 군정기)하에서 청일전쟁 이후에 조약으로 획득하였거나 강제 병합, 불법으로 획득한 대부분의 영토에 대한 권한을 주변국에 돌려주었다. 또한 국가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져 현재의 일본국 헌법 제정이 이루어졌으며,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고 1972년까지 아마미제도奄美諸島, 오키나와沖繩島 현에서의 영토권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1955년에는 여당인 자민당(자유민주당)과, 사회당을 중심으로 야당이 대립하는 ‘55년 체제’가 성립되었으며, 이는 1993년 자민당이 선거에서 호소가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이끄는 신당에 참패하여 붕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특수로 부흥의 길에 들어선 일본은 1960~1970년대의 고도경제성장에 돌입하여 1968년에는 국민총생산GNP 측면에서 자본주의 국가 중 2위로 도약했다. 이렇게 이룬 경제의 고도 성장은 1980년대에 이르러 ‘버블 경제’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경제를 크게 번성시켰다. 그러나 과도한 주가의 증가와 부동산 매입으로 인해 1990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이 진행되어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 상태에 빠졌다. 그로 인하여 지지를 상실한 자유민주당은 한 때 10개월 정도 정권을 상실하기도 하였다가 진보 정당과의 연정을 거쳐 ‘55년 체제’의 집권 골격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9년 8월 30일에 치루어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자유민주당에 압승을 거둬 전후 최초로 완전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2009년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내각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경제난과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등으로 신임을 잃은 민주당 정권은 201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에게 다시 여당 자리를 빼앗겼고, 2012년 12월 26일부터 자민당의 아베 신조安部 晋三를 중심으로 한 내각이 출범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일본의 정치 체제는 군주인 천황과 헌법이 양립하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현행 일본국 헌법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일본 국민들의 총의總意에 바탕을 둔다"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이 정하는 국사國事에 관한 행위만을 내각의 조언과 승인, 책임에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에 따라 총리와 내각의 임원들을 임명하거나 그 신임장에 인증하는 것, 최고재판소 장관을 임명하는 것, 국회를 소집하고 헌법 개정과 법률 및 정령, 조약을 공포하는 것 등으로 일본 천황이 국사에 관여하는 것은 크게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천황은 외교의례 상에서 일본의 국가 원수로 대우받고 있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125대 아키히토明仁이다. 일본은 입법권이 국회(헌법 41조)에, 행정권은 내각(65조)에, 사법권은 재판소(76조 1항)에 속해 있는 삼권분립 체제이다. 이 중에서도 영국과 유사한 의원내각제를 취하여 삼권의 견제 및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행정부(내각)
일본의 행정부는 내각부, 총무성, 법무성, 외무성, 재무성, 문부 과학성, 후생 노동성, 농림 수산성, 경제 산업성, 국토 교통성, 환경성, 방위성, 국가 공안 위원회(경찰청)의 1부 12개청이 있다. 현행 중앙 부처는 2001년 1월 6일 중앙 부처 재편으로 구성된 체재이다. 또한 나라의 행정 기관은 원칙으로서 내각에 속하고 있지만, 회계 검사원은 내각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의 행정 기관이다.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국회의원 가운데서 선출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하원 제1당의 당수가 그대로 수상이 되지만, 일본에서는 의결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 영국과의 차이점이다. 수상이 직접 국무대신을 임명하며, 과반수가 국회의원이어야 한다. 영국에서는 모든 대신이 의석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일본에서는 국회에 의석이 없는 대신도 존재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내각이 하원(일본의 중의원)에서 불신임결의가 이루어졌을 경우 사직을 하거나 또는 이에 대항하여 국민에게 의견을 묻기 위해 하원을 해산할 수 있는 ‘내각의 국회에 대한 연대책임’ 관점에서 보면 영국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행정권은 내각 총리대신을 장으로 하는 내각에 속하며 내각은 행정권의 행사와 아울러 국회에 책임을 진다. 내각은 내각총리대신과 이하 내각총리대신이 임명권을 가지는 국무대신으로 조직되어 행정권의 행사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진다. 내각은 행정 사무 이외에 법률 집행, 외교 관계의 처리, 조약 체결, 예산 작성, 정령(政令) 지정을 비롯한 하급 입법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그러한 수행 상의 부담을 나누기 위해 국무대신들을 책임자로 하는 12성(省)을 갖추고 있다.

입법부(의회) 
입법부인 국회는 헌법에서 명시된 국권의 최고 기관이자 나라의 유일한 입법 기관으로서, 영국식 의원 내각제를 채용했기 때문에 총리 지명권, 중의원의 내각 신임 또는 불신임 의결권 등을 가진다. 또한 유일한 입법기관으로서 모든 법률안을 심의, 의결하는 권한을 가지며, 조약의 승인권도 갖고 있다. 아울러 국회는 삼권분립의 이념에 입각하여 국정조사권, 재판관의 탄핵재판권을 가지나, 반대로 내각의 중의원 해산권, 최고재판소의 법령 위헌심사권에 의해 견제되고 있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하원) 및 참의원(상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원은 전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영국식 양원제를 둔 것은 심의를 신중히 하여 중의원에 의한 지나친 움직임을 참의원이 견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양원은 원칙적으로는 대등하다고 되어 있으나 많은 점에 있어서 중의원의 우위가 인정되고 있다. 중의원은 예산안 심의·총리지명·조약비준 등에 관해 참의원보다 우월한 권한을 가지고, 또 일반 법안에 관해서도 양원의 의결이 다를 때는 중의원이 2/3 이상의 찬성으로 참의원의 의결을 뒤엎을 수 있다. 중의원은 임기 4년으로 의원수는 480명이며, 참의원은 임기 6년, 의원수 247명으로 3년마다 지역구와 전국구의 2분의 1씩을 선출하고 임기 중 해산은 없다. 

일본 국회는 1955년 이후 1993년부터 1996년까지의 연정 기간을 제외하고 자유민주당(자민당)이 계속해서 여당의 자리에 있었으나 2009년 9월 15일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시작되면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2012년 12월 16일에 실시된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절대 안정 다수를 넘는 294석을 획득하여 여당의 자리를 탈환하였다. 선거에 협력한 공명당은 31의석을 획득, 양당 합계 325의석을 차지해 중의원에서 법안 재가결이 가능한 3분의 2의석인 320의석을 웃돌았지만, 민주당은 58의석으로 참패하였다. 그리고 2013년 7월 21일, 아베 내각이 출범한 이후 첫 국정선거인 23회 참의원 선거 결과 자민당은 단독으로 개선 정수(121)의 과반수를 넘었다. 비개선 의석을 합하면 자민, 공명 양당은 참의원 과반수(122)를 확보하고 참의원에서 여당이 소수인 “네지레(여소야대) 국회”는 해소되었다. 이를 통해 아베 총리는 안정적인 정권운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얻었다. 한편 민주당은 도쿄에서 처음으로 의석을 얻지 못하고, 획득 의석이 창당 이후 최소가 되는 참패를 당했다. 

지방자치제도 
일본의 지방자치 조직은 단체장과 지방의회의 이원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집행 기관과 의결기관의 분리원칙에 따라 양자가 상호 독립적으로 권한을 행사한다. 지방공공단체장과 지방의원은 모두 그 지방 주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하며, 선거에 대한 관심 제고 및 선거 일정의 중복을 피하고자 단체장 및 의원 선거일정을 전국적으로 통일하여 4년에 1회, 4월에 실시(통일지방선거)하고 있다. 

지방공공단체는 보통지방공공단체와 특별지방공공단체로 나뉜다. 보통지방공공단체는 우리의 광역시도에 해당하는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과 시군구 기초단체에 해당하는 1,727개의 시정촌市町村으로 구성되며, 특별지방공공단체는 동경도내 23개 특별구特別區, 지방공공단체조합, 재산구財産區, 지방개발사업단 등으로 구성된다.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은 1도都(도쿄도東京都), 1도道(홋카이도北海道), 2부府(오사카부大阪府, 교토부京都府), 43현縣으로 구성되며, 그 세목은 아래와 같다. 

사법부
일본의 사법 기관으로는 재판소가 있으며 최고재판소와 하급재판소(고등재판소, 지방재판소, 가정재판소, 간이재판소)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재판소는 장관과 14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장관은 내각의 지명에 따라 천황이 임명하고, 임명 후 최초로 실시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국민심사에 부쳐지며, 그로부터 10년이 경과할 때마다 최초 중의원 총선거 때 다시 국민심사에 회부된다. 14명의 재판관은 내각이 임명한다. 일본의 하급재판소는 제2심인 고등재판소와 제1심인 지방재판소, 가정재판소, 간이재판소로 구성된다. 하급재판소의 재판관은 최고재판소가 지명하고 내각이 임명하며, 임기는 10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경제

1868년 이후 일본은 메이지明治 시대의 근대화와 더불어 경제적인 확장을 시도하였다. 당시 메이지 천황은 자유 시장 경제와 기업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영미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이 시대에 일본인은 서양으로부터 많은 경제학자들을 고용하여 합리화된 경제 형태를 습득하였으며 오늘날 일본 유수의 기업들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아시아에서 경제가 가장 빨리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황폐화된 경제를 빠른 속도로 회복함과 동시에 경제 규모가 크게 성장하였는데, 1960년대에는 10%, 1970년대에는 5%, 1980년대에는 4%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빠른 성장 기조는 1990년대에 이르러 둔화되었으며 부동산 가격에 낀 과도한 거품이 1989년을 정점으로 크게 떨어지면서 이에 따른 후유증으로 10년 이상의 오랜 불황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불황세는 정부의 노력으로 2000년 직전에 잠시 회복되었다가, 2000년의 밀레니엄 불황과 더불어 다시 크게 침체되었다. 이처럼 회복과 침체를 반복하던 일본 경제는 2005년 이후 경제 성장률이 5.5% (2006년 4분기)에 도달하면서 미국과 유럽 연합의 성장률을 따라잡는 데 이르렀다. 2009년,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의 경제 대국이며 일본의 공공 부채는 연간 국내총생산의 192%에 이른다.

일본의 산업 체계는 주로 공업과 서비스업이 중심으로 은행업, 부동산, 유통업, 교통업, 통신업, 건설업 등이 주를 이룬다. 일본의 공업은 서구의 선진국에 비해 중소기업의 비중이 매우 높으면서도 대기업과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므로 고용기회의 확대 및 해외 경쟁력 강화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의 공업은 대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과밀하게 집중된 탓으로 해서 대기·수질 오염을 비롯한 각종 공해를 일으키고, 또 교통난, 주택난 등 도시문제도 심각하다. 따라서 지역주민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저항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일본은 대규모 산업 지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품은 자동차, 가전 제품, 철강, 비철금속, 선박, 화학 물질, 섬유 및 가공 식품 등이다. 또한 서비스업이 일본 연간 총생산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2001년을 기준으로 일본 총 인구의 약 6,700만 명이 노동자이며 실업률은 4%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또한 일본의 노동시간 대비 1인당 국민 소득은 2007년 기준 세계 19위로, 이는 빅맥 지수가 잘 보여준다. 잘 알려진 일본의 기업으로는 토요타와 혼다, 닌텐도, 소니, 신일본제철, 도시바와 미쓰비시 등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10년 이래 장기적으로 디플레이션 현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엔화의 지나친 강세도 수출을 위주로 하는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2013년 새로 출범한 아베 내각은 유로 안정화 기구의 채권을 매입하는 등 계속해서 엔화량을 늘리고 있으나 이와 같은 아베 내각의 부양책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다. 실제로 GDP경제성장률과 경상수지가 전년대비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기업의 수출은 늘어난 반면 수입물가가 급등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14년 IMF 기준 일본의 명목GDP(국내총생산)는 4조 7,698억 달러로 세계 3위, 1인당GDP는 37,540 달러로 세계 26위를 기록하고 있다. 외환보유고는 1조 2,760억 달러(2014년 7월말 기준, 재무성)이고, 교역규모는 수출 7,192억 달러, 수입 8,389억 달러(2013년, JETRO)이다. 

지난 2011년 초반 일본경제는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오랜 노력이 결과물을 나타나며 고무적인 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3월 11일 일본 동북지방에 예상치 못한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영향으로 전국의 원전이 차례로 정지되면서 급격한 전력 부족 현상과 생산 활동 및 수출의 차질이 초래되었다. 2011년 하반기에는 일본 자동차 기업 혼다를 중심으로 많은 기업들이 진출한 태국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공장 침수와 생산 차질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2010년 중반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엔화가치의 지나친 상승현상, 이른바 엔고현상이 2011년 내내 일본경제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해 일본의 주요 수출기업은 환율변동으로 인해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러나 2012년 상반기 이후 2013년도 말까지 일본경제는 수출이 저조한 상황 속에서도 개인 소비와 공공투자 수요 및 정책요인 등이 결부되면서 완만한 회복세를 보였다. 2013년 일본은 1.6%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내각부는 2014년 1월에 2014년도 경제성장률을 1.4%로 예상했다. 2014년도 일본경제는 2013년에 이어 지속적인 경기 확대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선진국 경기 회복, 미국경제 회복에 따른 수출 증가, 투자설비 및 공공투자 증가, 소비세 인상에 따른 물가상승 효과 등이 있다. 다만, 위험 요인도 상존하고 있어, 신흥국 경기 침체, 자원 수출국의 지정학적 리스크, 유럽 채무 위기 재발 등이 지속적인 경기 회복세 유지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2014년 4월 1일 소비세 인상 이후의 단기 경기 침체로부터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주목 받고 있다. 현 시점에서는 예상보다는 회복 속도가 빠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15년 10월에 예정된 소비세율 추가 인상(8%→10%)과 디플레이션 조기 탈피 등이 아베노믹스의 성패를 좌우할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사회 문화적 특징
일본은 선진국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 인간개발지수는 2011년 기준 세계 12위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 일본은 또한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러시아를 제외하고 G8에 들어가는 유일한 국가이며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비록 일본은 헌법에 따라 군대 및 교전권을 포기하였으나 국토의 방위와 평화,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자위대는 현대적이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국제 연합 및 세계 보건 기구에 따르면 일본은 영아 사망률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낮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균 수명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800만 명으로, 세계에서 열 번째로 많다. 사실상의 수도인 도쿄도를 둘러싼 현들(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지바현,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을 포함하는 수도권은 세계에서 가장 큰 메트로폴리스 형태로 이 지역에만 약 4,00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수 민족으로는 류큐인, 아이누족, 윌타족, 니브히족 등이 있는데, 계속된 차별을 받아온 류큐인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1970년대 일본 편입 이후 재독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아이누족은 적극적인 문화 회복 활동을 통해 일본 국회에서 선주민 자격을 인정받았다.

일본인의 평균 수명은 2009년 기준 남성이 79.29세이며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인 86.05세를 기록하였다. 특히 여성의 평균 수명은 1985년 이후 계속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출생률이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의학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사망률 또한 현저히 줄어들어 노인 계층이 증가해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상태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일본인의 기대 수명은 2009년 기준 싱가포르와 더불어 약 82세 정도라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대한민국에 이어 2위로 높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일본의 종교
일본 문화청에서 발간한 『종교연감』에 따르면, 2009년 1월 현재 일본의 종교인 수는 신도神道 약 1억 843만 명, 불교 8750만 명, 기독교 237만 명, 기타 888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총인구 수를 상회하는 이러한 수치는 한 사람이 복수의 종교에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앙에서 우러난 것이라기보다 각 종교 행사가 일상생활에 녹아 있는 일본의 독특한 종교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태어날 때는 신사神社를 찾아가고, 결혼할 때는 교회나 성당을 찾고, 죽은 후에는 절로 간다”는 말이 일본인들의 종교관을 잘 반영한다. 일본인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각 종교의 문화적인 부분만 이용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신사神社는 현실세계의 욕구나 희망을 추구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절은 사후세계의 희망을 추구하는 장소로 인식한다.

신도神道(천신지기天神地祇를 줄여 신기라고도 함)는 자연물에 대한 숭배가 종교로 발전한 것으로, 애니미즘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신도의 각 영역에는 수많은 가미사마(神)와 호토케사마(佛)가 존재한다. 가령 이세다이진伊勢大神, 하치만진八幡神, 가스가묘진春日明神 등과 같은 무수한 신들이 존재한다. 일본 사람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 이들 여러 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즉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것이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신앙이며, 이 신들을 모아 제사지내는 곳이 신사神社인 것이다. 신도에는 내세관도 없고 교의도 없다. 또 경전도 없고 교주도 없으며 설교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신도교 신자라는 말도 없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생활의 속에서 신사를 찾는 일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 종교법인으로 등록된 신사는 약 8만 개소로, 일본 전국 어디에나 신사가 산재해 있다. 일본인들의 대다수는 출생, 결혼식의 축하를 비롯하여 시험합격, 무사고 운전, 가업 번창 등을 기원하기도 하며, 지역주민들이 신사에 모여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의 일생은 신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신도 그 자체에 깊은 신앙심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전통과 습속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면이 강하다.

일본의 불교는 6세기 중반 지배층에 의해 대륙문화의 일부로서 도입되었다. 궁정의 보수파가 불교의 도입을 반대하였으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7세기부터 국교國敎로 인정되었다. 나라奈良 시대(710~794년)에 중국식 사찰이 다수 건축되었으며, 불교로 인해 전통 신도神道에도 불교적인 색채가 가미되었다. 나라시대에 정립된 6개 불교종파 중 3파가 현재까지 잔존하고 있다.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년)에는 신도神道와 불교의 공존이 합법화되었다. 현재 승려 수는 약 16만 명, 절은 8만여 개로 추정되며, 신도神道 예식이 결혼이나 출생 등 길사吉事에 행해지는 데 비해 불교예식은 주로 장례 때 이용된다.

일본의 기독교는 포르투갈 제수이트Jesuits 교파에 의해 16세기 중엽에 도입되었으며, 17세기까지 수십 개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포교활동을 한다고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1587년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가사키長崎에서 26명의 기독교도들이 십자가형을 당한 이후 2세기 동안 일본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되었다.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년) 초기부터 미국과 서구의 개신교파 선교사들이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濱에 교회를 건립하고 학교와 병원 등을 지어 사회에 공헌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가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현재 일본의 기독교도는 약 200만 명(전체 인구의 0.8%)으로 소수파인데, 지금까지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1%를 넘은 적은 없으며, 일본의 기독교 관계자는 이를 가리켜 ‘1%의 벽’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의 성당이나 교회는 예배를 보는 장소보다는 예식장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대중문화
일본의 대중문화를 언급할 때 쉽게 떠오르는 것들로는 스포츠와 만화, 다양한 음악 환경 등을 들 수 있다. 일본의 국기 스모相撲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스포츠 외에도 일본에는 우리나라처럼 야구와 축구가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고 유도와 검도, 가라테 등도 일본을 상징하는 요소들로 잘 알려져 있다. 야구의 스즈키 이치로나 피겨스케이팅의 아사다 마오는 널리 알려진 유명 스포츠 선수이다. 보편적인 대중 음악으로는 한국의 트로트와 같은 엔카演歌와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제이팝J-POP 등이 유행하고 있는데, 일본은 전통 음악에서부터 서양의 고전 음악, 팝송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CD는 일본에서 연간 4억 5천여 장, 테이프는 2,300만여 본이 제작되며 야마하ヤマハ와 같은 악기 제조 업체들도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만화는 ‘망가漫画‘로 불리며 현대 일본 미술과 긴밀히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했는데, 이러한 만화 작품들을 원작으로 하여 ‘아니메アニメ’라 불리는 애니메이션 산업도 함께 발전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영화와 포켓몬스터 등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일본은 애니메이션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일본에서 축제를 칭할 때 사용하는 말인 마쯔리祭まつり는 일본의 각 지역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행하는 신을 맞아 신사에 모시는 종교행사이다. 일본어에서 ‘정치政治せい-じ’는 다른 말로 ‘마쯔리고토祭事まつりごと’라 불리는데, 이는 일본에 있어서의 정치란 곧 신을 맞이하여 받드는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으로 일본인이 얼마나 그들의 신사문화神社文化를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마쯔리는 농경 사회에서 풍요로운 생산 등을 기원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지방분권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마쓰리는 지역주민들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농촌지역 홍보와 생산품 판촉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고대부터 각종 문화의 전파와 무역을 비롯한 많은 교류를 이어왔다. 특히 백제百濟는 고대 일본에 중국 문물을 많이 전파하였다. 고려 시대 후반과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서는 쓰시마 섬과 규슈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倭寇가 각종 약탈을 일삼았으며 이로 인해 조선 시대 중반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중세와 근세기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신사 파견으로 다시 한일 교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에 등장한 일본 제국이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 1945년까지 35년 동안 식민 통치를 행하고 현대에도 일본의 여러 우익 인사들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도발을 주창하면서 양국의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한일 양국은 독도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과거사 문제 등 외교적 차원에서는 종종 미묘한 대립 관계를 보이는 반면, 양국의 경제, 문화 등 민간 부문은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고 있다. 교역 측면에서는 한일 교역 규모 자체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체 수출이 늘어나면서 부품·소재·설비 대일 의존도도 덩달아 높아짐에 따라 대일 무역 역조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2002년에는 세계인의 축구 제전인 제 17회 월드컵 축구대회를 한일 양국이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양국간 우호 협력 분위기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한편 2003년부터 NHK위성방송으로 방영된 <겨울연가>가 붐을 일으키면서 2004년 이후 한류가 일본 내에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입어 한국 드라마가 일본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되고 출연 배우들도 일본을 속속 방문하면서 한류 붐에 불을 지핀 바 있다. 

한일 양국은 양국 국교 정상화 이래 40년이 되는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로 정하고 관광, 문화, 이벤트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 프로젝트를 실시해 한일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또한 일본 정부는 이 같은 교류 분위기 확산을 위해 아이치 만국박람회가 개최되는 기간 중에 비자를 일시 면제하고 2006년 3월 1일 기준, 한국인 관광객의 단기 체제 비자 면제 실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는 2005년 들어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 등 역사 문제가 돌출하고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가 이어지는 등 우호 협력 분위기가 상당 부분 악화되었다. 

그러나 2007년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후쿠다 총리가 집권하면서 양국간 긴장이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2008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 후쿠다 총리가 참석하였으며 이에 따른 답방으로 2008년 4월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양국 정상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국제사회에 함께 기여함으로써 양국 관계를 보다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확대하는 ‘한·일간 신시대를 열어나간다’는 데 합의하여 양국 간 경제 협력 확대 방안을 협의하였다. 우익으로 평가받는 아소 다로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선출된 이후에도 당초의 예상을 깨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2009년 9월 전후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며 발족된 하토야마 정권은 우애友愛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고 아시아를 중시 여기는 외교를 펼쳤다. 특히 취임 이후 첫 방문국으로 한국을 선택하면서 과거사 청산에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등 하토야마 총리는 한-일 외교에 큰 무게를 두었다.

2010년 8월 일본 정부는 한일병합조역발효 100년을 맞이함에 있어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 및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의지를 주축으로 하는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를 발표했다. 본 담화는 8월 15일 광복절 이전에 발표함으로써 한국측에 향후 긍정적인 대응을 기대하는 의도도 담겨있다. 간 나오토 수상은 담화 발표 이후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과 직접 전화통화를 통해 담화의 내용을 전달하기도 했다. 담화의 주요 내용은 ‘한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시된 식민지 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게 했다’ 라는 인식을 표명했으며 이에 더불어 ‘역사의 진실을 직시할 용기와 그것을 받아들일 겸허한 자세를 가지고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는 솔직한 자세를 가지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2차 대전 종전 50년 기념해서 1995년 발표되었던 무라야마 담화의 표현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 ‘식민지 지배가 야기시킨 큰 손해와 고통에 대해서 통감하며 마음에서의 반성의 의사를 표명한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2012년 5월 13일 한중일 정상회담을 위해 양국 정부 지도자가 중국 북경을 방문했을 때 정상회담을 실시하여 동아시아 정세, 김정은 체제 이후의 북한 무력도발 문제 등에 대하여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양국 간 논란이 될만한 사항인 독도, 종군위안부 등의 건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 않았고 서로간에 신뢰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행동에 반발 및 항의조치로 이날 무토 마사토시 주한 대사를 일시 귀국시켰다(그 후 같은 달 22일 귀임). 또한 같은 달 17일, 노다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독도 상륙 및 한일 관계에 대한 다양한 발언에 대해 유감의 뜻을 전하는 동시에 한국측에 신중한 대응을 해달라는 취지의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 친서는 수취가 거부되었다. 그 후, 한국과 일본 모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2013년 2월 25일에는 한국 서울에서 아소 부총리가 박대통령을 예방하고 대통령 취임 축하의 뜻을 전하는 등 회담했다. 한중일 FTA 협상 재개에 맞추어 한중일 3개국 정상 회담도 5월 하순에 서울에서 할 방향으로 조정하고 있었지만, 중국이 참여를 기피, 연기될 전망이다. 또한 아베 내각의 현역 장관의 잇따른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한일 정상회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후 7월 1일, ASEAN 관련 외교장관 회의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타 외무 장관이 첫 대면 외무 장관 회담을 가졌다. 한일 외무 장관 회담은 제 2차 아베 신조 내각 및 박근혜 두 정권이 출범한 이후 약 9개월만이다.

외무장관 회담 후 한일 정상회담 개최 기운이 고조되는 듯했으나 2013년 12월 아베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양국 관계가 다시 냉각, 결국 2014년 3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일 정상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2014년 8월 9일 미얀마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일본의 기시다 외무 장관이 회담. 양국간 공식 외교장관 회담은 2013년 9월 이후 약 11개월 만에 개최된 것이다. 양국 외무장관은 장관 레벨을 포함, 정부간 대화를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윤장관은 “역사 문제에서 일본이 진지한 태도를 보이면 양국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실을 조금씩 풀어나갈 것"이라며 정상회담의 실현을 위해 일본의 행동을 요구했다.

현재 일본과 북한은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다. 북한과의 수교관계에 대해 일본 정부는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평양선언’의 취지에 따라 핵·미사일, 납치문제, 과거청산 등 제반 현안의 포괄적 해결 후에 일·북 수교 및 대북 경제협력이 성사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평화적 문제 해결의 원칙하에 ‘대화’와 ‘압력’을 병행하되, 납치문제의 진전이 없이는 대북 경제지원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부터 모든 북한 국적 선박의 입항금지, 북한산 물품의 수입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북 경제제재 조치를 시행하여 왔으며, 2009년 4월 북한 미사일 발사, 2009년 5월 제2차 핵실험, 2010년 5월 천안함 격침 등과 관련해 각각 추가 제재 조치를 실시 중이다. 

우리 정부는 일·북 관계 개선은 한국의 평화번영정책에 부응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기본 입장을 밝히고 일·북관계 개선을 위한 가능한 측면 지원의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한반도 평화정책과 남북한 공동번영이 일·북관계 정상화와 함께 동북아 공존 공영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한·일간 긴밀한 공조체제를 강화하고,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한·일, 한·미·일 공조를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아이누민족과 류큐민족

아이누족은 일본열도에 살고 있던 원주민으로 약 2,500년 전 한반도와 아시아대륙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야요이인)에 밀려 북쪽의 홋카이도와 남쪽의 오키나와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들만의 인류학적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며 이어져 오다 홋카이도를 비롯한 북방도서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근거지를 에조지蝦夷地라 불렀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러시아와 국경을 정하면서 홋카이도라 명명하고 일본으로 강제 편입하였다. 현재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와 러시아 쿠릴과 사할린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도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류큐국琉球國(오키나와, 류추쿠쿠; 유구국)은 동중국해의 남동쪽, 현재 일본 오키나와 현 일대에 위치하였던 독립 왕국이다. 한반도와의 교류에 대한 기록으로는 1389년에 왜구에게 붙잡혔던 고려인을 보호하여 고려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과 1416년(태종 16년), 이예李藝를 류큐국에 사신(유구국통신관)으로 파견하여 왜구에게 잡혀 유구에 팔려간 조선인 44명을 쇄환하여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 협력하여 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었는데 류큐국 사신이 일본의 침략준비에 대해 조선의 사신과 같은 내용을 알려 의심을 풀었다는 기록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협조명령을 거부하고 명에게 일본정벌을 제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큐국은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등과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1609년에 사쓰마 번의 침공을 받은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의 침략을 받아 1879년에 일본에 강제로 병합(류큐 처분)되어 멸망하였고, 오키나와 현으로 바뀌었다.

아베노믹스

아베노믹스(Abenomics)는 아베 총리가 내건 경제 정책이며, 아베와 경제학을 합친 조어이다. 디플레이션과 엔고 탈출, 명목 3% 이상의 경제 성장 달성 등을 내걸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 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대담한 금융정책(2%의 인플레이션 목표·엔고시정·정책 금리의 마이너스화·무제한 양적 완화), 기동적인 재정정책(국토 강인화를 위한 대규모 공공투자), 민간 투자를 자극하는 성장전략(가칭 ‘일본경제재생·산업경쟁력강화법’ 제정에 의한 제조업 활성화·법인세 인하)의 3가지를 기본 방침으로 아베는 이를 ‘3개의 화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효과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데 선행지표인 주식 시장을 보면, 노다 전 총리가 2012년 11월 14일 중의원 해산 표명 이후, 닛케이 평균 주가는 11월 14 일부터 올해 5월 초까지 약 5개월 동안 약 60%나 상승하고 있다. 2013년 1월 11일에는 사업비 20.2조엔, 60만명의 고용을 목표로 하는 ‘일본 경제재생을 위한 긴급경제 대책’을 의결하였다. 2013년도 예산에서 공공사업비를 7000억 엔 증가한 5조 2,853억 엔으로 하는 등 경기부양을 우선하고,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에 이은 제3의 화살인 성장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2014년도 예산안에도 공공사업비는 5조 9,685억 엔을 책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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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사신론


문학박사이자 일본사연구가인 홍윤기 교수가 일본문화사 속의 신론神論에 대해 연구하고 그 원류를 추적했다. 한국인 역사학자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왕궁 황거안의 천신 제사음악당 ‘가구라당’에 들어간 그는 제사담당관 아베 스에마사 악장을 만나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해마다 11월 23일 밤, 아베 악장은 아키히토 일왕과 함께 고대 한국의 천신인 한신韓神을 모시는 신상제新嘗祭를 거행한다고 털어놓는다. 신상제에서는 경상도말(신라어)로 ‘아지매, 오게 오,오,오,오 오게’ 하며 단군왕검의 어머니(웅녀신)를 제사상으로 초혼한다. 신상제는 신라 천일창왕자가 곰신단(熊神籬)을 일본왕실로 직접 모셔간 데서 비롯되어 천부경天符經 이념으로 시작된 국가제사로 계승되고 있다. 

책에는 홍교수가 이와 관련, 아베 악장이 자신에게 써준 친필 연구론(일본 천황가의 신상제와 한신인장무)의 일본어 원문과 상세한 번역, 해설을 담고 있다. 일왕이 백제인임을 고증했던 그가 이 책에서 “일본문화의 뿌리는 단군의 천손문화”라고 역설한다. 고대 한국의 문화가 일본 개국신화와 역사형성의 모태가 됐다는 것이다. △섬나라의 어둠을 밝혀준 고조선 문명 △상고 조선천신 제사 모시는 일본 왕궁의 신상제 △일본에 건너온 한국의 벼농사문화 △태양신 모시는 단군신도檀君神道를 받들며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 천일창왕자 △고구려 주몽과 일본 초대 진무천황의 동일한 발자취 △고대 한국의 솟대신앙에서 생긴 아스카의 신목神木 제사 등 책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고대 한일관계사 전반을 조망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국신도가 내세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는 일본의 으뜸 아닌 두 번째의 신이다. 일본 최고의 신은 다카미무스히(고황산령존). 천조대신을 최고신으로 조작하여 천황가의 정통 ‘고황산령존 신화’를 숨겼다. (33쪽 참조)
▶고황산령존 신화는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천황족 고유의 신화다. 초대 ‘진무천황’은 뒷날 날조한 거짓된 천황이다. (36,37쪽)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코) 왕자가 곰신단(熊の神籬)을 가져옴으로써 일본 최초의 신도(神道)가 개창되고 신궁(神宮)이 섰다. (86쪽)
▶“단군 개국신화, 수로왕 개국신화, 주몽 개국신화 베껴 쓴 것이 일본 개국신화다.” -오카 마사오 교수 (138쪽)
▶“고구려 주몽(朱蒙)과 일본 초대 진무(神武)천황의 발자취가 동일하다.” -신화학자 미시나 아키히데 교수 (141쪽)




※ 일본 아사히신문은 2001년 12월 아키히토 천황이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2004년 8월 한국의 한 언론은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 마사히코가 백제 무령왕릉을 참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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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 안동 권權씨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안동 권씨는 성씨 별 인구 순위에서 422,735명으로 청주 한씨에 이어 12위로 조사됐다. 

안동 권씨, 어떻게 시작됐나

시조 권행權幸 그는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인 경주 김씨여서 김행金幸이었다. 김행은 신라말 고창古昌(안동)의 호족豪族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927년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입해 포석정에서 이궁離宮로 피신한 경애왕景哀王을 자결케 하고 왕비를 몸소 능욕하는 일이 있었다. 다시 929년(경순왕敬順王 3년) 12월에 견훤은 영남 동북의 요충지로서 주변 여러 고을이 모두 고려의 영향하에 있는 고창군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몰고 나왔다. 당시 영남지역은 왕도王都 서라벌 일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고을이 신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성주城主의 향배에 따라 고려나 후백제에 항복 또는 부용附庸하여 각기 그 지배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고창 고을만은 요지부동으로 신라 종국宗國에 충성하면서 3천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견훤 입장에서는 이곳만 공략하면 주변 일대가 평정될 것이므로 이를 노린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을 견훤에게 함락당해서는 조만간 신라 전체가 후백제에 병탄倂呑되고 후백제가 더 막강해질 것이므로 급히 대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나섰다. 당시 고창의 성주城主는 김선평金宣平(안동 김씨의 시조)인데 이때 이곳의 병마兵馬를 기르면서 함께 수호하는 이가 김행과 또 한 사람 고을의 명망있는 존장尊丈인 장길張吉(안동 장씨의 시조이며 정필貞弼이라고도 함)이었다. 견훤의 대군은 고창을 에워싸고 있고 왕건은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싸움에서 불리할 경우의 회군 대책을 의논하였다. 2년 전에 공산公山(대구 팔공산) 싸움에서 참패했는데 이번에도 후백제군이 강성한데다 만약 패하면 죽령竹嶺(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사이에 있는 고개)의 산맥을 넘는 길이 백제군에게 막혀 퇴로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같은 형세를 보고 김행이 분연히 일어나 ‘훤의 부도不道함은 의리로 보아 우리가 더불어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는 바인데 지금 우리는 병력이 적은 지라 힘으로 능히 보복할 수가 없는데다 또한 필쟁지지必爭之地에 근거하고 있은 즉 종당에는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왕공王公(고려 태조)에게 투귀投歸하여 저 역적 견훤을 섬멸하여 위로는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 민명民命을 살려 우리의 통분을 씻지 않으리오’ 하고는 마침내 김선평 성주와 장길을 설득하여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였다. 고창의 요충에서 결사항전하던 신라군을 얻게 된 고려군은 의기가 치솟아 병산甁山에서 후백제군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회전會戰을 벌여 크게 이기게 된다. 싸움의 결과 순식간에 일대의 30여 고을이 고려로 넘어오면서 대세가 고려 쪽으로 기울어 이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공적을 의논하고 포상을 행하면서 왕건은 김행을 보고 ‘능히 기미幾微를 밝혀 귀순하였으니 권도權道의 적절함에 통달한지라 권도가 있다 할 것이다(能炳幾達權)’하고 권씨로 성을 내리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동쪽을 안정시킨다는 뜻)로 하며 벼슬을 주어 대상大相(고려 초기 재상급 벼슬의 넷째 등급)을 삼았다. 뒤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김행에게 삼한벽상三韓壁上 삼중대광三重大匡 아부공신亞父功神의 호를 내리고 작위를 태사太師로 승차하였으며 안동고을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이에 권행은 태사공太師公으로 불리게 되었고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면서 안동 고을의 실제 영주가 되었다. 

권權 자의 의미 왕건이 권행에게 성을 내리면서 한 말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은 다분히 철학적이다. 먼저 권權 자는 원래 ‘저울 권자’이다. 저울은 무게를 헤아리고 사물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저울을 권형權衡이라 한다. 또 권 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먼저 나무 목자가 있다. 다음에 초두艸頭가 있으니 이는 온갖 풀이다. 그리고 입구(口) 자가 둘 나오는데 이는 여러 사람과 그들의 말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이 새 추隹자이다. 이것은 여러 날짐승이다. 이를 조합하면 기준이 되는 큰 나무에 온갖 식물과 사람과 금수가 모여 직분에 따른 질서를 이루는 모양이다. 이것은 또한 여러 글자가 형편에 따라 모였다가 분리될 수도 있어서인지 ‘일시적’ 또는 ‘임시적’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어 권설權設이라 하면 임시로 베푸는 것이 되고 권지權知라 하면 어떤 일을 시보試補로서 맡아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권도權道라 하면 임시적 개념의 임기응변臨機應變과 저울질한다는 개념의 권형이 대경대법大經大法에 합치된 것을 지칭한다. 권도를 달리 반경합도反經合道라고도 한다. 풀이하면 경법經法, 곧 대경대법大經大法으로 돌아와 도리에 합치된다는 뜻이다. 권도란 어디까지나 크고 곧은 길과 같은 대경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크고 곧은 길로만 걸을 수는 없는 것처럼 세상에서는 권도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맹자는 일찍이 권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수嫂(형제의 아내)가 물에 빠졌을 때는 손을 뻗어 건지는 게 권權인데 무릇 권이 도道가 되는 것은 변사變事(변고의 사태)를 이로써 구제하는 바이며,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도 해야 하거니와 [사후에는 반드시] 경법經法으로 돌아와야 선善이 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권도權道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반경反經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서 사마천司馬遷은 ‘발연勃然히 반경反經하여 권에 합치되고 상도常道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권도를 쓰는 것은 지극한 도리를 아는 성현聖賢이나 가능한 것이지 아무나 함부로 쓰면 혼란과 반역이 속출하여 세도世道가 망하게 된다. 이것의 어려움에 대해서 공자는 ‘뜻을 세우는 것은 가하여도 도道에 나가는 것은 가하지 못하고 도에 나가는 것이 가하여도 권權을 행하는 것은 가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왕건이 권행의 귀순 행위에 대해 ‘능병기달권’ 다섯 글자로 정의해주고 권씨 성을 사성賜姓한 것은 다분히 사상적이고 철학적 배경이 깔려있는 셈이다

안동 권씨는 어떻게 변천해왔나


10세 15파와 주요 세거지 안동 권씨는 시조 이전부터 안동에 세거해온 토착 성씨였다. 세계에 의하면 권행의 아들인 권인행權仁幸은 낭중郎中을 지냈고, 3세조인 권책權冊 이후 10세조인 권수평이 중앙관직에 진출하기 이전에는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과 같은 향리직에 종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안동 권씨 최초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에 의하면 권책이 안동의 이吏가 된 이후 계속 이직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권행은 고려 개국공신이 된 후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고창군 성주로 가지고 있던 종래의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동부의 실질적 지배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10세조인 권수평 이후로 중앙관직에 진출하기도 하고, 일부는 그대로 안동의 세력으로 남기도 하였다. 안동 권씨를 흔히 15파라고 한다. 시조 권행 이후로 10세에 이르러 15개의 큰 파로 갈라졌다. 10세에 이르러 후손이 15인뿐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후손을 이어 번창시킨 파조派祖가 15인이다. 이를 종지순宗支順, 즉 종계宗系와 지차支次의 순서에 따라 권수중權守中의 수중공파守中公派, 권시중權時中의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 권수평權守平의 추밀공파樞密公派, 권수홍權守洪의 복사공파僕射公派, 권채달權採達의 동정공파同正公派, 권지정權至正의 좌윤공파佐尹公派, 권영정權英正의 별장공파別將公派, 권통의權通義의 부정공파副正公派, 권인가權仁可의 시중공파侍中公派, 권형윤權衡允의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 권숙원權叔元의 중윤공파中允公派, 권사발權思拔의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 권대의權大宜의 정조공파正朝公派[광석공파廣石公派], 권추權樞의 호장공파戶長公派, 권척權倜의 검교공파檢校公派가 형성되었다. 주요 세거지는 경북 영주시 영중동, 강원도 평강군 일원, 경북 봉화군 봉화면 유곡리, 경북 안동시 법상동,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저곡동 등지다. 

주요 인물들 권수평權守平(추밀공파 10세, ? ~ 1250)은 청렴한 관리의 표상으로 ‘고려사’에 입전된 인물이다. 대정隊正(중앙군 하위부대의 장)이었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낭중郎中 복장한卜章漢이 유배를 간 동안 그의 토지를 경작하며 살았다. 그가 석방되어 돌아오자 토지와 함께 임대료까지 셈하여 주어, 재산 쟁탈이 다반사로 행하여지던 때에 아름다운 미풍을 남겼다. 또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견용牽龍 벼슬이 있어 부귀자제들이 서로 하고자 했는데, 권수평은 그 직에 임명되자 가난하다는 이유로 마다했다. 친구가 부가富家에 장가들고 이 벼슬에 나아갈 것을 권했으나, 부를 구해서 어찌 20년 조강지처를 버리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거절하였다. 관직이 추밀원부사樞密院(고려 시대 왕명 출납과 궁중의 숙위 및 군기를 담당했던 추밀원의 정3품 벼슬)에 이르렀다.

권보權溥(추밀공파 13세)는 수평의 증손자로 충렬왕 5년 18세로 등제하였다. 충선왕 즉위 후 사림원학사詞林院學士로서 박전지朴全之 등과 함께 총애를 받았다. 충선왕 복립 후 찬성사贊成事, 판총부사判摠部事에 올랐다. 충숙왕 때는 첨의정승僉議政丞, 판총부사判摠部事에 올라 영도검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가 가직加職되었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친척들에게 화목하였다. 늙어서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를 간행하도록 건의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소개했다. 아들 준準과 사위인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역대의 효자 64인을 뽑아 「효행록孝行錄」을 저술해 유포시켰다. 준準, 종정宗頂, 고皐, 후煦, 겸謙의 다섯 아들과 사위인 이제현李齊賢, 왕숙王璹·왕순王珣이 모두 봉군封君(임금의 적자를 대군大君으로, 후궁에서 태어난 왕자나 왕비의 아버지 또는 2품 이상의 종친과 공신 등을 군君으로 봉하던 일)받아 1가家 9봉군封君으로 당대 최고의 가세를 떨쳤다. 

권왕후權王煦(추밀공파 14세)는 권보의 넷째 아들이며 처음 이름은 권재權載였다. 충선왕이 총애하여 양자로 삼고 왕후王煦라고 성명을 하사하였다. 충숙왕 때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에 봉해졌고, 충선왕이 원에 알리어 계림군공鷄林君公에 봉함을 받았다. 충선왕이 토번에 귀양갈 때 자신이 대신하고자 했고, 심왕瀋王(고려 후기 심주瀋州·요양遼陽의 고려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원元에서 고려의 왕족에게 수여한 봉호封號)이 고려왕위를 빼앗고자 할 때도 전혀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충목왕대에 설치되었던 정치도감政治都監의 정승이 되어 당시 권귀나 부원세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탈점된 토지를 과감히 개혁하고자 했다. 이 개혁에 불만을 가졌던 기황후족과 노항盧項 등의 책동으로 정치도감의 개혁사업은 실패하고 죽은 후 장례도 관에서 치르지 못하게 되었으나, 공민왕이 즉위한 후 정헌貞軒으로 증익增益되고 공민왕묘정에 배향되었다. 평생에 망언을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장중했다 한다. 대의에 통했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예를 다했다고 한다. 왕후의 후손은 조선에 들어온 후 그의 손자인 권숙權肅과 권근權近의 노력에 의해 권씨로 복성復姓했다.

권근權近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서 크게 활약한 대학자이며 문학가이다. 공민왕 원년(1352)에 검교정승 권희權僖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권진權晋이었으며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 호는 양촌楊村이다. 고려 말 충주로 유배되어 양촌에 살았으므로 이를 호로 삼았다. 그는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고려 우왕 때 성균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예문관 대제학, 의정부 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고, 입학도설을 편찬했는데, 이는 후에 이황, 장현광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밖에 「양촌집陽村集」,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등이 있다. 

권제權踶(1387~1445)는 권근의 둘째 아들인데, 태종 14년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집현전부제학, 한성부윤을 지내고, 세종 때 경기도 관찰사, 이조판서를 지내고, 「동국역대가東國歷代歌」를 편찬했다.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정인지,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세종에게 바쳤다. 벼슬은 지중추원사, 우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권람이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를 추천하고 함께 쿠데타를 모의하여 계유정난 성공 후 1등 정난공신에 오른다.

권철權轍(추밀공파 21세, 1503~1578)은 권율의 아버지이다. 그는 중종 때 급제하고, 사관史官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544년 선공감부정으로 경상도경착관이 되었다. 경기도어사 우승지 등을 거쳐 1552년 도승지가 되고, 경상도 전라도의 관찰사, 형조·병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으며 1565년 우의정이 되고, 그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충성심이 강하고 사무 처리에 사려가 깊어 오랜 기간 정권에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허물을 말하는 이가 없었고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덕 많은 거공鉅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권율이다.

권율權慄은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고, 육지엔 권율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다.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금산군 이산사, 수원 독왕산성에서 적을 대파하고, 행주산성에서 적의 3만 대군을 격파하는 행주대첩을 치렀다. 그 공으로 도원수에 올랐으며, 이후 정유재란에서도 수많은 공을 세웠다.

권상하權尙夏(시중공파 27세, 1641~1721)는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송시열이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았다. 숙종이 총애하여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송시열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권일신權日身(?~1791)은 실학자인 안정복의 사위로 양명학을 연구하다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고, 명례방明禮坊(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에서 이승훈, 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조선천주교회를 창립하고 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신해박해 때 이승훈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나, 노모로 인해 신앙에 동요가 생겨 배교背敎하였다. 

이렇게 고려, 조선시대 주요 문벌 중의 하나인 안동권씨에서는 조선시대 증직贈職(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 품계·관직을 올려주는 일)된 사람을 포함하여 상신相臣이 40명, 경신輕臣이 116명, 초시初試 이상이 1085명, 봉군封君이 70명, 호당戶當이 6명이고 시호諡號를 받은 인물이 59명, 공신功臣이 86명이나 된다. 또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1398명인데, 그중 문과가 367명, 무과가 99명, 사마시가 913명, 역과가 9명, 의과가 4명, 음양과가 1명, 율과가 5명이다. 이 중 문과 급제자 367명은 조선의 종성이었던 전주 이씨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또다른 권씨, 예천 권씨

예천 권씨의 본래 성씨는 흔昕씨였다. 흔씨는 대대로 예천醴泉지역의 호장戶長(고려시대 향직의 우두머리)을 세습해왔다. 예천권씨 시조 흔적신昕迪臣은 고려시대 중엽에 보승별장保勝別將(별장:고려 때 2군 6위 중 6위에 속한 정 7품 부지휘관격이며, 2군은 응양군 용호군으로 왕의 친위대였음)을 지냈으며 안동 권씨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아울러 그의 3세손과 5세손 흔수창昕壽昌·승단昇旦도 안동 권씨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의 6세손 흔섬昕暹 대에 이르러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이 등극하게 되었는데 충목왕의 이름이 흔이어서 왕 이외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는 봉권왕제의 관례에 따라 성씨를 바꿔야 했다. 흔섬은 흔적신의 처가 성이자 3세와 5세의 처가 성이기도 한 권씨를 새로운 성으로 정하여, 권성이라 하고, 본관은 시조가 살고 있던 예천으로 하게 되었다. 권섬의 4세손 권맹손權孟孫은 고려 공민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당시의 문장가로 「대동시림大東詩林」을 남겨 가문을 빛냈으며 5세손 권섬權善은 오행五行, 오기五紀, 오복五福, 오륜五倫, 오상五常 5형제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예천 권씨 집안을 오복문五福門이라 불렀다. 권오복은 조선 성종 17년 사관에 뽑혔다. 8세손 권문해權文海는 대구목사大邱牧使로 있을 때 단군조 이래 선조조까지의 우리 역사와 문화예술 풍속 등을 총망라하여 1백 7가지 운韻으로 분류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군부운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하였다. 예천권씨와 안동권씨는 내외손內外孫 관계를 800년 동안 지속한 성본이라 한다. 동성이본同姓異本이므로 지금까지 통혼通婚을 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예천권씨는 총 1512가구에 48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안동권씨 근·현대 인물

안동 권씨는 1가 9봉군과 사시四始를 자랑으로 여기는 대표적 양반가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3대에 걸쳐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권인규仁圭, 권종해鍾海, 권기수基洙의 집안이 유명하다. 권인규는 호는 소은巢隱으로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비록 나이 먹고 병들었으나 목숨 바쳐 일본을 물리칠 것을 맹세하고 의병투쟁에 참여했다. 선생은 1895년(양력 1896년) 평창 방림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강릉으로 들어온 민병호 의병에 참여하여 격문 또는 포고문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하며 의병참여를 호소했다. 이 같은 내용은 아들 권종해가 편찬한 의병록 『소은창의록巢隱倡義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예안禮安 창의소倡義所에 답한 통문通文」, 「창의포고문倡義布告文」, 「창의통문倡義通文」, 「광동창의소포유문關東倡義所布諭文」, 「서고문誓告文」등이 있다. 특히 「창의포고문」에서는 일본은 임진왜란의 원수이며, 국모를 시해한 ‘섬 오랑캐’라면서 우리가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또 고개를 숙이고 단발령과 같은 그들의 정책을 따를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초대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철학자 권상로相老가 있다. 그는 『팔만대장경』을 번역했고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와 같은 대작을 남겼다. 또 문학박사로 한국 최초의 영한사전을 펴낸 전 서울대 총장 권중휘重輝(문학박사)씨도 유명하다. 그 외 학자로는 권이혁(전 보사부 장관, 전 서울대 총장), 권영찬(전 건국대 총장), 권오익(경제학 박사, 전 성균관대 총장), 권영대(전 서울대문리대 학장), 권영우(민송학원 이사장)씨 등이 학계의 거목이다. 

정관계에서는 권승열(전 법무부 장관), 권중돈(전 국방장관, 전 국회의원), 권오병(법학박사, 전 법무·문교부 장관), 권중동(전 노동부 장관), 권숙일(전 과학기술처 장관), 권영해(전 안기부장), 권영각(전 건설부 장관), 권오기(전 통일원 장관), 권오규(전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권진호(청와대 안보보좌관), 권정달(전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전 민정당 전국구의원), 권일, 권병노, 권태희, 권태욱, 권복인, 권오종, 권오석, 권오훈, 권성기, 권오태, 권영우, 권오을, 권영세, 권영길, 권선택(이상 국회의원), 권용식(전 제주지사) 등이 있다. 

재계 및 언론계에서는 권오기(신문편집인협회장), 권혁승(서울경제신문 사장), 권효섭(전 MBC 전무이사, 유정회 국회의원), 권용식(전 농협 회장), 권태을(아동문학가), 권덕규(국어학자, 사학자), 권구현(시인)이 있으며, 배우 권상우와 가수 보아(권보아)도 안동권씨이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참고사이트〉
안동 권씨 대종회(http://www.andongkwon.or.kr), 안동 권씨 대종원(http://www.andongkwon.org)



안동 권씨의 사시四始

사시四始란 조선왕조에서 안동권씨가 다른 성姓보다 앞서 시작했다는 네 가지를 의미하며, 세상에 내놓을 권씨 가문의 자랑으로 일컬어 온 것을 말한다.

기로지시耆老之始 : 기로소耆老所에 최초로 입소
기로소耆老所란 조선 초기부터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 원칙적으로는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인 전ㆍ현직의 고관 출신으로 70세 이상의 원로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들을 ‘기로소 당상’이라고 하였으며 인원 제한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통틀어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 명에 불과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기게 되었다. 권문權門에서는 기로소에 가장 먼저 입소한 사람들이 바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서예가이셨던 권문權門의 14세손인 권중화權仲和공을 비롯해서 15세손인 권희權僖, 17세손 권진權軫, 20세손 권홍權弘, 21세손 권철權轍, 24세손 권대운權大運 등 총 21명이었다. 

문형지시文衡之始 : 대제학에 최초로 임명되다 
대제학大提學은 조선시대 때 홍문관, 예문관의 수장首長인 정2품 벼슬이다. 달리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조선 건국 이전에는 없었으나, 조선 초기에 이르러 문물과 관직을 정비하고 보완할 목적으로, 예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는데, 1420년(세종 2년)에 이르러서는 집현전集賢殿에도 대제학을 두었으며, 1456년(세조 2년)에는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고쳐 대제학을 두었다. 이러한 대제학이 되려면, 전임 대제학이 조정의 공론을 모아서 학식과 경륜이 가장 높은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을 선발하여 추천하면, 전ㆍ현임 정승과 이조판서 등이 투표로 가부可否를 결정해서 왕의 재가를 얻어 임명했다. 대제학은 대개 한 번 임명되면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토록 그 직책을 지켰다. 이와 같이 당대 최고의 학식과 경륜으로 상징되던 대제학에 가장 먼저 오르신 분이 바로 16세손 양촌陽村 권근權近 선생이라 한다. 

호당지시湖當之始 : 호당湖堂(독서당)에 최초로 입소 
호당湖堂이란 조선시대에 국가의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해 건립한 전문 독서 연구기구를 말하며, 일명 ‘독서호당’ 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호당이 처음 설치된 것은 1426년(세종 8년)인데, 그 뒤에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의 청을 받아들여 1492년(성종 23)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여 인재를 길러 내었다.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507년에 다시 부활되었으며, 중종은 1517년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인재 양성과 더불어 학문 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호당, 즉 독서당은 학문과 국정에 대한 연구기관으로서 역대 제왕들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는데, 호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입소자의 자격과 규정을 엄격히 심사하여 입소하는 인원을 소수로 줄여서 선발하기도 했다. 1426년부터 1773년까지 약 350년 동안 총 48차례에 걸쳐서 선발된 인원은 겨우 320명에 불과했는데, 권문權門에서는 권채權採를 비롯해서 권건權健, 권경유權景裕, 권달수權達手, 권운權雲, 권중경權重經 등 6명이나 호당湖堂에서 재직하였다. 

족보지시族譜之始 : 우리 나라 최초의 족보族譜 편찬
부계를 중심으로 종족의 혈연관계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계보를 족보族譜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 안동 권씨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이다. 조선조 초기인 성종 7년 1476년에 창간하였으며 권제가 가보소첩家譜小牒을 편수編修한데서 비롯하여 제의 아들 권람이 선지를 널리 수소문하여 많은 자료를 수집 그 역시 끝을 맺지 못하였던 것을 그의 내종 서거정徐居正이 상주판관尙州判官 박원창朴元昌과 부사府使 최호원崔灝元과 더불어 보완하여 도보2권을 만들었다. 이것을 더 보완하여 3질秩로 편찬한 것을 외손 경상감사 윤호尹濠에게 부탁하여 안동부安東府에서 1476년 병신丙申(성종 7) 3월에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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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역주본 추천사

 

박석재(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


 

학창시절 배운 국사 교과서에서 고조선이 건국된 BC 2333년부터 고구려가 건국된 BC 37년까지는 내용이 거의 없는 블랙홀이었다. 따라서 만일 고조선이 신화의 나라라면 우리 역사는 일본보다 짧은 2천 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블랙홀 한복판에 천문관측 기록이 있으니 <환단고기>오성취루가 그것이다. 천문 소프트웨어를 돌려보면 실제로 BC 17347월 중순에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 순서로 오성이 모인다. <환단고기>의 기록은 사실이고, 천문대를 가진 고조선은 신화의 나라가 아니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개천절은 왜 103일인가. 이것 또한 개천 1565103일 왕검을 단군으로 추대했다같이 요약되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즉 개천 1년에는 환웅의 배달국 건국이, ‘진짜 개천이 있었다는 뜻이다.

 

개천절에 진짜 개천을 기념하지 않기 때문에 배달국의 역사 1565년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있다. 태극기를 만든 태호복희나 민족의 수호신 치우천황은 모두 배달국 사람이다. 배달국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태극기는 중국제가 되고 붉은악마또한 중국 응원단이 되는 것이다.

 

환웅이 풍백·우사·운사 세 신하와 3천 명의 천손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것이 진짜 개천의 모습이다. 호랑이 부족과 곰 부족 같은 지손은 환웅에게 천손이 되고 싶다고 간청했다. 환웅이 쑥·마늘을 먹으며 수양할 것을 요구하자 호랑이 부족은 포기했다. 하지만 곰 부족은 이를 완수해 여왕은 환웅의 아내가 되는 영광을 누린다…….

 

<환단고기>의 천손이 지손을 교화하는 장면이다. 천손의 당당함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선민사상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배달국의 개국이념 홍익이다. 우리는 누구인가질문에 대한 답은 천손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질문에 대한 답은 홍익인 것이다.

 

나는 미국 유학시절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물어온 외국인의 질문에 무척 당황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3·1 정신, 새마을정신, 화랑정신, 충무정신…… 어느 것 하나 내 가슴을 진정으로 채우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개국이념이 개천사상이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처럼 세계화를 추진하려면 먼저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개천사상이라는 국민정신이 흔들리면 세계화는 의미가 없다. 여기서 사상과 종교를 혼돈하면 안 된다. 교회, 도장, 사원, 성당, …… 어디를 다니든, 종교가 있든 없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개천사상을 공부해야 한다. 다문화 가족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국혼이 흔들리면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좁은 영토를 가지고, 역사교육도 제대로 못하며, 사대주의에 찌들어 사는 우리는 가장 못난 후손이다.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은 식민사학에 의해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로 둔갑했고, 그 결과 하늘의 자손 천손은 곰의 자손 웅손이 됐다.

 

그러다 보니 강대국 교포처럼 언행을 해야 대접을 받는 희한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애국을 얘기하면 세계화에 역행하는 국수주의자로 낙인찍히는 분위기다. 이렇게 국혼이 흔들리고 이념으로, 종교로, 지연으로, 학연으로, 빈부로…… 사분오열된 나라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나는 대한민국이 컴퓨터라면 다시 포맷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개천사상을 바탕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개천사상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안경전의 <환단고기> 역주본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을 지배한 우리 조상들의 찬란한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할 후손들의 밝은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안경전의 <환단고기> 역주본은 승천하는 대한민국 용의 여의주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천재소년 송유근 군을 길러내고 계신 걸로 유명하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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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어제 훈민정음 (2014.10.23  이형모 재외동포신문 발행인)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7348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세종대왕 단독작품 (2014.11.14  반재원 국학박사 한민정음연구소장,한국땅이름학회장) http://www.econotalking.kr/news/articleView.html?idxno=126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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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신문 이형모 발행인 칼럼

◈북부여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7853
◈고조선과 위만조선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7784
◈홍익인간의 깊은 내력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7647
◈세종어제 훈민정음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7348
◈단군과 환웅 그리고 개천절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7195
◈세 번의 이천년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7031
◈고분 벽화에서 만난 견우직녀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6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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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스님 국보 1호 교체론 왜? “숭례문엔 품격도 감동도 없다”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04607#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조선총독부가 숭례문을 ‘조선고적1호’로 분류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는 주장도 숭례문의 국보 1호 지위를 흔들리게 하는 대목이다. 학계는 일제강점기 당시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을 헐어버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숭례문을 통해 입성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보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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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2014. 12. 15. (월)  17:30~19:30

□ 장 소  KT광화문빌딩 1층 드림엔터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 주 제  하늘에 길을 묻다

□ 연 사  박석재 박사 (한국천문연구원 3~4대 원장)

□ 주 최  (사)유라시안네트워크

□  후 원  한류열풍사랑, 세계환단학회, (사)대한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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