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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9천 년 전통신앙인 신교神敎는 인류 정신문화의 원형이다. 

아래 글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의 첫구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풍류風流의 본래 이름이 바로 한민족의 9천 년 전통신앙인 신교神敎(신의 가르침)이다. 

신교의 문자 뜻은 ‘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단군세기≫에는 이신시교以神施敎, ≪규원사화≫에는 이신설교以神設敎로 쓰여 있다. 

신교는 단순히 한민족의 고유 신앙이 아니다. 신교는 환족의 이동과 함께 주요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퍼져나가 인류 정신문화의 원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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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배달-고조선 이래 한민족은 삼신상제님을 섬기고 상제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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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상제님을 중심으로, 천지 안의 모든 신들의 은혜와 덕을 칭송하고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살아 왔다. 그러한 제천행사는 한민족을 넘어 인류의 원형문화로 정착되었다. 

신교 문화에서 우주를 주재하시는 이 한 분(一者)으로부터 하늘, 땅, 인간(과 만물)이 벌어져 나온다. 그래서 하늘·땅·인간 속에는 삼신의 생명과 신성과 지혜와 광명이 그대로 다 들어 있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천지인의 관계를 수리數理로써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이라 표현한다. 하늘도 땅도 인간도 모두 하나의 근원자리에서 나왔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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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 문화의 우주사상을 전하는 한민족의 3대 경전이 있다. 신교의 우주관을 기록한 『천부경天符經』, 신관이 집약된 『삼일신고三一神誥』, 인간론을 담은 『참전계경參佺戒經』 이 그것이다. 

환웅천황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론하여 우주관, 신관, 인성론, 수행관에 관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천부경』은 환국 때에 구전되어 오다가 배달 시대에 문자로 옮겨진 한민족 최고의 경전이다. 여든 한 자에 불과한 짧은 글이지만, 삼신 사상의 3수 원리를 근거로 하여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고 있다. 『천부경』은 우주론과 인간론의 진수가 압축되어 있는 인류사 최초의 계시록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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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사상은 비단 정치제도뿐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나타난다.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天符인印 세 개를 주었고,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방의 밝은 땅에 새 나라를 열었다. 환웅을 찾아온 웅족 여인의 수행 기간도 삼칠(3·7) 도수로 21일이었다.

삼신은 본체가 되고 칠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삼신과 칠성은 신교 문화의 두 축이 된다. 한민족의 어머니들이 예로부터 정화수를 떠 놓고 칠성님께 자손과 가정의 안녕과 축복을 염원하였다. 이를 단순히 민간신앙, 기복신앙으로만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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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고조선은 국가를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이를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고 한다다.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관경(管景)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를 봉하여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삼신일체(三神一體), 천지인(天地人), 일체삼용(一體三用) 사상의 원리에 따라 나라(體)는 하나(一)이지만 다스림(用)는 셋(三)으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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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해제 (상생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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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강탈한 일제의 고민은 우리 민족이 일본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총칼로 잠시 지배를 할 수 있겠지만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에는 조선의 문화적 저력이 너무 컸다. 이에 일본은 조선민족을 완전히 동화시키고자 상고사 말살작전을 펼쳤다.

일제는 조선사를 말살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일제는 1910년 11월부터 약 14개월동안 조선강토에서 역사서를 포함한 20여만권의 도서를 수거하여 대부분 불살랐다. 그리고 역사왜곡에 도움이 될만한 사서만 남겨두었다.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단군 관련 기록 삭제,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상을 뿌리로 한다는 동조동근론, 조선인은 열등하고 일본인은 우수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 등이다. 조선사 간행은 민족정체성을 뿌리 뽑아 한민족을 일본왕의 출신한 신민으로 전락시키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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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 류는 『삼국유사』 임신본에 적힌 “석유환국昔有桓国”의 ‘국国’ 자를 ‘인因’ 자로 변조시켰다.

이리하여 환국을 불교 신화에 나오 는 나라로 둔갑시키고, 환국을 계승한 배달과 고조선도 허구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 고대사의 핵을 도려낸 사건이다. 이로써 한국사의 영혼이 뽑히게 되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7천 년 상고사가 통째로 잘려 나간 것도 통탄스럽지만,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가 식민사학을 추종하여 환인·환웅·단군을 신화의 인물로 전락시킨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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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환국·배달·고조선뿐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 역사도 축소하였다.

그런데 일본은『삼국사기』의 상대上代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 초기 왕들의 존재도 부정하였다. 삼국의 초기 왕을 모두 누락시키고 고구려는 6세 태조왕, 백제는 8세 고이왕, 신라는 17세 내물왕부터 그 이름을 거론하였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게 되면 4세기 이전에도 한반도에 강력한 왕권이 있었고 4세기의 임나일본부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의 쓰다 소우키치律田左右吉는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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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중 하나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이다.

이병도는 일본 역사 왜곡의 선봉장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의 제자로, 1927년 조선사편수회가 조직을 확대 정비할 때 이마니시 류의 수사관보로 들어가서 한민족 고대사를 왜곡하는 데 헌신적으로 기여한 자이다.

일제가 물러간 후 그는 이승만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서울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일제 식민사학이 날조한 한민족사를 그대로 계승하거나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답습하였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쓰다의 조선사 이론에 조선 후기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이론을 한국사의 정설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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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학계의 거센 비판을 받아 부분적으로 시정되었지만, 이 땅의 2세들이 보는 역사 교과서는 여전히 일제 식민사학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잘못 소개된 고조선사는 알맹이가 빠진 채 10쪽 내외 로 간략히 기술되고, 삼국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의 역사는 온통 불교사와 유교 사로 채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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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서술도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의 근대사는 일본, 러시아, 청나라 등의 침략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외세 항거운동과 독립운동을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다. 그리고 독립운동사라면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국사 교과서는 독립운동은 거의 다루지 않고 식민지 체제 내의 애국계몽 운동이나 실력 양성 운동 등 근대사 서술을 주로 다룬다.

이 땅의 역사 교과서는 독립운동사를 약술하는 데에서 그치고, 일제의 역사날조 만행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총독부의 주택난 해결 정 책은 세밀히 묘사한다. 일본 덕분에 인구가 증가하고 큰 발전을 이룬 것처럼 장황 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최근 온 국민이 나서서 일본 교과서에 실린 조선사 왜곡 내용을 질타하지만, 정작 이 땅의 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관의 틀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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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망한 후 일본은 자기네 역사를 자생 역사로 만드는 한편, 모국인 한민족의 역사를 오히려 식민지사로 변조하였다. 

5history_13_1.jpg‘4세기 후반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 가야지역의 소국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2백 년 동안 다스렸다’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을 날조한 것이다. 

8세기에 일본의 첫 역사서를 만들면서 가공한 남선경영론(임나일본부설)은 19세 기 말 일본의 조선침략 명분으로 다시 악용되었다. 과거에 자기네 조상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지배하였으니, 근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하는 일이라 하였다. 일본은 심지어 만주의 광개토대왕비를 위조하여 일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사를 모두 일본의 식민지사로 전락시켰다. 


5history_14.png일본 역사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일본사는 한민족의 이민사’라고 거침없이 주장한다. 이 주장과 같이, 여러 가지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한민족의 선조들은 바다를 건너 가서 일본 역사를 개척하였고, 고대 일본 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특히 삼국 시대에 이르러 백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왜倭 조정은 백제의 분조分朝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백제가 망한 후(660), 왜는 ‘친정집’인 한반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에 사용하던 왜라는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치고(670), 왜왕을 천황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 역사를 자생自生 왕조사로 변색시킨 『고사기』(712)와 『일본서기』(720)를 편찬하였다. 일본은 첫 역사서에서 천황가를 백제와 무관한, 신대神代로부터 시작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왕조로 조작하였다. ‘일본 왕실이 만세 동안 한 계통으로 내려왔음’을 주장하는 ‘만세일계’ 사상은 일본 황국사관의 핵심이다. 이것은 그 후 메이지 유신 때 ‘막부 대신 천황을 국가의 정점으로 옹립’하는 존황주의尊皇主義의 뿌리가 되었다.

일본 학자 요시노 마코토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낸 속사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서기』가 천황통치를 정통화하기 위한 역사서였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과 관련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 이야기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와 관계가 있다. 천황이 천황이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국가들을 복속시킨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요시노 마코토 저, 한철호 역,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114쪽).

문제는 임나일본부설이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역사의 진실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 프렌티스 홀에서 간행한 『세계 문화World Cultures』(2004)에 “BCE 400년경, 일본은 몇 개의 씨족들이 연합해 야마토라고 불리는 구역에 정착했다. 그들은 일본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한국 남부의 작은 지역을 통치하기까지 했다”라는 서술이 보인다(이길상, 같은 책,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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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의 뿌리를 밑둥이까지 들어낸 이마니시 류는 한민족사의 중간 역사도 가위질하여 고대 중국와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는 과거 중국이 조작 왜곡한 한국 고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사군 대동강설이다. 그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귀신도 하지 못할 땅 뜨는 재주’를 부려서, 고대 요서에 있던 지명을 대동강변에 옮겨놓은 것이다. 거기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군이라 이름을 붙인 그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 되어 점제현신사비 같은 가짜 유물을 대동강변에 묻어놓고 한나라 4군의 유물이 나왔다고 사기극을 벌였다.

5history_17.jpg『환단고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중심이었던 진조선이 망하고(BCE 238), 40여 년 후 번조선도 중국 사람 위만에게 탈취되는(BCE 194) 동안, 진조선 땅에서 일어난(BCE 239) 북부여가 고조선의 대통을 계승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강단사학자 대부분은 이러한 북부여를 무시하고, ‘한 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이 위만정권 멸망 이후 한민족을 지배하였다’고 주장한다.

중국 사서에서 한사군에 대한 기록은 『사기』「조선열전」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그런데 저자 사마천(BCE 135~BCE 90)은 한사군이 설치되는 직접적 계기가 된 ‘한 나라와 고조선(위만정권) 사이의 전쟁’(BCE 109년)을 목격하였지만, ‘조선을 평정하고 군을 설치했다’고 할 뿐, 4군의 구체적 이름과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 기록을 현장 답사로 꼼꼼히 확인했다는 사마천이 한사군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4군의 구체적 명칭은 사마천이 죽고 백 년이 더 지나서, 중화中華사관이 뚜렷한 반고가 쓴 『한서』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서』의 기록도 한사군의 실체에 대해 명확하지 못하다.

중국 사서의 일관성 없는 기록은, 한사군에 대한『사기』의 그 짤막한 기록이 과연 사마천 자신의 서술인지 의문마저 들게 한다. 『사기』의 이 구절은 후대의 역사학자가 삽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사군이란 것이 설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마천은 한사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그 진실을 우리는『환단고기』에 수록된 『북부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나라 무제가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를 격파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한사군은 한나라의 희망사항이었지 결코 실현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그 실존 사실조차 의심스러운 한사군을 한국 강단사학계는 확고부동한 사실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위치를‘ 낙랑-대동강 유역, 현도-압록강 중류, 진번-황해도, 임둔-함경남도’등으로 비정한다. 하지만 이 한사군은 일제가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내용일 뿐이다. 일제는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 ‘한사군 → 임나일본부 → 조선총독부’로 연결시키고, ‘조선의 역사는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였으니 일제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것을 해방 후에 등장한 강단사학자들이 실증주의란 미명 아래 한국사의 주류 학설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를 재야사학자로 몰아 강단사학계에서 추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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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인 연나라왕 노관의 부하로 숙청을 피해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된 위만은 한족망명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키워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인 복장을 하였다 하여 조선의 유민이라 하였는데, 현행 국사학계에서 이를 정론으로 받아들여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엉터리 교육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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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우거右渠가 한무제에게 망할(BCE 108) 때까지 약 90년간 존속한 이 위만정권을 일본은 위만조선으로 격상시키고 이것을 조선 역사의 시작으로 정하 였다. 게다가 일본은 위만조선의 위치를 요동반도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양 이북으 로 비정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일본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일본은 위만조선이 망한 후의 한국사도 뜯어고쳤다. 우거를 멸하여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한무제가 그곳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조선인을 식민 통치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위만조선에 한사군 설이 결합되면서 고대 조선은 결국 중국이 세운 나라로, 나아가 중국의 식민지로 왜곡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에서 해방되어 대한민국이 된 지금 위만조선의 망령은 깨끗이 사라진 것일까? 마땅히 그러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위만조선의 망령은 한국 교과서에 여전히 살아 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거의 모든 역사교과서가 위만을 말하고, 위만을 언급한 역사 교과서 전부가‘ 위만이 고조선 말기에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심지어‘ 위만이 집권하면서 고조선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고 하여 위만을 조선인의 구세주로까지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위만이 연나라 출신이란 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집권하였다’고 하거나‘ 유이민 집단 중에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왔다’고만 한다. 조선의 한쪽 변방을 강탈한 도적이며 침략자에 불과한 위만에 관한 이러한 기록은 반드시 역사 정의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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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예, 맥, 숙신 등의 제후국 이름을 내세워서 조선이라는 국가 이름자체를 제거했다. 

사마천도 『사기』 「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이란 이름을 썼다.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에 중국의 제후국인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단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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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history_9.png『상서대전』,『사기』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를 풀어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

소식을 들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상서대전』은 기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기』는 기자가 책봉은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 결코 없기 때문에 사마천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진실을 고백한 것이다. 요컨대 기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일은 결코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 동방 땅에 그전부터 조선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한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조선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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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4700년전, 치우천황께서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유망楡罔을 추방하고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펼치자 서방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치우천황에게 도전했다. 

이에 천황께서 탁록을 중심으로 황제헌원과 10년에 걸쳐 73회의 전투를 했는데, 이 때 치우천환은 큰 안개를 일으켜 헌원을 사로 잡아 신하로 삼고 동방의 문화를 전수해주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도리어 ‘황제가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역사를 왜곡하는 망필妄筆을 하였다. 

사마천은 중국 역사의 시조인 황제헌원을 천자天子, 즉 동북아의 주도권자로 만들려 했다. 헌원이 천자가 되면 중국은 그 출발부터 천자의 나라가 된다. 그리하여 ‘중국이 천차국으로 천하의 중심이며 주변민족은 모두 야만족’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history_7.png배달국 14대 자오지 천황은 법력이 고강하고 신용관절하며 용병술이 뛰어났다. 구리와 철을 채위하여 무기를 만들고 전쟁 때마다 안개를 일으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신농국을 병합하고 황제를 무릎꿇렸으며 회대淮岱(산동성과 안휘, 강소성)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후에 무신의 원조로 추앙받았다.

『사기집해』는“ 응소應劭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라고 말했다”라는 말을 기록하였다. 천하의 지배자는 헌원이 아니라 치우천황이었다는 말이다.  『사기정의』는 “치우 군대가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太弩]와 같은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 라고 하였다. 

최근 탁록의 현장에는 황제 헌원과 함께 동방의 뿌리 역사의 주인공인 신농씨와 치우천황을 그들의 조상으로 모셔놓은 큰 사당이 세워졌다. 그 이름은 중화삼조당이다. 본래 중국은 황제와 염제신농씨만 서방 한족의 시조라 주장해왔는데, 치우천황까지 시조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에 대해 하버드 대학의 바잉턴M. Byington 박사는 ‘1949년까지 중앙정부가 동북지역을 장기적으로 통치한 적이 없어서 장차 한국이 통일될 경우 조선족의 독립운동을 막을 역사적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삼조당을 지어 황제, 염제, 치우를 ‘중국 민족의 근본을 다진 인물’로 설정한 중국은 치우천황 후반기의 주 활동무대였던 탁록을 ‘중국 5천년 문명사의 요람’이자 ‘중화민족의 주요 발상지 중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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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동서양의 교과서들이 왜 이렇게 하나같이 한국사를 축소·왜곡하는가?

그 근본 원인은 중국과 일본에 의한 한국사 왜곡에 있다. 두 나라는 자기네 국익에 유리하도록 한국사를 날조하였을 뿐 아니라 그 날조된 내용을 다양한 외국어로 번역하여 여러 나라에 알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계 교과서가 한국사를 잘못 서술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은 광복 후 한국의 역사학계를 주름잡은 이 땅의 강단사학자들에게 있다. 40여 나라가 사용하는 교과서 5백 종을 분석하여 한국사 왜곡의 실태를 밝힌 이길상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 학자들에게 배운 한국의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광복이 된 뒤에는 한국의 1세대 역사학자가 되어 왜곡 날조된 한국사를 미국의 학계에 그대로 전하였다. 결국 중국과 일본의 한국사 왜곡, 왜곡된 역사의 세계적 유포, 그리고 한국의 1세대 역사학자들의 민족 주체성을 상실한 태도가 세계 교과서 속에 ‘상고역사가 실종된 일그러진 한국사’를 실리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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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한민족은 오늘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경이로운 역사를 이어왔지만, 시원 역사가 송두리째 잘려 나가 역사 단절의 아픔을 겪는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어찌하여 한민족은 자신의 역사를 잃고 미궁에 갇혀 버리게 되었는가? 그 결정적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외적의 우리 사서 탈취와 소각, 우리 손으로 자행한 사서 말살 때문에 현존하는 한국의 고유 사서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둘째, 중국의 중화주의 사관이 빚어 낸 중독中毒, 일본의 식민주의 사관이 빚어 낸 왜독倭毒, 서양의 실증주의 사관이 빚어 낸 양독洋毒 때문에 한국사가 은폐, 축 소, 왜곡되었다. 

셋째, 유교, 불교, 기독교와 같은 외래 사상에 중독된 반민족적 사가들이 자기 역사를 스스로 부정한다. 


* 원문 출처: 『환단고기』 해제 (상생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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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출처: 환단고기 해제 (상생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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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이자 유명 작가인 이덕일(53)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2일 저녁 7시 청주교대에서 ‘우리 안의 식민사관’을 주제로 첫 강의를 한다. 지난 9월 낸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란 책에서 ‘신채호는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이고,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입니다’라고 말한 한 역사학자의 공개 발언을 인용하며,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주의자 단재가 자국 주류 사학계에서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냐”고 우리 사학계를 정면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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