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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wandan.org/


세계환단학회 발족에 즈음하여


 

안녕하십니까?

한민족의 상고시대 역사를 온전히 전해주고 있는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온 지도

10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환단고기를 모르고 있거나 자세히 알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환단고기에는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전하는 놀라운 사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기록은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편에 나오는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 되었다(吾桓建國이 最古라)"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본래 환족이라는 것과 우리민족이 세운 환국이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위대한 역사선언입니다.

삼국유사에도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이 세상 어느 나라 기록에도 없고 오로지 한민족의 사서에만 나오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의 역사기록이야말로 우리의 뿌리역사를 원점에서 완전히 다시 검토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태백일사에서는 ‘우주에는 일찍이 암흑을 볼 수 없었고,

오로지 광명만이 있었다(曾未見暗黑하고 只一光明矣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은 우주의 실상을 광명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환단은 우주의 광명을 말합니다. 환국은 ‘광명의 나라’요, 환족은 광명의 민족입니다. 

 


그러나 지금 환국을 아는 사람도 없고 광명한 인간이 되는 것을 인간삶의 근본 주제로 삼았던 환족의 문화정신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물질문명의 발달사를 인류역사의 본질인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날의 세계사는 서양을 인류사의 중심으로 여기도록 가르치는 편협하고 편파적인 것일 뿐입니다.

서양문명만 인류역사 발전에 기여한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이것이 바른 교육이겠습니까? 


동양에도 서양 못지않게 편파적인 역사관이 있으니 중화사관과 식민사관입니다.

중화사관과 식민사관에 물들면 우리의 혼과 정신이 마비되어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서로 편을 갈라서 헐뜯고 싸우는 것을 일상으로 하는 천박한 사회상을 연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습니까? 

 

인문사회과학 가운데에서도 사학이 가장 중요합니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에 의하면 “나라를 위하는 길에는 선비의 기개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사학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사학이 분명하지 않으면 선비(지식인)의 기개를 떨칠 수 없고, 선비의 기개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갈라지기 때문이다(爲國之道가 莫先於士氣하고 莫急於史學은 何也오 史學이 不明則士氣가 不振하고 士氣가 不振則國本이 搖矣오 政法이 岐矣니라)”

 

고 하였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사실의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적 삶과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본질입니다.

때문에 과거 역사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의 여명이 타오르기 시작하던 인류문명의 황금시절에 우리는 인류문명의 완성을 위한 광명의 등불을 비추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는 선조들의 위대한 삶의 자취와 혼을 잃어버린 불쌍한 후손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문명의 씨앗이 뿌려진 곳에서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영글 듯이 환단고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장차 대한민국이 인류문명의 뿌리국가로서 진정한 면모를 회복하여 홍익인간, 광명이세의 이상세계를 건설할 사명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를 하루속히 제대로 밝혀서 우리의 혼과 정신을 회복하고 정신이 살아있는 진정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라는 준엄한 경책으로 다가옵니다.


세계환단학회는 환단시대의 역사, 문화, 사상, 정신의 총체적 면모를 학문적으로 환히 드러내고 세계화하는데 정성을 쏟고자 합니다.

이제 세계환단학회가 출범한 것은 100여년 전에 운초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를 편찬한 후 기뻐서 손과 발이 절로 춤춘다고 했던 것처럼 한민족과 인류사의 미래에 희망의 한소식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앞으로 많은 기대와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세계환단학회장 백산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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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日帝) "단군 존재 인정"

총독부시절 문헌 발견 
   일제시대 일본이 단군의 존재를 인정한 자료와 함께 단군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한 문헌 3권이 발견됐다. 

서지학자 이종학(李種學ㆍ독도박물관장) 씨는 2일 단군 존재를 인정한 이왕직(李王職)의 문서 일부(9쪽)와 단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 발행 조선사료(朝鮮史料) 3권을 공개했다.

   이왕직이란 일제시대에 조선왕족의 재산 등을 관리하던 기관. 이 기관에서 1938년 발행한 제목ㆍ필자 미상의 문서 중 종묘(宗廟)의 기원 부분에 "단군은 정사(正史)에 전하지 않아 설 이 분분하지만

단군에 대한 기록을 사실로 본다"며 "특히 사마천의 기록과 삼국유사ㆍ동사 고기 등 많은 역사서를 참고해 볼 때 단군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조선사료 중 '단군조선(檀君朝鮮)' '단군건국설(檀君建國說)' '기자조선(箕子朝鮮)' 편은 단군의 출생과 이동, 그리고 신화의 구체적인 내용 등을 삼국유사ㆍ동국통감ㆍ동 사강목 등 

다양한 역사책을 바탕으로 총정리 해놓고 있어 일제의 단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한다.

   李관장은 "한반도 강점 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단군의 존재를 부정했던 일제가 발행한 문서에 단군의 존재가 인정돼 있는 것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신용호 기자 

중앙일보 1999년 10월 3일자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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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단군'과 터키어 '탱그리(Tengri, 하늘)'
http://www.brainmedia.co.kr/brainWorldMedia/ContentView.aspx?contIdx=14834
몽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등 중앙아시아의 언어로 하늘을 ‘탱그리(Tangri, Tengri)’라고 하는데 한문으로 의역하면서 ‘단군’이 되었다. 이 말은 ‘(하늘처럼) 동그랗다’, 또는 ‘탱글탱글하다’고 하거나, 무속인을 ‘당골네’라고 하는 우리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카자흐스탄의 현재 수도는 ‘아스타나’이데 이는 곧 단군의 도읍지인 ‘아사달’이고, 아스타나 항공사가 발간하는 기내잡지가 ‘탱그리’라고 한다. 이는 그 옛날 카자흐스탄이라는 땅도 곧 ‘단군의 영역’이란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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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년전에서 1만년전은 원시 시대라며 환국이라는 문명은 있을 수 없으니 환단고기는 허구이다?

 

이에 대한 설명 |

어떤 블로그에서 7만년전~1만년전에는 원시시대이므로 환국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환국은 9200년전 이다. 그런데 어찌 7만년전까지 얘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삼성기하下 에는 혹운 6만3천182년이라는 문구가 있어서 그걸 보고 그러는듯 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환단고기 연대는 9200년전까지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7만년전부터 1만년전 시기도 결코 원시 시대가 아니었다. 전기환국으로 볼 수 있다.  


메인 페이지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고고학은 선사시대를 역사시대로 만들어 주는 학문이라 했다이르쿠츠크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맘모스 상아로 만든 사람 모양의 인형은 35천년~1만년전 유물이다그리고 1994년 프랑스 남부에서 지역담당공무원 세명이 발견한 동굴이 있다대부분 우연히 발견된 동굴처럼 이 동굴도 원래 입구는 산사태나 다른 원인으로 인해 무너져 막혀버렸기에 온전히 발견되었다고 한다바로 프랑스 쇼베 동굴이다.쇼베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는 원시인이 그렸다고 하기에 놀랍도록 묘사가 사실적이고그 동굴에서는 사람의 뼈는 나오지 않았고, 동물들의 뼈만 나왔다고 한다제사를 위한 특정한 장소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3만년 전에도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고고학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cuculo/100180209070)


대영 박물관 맘모스 뼈로 만든 조각은 1만 3천년 전 유물이다박물관 설명으로는 당시 이 조각을 만든 예술가는 현대의 정신 수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rubykor)


반면에 우리나라에 암사동이나 대전등 신석기 유적지에서 6~7천년전 신석기 시대를 복원해 놓은 모습은 어떠한가한반도는 열대지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열대지방 원주민처럼 표현해 놓고 있다고고학의 무지가 아닐 수 없다반면에 러시아에서 발굴된 2만 5천년전 남매의 무덤에는 목걸이 구슬이 1만개가 발굴이 되어서 당시에 분업화된 조직이 있었다고 전한다또한 남매의 몸에 수천개의 구슬로 둘러싼 모습을 통해 당시 의복 문화가 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독일 남부의 홀렌슈타인의 슈타델 동굴에서 발견된 맘모스로 만든 테리안스로프(therianthrope)는 기원전31천년경 작품이다머리는 사자머리이고 몸은 사람모습이다이는 3만년전에 반인 반수의 신화가 존재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결코 원시인들었다고 할 수 없다.

(이미지 출처 : http://cafe.naver.com/qkftkd22/3534)


 

이밖에도 수도없이 많은 유물들이 수만년전 인류가 결코 원시인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 현대 고고학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7만년~1만년전 역사를 구석기 원시인들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며,구석기식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7만년전~1만년전 시대에서 이러한 지적수준의 인간이 살았다는것은 일반적인 환국의 연대로 보는 9200 여년 전에는 더욱 발달된 문명이 존재했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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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위서? 잘 모르는 위서바이러스에 걸린 위서론자들이 <초록불>이라는 자의 이글루스 블로그를 인용하거나 추천합니다.

그래서 이글루스 블로그에 <위서론 반론 블로그>를 익명의 한분(?)이 정리를 했습니다.

http://morris33.egloos.com/

환단고기 위서론 반론 책에 있는 내용을 블로그에 옮겨 놓았고 책으로 나온 내용에서 문제가 있거나 논리가 약한 몇 부분 보완을 하였습니다.

첫 화면에 보시면 위서와 역사왜곡에 대한 설명과 위서론 질문들 리스트를 올려 놨습니다. 클릭을 하면 바로 해당 설명으로 링크를 걸어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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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해제 중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동양에서 역사歷史는‘ 지날 역歷’ 자와‘ 사관 사史’ 자가 합쳐진 말이다.‘ 역歷’이란 대자연 속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꿈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 삶의 발자취를 의미한다. 그래서 역사란‘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삶의 총체’를 일컫는다. 

‘사史’는‘ 가운데 중中’과‘ 손 수手’가 합쳐진 말로서,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 정신을 뜻한다. 주관에 치우친 편협한 안목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중도 정신에서 벗어나므로, 무엇보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히스토리history’의 어원인‘ 히스토리아historia’는 원래‘ 탐구’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 말이다. 이 용어는『 히스토리아이Historiai』를 지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 도투스Herodotus(BCE 484?~BCE 430?)가 책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때 수집한 자료를 28개의 이야기로 정리하여 이 책을 썼다. 과거에 대한 고증과 조사를 바탕으로 쓴 서양 최초의 역사책인『 히스토리아이』에서‘ 히스토리(역사)’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역사란 과거의 진실을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지난 과거사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어 현재 삶을 향상시킬 최선책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의미체다History is meaning.”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읽게 하되 어릴 때부터 읽게 할 것이며, 역사를 배우게 하되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게 할 것이며,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배우게 할 것이며, 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피지배 계급도 배우게 할 것이다” 라고 외쳤다. 그가 말하는 역사는 국가와 민족을 소생시키고 인류의 참된 소명을 깨닫게 하는,‘ 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이다. 때문에“ 정신이 없는 역사는 정신이 없는 민족을 낳고, 정신이 없는 나라를 만든다”라고 절규하였다. 신채호에 따르면 역사는 인간정신 활동의 결과물이요 산물이다. 그래서 역사는 인류의 삶에 필요한 제1의 자산이자 지혜의 보고가 된다.

우리가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유는 오늘의 우리 삶이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며, 지금 우리의 발걸음에 따라 미래의 향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으면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도 가질 수 없다.“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 속에 살아있는 과거”이고,“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변혁에 대비하고 밝은 미래를 열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역사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역사에서 나온다. 그래서 흔히‘ 역사는 미래학’이라 말한다.

‘역사를 모르는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

이 한마디에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필연성과 당위성이 담겨 있다.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 놓고서 성姓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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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24)은 음력 10월 3일 진짜 개천절

현재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을 기념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음력 10월 3일이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 된 것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더불어서 음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해방후 정식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단군왕검을 우리의 시조로 인식하고 단기檀紀를 연호로 법제화해서 공식적으로 사용 하였으며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 국경일로 지정했다

본래는 환인천제께서 다스리셨던 환국桓國의 국통國統을 계승한 환웅천황께서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시고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배달국(BCE3897)을 건국한 날인 음력 10월 3일이 바로 오늘의 개천절의 근원이다.

환인천제께서 환웅천황께 동방개척의 사명을 내린다. 신교神敎 가르침의 정수가 새겨진 신령스런 천부인(天符印) 세 개와 3000명 핵랑을 거느리시고 태백산太白山(백두산)으로 향했다. 이것이 바로 ‘개천(開天)’ 역사의 시작이다. 그리고 고조선을 건국하신 단군왕검께서 800여 명의 백성를 이끌고 단목 터에 와서 삼신상제님께 제를 지내신 날도 바로 음력 10월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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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꼽아달라고 하니 “이순신이 어머니 위패에 절할 때 보이는 현판을 주목하라. 거기에 숨겨놓은 비밀이 있다”고 귀띔했다

(김한민 감독 인터뷰, 2014.08.18 국민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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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 청소년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다. 

 


글작성 : msn-skr486@hotmail.com
     세이-loveryeh
     버디-매일기분져아

 

글쎄-_-;국사시간에 맞았습니다..!!!!!

 

크억!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국사시간이 돌아왔습니다 ^ㅡ^
평소 존경하는 국사 선생님이 떠나셔서-_-;아쉽긴 했지만요....
새로오신 선생님께서는 간단한 소개를 맞치고나서 
저희에게 진단평가?-_- 라는 것을 하신다면서 종이를 나누어주시는데 
이게 왠일입니까!!!
문제가 으 ㅇ ㅏ ~~~ 총 .... 70문제나 되는 것이였습니다-_- 그것도 
30분안으로 다 풀으라는 거였지요..
문제를 쭉 쭉 쭉 풀면서 내려가다가 갑자기 ! 한 45번쯤 문제에서 저는 콱 ! 막혔습니다

 

음....문제가 바로 이거였거든요 
문제- 우리나라의 역사가 가장 잘 들어나있고, 한 민족의 참 역사서는?
전 당연히..당연히....환단고기라고 하였지요.-_-v 
제가 평소에도 환단고기라는 만화책을 읽고 있었고.... 확실한 생각으로 였지요 
문제를 다 풀고 나서 아이들이 답안지를 걷어서 
선생님께 갖다 주었습니다

 

제 번호가 2번이거든요?
선생님께서 제 답안지를 보시더니 머리를 툭 치시면서 하시는 말씀
'야! 환단고기가 있어?! 그건 존재하지 않아! 답은 삼국사기라고!!'
황당했습니다-_- 우리나라의 참 역사서는 당연히 환단고기인데 
한마디로 저희선생님은 기독교에다가 환단고기를 부정하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앞으로-_-1년동안 국사를 어떻게 배울지 막막 하였습니다 
얼마전 아빠에게 생일선물로 환단고기 원본을 선물 받았습니다 
지금도 읽고 있구요....^^ 한문이지만 한문공부를 예전에 한 바가 있어서.ㅋㅋ 
어려우면 밑에 풀이 되어있는 한문을 보고 읽고 있습니다

 

전 이책 잘 읽어서 꼭! 저희선생님께 보여드릴 겁니다 
왜냐구요? 우리 민족의 참 역사서가 환단고기이고 반만년의 역사가 아닌 9천년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체를 보여드리기 위해서요!!

 

'ㅡ' 지금 우리나라땅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중 
환단고기 부정 하시는 선생님이 계시겠죠? 하지만-_-ㅋ 
환단고기는 절대 부정할수 없습니다!! >_< 우리민족의 참 참 참!!!!!!역사서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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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 국혼 말살정책 실체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은 자기의 저서인『한국통사』(1915) 결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국혼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국교(國敎)와 국사(國史)가 망하지 않으면 국혼(國魂)은 살아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亡)하지 않는다.”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천황제를 기축으로 한 근대국가 체제를 수립한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제는, 조선 민중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조선의 각종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제반 정책을 실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침략·수탈을 합리화하고, 조선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일제는 한국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한국의 국혼(國魂)을 말살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수립해 강력히 실시했다. 
                                                         1.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때 유신의 싹이 텄고,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幕府)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을 겪었다. 그러다가 700여 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官主導)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새 시대를 열었다. 이 유신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 ·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1894년에는 청일전쟁을 도발했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도발했으며,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해 식민지로 삼았다.
                                                          2. 정한론(征韓論)
  정한론(征韓論)은 187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된 조선(朝鮮)에 대한 공략론(攻略論)을 말한다.
  고종 5년인 1868년 일본정부는 그들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양국의 국교회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 왔으나, 척왜정책(斥倭政策)으로 기운 대원군 집정의 조선정부는 서계(書契:外交文書)의 격식이 종전과 같지 않고 도서(圖書:符印)도 조선정부가 인각(印刻)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였다. 이로부터 양국은 외교문서의 수리를 놓고 1년을 논박으로 보내다가 일본은 대조선(對朝鮮) 외교를 전담하여 온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오씨(宗氏)로부터 그 직임을 회수하고 1869년과 1870년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조선측의 완강한 거부에 부닥쳐 타결을 보지 못하였다. 1872년에는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내도하였으나, 조선측은 '왜사(倭使)가 군함을 타고 오다니 상대해 줄 수 없다'고 냉대하여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돌아갔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일본의 조야에서는 정한론이 세차게 일고, 1873년에는 이것이 정치문제화 하여 삿슈(薩州) 군벌의 거두이자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참의(參議)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및 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 강경 정한론자들은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이 해외시찰차 나가 있는 사이에 사이고가 스스로 견한대사(遣韓大使)가 되어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조선에 파병하여 무력행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등 많은 각료들은 국력(國力)의 배양(培養), 내치(內治)의 선결을 들어 정한론에 반대하여 1개월여를 두고 논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태정대신(太政大臣 : 首相)의 대행이 된 이와쿠라는 그해 10월 24일 정한(征韓) 반대를 결정하고 이를 상주(上奏)해서 견한사절건(遣韓使節件)은 무기 연기되었다. 
   이로써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의 다섯 참의는 각료직을 사퇴하여 일본정계는 둘로 갈라지고 정한론의 후유증은 곧이어 이른바 '서남(西南)의 역(役)' 이라는 사족(士族)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정부 내에서 정한론에 맞섰던 이와쿠라 등 비정한파(非征韓派)가 본질적인 비정한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주도한 정권이 1875년 운요호(雲揚號)를 보내 강화도를 침공하여 운요호사건을 일으키고 강압적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한 예로써 증명이 된다.

                                             3.  한국사 왜곡 – 황국사관과 식민사관
                                                        1) 황국사관(皇國史觀)
  황국사관이란 일본의 천황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즉 일본이 신의 나라이며 일본의 천황은 하늘의 자손이므로 천황의 말은 무조건적으로 신봉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자손이 일본열도에 내려와 일본을 건국하고 천황이 되었고 그 혈통이 전세계에 전해져 오늘의 일황에게까지 연결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황국사관은 일본 우월주의와 함께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만행을 모두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되어 왔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2) 식민사관(植民史觀)
  일제가 한국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역사관을 말한다. 식민사관에 기초를 둔 한국사 연구는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신공왕후의 신라정복설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한국역사를 만주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만선사(滿鮮史) 이론, 당시의 한국 경제를 일본 고대의 촌락경제수준으로 보는 이론 등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논리는 20세기 초 조선침략이 본격화되자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정체성론, 타율성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관의 토대가 되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과 조선은 동일한 조상을 갖고 있다. 즉,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의 조상은 하나'라는 이론이다. 환언하면 본래 한국과 일본은 같은 민족으로 한국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한민족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일본과의 합병이나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하여 1930년대 일본이 펼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정체성론은 한국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능동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당시의 조선사회가 10세기 말 고대 일본의 수준과 비슷하다고 보는 주장이다. 특히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봉건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여 사회경제적 낙후를 면치 못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논리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침략미화론으로 이어졌다. 
  타율성론은 한국이 역사를 스스로의 주체적인 역량으로 전개시키지 못하고 중국이나 몽골, 만주, 일본 등 주변 외세의 간섭과 힘에 좌우되어 왔다는 논리이다. 한국사는 그 형성에서부터 중국 등의 식민지배에서 출발하였다고 보았는데, 이는 한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성향을 부정하고 타율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민족의 부수된 주변성으로 대표되는 반도적 성격론과 사대주의론에 관한 주장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이 밖에 당파성론도 제기되었는데, 이 주장은 조선의 문화수준이 낮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처럼 발전하지 못한 까닭은 잘못된 민족성을 지닌 탓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파벌을 만들어 싸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쟁과 사화를 그 예로 들었다. 
   일제는 한국사 재구성 작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1922년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37권, 1937)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식민사관은 우리 민족이 열등의식과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심리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주체적인 역사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극복되었다.(두산백과) 
                                                          4.  황국신민화정책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탄(倂呑)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부터는 한민족을 아예 말살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제 추진하고,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으로 신사(神社)를 참배시키고 조선인도 일본 천황의 백성임을 선언하도록 강압하였다. 문자와 언어도 일본문자 일본말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두 민족이 하나의 조상·하나의 뿌리를 가졌으므로(동조동근설 同祖同根說) 한국인도 일본인의 한 부류임을 이론화하여 세뇌(洗腦)시켰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 2월 11일 설립된 친일 민간단체인 녹기연맹(綠旗聯盟)은 기관지겸 사상교양지인 월간『녹기(綠旗)』를 1936년 1월부터 발행하여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를 한국인에게 홍보했다. 특히 1937년부터 내선일체를 이론화한 현영섭 등 조선인들이 가입하면서 성격이 바뀌어 내선일체의 이념과 실천이 조직의 중심 목표가 되면서 정치적 색채가 크게 강화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시책에 호응하면서 대외 활동도 활발해졌다. 조선총독부의 외곽 정보 조직으로 기능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일제는 동조동근설(同祖同根說)과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을 한국인에게 주입시키고 확산시키기 위해 1940년 1월 1일 친일 일문잡지(日文雜誌)인『내선일체』를 창간했다.『내선일체』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을 적극 찬양하고,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하고 일본 문화를 한민족에게 주입시키는 역할을 한 대표적인 반민족지(反民族誌)로 약 5년에 걸쳐 일본의 한국인 말살정책을 뒷받침하였다.
                                                      5. 일제의 종교 탄압 – 보천교 탄압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뒤 종교계의 반일사상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여러 가지 탄압정책을 썼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16일 총독부령 제83호로 이른바 ‘포교규칙’이란 것을 공포했다. 여기서는 총독부가 공인하는 종교는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라고 규정하고, 이외의 종교(단체)는 모두 유사종교로 분리하여 불법화시키고 탄압했다. 특히 일제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대표적인 민족종교인 최제우의 동학사상, 김항의 정역사상, 강일순의 신명사상, 나철의 삼일철학, 박중빈의 일원철학 등 5개의 사상을 사교 또는 유사종교라 격하시키면서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술책으로 혹독한 탄압을 자행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직후인 1911년 6월13일 이른바 ‘경학원 규정’(제령 제7호)을 통해 성균관을 폐지하고 학사중심의 경학원(經學院)을 세워서 총독부가 운영에 직접 개입토록 만들었다. 이로써 한국의 최대 종교 세력인 유림계를 장악한 것이다. 이어서 ‘사찰령’이란 것을 제정하여 불교계를 통제하기 시작하고, 병탄직후 이른바 데라우찌총독 암살미수사건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기독교인 105인을 가혹한 고문으로 기독교계를 탄압했다.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에서 유교와 불교, 기독교는 공인종교로 인정하여 자신들이 직접 통제할 수 있도록 총독부 학무국에 종무과를 설치하고 종무과에서 이 세 종교를 담당하도록 조치했다. 이와 함께 민족종교들에 대해서는 ‘포교규칙’ 제15조에 “조선총독은 필요가 있을 경우 종교 유사한 단체라 인정한 것에 본령을 준용함이 가함. 전항에 의하여 본령을 준용할 단체는 이를 고시함”이라고 규정,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종교활동이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일제의 조선종교정책은 기성종교는 각종 위협과 혜택으로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고, 민족종교들은 총독부 경무국 체제에 두고 철저하게 공인종교와 차별하면서 탄압했다. 
  조선총독부는 민족종교를 말살시키고자 촉탁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을 시켜 한국의 민족종교들을 ‘유사종교’로 일괄 정리하면서, 총 5계파 66교로 분류했다. 무라야마가 분류한 ‘유사종교’는 다음과 같다. 
  ▲동학계열 17개교=시천교, 상제교, 원종교, 천요교, 청림교, 대화교, 동학교, 인천교, 백백교, 수운교, 대동교, 천명교, 평화교, 무궁교, 무극대도교, 천법교, 대도교.
  ▲증산교계열 11개교=보천교, 무극대도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증산교, 동화교, 태을교, 대세교, 원군교, 용화교, 신도교.
  ▲불교계열 10개교=불법연구회, 금강도, 불교극락회, 감로법회, 대각교. 운융도, 정도교, 영각교, 광화교, 광화연합도관, 원각현원교. 
  ▲숭신교계열 16개교=관성교, 단군교, 대종교, 삼성교, 기자교, 기사교, 숭인인조합, 신리종교, 문화연구회, 교정회, 성화교, 영신회, 서선신도동지회, 황조경신숭신교, 칠성교, 지아교, 영가무교.
  ▲유교계열 7개교=태극교, 대성원, 막성원, 공자교, 대성교회, 대종교, 성도교.
  ▲계통불명 5개교=제화교, 천화교, 각세도, 천인도, 동천교. 

  민족종교 가운데서 민족적 자주의식과 독립정신을 표방하며 활동한 종파가 있었는가 하면, 그냥 무격, 무당, 미신, 사이비 종교로 민중들을 갈취하고 일제에 협력한 종파도 없지 않았다. 일제 패망과 한국 독립을 표방한 주요 민족종교는 다음과 같다.
  대종교, 미륵불교, 무륵대도교, 성도교, 세천교, 신인동맹, 신장교, 여처자교, 영가무도교, 일련교, 정도교, 천자교, 태극교, 태을교, 황극교. 
  일제는 1930년대 후반 대륙을 침략하면서 더욱 강화된 통제정책에 따라 이른바 ‘유사종교’에 대한 더욱 철저한 탄압을 자행했다. 새로 부임한 총독 미나미(南次郞)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거나 타인을 참배시키지 않는 행위는 안녕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이며 공익을 해치는 자”라는 법규를 내세워 민족종교를 탄압했다. 
  1930년에는 ‘유사종교 해산령’을 내려 민족종교를 모조리 해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해산령으로 민족주의 성향을 띠지 않았던 일반 종교(단체)들도 대부분 해체되었다. 한국 민족종교사상 최대의 시련기였다. 그럼에도 일부 민족종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와 힘겹게 싸웠다. 특히 차경석의 보천교(普天敎)는 증산교 계열의 민족종교로 신도가 600만 명에 달하여 그 영향력이 대단했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등으로 항일독립운동에도 많이 기여했는데, 1936년에 교주인 차경석이 타계하여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6. 신사 건립 및 참배 
   일제는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에 착수함과 동시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비롯해 각 지역에 신사(神社·神祠)를 설립하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신사(朝鮮神社) 신영준비비(新營準備費)를 예산에 편성하여 일본 제국회의(帝國會議)의 협찬을 거쳐서 확정시키고 각 방면에 걸쳐서 조사를 실시하였다. 1913년에는 건축 전문 기술관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내의 유명한 신사의 구조·형식 등을 조사하여 참고 자료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1914년 1월부터는 총독부의 토목국과 내무부 관계 직원들이 수차례의 합동 회의를 갖고 신사 조영(造營)에 따르는 제반사항을 심의하였다. 여기서 신사의 설립 위치는 경성부 안에 두기로 하고 후보지 여러 곳을 조사한 결과 남산의 한양공원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또 제신(祭神) 문제도 상당한 논의를 거쳐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명치천황(明治天皇)으로 결정하였다. 
  수년에 걸쳐 조선신사 설립에 관한 준비와 기초 조사를 끝낸 조선총독부는 1918년 3월 신사 조영 경비를 4개년 계속비로 예산에 편성하고, 같은 해 12월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請議)를 일본 내각 총리대신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1919년 7월 18일부로 일본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남산 한양공원 주위에 용지 20만 평을 확보, 1920년 5월 27일 지진제(地鎭祭)를 행함으로써 공사에 들어가 1925년에 완공하였다. 그 명칭도 격을 높여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바꾸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민간신사(民間神社)를 제도적으로 공인하여 관·공립화하기 위하여 신사에 관한 각종 법령을 마련 신사 제도의 확립에 힘을 썼다. 1915년 8월 16일자 총독부령 제82호로「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을 제정 발포하여 모든 신사의 창립과 존폐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기존의 신사들도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또 1917년 3월 22일에는 총독부령 제21호로「신사(神祠)에 관한 건」을 발포하여 신사(神社)로 공인받지 못한 소규모 집단의 소사(小社)라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였다. 당시 신사(神社)는 숭경자(崇敬者) 30인 이상이 창립 허가를 낼 수 있음에 비하여, 신사(神祠)는 “공중(公衆)에 참배케 하기 위하여 신지(神祗)를 봉사(奉祀)하는 것”으로 10인 이상이면 설립 허가를 얻을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총독부 방침에 의하여 그때까지 일본거류민들에 의해서 각지에 설립되었던 거류지 신사들의 대다수가 총독부로부터 공인되어 신사(神社)로서 인가되었고, 아직까지 신사가 없던 지방에는 신사(神祠)라도 세우려는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1916년에 17개이던 신사(神社)가 1920년에는 36개, 1925년에는 42개, 1930년에는 49개로 늘어났다. 또한 1917년에 11개에 불과하던 신사(神祠) 역시 1920년에는 46개, 1925년에는 108개, 1930년에는 182개로 증가하였다.
   1930년대 접어들어 농촌진흥운동과 더불어 정신교화·심전개발(心田開發) 운동을 권장한 일제는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는 가운데 신사 중심의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총독부에서는 각 도에 통첩을 보내 신사의 설립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게 하는 한편, 신사를 지을 때도 토지를 강제로 수용할 수 있도록 토지수용령을 개정하였다. 또한 1936년 8월 신사에서 도·부·읍·면(道府邑面)으로부터의 신찬폐백료(神饌幣帛料)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신사의 관공립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신사제도를 개정하였다. 그리고 총독부에서는 1면(面) 1신사 정책을 추진하여 전국 각지에 신사의 건립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제반 정책에 힘입어 각지에 신사 설립이 급격히 증가하여 1945년 6월에는 전국에 신사가 1,000개 이상이 건립되었으며, 해마다 신사를 중심으로 한 행사나 참배자수가 급증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학교는 물론 종교단체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대전 신사는 명치 40년인 1907년에 현재 성모여고 자리에 창건되어 처음에는 대전대신궁이라 불렀으며 천조대신을 봉사하였다. 대정 6년인 1917년 6월 11일 법규에 의해 공인신사가 되었고 사호도 역시 대전신사로 바꿨다. 한편 1907년 4월 초에 소제산 위에 사전을 창조하여 황조신령(皇祖神靈)을 봉사하였다. 소화 3년인 1928년 새로이 현재의 사지에 사전을 건축하여 천좌하였다. 소화 11년인 1936년 8월 도공진신사로 지정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조선인을 모두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조선총독부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었으며, 이것이 전시 총동원체제하에서는 애국반 등 각종 조직을 통해 더욱 강제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참고 문헌>
    1. 小山文雄,『神社과 朝鮮』, 1934.
    2. 孫禎睦,「朝鮮總督府의 神社普及·神社參拜 强要政策硏究」,『韓國史硏究』 58, 1987.
    3. 안후상,「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1993.
    4. 윤이흠,『일제강점기의 민족종교운동』, 집문당, 2004.7.20.
    5. 淸岩 張基萬, “일제가 조선 각지에 세운 침략신사”, 2014.8.31.
    6. “메이지유신”, “정한론”, “황국사관”, “식민사관”, “황국신민화정책”, 네이버 두산백과, 2014.11.8.
    7. 김삼웅, “일제 강점기 민족종교의 탄압과 수난 - 사교․유사종교로 격하 민족정기 말살획책”, 종교신문, 2007.3.8일자.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전국문화원연합회장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Posted by 바람을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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