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탐사선발사에서 도착까지
'과학과 동양사상'에 해당되는 글 72건
- 2015.06.30 화성탐사선발사에서 도착까지
- 2015.06.16 서양의 우주론, 우주의 생성과 소멸
- 2015.06.07 뇌과학, 좌우뇌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 2015.02.25 물과 불
- 2015.02.03 우주가 사람처럼 생겼다는 별자리 지도
- 2015.01.07 아인슈타인의 실수
- 2014.11.29 동양과 서양의 차이, 아는 것과 보는 것.
- 2014.11.17 퍼지이론에 대해
- 2014.11.17 현대물리학과 동양철학 1
- 2014.11.17 엔트로피 법칙으로 영구기관은 없게 되는건가
현대과학에 의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우주의 탄생은 1948년 미국의 가모프가 밝힌 빅뱅(Big Bang, 대폭발) 설이다. 즉 우주는 150억년전(?)에 높은 진공에너지를 가진 고밀도의 한 점(‘특이점’이라 부름)에서 대폭발을 하여 지금까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우주의 탄생비밀을 밝히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특이점이 어디서 왔는지, 즉 빅뱅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결점을 보충하여 최근 새로 등장한 이론이 현재 우주연구의 선두를 달리는 영국의 천재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과 소련출신 비렝킹(미국 국적) 등에 의한 “양자 우주론”이다. 우주생성 초기단계는 10의 43제곱분의 1초라는 아주 짧은 순간을 말하는데, 이것은 양자역학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이 이론에 따른 우주의 생성과 소멸과정을 아래 간단히 살펴보자.
『우주는 150억년 전에 특이점이라는 ‘점’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로서 태어났다(폭발했다).그러나, 이 ‘무’의 상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소립자보다 작은 초극미의 무한이라 할 수 있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빅뱅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이 탄생하는 순간이며, 그 이전의 우주는 시간.공간.물질의 구분이 없는 상태). 우주가 팽창해 가는(나선형 모양으로 팽창함) 과정에서 은하계와 별이 태어나며 현재에 이르렀다. 필요한 온도 등의 조건을 갖춘 행성에서는 생명체가 태어났다. 넓은 우주에서는 갖가지 생명체가 탄생되었을 것이다. 우리 태양계는 46~47억년 전에, 지구는 46억년 전에, 태양은 41~44억년 전에 만들어 졌고, 지구상에 최초의 생물이 등장한 것은 40억년 전이다. 그리고 약 5만년전에 현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간도 팽창하고 시간도 미래도 늘어가고 있다.
우주는 팽창함에 따라 더욱 무질서, 즉 혼돈에 빠진다. 팽창하는 동안 우주는 매우 불균질한 상태가 된다(아인슈타인 이후 현대과학에 의해 밝혀진 현 우주의 모습은 시공연속체로서 울퉁불퉁하고 속은 비어 있으면서 얄팍한 공간모습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주는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모든 은하는 우주안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고 비누방울의 거품과 같은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다. 우주의 팽창과 함께 거품구조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로서 우주가 영원히 팽창을 계속할 것인 지, 다시 수축할 것인 지 알 수 없다.
우주가 수축하면, 수축하면서 우주공간의 밀도는 높아지며 질서상태로 돌아간다. 우주는 다시 막힌 데가 없고 질서를 되찾는다. 가을에 열매가 성숙하듯 은하계는 열매처럼 결실을 맺으며 또 다른 은하계와 통합되기도 한다.(斂)
즉, 수축이 진행되면 별끼리 융합하여 블랙홀이 생긴다. 블랙홀이 자꾸만 커가다가 마침내 우주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이 되며, 블랙홀은 다시 특이점으로 수축되었다가 특이점 조차도 사라지고 우주는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藏) 공간과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우주는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깨어날 내일을 기약하면서.
수축하고 있는 우주의 상(相)에 인간이 살고 있다면, 시간이 역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은 아니며, 계속 미래로 진행되는 것이다. 시간은 반복된다. 즉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렀다가 다시 되돌아오므로 수레바퀴보다는 진자(시계추) 쪽이 더 적절하다.
■(1) 블랙홀(Black Hole) :
별이 공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은 중력과 압력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인데, 중력이 매우 강한(태양의 10배 이상) 별은 수축을 계속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밀도나 중력의 크기가 무한대인 한 점(특이점)으로 집중하게 된다. 여기 내부는 중력이 너무 세어서 빛조차도 빠져 나오지 못하므로(나선형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두워서 이 곳을 밖에서는 볼 수 없고 다만 우주공간에 마치 검은 구멍(블랙홀)이 뚫려 있는 것 같이 보이므로 블랙홀이라고 한다.
빛이든 행성이든 모든 것을 빨아들여 일점으로 응축시키며, 이곳에는 시공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블랙홀은 대폭발이 시작되었던 우주의 탄생과정을 역전시켜 보는 것과 흡사하다. 우주에서 수(水)의 힘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다(오행론의 水 성질 참조). 관측에 의해 블랙홀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이 이미 발견되었다.
우주가 팽창을 계속하면, 현재 커가고 있는 블랙홀 만이 더욱 크게 자라며 이윽고 별이든 은하든 우주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블랙홀은 다시 특이점으로 수축되었다가 특이점 조차도 증발되고 우주는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藏)
우주의 경계는 끝이 없다. 크기는 유한하지만 경계나 끝은 우주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주는 시작과 종말이 없고 공간적으로도 끝이 없는 무심(無心)의 존재다.』
■ 우주만물에 존재하는 生.長.斂.藏의 법칙 및 그 용어는 조화옹(?)께서 우리에게 처음 알으켜 주신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동양우주론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에서는 비록 서양우주론을 다루고 있지만 독자들의 이해의 편의를 돕고자 동양철학의 용어를 말미에 삽입한 것이다.
현재 양자 우주론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주가 언젠가 수축할 것인지(닫힌 우주), 아니면 지금처럼 팽창을 계속할 것인지(열린 우주)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까지 서양과학이 발견한 우주의 비밀은
1) 놀랍게도 우주는 ‘무’에서 시작되어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2) 그러나, 앞으로 우주가 지금처럼 팽창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수축할 것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우주는 시작과 끝이 없고 공간적으로 끝이 없이 그저 "존재"할 따름인 무심(無心)의 존재'라는 결론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신이 있다 하여도 태초의 우주 창조에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스스로 열려 가는 우주의 본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우주에는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은 창조주 하느님(우주의 질서까지 빚었다는 신)이 없다는 것이다(이런 주장으로 인해 스티븐 호킹은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부인과 이혼까지 당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질서의 통치자 하느님이 계신다는 쪽으로 우주의 주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우주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편, 서양과학이 풀지 못하는 두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을 후술하는 동양철학에서는 너무나 싱겁고 쉽게 구할 수 있다 !
인체의 신비 | 내 안의? 뇌안의? 적절한 균형
{오늘날은 뇌과학이 의학뿐만 아니라 마케팅, 경영학 등 전방위적으로 적용되는 시대다. 이제 과학은 인간의 의식과 영성을 들여다보려 한다. 간혹 “인간의 영적 체험은 뇌의 착각”이란 성급한 연구가 발표되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NO!”, 영적체험을 할 때 신경의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뇌가 그런 체험을 유발하는 것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연구가 거듭될수록 인간은 원래 영적 존재이며 이런 체험이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좌뇌와 우뇌의 차이를 통해 이 주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여건이 허락된다면 유튜브YouTube나 TED에서 <뇌과학자의 뇌졸중체험기, Jill B. Taylor>라는 영상을 먼저 봐주시길 부탁드린다. 한 뇌과학자가 뇌졸중을 직접 겪으며 일어난 체험을 강의한 내용인데, 매우 의미있고 감동을 주는 영상이다. 경지 높은 구도자에게 들을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과학자로부터 듣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랄 것이다. 뇌졸중으로 왼쪽 뇌의 기능을 잃은 질Jill 박사는 8년의 재활과정에서 겪었던 체험들을 신경과학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좌우뇌와 뇌량의 역할
뇌연구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의문 중 하나는 “왜 좌뇌와 우뇌로 나뉘어져있는가?”하는 의문이다. 좌뇌와 우뇌가 기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좌우뇌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에 참여해 교류가 이뤄진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두 뇌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굵고 넓은 신경회로를 뇌량Corpus Callosum이라고 한다.
뇌의 중앙부에 교량처럼 연결된 부위가 뇌량이다. 간질환자의 경우 뇌량을 자르기도 하는데, 간질 자체를 치료하는 것은 아니고 발작이 다른 뇌로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뇌량절제술을 받은 사람들이 간질증상은 호전되지만 전혀 다른 문제를 보이기 시작한다. 가령 슈퍼에 가서 물건을 고른다면, 왼쪽 손과 오른쪽 손이 서로 다른 물건을 집으려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만약 좌우에 각각 열쇠와 칫솔이란 두 개의 단어를 보여주고 읽어보라고 하면 오른쪽에 놓은 칫솔만 읽고 열쇠는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까 본 걸 가져오라고 하면 열쇠와 칫솔을 모두 잘도 가져온다.
우리 몸의 오른쪽의 감각정보는 왼쪽 뇌가 담당하고, 왼쪽은 오른쪽 뇌가 담당한다. 아주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좌뇌에 언어중추가 있어서 오른쪽의 시야로 들어온 정보를 왼쪽으로 보내야만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뇌량이 절제되어 왼쪽에 있는 ‘열쇠’라는 글자정보를 좌뇌의 언어영역으로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쇠”라는 단어를 읽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뇌량절제술을 받은 환자나 뇌졸중이나 사고로 뇌손상을 입은 환자들을 통해 좌우뇌가 확실히 다른 모듈로 되어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흔히 말하듯이 감정의 뇌-이성의 뇌, 통합의 뇌-분석의 뇌, 예술의 뇌-논리의 뇌 등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뇌형 인간, 좌뇌형 인간 같은 극단적인 표현들까지도 나오게 된 것이다. 어쨌든 양측반구는 뇌량이라는 고속도로를 가진 덕분에 각각의 반구가 처리하는 정보유형이 다르지만 세상을 단일하게 지각할 수 있다.
대뇌피질의 구성과 기능 영역
대뇌의 표면을 구성하는 회백질로 이루어진 부분을 대뇌피질大腦皮質(cerebrum cortex)이라 하는데, 대뇌피질은 크게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 후두엽으로 나뉜다. 뇌 자체를 대형마트에 비유한다면, 대뇌피질에는 수많은 매장들(뇌기능)이 각기 최적의 상태로 배치되어있고, 각 부스는 서로 통로(신경회로, 시냅스synapse)로 연결되어있어서 필요하다면 언제든 최적의 동선으로 찾아갈 수 있다.
독일의 해부학자 브로드만(Korbinian Brodmann)은 대뇌피질을 관찰해 일일이 그 영역을 표기했는데 이를 브로드만 뇌지도라고 한다. 전두엽에 위치한 44, 45번은 언어표현의 중추인 브로카Broca영역이고, 측두엽의 39, 40번은 언어이해의 중추인 베르니케Wernike 영역이다. 예를 들어 베르니케영역에 손상을 입었다면,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질문을 해도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질Jill 박사의 경우는 두정엽의 연합영역(신체 경계, 공간과 시간 개념의 중추)에 출혈이 일어나 브로카영역과 베르니케영역까지 핏덩이가 덮였기 때문에 언어와 동작, 자각 능력 등 뇌 기능들이 마비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영적 체험과 뇌활동의 관계
앤드류 뉴버그Andrew Newberg와 유진 다킬리Eugene Daquili 박사는 티베트의 수도승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녀들을 대상으로 종교적, 영적체험을 할 때 일어나는 뇌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명상이 절정에 달하거나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순간 좌뇌의 언어중추와 정위연합영역의 활동이 감소했다. 이는 질Jill 박사가 뇌졸중 이후 우주와 하나가 된 체험을 했을 때와 동일하다. 즉 우뇌의 긍정적인 기능들, 나를 고정체가 아닌 유동체로 인식하는 경험, 우주와 내가 하나된 듯한 경험,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느낄 수 있었던 체험, 그리고 나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등이다. 다시 말해 좌뇌의 언어중추와 정위연합영역이 기능이 멈췄을 때 우뇌는 깊은 마음의 평화 상태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뇌 속의 끊임없는 재잘거림을 멈추는 것, ‘나’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 와! 이것은 과학이 수행의 원리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펜실베니아대학 뉴버그 교수는 “영적 체험들이 뇌활동과 관계가 있다고 해서 그런 체험이 신경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다.”고 했다. 오히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물질적인 존재를 초월하여 모든 것과 연결시켜주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실체로 인식되는 더 깊고 영적인 자신을 인식하고 그와 연결될 수 있도록 진화한 신경학적 과정의 증거”라고 했다.
좌우뇌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주인과 심부름꾼>의 저자인 신경심리학자 이언 맥길크리스트Iain Mcgilchrist는 좌뇌가 본래는 우뇌의 심부름꾼이지만 이 사실을 망각하고 두뇌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화로운 균형상태를 선호하는 우뇌와 달리 좌뇌는 논리적이고 계산능력에 능한데, 현대사회는 좌뇌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좌뇌가 득세하면서 인류문화가 쇠퇴하였고, 심지어 오늘날의 금융위기도 좌뇌로 인해 촉발되었다고까지 말한다.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지만, 위에서 본 질Jill박사의 영상을 기억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치게 분석적이고 개별적인 좌뇌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이언과 질 박사 모두 우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좌우뇌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깥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좌뇌와 내면의 평화와 공감을 지향하는 우뇌, 그 사이에 뇌량이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한쪽이 한쪽을 억제하지 않고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대체로 여자의 뇌량이 남자보다 더 크다고 한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는 핑계는 그만두고, 여자들의 공감능력을 좀 배워야겠다. 우리 몸 안에서 그동안 억제되었던 우뇌를 풀어주는 것이나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나 동양과 서양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나 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 (정리 / 이재국)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순화된 불을 위하여 2015-02-25
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424790000544347208
인간의 몸은 90퍼센트 이상이 물로 되어 있는데, 신비한 불을 지니고 있는 우주적인 존재이다. 동양에서는 우주의 원소를 물(水), 불(火), 흙(土), 쇠(金), 나무(木) 등 오행(五行)이라고 말하고, 서양에서는 물, 불, 흙, 공기(四行)라고 말한다....
◈21세기 ‘물의 시대’2015-02-25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50225.010310837220001
20세기가 석유의 시대였다면 21세기를 물의 시대로 규정하는 미래학자들이 많다. 지구 표면은 70%가 물이지만 이용 가능한 담수는 1% 미만이다
우주가 사람처럼 생겼다는 별자리 지도
관측한 가능한 모든 범위의 별자리 지도에서 사람모양을 발견할수 있네요.
대우주-우주
소우주-인간
아인슈타인의 실수 2015-01-06
http://news.donga.com/3/all/20150106/68926627/1
올해는 마침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다. 아인슈타인은 정확히 1915년 11월 25일 3쪽짜리 논문을 발표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이다. 이 논문이 이후 100년의 세계를 뒤흔든다
아는 것과 보는 것.
1) 현대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사상 사이의 유사성 규명을 위한 선결 조건
현대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사상 사이의 유사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밀과학과 정신적 수련을 어떤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부터 다루어야 한다. 그러려면 보다 더 먼저 지식의 성격과, 이 지식이 표현된 언어의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한다.
2)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의 두가지 지식 또는 의식의 양태.
-서양 -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편애 → 추론적.
-동양 - 직관적이고 종교적인 지식에 대한 편애 → 직관적.
① 합리적 지식(이론적, 추론적 지식)
㉠ 일상 생활환경에서 그 대상과 사건을 경험하는 데서 비롯하며, 식별, 분리, 비교, 측정, 범주화하는 기능을 가진 지성의 영역에 속한다.
㉡ 비교, 분류를 위해서 몇가지의 두드러진 것만을 선택하여 추상화하며 추론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적 지식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상호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립적인 세계이므로 항상 상대적이며 근사치에 머물게 된다.
② 동양의 신비주의 지식
㉠ 지적 사상뿐만 아니라 감각적 인지까지도 초월하는 실재의 직접적인 체험에 관심을 둔다. - 絶對知
㉡ 궁극적인 실재는 추론(드러낼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
- 이유: 우리의 언어나 개념의 근원이 되는 감각이나 지성의 영역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
㉢ 道可道 非常道 - 노자의 ≪道德經≫ ⇒ 절대적 지식은 언어로서 전달될 수 없다.
3) 지식이 어떻게 얻어지는가.
① 물리학에서의 지식
- 3단계의 진행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과학적인 연구과정을 통하여 얻어진다.
㉠ 1단계 - 설명해야 할 대상에 관한 경험적 실증을 수립.
㉡ 2단계 - 경험적 사실들이 수학적 상징으로 연관되며, 이러한 상징들이 정밀하고 일관성있게 상호 연결되어 수학적 체계가 마련됨. → 수학적 모형(model), 혹 이론(theory)
㉢ 3단계 - 수학적 체계를 통상언어로 해석하는 언어적 모델을 만든다.
약간 모호하고 부정확하지만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다시 사용하여 언어적 해석을 가함으로서 수학적 모형과 이론들을 보완해야 한다.
cf) 수학적 모형은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 닿지는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
② 동양의 신비주의
㉠ 직접적 신비경험(비감각적 경험)에 그 지식의 기반을 두고있다.
㉡ 개오의 증험에 집중하며, 증험의 해석에는 별 관심이 없다.
③ 유사점, 차이점
㉠ 동양철학의 경험주의적 접근방식 ≒ 과학의 관찰.
㉡ 동양신비가의 직접적 투시 ≒ 과학적 연구의 실험의 단계.
㉢ 투시의 여러 가지 해석 방식 ≒ 과학적 모형과 이론들.
㉣ 지식습득법
물리학자들 - 세심한 팀웍과 정교한 기술 수반.
신비가들 - 아무런 기기도 없이 고독한 명상을 통한 순수한 투시.
㉤ 반복성
과학적 실험 - 어느때 누구에게나 반복될 수 있다.
신비적 경험 - 극소수의 개인에게만 일어난다.
㉥ 기반
물리학 -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현상의 관찰.
동양적 신비주의 - 실재의 본질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
4) 지식이 어떻게 표현(기술)되는가.
① 물리학
모형 혹 이론이라는 실험의 해석을 통해 표현하나, 이론 자체에도 이론에 극히 미미하게 영향을 미치는 대상을 제외해버린 ‘잘 정의된 근사치’라는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예) 뉴턴의 고전적 기계론에서 공기의 저항, 마찰의 효과를 제외시킨 것.
② 동양의 신비가
㉠ 실제의 체험에 주로 관심이 있으며 그 체험의 기술에는 흥미가 없다.
㉡ 굳이 표현한다면 → 신화(힌두교), 역설(도가), 공안(선불교), 시(일본)
최근 퍼지라는 낱말이 전자제품이나 각종 제품 선전에 자주 등장하고 있으나 사실 그 뜻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단지 ‘기계가 스스로 알아서 기능을 조절하는 능력’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그런 찰라에 현대수학개론의 리포트 주제들중 퍼지이론이 들어있어서 퍼지이론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볼겸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지은이는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퍼지이론의 창시자인 미국 버클리 대학의 자디교수를 사사했으며 일본의 퍼지이론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럼 우선 퍼지이론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자.
퍼지이론은 1965년, 미국 캘리포니어대학교 버클리대학의 L.A.Zadeh 교수가 학술전문지 ‘INFORMATION AND CONTROL’에 발표한 ‘퍼지집합(FUZZY SETS)'이란 논문이 그 시초이다. 이 논문에서 자디 교수는 ‘아름다운 여성의 집합’ ‘키가 큰 사람의 집합’등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집합을 ‘퍼지집합’이라고 이름 붙였다. 퍼지 집합은 인간사고의 의미정보의 전달중 추상화라는 부분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여 그것을 수학적이론으로써 전개한 것이다. 지금까지 수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집합은 남자의 집합이라든지 정수의 집합이라고 하는 것처럼 소속여부가 확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 집합이라 부르지 않았고, 수학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같은 의미에서 퍼지집합론은 새로운 제안이었던 것이다.
자디 교수가 퍼지이론을 제안하게된 동기중 중요한 이유는 컴퓨터에 의한 엄밀한 모델의 한계이다. 즉, 컴퓨터에서는 패러미터의 수치를 정확히 결정해 주어야하지만 실제는 패러미터의 수치를 정확히 결정해 줄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들어 어떤 시스팀이 온도가 높아지면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으나 몇도에서부터 사용이 안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경우 그 온도를 알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당한 가정수치를 결정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애매함은 애매한 그대로 취급하는 이론이 있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퍼지집합론을 생각해낸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디교수가 퍼지집합에 생각이 미치게 된 또다른 큰 이유가 있다. 자디교수가 어떤 친구와 그들의 부인들 두 어느 쪽이 미인인지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는데 미인의 척도는 타인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주관에 의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취급하는 퍼지이론을 생각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퍼지이론이 순탄한 길을 걸어 온 것만은 아니다. 처음 자디 교수가 발표했을 때 학회의 반응은 대단히 냉담했다. 대부분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지금까지 극히 엄밀한 현대제어이론의 기수였던 자디 교수가 180도 변신하여 애매성을 인정한다는 점이 더 거센 반발의 요인인 것 같다. 도피가 아니냐는 소리도 있었다. 과학기술의 사명은 사물을 정확히 하고 애매성을 배제해 가는 것이며 또 이같은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 가는 것이 과학자들의 의무라는 것이었다. 그 의무를 도중에서 포기하는 것이며 과학자의 사명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그러한 역경을 딛고 처음에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퍼지이론이었으나 이를 읽어본 학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강한 연구열의를 보이기 시작하여 유럽,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연구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편에서는 여전히 퍼지이론에 대한 강한 반대와 비판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면 퍼지집합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까지의 ‘이론’에 적용하거나 컴퓨터에 이를 대입하려면 역시 앞에서 본것처럼 확실하게 수치를 정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본래는 애매하고 연속적인 것을 무리하게 명확한 것으로 해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본래 애널로그적인 정보를 이론이나 컴퓨터에 입력시키기 위해 디지틀표현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디교수는 종래의 집합을 포괄하면서 퍼지집합을 만든것이다. 여기서 ‘퍼지’란 깃털처럼 경계가 불명확하다고 하는 형용사로써 우리말로는 몽롱하다는 뜻과 비슷하다고 이해하면된다. 즉, 퍼지집합이란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집합이다. 한편 종래의 집합은 경계가 명확하게 퍼지집합과 구분하여 CRISP 집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CRISP이란 빠삭빠삭하다는 뜻이다.
퍼지이론을 그 사람의 주관을 수치화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퍼지이론이 발표된 초기부터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퍼지이론의 연구자는 역으로 주관을 그 사람의 주관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며 그 이후의 이론전개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퍼지이론은 그 이름이 나타내는 것처럼 애매한 이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애매성을 위한 이론으로서 애매을 인정한 연후에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치화해 엄밀히 취급하자는 것이다. 종래의 이론은 객관적인 것 만을 연구대상으로 하자고 하는 데카르트의 정신에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애매한 것은 의도적으로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퍼지이론에서는 애매성의 존재를 허용하여 대략적으로 추론하는 편이 보다 본질적인 결론을 유도할 수가 있다는 것이 퍼지이론의 사고방법이다. 아뭏든 퍼지이론이 탄생하여 방치되어 있었던 주관을 처음으로 취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애매성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고 하자 여자가 “A씨, 위험하지 않은 속도로 운전하세요”라고 말했을 때 남자는 “알았어”라고 대답하고는 그의 판단에 따라 적당한 속력으로 달린다. 이러한 대화에서도 애매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 애매성이 있음으로 해서 회화가 자연스럽게 진행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여자가 ‘위험하지 않은 속도’라고 한 말에는 시속 90킬로미터 전후의 속도라고 뜻이 담겨 이었고 남자의 생각에는 70킬로미터 전후가 위험하지 않은 속도라고 생각했다고 할때 이것을 살펴봤을때 남자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운전했다몀 여자는 “좀더 속도를 내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남녀 양측 생각의 중간이 되는 80킬로미터로 주행하고 있었다면 양자 모두 주행속도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두사람간에 ‘위험하지 않는 스피드’에 대한 생각은 다르지만 애매성이 있기 때문에 공통점을 찾아 낼 수가 있었다는 결론이다. 종래의 컴퓨터처럼 엄밀히 정의하여 전후 5킬로미터 밖에 인정하지 않는다로 정의하면 두 사람 다 만족할 속도는 찾아 낼 수가 없다.
사람간의 대화는 이처럼 애매한 것이라 하더라도 허용의 폭이 있기 때문에 대화가 성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에는 애매성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이말을 퍼지집합에 의해 컴퓨터가 표현하도록 시켜보면 컴퓨터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입력 시킬 수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다리며 맞이하는 시간도 애매성이 있는 퍼지적인 시간이며 표현도 퍼지집합을 사용하는 편이 좋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종래의 집합을 써서 개념을 표현할 때, 그 개념과 다른 개념과 사이에 공통부분이 있는지 여부가 명백히 가려진다. 퍼지집합을 써서 나타내게 되면 어느 정도는 공통부분을 갖는 것이 된다. 이에 따라 퍼지집합에서는 일치도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도입할 수가 있다. 단 양자 모두 크리습의 집합이나 요소의 경우 공통부분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일치하느냐 않느냐의 일치도는 맞다, 틀리다의 어느 하나가 되어 버린다.
퍼지집합의 생각하는 법은 이처럼 극히 단순하며 이 퍼지집합을 기초로 하여 퍼지이론이 구성되어 있다. 종래의 수학적이론이 집합론을 기초로하고 있는 것처럼 퍼지이론은 퍼지집합을 기초로 하여 실로 여러가지 분야에서 이론이 전개되고 있다. 또 퍼지이론을 응용한 분야도 최근에 상당히 많다.
그러면 퍼지이론과 확률론의 차이에 대해 알아보자.
퍼지이론이 제창되었을때 일어난 비판의 하나에 ‘이것은 확률론과 같다. 따라서 확률론으로 바꿔 놓고 생각할 수가 있으니까 퍼지이론같은 것은 필요없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분명히 확률론에서도 0과 1사이의 수치를 사용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취급하는 애매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먼저, 확률론에서 취급하고 있는 애매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주사위의 눈은 1에서 6까지 밖에 없다. 따라서 그 사이의 수는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 된다. 주사위의 눈이 나오는 확률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각각 6분의 1이며 전부 같이 나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애매성은 던지기 전에 어떠한 숫자가 나올지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던지고 난 후면 그 결과는 분명해지며 따라서 미래란 알 수 없기 때문에 던지기 전에는 답을 알수가 없다. 이를 바꾸어 말한면 확률에서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애매성만 취급하고 있으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확률의 총합은 1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확률론에서는 엄격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 확률론이 퍼지이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애매성을 취급하는 유일한 이론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통계학에서는 확률론을 자주 이용하기 때문에 많은 사례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을 수치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일어날 수있는 확률의 값을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확률론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확률론은 복잡한 계산을 요하지만 앞서 지적한 전체가 분명히 정해진 경우 매우 유용한 방법임이 틀림없다. 또한 지금까지 많은 분야에서 그 유효성이 입증되고 있다. 단 일어날 가능성을 전혀 모른다거나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을 경우에는 확률의 값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복잡한 계산을 하더라도 그다지 유효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퍼지이론에서 취급하고 있는 애매성. 다시 말해 퍼지니스는 랜덤니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면 내일 대단한 미인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생각해 보자. 이에 대한 대답은 내일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여기까지는 확률론의 영역이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어 어떤 여성을 만났다하자. 만난 여성이 미인인지 아닌지를 YES,NO로도 간단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퍼지이론은 실제로 만나도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 주관에 바탕을 둔 애매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확률론은 집합론을 기본으로 하며 퍼지이론은 퍼지집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퍼지집합의 모임은 통상의 집합이므로 퍼지집합을 대상으로 한 확률론이란 것도 성립된다. 요컨대 양자는 다른 개념을 가지면서도 공존할 수있는 이론이기도 한 것이다.
확률론은 집합론을 기본으로 하며 퍼지이론은 퍼지집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퍼지집합의 모임은 통상의 집합이므로 퍼지집합을 대상으로 한 확률론이란 것도 성립된다. 요컨대 양자는 다른 개념을 가지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이론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우리의 말에 관련된 애매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간은 본질적으로 애매한 것이라고 기술했지만 그 원인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 말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애매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은 연속적이며 애널로그적인 것이다.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디지틀 기호(심볼)에 맡겨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호에 대한 의미는 서로의 머릿속에서 그 기호에 따라 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과 컴퓨터가 하나의 사회에서 공존하게 되면 컴퓨터에게 언어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작업이 필요하게 된다. 컴퓨터가 언어를 기호로 받게되면 언어의 의미를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퍼지집합에 대한 멤버십관수인 것이다. 다시 말해 퍼지집합에 언어 즉 기호이며 맴버십관수가 그 언어의 의미에 해당되는 것이다.
퍼지이론은 이같은 의미의 수치화에 의해 컴퓨터가 의미를 취급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관에 의한 말의 의미에 대한 에매성을 맵버십관수라고 하는 자유로이 설정할 수 있는 수치에 의해 흡수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을 컴퓨터가 취급하려면 지식의 의미를 컴퓨터내부에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퍼지인론은 그것을 위한 유력한 이론적 도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 영어로 AI(Artificial Intelligence)라고 하는 것으로 지금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으리는 여러 분애에서 인공지능이란 말을 듣는다. 이 말을 인공적으로 인간의 뇌와 유사한 것을 만든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인공뇌를 만든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전혀 불과능하며 앞으로도 당분간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우월했던 분야에 컴퓨터 응용하는 기술이라는 것이 가장 타당한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인간과 컴퓨터와의 맨-머신 인터페이스를 보다 유연하게 하여 컴퓨터가 인간이 보다 지적인 일을 할 때의 파트너가 되도록 하기 위한 응용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공지능연구가 컴퓨터에게 인간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애매성’을 잘 처리할 수 없는 한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컴퓨터를 인간과 협력하여 문제해결을 실행하는 기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매-머신 인터페이스의 유연성, 부드러움이 중요하며 여기서도 애매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즘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퍼지제어에 대해 알아보자.
퍼지제어는 퍼지추론의 하나의 응용으로서 퍼지엑스퍼트시스팀을 말한다.
퍼지추론에서는 룰은 퍼지집합에 대응하는 언어로 표기된 퍼지룰이며 그것을 퍼지로 변형해서 사용하였다. 퍼지추론에서는 크리습한 어떤 확정된 값 또는 퍼지집합이 입력되었지만 출력되는 것은 항상 퍼지집합이었다. 그러나 퍼지제어와 같이 출력치에 의해 기계가 제어될 경우는 그 값이 확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입력도 기계로하므로 역시 명확한 하나의 값이 나와야 한다. 더구나 입력은 하나의 수만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둘 이상 있다.
그렇다면 현재 퍼지제어가 실제로 응용되고 있는 예를 몇가지 들어보기로 하자.
(1) 지하철이나 열차의 자동운전
(2) 컨테이너의 자동운전
(3) 엘리베이터의 집단관리
(4) 정수장의 물제어
(5) 로봇의 팔제어
(6) 유리용광로의 온도제어
(7) 쓰레기 소각로의 제어
(8) 냉연 프로세스의 제어
(9) 소결 프로세스의 제어
(10) 아크로봇의 제어
(11) 공급 온수의 온도제어
(12) 자동차 정속주행제어 등이다.
퍼지이론의 제창자인 자디 교스는 현대제어이론 창설자의 한사람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엄밀한 이론을 구성하고 있어도 복잡한 시스팀의 제어에는 대처할 수가 없어 그 좌절감으로 퍼지이론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자디 교수 자신은 퍼지이론이 제어에 응용될 수 있다고는 예상을 못했었다고 술회하고 있었지만 퍼지이론은 그 이론의 발생토대인 제어이론에 보답을 한 셈이다. 그리고 퍼지제어는 일본에서 많이 개발도어 응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퍼지 컴퓨터에 대해 알아보자.
퍼지 컴퓨터는 퍼지추론을 기초로 이것을 퍼지제어하는 것이며 퍼지추론을 빠른 속도로 실행하기 위한 기계이다. 그러나 사실 현재의 과학으로는 제대로 만들수가 없다.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1) 퍼지논리의 이론적 해명
(2) 퍼지프로그래밍 언어의 개발
(3) 퍼지컴퓨터의 아키텍처(구조)의 구명
(4) 각종 퍼지관수의 회로에 의한 실현
등이 해결되어야 한다. 이것들이 부분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사실 현상태로는 퍼지컴퓨터의 실현은 ‘꿈’이라 볼 수 있다.
퍼지이론은 막 태어났을 뿐이다. 퍼지이론으로 모든 애매성을 취급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책의 필자는 애매이론에는 동양의 향기와 포근함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퍼지이론은 동양사상을 과학적 입장에서 다시 보게함으로서 인간에게 아름다운 과학으로 인식토록 하며, 또한 주관을 복권시키기 위해 애매성을 참되게 활용하며 생각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미래사회를 개척하는데 있어서 퍼지이론은 정말로 빠질수 없는 존재라고 보며, 머지않은 장래에 퍼지컴퓨터가 꼭 만들어져 인간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철학
이번에는 동국대 철학과 김용정 교수가 쓴 글을 올립니다.
글에 군데군데 수정을 가해야 할 이론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철학과 교수로서의 물리학적인 한계 그리고 동양易銜 통일적인 세계
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주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최근 우리들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의 사유방법이 동양의
사유방법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양의 고전 물리학적 사고방법이나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방법은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 주관과 객관을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전제하고 나
의 주관이 별개의 물질적 대상을 연구하고 인식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사
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나와 대상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보다 넓은 철학적 인식의 문제가 논의
돼야 하기 때문에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단지 현대 물리학이 바라보는 우
주론이나 물질관이 동양의 종교나 철학과 사유방법에 있어서 어떤 유사성
이 있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물질과 공간은 상호의존적 통일체
먼저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허공이라는 공간적 장
(場,field)과 공간에 존재하는 물질(에너지)과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장과 물질은 둘인가 하나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
서 한 가지 주의 해야 할 점은 고도의 방정식이 요구 되는 현대 물리학을
일상언어로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따르겠지만, 앞으로 논의될 이야
기들은 현대 물리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우선 상대성 이론에서 물체와 공간은 더 이상 분리시킬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무거운 물체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장이 형성될 것이고, 이
장은 그 자체가 물체를 둘러싸는 공간의 만곡(curvature)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물체는 그것의 중력장과 분리될 수
없고, 중력장은 굽어진 공간과 분리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물질과
공간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상호 의존적인 하나의 통일체로 보게 되는 것
이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상대성이론으로 부터 물체란 강하게 응축된 에너지이며, 에너지
는 곧 물질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를
질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질량과 에너지의 구분은 질적인 구분
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상당한 부분은 물질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상당히 적은 양이긴 하지만 그 입자를 둘러싸고 있는 장도 또한
에너지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물질은 에너지가 상
당히 많이 모인 곳이고, 장은 에너지가 비교적 적게 모인 곳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물질과 장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물질과 장이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
게 된다. 우리는 물질과 장이 명백하게 구분되는 표면을 생각할 수도 없
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기장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중되는데 '도(道)의 물리
학'(필자가 번역한 '현대 물학과 동양사상'-Tao of Physics,범양사 출간)
의 저자인 카프라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양자 전기역학의 두드러진 새로운 특징은 두 개념의 결합에 있다. 즉 전
자기장의 개념과 전자기파가 입자적 측면으로 나타나는 광자(photon)의 개
념과의 조화가 그것이다. 또한 광자는 전자기파이고 이 파는 진동하는 장
이기 때문에 광자는 전기장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 할 것이다. 따라서 '양
자장'(quantum field)은 곧 양자 내지 입자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장인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와 같은 물질적인 입자도 중력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와일(Herman Weyle)이라는 물리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질에 관한 장이론에 따르면,전자와 같은 물질의 입자는, 비교적 커다
란 장 에너지가(매우 작은 공간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당한
정도의 힘을 가진 전기장 속의 작은 영역에 지나지 않은다. 결코 나머지의
장과 명백히 부분될 수 없는 그런 에너지의 덩어리는 호수의 표면을 가로
지르는 물결처럼 빈공간을 퍼져 나간다. 따라서 전자를 이루는 실체가 언
제나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즉 물과 물결이 구분될 수 없는 것처럼."
현대 물리학의 장 이론은 양자나 전자와 같은 아원자적(亞原子的)인 입자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입자들 사이의 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수정하게 했
다. 장은 공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디에서나 준재하는 연속체(continuum)
이고, 입자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연속적인 '알맹이 모양의'구조를 지닌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는 두 개념은 결국동일한 실체를 서로 다른 측면에
서 바라본 하나의 실체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정반대되
는 두 개념은 언제나 역동적인 방법으로 일어난다. 즉 물질의 두 측면은
끊임없이 서로 다른 것(연속체와 불연속)으로 변화된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와 화동성은 서로 불리될 수 없다
월터 티링은 현대 물리학서 장에 대한 이상의 진술들을 다음과 같이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대 이론 물리학은 ... 물질의 본질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다른 맥락
에서 생각하게 했다. 즉 현대 이론 물리학은 볼 수 있는 입자에서 숨겨진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장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물질이 현존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서의 완전한 장의 상태를 흐트러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이론은 입자들이 한 알맹이의 분리된 물질이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우주 그물(cosmic web)속에서 상호연결(interconnections) 내지 기능적 형
태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원자적인 세계에서의 입자들은 단지 매우 빨
리 돌며 움직인다는 점에서 역동적일 뿐만아니라, 그 입자들 자체가 하나
의 과정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의 존재와 그것의 활동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다만 동일한 시공적(space-time)실체의 다른 측면에 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 물질적인 대상과 그것의 환경(時空) 사이
의 상호연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양자장 이론에서 근본적인 원리가 됐
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관은 본래 동양의 세계관에서 더욱 근본적인 원리
였다. 물론 동양 사상가들의 직관적인 세계관이 현대 물학의 상대성이론이
나 양자(장)이론과 동일한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물리학자
들이 양자 장이론을 통해서 아원자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가운데 내재하는
상보적(相補的)인 세계관은 암묵리에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을 동일한
실체의 양면으로 보려는 동양의 직관적 세계관과 유사한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라는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장이라는 개념이 나옴으로 해서, 물리학자들은 다양한 장들을 모든 물리
적 현상을 통합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하나의 장으로 통일시키려고 시도해
왔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통일장을 탐구하는 데 그의 여생을 보냈
다. 힌두교의 범(梵.Brahman), 불교의 법(法.Dhsrma Kaya), 도교의 도
(道,Tao) 등은 아마도 물리학에서 연구하는 현상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현
상들의 근원적인 통일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상과 같은 물리학자들의 주장을 동양사상의 유기적인 역동적 세계상과
비교해 보기 위해서 간략하게 동양철학에 대해 살펴보자.
만물은 음과양이 합한 기를 바탕으로 생성
이미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국사상은 유교,불교,도교의
세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짧은 지면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충 성리학을 중심으로 노장사상 내지 불교와 연관시
켜 요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노자는 그의 '도덕경'에서 "도(道)는 일(一)을 낳고,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고 했다. 이것은 무위자연(無爲
自然)의 무위지도(無爲之道)에서 만물이 생성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
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도는 자연 본래의 근원적인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다. 그리고 공자는 "도는 사람과 멀지 않은 것이니 사람이 도를 행한다 해
도 사람을 멀리 하면 가히 도를 행한다 할 수 없다"고 해 도가 곧 인륜의
질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옛 중국의 철인들은 자연의 질서와 인
륜의 질서를 모두 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중국 철학에서 많이 거론되는 허(虛) 이(理) 기(氣) 성(性) 심(心)등과
같은 말들은 모두 도라는 말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중국의 성리학자
장횡거(張橫渠)는 태허(太虛)와 기로 우주를 설명했다. 즉 태허의 기가 모
여서 만물이 되고 만물이 흩어져서 태허로 돌아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
면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곧 기의 장이며 따라서 기가 숨었다 나
타났다 하는 것을 알면 생성변화(神化)와 하늘의 법칙(性令)이 둘이 아님
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기는 본래 허한 것어서 형체가 없으며 안과 밖이
없다. 형체가 있는 삼라만상이나 형체가 없는 허공이나 모두 기의 이합집
산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도가 일(氣)을 낳고, 일이
이(陰陽)를 낳고, 이가 삼(陰陽의 화합체)를 낳고 삼이 만물을 낳는다"는
것은 결국 '만물은 음과 양이 화합한 기를 바탕으로 해 생겨난 것'을 의미
한다.
노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는 영구 불변한 도가
아니고,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재의 이름이 아니며, 무
는 천지의 시초요, 유는 만물의 근원"이라고 했다. 여기서 무는 결코 허
무주의적인 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무와 유는 한 근원에서 나온 것으
로서 이름만 다를 뿐이고, 자연의 유현한 신비적 세계를 철학적으로 설명
하려는 의탁된 언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장횡거가 노자의 무를 비판하고 그의 허에다 태자를 붙여 태허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도 무가 허무의 무로 오해될 우려를 피하기 위한 것
이기도 했다. 이것은 좀더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성리대전' 정몽(正夢) 태화편(太和篇)에
보면 "태허가 있음으로써 천(天)이라는 이름이 있고, 기화(氣化)가 있음으
로써 도라는 이름이 있고, 허와 기가 합함으로써 성(性)이라는 이름이 있
으며, 성과 지각이 합함으로써 심(心)이라는 이름이 있다.(由太虛有天之
名, 由氣化有道之名, 合虛與氣有性之名, 合性與知覺有心地名)"는 언명이
있는데, 여기서 태허가 천 도 성 심의 총체적 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
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동양사상의 태허 태극 성 도 무 기 심 등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음양의 관계는 별개의 둘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양철학의 우주론과 인성론이 서양의 현대 물리학과 어떻
게 만나고 있는지를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통해 비교적 쉽
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의 비교연구
를 통해 몇편의 논문을 오래 전에 발표한 바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논문들 가운데 몇군데를 추려서 지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셉 니담은 '중국과학사'에서 "감
촉할 수 있는 물질로 응축된 기(氣)는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단순한 개별
적인 것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다른 대상들과 함께 서로 작용을 주고 받
는 개별적인 대상인 바 결국에는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기본적인 힘의
율동적인 교체에 의존하는 파동이나 진동의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이 동일한 유기적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성변화하고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의 첫머리에 "태극(太極)이 양의(兩儀, 즉 음양)을 낳는다"고 했는
데, 노자의 경우는 도가 기를 통해 음양을 낳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음과 양은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음
양의 관계는 그것이 결코 별개의 둘이 아니고 음속에 양이 있고 양속에 음
이 있으며 음이 극한에 달하면 양이 되고 양이 극한에 달하면 음이 되는
동일자의 양면성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태극도설'의 창시자인 주렴계(周濂溪)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말
하고 "태극이 동(動)하여 양을 낳고 정(靜)하여 음을 낳는다"고 했다. '주
역'에는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해 음양의 상호작용이 곧 도
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중국사상의 세계관은 앞에서 설명한 현대 물리학의 세계상과
얼마나 유사성을 갖고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신유
학(新儒學) 즉 성리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준 불교의 화엄사상(華嚴思想)
을 이해함으로써 더욱 명백하게 설명될 수 있다.
첨단과학이론 초월하는 불교의 세계관
'화엄경'에 비로자나불(佛, Vairocana)이라는 일종의 법신불(法身佛)의
이름이 나온다. 이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본질을 의미하며 세계 모든 현상
들은 바로 그 비로자나불의 화신(化身)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
법신불은 모든 현상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시시각각으로 유동, 변화하는 연
기(緣起)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로자나불은 결코 어떤 고정적인
불변의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존재가 생겨나고 모든 현상
들이 변화하는 한가운게서 역동적으로 작용 하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
다. 따라서 이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수 억만의 사물들과 현상으로 변모하
고 유동하는 산 생명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화엄경'에 여래성기(如來性起)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곧 비로
자나 법신불과 관계 있는 말로서, 이 세계의 모든 생성 변화가 바로 이 여
래, 즉 법신불의 성품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성기(性起)라 하는 것이
다.
'화엄경'속에는 가느 곳마다 사물과 사물이 서로 대응하는 사사무애(事事
無碍)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국토가 하나의 국토에 들어가고, 하
나의 국토가 모든 국토에 들어간다(一切國土入一國土, 一國土入一切國土).
온 세계가 한 터럭 속에 들어가고 한 터럭이 온 세계에 들어가며, 일체중
생의 몸이 한 몸 속에 들어가고 한 몸이 일체 중생의 몸속에 들어가며, 말
할 수 없는 겁(劫)이 한 순간의 생각에 들어가고 한 순간의 생각이 말할
수 없는 겁에 들어가며,...모든 부처님법이 한 법에 들어가고 한 법이 모
든 부처님 법에 들어가며 말할 수 없는 처소가 한 처소에 들어가고 한 처
소가 말할 수 없는 처소에 들어가며,...모든생각이 한 생각에 들어가고 한
생각이 모든 생각에 들어가며, 모든 음성이 한 음성에 들어가고 한 음성이
모든 음성에 들어가며, 일체 삼세(一切三世)가 일세(一世)에 들어가고 일
세가 일체 삼세에 들어가니라."
이러한 상호관입의 사상은 오늘날 첨단과학의 기억소자(칩)나 분자 생물
학에서 하나의 분자가 수십 만의 분자 내지 정보를 내포한다는 이론을 초
월하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세계가 다 들어가며 온 세계
에 한 티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 우주의 사사만물들이 서로 의
존돼 상호관통하며 일종의 우주망을 짜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거
니와 불교는 현상계를 공으로 묘사 하기도 한다. 현대 물리학의 아원자적
세계처럼, 불교에서 보는 현상계는 끊임 없는 생멸의 세계다. 무상(無常)
한 세계에서는 어떤 영원한 동일성도 갖지 않는다. 이것은 특히 어떤 물질
적 실체의 존재도 부정하고 각기 다른 연속적인 경험을 통해 아무 것도 상
주(常住)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이른바 '제행무상 제법무아'(諸行無常 諸
法無我)를 체득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종종 이 세계를 환상으로 비유하
고 개별적인 것들을 파도와 물의 현상으로 비유한다. 즉 우리는 물이 위
아래로 출렁이는 것을 보면서 봉우리가 된 파도를 마치 물과 독립된 실체
로 믿느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광속으로 달리는 입자들은 전우주에 영향미쳐
물리학자들은 장이론(場理論)의 맥락에서 비슷한 유추를 사용한다. 즉 장
이론에서 물질적 실체에 대한 환상은 운동하는 입자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물리학에서 전자와 같은 물질 입자
는 단지 일정한 정도의 힘을 가진 장 속에 하나의 전자장(電子場)의 파도
의 봉우리가 생긴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에너지의 작은 봉우리
는 마치 물결이 호수의 수면을 지나가듯이, 빈 공간(場)속을 진동하면서
퍼져 나간다. 따라서 우리가 전자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빈공간(즉 힘을
가진 전자장)의 파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대의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어떤 기본적인 실체적 원자나 입자를 인정하
지 않는다. 비록 쿼크와 같은 실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복합입자를 의미한다. 질소원자에 알파선을 쬐면 그것
이 산소원자와 수소원자로 변한다. 양성자가 중성자의 베타붕괴에 의해 만
들어지는가 하면 이 붕괴에서는 약한 상호작용과정에 의해 중성자가 전자
와 반중성미자를 방출한다. 양성자와 중성와의 충돌에서 같은 양성자와 중
성자 그리고 중성의 중간자가 생성되는가 하면 두개의 중성자와 양중간자
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성자나 중성자보다도 훨씬 질량
이 큰 수십개의 수립자가 입자가속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기본적
인 힘은 입자를 산란 생성 소멸 변환시키는 상호작용인 것이다.
쉽게 만하면 거의 광속으로 달리는 입자들은, 하이젠베르크가 하나의 입
자운동이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것처럼 상호작용하면서 이것이
저것으로 되고 저것이 이것으로 되는 과정적 실재들인 것이다. 이 점이 특
히 불교의 사사무애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서양 과학과 동양 철학
같은 사유선상에서 만나게 돼
장자는 그의 '제물론(齊勿論)'에서 "만물이 동일한 이(理,이치)에서 나온
다"는 것을 강조하고있다. 즉 그에 의하면 사물은 그 자체 속에 스스로 발
생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사물 속에는 고유한 특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자연 또는 천연이라고 말하고 있
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때 시비(是非)가 구별되는 것은 달도(達道)에
이르지 못한 데 그 이유가 있으며, 도를 체득해 무심의 심경에 도달한 사
람에게는 사물간의 차별이나 대립은 사라지게 되며 만물은 제일(齊一)하다
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진리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며 중국사상과 불교는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유교나 불교 혹은 도교의 어느 것도 그 본원에 있어서는 동일한 유기적인
역동적 세계상으로 귀착하게 된다.
관자(官子)는 "천도(天道)는 공(空)하며 무형(無形)하다"라고 말하고 있
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철학에서는 공허하며 형체가 없
으나 모든 현상들을 산출할 수 있는 도의 개념속에 현대 물리학의 장의 개
념이 함축돼 있을 뿐만 아니라 기의 개념에서도 그것은 명백히 표시돼 있
다. 이 용어는 중국 자연철학의 거의 대부분의 학파, 특히 송대의 성리학
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학파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교 도교 불
교의 종합을 꾀한 학파였다.
그리하여 동양적 견지에서는 현대 물리학의 견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 관련돼 있어서 그 중 어느 부분도 근본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어떤 부분의 속성들도 어떤 근본적인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부분들의 속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편집자주:
이말은 좀 수정을 해야할것같다.) 그러므로 카프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양의 사상가의 세계관은 모든 현상들의 상호 관련성과 자체 조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물질의 근본적인 구성요소를 부인하는 것에
서도 현대 물리학의 부츠스트랩 철학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불가분(不可
分)의 전체이며 그 안에서 모든 현상들이 끊임 없이 변화하는 우주 안에
는, 어떤 고정된 근본적인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물질의 '기본적 구성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서양의 과학은 자연의 탐구에, 동양의 철학은 인간의 완성에 그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의 발
달은 결국 자연과 인간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했고, 그로 말미암아 서
양의 과학과 동양의 철학은 같은 사유선상에서 만나게 됐다.
오늘날의 현대물리학의 주요 이론들과 모델들은 동양의 종교나 철학의 유
기적이며 통일적인 세계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주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현대의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오염에 의한 위기적 상황은
더욱더 동양사상의 전체적인 통일적 세계관 내지 자체 조화하는 사상의 중
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끝-----
E N T R O P Y
엔트로피 (ENTROPY)
아인슈타인은 ‘엔트로피는 모든 과학에 있어서 제 1법칙이다’라고 말했다.엔트로피를 우주 전체의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법칙으로서 ‘엔트로피의 법칙’을 전개한 것은 아더 애딩튼이다.
어떤 이론에 맞지 않는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 동안 일단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것을 ‘잠정진리(暫定眞理)’라고 한다.
뉴튼의 이론체계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도 이러한 잠정진리에 속한다.지금까지 인간이 발명,발견,개발해 온 모든 이론이나 법칙은 이 잠정진리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다.앞으로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경우도 그것을 능가하는 법칙이 존재할 가능성이 현재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여기 오직 하나의 예외가 있다.이것이 바로 이 ‘엔트로피의 법칙’을 포함한 ‘열역학 법칙’이다.
열역학 법칙에는 ‘제 1법칙’과 ‘제 2법칙’이 있는데 ‘제 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고,‘제 2법칙’은 바로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엔트로피의 법칙이란 -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의 방향으로만,즉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혹은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또는 질서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로 정의되어 진다.
요컨데 ‘제 2법칙’은 우주 전체는 체계와 가치에서 시작되어 끊임없이 혼돈과 황폐로 향한다고 할 수 있다.엔트로피란 일종의 측정법(測定法)으로 그것에 의해 이용이 가능한 에너지가 이용이 불가능한 형태로 변환(變換)되는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그리고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하면 지구나 우주의 어디에서 무질서가 이루어질 경우,주변 환경에는 더욱 큰 무질서가 발생한다고 한다.
엔트로피의 증대는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는 증가를 가리킨다.
열역학 제1법칙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어떤 에너지를 되풀이해서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예컨대 석탄을 태울 때 에너지는 얻을 수 있지만 거기에서 발생한 이산화유황이나 그 밖의 가스는 공기 속에 퍼져 버린다.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멸되는 일은 없지만 한번 태운 석탄을 다시 태울 수는 없으며 더구나 같은 양의 에너지를 얻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열역학 제 2법칙 뿐이다.제 2법칙은 에너지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할 적마다 장차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를 읽게 된다는 것이다.엔트로피란 이것을 말하며 이미 일로 변환될 수 없는 에너지 양의 정도를 가리킨다.
즉 엔트로피가 증대한다는 것은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자연계에서 무엇이 일어날 적마다 장차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그리고 이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의 대표적인 것으로 공해가 있다.또한 산업 폐기물도 낭비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열역학 제 1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더 이상 더 조성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가능한 것은 ‘변환시키는’일뿐이다.그리고 제 2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하나의 방향,즉 사용된 상태에서만 변환된다.이런 점에서 공해란 그야말로 어떤 ‘<계(系)>(상호 관련을 가진 반응 시스템)에 나타난 사용이 불가능해진 에너지의 양을 가리킨다.
엔트로피라는 말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루돌프 크라우디아스라는 독일 물리학자이다.그는 ‘닫혀진 계(系)’(외부로 확장되지 않은 반응 시스템) 속에서는 에너지 레벨에서 차이가 있으면 언제나 평형상태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평형상태라는 말이 있다.평형상태란 에너지 레벨에서 차이가 없게 된 상태이다.이 상태에서 엔트로피는 최대가 된다.거기에는 다른 일을 행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자유로운 에너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영구기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증명되었다.
엔트로피는 희망적인 ‘진리’이다.엔트로피는 현재의 경제,과학,교육,종교에 영향을 주고 있다.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역사가 진보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