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경량 졸글에 박사재 박사님의 글
대답할 가치도 못느끼지만 간단히 몇 자 적습니다
최근 젊고 용감한(?) 식민사학자가 <환단고기>의 오성취루를 흠집내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오성취루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입니다 (웃음).
이는 오성취루 논문을 쓰신 박창범 박사님이 직접 반박하실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글 끄트머리에 제 실명을 거론했기에 할 수 없이 간단히 몇 자 적습니다.
1. 오성취루를 70년대에 계산했다?
1940년 오성취루를 보고 1979년 <환단고기>에 오성취루를 추가했다?
그럼 어떻게 꼭 집어서 BC 1733년이라고 했을까요?
300년에 한 번 일어날 정도로 촘촘하게 모인 BC 1733년의 오성취루를 어떻게 PC가 없던 1970년대에 알아냈을까요?
결국 <환단고기> 기록이 옳다는 말 아닌가요?
2. 오성취루보다 700년 앞선 오성결집 기록도 있습니다
단군조선 앞 환웅배달 시대 오성결집 기록 오성개합이 <천문류초>에 있습니다.
왜 오성개합은 공격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오성개합 논문 저자 입장에서 조금 서운합니다.
3. <단기고사>는 <환단고기>가 아닙니다
<단기고사>는 후대에 가필된 부분이 많아서 민족사학자들도 인용을 안 합니다.
예를 들어 제 소설 <유위자>를 보세요.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황보덕 이름만 소개했지 후대에 추가된 부분을 전혀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오성취루가 나란히 나온다고 강조하나요?
<단기고사>가 가필이 많으니까 결국 <환단고기>도 같이 엉터리다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누가 속습니까...
실명을 적어가며 비난하는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입니다.
식민사학 동네에서 취직을 해야하는 젊은 학자니 이해는 갑니다.
그래도 앞으로 곡학아세하며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