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을수록 완벽해진다.
감각을 잃어갈수록 완벽해지는 사랑의 감정.
내가 좋아하는 바다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 없다면
음식들을 먹는데 맛을 느낄 수 없다면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면
과연 난 그런 조건에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퍼펙트 센스>는 전 세계 사람들이 알수 없는 바이러스로 인해 점점 감각을 잃어가는 상황을 배경으로 이완 맥그리거, 에반 그린 두 매력적인 배우가 감각을 상실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다.
비슷하면서도 방향이 다른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에서는 시각이라는 하나의 감각이 사라진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알수 없는 바이러스로 전인류가 봉사가 됐는데 오직 한명 그 병에 면역있는 눈뜬자가 홀로지켜봐야하는 참혹함, 자기의지와 관계없이 구세주의 역할을 해야하는 내용이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퍼펙트 센스는 시각이외에도 후각,미각,청각까지 사라지는 세상을 그리고 있음에도 차분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모르긴해도 흥행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존재에 대한 대단히 큰 울림을 전해준다.
인도영화 '블랙'에서 헨렌켈러같이 촉각을 제외하고는 모든 감각을 쓸수 없는 장애인 주인공이 water라는 단어를 인식하는 순간 기적같은 신세계를 만나는 장면과 어쩌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또다른 방향에 대한 생각은 전염병에 대한 것이다.
가공할 전염병에 관한 가능성은 이미 충분한 상황에서 질병에 관한 영화는
1. 컨테이전 같은 진지한 질병영화
2. 나는 전설이다, 28일후 같은 좀비 바이러스 영화
3. 그리고 최근에는 눈먼자들의 도시, 퍼펙트 센스같이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나름대로 이렇게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았다.
또 하나는 영화에서 나타나는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서이다.
후각->미각->청각->시각의 상실의 순서인데 하나의 감각을 잃어버릴때마다 인간 감정이 솟구쳐 나온다.
동양에서는 우주가 돌아가는 근본이치를 오행으로 설명하는데 이 영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특히 후각을 잃어버릴때 극도의 슬픔이 그렇다.
목화토금수의 다섯 기운이 인간의 오장, 그리고 오감과 연결되어 있다.
목-간 -눈-분노
화-심장-혀-기쁨
토-비위-입-생각
금-폐 -코-슬픔
수-신장-귀-공포
1) 극도의 슬픔 후 후각 상실:
영화에서 말 한 것처럼 냄새는 추억을 떠올리는 주된 수단이다. 비 오는 날 삶은 감자에서 옛 어린 시절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기억을 떠올린다든지, 배릿한 아가 옷에서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린다든지, 푸른 숲 바람의 냄새에서 좋았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는 등, 많은 추억들이 냄새와 함께 한다.
따라서 극도의 슬픔 후에 후각을 잃는다는 것은, 깊은 슬픔 후에 기억을, 추억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2) 탐식 후 미각 상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주체할 수 없는 배고픔에 생고기를 뜯어 먹을 정도로 탐식을 한 후 사람들은 미각을 잃는다. 영화에서 나온 이 병은, 실제 현실에서의 욕심을 뜻하지 않나 싶다.
먹고 또 먹고, 먹고, 먹어도 배부름을 모르는 사람들. 돈이든 사랑이든, 더욱 더 많이, 더 많이, 많이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들. 대체 왜 더 가지려는지, 왜 더 먹으려는지, 그 의미와 맛은 이제 중요치 않고, 단지 더 가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 이미 잃어버린 미각이지만, 아무도 안타까워하지 않는 현실 말이다.
3) 갑작스런 증오,분노 후 청각 상실:
이유 없는 증오란 없을 테다. 저마다 가슴 한 구석에 못 박힌 응어리들이 어느 순간 밖으로 튀어 나오면 그것이 증오로 표출되는 것.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상 속에서 증오를 거리낌 없이 수시로 폭발시키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청각을 잃는다. 내 상처, 내 마음, 내 분노만 중요할 뿐,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이나 사정, 입장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잃어버린 후각과 미각 속에서 청각을 상실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4) 이유 없는 용서와 화해 후 시각 상실:
갑작스런 용서와 화해, 모든 사람들이 시각을 잃기 직전 서로를 부등켜 안으며 시각을 잃어간다.
그리고 완전한 암흑,, 오직 서로를 느끼는 건 안고 상대편의 손과 볼과 입술의 느낌 뿐...
나쁘게 보면 답이 없는 영화다.
하지만 괴이한 질병과 인간의 감정, 왜 사는가에 대한 근본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볼수 있다.
불교의 유식설에서는 보고,듣고,냄새맡고,맛보고,만지는 인간의 의식작용에 대해 깨달음과 수행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유식설에 대한 쉽지 않은 설명>
유식설(唯識說)은 인간의 현실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법은 실유(實有)가 아니고, 그 실상(實相)은 공(空)이라고 본다. 하지만, 무차별하고 한결같은 공의 차원에 의거하여 다양하지만 일정하게 질서있는 현실의 모든 차별상이 나타난다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종류의 법이 현재 있는 것과 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각각 공에 근거된 원인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이미 가능성의 상태에서 존재한다고 보며 그것을 종자라고 부른다. 유식설에서, 종자라고 하는 것은 법을 나타나게 하는 가능력을 말한다. 이와 같은 가능력이 순수한 정신작용 즉 식(識)이라고 유식설은 주장한다.
유식설에 따르면, 식이라는 것은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작용이다. 만유는 식에 의하여 현현(顯現)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유식설은 주장한다. 이 동향을 식체의 전변이라고 한다. 식체가 전변하여 세 가지 종류의 식을 성립시킨다. 첫째로 아라야식은 근본식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이는 제법의 종자가 된다. 둘째로 사량의 작용을 하는 말나식으로서, 말나식은 아라야식에 의존하여 일어나지만 아라야식을 대상으로 하여 아집을 일으킨다. 셋째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식인데 각각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을 인식한다.
그런데 자기의 대상을 공(空)이라고 깨달아 실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마음은 유식성(唯識性)에 존재한다.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수행자는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을 상이한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진여의 지혜(반야 · 보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생사의 차원에서 존재되지 않는다. 또한 자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노력하여 권태함이 없으며, 열반에 머무르는 일도 없다. 구체적인 덕목으로서는 6도를 실천한다.